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상해에 온 지 5일째다. 이틀만 있으면 서울로 돌아가야 한다. 아침 10시에 집을 나서 밤 12시 넘어 돌아오기까지 매일 걸어 다니면서 강행군을 했지만 발바닥에 물집이 잡힌 것을 빼면 컨디션은 좋다. 어머니께서 “젊어서 열심히 다녀라. 나이 들어 무릎에 힘 빠지면 다니지도 못한다.”고 하신 말씀이 명언이다. 앞으로 이렇게 기운차게 돌아다닐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될까... 건강하고 시간 있을 때 열심히 돌아다니자. 오늘도 나는 힘차게 ‘고!’ 를 외치며 집을 나섰다. 오늘은 임시정부로 해서 상양시장을 둘러보고 저녁에 리리를 만나 예원야경을 볼 계획이다. 약국에 들려 ‘감비차’를 사고, 상양시장에서 쇼핑도 해야 한다. 서툴기 짝이 없는 중국말로 이 일을 다 해야 한다. 정신 바짝 차려야지...
임시정부는 1호선 황피남루에서 내려서 마땅루를 따라 걸어 내려가면 길가 연립주택에 있다. 허술하기 짝이 없다. 오늘 인터넷 신문에 보니 ‘상해 임시정부청사 대규모 개발로 위태’하다는 기사가 떴다. 이미 내가 갔을 때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어서 청사 건물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 홀대받는 모습을 보자니 마음이 상한다. 이국 땅, 허름하고 다 쓰러져가는 건물에서 기거하며 나라를 되찾기 위해 피눈물을 흘렸을 임시정부요인들을 생각하자니 현재 내가 선 자리에서 참된 애국이 무엇이며, 한 나라를 이끄는 지도자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했다. 생각할수록 답답하기만 하다.
깊은 생각을 하며 천천히 걷다보니 눈에 익은 거리다. 지난밤에 걸었던 신천지 거리이다. 낮이라 한산하기는 해도 여전히 관광객들이 몰려든다. 하얀 거품이 풍성한 맥주잔을 앞에 놓고 식사를 하는 외국인을 보자니 갑자기 갈증이 나면서 배가 고프다. 야외에 자리를 정하고 앉아 음식을 시켰다. 맥주 한 잔까지 곁들여서. 당연히 중국말로. 느긋하게 조금은 건방져 보이는 자세로 식사를 하며 나는 혼자만이 누릴 수 있는 황홀한 자유로움을 만끽했다. 여행의 묘미 중에 하나가 바로 뒷골목을 둘러보는 일이다. 나는 어슬렁거리며 중심가에서 벗어나 골목으로 들어섰다. 평범한 사람들이 평범하게 사는 일상적인 삶의 모습이 한국과 별반 다르지 않다. 발 마사지 하는 곳이 눈에 많이 띤다. 뒷골목 풍경은 마치 우리나라 70년대 드라마를 촬영하는 곳 같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걷자니 큰 병원 옆에 약국이 보인다. 이젠 아무 상점이고 들어가서 내가 필요한 것을 요구할 정도로 간이 커져 있다. 이번에도 무사히 감비차를 사고 돈을 거슬러 받았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몸으로 부딪치며 배우는 것이 제일이다. 나는 상양시장으로 가기 위해 대로변으로 나왔다. 우리나라는 ‘40% 세일’ 이렇게 문구를 써 붙이지만 중국은 ‘60%만 받겠다.’ 이런 식으로 표현을 한다. 마침 pasaco 에서 40% 세일을 한다.
"이 거 입어 봐도 되요?”
점원은 얼굴을 찡그린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한번 더 물었다. 결국 옷을 입어보고 마음에 안 들어서 다른 것으로 바꿔 한 벌 샀다. 성공, 대 성공이다.
상양시장은 작은 전방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잡동사니 시장이다. 외국인들 중에선 아예 트렁크가방을 가져와 물건을 주워 담듯이 사 가는 사람도 있다. 조잡스럽긴 해도 싼 맛에 살 만 하지만 잘못하다간 바가지 쓰기 딱 좋다.
“아저씨! 이거 얼마예요?”
나는 작은 쌍안경을 가리키며 물었다. 중국인 남자가 계산기에 350을 찍어서 날 보여준다. 나는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너무 비싸요. 깎아 주세요.”
그는 다시 계산기에 150을 찍어서 날 보여준다. 이런 날도둑이 어디 있나. 한 번에 50%를 깎아 주다니. 나는 고개를 절래 흔들며 발걸음을 돌렸다. 그가 날 붙잡더니 계산기를 내게 주며 사고 싶은 가격을 말하란다. 나는 웃으면서 ‘0’을 찍어 보여줬다.
“아저씨, 나 돈 없어요.”
이번엔 70을 찍어 보여준다. 기가 막히다. 한 번 말할 때 마다 50% 씩 깎아준다. 이런 날강도가 어디 있나. 350원에서 70원으로 80%를 깎아준다. 물론 나는 처음부터 살 생각은 없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실습이었다. 중국어 실습. 50원을 불러도 내가 돈이 없다며 고개를 흔들자 그는 포기를 한다. 나는 그를 향해 환히 웃어주며 다음에 오면 사겠다고 말을 했다. 그도 역시 환히 웃으며 “짜이 찌엔!”한다. 듣기에는 이 상양시장이 도시계획에 의해 철거된다 한다. 다음에 왔을 때는 현대화된 시장 건물이 들어서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예원 야경은 여전히 멋있고 화려하다. 제비꼬리 같이 날렵하게 솟아오른 지붕마다 전구를 둘러쳐서 한껏 멋을 부렸다. 리리와 나는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는 만두에다 이번엔 닭발까지 먹었다. 한국의 닭발이 매콤한 반면 중국의 닭발은 부드럽고 달큰하며 고소하다. 우리는 인민광장역으로 가서 전철을 탔다. 오늘이 중국에서 마지막 밤이다. 내일이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리리도 그동안 낮에는 직장에 나가고 밤에는 중국어 선생을 하느라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다. 나를 숙소까지 데려다 주고는 며칠 동안 엄마를 못 봤다고 오늘은 집에 가겠단다. 나는 그녀의 수고에 감사하며 작은 정성을 표현했다. 위층에 사는 민박집 주인도 섭섭해 한다.
다음 날엔 아침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위층으로 올라가 민박집 주인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 상해에 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자신의 일인 양 구석구석 챙겨주는 마음씨가 고맙다. 이 민박집은 푸동공항에서 자기부상열차로 10여분 정도 되는 거리에 있어서 공항까지 오가는 길이 아주 편하다. 게다가 전철 2호선의 종점인지라 시내로 나가기도 편하다. 집도 깨끗하고 음식도 정갈하고 맛있다. 조선족 아줌마가 볶아주는 감자볶음은 진짜 맛있다. 가격도 비교적 저렴한 편에 속한다. 나는 올 겨울에 다시 오겠다고 말했다. 여행 끝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항상 즐겁다. 그러나 이번 여행은 그렇지 않다. 상해와 정이 들었는지 마음이 떠나기 싫어 발을 질질 끈다. 공항까지 가는 자기부상열차는 최고속력이 시속 431Km로 6분 걸린다. 잠시 앉았다 싶은데 벌써 공항이란다.
짧은 기간 동안의 어학연수를 겸한 이번 여행은 나에게 귀한 교훈을 남겨주었다. 나에겐 아직도 무한의 기회와 시간이 주어져 있음을, 내 마음 속에 희망과 열정의 불꽃이 타오르는 한 나는 그 무엇이라도 언제든지 시작할 수 있는 자신을 갖게 되었다. 'Boys, be ambitious!' 이 말은 바로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나는 하늘을 날아오르는 비행기에서 상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잘 있어요, 아가씨! 올 겨울에 다시 올 테니 그 땐 멋진 사랑을 나눠봅시다.” (동 은)
맨 위 사진을 보니 임시정부 청사로 쓰던 건물이 금방이라도 철거될 듯 아주 위태롭군요.예전에 정부차원에서 건물을 국내로 이전한다는 얘기도 있더니만 그뒤 어찌된 건지.사진에서 특이한 것은 중국은 외부 비계(철거나 작업을 위해 건물 외부에 매다는 발판)에 아직도 대나무를 이용하는군요.우리나라도 예전엔 소나무를 이용한 적도 있지만 지금은 모두 다 강관pipe를 쓰고 있지요. 동은님의 상해 여행기 그동안 잘 읽었습니다.몸으로 부딪쳐 가며 익힌 중국,그야말로 산 경험이 되어 오랫도록 기억에 남으시겠네요.여행기 올려주시느라 그동안 애 많이 쓰셨습니다.
첫댓글 이야기 속에 들어 있는 기분이예요~
맨 위 사진을 보니 임시정부 청사로 쓰던 건물이 금방이라도 철거될 듯 아주 위태롭군요.예전에 정부차원에서 건물을 국내로 이전한다는 얘기도 있더니만 그뒤 어찌된 건지.사진에서 특이한 것은 중국은 외부 비계(철거나 작업을 위해 건물 외부에 매다는 발판)에 아직도 대나무를 이용하는군요.우리나라도 예전엔 소나무를 이용한 적도 있지만 지금은 모두 다 강관pipe를 쓰고 있지요. 동은님의 상해 여행기 그동안 잘 읽었습니다.몸으로 부딪쳐 가며 익힌 중국,그야말로 산 경험이 되어 오랫도록 기억에 남으시겠네요.여행기 올려주시느라 그동안 애 많이 쓰셨습니다.
'나는 웃으면서 ‘0’을 찍어 보여줬다' ㅎㅎ 동은님 두둑한 배짱과 여유있는 여행자 모습이 그려지네요.재미나게 읽었습니다 ^^;
동은님..아직도 남은 얘기가 참 많을거 같은데..아쉽네요! 전 자기부상열차라는것이 참 타보고 싶어요. 우와 ! 시속 431Km면 거의 비행기 속력의 반인데...무쟈게 빠르겄다..동은님 여행기 흥미롭게 잘 읽었네요^^
열정의 불꽃으로 타오르시는 동은님....꿈과 야망을 가득 품으신 소녀이십니다.
동은님의 용기와 그리고 정열에 찬사를 보냅니다. 아직도 꿈많은 소녀의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추임새를 넣으며 신나게 읽었습니다. 공짜 여행 감사합니다^^.
오~우~~~역시 동은님은 무슨 일이든>>> 굵게 뚜렷한 획을 긋는 당차고 야무진,그러면서도 섬세하고 예리하게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