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5:21]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저편으로 건너가시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다시 저편으로 건너 가시매. - 돼지 몰사 사건이 발생했던 위치가 갈릴리 호수 동편이므로 건너편이라고 할 때 서쪽 해안 곧 가버나움 지경으로 추측된다... 이곳은 바로 갈릴리 선교의 전진 기지였다. 그곳에서도 역시 큰 무리가 모여들었다. 거라사 지방에서는 떠나줄 것을 요구했지만 갈릴리 지방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예수의 인기를 보증해 준다. 바닷가에 계시더니. - 이 표현은 바닷가에 도착한 시각에 나오는 다음 사건이 발생한 시각에 간격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바닷가가 많은 군중들을 향해 말씀을 가르칠 수 있는 용이한 지역이었으므로 이곳을 자주 당신의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셨다....[막 5:22]"회당장 중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회당장 중 하나. - 이는 "한 회당장"으로 번역될 수 있다. 따라서 그는 가버나움에 있는 한 회당장으로 이해된다. 당시 회당의 조직은 회당장, 핫잔, 랍비 그리고 평신도로 구성되어 있었다.
"집회의 우두머리"로 일컬어지는 회당장은 건물을 관리하며, 예배 순서의 작성 및 질서 유지, 심지어 재판과 같은 사무 증을 관할하던 장로 출신의 지도자였다. 이들은 제사장 계급의 상대적 실추로 인해 소위 종교 민주화를 통해 등장한 평신도 계급들로서 이들의 등장은 곧 종교적 관심을 일반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제사장은 아니지만 예배를 주관하고 회당을 관리하며 다스리는 사람들이다.
"회당장"이라는 명칭은 명예직으로서 행정적인 의무는 없으나 회중 가운데 탁월한 인물에게 이 직위가 주어지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당시 대중들로부터 상당한 존경의 대상이었다. 야이로는 바로 이들 중에 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야이로 역시 그 지방에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사람이었다고 보는데는 의심할 바 없다. 야이로. - 이는 "깨달은 사람" 내지는 "그는 빛난다"는 뜻의 히브리어 이름 "야일"의 헬라식 발음으로 이해된다.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 발 아래 엎드렸다는 것은 최대의 존경을 표현하는 것이다. 회당장의 신분이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존경받는 사회적 지위를 가졌다면 이 장면은 ① 예수를 최고의 지위로 높이는 절대 겸손의 모습니다. 사실 그 당시 예수는 일반적으로 한 새로운 랍비 정도에 불과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던 터였기 때문에 유대의 종교를 대표할 만한 종교 지도층 인사가 그 앞에 무릎 꿇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② 예수의 치료이적이 그 지방에 아주 신빙성있고 믿을 만한 소문으로 알려져 있음을 암시한다. 즉 그 지방의 존경받는 회당장이 기적을 요청한 사실은 예수의 이적 행위에 대한 공적인 신뢰감을 증명하는 것이다. ③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철저한 믿음과 확실한 소망을 가지고 취한 회당장의 신앙적 행동을 보여 준다. 회당장이 직접 바닷가에 많은 무리가 모인 곳으로 예수를 찾아왔고 그러한 행동에 옮기기까지는 예수에 대한 믿음이 뒷받침되지 않고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막 5:23]"많이 간구하여 가로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하거늘.." 많이 간구하여. - 회당장은 마치 자신이 죽을 위기에 처한 자처럼 필사적으로 거듭 반복해서 예수께 간절히 매어달렸다.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 회당장이 예수께로 온 목적을 밝히고 있다. 이유는 "어린 딸이 다 죽게 된" 때문이다. 여기서 "어린 딸이란 조그마한 여아를 깊은 애정으로 부를 때 사용하던 말이다.
이를 통해 야이로의 자식에 대한 애끊는 심정을 엿볼 수 있다. "죽게 되었사오니" 지금 즉음이 문 앞에 서 있을 만큼 그 병세가 최악의 상태임을 시사해 주고 있다. 물론 그 딸의 병명은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지 않다. 누가 복음에서는 회당장이 직접 말하지 않고 기록자 누가가 담담히 설명하고 있는데, 어린 딸의 나이가 12살임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회당장은 다만 예수께서 자기 집으로 가주기만을 간청한다. 마태복음에서는 "내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말함으로써 절망적인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키고 있다. 마가와 누가복음은 "죽게 된 지경"을 말하고 마태복음은 이미 죽은 것으로 묘사한다. 이 같은 차이점은 마태가 마가복음에도 뒤에 기술되고 있는 이미 딸이 죽었다는 사실을 본시점과 종합하여 서술한 째문인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어쨌든 세 복음서의 공통된 점은 사태가 매우 급하다는 것이다. 손을 얹으사. - 회당장 야이로는 예수께서 그 손을 딸의 몸위에 얹으면 곧 회복될 것이라는 믿음을 간직하고 있다.
실로 회당장의 간청은 확신적이고 매우 구체적이다. 이는 병 치유에 대한 전권을 인정한 것이다. 여기 손을 얹어 안수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바라는 행위이자 치병을 이한 일반적 행위로 알려져 있다. 회당장의 이 같은 안수에서 요청은 예수의 능력과 권위를 온전히 인정하는 것이며 그의 은혜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 여기서 "구원을 얻어"(소데)란 "구원하다", "보전하다", "놓아주다", "병을 고치다"는 뜻을 지닌 부정과거 가정법 수동태로서 예수로 인한 병의 회복, 곧 건강을 기원한 말이다. 따라서 본문을 재해석하면 " 건강을 회복하여 살게 하소서"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