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시 임고면 선원리에는 포은 정몽주 선생 종증조부의 후대 70여 세대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지금도 이 마을에는 고색창연한 개와(蓋瓦)지붕과 정자의 헌함(軒檻)들이 즐비해 반촌(班村)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영일 정씨의 영천 입향은 포은 정몽주 선생의 4대조로 전해지고 있다. 영일 정씨는 본관을 영일의 옛 지명을 따라 연일(延日)로, 영일(迎日)에서도 본고장인 오천(烏川) 마을 이름을 따서 오천으로 쓰기도 했으나, 1981년 영일 정씨 포은공파종중에서 영일정씨세보를 편찬하면서 영일(迎日)로 통일해 쓰고 있다.

임고면 선원리에 위치한 저수지(산소 뒷골목)
◆ 영일 정씨 집성촌 선원리, 자양면 영천시 임고면 선원리에는 현재 포은 선생 종증조부의 후대 70여 세대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영천성을 탈환한 호수공 정세아(鄭世雅∙1535~1612)의 장손으로 왜군에 포위된 아버지를 구하고 경주에서 순국한 백암 정의번의 아들 정호예가 선원리에 입향하면서 마을을 이루게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해남현감으로 청백리로 추앙받았던 정호예는 모든 세속의 영리를 정리하고 영천시 임고면 선원리 현재의 자리에 거처를 정했다. 입향조 정호예의 손자인 함계 정석달(鄭碩達∙1660~1720)선생이 함계정사를 세우고 후학들을 가르치며 안빈낙도의 삶을 산 터전이기도 하다. 함계 선생의 이기설(理氣說) 즉, 주리(主理)적인 논설(論說)은 너무도 유명하다. 선생은 갈암 이현일의 문인(門人)으로서 매곡 정사석채사유문(梅谷 精舍釋菜寺由文)에서 ‘만기퇴서 상소민락’이라고 하여 늦게 퇴계서(退溪書)를 좋아했다. 함계 선생은 대유학자인 매산 정중기(1685~1757) 선생을 낳으신 분이며 또 ‘평생용력 유일간경(平生用力 惟一簡敬)’이라고 하여 평생에 경(敬)으로써 수양(修養)공부에 노력했다. 함계선생의 장자인 매산 정중기는 당시 괴질을 피해 선원리에서 20여리 떨어진 삼매로 자리를 옮겨 집을 짓고 마을을 이루었다. 현재 선원리에 남아 맥을 잇고 있는 자손들은 함계 선생의 3남 정중보의 후손들이다. 선원리는 마을의 뒷산 언덕이 고리 모양으로 마을을 감고 있다하여 환고 또는 대환이라 하는데, 영천지역 내에서 살기 좋은 세 곳(자천, 환고, 평호) 중 하나로 꼽힌다. 해남공이 이 마을을 선택해 입향을 하게 된 것도 도연명의 무릉도원에 비유할 만큼 마을의 산세가 수려하고 풍광이 빼어났기 때문으로, 마을 이름이 선원이라 불린 이유이기도 하다. 주변 경치가 뛰어나며 높이 약 200m의 학산이 병풍처럼 둘러 있는데, 오천(烏川) 정씨가 주성(主姓)을 이루고 있다. 마을 중앙에 두리등(頭里嶝)이라는 언덕이 있어 예부터 부자가 많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마을 뒤에는 선조의 묘소가 있으며 이 곳을 중심으로 1만여㎡의 울창한 송림이 우거져 있다. 자손들의 정성으로 가꾸어진 숲으로 그 경관이 매우 아름다워 인근 초∙중∙고교생들의 소풍 장소로도 인기를 끌고 있다. 이 마을 출신 인물로는 정동윤 전 국회의원과 정연통 재경향우회 회장, 정은식 영천경찰서장, 정재식 영천농업기술센터 소장 등이 있다. 선원리를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학산이 있어 풍수지리에서는 ‘백학포란형’이라고 하는 이 마을에는 그림 같은 건물들이 산재하고 있어 건축 관계자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또 자양면은 영천에서 호수공 정세아의 후손이 가장 많이 살던 집성촌으로 인구, 월연, 삼귀, 충효리 등에 살다가 영천댐 공사로 인해 영천시내를 비롯해 대구, 포항 등지로 이주해 살고 있다. 후손으로 정희수 국회의원 등이 있으며 자양 출신 인물로는 정병순 전 삼성화재 사장, 정연환 영남대 법률아카데미 원장(법학박사), 정용찬 변호사 등이 있다.

영천댐 선원리 자양면 일대 위치
◆ 영일 정씨의 태두 포은 정몽주 선생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단심가, 선죽교, 삼년 시묘살이 등.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포은 정몽주 선생을 떠올리는 말들이다. 영천을 충효의 고장으로 불리게 한 포은 선생은 본관이 연일(延日)로 영천의 동쪽 우항에서 태어났다고 여러 문집들이 전하고 있다.
 선생은 부친 일성공 정운관과 모친 영천 이씨의 상을 당하여, 무덤 옆에 막을 짓고 3년 시묘살이를 해 이후 양반들의 효행의 기준이 된 시묘살이의 효시가 됐다.
선생의 이러한 효성을 기려 1389년(공양왕 1년)에 출생지인 영천시 임고면 우항리(愚巷里)에 효자리(孝子里)라 새긴 비가 세워졌다.
후에 비가 없어진 것을 1487년(성종18년) 경상감사 손순효가 찾아내 다시 세웠으며, 이 때 비각도 함께 세워졌다.
이 비각은 1992년 7월18일 경북도유형문화재 제272호로 지정돼 선생의 효 정신을 전하고 있다.
 포은 선생은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부하 조영규 등에게 격살되어 향년 56세에 비참하게 생을 마감 할 때까지, 의창(義倉)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유학을 보급하였으며 성리학에 밝았다. 주자가례에 따라 사회윤리와 도덕의 합리화를 기하며, 개성에 5부 학당과 지방에 향교를 세워 교육진흥을 꾀하는 한편 대명률(大明律)을 참고하여, 신율(新律)을 간행해 법질서의 확립을 기했다. 충절과 효심이 남달랐던 선생은 시문에도 뛰어나 시조 ‘단심가(丹心歌)’ 외에 많은 한시가 전해지고 있으며 서화에도 뛰어난 인재였다. 고려 삼은(三隱)의 한 사람으로 1401년(태종 1년) 영의정에 추증되고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에 추봉됐다. 중종 때 문묘(文廟)에 배향되었고 개성의 숭양서원 등 11개 서원에 제향 됐다. 유교를 숭상한 조선조에서 조선의 건국을 반대해 목숨까지 버린 선생을, 최초로 문묘(文廟)에 모신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기 보다는 선생의 발자취가 너무 컸기 때문이 아닐는지? ◆ 산남의진(山南義陣) 정환직∙정용기 의병대장
산남의진은 영천 자양면 출신의 의병장군 정용기에 의해 처음 결성된 후 옛 영일군 일대를 중심으로 거센 항쟁의 횃불을 들었던 구한말 제2단계 의병운동을 대표하는 의진 이다. 산남은 문경새재 즉, 조령 이남의 영남지방을 이르고, 의진은 오직 구국일념의 충성된 의기로 뜨겁게 뭉쳐진 의병진영을 줄여 일컫는 말이다. 삼남도시찰사와 중추원의관 등을 지낸 정환직(鄭煥直∙1843~1907)은 1905년 굴욕적인 을사늑약 당시 고종황제로부터 ‘경이 화천지수(華泉之水)를 아는가’라는 밀지를 받게 됐다. 화천지수란 제나라 환공을 적의 추격에서 탈출시킨 봉추부의 고사로, 일본으로부터 나라를 되찾는데 힘써 달라는 황제의 간곡한 당부가 담겨있는 것이었다. 이에 아들 용기(鏞基∙1862~1907)와 함께 삼남의진을 결성, 왜병을 무찌르는데 많은 전과를 올렸으나 나라를 되찾는 데는 역부족으로 장렬히 순국했다.

▲ 함계정사 지난 1990년 지방문화재자료 230호로 지정된 함계정사는 일생동안 학문을 탐구하며 인품과 덕망이 높았던 함계 정석달 선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손자인 죽비공 정일찬(鄭一鑽∙1724~1797)이 1779년에 완공한 것으로 판단된다. 마을 입구 작은 언덕 위에 남향으로 자리 잡았고, 남쪽의 언덕 아래에 소계(小溪)가 있으나 지금은 사과밭에 편입이 되어 유수(流水)는 남아 있지 않고 다만 옛 물줄기를 따라서 자갈 줄기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영천문화제 제230호(분류: 유적건조물 / 교육문화/ 교육기관/ 서당 )
소새지:경북 영천시 임고면 선원리 203-2 / 소유자: 정동선 사진출처:문화재청
▲ 강호정(江湖亭)

1975년 경북도유형문화재 제71호로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에 있다. 임진왜란 때 의병대장으로 전공을 세운 정세아가 1599년(선조 32년) 창건했다. 용산동(龍山洞)에 있었으나, 영천댐 건설공사로 인해 1977년 3월 이 곳으로 이전∙복원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맞배지붕집으로 중앙이 대청, 좌우 협간(挾間)이 방이며 앞면에 퇴를 두어 마루를 넓게 쓰도록 했다. ‘자호정사(紫湖精舍)’라고 씌어진 편액과, 정세아의 시(詩)를 포함한 시액(詩額) 15점이 걸려 있다. 정세아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국가에서 수여하는 모든 명예를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자호언덕에 정자를 짓고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썼다.

강호정에서 본 영천댐
▲ 옥간정(玉澗亭)
 영천시 화북면 횡계리에 있는 조선시대 누각으로 1992년 경북도유형문화재 제270호로 지정됐다. 조선 숙종 때의 성리학자인 훈수 정만양(鄭萬楊∙1667~1732)과 지수 정규양(鄭葵楊∙1667~1732) 형제가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1716년에 세운 정자이다. 아우 우졸재 몽양(夢陽)도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이들과 함께 오직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는데, 저술 활동은 주로 두 형제에 의해 이뤄졌다. 영의정 조현명, 형조참의 정중기 등이 이 곳에서 수학했다. 정면 3칸, 측면 4칸 반의 ‘ㄱ’자형 누각으로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정면 건물 오른쪽 중간의 숫기와에서 용마루를 뽑아 건물을 이어 단 형식이 특이하다.

▲ 정용준(鄭容俊) 가옥과 연정(蓮亭)
 정용준 가옥은 영천시 임고면 선원리에 있는 조선시대 가옥으로 1979년 중요민속자료 제107호로 지정됐다. 영조 원년(1725년)에 지은 집으로 본채와 정자로 되어 있다. 넓은 대지에 연못이 있는 이 집은 안채, 사랑채, 아래채, 곳간채가 ‘ㅁ’자 평면을 이루는 서남향집이다. 연정은 정용준 가옥의 울타리 안으로 흐르는 냇가의 연못 북쪽 가장자리에 세워져 있으며 그 자태의 빼어남은 보는 이의 감탄을 절로 자아낸다. 정용준의 8대조가 영조 32년(1750년) 몸채와 함께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며 연지(蓮池)와 어울려 한 폭의 그림과도 같다. 이 때문에 이병헌이 주연을 맡은 영화 ‘그해여름’의 촬영 장소가 되기도 했다.
영천=기인서기자 golbul@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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