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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광복군총영 약장 광복군사령부는 같은 해 중반 탁월한 전투력을 지닌 광복군총영을 발족시켰다. 광복군총영은 여러 지대를 설치해 무장투쟁을 전개한 정예부대였다. 특히 평안북도의 천마산에 설치된 천마산대는 수 많은 유격전을 전개해 일제의 무력을 척결한 별동대였다. 본 자료는 대한광복군 총영 약장으로, 명칭・목적・위치・단원명 등이 수록되어 있다. |
1920년 6월 6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파견된 이탁(李鐸)을 중심으로 조선의 실질적 군대로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이 조직돼 사령관에 조맹선(趙孟善), 참모부장에 이탁, 경리부장에 조병준(趙秉準)이 임명되고 선생은 총영장이 되었다.
일제의 끊임없는 탄압에 대응하기 위해 상해 임시정부로부터 장총 2백 40여 정과 많은 탄약을 이륭양행을 통해 입수하고 항쟁준비를 위한 무장을 강화하고 있을 때 미국의회 동양 시찰단인 모리스의원 등 상원의원 일행과 가족 70여 명이 1920년 8월 14일 서울에 입경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되자 광복군총영에서는 이 호기를 이용,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세계 여론에 호소하기로 방침을 세우고 국내 일제 중요기관을 파괴하며 침략원흉과 일제관리 등을 처단하기로 했다.
1920년 7월 결사대원을 엄선, 평양, 신의주, 선천, 서울로 보내 미 의원단 일행이 그 지역을 통과할 때 일제관청을 파괴하고 일제요인들을 암살하는 등 혁혁한 성과를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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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통의부를 조직하여 군사위원장으로 항일전 전개
이후 군사위원장이 된 선생은 이듬해 6월 신팔균(申八均)사령장이 전사함에 따라 사령장을 겸직하고 소속 독립군을 총지휘, 항일전을 전개한다.
1925년 정의부 군사위원장 겸 사령장 겸임
1925년 1월 25일경 선생은 통의부의 고문인 양기탁 등과 통의부를 중심으로 길림주민회, 의성단, 대한독립단, 광정단동친목회, 변론자치회, 고본계, 대한독립군단, 학우회 등 지방자치단체를 총망라, 통일회의를 개최하고 정의부를 조직했다.
통의부와 마찬가지로 입법, 행정, 사법기관을 두었으며 중앙집행위원장 밑에 내무, 군사, 학무, 생계, 재무, 외무 등 6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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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의부공보 1925년 8월 1일 정의부의 각종 규정을 기록해 배포한 공보. 정의부는 1924년 11월 만주 길림성 유하현에서 조직된 만주지역 독립운동 단체의 연합체이다. 참여 단체는 대한통의부・군정서・광정단・의우단・길림주민회・노동친목회・변론자치회・고본계 등이었다. 정의부는 창립후 헌장과 선언을 발표하고, 자치・군사・교육・재정・생계분과 위원을 선임하였으며, 중앙행정위원으로 이탁, 오동진, 지청천 등을 선출하였다. |
1926년 3월 3일 길림성내 양기탁의 집에서 각계 인사들이 연석회의를 열고 고려혁명당을 조직, 좌우익이 합작으로 새롭게 통일된 독립운동을 추진하게 된다. 당원수는 1천 5백여 명에 이르렀으며 선생은 정의부 군사위원장으로 총사령을 겸임했다.
옛 동지의 밀고로 장춘에서 일경에게 붙잡히다
이무렵 선생의 옛 동지 김종원(金宗源)이 선생에게 「三成금광주인 최창학(崔昌學)이 선생을 만나 뵙고 싶어한다」는 뜻을 전하자 1926년 12월 16일 장춘시내 약속 장소에 나갔다가 일제의 앞잡이로 변한 김종원의 밀고로 신의주 악질 고등계 형사인 김덕기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선생은 일제의 재판을 거부하고 1929년 11월 11일부터 33일동안 단식을 하기도 했다. 1932년 3월 5일 강제로 재판정에 서게 된 선생은 광기가 발작했다는 이유로 퇴장당한 채 검사로부터 무기징역을 구형받았으며, 3월 9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도 같은 형이 선고됐다.
옥중에서도 2차례에 걸쳐 단식을 실시, 무장항쟁에 전생애를 바치다
공소를 제기한 선생은 그 해 6월 평양에서 1심과 똑같은 무기징역을 받았으나 더이상 일인(日人)의 재판이 필요없음을 깨닫고 상고를 포기했다. 7월 장기수를 수용하던 경성형무소로 이감된 선생은 1934년 6월 11일부터 48일간의 제2차 단식을 벌인다.
7년간의 형무소생활로 쇠약해질대로 쇄약해진 선생이 2차 단식에 들어가자 모두들 선생의 정신력에 경이로움을 표시했으며 일본인 형무소장조차 선생과 면담을 할 때에는 경례하고 예를 갖추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일본인 의사가 선생에게 「형무소 정신병」이라는 기이한 병명을 붙이는 바람에 선생은 1944년 정신질환자들이 수용되는 공주형무소로 이감돼 그해 5월 20일경 옥중에서 순국한다.
나라를 빼앗은 불공대천(不共戴天)의 일제를 격멸하기 위하여 일편단심으로 무장항쟁에 전생애를 바치신 선생의 숭고한 애국심은 청사에 빛날 독립운동의 화신(化身)이었으니 누가 과연 선생의 고귀한 뜻을 이어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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