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토류아이키주주쓰(大東流合氣柔術, 이하 대동류)의 중흥의 조(中興の祖)라고 알려진 다케다 소가쿠(武田惣角) 선생은 자신의 이름과 함께 무호(武號)로 미나모토 마사요시(源正義)를 함께 썼다. 일본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겐 혼동을 주는 것이 사실이고, 한국형 합기도의 역사를 연구하던 이들이 겪었던 전형적인 오류이기도 하다.
다케다 선생은 에도 시대 말기와 메이지 시대에 걸쳐 살았던 사람이다. 근대화 이전에는 일본 역시 성과 이름을 갖지 못한 사람이 많았다. 메이지 유신 시기인 1875년부터는 묘자필칭령(苗字必稱令)을 통해 모든 이들이 성씨를 갖게 되었다. 때문에 일본 성씨 대부분의 유래는 대개 지명, 직업명, 가게의 호칭 등에서 유래하였다. 야마시타(山下), 이시바시(石橋), 다나카(田中) 등이 그 예다.
성은 부모를 따르지만 옛 일본에서는 쇼군이나 다이묘, 스승으로부터 성을 받는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했다. 혹은 자신이 제일 존경하는 사람의 성이나 이름을 스스로 붙이기도 했고, 윗사람에게 충성이나 존경의 표시로 윗사람의 성이나 이름을 붙이는 풍습도 있다. 우리 나라도 구한말 신분제가 폐지되면서 노비들이나 소작농들이 주인의 성을 따라서 붙이다 보니, 김 이 박 등의 특정 성씨의 인구수가 많을 수 밖에 없었다. 검술 명문가인 호쿠신잇토류(北辰一刀流)에서도 역시 사범들에게 전통에 따라 지금도 종가(宗家)가 하사하는 이름[武號]을 자신의 이름과 나란히 부르고 있다.
다케다 소가쿠 선생은 무술에 뛰어난 능력만큼이나 품행이 거칠다고 알려져 있다. 무력(武力)으로는 거리낌이 없던 그에게도 미나모토(源) 가문은 늘 흠모의 대상이었고, 결국 자신의 이름에 源正義(마나모토 마사요시)를 넣었다. 이런 행위는 메이지 시대에 흔하게 볼 수 있는 상황이었고, 실력은 출중했으나 빈약한 출신에 대한 그의 고뇌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다케다의 일방적인 흠모의 결과 무호를 쓰는 것 이외엔 미나모토 가문과 특별한 연결고리가 없는 상황에서 대동류를 미나모토 가문의 무술로 간주하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미나모토 가문과 다케다를 혈연이든 사승(師承)이든 관계를 증명할 어떠한 사료(史料)도 남아있는 것이 없다. 미나모토 가문이 도래인(渡來人)이고 미나모토 가문에서 대동류가 나왔으니 합기도의 원류가 신라라는 궤변을 늘어 놓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지만, 미나모토 가문 역시 고대 일본 역사를 보면 신적강하(臣籍降下)를 통해 부여 받은 일본 귀족 가문이라는 사실은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다케다 선생은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스모와 유술, 호조인류(宝蔵院流) 창술을 배웠고, 시부야 도마(渋谷東馬)로부터 오노하잇토류(小野波一刀流) 검술을 배웠다. 따라서 학계에서는 사실상 대동류의 창시자로 보고 있다. 대동류의 기술적 특징 중에는 다케다 소가쿠의 전매특허라 할 수 있는 스와리 와자(座技, 좌기)가 있다.
그런 기술이 완성된 배경에는 닛코도쇼구(日光東照宮) 신사에 신관으로 있던 사이고 다노모(西鄕賴母)에게 제자로 있을 당시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러한 추측은 사무라이였던 사이고 다노모가 좌기를 중점으로 하는 3가지 무술 유파의 교수면허를 가진 것에서 비롯되었다. 품행이 거칠었던 다케다 소가쿠는 이후 파문당하고 만다.
일본은 예로부터 검술 수련 과정에서 무릎을 꿇고 시작하는 이아이(居合)를 함께 하기 때문에 스와리와자(座技, 좌기)가 기본적으로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신사나 절에 들어갈 때는 검을 소지할 수 없었기에 단도나 맨손으로 기술을 펼치는 스와리 와자가 발전하였다. 다케다 소가쿠 선생이 사이고 다노모를 만난 이후부터 스와리와자를 보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형 합기도에는 스와리와자를 볼 수가 없다. 발차기와 기계체조, 홍콩 영화풍의 무기술의 결합이 된 좋게 말해서는 현대식 종합무술이고, 속된 말로는 이도 저도 아닌 짬뽕 무술로 변질된지 오래다. 전가의 보도처럼 들이대는 신라-대동류-다케다-최용술-합기도의 연결 고리를 찾으려고 해도 역사적으로도 기술적으로도 찾기가 힘들다. 최용술 선생은 생전에 당신의 무술을 야와라(柔)라고 하셨던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이을래야 이을 수 없는 연결이다.
다케다 소가쿠 선생은 자신의 삶을 이상적인 사무라이의 삶에 일치시키려 했다. 과거 사무라이는 일본식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이다. 평소에는 백성들의 피땀으로 생활해 가지만, 영주와 그 백성이 위기에 봉착했을 때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대의(大義)를 위해 몸을 받쳤던 이들이다. 진정한 용기를 가진 명예로운 사람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살아있을 때 어려움을 겪더라도 죽어서 널리 이름을 남기겠다는 마음으로 실천을 했던 것이다.
무도(武道)는 실력뿐만 아니라 명예를 인생의 가장 큰 가치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전유물이다. 그저 싸움에서 이기는 기술 정도로 생각하는 이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다. 이번 제주도 강습회에서 무도를 가장 큰 인생의 가치로 생각하는 이시바시 선생의 강습회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는 진정 남편의 희망과 꿈까지 사랑하는 부인의 태도에 크게 감명을 받았다. 이시바시 료이치(石橋良一, 合気会 6단) 선생은 세무사이시지만, 도쿄 합기도 연맹 이사이자, 도쿄 나기나타 연맹(品川区薙刀連盟) 회장이시다.
이른바 사회적으로 안정되고 존경받는 위치에 계시지만, 무도를 자신의 직업보다도 더 높은 인생의 가치로 생각하시는 분이다. 메이지대학 시절부터 야마구치 세이고(山口清吾) 선생 문하의 혹독한 수련 과정을 거치셨고, 이를 통해 축적된 실력을 국내외 제자와 후배를 양성하는데에 아낌없이 투자를 하시는 분이다. 비록 시대는 바뀌었지만 문무를 겸비하고 명예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21세기의 사무라이가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