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이나 집안잔치가 다가오면 방 안의 아랫목은 늘 커다란 항아리가 차지했다. 보온을 위해 두터운 이불까지 두른 항아리 속에는 식혜가 달콤하게 익고 있었다. 식혜(食醯)는 한옥의 구들과 질그릇·쌀 등과 함께 호흡하며 우리나라 전통발효 음청류의 한 맥을 형성해왔다.
전통음식 전문가들은 예부터 잔치나 제사 때 주요 음식으로 이용한 식혜를 수정과와 함께 전통음료 가운데 으뜸으로 꼽는다. 또 인공감미료나 효소제를 사용하지 않고 만들기 때문에 우리나라 대표 슬로푸드로 치켜세운다. 일부 지방에서는 술 대신 제례용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식혜는 지방마다 만드는 방법이 조금씩 다른데, 이름도 ‘단술’ 또는 ‘감주’라고도 부른다. 한식 전문가들은 밥알을 띄워 먹는 것은 식혜, 밥알을 건져내고 물만 먹는 것을 감주로 구별하기도 한다.
경북 안동지방에는 독특한 식혜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안동식혜’는 엿기름물에 생강·무·고춧가루 등을 넣어 숙성시킨 것으로 국물이 불그스름하고 매콤·새콤한 맛이 나는 것이 특징이다. 언뜻 보면 고춧가루를 넣은 물김치와 비슷한데 상품화가 가능한 향토음식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명숙 한국전통음식연구소 평생교육원 원장은 “예전에는 단 음식이 귀했기 때문에 단맛나는 식혜는 당분을 섭취하기 위한 주요 음식이었다”며 “한과와 떡 등 명절음식과도 잘 어울려 후식으로 안성맞춤이다”고 자랑한다.
특히 식혜는 얼음을 띄워 시원하게 해서 마시면 텁텁하던 입 안이 개운해진다. 갈증이 날 때도 물이나 청량음료 대신 식혜를 마시면 칼칼하던 목이 트이고 기분까지 상쾌해진다. 또 설날 떡국·약식 등 세찬으로 과식하기 십상인데 식혜를 한사발 들이키면 소화가 잘되고 더부룩하던 뱃속도 편안해졌다.
한편 ‘사상의학’에서는 소화력이 약하거나 속이 차가운 사람에게 식혜를 따뜻하게 데워 마시도록 권하고 있다. 또 열이 많은 소양인이 음식을 먹고 체했을 때도 식혜를 마시면 좋다고 한다. 식혜의 주원료인 엿기름은 소화를 돕는 성분이 있어 소화불량, 식욕부진, 비위가 허약한 사람에게 좋기 때문이다.
식혜에 대한 첫 문헌기록은 〈규합총서〉(1809년)에서 볼 수 있다. 여기에 엿기름과 식혜밥을 만드는 방법이 나와 있다. 또 1800년대 말 발간된 것으로 추정되는 한식 요리책인 〈시의전서〉에서는 ‘곡물과 엿기름으로 감주를 만들고, 여기에 유자를 넣어 신맛을 더한 것이 식혜’라고 전하고 있다.
또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1943년)에서는 “엿기름은 가을보리가 제일이니 이삼월이나 구시월에 싹을 내어 쓴다. 봄보리나 밀로도 싹을 내어 쓰기도 하지만 가을보리만 못하다”며 엿기름 제조법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식혜의 원리는 엿기름에 포함된 아밀라아제 효소를 이용, 고두밥(찹쌀·멥쌀)의 전분을 분해시켜 맥아당 등이 생성되게 해 단맛이 나도록 하는 것이다. 엿기름에 들어 있는 당화 효소의 작용으로 고두밥이 삭으면서 식혜의 독특한 단맛과 향이 생기는 셈이다. 한편 보리는 싹을 틔우면 엿기름이 되는데, 이때 보리에 아밀라아제가 생긴다.
김영희 양산대 호텔조리과 교수는 “식혜는 상온에 오래 두면 산패로 인해 신맛이 나는데 우리 선조들은 이를 방지하기 위해 식혜를 다 만들고 나서 끓이는 열탕법을 이용했다”며 “이 같은 방법은 엿기름의 아밀라아제 효소가 불활성으로 처리돼 산패가 늦춰지는 효과가 있다”며 식혜의 과학성을 입증했다.
오현식 기자 hyun2001@nongmin.com
게시글 본문내용
|
다음검색
댓글
검색 옵션 선택상자
댓글내용선택됨
옵션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