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과 유팽로 이팝나무
‘함평천지 늙은 몸이’로 시작하는 호남가를 듣다 보면 ‘나무나무 임~실이요’에서 임과 실 사이의 박자가 9임을 알 수 있다. 제일 길게 부르는 대목인 것이다. 다음 대목은 ‘가지가지 옥과로다’이다. 그렇다. 그렇게 길게 공들여 맺은 과일이니 구슬 같은 옥과가 아니겠는가? 향기로운 과일이며 아름다운 보석이다.
하지만 옥과(玉果)가 무엇이겠는가? 나무라면 당연히 열매이지만, 사람이라면 자식 아니겠는가? 향기롭고 아름다운 자식을 원하지 않은 사람이 있느냐고 묻는 건 어리석음이다,
우리 인간의 한평생 가장 큰 보람은 자식을 얻어서, 더불어 살아가는 향기롭고 아름다운 사람이 되도록 키우고 가르치는 일이다.
곡성군 옥과면 합강리는 임진왜란 의병장 유팽로가 태어난 마을이다. 마을 앞으로 흐르는 옥과천이 들녘을 적시고, 마을 뒤 옥출산을 휘감아 오는 섬진강으로 들어가는 곳이다.
월파(月坡) 유팽로(柳彭老 1564-1592)는 충주판관과 순창군수를 지낸 아버지 유경안과 어머니 남원 윤씨의 장남이다. 6세 때 부모님에 대한 효행시를 지었고 선조 12년인 1578년에 사마시, 1589년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학유가 되었다.
부모상에 시묘살이 중 곧 선조의 부름에 1592년에 28세로 홍문관 박사가 되었으나,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고향으로 오던 중이다. 전북 순창에서 5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전라도의병 진동장군 유모(全羅道義兵 鎭東將軍 柳某)의 대청기(大靑旗)를 높이 들고 기병하였다. 진동은 처음 일으킴이며 청색은 동쪽이니, 곧 동쪽의 왜적을 섬멸하겠다는 뜻이다. 왜란 발발 7일만인 4월 20일이니 조선 최초의 의병이 바로 그들이고 유팽로는 최초의 의병장이다.
5월 11일 이들 유팽로 의병은 임실군 갈담역 전투에서 임란 최초의 첫 승리를 하는 등, 각처의 의병들에게 구국의 열정과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임진왜란의 흐름을 바꾼 위대한 역사의 분수령이었다.
그 뒤 담양 추성관에서 고경명 의병의 선봉장이 되어 말의 피를 마시고, 속내의에 이름을 기록하여 죽음으로 싸울 것을 결의하였다. 6월 11일 의병 6000명을 이끌고 담양을 출발, 6월 24일 전주, 마침내 7월 8일 금산성 전투를 치르다 이틀 뒤, 순절하였으니 나이 28세였다.
이때 유팽로가 타고 다니던 말은 오리마(烏悧馬)로 처음에는 다리가 다섯이었던 검은 말이었다. 이 오리마가 왜군이 가져가려고 하는 장군의 머리를 빼앗아 물고 합강리로 왔다,
부인 원주 김 씨가 후원에 단을 쌓고 남편의 무사 귀환을 빌 때였다. 집에 돌아온 오리마는 9일이나 여물을 먹지 않고 울다 죽었다. 남편과 의마의 장례를 치른 원주 김 씨도 슬픔을 못 이겨 남편 뒤를 따랐다. 합강리 마을 앞 들녘의 의마총이 바로 그 오리마의 무덤이다.
비록 유팽로의 의병 활동은 81일간의 짧은 기간이지만 어려운 시기에 역사의 흐름을 바꾼 위대한 업적이다. 그럼에도 그동안 크게 주목하지 못했음이 참으로 민망하고 죄송스럽다.
임진왜란이 일어나도록 기강이 문란했던 나라, 속수무책으로 국방이 허술했던 게 논의의 초점이다. 누가 먼저 기병하고 무슨 업적을 쌓았느냐는 나중 일이라고 에둘러 생각하지만, 글을 읽은 선비로서 분연히 칼을 들고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린 유팽로의 용기와 정신은 만고의 귀감임에 틀림없다. 이곳 유팽로의 오리마 무덤으로 가는 길에 네 그루의 커다란 이팝나무가 있다. 넷이 어울려 산더미처럼 쌀꽃으로 젯밥을 해마다 올리니, 그나마 장군과 원주 김 씨, 오리마에게 죄송함을 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