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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길 시리즈] <593> 고성 시루봉 (일명 소풀산) 봄꽃이 지천인 '꽃밭데기'에 마음 뺏겨
산행을 갔는데, 화원을 방문한 느낌이었다. 경남 고성 시루봉(540.9m) 능선 종주. 진달래가 붉었고, 연분홍 산벚나무도 한껏 멋을 부렸다. 발아래 은근한 각시붓꽃, 현호색, 양지꽃, 큰구슬붕이, 얼레지, 고깔제비꽃은 뻣뻣한 인간의 허리를 넙죽 숙이게 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봄날이 또 있을까. 겨울을 이겨내고 온 힘을 다해 최선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봄꽃들에 경의를. 지척에 있는 도립공원 연화산의 위세에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시루봉 '꽃밭데기봉'에 찬사를.
낙남정맥 우람한 산줄기 따라 오른
■ 시작은 낙남정맥에서
도립공원 고성 연화산은 본보 '산&산'에서 두 번 소개한 적 있다. 경남의 도립공원이 가지산과 연화산뿐이니 그 위세가 대단한 것은 틀림없다. 이번에는 도립공원 연화산의 숨은 비경 시루봉 종주를 택했다. 낙남정맥 장전고개(장전 버스정류장)에서 시작하여 성지산~447봉~382봉~417봉~시루봉~장기바위~시루봉~임도~혼돈산(498.6m)~어산(533.7m)~계승사~금태골~대촌 버스정류장까지 12㎞를 6시간 30분 동안 걸었다.
장전고개는 낙남정맥 종주를 한 산꾼이라면 기억이 새록새록 날 것이다. 진주를 지나면서 한껏 고도를 낮춘 정맥이 성지산을 지나면서 여항산으로 서서히 올라서는 분기점이기 때문이다. 장전고개에서 성지산까지는 임도가 잘 나 있었다. 봄기운이 무르익는 산길을 호젓하게 걸으니 어느새 땀이 났다. 겉옷을 벗고 본격적인 산행 채비를 갖췄다.
성지산 정상은 만개한 진달래와 산꾼들이 달아놓은 리본으로 화려했다. 정상 못 미쳐 조망지에서 여항산으로 뻗은 낙남정맥의 우람한 산줄기를 한참 감상한 후 정맥을 벗어나 왼편 시루봉 능선을 택한다. 산길은 좋은데 간벌을 한 뒤 정리하지 않아 진행이 더디다. 월곡마을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삼거리에 이정표가 있다. 갑자기 길이 훤해진다.
어림잡아 100명은 앉아 도시락을 먹을 수 있는 넓은 바위가 있다. 퇴적암으로 된 너럭바위는 바닥도 반듯하여 기분까지 좋아진다. 특이하게 생긴 꽃이 있다. 자주색 예쁜 꽃잎을 가진 큰구슬붕이다. 도감을 찾아보니 옮겨심기가 거의 불가능한 야생화라고 한다. 이 자리에서 오래도록 예쁜 꽃을 피웠으면 좋겠다. 고깔제비꽃도 썩은 나무 둥치에 의지해 꽃을 피웠다. 잠시 고도를 높이니 특이하게 생긴 돌탑 서너 기가 있다. 송계마을로 내려가는 삼거리다.
■ 꽃밭데기봉을 아시나요
송계마을(장기바위 0.1㎞)이란 이정표를 보며 잠시 고민했다. 대체로 목표로 한 길에서 벗어나 '명소'라고 칭한 곳을 가봤자 실망한 경험이 좋았던 것보다 더 많았기에 망설였다. 황계복 산행대장이 "가보자" 하지 않았으면 시루봉으로 향할 뻔했다.
장기바위로 가면서 바야흐로 봄이 '잭팟'을 터트렸다. 고도가 한껏 높아진 능선이라 진달래는 아래와 달리 생생하고 싱그러웠다. 두부모처럼 사각진 장기바위는 신선이 부린 조화라고 불릴 만했다. 건건산악회 김태영 전 회장이 바위 위로 성큼 올라선다. 생각만큼 위험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차마 용기를 내진 못했다. 대신 올려다보며 만발한 진달래와 푸른 하늘, 멀리 남해를 바라보며 눈 호강을 한다.
이정표에서 장기바위로 왕복하는 200m 구간은 이번 산행의 정수였다. 붉은 진달래에 푹 빠져 머리가 허연 분들이 소녀가 되어 즐거워하는 '마법의 길'이었다. 시루봉에는 넓은 전망대와 망원경 1대, 그리고 산불초소가 있었다. 초소에 근무하는 분은 아래 신전마을에 사는 김호열(70) 씨. 22년째 시루봉을 책임지고 있다고 했다. 나무에 글을 새겨 넣은 정상목은 김 씨의 작품. 산불 감시 근무를 하며 올라오다가 죽은 나무를 주워 새긴 것이란다.
"장기 바위가 원래 시루봉이여. 여긴(시루봉) 꽃밭데기라 불렀지. 봄이면 꽃이 어찌 좋은지." 설명을 듣고 나니 고개가 끄덕여진다. 장기바위는 층층이 쌓인 퇴적암이라 시루떡 모양이 분명했다. 시루봉 정상 주변은 온통 진달래밭이다. 발밑에는 양지꽃과 현호색도 지천이다. "어디? 부산서 오셨다고. 자주 놀러 오세요. 고성에." 친절한 주변 설명을 듣고 아쉬운 작별을 한다. ■ 어산 가풀막에서 헥헥
현호색
현호색이 손짓한다. 알록달록 독특한 이파리를 가진 얼레지 한 포기가 보인다. 어라 두 포기, 세 포기…. 얼레지 군락지다. 이렇게 많고 넓은 얼레지 꽃밭은 처음이다. 시루봉에서 내려서자마자 만난 풍경이다. 오른쪽 골짜기 절에서 독경 소리가 들린다. 부처님오신날이 다가오고 있다. 동행한 김태영 회장이 선택지를 두 개 꺼낸다. "능선을 따라가면 벌목을 많이 해 놔 길이 험하고, 오른쪽 사면으로 내려서서 임도로 가면 편합니다."
정통 산악파 황 대장이 두말없이 능선으로 접어든다. 병아리처럼 뒤를 따른다. 그런데 길이 만만찮다. 나무를 자른 뒤 치우지 않아 반듯하게 나 있는 길이 덮였다. 요리조리 길을 두고 나뭇등걸을 빠져나가느라 더러 긁히기도 했다. 좋았던 것은 여기도 얼레지가 무척 많았다. 능선 끝은 절개지라 도로가 보이면 오른쪽으로 내려서야 편하다. 도로에서 우선 혼돈산으로 올라섰다. 꽃길이다.
혼돈산 양지에서 점심을 먹고 어산으로 간다. 안부에 오래된 이정표도 있다. 땅밑은 통영~대전고속도로 터널이 지나는 곳. 어산은 오르기가 만만찮다. 된비알을 20분 정도 올라야 정상을 볼 수 있다. 어산 정상에는 누군가 돌에 손으로 쓴 앙증맞은 정상석이 있다. 조망도 좋아 지나온 길과 영천강 상류가 잘 보인다. 계승사까지 가는 길은 무난하다. 능선을 따라가다가 오른쪽 나무 계단으로 하산한다.
지그재그로 난 계단을 내려가면 문득 도로가 나온다. 여기서 왼쪽으로 10분 정도 가면 공룡발자국 화석이 있는 절로 유명한 계승사다. 계승사는 금태산(金太山) 자락에 있는데 금태산은 이성계가 왕이 된 뒤 이름을 지어줬다고 한다. 계승사에서 대촌 버스정류장이 있는 금태골까지는 임도를 따라 내려와야 한다.
문의:황계복 산행대장 010-3887-4155. 라이프부 051-461-4094. 글·사진=이재희 기자 jaehee@busan.com 그래픽=노인호 기자 nogari@
[산&길] <593> 고성 시루봉 산행지도
계승사에서 금태골로 하산하여 산행을 마치면 도착하는 곳이 대촌 버스정류장이다. 이곳에서 고성여객자동차터미널로 돌아오는 농어촌버스는 금곡에서 회차하는 버스다. 금곡 출발 시간(06:35 08:35 19:10 11:45 13:55 15:30 17:30 18:40)에서 약 30분을 더하면 대촌 마을 도착 예정 시간인데, 자세한 것은 꼭 고성버스 회사에 문의해야 한다. 요금 1500원 내외.
고성여객자동차터미널에 도착하면 서부산으로 오는 시외버스는 저녁 8시 40분까지 수시로 있다. 고성에서 동래나 노포동으로 운행하는 버스도 하루 10차례(06:09 07:40 09:40 11:10 11:55 12:55 15:30 16:40 17:20 19:00) 있다.
산행 종점에 있는 계승사는 신라 문무왕(서기 675년) 때 의상대사가 창건한 유서 깊은 절. 고려 말 이성계가 왜구 토벌 차 내려왔다가 수행 기도를 하며 조선 창건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경내에 공룡발자국 화석과 물결무늬 화석(사진)이 잘 보존돼 있다. 이재희 기자 ▲ 고성 시루봉 산행은 낙남정맥 장전고개에서 시작한다. 장전 마을 버스 정류장이 지척이다.
▲ 성지산 정상에서 낙남정맥과 헤어지고 왼편 능선을 따라 시루봉 방향으로 간다. ▲ 송계마을과 갈라지는 삼거리다. 왼편은 장기바위로 가는 하산로. 오른쪽이 시루봉이다.
에서 마무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