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현을 도피시키다
증 언 자 : 차명석(남)
생년월일 : 1954. 7. 13 (당시 나이 26세)
직 업 : 대학생 (현재 한국과학기기상사 운영)
조사일시 : 1989. 5
개 요
1980년 5월 18일 박관현(전남대 총학생회장)과 김영휴씨를 여천군 돌산면 임해연구소 부근에 도피시키고 5월 19일 양강섭(전남대 총학생회 총무부장) 씨를 같은 장소로 도피시킨 후 서울로 피신해 있다가 5월 30일경에 보안대에 자수, 같은 해 12월 석방됐다.
광주고등학교 동기인 박관현
나는 1980년 당시 박관현 도피 주모자로 구속되었는데 나와 박관현은 광주고등학교 동기동문이다. 고등학교 때 선배들로부터 만들어진 학교간부들의 모임이 있었다. 이 모임에 박관현, 양강섭과 함께 참여했으므로 우리들은 더욱더 절친하게 지냈다. 그렇다고 이 모임이 특별한 성격을 띤 것은 아니고 단순히 선후배 친목도모를 위한 모임이었다.
1973년 전남대 공대 금속공학과에 입학했고 군복무를 마친 후 1977년에 복학했다.
1980년 4월 박관현이 전남대 총학생회장으로 당선되었고 양강섭이 총학생회 총무부장을 맡았다. 나는 전남대학교의 자동판매기 사업을 했으므로 학생회 간부는 아닐지라도 그들 옆에서 항상 돕고자 했다.
1980년 5월 총학생회에서는 대대적인 민주화운동을 표방하면서 학내의 민주화 열기의 여세를 몰아 5월 14일부터 16일까지 집회를 열었다. 이후 정국의 추이를 관망하기로 하고 17일은 집회를 열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항상 피해 다니는 입장이었다.
5월 17일 저녁 박관현, 김영휴씨와 함께 무등산장 부근의 식당에 은신하고 있었다. 그러던중 서울 쪽으로 연락을 취해 전국에 계엄확대 조치 소식을 듣고 우리는 일단 피하기로 하고 식당의 자가용을 타고 산수동 오거리까지 왔다. 일단 총학생회에 알려야 된다는 생각에 박관현과 김영휴 씨에게는 상대 뒤에 후배 자취방에 은신하라고 하고 나는 곧장 총학생회실로 달려갔다.
밤 11시 40분경 총학생회실에 도착했다. 총학생회 부회장인 이승룡을 비롯한 예닐곱 명의 학생들이 있었다. 나는 계엄확대 소식을 알려주면서 빨리 피하라고 일렀다. 학생회관 창문을 통해 보니 전남대 정문 앞에는 이미 20여 대의 군용트럭이 라이트를 켠 채 있었다. 우리들은 그곳을 빠져나와 사범대 뒤의 담을 통해 상대 뒤의 후배 자취방으로 갔다. 이승룡은 바로 학교 앞이 집이라며 그곳으로 빠져 나간다고 했다. 그때 승룡이는 학교를 빠져나가다 공과대 부근에서 군인들에게 붙잡혔다.
그런데 바삐 도망오다 보니 총학생회 사무실에 중요한 서류를 빠뜨리고 나와 버렸다. 나는 그것을 가지러 다시 학교로 들어갔다. 학교 안은 군인들이 장악해 5, 6명씩 사열을 하고 돌아다녔다. 나는 거의 낮은 포복 자세로 학생회관까지 접근했다. 이때 나를 본 수위아저씨가 '군인들이 지금 학생들을 잡아가려고 야단인데 뭐하러 학교에 있냐'며 빨리 학교를 빠져나가라고 했다. 나는 곧바로 총학생회실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서류 한 장 없이 군인들이 싹 쓸어가 버렸다. 허망한 마음으로 거의 기다시피 하면서 기숙사 뒤로 향했다. 공과대 부근의 학군단에는 많은 군인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그곳을 빠져나와 자취방에 도착했다. 그날 밤은 후배 자취방에서 보냈다.
박관현을 여천 돌산으로 피신시키다
5월 18일, 예전부터 휴교령이 내리면 전남대 정문 앞으로 모이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문 앞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우리는 위험을 느껴 일단 피신하기로 하고 다시 시내로 나왔다. 시내상황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자가용을 빌려 낚시꾼으로 가장하고 박관현과 김영휴를 데리고 운전사와 함께 광주를 빠져나갔다. 양강섭 씨는 앞으로의 추이를 더 살펴보기로 했다.
우리는 광주를 빠져 전남 여천군 돌산면 방죽포 소재 전남 임해연구소 앞에 있는 김철만 씨 집으로 피신했다. 이곳은 내가 중학교 때부터 알고 지내던 곳이기도 하지만 사범대 교수인 정정희 씨의 도움을 받아 그곳을 피신했던 것이다. 박관현과 김영휴 씨를 남겨두고 나는 곧바로 광주로 올라왔다.
5월 19일 점점 사태가 악화되자 양강섭을 데리고 어제 그 자가용을 타고 광주를 빠져 여천으로 향했다. 통과하는 곳마다 검문소가 있었는데 우리는 경우신문 부사장으로 행세했기 때문에 쉽게 통과가 되었다.
우리는 여러 군데로 돌아서 갔기 때문에 5월 20일 새벽에야 그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때 관현이와 김영휴 씨가 광주를 가겠다며 나오고 있었다. 나는 광주의 상황이 굉장히 위험하니 안 된다고 말렸다. 그래서 그들은 나의 말을 듣고 광주로 나오는 것을 포기했다. 그러나 내가 지금에 와서 관현의 억울한 죽음을 생각할 때마다 가장 가슴 아픈 것이 이때의 일이다. 만약 그때 광주로 나오기만 했어도 관현이가 그렇게 억울한 죽음을 당하지 않았을 텐데…….
나는 곧바로 광주로 올라왔다. 대인시장 입구 동문다리 부근에 왔을 때다. 계림파출소 쪽으로 군인들이 진을 치고 있었고 반대편에 시위대들이 있었다. 시내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가 감각이 없던 우리는 차 안에 있으면 별 이상이 없을 것 같아 그대로 있는데 군인들이 곤봉을 들고 시위대를 향해 돌진해 왔다. 시위대 또한 힘차게 맞섰다. 우리는 안 되겠다 싶어 얼른 차에서 뛰어내렸다. 곧바로 우리 차가 불이 붙었다. 안타깝게 바라보다 뒤돌아섰다.
광주에서 다른 사람들과 연락이 두절된 상태에서 머무른다는 것이 위험할 것 같아 나는 자가용을 빌려 서울로 가기 위해 송정리로 갔다. 그러나 송정리도 이미 교통이 차단된 후였다. 다시 전북 이리로 가서 새마을호 편으로 서울로 도피했다.
누구와도 연락이 안 된 상태에서 서울에 혼자 머무른다는 것이 갑갑해 광주 함락 이후 곧바로 광주로 내려왔다. 집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후배 아저씨의 도움으로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옥상 물탱크 밑에 한 달 동안 숨어 지냈다. 그러다 나로 인해 주위 사람들이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나는 5·18 관련자 마지막 자수기간인 6월 30일경에 보안대로 가서 자수했다.
보안대 수사관들은 나의 몸집이 건장하자 나를 전남대 내의 폭력서클로 유명한 '아인', '알핀' 회장을 역임한 것으로 몰아부치며 수없이 두들겨팼다. 그리고는 총학생회의 자금관계를 집중 수사를 했다. 그 무렵에 자수한 양강섭씨에게도 계속 총학생회의 자금관계를 추궁했다. 그러더니 김대중 씨와 연관을 지으면서 자금을 얼마나 받았냐고 다그쳤다. 우리는 완강히 거부했다.
그 후 나는 1심에서 구형 5년을 선고받고 1980년 12월경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석방 후 휴양차 박관현 씨가 피신했던 곳으로 갔다. 박관현 씨를 숨겨줬던 김철만 씨는 나를 보더니 아주 반가워했다. 내가 잘 말해 줘서 자기에게 별 피해가 없었다는 것이다. 고마워할 사람은 바로 우리들인데…….
그곳 생활을 하다가 1981년에 결혼했다. 결혼 후에도 경찰들의 끊임없는 감시 때문에 하루도 편안할 날이 없이 지내다 지도교수였던 오항기(전남대 총장) 씨의 권유로 기기수리를 했다. 1982년에 복적을 하여 졸업 후에는 한국과학기기상사를 경영하고 있다. (조사.정리 김정기) [5.18연구소]
첫댓글 자료 감사합니다.
사랑과 행복이 함께하는 휴일시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