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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중반 “기독교 세계관으로 훈련되어 교회와 사회를 변화시키는 리더를 양성”할 목적으로 세워진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VIEW, Vancouver Institute for Evangelical Worldview)이 설립 20주년을 맞았다. 해외에서 학교 설립을 추진한 이래, 캐나다 TWU(Trinity Western University)의 ACTS 신대원과 협약을 맺고 1998년 설립 인가를 받은 지 올해로 스무 해를 맞이한 것이다. 1999년 여름 26명의 신입생과 함께 첫 학기를 시작한 VIEW는 지난 7월 16일 한국에서 후원자와 동문들을 초대하여 설립 20주년 기념 행사를 가졌다. ― VIEW의 지난 20년을 어떻게 회고하시는지요?
전성민(이하 ‘전’): 지난 20년 가운데 5년을 함께해왔는데, 저는 좋은 시절을 보냈다는 생각이 들어요. 앞서 양 교수님이 말씀하신 ‘한국어 과정’에 대해 좀 더 덧붙이고 싶은데, 한국어로 공부하니 쉽고 편하지 않겠나 하는 게 일반적인 인식 아닌가 합니다. 실제로 요즘 해외에서 한국어 과정이 꽤 많이 생겼는데 편차가 좀 있어요. D.Min.(Doctor of Ministry, 목회학 박사) 과정으로 시작했다가 M.A 등 다른 과정도 한국어 수업으로 확장해 나가는 추세인데, 그 과정의 디렉터가 누구냐가 수업의 충실도를 좌우하는 거 같아요. 결국 학문적 질을 어떻게 확보해 내느냐가 관건이 되겠지요. 외국 유학까지 갔는데 한국어로 진행하는 수업이 얼마나 충실하겠나 하는 오해나 선입견이 있는데 어떤 분들에게는 한국어 과정이 훨씬 더 결과가 좋거든요. 그래서 그런 선입견을 극복해 왔고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그렇게 해갈 겁니다. VIEW 지원자들 가운데도 한국어 과정이니까 공부가 쉬울 거라 여기고 정작 공부보다는 다른 우선순위나 목적으로 지원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그런 분들이 와서 공부하는 중에 세계관 공부가 정말 의미 있구나 새삼 깨닫는 경우도 있지만, 아예 주객이 전도된 경우라면 학생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겠지요.
― 밴쿠버 현지의 반응이나 평가, 예를 들어 ACTS 관계자나 지역 교회 쪽 피드백은 접하신 적 없는지요? 양: ACTS 세미너리의 한국어 과정으로서 VIEW 프로그램을 처음 시작하려 했을 때, 어려움이 꽤 있었습니다. 교수회의 시간에 노골적으로 한국어 과정을 불신하는 교수들이 있었거든요. 설득하느라 애를 썼는데, 그게 말로 설득할 문제가 아니라 실제로 보여주어야 하는 문제잖아요. “나는 일반 대학교에서 가르치다 왔는데, 이 과정의 질을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면 당신들보다 내가 더 큰 부담이자 문제가 된다”는 얘길 했어요. 그 뒤로 5년 정도 지나면서 여러 모니터링 과정을 통해서 그런 얘기가 완전히 없어졌습니다. ACTS의 다른 프로그램보다 더 잘하는구나 하는 걸 그들이 알게 된 거지요. 전: 객관적인 사실로 이야기하자면 첫째, ACTS의 영어 과정으로 입학한 한국 학생들이 있는데 그분들이 우리 수업을 들을 수 있어요. ACTS의 영어 M.Div.(Master of Divinity, 목회학 석사) 과정에 들어갔는데 VIEW의 한국어 수업을 선택 과목은 물론 전공 필수 과목으로 수강하는 걸 흔쾌히 오케이하고 학점 인정을 해줘요. 영어 과정이나 한국어 과정이 수업 교류가 자유로울 정도로 ACTS에서 한국어 과정의 교육 수준을 인정하는 거지요. ACTS는 내년 봄에 ‘만다린(본토 중국어) 과정’을 시작하는데, 만다린 과정 디렉터가 좋은 분이기도 하지만 VIEW를 통한 경험이 중국어 과정 개설에 작용했으리라고 봅니다. (영어가 아닌) 외국어 과정이라 해도 디렉터만 믿을 만하다면 충분히 보증할 수 있겠다는 경험 말이지요. 양: 이번 여름학기에 리젠트 칼리지와 VIEW가 상호 협력 하에 한국어 과정 수업을 2개 개설했는데, 리젠트는 그야말로 세계적인 복음주의 신학교입니다. 그런데 그런 리젠트 칼리지에서 VIEW의 학문적 열량을 인정을 한 셈이지요. 전: 강의 개설 전에 영어로 강의계획서를 보냈는데, 리젠트 측에서 그 계획서를 보고는 자기 학교 학점 과목으로 개설할 수 있을 정도로 좋다고 판단한 거지요. 리젠트 학생들이 이 수업을 듣고 나서 피드백도 잘 나왔고 그래서 내년 5월에도 리젠트 여름학기에 한국어 과정이 개설될 예정입니다. 학교측에서도 “아주 좋았다. 내년에도 개설하면 좋겠다”는 긍정적인 피드백을 보내왔어요. ― 지난 20년 세월 동안 크고 작은 어려움이나 위기가 없지는 않았을 텐데요.
전: VIEW가 해외에 세워진 학교이다 보니 영향을 끼치는 외부 요인과 고려할 요소가 많은 게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캐나다 정부가 유학생 비자를 엄격하게 하면 우리에게 위기가 되고, 유학생 체류 기간에 벌어진 일도 그럴 수 있거든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이런 요소들을 그럼 어떻게 하느냐 할 때, 결국은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에 더욱 집중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지난 평창동계올림픽 기간에 아이스하키 남북단일팀의 새라 머리 감독이 힘들지 않냐는 질문에 이런 얘길 했어요. “동물을 보면 다른 동물을 잡아먹는 포식자가 있고 먹히는 동물이 있는데 둘의 차이는 눈의 구조에 있다. 먹히는 동물은 끊임없이 주변을 신경 쓰는 게 생존의 길이라서 눈이 옆에 달려 있는 반면, 공격하는 동물들은 눈이 앞에 있다. 우리 단일팀은 공격하는 프레데터(predetor)다.” 그 얘기가 굉장히 흥미있게 다가왔어요. 우리 상황하고도 연결점이 있거든요. VIEW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여러 외부 요인에 끊임없이 신경 써야 하지만, 그건 우리가 예측하고 통제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그렇다면 우리는 앞을 보면서 집중하자, 그게 우리 토대를 더 견실하게 만드는 방법이다, 하고 생각하게 되었지요. ― 비영리 교육기관으로서 재정적 어려움은 없는지, 따로 후원 시스템이 갖춰져 있는지요?
양: 후원 채널이 있긴 한데 액수가 미미합니다. 설립 초기 집중적으로 이뤄진 후원은 11년이 채 안 됐을 때 소진되었고, 이후로는 후원이 많지 않고 그마저도 거의 장학금으로 다 나가지요. 그래서 이번 설립 기념행사에서도 도서관 확충이나 좋은 교수 영입 등을 위해 기금 조성 문제를 공유하려고 해요. 등록금만 가지고는 해결할 수 없는 이슈들이거든요. 전: VIEW가 시작될 때 정말 많은 분들이 헌신적으로 후원을 해주셨거든요. 그렇게 고액 기부로 시작이 되었는데, 그 뒤로 소액 후원, 소액 기부가 덜 계발된 점이 있어요. 졸업생들이 늘면서 조금씩 후원하고 있는데, 향후 후원 구조를 좀 더 안정적으로 만들어야 하는 과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후원해 온 분들은 우리 비전에 공감했다는 의미이고, 새로운 후원자를 계발한다는 건 비전에 공감하는 분들을 발굴한다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앞으로 VIEW가 무엇을 하는 곳이고 한국교회를 위해서 어떤 일을 감당할지 더 잘 제시하고 보여드리는 게 재정 후원을 위해서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 VIEW의 ‘비전과 미션’ 중 ‘가치’ 항목에, “하나님의 온 백성을 위한 기독교 지성을 활성화한다”는 문장이 첫 줄에 나옵니다. ‘기독교 지성’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요?
전: 양 교수님 말씀 중에서 기독교 지성과 관련하여 진리의 보편성이라는 말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봐요. 기독교 지성이 뭘까 하고 생각하면서 정리를 해보니 정작 ‘기독교적’이라는 말이 거의 안 나오는 거예요. 그게 오히려 기독교 지성의 특징일 수 있겠다 싶어요. 기독교 지성이 기독교인을 고립시키는 자기만의 논리를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보편성에 대한 확신을 갖고 세상과 대화할 수 있는 지성이거든요. 미국 대학 시스템을 보면 리버럴 아츠 칼리지(Liberal Arts College)가 있어요. 여기서 ‘리버럴 아츠’가 우리말로는 정확히 옮기기 어려운 개념이긴 한데, ‘인문학’ ‘자유 인문학’ 정도가 돼요. 대표적인 기독교 리버럴 아츠 칼리지가 휘튼 칼리지인데, 이 리버럴 아츠는 단순한 인문학이 아니라 사고력을 키우는 기본 과정이라는 거지요. 운동에 비유하자면, 어떤 운동선수라도 심폐와 근력, 지구력 등 기초체력을 기르는 게 먼저이듯, 나중에 어떤 전공을 하고 어떤 직업을 갖든 그 바탕이 되는 학문적인 기초 체력을 다져주는 것이 바로 리버럴 아츠 칼리지의 교육 목표인 거죠. 그런 점에서 한국교회와 VIEW를 생각할 때 기독교 지성이란 무엇보다 기본적인 사고력과 학습 능력을 다져주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기본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인식이 피상적이 되고 대화 능력이 떨어져서 그들만의 리그로 게토화되기 마련입니다. 반대로 사고력이 발휘되면 세상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화두를 대할 때 적극적으로 반응을 하되 공격적이기보다는 대화적인 자세를 보일 수 있다고 봐요. 그 토대는 진리의 보편성인데, 기독교 진리가 보편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대화할 수 있고 공통 가치와 지향점을 만들어나갈 수 있다는 거죠. 대화하는 지성, 포용하는 지성, 중심이 아닌 변방 즉 주변부 시각으로 대화하고 포용할 때 비로소 교회 안에 갇히지 않고 온 세상을 위한 지성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대화나 포용, 변방의 시각 등 이런 이야기하면 기독교적이 아니라고 반박할지 모르겠는데, 그렇다면 무엇이 기독교적이냐는 겁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이중 계명이야말로 가장 기독교적 가치인데, 이 계명에 따르면 기독교 지성이란 바로 사랑하는 지성 아닌가 해요. 복음주의 전통을 따르는 저희로서는 가장 핵심적인 게 십자가인데, 결국 대화와 포용, 주변적 시각을 십자가로 설명할 수 있다면 복음주의 정체성 안에서 지성운동을 하는 길이 열리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양 교수님이 미국에서 과학사를 공부하실 때 “신실한 크리스천 과학자들이 ‘창조과학은 반(反)과학이다’라고 해서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하신 적이 있는데요. 한국교회에서는 창조과학이 주류인데 이 점이 한국교회 반(反)지성주의의 예증이라는 지적이 있습니다.
전: 창조과학을 신봉하고 주장하는 이들은 스스로를 반지성주의라고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스스로 과학적이고 논리적이고 이성적이라고 생각할 뿐 아니라 강의를 통해서도 이성에 호소하는 방식으로 접근해요. 중요한 건 대화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 아닌가 해요. 창조과학을 반지성이라고 하는 건 대화하지 않는 논리, 대화하지 않는 지성이기 때문인 거지요. 대화하지 않는다는 건, 주변에 나오는 과학적 연구와 증거들에 대해 열린 성찰을 하지 않는 것도 포함합니다. 결국 그들이 대화하지 않는 건 두려움 때문이겠지요. 자신들이 내세우는 진리의 보편성에 대한 자신감과 확신이 없어서, 끊임없이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서 생존하려는 두려움이 대화를 막고 스스로 게토화하는 게 아닌가 합니다. 창조과학 유튜브 강의나 책들을 보면, 여러 면에서 두려움이 깔려 있는 게 보이는데, 그래서 공포 마케팅을 사용하는 거 같아요. 그러니 갈수록 더 교조적이 되는 거죠. 우종학 서울대 교수가 ‘과학과 신학의 대화’(과신대) 운동을 적극 펼치고 창조과학 진영과 대화하려 노력하는데, 소명 의식으로 감당해나가는 일이지 사실 과학자로서는 할 일이 못됩니다. 과학자라면 그 일은 별 의미 없는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 싶거든요. 양: 전 교수님 얘기를 들으니, 최근 탈고한 책 후기가 생각납니다. 그랜드캐니언에 관한 책인데, 2년에 걸쳐 쓰면서 사진과 이미지를 모았는데 그랜드캐니언 탐사할 때 누가 연구비 대주는 것도 아니고 비용이 많이 들었지요. 그 책을 쓰느라 지구 한 바퀴 반을 돌아다녔고요. 탈고하고 나서도 몇 번씩 고쳐서 출판사에 넘기는데 한심한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랜드캐니언을 연구한 학자들이 많고 학계에서 이미 많은 연구가 이뤄져서 논쟁의 여지도 없는데 내가 이 짓을 왜 하고 있나, (창조과학 쪽 주장의 허구성을 밝히고 입증하기 위해) 무슨 논쟁거리라도 되는 양 그토록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들어 책을 썼나, 하는 허탈한 마음을 후기에 담았거든요. 그런데 이 책을 쓰지 않을 수 없었던 게, 창조과학회가 끊임없이 그랜드캐니언으로 사람들을 데려가는데 거기 갔다 오면 대화가 안 되는 겁니다. 학문적으로는 이 책을 쓰는 게 아무 쓸데없겠지만, 거기 가기 전 몇 사람이라도 이 책을 읽는다면 도움을 받지 않을까 해서 쓴 거지요. 전: 종교에는 자칫 두려움을 조장할 수 있는 요소가 있습니다. VIEW에서 기독교 세계관을 가르치면서 모니터하는 것은 세계관 운동의 극우화 문제입니다. 세계관 운동이 극우 운동이 될 위험이 있다는 거지요. 한국교회를 보면 극우 이데올로기 운동을 하는데 이걸 세계관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합니다. 앞서 제가 대화와 포용, 사랑을 이야기한 기독교 지성과는 정반대인 거지요. 대결보다는 대화가 필요합니다. 한국교회는 내부의 위기를 진리의 보편성에 대한 자신감으로 적극적인 대화를 통해 외연을 확장해가는 방식으로 해결하지 않고 더 확실한 외부의 적을 규정함으로써 내부를 단속하는 방식으로 접근합니다. 이런 일에 세계관이라는 개념을 갖다 붙이는 경우가 있어서 신경이 쓰입니다.
― VIEW에서는 세계관 운동의 극우화를 어떻게 바라보시는지요? 양: 그 대표적인 예가 창조과학입니다. 성경이나 과학 데이터에 대한 해석의 경직성, 내 해석은 절대 틀릴 수 없다는 그 경직성이 만들어낸 참사가 창조과학이라고 봅니다. 내 해석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야 대화할 수 있는데, 오류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대화가 아니라 강요 일변도가 될 수밖에 없지요. 전: 한국교회의 지성 운동에는 강한 확신을 바탕으로 논리적 설득을 얻으려는 경향이 있는데, 확신이 없으면 안 되겠지만 이 확신은 자신도 틀릴 수 있다는 겸손한 확신이어야 합니다. 신앙은 어떤 면에서는 불안하고 흔들릴 수도 있는 건데, 지성 운동이라는 이름 아래 그 불안을 해소한다는 명분으로 성찰과 탐구를 멈춘다면 잘못된 길로 빠질 수밖에 없겠지요. 양: 한국교회 안에는 신앙이 불안하고 흔들릴 수 있다고 말하거나 강한 확신에 차 있지 않으면, 믿음 없는 사람이라고 비판하는 일들이 있어요. 제 이야기이기도 한데, 제가 창조과학이 틀렸다고 할 수 있었던 것도 결국 나 자신이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거든요. 그 결과 예수 안 믿는다, 이단이다 등 온갖 이야기를 다 들었지요. 지금도 가끔 강연해달라고 불렀다가 취소하는 일이 있어요. 이런 일을 견딜 수 있는 건 이 분야를 공부한 학자로서 당연히 치러야 하는 대가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사실에 대해 그 분야를 공부한 사람으로서 틀렸다는 얘기를 안 할 수 없는 일이지 않습니까. 아무리 힘든 일을 겪더라도 말이지요. 전: 지성 운동과 관련해서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이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그 드라마를 보다가 논어에 나오는 ‘학이불고’(學而不固), 즉 배우면 고집스럽지 아니하다는 말을 접했거든요. 이것은 지성 운동에서 굉장히 중요한 태도라고 봅니다. 그 드라마에서 정약용이 아라비아 속담을 인용하면서 “흔들리는 나침반은 틀리지 않는다”는 말을 해요. 나침반 바늘은 끊임없이 유연하게 흔들려야 정확한 방향을 알려줄 수 있고 고정된 나침반은 이미 고장 난 거잖아요. 신앙도 그렇다고 봐요. 흥미로운 점은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걸 일반 성도들은 쉽게 받아들이는 반면, 신학 공부를 마친 분들은 대부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겁니다. ― 기존의 신학교나 기독교 대학과 다른 VIEW만의 차별점은 무엇인지요?
― 과거 인터뷰에서 양 교수님은 “창조과학의 문제가 과학의 문제이기 이전에 치우친 성경관의 문제”라고 하셨는데요.(본지 2014년 2월호〔279호〕, 6-22쪽) 한국교회의 성경관에 대해 전 교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 VIEW의 비전과 미션에는 “기독교적 관점을 가지고 교회와 사회 이슈에 참여한다”는 문장이 나오는데, 최근 예멘 난민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전: ‘기독교적 관점’으로 참여한다고 할 때, 그 관점이 한 가지만 의미한다는 건 아닙니다. 성경을 보더라도 열왕기 관점과 역대기 관점이 다르고, 복음서들도 네 가지 시각이 있는 것처럼, 다양한 관점이 존재하는 것도 성경적이라고 봅니다. 기독교적 관점으로 참여할 때 모두가 합의한 단 하나의 관점이 아니라 다양성에 대해 열린 태도를 취하는 것도 기독교적 관점이 아닌가 합니다. 교회와 사회에 관한 이슈들에 대해 찬성과 반대가 있고 논쟁이 일어나는 건 자연스런 일이지요. 그렇기에 사회 참여의 기초는 대화라고 생각합니다. 진보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유명한 로날드 사이더 교수님이 VIEW에서 수업을 하실 때 들은 이야기가 기억나는데요. 미국 정부의 정책에 보수적인 단체에 있는 분들과 오랜 시간 서로 정직하고 솔직하게 대화했는데, 그 과정에서 서로 동의할 수 있는 공통의 가치를 찾을 수 있었다는 얘기였어요. 각자 더 중요시 하는 관점으로 인해 대화가 막힐 수도 있지만, 공유할 수 있는 근본 가치를 대화를 통해 찾아나가는 작업이 한국교회에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물론 근본 가치를 공유하더라도 그것이 정책으로 현실화할 때는 서로 관점이 다를 수 있겠지요. 그런데 한국교회는 대화를 통해 서로 공유할 만한 근본 가치를 찾아가는 작업조차 버거워하는 거 같아요. VIEW 상황에서는 교육·학술 기관이 지니는 한계도 있어서 사회 참여가 두드러지게 나타지는 않습니다. 난민 문제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근본 가치에는 뜻을 하나로 모으고, 구체적인 실천의 모습은 각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 않나 합니다. ― 어떤 분들에게 VIEW를 권하고 싶으신지요. 전: 무엇보다 VIEW에서는 소위 평신도와 목회자가 함께, 다양한 교단 출신의 신앙인들이 섞여서 함께 배웁니다. 최종원 교수님 표현을 빌리자면, 신학뿐 아니라 세상을 함께 배웁니다. 다른 표현으로는, 텍스트뿐 아니라 콘텍스트도 함께 공부한다는 얘깁니다. 양희송 청어람 대표가 기존에 해오던 걸 더 열심히 한다고 한국교회의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라고 했는데요. 그런 면에서 열심의 부족이 아니라 방식의 재고가 필요한데, VIEW가 새 포도주를 담을 새 부대가 될 수 있지 않나 합니다.
― 올해 말에 양 교수님이 원장직에서 물러나신다고 들었는데, 시기가 좀 이른 거 아닌가 하는 목소리들이 있습니다.
― 후임으로서 전 교수님은 VIEW가 앞으로 풀어가야 할 과제에 대해 어떤 ‘그림’을 그리시는지요? 아울러 끝으로 나누고 싶은 말씀을 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전: 앞서 제가 동역자를 찾고 만든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좀 더 직접적으로 얘기하자면 후원을 더 많이 기대한다는 뜻입니다.(웃음) 결국 그것이 VIEW가 주변 상황에 좌우되지 않고 소명에 더 집중할 수 있는 토대가 되는 거니까요. 또 하나는 국제적인 네트워크도 감당해야 할 부분 아닌가 해요. 그동안 쌓아온 국제적 경험들을 나눌 수 있지 않나 하는 거지요. 올해 리젠트 칼리지와 여름학기를 처음 시작했는데, 더디더라도 앞으로 영국의 런던현대기독교연구소나 북미주의 다른 신학교와 비전을 공유하면서 하나씩 국제 네트워크를 확장해 나가기를 꿈꾸어 봅니다. 양: 최근에 탈고한 원고가 《기독교 대학의 이념과 실제》입니다. 지난 20년간 VIEW 사역을 통해 기독교 대학이 무엇인지 진지한 고민과 질문이 녹아든 책이지요. 한국 사회에 경건과 경영이 함께 갈 수 있는 기독교 대학의 좋은 모델이 되고, 그런 대학을 세우고자 할 때 잘 돕는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 생깁니다. 전: 저는 VIEW의 사역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중 계명에 대한 독특한 실천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는 어떤 방식으로든 새로운 변화가 필요하며, 지금 이대로는 이웃을 사랑하는 교회라고 보기는 어렵지 않나 싶습니다. 제가 성경 해석학 수업의 마지막 시간에 늘 인용하는 책이 있는데, 헨지 조지의 《진보와 빈곤》입니다. 도입부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어떠한 논점도 피해가지 말고, 어떠한 결론이 나더라도 위축되지 말고, 오로지 진실만을 추구하기로 하자. 우리는 진정한 법칙을 찾아야 할 책임이 있다. 오늘날 우리 문명의 한 가운데서는 여인들은 기절하고 어린이들은 신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법칙이 어떤 내용으로 나타날 것인가는 우리는 상관할 바가 못 된다. 우리가 도달하는 결론이 우리의 편견과 충돌하더라도 움츠리지 말자. 그 결론이 오랫동안 현명하고 자연스럽다고 받아들여온 제도를 부정하더라도 되돌아서지 말자.” 이 얘기는 기존의 경제학이나 경제 패러다임이 현실의 어려움을 양산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진실을 추구했을 때 자신이 생각한 것과 다른 결론이 나오더라도 위축되지 말자는 얘기를 합니다. 그의 이 말이 개인적으로는 제가 신학을 하는 방법론이자 태도입니다. VIEW에 오시거나 관심을 가진 분들도 어떠한 결론이 나더라도 진리를 추구해왔다면 새로운 포도주를 담을 새 부대를 만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일에 VIEW가 사용되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