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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조선과 동북공정(1)
- 명조선의 '기자조선' 만들기-
默 土 吳 鍾 洪
1.총설
우리의 오늘 됨은 지난날이 쌓인 결과다. 개인은 그 개인의 과거가 쌓여서 오늘의 그가 있는 것이며, 나라와 민족은 그 나라의 역사가 쌓여서 오늘의 그 나라와 민족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역사가 개인사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는 쉽게 와 닿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역사가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실로 크다. 이조선 정권이 일본에게 나라를 팔아먹었기 때문에 일제강점시대가 왔으며 뒤 이어 6.25. 한국전쟁이 반드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미국이 한국 전쟁 후 복구사업에 절대적인 도움을 줌으로써 미국은 우리에게 어버이의 나라, 선망의 대상이 되었고 미국의 비호아래 오늘날 친미세력이 나라를 좌지우지 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래서 사상적으로는 미제산 기독교회 목사교가 맹위를 떨치고 있으며 정치경제적으로는 미제산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다.
그 결과 현재 우리는 비정규직이라는 이상한 경제계층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고 사회적 양극화와 살인적인 생존경쟁이 더욱 치열해 지고 있다. 이에 따라 세계에서 제일 많은 자살자를 양산해 내고 있는바, 하루 평균 50명에 육박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 1년으로 따지면 연간 2개 사단병력에 육박하는 사람들이 자살하고 있다.
이와 같이 역사는 아주 절박하게 개인의 생존을 좌우할 정도로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만약에 이조선 정권이 일제에 나라를 팔아먹는 짓을 하지 않고 동학혁명세력과 합세하여 외세를 몰아내고 함께 나라를 이끌었다면 오늘날의 이런 비극적인 상황은 전개 되지 않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우리가 주체가 되어 서양문물을 수용하여 우리의 전통을 바탕에 깔고 그 위에 필요한 것을 받아들여 가장 이상적인 생민 본위의 선진국가를 탄탄하게 구축했을 것이다.
역사라는 것은 이렇게 개인적인 물질적 삶에도 구체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다른 한편 역사는 우리의 정신세계를 지배한다. 이조선 이전의 고려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여성들은 ‘남귀여가男歸女家’라는 결혼풍습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여성이 주도하는 사회로 여성적인 포용성과 다양성의 정신이 지배하고 있었으며, 사상적인 측면에서도 신선도에 바탕을 둔 불교, 도교, 유교 등 다양성이 보장되어 문물이 크게 발전하였다. 그런데 이조선 들어서 공자유교의 1당독재체제만 강요하고 다른 것은 일체 허용치 않아 사상적 경직성 때문에 결국 제때에 개항을 하지 못하여 일제에게 나라가 사라지는 비극을 초래하였다. 특히 이조선 정권은 지배, 피지배라는 수직적 질서인 공자유교사상에 뿌리박은 명나라 사대주의를 국시로 하여 5백년동안 지속한 결과 우리의 무의식가운데 큰 나라는 절대로 넘볼 수 없고 우리 것은 원래 다 중국등 외국에서 들여온 것이라는 자학적 기회주의 사대근성을 심어 놨다.
그래서 우리가 더 잘사는 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중국하면 감히 넘볼 수 없는 대상으로 무의식속에 각인되어 있고 알 수 없는 두려움의 대상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중국이 현재 우리의 제주도 서남단의 이어도를 자기네 영토라고 하며 수시로 항공기와 배를 띄워 출몰하며 협박을 해도 제대로 대처를 하지 못하고 있으며, 중국의 어선이 우리의 영해에 들어와 마구잡이로 불법조업을 해도 소극적, 수세적으로 밀어내거나 마지못해 체포해도 중국 공산당 정권의 공갈 협박에 굴복하여 곧 풀어주고 마는 어처구니없는 행위를 반복하고 있다. 스스로 주권국가라고 할 수 없는 짓을 되풀이 하고 있는 것이다. 현장 진압하는 애꿎은 우리 해경들만 희생되고 있는 실정이다.
대한민국의 영해에 들어와 불법조업하는 중국의 어선들이 한줄로 배를 엮어매어 대한민국 해경에 저항 하고 있다.
(중앙일보.2011.11.17.)
이와 같이 역사는 우리의 오늘을 있게 하고 있고 개인적으로나 국가, 민족적으로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든 그 역사의 처음이 있듯이 우리의 역사에도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역사의 출발점이 있다. 그것도 우리 스스로 세계의 현생인류문명을 열어 이 끈 위대한 역사의 새벽이 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오늘날 우리는 머리와 뿌리 되는 역사는 잘려 나간 상태로 공식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부모도 모르고 근본도 모르는 떠돌이 족속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머리가 없는 역사 교육은 우리가 뿌리 없는 민족이요, 부모없는 존재임을 우리의 무의식 가운데 심어주고 있는바 정체성의 혼란을 일으키는 근본원인이 되고 있다.
개인이나 국가는 그 정체성을 먹고 살며 왜 존재하는 지 정체성속에서 근본이유를 찾는다. 그런데 지금 가르치는 우리의 역사교육은 이 정체성을 심어주는 역사의 머리를 잘라 버려 머리 없는 족속으로 만들어 버렸다. 머리가 없다는 것은 정신이 나갔다는 것이며 이는 정신병자를 말한다.
아이가 처음 엄마 뱃속에서 나와 제일 먼저 찾는 것이 엄마이며 엄마와의 깊고 따듯한 교감을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간다. 그리고 하나의 온전한 인격체로서 향후 인생을 결정하는 기초를 닦는다. 그런데 이러한 엄마와의 교감을 통한 애착, 자아정체감이 형성되지 않은 아이는 커서도 정서불안으로 시달리며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데도 스스로 주체가 되어 못하고 혼란 속에 빠지기 쉽고, 범죄성향을 보인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사의 시작을 가르치지 않거나 바르게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은 개인적, 국가적, 민족적 차원에서 심각한 병리현상을 야기 시킨다. 오늘날의 우리 한국사회가 이것을 말해 주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역사의 처음은 어디이며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보통 단군왕검이 개국한 ‘조선’을 우리역사의 실체로 보고 여기서 우리의 모습을 찾는다. 수많은 학설과 주장들이 있지만 대체적으로 ‘삼국유사’에 나오는 ‘고조선(왕검조선)’을 근거로 우리 역사의 시작을 전개한다. 그런데 이 ‘조선’의 역사, 약 2333년을 47명의 단군임금이 다스린 것이 아니라, 단군왕검의 조선은 약 1천년정도 진행하다가 끝났고, 이 후에는 중국세력이 단군왕검이 개국한 조선을 정복하여 미개 야만의 조선을 선진문명의 문물을 들여와 계몽, 개화시켜 문명국으로 만들었다거나, 정벌, 멸망시켜 비참하게 끝나는 것으로 가르쳐 왔다.
이른바 ‘기자’의 조선과 ‘위만’의 조선이다. 기자조선은 이조선 5백년 동안 국가기본 시책으로 주입, 세뇌되어 왔고 위만조선은 지금까지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정신활동에 지대한 악영향을 주고 있는 것은 기자조선이다. 중국에서 파견한 조선 총독, 기자가 단군조선으로 와서 약 1천년 동안 통치하며 미개야만의 우리를 문명개화시켰다고 주입, 세뇌시켜왔고 우리 무의식속에 저주받은 망령처럼 웅크리고 있다가 사대노예의식에 바탕을 둔 외세굴종의식과, 피해의식, 자학적 인생관, 운명주의적 세계관으로 되살아나 괴롭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글에서는 ‘기자조선’에 대하여 논하기로 한다. 기자조선의 요점은 중국에서 중국 주나라 무왕의 책봉을 받아 ‘기자箕子’라는 인물이 이른바 ‘8조범금’과 ‘홍범구주’라는 선진문화제도를 가지고와서 단군조선 생민들을 교화, 계몽시켜 미개야만에서 벗어나게 했다는 것이다. 기자조선을 긍정하고 심지어 찬양하는 세력은 ‘기자조선’에 머리를 두고 기자를 조상으로 삼은 이조선이 망한지 1백년이 넘었는데도 여러 가지 이유로 자신들의 의견을 굽히지 않는다.
이하에서는
첫째, ‘기자조선’이 생기게 된 계기를 이조선 왕조 개국 전후를 통해서 살펴본다.
둘째, 기자조선을 긍정하는 측과 부정하는 측의 기존의 일반적 견해를 살펴본다.
셋째, 기자조선을 긍정하는 어느 특정 견해를 살펴보면서 이에 대한 반대 근거를 제시한다.
넷째, 오늘 현시점에서 왜 기자조선설이 위험한지 그 심각성을 중공의 ‘동북공정’을 통해서 살펴본다.
2. 기자조선은 어떻게 탄생했는가.
기자조선이 하나의 역사로써 어떻게 사실로 체계와 되었는지 실체를 확인하려면 고려 말 공자유교 신봉자들과 이성계의 위화도회군반란 그리고 당시 신흥 명나라와의 관계를 먼저 알아야 한다.
1) 위화도 반란의 사상적 토대
이 땅에 공자유교가 들어온 이후 고려말에 와서 본격적으로 새끼공자신도들이 생기기 시작했고 정계에 까지 진출하여 세력을 확장하며 공자의 나라를 꿈꾸기에 이른다. 고려 말 공민왕시기를 분기점으로 하여 우리가 흔히 들어온 정도전, 정몽주, 조준 등을 중심으로 공자유교의 나라가 구체화되어 간다. 이들 중에 정도전은 정몽주와는 다르게 고려제국을 폭력으로 뒤엎고 새로운 공자유교질서를 꿈꾸며 이성계와 의기투합한다. 이민족 출신 이성계 역시 그 아비 이자춘 때부터 고려조정에 내조한 이후 고려군부에서 꾸준히 세력을 확장하여 ‘최영崔瑩’ 다음가는 세력을 확보하기에 이른다. 공자유교에 철저히 세뇌된 이들은 이미 새끼중국인의 정신세계를 형성하고 있었고 공자유교의 원산지 중국은 어버이 나라요, 주인으로 추앙받는 존재가 되었다. 따라서 당시 발흥하는 신생국 명나라에 대하여 사모하는 마음 가득했고 성지순례를 해야 하는 곳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2) 고려의 명나라 정벌군과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반란
이러한 때에 원나라가 쇠퇴하면서 명나라가 이른바 철령위사건을 일으키고 요동의 고려 땅을 침탈하여 왔다. 고려는 자주 독립국으로써 외적의 침탈을 막는 것은 당연하였고, 나아가 아직 신생독립국에 지나지 않아 모든 것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명나라를 멸망시켜 고토회복까지 덤으로 노렸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좋은 단군조선의 단궁을 이어 받은 활(최대살상거리 약300m)과 고구려의 개마기갑군단을 계승한 기마군단 2만 이상으로 무장한 최정예 군대를 편성하여 명나라 정벌 및 고토수복에 나선다.
청태조 金누르하치가 명나라를 정복하면서 한 말이 있다. “내게 팔기군 기병1만을 주면 세계를 제압할 수 있다.”-김운회, 대쥬신을 찾아서 중) 몽골이 세계제국을 건설할 수 있는 것도 기병이 절대적으로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 지난 8월에 개봉되어 인기를 끌었던 ‘최종병기 활’에서 보여주는 청나라 기병의 질주하는 모습과 전투모습을 보면 기병이 얼마나 위력이 강한지 가늠할 수 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보병중심의 이조선 군대를 휩쓸어 버린다. 이러한 막강 명나라 정벌 고려군대가 당시 원나라 몽골군대와 연합하기로 했으니 신생국 명나라 멸망은 불 보듯 하였다.
아, 그런데 이를 어찌하랴! 이미 명나라를 어버이로 섬기고 주인으로 섬기는 사대노예 정신으로 물든 이성계를 명나라 정벌군 사령관으로 맡겨버린 것이다. 결국 이성계는 정벌군 요소 요소에 자기의 심복을 중간 지휘관으로 심어 놓고 이들을 이용하여 고려군을 선동하여 정벌군을 반란군으로 둔갑시키는데 성공한다. 예나 지금이나 군대생리상 현장 최고지휘관의 명령에 절대 복종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반란에 성공할 경우 개국공신이 되고 각종 논공행상을 통하여 출세시켜 준다는 감언이설에 안 넘어갈 군관과 병사들이 없었을 것이다. 결국 이성계 일당은 위화도 회군반란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본격적으로 공자유교의 나라건설에 들어간다. 그러나 이 반란은 대다수 고려생민들에게는 반역으로 비추어졌고 명분도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성계 반란군 세력은 명나라라는 외세를 끌어들여 목적을 달성한다. 자기를 정벌하러 오는 최강 고려군대가 오다말고 갑자기 회군을 하여 그 주인을 때려잡는 것을 본 명나라는 반란군의 실체를 파악하고 본격적으로 반란군과 교류를 통하여 주인과 종의 관계,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설정하게 된다.
3) ‘기자조선’ 확립과 공자유교를 국시로 삼다.
결국 이성계는 자신의 사리사욕의 정권욕(이조선 개국)을 채우기 위해서 지금까지 이어온 자주독립국의 모습을 버리고 외세 굴종, 사대노예역사의 문을 활짝 열어 제친다. 모든 것을 명나라에 넘기고 명나라의 보호아래서만 존재하는 이씨조선왕조를 개창한다. 따라서 이제까지의 전통과 문화를 모두 지워버리고 전혀 다른 나라, 다른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문제에 봉착한다. 그래서 국가 차원에서 대대적인 과거 지우기 작업에 들어간다. 그리고 새로운 사상과 이념과 전통을 세우는데 이조개국 초기의 국력을 모두 쏟아 붙는다. 이조태조실록과 세종실록을 보면 이와 같은 사실이 잘 드러난다.
가장 먼저 이조선정권이 날조 작업에 착수 한 것은 우리의 뿌리를, 머리를 어디에 두느냐 하는 것이고 이는 나라이름부터 먼저 정해야 하는 문제였다. 그래서 이조선 정권은 자신들의 주인이자 상전인 명나라로부터 ‘조선’이라는 이름을 내려 받는다. 이것은 ‘단군’의 조선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중국의 사실상 뿌리 왕조라고 하는 주나라 무왕이 ‘단군조선’를 다스리라고 제후로 책봉해 줬다는 기자箕子의 ‘조선’을 말한다. 혈연적, 정신적으로 단군의 조선이 아니라 중국의 주나라 무왕이 조선의 제후로 책봉해 줬다는 기자箕子의 나라를 조상으로 섬긴다는 것이다.
명나라를 주인, 상전으로 섬기는 것을 국시로 정한 이조선 정권에게는 이러한 역사적인 연원이 반드시 필요했다. 명나라를 주인, 상전으로 섬기려면 반드시 역사적 이론적 근거가 있어야 했고 이 차원에서 ‘ 서기전 약 1천년전에 중국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단군조선에 제후로 책봉했다’는 이론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것은 한국의 성을 중국의 성으로 갈아 버리는 것이며, 이제까지 입고 있는 고려의 옷을 중국의 옷으로 갈아입는 것을 뜻한다. 단군을 부모로 둔 이제까지의 삶을 버리고 중국이 임명해준 기자를 조상부모로 모시겠다는 것이다. 이것을 이른바 ‘환부역조換父易祖’라고 한다.
이조선이 왜 중국명나라가 명명한 나라인지 그 이론적 근거를 알려주는 한 대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이에 동방(東邦)을 돌아보시고 우리로 하여금 편안히 살도록 하셨도다. 이 때에 신의 선조(先祖)께서 삼가 명나라의 지시를 받들어 이 동토(東土)를 다스렸으니 신인(神人)의 비호하는 바가 되었도다. 황제께서 벌써 반서(班瑞) 를 하시고 아름다운 국호를 내리셨도다. 은사(殷師)의 옛 봉강(封疆)을 이에 다시 받도록 명하셨도다. 만 가지 이치를 밝게 살피니 비금(斐錦)11729) 이 세상에 행해질 수 없도다. 부모의 나라가 매우 가까우니 우로(雨露)의 은택을 고루 받았도다. 아무리 작은 것도 모두 황제가 주신 것이니, 왕기(王畿) 밖의 요전(要甸) 이 어찌 차별이 있겠는가(영조 69권, 25년(1749 기사 / 청 건륭(乾隆) 14년) 4월 10일(정해)?
여기서 ‘은사’라는 것은 은(殷)나라 태사(太師)였던 기자(箕子)를 가리킨다. 이조선은 당시 이조선의 땅이 옛날 중국 주나라 무왕이 봉토해준 그 땅이라고 한다. 그리고 기자가 중국 주나라 무왕으로부터 단군조선의 제후로 책봉을 받아 와서 다스렸는데, 이조선 때도 중국 명나라가 이조선에 이조선의 왕을 책봉하여 다스리게 한 것이 옳다는 것이고 그 은혜로 이 만큼 이조선 왕조가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조선 정권은 이처럼 중국인 기자에 머리를 두고 공자유교를 국시로 삼는 것으로 이조의 국가기반을 닦는다. 이것은 우리 스스로 자주적으로 우리의 삶과 역사를 이끌어 온 것이 아니라 중국의 관리 감독이 있을 때, 우리나라가 비로소 모습을 갖추고 제대로 된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기자조선’이 어떻게 구체와 실체와 되었는지 리조선 정권을 사실상 기획하고 기초를 닦아놓은 삼봉 정도전의 삼봉집 ‘조선경국전’ 편을 보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 해동(海東=조선반도)은 그 국호가 일정하지 않았다. 조선(朝鮮)이라고 일컬은 이가 셋이 있었으니, 단군(檀君)ㆍ기자(箕子)ㆍ위만(衛滿)이 바로 그들이다. 박씨(朴氏)ㆍ석씨(昔氏)ㆍ김씨(金氏)가 서로 이어 신라(新羅)라고 일컬었으며, 온조(溫祚)는 앞서 백제(百濟)라고 일컫고, 견훤(甄萱)은 뒤에 후백제(後百濟)라고 일컬었다. 또 고주몽(高朱蒙)은 고구려(高句麗)라고 일컫고, 궁예(弓裔)는 후고구려(後高句麗)라고 일컬었으며, 왕씨(王氏)는 궁예를 대신하여 고려(高麗)라는 국호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이들은 모두 한 지역을 (중국의 허락을 받지 않고)몰래 차지하여 중국의 명령을 받지 않고서 스스로 명호를 세우고 서로를 침탈하였으니 비록 호칭한 것이 있다손 치더라도 무슨 취할 게 있겠는가? 단 기자만은 주무왕(周武王= 중국의 원조라고 통용됨)의 명령을 받아 조선후(朝鮮侯)에 봉해졌다.
지금 천자天子 (명나라 태조 明太祖)가,
“오직 조선(기자조선)이란 칭호가 아름다울 뿐 아니라, 그 유래가 구원하다. 이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하늘을 체받아 백성을 다스리면, 후손이 길이 창성하리라.”
고 명하였는데, 아마 주무왕이 기자에게 명하던 것으로 전하(이성개)에게 명한 것이리니, 이름이 이미 바르고 말이 이미 순조롭게 된 것이다.
기자는 무왕에게 홍범(洪範)을 설명하고 홍범의 뜻을 부연하여 8조(條)의 교(敎)를 지어서 국중에 실시하니, 정치와 교화가 성하게 행해지고 풍속이 지극히 아름다웠다. 그러므로 조선이란 이름이 천하 후세에 이처럼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제 조선이라는 아름다운 국호를 그대로 사용하게 되었으니, 기자의 선정(善政) 또한 당연히 강구해야 할 것이다. 아! 명나라 천자의 덕도 주무왕에게 부끄러울 게 없거니와, 전하의 덕 또한 어찌 기자에게 부끄러울 게 있겠는가? 장차 홍범의 학과 8조의 교가 금일에 다시 시행되는 것을 보게 되리라.(삼봉집 제13권 조선경국전 상(朝鮮經國典 上)”
4) 이조선의 한국사 말살과 부모 없는 나라 만들기
이와 같이 이조선 정권은 중국인 기자의 나라와 공자유교를 통치지배이념으로 삼아 나라의 기초를 탄탄하게 닦는다. 그리고 고려제국의 혼과 역사를 기억하고 지키려는 고려인들을 대대적으로 학살하기 시작한다. 대략 10만명 이상의 고려인들이 이성계의 이씨조선 정권에 학살되었다고 한다. 특히 고려왕족에 대한 천인공로할 학살극은 이조실록에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다.
서기1997. 한국방송 1테레비에서 방영된 용의눈물 중'고려왕씨학살' 장면
(1)이조선의 한국태고문헌사료 수거령
또한 고려제국까지 이어온 제국의 자주역사를 철저히 지우기 시작한다. 이를 위해서 당시 까지 전해오던 모든 제국의 역사를 없애 버렸다. 이조선정권이 얼마나 많은 우리의 자주제국의 역사문헌을 없앴는지 다음과 같은 이조실록의 기록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서운관(書雲觀)에 간직하고 있는 참서(讖書) 두 상자를 불살랐다. 풍속이 전조의 습관을 인습하여 음양 구기(陰陽拘忌)를 혹신하여 부모가 죽어도 여러 해를 장사하지 않는 자가 있었다. 임금(태종 이방원)이 박은(朴訔)·조말생(趙末生)에게 명하여 서운관에 앉아서 음양서(陰陽書)를 모조리 찾아 내어 요망하고 허탄하여 정상에서 어그러진 것을 골라 불태웠다(丙申/焚書雲觀所藏讖書二篋 俗因前朝之習, 酷信陰陽拘忌, 親死累年不葬者有之 上命朴訔、趙末生坐書雲觀, 盡索陰陽書, 擇其妖誕不經者焚之-太宗 34卷, 17年(1417 丁酉 / 명 영락(永樂) 15年) 12月 15日(丙申) 1번째기사).
-팔도 관찰사(八道觀察使)에게 유시(諭示)하기를,
“《고조선비사(古朝鮮秘詞)》·《대변설(大辯說)》·《조대기(朝代記)》·《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지공기(誌公記)》·《표훈삼성밀기(表訓三聖密記)》·《안함노 원동중 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도증기 지리성모하사량훈(道證記, 智異聖母河沙良訓)》, 문태산(文泰山)·왕거인(王居人)·설업(薛業) 등 《삼인기록(三人記錄)》, 《수찬기소(修撰企所)》의 1백여 권(卷)과 《동천록(動天錄)》·《마슬록(磨蝨錄)》·《통천록(通天錄)》·《호중록(壺中錄)》·《지화록(地華錄)》·《도선한도참기(道詵漢都讖記)》 등의 문서(文書)는 마땅히 사처(私處)에 간직해서는 안되니, 만약 간직한 사람이 있으면 진상(進上)하도록 허가하고, 자원(自願)하는 서책(書冊)을 가지고 회사(回賜)할 것이니, 그것을 관청·민간 및 사사(寺社)에 널리 효유(曉諭)하라.” 하였다(세조7권, 3년(1457. 정축/명 천순(天順) 1년) 5월 26일(무자).
- 예조(禮曹)에 전교하기를,
“《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지공기(志公記)》·《표훈천사(表訓天詞)》·《삼성밀기(三聖密記)》·《도증기(道證記)》·《지이성모하사량훈(智異聖母河沙良訓)》, 문태(文泰)·옥거인(玉居仁)·설업(薛業) 세 사람의 기(記) 1백여 권과 《호중록(壺中錄)》·《지화록(地華錄)》·《명경수(明鏡數)》 및 모든 천문(天文)·지리(地理)·음양(陰陽)에 관계되는 서적들을 집에 간수하고 있는 자는, 경중(京中)에서는 10월 그믐날까지 한정하여 승정원(承政院)에 바치고, 외방(外方)에서는 가까운 도(道)는 11월 그믐날까지, 먼 도(道)는 12월 그믐날까지 거주하는 고을에 바치라. 바친 자는 2품계를 높여 주되, 상받기를 원하는 자 및 공사 천구(公私賤口)에게는 면포(綿布) 50필(匹)를 상주며, 숨기고 바치지 않는 자는 다른 사람의 진고(陳告)를 받아들여 진고한 자에게 위의 항목에 따라 논상(論賞)하고, 숨긴 자는 참형(斬刑)에 처한다. 그것을 중외(中外)에 속히 유시하라(예종7권, 1년(1469. 기축/명성화(成化) 5년) 9월 18일(무술).”
- 여러 도(道)의 관찰사(觀察使)에게 교서(敎書)를 내리기를,
“전일에 《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지공기(志公記)》·《표훈천사(表訓天詞)》·《삼성밀기(三聖密記)》·《도증기(道證記)》·《지리성모(智異聖母)》·《하소량훈(河少良訓)》, 문태(文泰)·왕거인(王居仁)·설업(薛業) 삼인기(三人記) 1백여 권과, 《호중록(壺中錄)》·《지화록(地華錄)》·《명경수(明鏡數)》와 무릇 천문(天文)·지리(地理)·음양(陰陽) 등 여러 서책(書冊)을 빠짐없이 찾아내어 서울로 올려보낼 일을 이미 하유(下諭)했으니, 상항(上項) 《명경수(明鏡數)》 이상의 9책과 《태일금경식(太一金鏡式)》·《도선참기(道銑讖記)》는 전일의 하유(下諭)에 의거하여 서울로 올려보내고 나머지 책은 다시 수납(收納)하지 말도록 하고, 그 이미 수납(收納)한 것은 돌려주도록 하라(성종1권, 즉위년(1469. 기축/명성화(成化) 5년) 12월 9일(무오).” 하였다.
위에 이방원(이조 태종)이가 불태웠다는 2상자 포함 서적들을 보면 고려시대풍습과 공자유교를 국시로 하는 이조선의 지배이념이 상극임을 알 수 있다. 공자유교 매장제도에 맞지 않는다고 관련 서적을 모조리 불태운 것이다. 고려조정에서 보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음양서인데 이조선 정권이 불태워 지금은 알 수 없는 우리의 소중한 풍습이 새겨져 있는 서적으로 보인다. 특히 이 '서운관'이라는 관청은 하늘의 별자리를 보고 기후, 기상을 살펴 농사, 어업 기타 수 많은 국가정책을 입안한다. 천문,지리학地理學,역수(曆數:책력),측후(測候),각루(刻漏) 등의 사무를 맡아 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조선 초기에는 고려조에서 쓰던 서운관(書雲觀)이라는 명칭을 그대로 썻지만 세종대로 들어와서는 관상감(觀象監)으로 바꾼다. 서운관에 있던 음양서를 두 상자나 붙태웠다는 부분에서 수 많은 천문서적이 사라졌음을 알 수 있다. 대륙에서 관찰한 대륙고려의 천문서적도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도 가능하다. 이조선의 천문학은 중국 명나라 천자만 하늘을 볼 수 있다고 하였고 노예제후국인 이조선은 감히 하늘을 처다보지 못했다. 그래서 천문학분야에서는 이조선은 암흑기였다.
그리고 위 세조, 예종때에 수거되어 지금은 사라진 책들의 이름 중에는 우리의 간절한 단군조선의 역사를 알려주는 듯한 ‘고조선비기’도 보인다. 또한 우리의 한인, 한웅, 단군을 암시하는 ‘삼성밀기, 삼성기’도 보인다. 이 책들은 현재 이름만 전하는 삼국유사 ‘고조선’편의 ‘한인 한웅 단군’에 대하여 구체적인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위 이조실록을 보면 이조선의 통치이념과 세계관에 맞지 않는 한국태고사문헌사료를 내놓지 않고 개인적으로 숨기다가 발각되면 ‘참형斬刑’에 처한다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은 목을 잘라 죽이겠다는 소리다. 사극에서 보면 이른바 ‘망나니’가 피묻은 시퍼런 칼을 들고 죄인의 목을 치는 장면이 나온다. 책을 안 내놓고 버티다 발각되면 이렇게 죽이겠다는 것이다.
위에 적혀있는 책들은 지난 군사독재정권때의 용어로 말하면 '불온서적, 금지서적'들이다. 자기 정권을 위태롭게 하는 것으로 보이는 서적들은 이렇게 낙인찍어 수거하여 모조리 없애 버린 것이다. 더우기 명나라 사대노예세계관과 공자유교를 국가이념으로 하여 중국의 역사는 황제국의 역사로 바꾸고 우리는 역사가 시작한때부터 중국의 식민통치를 받아온 번국, 제후국으로써 조공이나 바쳐온 역사로 바꿔치기 했다.
그런데 위 서적들은 그 반대로 우리가 본래 제국이고 중국은 우리에게 조공을 바쳐오며 우리의 지도와 감독하에 제대로 문명화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을 이조선 정권이 그냥 놔둘리가 없었던 것이다.
이조선 정권은 이와 같이 우리의 뿌리 태고사를 알려주는 귀중한 문헌자료를 수거하여 없애버린 다음, 고려시대 편찬된 것으로 알려진 ‘삼국사기, 삼국유사, 제왕운기’ 등 사료와 문집을 중국 사대노예 세계관에 맞게 개간改刊해 다시 펴낸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제왕운기’ 및 기타 고려시대에 편찬된 것으로 알려진 사료나 문집의 저자는 고려시대 사람으로 새겨져 있으나 무늬, 껍데기만 그렇고 내용은 모두 이조선 정권이 새로 쓴 것이다. 마치 고려시대 사람이 그렇게 쓴 것처럼 사기극을 벌인 것이다.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이나,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 그리고 제왕운기의 저자로 알려진 이승휴 등이 이와 같은 사실을 알면 원통하고 분하여 다시 살아나 이조의 만행을 규탄할 것으로 본다. 이조선 정권은 이와 같이 한국혼을 말살하기 위하여 저자의 이름까지 도적질하여 사기극을 서슴치 않은 역사상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만행을 저질렀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대표적 사례인데 다음과 같다. 이조선 정권이 중국이 파견한 조선 총독, 기자箕子에 머리를 두고 조상으로 모셨고 기자가 중국의 선진문물을 가지고 와서 미개야만의 우리를 개화시켜 문명인으로 만들었다는 내용은 앞서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에서 살펴보았다. 기자가 우리를 문명개화시켰다는 도구는 ‘8조범금’과 ‘홍범구주’라는 것이다. 이것은 공자유교의 ‘인의예지仁義禮智’사상과 거의 일치하는데 ‘인仁’으로 교화시켰다는 것이다.
(2)이조선의 삼국사기 왜곡조작
삼국사기를 보면 이러한 문장을 거의 빼다 박은 내용이 나온다. 다음과 같다.
“논하여 말하면, 현토 락랑은 본래 조선의 땅인데 기자가 책봉을 받은 곳이다. 기자는 그 백성에게 예의를 가르치고 농사를 짓고 누에를 치고 옷감을 짜고 물건을 만드는 것을 가르쳤다. 그리고 금8조를 가르쳤다(論曰玄菟樂浪本朝鮮之地箕子所封箕子敎其民以禮義田蠶織作設禁八條-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위 글이 고려조 인종(재위: 1122년 ~ 1146년) 때의 학자 김부식이 기록한 것으로 삼국사기에 나온다. 위에서 ‘예의禮義’ 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공자유교의 대표적인 핵심 가르침의 ‘인의예지仁義禮智’의 한 대목이다. 위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나오는 글은 중국의 ‘한서지리지연지漢書地理地燕地’ 편의 글과 똑같다. ‘한서 지리지 연지’편의 저 글 다음에는 ‘인현지화仁賢之化’ 라는 말이 나오는데 유교의 핵심으로 단군조선 생민들을 교화시켰다는 말이다.
그런데 위 삼국사기 고구려본기편의 위 글에 이어서 나오는 기록은 완전히 이조선 정권의 사대노예 세계관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말이 나온다. 글이 너무 길어 굵게 표시한 글만 읽어도 알 수 있다.
“(중국에서 파견 책봉해 준 기자의 가르침의 결과) 이리하여 이곳 (단군조선의) 백성들은 서로 도둑질하지 않고, 대문을 닫지 않고, 부녀들이 정조와 신의를 지켜 음란하지 않고, 음식을 먹을 때 그릇을 사용하였다. 이는 어질고 현명한 사람(기자)의 교화가 미친 탓이었다. 또한 그들은 서·남·북방의 오랑캐들과는 달리 천성이 유순하였다. 이리하여 공자는 자기의 도가 중국에서 행하여지지 않음을 슬퍼하고, 바다에 배를 띄워 이곳에 살고자 하였으니, 이 또한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주역의 괘가 효이(爻二)를 다예(多譽), 효사(爻四)를 다구(多懼)라 한 것은 군위(君位)에 가깝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진·한 이후로 중국의 동북방의 한 쪽에 끼어 있었다. 북쪽 인근 지역들은 모두 천자가 관리를 보내 통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혼란한 시기에는 영웅들이 나타나 참람되게도 황제의 이름과 지위를 차지하려 하였다. 그러므로 고구려는 실로 다구(多懼)의 지역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고구려는 겸양하려는 생각없이, 천자의 영역을 침노하여 원수를 맺었으며, 천자의 군현에 들어가 살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전쟁이 계속되고 화근이 맺어졌으므로 평안한 해가 거의 없었다. 평양으로 도읍을 옮긴 때는 수·당이 중국의 통일을 이루었던 시기에 해당한다. 이 때 고구려는 오히려 불손하게도 중국의 조서와 명령을 거역했으며, 천자의 사신을 토방에 가두기도 하였다. 고구려는 이와 같이 고집스럽고 겁이 없었기 때문에, 여러 번이나 죄를 묻는 정벌의 군사를 부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비록 어떤 시기에는 기묘한 계책으로 대군에게 승리를 거두었던 적도 있었으나, 결국은 왕이 항복하고 나라가 멸망하였다. 고구려 전체의 역사를 살펴보면, 임금과 신하가 화평하고 백성들이 서로 화목했을 때는, 비록 대국이라 할지라도 고구려를 빼앗지 못하였지만, 나라에 정의가 사라지고, 군주가 백성들을 사랑하지 않아 그들의 원성이 일어난 뒤에는, 나라가 붕괴되어 스스로 일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맹자는 "전쟁의 승리에 있어서, 시기의 이로움과 지형의 이로움이 인심의 화목함만 못하다."라고 말했으며, 좌씨는 "국가는 복으로 흥하고 화로 망한다. 나라가 흥하려면, 군주가 자기 몸에 난 상처를 보듯이 백성을 보살펴야 하나니, 이것이 복이다. 나라가 망하려면 백성을 흙먼지 같이 여기나니 이것이 화이다."라고 하였다.
원문: 是以其民不相盜, 無門戶之閉, 婦人貞信不淫, 飮食以 豆, 此仁賢之化也. 而又天性柔順, 異於三方. 故<孔子>悼道不行, 欲浮 於海以居之, 有以也夫. 然而『易』之 "爻, 二多譽, 四多懼, 近也." <高句麗>自<秦>·<漢>之後, 介在<中國>東北隅, 其北隣, 皆天者有司, 亂世則英雄特起, 竊名位者也, 可謂居多懼之地, 而無謙巽之意, 侵其封 以讐之, 入其郡縣以居之. 是故兵連禍結, 略無寧歲. 及其東遷, 値<隋>·<唐>之一統, 而猶拒詔命以不順, 囚王人於土室. 其頑然不畏如此, 故屢致問罪之師. 雖或有時設奇以陷大軍, 而終於王降, 國滅而後止. 然觀始末, 當其上下和, 衆庶睦, 雖大國, 不能以取之, 及其不義於國, 不仁於民, 以興衆怨, 則崩潰而不自振. 故<孟子>曰: "天時·地利, 不如人和." 『左』氏曰: "國之興也, 以福; 其亡也, 以禍. 國之興也, 視民如傷, 是其福也; 其亡也, 以民爲土芥, 是其禍也."
이와 같은 글은 중국인 기자를 조상으로 삼고, 공자유교를 국교로하여 중국을 주인, 상전으로 모시는 것을 국시로 삼은 이조선 정권의 개국목적과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어떤 사람은 김부식이 고려시대 당시 공자유교의 사대모화 유학자라서 저렇게 쓴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고려는 고구려의 뜻을 받들어 잃어버린 고토를 수복하는 북진정책을 내걸고 개국한 나라다. 그래서 고구려의 후예라는 뜻으로 ‘고려’로 나라이름을 정했다. 또한 당시 고려는 엄연히 황제국을 지칭(제왕운기 상권 ‘고려국 황제 운운’, 하권 ‘황실’)하고 있었고 연호를 쓰고 있었으며 더구나 팔관회 등을 개최하면서 황제국의 면모를 과시하고 있었고 팔관회에서도 나오듯이 고구려의 정신을 계승하였다는 뜻으로 개성에서 하는 팔관회 외에 평양에서 해마다 음력으로 11월 14일 경에 팔관회를 개최하여 고구려의 제천행사인 ‘동맹’을 이어 고구려 조상신에게 제사를 지내왔다(고려사69권/지23/예11/가례잡의/중동팔관회의, 송사/외국열전/고려).
이런 황제국 고려에서 위와 같은 중국사대주의노예사관으로 물든 삼국사기가 편찬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다. 또한 삼국사기는 고려인종의 지시로 쓰게 된 것이라고 나온다. 삼국사기를 다 쓰고 고려인종이 모두 보았을 것인데 고구려를 계승한 황제국 고려에서 ‘고구려가 어버이 중국에 버르장머리 없이 굴다가 망한 나라’라고 기록한 것을 그냥 놔두었겠는가, 또한 삼국사기 전반에 흐르는 중국사대노예세계관에 기초한 역사기록을 그대로 하라고 놔두었겠는가,
더구나 현존하는 삼국사기는 고려시대 것이 하나도 없다. 모두 이조선 정권의 개국과 동시에 두 차례 교정, 개판된 것이다. 현존하는 삼국사기의 끝장에 보면 발문跋文이라는 것이 나오는데 여기에 이조선 태조 이성계 2년에 김거두라는 이조선 고위직 관리가 이조선 정권의 명령을 받아 새로 펴냈고, 이어 이조선 중종연간에 연산군을 몰아낸 추성정난공신, 전평군 이계복李繼福이라는 자가 다시 개간改刊해 낸다. 이런 발문 기사가 없다면 삼국사기가 고려 인종 때의 김부식이 편찬한 것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명백하게 이조선 시대에 와서 두 차례나 다시 펴냈고 이계복이 펴낼 때는 중판重版도 아니요, 재판再版도 아니요, 복판復板도 아닌 명백히 개간改刊했다고 나온다. 이것은 ‘틀린 것을 바로잡아 고쳐 다시 찍어 냈다’는 소리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대중국 사대노예세계관에 맞게 원 삼국사기를 왜곡, 날조해 냈다는 증거라고 할 것이다. 이조선은 자기기준에 맞지 않으면 음사淫祀라고 정의내린다. 이런 음사적 관점에서 고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3)이조선의 ‘삼국유사, 제왕운기’등 왜곡조작
다음으로 삼국유사이다. 이것도 앞선 언급한 이조선 중종연간의 추성정난공신, 전평군, 이계복이 개판했다고 발문에 똑 같이 써 있다. 삼국유사 역시 전편 밑바닥에는 중국 사대노예세계관이 흐르고 있다. 이것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것이 삼국유사 서문이다. 중화세계관과 공자유교사상으로 가득 차 있다. 예를 들어 공자유교 경전에서나 볼 수 있는 ‘성인이 예악으로 나라를 흥하게 하였다(聖人方其藝樂興邦)’든가, 인의예지 할 때의 인의로 가르침을 베풀었다(仁義設敎)든가, 공자가 금기시한 용어인 ‘괴력난신怪力亂神’이라는 말이 나오는가 하면 온통 중국의 신화나 전설에 나오는 인물들을 비유하여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河水圖洛水書, 神母伏羲, 女登炎宰, 皇娥少昊, 簡狄契, 堯). 불교승려 일연이 썻다면 불교적 이야기로 비유를 들어 서문을 쓰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삼국유사 첫 서문에서 중국에 뿌리를 둔 세계관으로 가득 찬 글이 등장한다는 것은 누구도 납득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마치 이조선의 공자유교에 물든 이조 선비가 쓴 냄새가 물씬 풍긴다.
특히 삼국유사 첫장에 나오는 개국신화(이른바 단군신화)의 고조선(왕검조선)편의 마지막 부분에 중국왕조, 주나라의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책봉하였다는 문구(周虎王卽位己卯封箕子於朝鮮)가 나오는데 위와 같은 여러 정황과 본 논문 아래 ‘2)기자조선 부정설- 긍정설 비판’ 항목에서 다룬 바와 같이 실증적 근거를 통해서 볼 때 중국사대주의를 표방한 이조선 정권이 추가로 집어넣은 것으로 나온다.
고려시대 이승휴라는 사람이 썼다는 이른바 ‘제왕운기’도 마찬가지다. 이조선 들어서 ‘교정敎正’ 하여 개판開版했다는 발문이 붙어 있다. 따라서 제왕운기의 후조선기에 나오는 이른바 ‘기자’관련기록은 이조선 정권에서 집어넣었다고 봐야 한다. 왜냐하면 기자관련 내용이 나오는 중국사서의 모든 내용을 압축 정리하여 써놓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명나라를 주인, 상전, 부모나라로 섬기는 것을 국가시책으로 한 이조선 정권은 위와 같이 고려시대의 사서를 사대노예사관 맞게 모두 왜곡조작해서 다시 펴낸다.
(4) 이조선의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 사대노예 역사책 편찬
이조선 정권은 이와 더불어 고려시대의 역사를 새롭게 조작날조해서 펴내는데 그것이 이른바 ‘고려사, 고려사절요’등이다. 고려사의 경우 처음 이조선 정권의 기틀을 잡은 정도전이 ‘고려국사’로 펴낸 것을 이 후에 중국천자의 나라에 불경스러운 기록이 많다는 이유로 세종시기에 김종서, 정인지등을 시켜 최종적으로 중국사대노예세계관(공자유교의 주자학적 관점)에 맞게 찍어낸다. 그리고 고려시대 고려역사를 기록한 사서를 모두 없애버린다. 고려시대 고려조정에서 쓴 것으로 알려진 『고려실록』, 이제현(李齊賢)의 『사략(史略)』, 이인복(李仁復)·이색(李穡)의 『금경록(金鏡錄)』, 민지(閔漬)의 『본조편년강목(本朝編年綱目)』, 고려 말기 사관(史官)들이 써놓은 사초(史草)등이 오늘날 하나도 전해내려 오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조선 정권 스스로 ‘고려사절요’에 ‘사신왈史臣曰’ 이라는 사론史論을 57개나 집어넣으면서 고려왕조를 비판하는 처지, 무신정권을 비판하는 문신 중심적 처지, 유교윤리와 사대외교를 옹호하는 처지를 취하는 것으로 나와 명백히 중국사대주의 세계관에 기초하여 고려시대 역사를 편찬한 것을 드러내고 있다. 예를 들어 같은 내용이라도 전략적 상황에 따라 중국에 사례를 하면 제후국이 황제국에게 조공을 한 것으로 기록한다든가, 당시 중국 송나라가 고려에 더 많이 사신을 파견하여 문물을 배워갔는데도 이것은 축소해서 기록하고 고려가 송나라에 파견한 사신 즉 ‘상국’이라고 표현하며 마치 주인의 나라에 황제를 알현하러 간 것처럼 기록하는 것 등이다.
또한 고려가 제국으로서 연호를 쓴 것을 다 빼버리고 전략적 상황에 따라 송나라의 연호를 사소한 것에 쓴 것을 가지고 마치 고려가 중국의 속국으로서 중국 송나라의 연호를 쓴 것처럼 확대하여 기록하는 것 등이다. 앞서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논왈 論曰’이라는 기록도 이런 맥락에서 이조가 고려인종 때의 사람, 김부식의 이름을 빌어 집어넣은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이 이성계와 정도전을 주축으로 하는 중국사대노예, 공자유교세력은 공자유교의 나라를 꿈꾸다가 위화도회군반란을 기화로 고려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주인, 상전, 부모나라로 하는 이조선을 개국한다. 이것은 중국에서 단군조선을 미개야만에서 문명개화시킬 목적으로 파견한 조선 총독, 기자에 머리를 두고 단군에서 기자로 성을 갈아치우는 기자의 조선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당시 명나라의 초대 왕, 원장이와 이성계 세력은 이른바 ‘기자조선’을 기정사실화 시키며 대대적으로 기자조선 찬양과 실체화 작업에 들어간다. 문헌적 근거 확보를 위해 고려사를 새로 쓰면서 중점적으로 왜곡 날조한다.
‘고려사’ 기사에 고려태조 왕건의 직계 조상이 당나라에서 온 태자와 고려여자 사이에서 난 사람이라고 하여 일단 고려도 중국인의 피가 흐르는 것으로 기록하고, 후당나라에서 사신을 파견해서 ‘고려왕 왕건아, (너는) 기자箕子가 이룩한 변방국가의 자취를 잇는구나’라고 기록하고(고려태조왕건 재위16년), 거란족의 동경유수에게 편지를 보내는 형식을 빌어 ‘우리 고려는 기자의 나라를 상속했다’고 하고(고려사 문종 9년 7월), 고려조 신하, 형부상서 ‘정문’의 이름을 빌어 ‘평양에 기자사당을 지으면 어떻겠느냐’의 상서문을 집어넣고(고려사 열전8), 송나라 사신의 답변 형식을 빌어 ‘기자 봉토 운운’ 문구를 집어넣고(고려세가 문종3년), 금나라 황제의 조서형식을 빌어 ‘기자의 옛터 운운’을 집어넣는다(고려사세가 신종2년).
이러한 문헌사료 조작날조 생성과 더불어 실제로 기자조선이 존재하였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평양에 기자묘와 사당을 짓고 재정을 지원하여 이조선 5백년 내내 기리도록 한다. 그 최초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 기자는 처음으로 교화를 일으킨 임금이니 평양부로 하여금 때에 따라 제사를 드리게 해야한다(이조태조실록, 태조1년 예조전서 조박등의 상소문).” 이를 이어 몇 년 후에는 다음과 같은 이성계의 명령이 떨어진다. “기자는 조선에 봉토를 받아 실제로 풍화의 기초를 닦았으니 마땅히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전답을 두어 사철 제사를 지내라(이조태조실록, 태조5년, 이성계가 지시한 말).”
이조선 정권은 이 기자조선을 더욱 뿌리내리게 하기위해 각종 역사서를 창작해 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이조태조 초기의 ‘기자조선과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이라는 기준이 세웠다는 마한의 위치를 부각시킨 권근의 ‘동국사략’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이조선의 중국 사대노예세계관이 굳혀져 감에 따라 제도와 문화로 깊이 뿌리내리게 된다. 이에 따라 이이 이율곡과 같은 사람은 ‘기자실기’까지 쓴다. 그리고 이조선 후대로 내려오면서 수많은 중국명나라 사대주의 새끼 중국인들을 양산하였고 권력을 가진 학자들, 관리들도 이러한 풍토 속에서 낳고 자라 추호도 의심 없이 기자조선을 실재 역사화 하는 문헌사료들을 무수히 남긴다.
그 대표적인 문헌은 이조 성종이 개입하고 명나라 사대주의를 바탕에 깔아 놓은, 기자조선-마한-신라를 강조한 서거정 등이 쓴 관찬사서 ‘동국통감’, 기자조선을 맨 앞에 기술하고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이라는 기준이 도주하여 정착한 마한을 정통으로 삼고 삼국은 정통성이 없다고 하며, 단군조선은 무시해 버린 안정복의 ‘동사강목’, 단군조선은 빼버리고 기자조선을 우리역사의 시작으로 기술한 정약용의 ‘아방강역고’등 이다. 그리고 기자조선을 역사적 사실로 만들어 기자를 부모로 섬기는데 첨병을 역할을 한 이조선 왕들이 기자조선의 신봉, 찬양자들이었음은 두말 할 나위도 없다. http://cafe.daum.net/mookto
이렇게 만든 기자조선은 그럼 몇 년간을 존속했다는 것일까, 이조선 숙종 때의 고위관리 우의정 허목이라는 자의 발언을 보면 확실하게 드러난다.
“단군(檀君)은 순후(淳厚)하게 다스리고, 기자(箕子)는 팔조(八條)로 가르쳐 각각 1천 년씩을 가고, 위만(衛滿)은 병력(兵力)의 위엄과 재물(財物)을 가지고 수천리의 땅을 개척했으나 갑자기 얻었다가 갑자기 망했습니다(숙종 6권, 3년(1677 정사 / 청 강희(康熙) 16년) 1월 12일(기축).”
이렇게 이조선 정권은 새롭게 맞아들인 양부모, ‘기자’를 위해 국력을 다 쏟아 부었다. 반면에 자기를 낳아주고, 먹여주고, 입혀주고 길러주신 생부모, 단군의 사당은 방치하거나 단군사당과 신위를 다른 곳으로 옮겨 버린다. 이에 몇몇 제정신이 박힌 신하들이 그러면 안 된다고 상소하면 마지못해 지방관리로 하여금 관리를 하라고 하는 정도였다. http://cafe.daum.net/mookto
한마디로 이조선 정권은 사리사욕과 부와 권력을 위해 중국 명나라에 나라와 제국의 역사를 팔아먹었고 더구나 이제까지 자신을 있게 한 조상이요, 부모인 단군을 버리고 중국인 기자를 조상이요, 부모로 모시는 폐륜망동을 저지르고 전 백성에게 5백년동안 강요를 해 왔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이조 5백년동안 부모 없는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야 했다. 그리고 이를 이어 받은 일제의 단군신화 날조와 미제산 기독교회 목사교 등 이 땅을 지배하는 세력들에 의해서 ‘우리는 곰의 자식이라는 말이니 단군은 거짓이요, 신화다. 그러니 단군상은 우상이니 때려 부셔야 한다.’며 지금도 우리는 부모 없는 백성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조선 정권은 이렇게 ‘단군씨’에서 ‘기자씨’로 성을 갈아 버리는 천인공로 할 만행을 저질렀다. 이러한 저주받을 폐륜을 참다못해 단군조상님이 저주를 내렸는지, 황해도 문화현에 있는 단군사당을 함부로 가짜 기자묘와 기자사당이 있는 평양으로 옮겨 정체불명의 기자 옆에 놓자, 그 지역에 대대적인 괴질이 돌았고 수많은 백성들이 죽어나갔다. 잠시 그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5) 이조선 정권의 단군 삼성사 때려 부수기
“경창부 윤(慶昌府尹) 이선제(李先齊)가 상서하였다.
신이 들으니 황해도 인민의 병이 갑자기 여항(閭巷)에서 발생하여 사방에 전염해서 북으로 평안도에 이르고 남으로 기현(畿縣)에 이르러, 사망이 서로 이어 민호(民戶)를 싹 쓸었다 합니다. 어찌 까닭이 없이 그러하겠습니까? 신이 무오년·기미년 간에 집현전에 입직(入直)하는데 봉산군(鳳山郡)에 사는 서리(書吏) 오성우(吳成祐)가 직소(直所)에 따라 들어왔습니다. 신이 황해도 인민의 발병한 연유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지난 날에 문화현(文化縣) 단군(檀君)의 사당을 평양에 옮긴 뒤에, 괴이한 기운이 뭉치어 마치 귀신 모양 같은 것이 있어 밤에 다니며 검은 기운이 진(陣)을 이루고 행동하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바라보고 놀라고 괴이하여 숨어 피하고, 이것으로 전파하여 고하였습니다.’ 하였고, 마을 사람들이 서로 말하기를, ‘이 병의 발생이 실로 단군의 사당을 옮긴 까닭이다. 여기(癘氣)가 먼저 구월산의 산간 민호에서 일어나 점점 문화·장연·재령·신천 등지에 번지어 전염되어서 죽은 자가 매우 많았으니, 민생이 불쌍하다.’ 하였습니다...중략...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는 세종의 생각을 따르시어 대신에게 고루 물어서 천제가 아들을 단수(檀樹)에 내린 근원과, 신주를 옮겼기 때문에 괴이한 것을 일으키는 연유를 연구하여 의논하고 문화·장연·신천·재령의 늙은 사람과 원평·교하의 전염병 증세를 널리 물어 권도에 따라 의논을 정하여 다시 성당(聖堂)의 신주를 세워 전시병(傳尸病)의 뿌리를 끊으면 온 나라가 심히 다행하겠습니다(단종이조실록-단종 즉위년 임신(1452, 경태3)6월 28일(기축).”
“(황해도 구월산) 삼성당(三聖堂)에 환인 천왕(桓因天王)은 남향(南向)하고, 환웅 천왕(桓雄天王)은 서향(西向)하고, 단군 천왕(檀君天王)은 동향(東向)하여 다 위패가 있습니다. 속설에 전하기를, 옛날에는 모두 목상(木像)이 있었는데, 태종조(太宗朝-이조태종 이방원)에 하륜(河崙)이 제사(諸祠)의 목상(木像)을 혁파할 것을 건의하여 삼성(三聖)의 목상도 또한 예(例)에 따라 때려 없애버렸다고 하며, 의물(儀物)의 설치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三聖堂 桓因天王南向, 檀雄天王西向, 檀君天王東向, 幷板位。 俗傳古皆木像, 我太宗朝河崙建議, 革諸祠木像, 三聖木像亦例罷, 儀物設置與否未可知).” (이조성종실록-성종3년 2월 6일).
이조선 정권은 우리의 뿌리조상인 ‘한인, 한웅, 단군’ 사당에 나무로 조각된 이 세분의 상을 없애 버리고 공자유교식으로 위패로 바꾸었다가, 한인 한웅 단군의 신위 중 단군신위만 분리하여 가져다가 평양에 설치한 중국의 기자사당에 합사하였다는 것이다. 세분이 함께 모셔져야 함에도 단군만 떼어 밖에서 들어온 객귀인 기자사당에 기자의 신하로 합사하고 삼성사는 헐어 없어지도록 내 팽겨 쳐놓았다는 것이다.
그러자 괴질이 수년간 계속되었고 황해도 평안도 심지어는 경기도 이조궁궐지역까지 괴질이 번져오자 겁을 먹고 다시 복원했다는 이야기다. 그랬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괴질이 사라졌다는 내용이다. 정조 때에 와서는 상대적으로 많은 관심을 보이고 예를 갖추어 대하는 기사가 나온다. 그러나 이때도 기자사당에 지내는 제사보다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단군은 중국인 ‘기자’보다 서열이 아래였다는 것이다.
얼마나 ‘기자箕子‘ 광풍이 불었는지 이조선 후반기의 대유학자로 알려진 송시열의 정신세계를 보면 실체를 확인 할 수 있다. 또한 얼마나 새끼중국화한 나라였는지 청나라 태조 금누루하치의 말을 들어보면 알 수 있다.
송시열의 말 :
“오로지 우리 동방은 기자 이후로 이미 예의의 나라가 되었으나 지난 왕조인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도 오랑캐의 풍속이 다 변화되지는 않았고 … 기자께서 동쪽으로 오셔서 가르침을 베풀었으니 오랑캐가 바뀌어 중국인(夏)이 되었고 드디어 동쪽의 주(周)나라가 되었습니다(이조숙종실록, 7권, 8권)
청나라 태조 금누르하치의 말 :
<극심한 ‘중화 사대주의’에 대해 만주족 국가인 청의 태조 아이신조뤄 누루하치는 “중국과 조선, 이 두 나라는 말이나 글은 다르지만 그 옷이나 생활방식은 완전히 똑같다('滿文老''太祖' 卷13, 14)”고 개탄했다>(김운회의 新고대사 :단군을 넘어 고조선을 넘어③ 기자조선의 진실, 중앙선데이,2011.1.30.).
이것은 완전히 요즘 속된 말로 말하면 ‘~빠, ~빨’ 수준 이상임을 보여주고 있다. 지난 고려시대까지도 저들의 말에 따르면 이미 기자가 2천년이 훨씬 넘은 이전에 이 땅에 들어와 문명교화 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금수 같은 오랑캐의 떼를 다 벗지 못하고 있다가 이조선 들어서 완전히 뼈속까지 중국인 ‘기자’로 도배하자 비로소 사람구실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http://cafe.daum.net/mookto
이조선이 원 부모인 단군을 버리고 얼마나 지독하게 이조5백년 강제점령기간 내내 중국인 기자를 뿌리조상으로 섬긴 기자의 나라였는지, 이조선 말기 외국인이 쓴 ‘은자의 나라’라는 책을 보면 여실이 드러난다.
1801.11.25. 중국의 황제에게 보낸 글에는 인사말과 뒤에 다음과 같은 글이 보인다.
"(청나라)폐하께서도 아시는 바와 같이 은나라의 유민들이 동방으로 이주(서기전1122.)한 이래로 이 소국(이조선)은 예법에 적힌바 모든 것들, 이를테면 정의와 충성을 틀림없이 이행하고 자신의 임무에 모두가 성실하기로 항상 남다른 바가 있었습니다."
또 1802.1.25. 기독교(천주교)에 대한 왕의 포고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온다.
" ‘기자’에 그 머리를 두고 있는 이 왕조(이조선)는 개국 4백년 이래 2천여리의 전강토(疆土)에서 태평성세를 누려 왔다."
(빌리월이 그리피스 지음<은자의나라 한국> 53쪽, 1882. 초판)
위 글을 풀어보면 천주교(예수교) 객귀가 이조선 땅에 들어와 ‘예수 믿으세요’ 라고 하며 ‘예수천국, 불신지옥’ 외치고 다니자 이조선 정권이 대안으로 내놓은 것이 ‘우리는 기자의 문명개화된 문화로 이미 고도의 정신문화와 물질문명을 구가하고 있으니 예수 객귀의 가르침은 필요 없다’는 것이다. 결코 자기를 낳아주고 길러준 단군의 가르침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외국에서 들어온 중국 객귀 ‘기자’의 은혜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중국 주나라가 파견한 조선총독, 기자를 부모로 삼고 중국사대노예의 공자유교를 국시로 하여 개국한 이조선 정권의 정체를 보다 직접적으로 확인 할 수 있는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이조선을 열고, 기초를 다지고, 전성기를 이룩한 이성계, 이방원, 세종의 정신세계를 읽을 수 있는 기록이다.
-이조태조 이성계의 정신세계
"우리 국가가 삼국(三國)을 통일한 이후로 큰 나라 섬기기를 근실히 하여, 현릉(玄陵=공민왕)께서 홍무(洪武) 2년에 명(明)나라에 복종하여 섬겨 그 올린 표문(表文)에, ‘자손만세(子孫萬世)에 이르기까지 영구히 신하가 되겠습니다.’ 하였으니, 그 정성이 지극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이 뜻을 계승하여 세공(歲貢)의 물품을 한결같이 조지(詔旨)에 의거했으므로, 이에 (명나라)황제가 특별히 고명(誥命)을 내려 현릉(玄陵)의 시호(諡號=공민왕)를 내려 주고 전하의 작(爵)을 책봉하였으니, 이것은 종사(宗社)의 복(福)이요 전하의 성덕(盛德)입니다(이조태조실록-위화도회군반란을 정당화 하는 이성계의 상소문 중에서)."
-이조태종 이방원의 정신세계
“조정의 내사 황엄, 전가화, 해수, 한첩목아와 상보사 상보기원 등이 오니, 산붕(山棚)을 만들고 나례(儺禮)와 백희(百戲)를 베풀고, 임금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모화루(慕華樓)에서 영접하였다. 사신(使臣)이 경복궁(景福宮)에 이르러 칙서(勅書)를 선포하였다. 칙서에 이르기를,
“조선 국왕 이(태종 이방원)에게 칙(勅)하노라. 취(取)해 보낸 말 3천 필은 이미 계속해 도착하였다. 지금 왕에게 화은(花銀) 40개(箇), 매개(每箇)의 중량(重量)이 25냥(兩) 합계 1천 냥과 저사(紵絲) 50필(匹), 소선라(素線羅) 50필(匹), 숙견(熟絹) 1백 필(匹)을 내려 준다.” 하였다.
임금(태종 이방원)이 칙서(勅書)에 절하고 나서, 서계(西階)로 올라가 사신 앞에 나아가서 꿇어앉았다.
황엄이 성지(聖旨)를 선유(宣諭)하기를,
“네가 조선국(朝鮮國)에 가서 국왕(國王)에게 말하여, 잘 생긴 여자(女子)가 있으면 몇 명을 간택(揀擇)해 데리고 오라.” 하였다. 임금(태종 이방원)이 고두(叩頭- 머리를 땅에 박았다는 듯)하고 말하였다.
“어찌 감히 마음을 다해 명령을 받들지 않겠습니까?”
(이조태종실록 15권, 8년)
태종 이방원의 위 기사에서 모화루慕華樓 라는 말이 나온다. 중화(중국)를 사모하는 누각이라는 소리다. 이조선 말까지만 하더라도 지금의 서대문 지역에는 영은문迎恩門이라는 것이 있었다. 지금은 주춧돌만 있는데 이 말뜻은 은혜를 베풀어 주신 중국의 사신을 영접하는 문이라는 뜻이다. 다음은 성군이라는 세종의 기사다.
-이조선 세종의 對중국 정신세계
“예조에서 계하기를,
“지난 7월 18일에 (명나라)황제께서 승하하셨사오니, 이번 9월 초하루 소복(素服)과 흑각대(黑角帶)와 오사모(烏紗帽)로 거애(擧哀)하시고, 초4일에 성복(成服)하시고, 초7일에 복을 벗으시는 것입니다... 임금이 지신사 곽존중 에게 명령하여 말하기를,
“ 태조 황제 의 유조(遺詔)에, ‘천하 신민은 상복을 입은 지 사흘 만에 벗으라.’ 하신 것은 그것이 주현(州縣)의 이민(吏民)을 위하여 말씀하신 것이요, 조정에서는 반드시 그와 같지 아니하리라...군신(君臣)의 의리가 지극히 무거운 것인지라, 대행 황제의 상복을 나는 차마 사흘 만에 벗지 못하겠고, 또 고례(古禮)에 외정(外庭)에서는 역월(易月)의 제도를 행하였지만, 궁중에서는 삼년상을 실행하였으니, 이제 여러 신하들은 3일 만에 벗지만, 나는 3일 후에 권도(權道)로 흰옷을 입고 정사를 보다가 27일에 이르러 길복(吉服)을 입을 것이니, 근신(近臣)도 역시 마땅히 27일에 벗게 하되...끝내 27일의 제도를 실행하였다(이조세종실록, 25권, 6년).”
위 기사는 세종이 상복입는 제도가 원래 3일 만에 벗는 것이 맞다고 하는데도 명나라 황제와의 군신관계가 지극히 중요하니 더 오래 섬기기 위해서 27일간이나 상복을 입어 명나라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보이겠다고 고집부리는 내용이다.
6) 소결론
이와 같이 이조선 정권은 자신들의 공자유교의 나라 ‘이조선’을 위해서 나라와 조상을 중국에게 팔아먹었고 위대한 조상님들의 제국의 역사를 말살해 버렸으며, 중국에서 파견한 조선 총독, 기자를 혈통적으로 조상부모로 하여 성姓을 갈고 자기를 낳아주고, 먹여주고, 길러주고, 입혀준 생부모, 단군은 내쫓아 버렸다.
또한 정치적으로도 이조선 정권은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고 오직 명나라를 성姓으로 쓸 때만 존재할 수 있다는 의미로 ‘유명조선有明朝鮮’ 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성은 ‘명’이요 이름은 ‘조선’ 이라는 뜻이다. 성이 ‘단군’이요 이름이 ‘조선’이라는 말이 아니다. 명나라라는 성을 가지고 있는 조선이라는 말이다. 그냥 ‘조선’이라고 하는 것은 부모인 명나라에게 폐륜을 저지르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이 명나라 뒤에 따르며 명나라가 시키는 것만 가능하지 적극적, 능동적으로 무엇을 한다는 것은 상상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스스로 뭘 한다는 것은 곧 명나라에 반역하는 것이다.
이조선은 더 나아가서 자국의 이름을 스스로 부르지도 못하였다. ‘동국, 동방, 해동, 동사’ 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중국에 대하여 감히 자기 나라 이름조차도 부르는 것을 불경스러워 했다. 감히 고개를 들어 쳐다 볼 수 없는 중국 명나라의 변방 동쪽에 있는 보잘 것 없는 나라라는 것이다. 이런 자기굴종, 비하적 정신세계는 오늘날에 까지 그 잔재가 남아 있는데 우리의 어머니들은 직접 당신의 이름을 내세워 표현하지 못하고 ‘아무개 엄마, 아무개 댁’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조선 정권은 사상적으로는 공자유교의 나라를 세워, 부모 없는 민족, 뿌리 뽑힌 나라를 만들어 사대노예굴종의 역사를 5백년동안 이끌었다.
여기까지는 '기자조선과 동북공정 3편중' 1편입니다. 다음에 2편, 3편을 계속하여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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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바로 알면 세상이 바로 보입니다.
깨어있는 푸른역사 삼태극 http://cafe.daum.net/mookto
첫댓글 이성계가 최영의 명 받아서 반란 하지 않고 요동 도모 해어면 참으로 쉬운 일인데 그 당시에 요동은 주인이 없는 상태 인데 참으로 통탄할 일 이다 어느세월에 저 요동 도모 하리요
이성계! 정말 원통한짓을한 놈. 오늘의 이가와 상통하는 자가 아닐런지....?
아직도 이런 기자조선을 실채화 하는 역사서적이 버젓이 서점에서 팔리고 있죠.
슬픕니다.
위에서 말한 은의 유민이 기자인가? 백이와 숙제는 확실히 우리말의 이두 표현이기에 우리의 한 갈래임이 맞는데
대만 학자들이 대륙 중원의 근원인 뿌리 민족은 고구리,백제,신라,왜 4대민족을 중원 민족의 근본으로 봅니다 4 괘라고 하지요 그 다음 동이,서융,남만,북적 4대 민족을 합쳐서 8괘라고 하지요 그래서 대조선 8도 라고 합니다
그러면 중화족의 지나족은 가상에 민족이고 화하족은 극 소수의 민족 입니다,,,대조선 망한후 손문이 대조선에 역사를 바꾸어치기 하여 역사를 조작 했습니다 중공에 역사는 역사조작한 시점이 중공에 역사 시작으로 한 100 여년 됩니다
그래서 역사 자료방 접근금지 시키고 역사자료 공개 하나도 안 하고 동북공정으로 자료 조작 된 것만 발표 합니다 중공은 유물,유적도 접근금지 시키고 사진 촬영도 금지라 중공
->은 역사가 없기에 금지 조항이 많조 그 금지 조항이 증거로 역사가 없다는 것이조,,중공 베에징 징화 학교의 역사담당교사인 위안텅페이씨의 양심선언은 중공에기술된 역사서중 진실은 5%도 안 되고 나머지는 완전한허구라고 발표 했습니다 역사 조작이 얼마나 심하고 심하면 양심선언 할 까요,,,중공은 만리장성을 축으로 북방 유목민족 남방 농경민족의 대결이 통일 융합 되어 중화족이 되었다고 동북공정 합니다 거기에 속으면 안 되지요 95%이상의 허구의 역사서인 위서로 그 위서에 주눅들은 강단학자들이 문제조 손문은 동이 제후국중 동이 문화색이 적은 제후국만 골라 역사조작의 맥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왜놈도 같이 역사를 합작하
->여 역사를 왜곡 했다는 것이조 일제의 조선총독부 왜놈은 조선사 편수회를 만들어 역사를 조작 합니다
대륙에 역사를 반도의 역사로 축소 조작이지요 거기에는 기준이 있조 사대하는 민족 되어야 식민지적인 삶에 반발과 분노를 죽이고 노예적인 식민지적인 삶을 수긍 잘하게 역사조작의 좋은 소설은 조상대대로 사대하는 나라면 딱이조 그래서 상고사를 없애고 단군신화로 축소 시킵니다 그리고 대조선은 반도에서 조선이 되어 사대하는 나라 하나로는 효과가 없고 반감 살 요소가 있으니 전부 고쳐라 하여 기자조선을 만들고 삼국의 대륙 통일을 반도 통일로 축소 조작하고 고려도 자연히 반도에서 조공 받는 것에서 반대로 조공 하는 나라
->가 됩니다
조선사 편수회에서 만들어준 역사서 해방후 얼마나 잘 만들었는지 검증하고 수정하여 역사서 보급이 상식이고 원칙이나 그런거 없이 세작 이병도는 그대로 답습하여 보급 했다는 것이 분노를 하게 합니다
그 검증 안된 반도사관 역사서는 완전한 허구의 위서로 절대로 믿어서는 안 되는 것을 강단학자들은 정사라고 우기면 대륙에 증거들에 연구 할 생각은 안하고 반도사관 정사가 있으니 처더볼 팔요가 없다고 하더군요 이 얼마나 식민지 노예적인 삶을 수긍을 얼마나 잘 했는지 쪽발이에게 상 받아야 합니다,,,
반도땅과 연결된 역사서 이야기는 우선은 절대로 믿으면 안 됩니다 쪽발이 왜놈이 만들어준 역사서니 ,,,,,,,
대한민국에서 금과옥조로 여기는 삼국사기, 삼국유사가 저렇게 손이 탄 역사서라니 통탄할 노릇입니다. 500년동안 중국을 사대 했던 꼬락서니를 보니 참 챙피하네요. 이씨조선에서 수거했던 금서들이 상당수 일본 정창원에 있을거라는 얘길들었습니다. 머지않은 날에 우리민족의 손으로 넘어와서 천손민족의 명예를 회복하는 근거가되리라 기대해봅니다. 머지않은 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