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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탄은 슬픔과 상실을 느끼는 감정
"후회, 버려진 느낌, 고통, 무기력, 절망, 향수, 비애, 우울, 갈망, 상실, 애통, 낙심, 비관"
놓아버리면 용기, 받아들임, 사랑, 평화가 올라온다.
비탄은 우리 모두의 경험이다.
비탄 속에서는 상황이 너무 어렵게 보인다.
절대 이겨내지 못할 것으로 느끼기도 한다.
애정을 주지도 못하고
받지도 못한다.
낭비해버린 모든 세월같은 생각만 든다. 비탄은 슬픔과 상실을 느끼는 감정이다. 쓸쓸함이다. 무엇을 하기만 했어도...를 되뇌이는 감정이다. 후회, 버려진 느낌, 고통, 무력감, 절망, 향수, 비애, 우울, 갈망, 돌이킬 수 없는 상실, 애통,비통, 낙심, 비관...
비탄은 어떤 신념체계나 인간관계, 능력, 사회적 역할, 희망을 잃은 탓에 생기거나, 삶에 대한 태도 전반, 외부환경이나 제도 때문에 생길 수 있다. 삶에 대한 태도전반, 외부환경이나 제도 때문에 생길수 있다.
비탄은 이런 느낌이다.
"이 일은 절대 극복하지 못할거야"
"너무 힘들어. 노력했지만 아무 도움이 안돼"
고통에 상처받기 쉬운 감정이 내면에 있어서,
바깥 세상을 보면
이러한 감정을 강화하고 정당화할 상처만 잔뜩 보인다.
도와줄 사람을 찾아서 운다.
스스로는 상황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다른 누군가가 자기를 위해 무언가를 해줄 수 있을지 모른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무의욕과는 전혀 다르다. 무의욕 상태는 아무도 도움이 안된다고 여긴다.
비탄 허용하기
우리들의 대부분은 비탄을 억제해 품고 있다. 특히 남자들은 비탄이라는 감정을 숨긴다. 울면 남자답지 못하다는 소리를 듣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억제한 비탄의 양에 두려움을 느낀다. 넘쳐나는 비탄에 압도당할까봐 겁을 잔뜩 먹는다.
"한번 울기시작하면 절대 못 그칠거야
"세상에 비탄이 가득해, 나도, 가족도, 친구들의 인생도 모두 비탄해
"오! 이루 말할 수 없는 삶의 비극이여. 그 모든 실망, 박살난 희망이여
억제한 비탄은 심인성 신체질환과 기타 건강문제의 원인이 될때가 많다.
감정을 억제하는 대신
감정이 올라오게 놔두고
그 감정을 항복하면
비탄의 수준에서
받아들임의 수준으로
단숨에 올라갈 수 있다.
어떤 상실에 대해
비탄이 계속되는 것은
상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저항하면서
비탄만 쏟아지도록 놓아두기 때문이다.
어떤 감정이
지속되는 것은
감정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저항하기 때문이다.
비탄을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이미 자부심수준으로 올라간 것이다.
그러면 할 수 있다,
해결할 수 있다는 감정에 힘입어
용기로 올라간다.
마음속 감정을 직시해
놓아버릴 용기가 있으면
그 힘으로 받아들임 수준에 도달하고,
최종적으로는 평화의 수준에 이른다.
오랫동안 붙잡고 있던
비탄을 충분히 놓아버리고 나면,
얼굴 표정이 바뀐 것을 친구와 가족이 알아본다.
발걸음도 가벼워지고 젊어보인다.
비탄에는 시한이 있다는 사실에서
그것을 직시할 용기와
자발성을 얻을 수 있다.
비탄의 감정에 저항하지 않고
완전히 항복하면,
10분에서 20분쯤 지나면
감정이 줄어들어 없어진다.
그후 감정이 멎어 있는 시간은 일정하지 않다. 비탄이 생길때마다 계속 항복하면 결국에는 비탄이 없어진다. 완전하게 감정을 경험하도록 자신을 놓아두는 것이 전부다. 비탄의 압도를 10분에서 20분동안 견디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어느 결에 비탄이 사라진다.
비탄에 저항하면
비탄은 이어지고
또 이어진다.
억제한 비탄은 수년을 갈수도 있다.
비탄을 직시할때는
스스로 비탄에 빠지는 것 자체가
창피하고 쑥스럽다는 점을 인정하고
놓아버려야 한다.
남자들이 특히 그렇다. 감정에 대한 두려움을 포기하고 넘쳐나는 감정에 압도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을 포기해야 한다. 감정에 대한 저항을 놓아버리면 감정을 빨리 통과할 수 있다는 점을 알면 도움이 된다.
예로부터 여성들이 경험에서 얻은 지혜의 말이 있다. "울고 나면 기분이 좋아진다" 이말이 사실임을 깨닫는 남자들이 많다. 경험상과거 상황에 대한 비탄이 올라오도록 놓아두자 지끈거리던 두통이 놀랍게도 사라졌다. 비탄이 올라올때면 남자는 울지 않는다라는 문장도 함께 떠올렸다. 남자는 울지 않는다라는 자부심을 놓아버리고 나니, 이번에는 일단 울기 시작하면 절대 그칠것 같지 않다는 공포로 올라왔다.
이런 공포가 사라지자 바로 분노가 일었다. 남자에게 감정을 억제하라고 강요하는 사회에 대한 분노였고, 남자는 감정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대한 분노였다.
이런 분노를 놓아버리면 용기의 수준에 도달했고, 그러자 필요한대로 울 수 있었다. 두통에서 해방되었을 뿐 아니라, 흐느낌의 급류가 빠져나가자 깊은 평화가 자리를 잡았다. 이후로는 비탄이라는 것을 피할 필요가 없었다. 비탄이 올라오도록 충분히 놓아두어 억제했던 에너지에서 완전히 벗어난 남자는 평화로워지고, 자신의 남성성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자기의 남성성이
이제 더욱 완전함을
깨닫는다.
같은 남자인 점은 여전하지만, 이제는 자신의 감정과 접촉해 감정을 해결할 수 있다. 그 결과 남자는 보다 일에 적합하고 보다 능력있고, 다방면으로 균형이 있고, 보다 성숙하고 타인을 보다 잘 이해할 능력이 있고 보다 동정심많고 보다 다정해진다.
심리적 측면에서
모든 비탄과 애도는
애착에서 비롯한다.
애착과 의존이 생기는 것은
내면이 불완전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우리가
물건과 사람, 관계, 장소,
개념을 쫒는 것은
내면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다.
내면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그런 대상을 활용하다보니,
대상을 아예 내것이라고 생각한다.
대상에 대해 에너지를 쏟고
외부 대상을 내것으로
보던 것에서 나아가
그것들이 정말로 나의 확장이라고 본다.
물건이나 사람을 잃으면
자신의 자아를 잃은 것이자
감정을 구성하던 중요한 부분을 잃었다고 여긴다.
물건이나 사람이 자신의 가치를 대변하며,
그것을 상실하면 가치가 떨어진다고 느낀다.
물건이나 사람에 투자한
감정 에너지가 클수록 상실감이 크고,
의존적으로 맺은 유대는 잃는 아픔도 크다.
애착이 있으면
의존이 생기고,
의존은 그 특성상 상실의 공포도 내포한다.
사람마다 내면에는 아이, 부모, 어른이 있다. 그래서 비탄이 올라올때 이렇게 자문하면 좋다.
"나의 내면에 있는 아이와 부모, 어른 중
어느 것이 감정을 일으키고 있을까"
예를들면 내면의 아이는 사랑하는 애완견에게 무슨 일이 생길 것같아 겁이 나 '무슨일이 생기면 견딜 수 있을까"라고 생각한다. 내면의 어른도 비탄을 느끼지만 어른은 불가피한 일을 받아들인다. 고양이나 강아지가 죽지 않을 수는 없다. 영구적일 수 없는 것이 삶의 현실이란 점을 내면의 어른은 유감스럽지만 받아들인다. 젊음은 영원하지 않고 낭만적인 관계는 평생을 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며 애완견은 언젠가 죽을 것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상실 감당하기
상실을
실제로 경험하기에 앞서
애착의 본성으로 인해
상실을 두려워하는 상태가
먼저 찾아온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상태를 대개 둘 중 하나의 방법으로
방어한다.
하나는
유대를 강하게 만들기 위해
끈질기게 시도함으로써
애착의 강도를 높이는 방법이다.
이런 접근법은
'유대가 강할수록 잃을 가능성이 적을것이라는 공상'에 근거한다.
하지만 그 반대다.
상대방은
자기가 구속과 통제를 받는다고 느끼는 만큼
벗어나려고 하기 때문이다.
상실의 공포를
방어하는 또 다른 방법은
부인하는 심리기제를 이용하는 것이다.
부인하는 것은
타조가 위험을 피한다고
모래에 머리만 처박는 것과 같다.
심각한 질병이 있는 사람이
갖가지 증상을 무시하고
진단, 치료받기를 회피한다.
우리 주변의 다양한 모습속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을
직면하기 거부하는
부인기제를 볼 수 있다.
사방에
온갖 경고 표시가 있지만
고개를 들어
제대로 보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실직 위기에 놓인 사람은
자신이 일자리를 잃을 것이라 생각하지 못하기 쉽고,
이혼 위기에 놓인 부부는
적절한 행동을 취하지 못한다.
심각한 병이 있는 사람은
갖은 증상을 무시하며
치료받기를 회피한다.
정치인은
사회문제를 보지 못하고
그저 문제가 없어질 것이라는 기대만 한다.
나라전체가 존립이 위태로운 상태를 알아채지 못한다. 운전자는 엔진 오작동으로 인한 불길한 경고신호를 무시한다. 이런 식으로 우리 모두가 저마다 다가올 문제가 주는 경고신호에 주의하지 않았다가 후회한 적이 있다.
상실의 공포를 해결하려면
자신의 삶속에서
타인이나 물건이 갖는 용도를
잘 살펴보아야 한다.
어떤 감정상 필요을 충족시키는데 쓰일까?
특정 물건이나 사람을 잃는다면
어떤 감정이 생길까?
상실이 예상될 때
상실감과 관련된 다양한 공포를 해결하는 길은
공포가 나타내는
감정 복합체를 해체한 다음,
낱낱의 감정요소를 놓아버리는 것이다.
정든 애완견과의 이별
예를들어 여러해 동안 정든 애완견이 있다고 하자. 이 녀석은 분명 갈수록 늙는다. 그렇지만 녀석이 늙는다고 생각하기 싫다. 언젠가는 죽는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아 생각자체를 피한다. 자신의 이런 모습을 발견하고 이런 감정이 경고 신호임을 깨닫는다. 또한 자신의 감정이 처한 상황을 스스로 외면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래서 이렇게 자문한다.
내 삶에서 개는 어떤 의미일까?
녀석은 감정면에서 어떤 봉사를 할까?
사랑, 동료애, 헌신, 재미, 기분전환,
개를 잃으면 이런 감정상의 필요가 채워지지 않을까?
이런 점을 살펴보면서 공포의 일부를 인정하고 포기할 수 있다. 공포를 놓아버리고 나면, 부인기제에서 빠져 녀석이 영원히 살것처럼 자신을 둘러댈 필요도 없어진다.
비탄이나 애도를 따르는
또 다른 감정은
분노다.
소중한 것을 잃으면
격노하는 감정이
빈번하게 생겨
이 감정을
세상이나 사회,
사람들에게 투사하기도 하고,
우주가 어떤 곳인지는
신에 달려있다는 생각에
결국에는 신에게 투사하기도 한다.
삶속의 만남이나 소유물은
오래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데서 분노가 나온다.
우리에게 딸려있는 것 중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는 육체조차도
결국에는 포기해야 하는 것임을
모두가 알고 있다.
사람들은
어떤 것이 자신에게 중요하거나 익숙하면
이것이 자기에게 영원히 딸려있을 것처럼 느낀다.
따라서
이런 착각을 위협받으면
분노, 자기연민이 생기는데,
이런 감정으로 인해 억울함이 오래갈 수 있다.
세상 돌아가는 방식을 바꾸고 싶지만
바꾸지 못한데서 오는
무기력한 격노다.
존재의 이런 실상과 직면하면
중요한 것을 잃었을 때
각자의 철학적 입장이 뒤바뀐다.
한번의 중요한 상실로
모든 애착과 본성을 깨우칠 수도 있지만,
모든 관계는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는 명백한 사실을 다시 부인하고
상실을 보상받기 위해 기존 유대를 맹렬하게 강화하기도 한다.
한편
피할 수 없는 상실을 부인하려고
끝까지 조종을 시도하기도 한다.
착각속에서
마음은 상실을 피하기 위해
전술을 개발하려 든다.
이 전술은
더 착하거나 더 열심히 일하거나
더 정직하거나 더 인내하거나
더 충직하려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종교를 가진 사람들의 경우는
약속과 협상으로 신을 조종하려는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
인간관계에서는
과도하게 보상하려는 행동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결별을 막으려는 노력으로
배우자에게 잘해주고,
다정하게 굴고, 배려하기도 한다.
무신경하던 남편이
문제의 근본원인을 알아보는 대신
갑자기 선물과 꽃을 사들고 귀가하기 시작한다.
부인에 실패하고
조종이 잘 먹히질 않고
두려움을 겪고 나면
암울함 자체,
즉 애도와 비탄에 빠지는 과정이 실제로 일어난다.
놓아버리는 과정을 통하면
이 모든 감정단계를
훨씬 빠르게 통과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는
불가피한 비탄을 항복하고
자발적으로 저항을 놓아버려
과정이 스스로 지나가
끝이 나도록 놓아둔다.
또한
비탄에 대한
저항을 놓아버리겠다고
결정할 수 있다.
부인하고 저항하는 대신
대뜸 뛰어들어 극복한다.
애견을 잃거나
관계를 잃은 일에 대해
잘 우는 것이다.
비탄의 감정은
항상 다양한 죄책감과 결부된다.
상실은 벌을 받은 것이라거나
마음가짐이나 행동이 달랐으면
그런 일을 미리 막았을 거라는 착각에서 비롯된다.
죄책감을 포기하지 않으면
죄책감은
분노를 되살리는
연료를 공급한다.
분노를 인정해
포기하지 않으면
분노는
원망의 형태로
주변사람들에게 투사될 수 있다.
분노는
또 다른 상실을 일으켜
사태를 악화시킬 수 있다.
이런 일은 부부사이에서 아이가 죽었을때 자주 일어난다. 아이를 잃은 부부의 이혼률이 90%에 이른다는 보도가 있다. 원망을 투사한 탓에 아이를 잃은 심각한 상실이 이혼이라는 또 다른 심각한 상실을 낳으며 악화된다. 이런 식으로 반응한 예로 40세 여상의 경우가 있다. 그녀는 뭐든 잘해주고 배려하는 남편과 함께한 20년의 결혼 생활이 매우 만족스러웠다. 그러던 중 막내아들이 백혈병이 걸렸다.
아들이 죽자 비탄과 애통에 빠졌는데, 격분반응을 잃으킨 것이 더 큰 문제였다. 격분은 증오로 나타났다. 의사들을 증오했고, 병원을 증오했다. 신을 증오했고 남편과 남은 자식들을 증오했다. 격노가 통제할 수 없을만큼 커져, 육체적으로 사납게 굴며 상대를 위협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난폭한 행동을 제압하기 위해 몇번이나 경찰이 출동했다. 결국 자식들은 그 난리와 육체적 학대, 위협적 감정상태에 질려 집을 나갔다. 아내의 격노문제를 해결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한 남편에게도 아내는 마찬가지로 격분했고, 사납게 공격한 적도 여러번 있었다.
마침내 절망과 자포자기에 빠진 남편이 집을 나갔다. 이 수라장은 결국 이혼으로 마무리되었고, 여자는 가정을 잃었다. 이후 거의 5년이 지나서야 격분이 가라앉았고 , 그 시점에서 여자는 삶 전체가 망가져 처음부터 다시 새 삶을 꾸려야 했다.
부정적 감정을
모두 통과하고 항복하고
놓아버리고 나면,
마침내 감정이 해소되면서
전처럼 고통을 겪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다.
받아들임은 감수와 다르다. 감수하면 여전히 이전 감정의 찌꺼기가 남아있다. 감수할때는 상실을 인정하는 것을 주저하고 미룬다. 감수는 "좋아하지는 않지만 참아야지"하는 것이다.
받아들임과 함께
상실에 대한 저항을 포기한다.
따라서 받아들임 징후 중 한가지는
평정이다.
받아들임과 함께
분투가 끝나고
새 삶이 시작된다.
부정적 감정에 묶여 있던 에너지가 풀려나면서
그 사람의 건강한 측면이
되살아난다.
마음의 창조적 측면이
새로운 삶의 기회와 더욱 성장하고
경험할 여지를 얻을 기회를 개척하면서
새삼 살아있다는 느낌을 준다.
익명의 알코올 중독자들 모임에서 하는 "평정기도"는 많은 이가 따르는 유명한 가르침이다.
평정기도
"신이시여!
바꿀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정과
바꿀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와
그 차이를 아는 지혜를 얻게 해주소서"
애도와 상실에 딸려오는 갖가지 감정을 통과하지 못하면
각 감정이 만성 정체에 빠질 수 있다.
우울이 장기화되고 부인이 장기화되어
고인의 죽음을 사실상 부인할 수 있다.
또한 노상 죄책감에 빠져 있거나 상실에 따르는 감정 통과하기를 거부하면 비탄 반응이 길어지고, 몸에도 병이 생길 수 있다. 이런 과정의 이면의 기제는 뒤에서 마음과 몸의 관계를 다룰때 다시 설명하겠다.
포기하지 않은 감정속에
에너지를 억제하면
그것이 내분비계와 신경계에서
에너지 균형이 맞지 않는 현상으로 다시 나타나,
침술경락상의 생명 에너지 흐름에 손상을 입힌다.
여러 장기에 병이 든다.
주변의 누군가를 떠나보낸 사람들은
일반사람들에 비해 사망률이 훨씬 높으며,
특히 배우자가 죽은 사람의 경우
배우자 죽음이후 1~2년 사이에
높은 사망률을 기록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비탄과 관련해
죄책감이 생기는 원인 중 한가지는
사랑하는 이가
자신을 떠난 것에 대한 분노다.
의식적으로 품자니
비이성적인 것같아
흔히 억제하는 감정이 분노다.
반대로
떠난 사람의 좋았던 점을
상상속에서 더 좋게 부풀리기도 하는데,
이때 두 심리의 불일치가
죄책감을 악화시킨다.
그렇게 멋진 사람한테
어찌 화를 내겠는가?
또는
신이 우주의 입안자로서
그런 비극이 일어나도록
방치한 것에 대해 화를 내며
죄책감을 느끼기도 한다.
여러가지 증상으로 몸이 불편한 60세 여성이 진료실에 들어왔다. 천식발작, 알레르기, 기관지염, 잦은 폐렴증상과 기타 호흡곤란 증세가 있었다. 심리치료 중에 22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셨을때 기이하게도 아주 무덤덤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자신이 할일인데도 어머니 무덤에 세울 비석을 주문하지 않았던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이런 정보로 볼때 그녀는 어머니에게 극도로 의존적이었으며, 이 모든 의존 욕구를 채워주지 않고 떠난 어머니에 대한 애증이 있었다.
자신을 떠난 어머니에 대해
분노가 치밀었다는 죄책감과
이와 결부된 완강한 부인상태에서 벗어나는데만
여러 달이 걸렸다.
어머니에 대한 분노가
마음속에서 자기 자신을 겨냥하면서
결국 분노는 병이 되어 나타났다.
그런데
이 병은
자신은 무력하니
엄마가 절실하다는
바람의 표현이기도 했다.
엄마를 잃어
울고 싶은 욕망을 억제한 것이
숨을 쉬지 못하겠다는 느낌으로
계속 나타났다.
또한
어머니에게 느끼는 사랑과 증오때문에
자신을 미워했고
이렇게 억압된 감정의 총합이
호흡기 증상과 통증같은
"심인성 육체'질환으로 나타났다.
뒤늦게나마
애통해 하는 과정을 거치자,
상실로 인한 비탄반응이
표면으로 올라왔다.
그런 감정을 거치는 일에 대한 저항이 얼마나 컸는지,
그런 저항이 어떻게 육체적 증상을 일으켰는지를
이제 스스로 또렷이 인식했다.
결국 그녀는 직업훈련까지 받아 호스피스 프로그램에서 임종을 다루는 치료사가 되었다.
비탄 예방하기
지금까지 이야기한 심리과정의 본성상, 극심한 슬픔과 상실, 그에 따른 병적 반응들은 초기에 인식하여 그 반응과 연관된 감정을 항복한다면 예방할 수 있다. 앞에서 보았듯이 모든 큰 슬픔과 상실은 애착에서 기인하며 모든 관계는 일시적이라는 점을 부인하는데서 시작한다.
삶을 잘 살펴보고 자신이 어떤 것에 애착을 갖는지 찾아낸 다음 이렇게 자문하라.
"이런 것이 채워주는 마음속 요구는
어떤 것일까?"
"잃는다면 어떻게 될까?"
"어떻게 하면
마음속 감정생활의 균형을 맞춰
마음밖 물건이나 사람에 대한
애착의 양과 정도를 줄일 수 있을까?"
외부 사물에 대한 애착이 클수록 상실을 두려워하거나 상실에 상처받기 쉽다. 왜 그렇게 스스로 불완전하게 느끼는지 자문할 수 있다.
왜 이토록 내면의 공허를 느끼면서
애착과 타인 의존이라는 형태의
해결책을 찾아야 할까?
내면에서 미숙한 부분을 잘 살펴본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이렇게 조사해 보아야 한다.
사랑을 주기보다
사랑을 받기 위해 관심을 보이는 것은 어떨까?
다정할수록
비탄과 상실에 대한 상처받기가 어렵고,
애착을 가질 필요도 덜하다.
모든 부정적 감정을 인정하고
놓아버리면
왜소함에서 벗어나
자신의 위대함을 알아보고,
주는 즐거움과 사랑하는 즐거움에서
내면의 환희가 일어난다.
때문에
상실로 상처받지 않는다.
행복의 근원을 안에서 발견할 때
우리는 세상을 잃는 상실에 면역이 생긴다.
자신의 삶을 비평적인 시선으로 살펴보면
자신이 빠져있는
모든 애착과 도피가 보인다.
그 하나하나가
미래에 아픔과 괴로움을 일으키는 근원이다.
그 중에서도
정말로 중요한 부분들은
면밀히 조사해야 한다.
이런 문제를 직시하지 못하는 예로 "은퇴증후군"있다. 이 증후군은 아이들이 자라 집을 떠나면서 자신의 역할을 잃은 여자나(빈둥지 증후군) 퇴직할 나이에 이르거나 일자리를 잃었거나 신체장애로 이전에 하던 일을 못하게 된 남자에게 일어날 수 있다.
이런 상황에 처했을때
중년기 사람들이 보이는 보통반응은
이전부터 수년간 해온 부인에서 비롯한다.
불가피한 일에 직면해
내면의 동일한 욕구를 충족시킬만한
다른 활동을
미리 계획하지 못하는 경우가 흔하다.
여기서
내면의 욕구란
자존감이나 중요한 일을 한다는 느낌
또는 누군가 자신을 필요로 하며
그로 인해 자신이 중요하다는 느낌을
얻으려는 욕구,
무언가를 기여하고 생산하려는 욕구등을 말한다.
불가피한 일을 예상해 미리 준비하면 나중에 상실로 상처를 입고 비탄에 빠지는 것보다 상대적으로 덜 불쾌하다.
연인관계도 정직하게 검토한다.
내면의 이기적인 욕구에
상대가 얼마나 보탬이 되는 걸까?
나는
나의 이득을 위해
상대를 얼마나 활용하는 걸까?
상대는
나의 행복에 보탬이 되는데,
어느 정도로 그럴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이렇게 자문하기만 하면 된다.
나를 떠나는 것이
그 사람이 가장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이라면
어떤 기분이 들까?
이 질문을 통해
내가 상대방을 얼마나 구속하고
통제하려는지가 드러난다.
그것은 애착이지 사랑이 아니다.
2500년 전에 부처는
인간의 모든 고통은 욕망과 애착에서 비롯한다고 했고,
인간의 역사는 그의 가르침이 진실이라는 증거가 되었다.
이 딜레마의 해결책은 무엇일까?
애착을 갖는 것은
우리의 왜소한 측면이다.
우리는
겁먹고 무능한 프로그램의 세트가
우리를 휘두르도록 부지불식간에 용납했는데,
왜소한 자아가 믿는 것이
이 프로그램 세트다.
이러한 프로그램들이
더 이상 우리를 휘두르지 못하도록
에너지 공급을 끊는 것이
놓아버림의 목적이다.
이렇게 할때
우리는 의식이 커지면서
높은 큰나에 대한 자각도 커질 수 있다.
우리 내면의 큰나라고 하는 것은
사랑을 구하기보다 그냥 사랑한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한계없는 사랑에 감싸여 있다는
자각이 생긴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저절로 끌린다.
"부정적 감정을 끊임없이 놓아버리면
현재의 고통이 치료되고
미래에 고통이 생기는 것을 막는다.
공포가 신뢰로 대체되고,
신뢰와 더불어
크나큰 행복의 느낌이 찾아온다.
작은 자아에 대한 의존을
큰 나에 대한 의존으로 대체하면
상실로 인한 비탄에
면역력이 생긴다.
일시적인 작은 자아가 아니라,
영원한 큰 나에서 안전을 찾는다"
익숙한 것들과 거리두며 큰나를 찾기
정직하게 모든 부정적 감정을 놓아버리고 큰나와 만나기
놓아버림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놓아버림으로 하루를 끝내라!!
첫댓글 부정적 감정을 끊임없이 놓아버리면 현재의 고통이 치료되고 미래에 고통이 생기는 것을 막는다. 공포가 신뢰로 대체되고, 신뢰와더불어 크나큰 행복의 느낌이 찾아온다. 작은 자아에 대한 의존을 큰나에 대한 의존으로 대체하면 상실로 인한 비탄에 면역력이 생긴다. 일시적인 작은 자아가 아니라, 영원한 큰나에서 안전을 찾는다
애착을 갖는 것은 우리의 왜소한 측면이다. 우리는 겁먹고 무능한 프로그램의 세트가 우리를 휘두르도록 부지불식간에 용납했는데, 왜소한 자아가 믿는 것이 이 프로그램 세트다. 이러한 프로그램들이 더 이상 우리를 휘두르지 못하도록 에너지 공급을 끊는 것이 놓아버림의 목적이다
신이시여!
바꿀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정과
바꿀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와
그 차이를 아는 지혜를 얻게 해주소서!!
심리적 측면에서 모든 비탄과 애도는 애착에서 비롯한다. 애착과 의존이 생기는 것은 내면이 불완전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물건과 사람, 관계, 장소, 개념을 쫒는 것은 내면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다.
상실 감당하기
하나는 유대를 강하게 만들기 위해 끈질기게 시도함으로써 애착의 강도를 높이는 방법이다. 이런 접근법은 '유대가 강할수록 잃을 가능성이 적을것"이라는 공상에 근거한다. 하지만 그 반대다. 상대방은 자기가 구속과 통제를 받는다고 느끼는 만큼 벗어나려고 하기 때문이다.
상실의 공포를 방어하는 또다른 방법은 부인하는 심리기제를 이용하는 것이다. 부인하는 것은 타조가 위험을 피한다고 모래에 머리만 처박는 것과 같다. 심각한 질병이 있는 사람이 갖가지 증상을 무시하고 진단, 치료받기를 회피한다.
비탄이 생길때마다 계속 항복하면 결국에는 비탄이 없어진다. 완전하게 감정을 경험하도록 자신을 놓아두는 것이 전부다. 비탄의 압도를 10분에서 20분동안 견디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어느 결에 비탄이 사라진다. 비탄에 저항하면 비탄은 이어지고 또 이어진다. 억제한 비탄은 수년을 갈수도 있다
연인관계도 정직하게 검토한다.
내면의 이기적인 욕구에 상대가 얼마나 보탬이 되는 걸까?
나는 나의 이득을 위해 상대를 얼마나 활용하는 걸까?
상대는 나의 행복에 보탬이 되는데, 어느정도로 그럴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이렇게 자문하기만 하면 된다.
나를 떠나는 것이 그 사람이 가장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이라면 어떤 기분이 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