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45년 해방동이다. 정월이 지났으니 만 78세가 넘었다. 얼핏 생각해도 꽤 오래 살았다. 앞으로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 나는 아버지가 후두암으로 77세에 돌아가실 때 그만하면 오래 사셨으니 고통스럽게 수술을 받아도 어차피 오래 사시지 못할 거라며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시켰다. 그야말로 편안하게 생을 마감하시도록 했다. 물론 의사의 의견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77세의 아버지를 그만하면 오래 사셨다고 판단하고 치료를 중단했던 나였으므로 이미 아버지보다 더 살고 있는 내가 더 오래 살기를 바란다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다. 무슨 염치로 더 살겠다고 버둥거리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제 언제 죽어도 그리 안타까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내 삶을 마감할 준비를 하고 있다. 우선 나와 내 아내의 사진들을 다 태워버렸다. 아주 적은 양의 사진만 다시 정리해서 새로운 사진첩을 만들었다. 기념패, 축하패, 상패 등을 모두 없애버렸다. 없애려고 모아보니 그 수도 엄청났다. 부모가 살아계셨을 때 걸어놓았던 십자가, 묵주, 성모상 등도 모두 쓰레기 봉지에 넣어 없앴다. 벽에 걸린 사진 액자도 아직은 없애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치워버릴 예정이다. 내가 공부하던 전공서적도 모두 고물수집하는 노인에게 주어버렸다. 심지어 영어, 일어 참고서, 소설, 사전도 모두 주어버렸다. 여행지에서 구입한 작은 소품(인형, 동물조각 등.)도 비에 금속, 돌, 도기로 된 것은 모두 마당의 나무 밑에 내놓았다. 애지중지 아끼던 양주도 없애려고 조금씩 마신다. 지금 Glenfiddich single molt를 마시고 있다. 이런 식으로 마시면 죽기 전에 다 마시기 어려울 만큼 아직도 찬장에 그득하다. 나의 흔적을 지우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지금 내 삶에 전혀 만족한다. 나 자신의 건강도 이 나이에 이만하면 괜찮은 편이고 아내도 건강한 편이다. 먹도 사는데 별 부족함이 없고 자식들도 제 몫을 하니 내가 도와줄 일도 없다. 언제까지 버틸지는 모르지만 나는 이 나이에도 지방의 한 설계회사에 비상주 직원이다. 한 달에 서너 번 회사에서 원하는 일을 해주고 또박또박 월급을 받는다. 내 용돈으로는 충분한 적지 않은 금액이다. 국민연금도 백만 원이 넘게 들어오니 아무런 경제적 어려움이 없다. 속으로는 어떤지 모르지만 두 아들도 ‘저희 남겨 줄 걱정 마시라.’ 하니 아끼고 자시고 할 일도 없다.
아내는 우리가 더 늙어서 남의 도움이 필요하게 되면 자식들에게 부담이 되지 않겠느냐고 걱정이다. 나는 그런 아내에게 단호하게 말한다. ‘그렇게 되면 일단 간병인을 고용하자. 그마저 힘들면 적당한 요양원에 들어가자. 절대로 자식들이 우리를 돌보느라 저희들 삶을 희생 하지 않게 하겠다.’ 나는 5년 전부터 ‘사전연명의료의향서(의식이 없거나 치명적인 경우 생명을 연장하는 치료를 포기한다.)’를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등록하고 그 증서를 소지하고 다닌다. 죽을 때가 되면 유감없이 죽겠다는 의미다. 구차하게 삶을 연장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아내도 나와 뜻이 같아 함께 등록했다.
지금 나의 삶은 단조롭지만 그리 무료하지 않다. 도서관, 면자율쎈터, 문화쎈터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을 등록해서 운동도 하고 뒤늦게 시작한 기타를 손가락이 아프도록 친다. 늙어서 시작한 기타여서 다른 이보다 익히는 속도가 느리지만 ‘늙어서 그런 걸 어쩌랴.’ 스스로 위로하며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함께 기타를 배우는 젊은 사람들과 커피를 마시며 가벼운 농담도 하고 어쩌다 운이 좋으면 같이 점심을 먹기도 한다. 이런 기회가 아니면 어찌 젊은 여인들의 가까이 할 수 있겠는가.
사귀는 여자도 한 사람 있다. 73세의 꼬부랑 늙은 과부다 그러나 한 달에 한 번쯤 같이 밥 먹고 차를 마시며 얘기를 나누기에 그리 부족함이 없다. 그녀와 사귄 지도 20년이 넘었으니 큰 상황의 변화가 없는 한 그녀와의 만남은 계속되리라. 그녀는 원불교에 다닌다. 그래서 아무 종교도 믿지 않는 내가 지옥에 떨어지게 되면 제가 구해주겠다며 웃는다. 그래서 죽어서 지옥에 갈 걱정도 없다.
나는 가능하면 남의 일에 참견하지 않기로 하고 산다. 전철에서 싸움을 하던 큰 소리로 전화를 하던 젊은 아이들이 껴안고 지나친 사랑놀이를 하던 오불관언이다. 정치에도 관심을 끊으려 애쓴다. 정치에 신경을 쓰면 내 골치만 아프다. 제 놈들이 싸우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다. 그래서 되도록 뉴스를 안 본다. 어쩌다 뉴스가 눈에 띄거나 들려오면 머리가 지끈거리고 혈압이 오른다. 뉴스를 보는 대신 Netflix, Waave에서 영화나 드라마 series를 골라본다. 주로 알콩달콩 젊은이들의 연애나 코미디를 골라본다. 늙으면 보리라고 주말의 명화를 녹화해서 보관했던 비디오테이프는 이제 아무 쓸모가 없어졌다. 이렇게 세상이 바뀔 줄 어찌 알았으랴.
그리고 내 안뜰을 가꾸느라 바쁘다. 귀에 핸드폰의 이어폰을 꼽고 유머나 단편소설을 들으며 잡초를 뽑고 거름을 주고 밭에 채소를 심으며 시간을 보낸다. 화단도 만들고 새들에게 모이도 주고 내 잔디밭을 엉망으로 만드는 두더지를 없애려고 애를 쓴다. 그러니까 남과 시비를 할 일도 없다. 오히려 동네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는다. 동네 이장마저 도와줄 일이 없는가 묻는다. 고맙다.
나는 가끔 살아 온 내 생애를 뒤돌아본다. 누구나 다 그렇듯이 나의 삶도 어지간히 파란만장이다. 시골 학교에서 거의 독학을 하다시피 밤을 새우며 공부한 일, 대학을 세 번이나 떨어지며 춥고 배고픈 시절을 보낸 일, 간신히 후기대학에 들어가 가정교사를 하며 눈칫밥을 먹던 일, 결혼해서 박봉의 공무원시절을 견디지 못해 돈 많이 준다는 재벌회사로 옮긴 일. 사랑하는 아내와 가족을 떠나 뜨거운 중동에서 지낸 고초와 공무원출신이라고 따돌림을 당하면서도 악착같이 버티던 쓰라린 경험, 급기야 회사에서 퇴출당해 내 회사를 만들고 회사가 정상적으로 운영되기까지 자금에 쪼들리며 비굴하게 굽실거리던 일. 참으로 어떻게 그런 어려운 삶을 버티고 지냈을까 돌이켜보면 아찔하다, 그래서 60세가 되기 전 회사를 직원들에게 넘겨주고 미국의 한 대학에서 1년 동안 Visiting scholar로 지냈다. 그리고 귀국 후 모교에 강사(겸임교수)자리를 얻어 10년 넘게 교직에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나를 찾을 수 있었다. 한가롭게 나를 추스를 수 있었다. 여행도 마음껏 할 수 있었으며 그 때부터 나는 즐거운 삶이 시작되었다. 바쁜 세월 속에서도 대학원에 다니며 박사학위를 받아 놓은 게 큰 도움이 되었다.
나는 그야말로 앞만 보고 뛰는 삶을 살았다. 최선을 다하고 살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아무 잘못도 없이 살았다고 장담하는 건 아니다. 또 옳은 판단만 하고 살았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나라고 어찌 후회 없는 삶을 살았으랴. 다만 큰 욕심 부리지 않았고 정의롭게 인간답게 살려고 노력했다는 말은 할 수 있다. 다행히 좋은 아내를 맞이한 덕분에 한 평생 큰 의지가 되었고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었다.
남들은 다시 젊은 날로 돌아가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아니다. 숨 가쁘게 살아 온 날들이 끔찍하고 아찔해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지금이 가장 좋다. 왜 구태여 그 힘든 세월로 다시 돌아간단 말인가.
지금도 눈이 돌아가게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을 따라잡기 힘들다. 그래서 다 포기하고 그냥 이대로 살기로 했다. 그러니 아주 마음이 편하다. 에라, 모르면 모르는 데로 살자.
나는 미리 유언장도 써 놓았다. 내가 죽으면 지인은 물론 친척들에게도 알리지 말고 조용히 화장해서 서운산 탕흉대에 뿌려달라고 했다. 왜냐하면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미리 정한 데로 화장을 해서(아버지도 산소를 파헤쳐 화장을 했다.) 두분의 유골을 서운산 탕흉대에 모셨다. 말이 모신거지 실은 남 몰래 바위 밑에 묻었다. 공연히 무덤을 만들어 후손에게 부담을 주기 싫었다. 그래서 나도 깔끔하게 사라지고 싶다. 만약 영혼이 있다면 아버지, 어머니를 만나 왜 그리 했는지 변명이라도 할 수 있겠지. 잘난 척, 멋있는 척, 아는 척 안하고 사니 정말 편하다. 2023. 2. 21
첫댓글 그래! 이제와 이것 저것 따지는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자기 마음 평안하게 생각하고 실행하며 살면 잘 사는 것이라 생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