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려를 넘어 평강으로 (빌 4:6-7)
이 시간에 “염려를 넘어 평강으로”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염려 없이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염려할 것은 늘어만 가는 것 같습니다. 국가적으로도 천안호 침몰, 소말리아 해적들의 유조선 탈취, 남북간 긴장, 일본의 독도 망언, 중국의 동북공정,, 한순간도 쉴틈이 없습니다. 성경에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이 365번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1년은 365일입니다. 그러므로 매일 매일 염려하지 않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항상 강도가 들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때문에 몇 년째 잠을 편히 자지 못하는 여성이 있었답니다. 조그마한 소리만 들려도 한밤중에 곤히 자는 남편을 깨우는 통에 남편도 잠을 설치기 일쑤였습니다. 어느 날 밤 자다가 집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습니다. 무슨 일인가 해서 남편이 아래층으로 내려가 보니 정말로 강도가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 남편은 강도를 향해 말했습니다. 뭐라고 말했을까요? “안녕하시오. 만나서 반갑소. 위층에 올라가 내 아내를 만나 보시요. 당신 만나기를 10년이나 기다리고 있었다오.” 한 번이면 될 염려를 10년 동안 한 어리석은 사람에 대한 교훈적인 이야기입니다.
잠17:22에서는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말씀합니다. 근심의 독이 얼마나 강한지 뼈까지 마르게 합니다. 염려는 자기 영육 간을 죽이는 독입니다. 노벨 의학상을 받은 카렐 박사는 “근심과 싸우는 방법을 모르는 사업가는 일찍 죽는다.”는 말을 했습니다. 염려와 근심을 처리하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건강하게 살고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염려를 어떻게 이길까요?
1. 하나님의 명령으로 이깁시다.
6절의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군병입니다.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어야 합니다. 염려하지 않아야 할 것은 염려야 말로 백해무익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염려’라는 헬라어는 ‘메린나우’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나눈다는 뜻의 ‘메리조’와 마음이라는 뜻을 가진 ‘누스’의 합성어입니다. 염려하면 마음이 나누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이 나누어진다는 말씀은 단순한 분리의 의미가 아니라 물거품처럼 부서지고 약해지는 하나님께 대한 불신을 의미합니다. 이런 불신앙 일을 해야 되겠습니까?
성도는 어떤 가운데서도 염려하지 말라는 주님의 명령을 받고 있습니다. 눅12:22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요14:1에도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지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눅 21장을 보면 말세의 성도들이 빠지기 쉬운 악 세 가지 중에 하나가 염려입니다. 염려는 죄악의 방방만큼 악한 죄가 됩니다. 하나님을 못 믿는 마음이니 왜 악이 안 되겠습니까? 마 13장을 보면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앗은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염려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염려는 영적생활의 최고의 악입니다.
‘걱정, 근심’은 영어로 ‘Worry’(워리)인데 ‘Worry’의 어원을 살펴보면 ‘물어뜯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마치 ‘짐승이 이빨로 목을 꽉 물어 질식해 죽이듯’ 그런 무서운 의미가 있습니다. 실재로 염려는 우리 심령을 물어 질식시켜버리는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한 번 염려의 병에 빠져들기 시작하면 그 심령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 가나안 사람들은 모두 염려 공포에 빠졌습니다. 바로 그것이 그들의 실패의 원인이었습니다.
염려는 문제 해결에 도움이 안 되고 오히려 에너지만 소비할 뿐입니다. 예수님은 염려한다고 키가 작은 사람이 한 자나 커지더냐? 염려하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염려는 좋지 않는 결과만 낳을 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염려로서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가불해서 걱정합니다.
아서 랭커라는 사람은 사업부진으로 매일 걱정으로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지혜가 떠올랐습니다. 내가 이렇게 매일 염려에 시달리며 살게 아니라 염려하는 날을 정해서 그 날만 염려를 한꺼번에 염려하자. 그래서 랭커는 매주 수요일을 염려의 날로 정하고 염려거리가 생기면 그 염려를 적어 염려함에 넣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염려하여 적어 넣었던 문제들은 거의 다 해결 됐거나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문제로 변해 있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염려하지 않아도 될 일로 염려하고 살고 있기 때문에 염려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염려만 몰아내도 우리의 삶은 만사형통합니다. 염려할 일이 있어도 그 염려를 몰아내고 하나님이 도우실 것이라는 확신에 선다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도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염려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 있어도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2. 기도와 간구로서 이깁시다.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그랬습니다. 염려하지 말라고 해도 그게 쉬운 일입니까? 마음을 통제하는 사람은 성을 빼앗는 장수보다 더 강한 사람인데 그런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술을 마시면 흥이 나서 시를 썼던 당나라의 시인 이백(李白)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도단수수경유 거배소수수경수’(刀斷水水更流 擧杯消愁愁更愁) 그 뜻은 ‘칼로 흐르는 물을 내리쳐도 물은 끊이지 않고 계속 흐르듯이 잔을 들어 술 마시며 걱정을 씻으려 해도 걱정은 더욱 쌓여만 간다’라는 뜻입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염려와 근심을 해결할 길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하나님 앞에 기도와 간구입니다. 기도와 간구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기도는 말씀의 약속을 우리 신앙으로 고백하며 아뢰는 것이라면 간구는 우리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 해결해 달라고 간청하는 기도입니다. 또 기도가 하나님과의 보통 대화라면 간구는 하나님께 간청하는 특별한 대화를 의미합니다. 보통의 마음으로 기도해서 안 되면 특별한 마음으로 기도하세요. 십자가를 앞에 두시고 기도하셨던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의 기도처럼 염려가 떠나가도록 부르짖어 기도하세요.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염려는 영적생활의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염려의 열매가 외부적인 것으로 아는데 실상은 심령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쥐는 설치류에 속하는 동물입니다. 설치류는 땅 위나 땅 속에서는 살 수 있지만 하늘 높이 올라가면 죽습니다. 한 비행사가 비행을 하던 중 비행기 안에 쥐를 발견했습니다. 비행기 안에 쥐가 있으면 전선을 갉아먹는 등 아주 위험한 일입니다. 그래서 비행사는 비행기의 고도를 2만 피트로 높이 올렸습니다. 그랬더니 곧 쥐가 죽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영적고도가 높아지면 염려의 쥐는 사라지게 된다는 교훈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 하리로다”(시46:1-3) 했습니다. 염려가 사라지고 평안이 오면 그것은 하나님의 보장을 받은 것이니 모든 것은 만사형통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평강이 주장할 수 있는 기도와 간구의 영적생활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3. 감사함으로 아룁시다.
빌4:6-7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이 감사의 기도는 불신의 기도가 아니라 믿음의 기도입니다.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를 생각하면 기도는 감사의 기도로 변합니다.
아이가 웁니다. 네 말대로 해줄 테니 울지 마라 해도 아이가 그 말을 믿지 않고 계속 웁니다. 우리 기도가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믿음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믿음의 기도는 감사의 기도입니다. 나와 세상만사는 아버지의 책임이시니 아버지께서 다 해주실 것이라고 믿고 아뢰야 합니다.
그런데 너무 믿는 나머지 기도조차 하지 않는 잘못을 범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으시고 계신다는 확신 가지고 기도하면 기도 들으심이 믿어지면서 평안이 옵니다. 그 때까지 기도하세요. 하나님을 똑 바로 바라보며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들으심의 확신을 갖게 되고 그 확신대로 이루어주십니다.
그래서 요한은 요일5:14-15에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벧전5:7을 새로 번역한 개정판으로 보면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를 돌보신다는데 다른 말이 필요합니까? 롬8:32에 “자기 아들을 아까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귀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입니다.
아이가 아버지에게 근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아버지, 내일 먹을 양식 있어요?”라고 묻는다면 아버지께서 “무슨 쓸데없는 소리냐? 공부나 해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은 우리에게 아무 염려하지 말고 신앙생활이나 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이 바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 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우리가 염려하는 것은 정말 쓸데없는 일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기 이름 앞에 ‘티테디오스’라는 말을 붙이고 다녔습니다. 티테디오스는 염려에서 해방된 사람을 뜻합니다. 우리들도 티테디오스 아무개라고 붙인 티테디오스 신자가 되어야겠습니다. 예수님은 내일 염려는 내일 하라 하셨습니다. 그럼 다음 날 염려하라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다시 내일입니다. 내일 내일 내일,,, 결국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출처: 아세아선교신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