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경률(현재 한중미래협회 이사, 동아시아미래재단 연구위원)
고교시절, 선생님들 몰래 독서토론 모임을 만들어 활동했다. 아침 7시부터 밤 11시까지 꼼짝없이 머리 처박고 공부해야 하는 스파르타식 교육현장이 너무 답답해서였다. 시간만 나면 도서관 뒤 으슥한 벤치에 숨어 미친 듯이 책을 읽고 토론을 했다. 때로는 학주에게 걸려 죽지 않을 만큼 두들겨 맞기도 했지만 새장 속에 갇힌 삶을 조롱하는 희열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반항이었던 것도 같다. 우리는 모임의 이름을 ‘불꽃’이라고 지었다.
1920년대 중국 톈진의 난카이 중학교에도 반항아 한 명이 있었다. 그는 “외침”, “아Q정전” 등 루쉰의 저서를 탐독하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를 넓혔고, 학교 내 극단 활동을 하는 친구들을 사귀며 연기에 대한 꿈을 키웠다. 마침내 배우가 되겠다는 결심을 한 그는 이름부터 바꾼다. 새 이름은 불꽃 ‘염(焰)’을 썼는데 루쉰의 산문시 “사화(死火)” 혹은 볼셰비키 기관지 “이스크라”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그가 바로 중국 영화의 한국인 황제 김염이다.
중국의 시대정신 대변한 불꽃같은 삶
지난 편에 다룬 정율성이 팔로군행진곡을 작곡해 중화인민공화국 건설에 이바지했다면, 김염은 시대를 대변하는 연기로 새로운 중국을 염원하는 인민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우리나라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김염은 중국영화 100년사에서 유일무이하게 ‘황제’라는 칭호를 부여받은 배우다. 1930년대 상하이가 아시아 문화예술의 중심지였을 때 그는 당대 최고의 스타이자 항일 예술운동의 선봉으로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한국인인 그가 처음부터 중국 영화계의 환영을 받았던 것은 아니다. 연기에 대한 열정 하나만으로 상하이 민신영화사로 달려갔지만 외국인에다 연기 초짜인 그에게 선뜻 비중 있는 배역을 맡길 감독은 없었다. 한겨울에 며칠씩 밥을 굶다가 외투를 팔아 한 끼 식사를 해결하는 비참한 생활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염은 좌절하는 대신 자신을 단련하는 길을 택했다. 운동을 하고 언어를 익히며 연극무대를 누빈 것.
당시 상하이엔 퇴폐적이고 관능적인 멜로 영화가 판을 치고 있었다. 유약한 서생 이미지의 남자 주인공들이 삼각관계에 빠져 허우적대는 영화에 식상한 관객들은 변화를 요구했다. 운동으로 단련된 준수한 외모와 건강미 넘치는 웃음을 지닌 김염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미국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쑨위 감독이 문을 열어줬다. 활빈당의 이야기를 다룬 “풍류검객”에서 김염은 유창한 중국어 실력과 자연스러운 연기로 호평을 받는다.
일개 엑스트라에서 단번에 주연급 배우로 성장한 김염은 1930년 작품인 “야초한화(野草閑花)”에서 롼링위(阮玲玉, 완령옥)와 호흡을 맞추며 ‘김염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다. 중매결혼에 반발해 집을 뛰쳐나온 부자집 청년이 길에서 우연히 만난 꽃 파는 소녀와 사랑을 나누다가 마침내 부모의 반대를 극복하고 결혼에 성공한다는 스토리. 오늘날로 치면 “꽃보다 남자”의 ‘구준표’와 ‘금잔디’에 봉건사상에 반감을 지닌 젊은이들은 열광했다.
김염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인터넷이 없는 시대였지만 상하이의 신문사가 주관하는 행사에서 그는 독자와 관객의 투표로 중국 최초의 ‘영화황제’ 자리에 오른다. 이후 ‘황제’는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다. 중국영화계에서 ‘황제’ 칭호를 부여받은 사람은 오늘날까지 김염 한 사람 뿐이다. 몇 해 전 간행된 ‘중국영화 100년사’에도 오직 그의 이름 옆에만 ‘황제’ 칭호를 허용하고 있을 정도. 여기엔 연기도 연기지만 항일운동에 대한 공헌도 작용했다.
중국인의 항일의식 고취한 영화 “대로”
김염은 1932년이 저물 무렵 “앞으로는 멜로영화에 출연하지 않겠다.”고 폭탄선언을 했다. 그는 조선을 발판으로 대륙을 옥죄어오던 일본 제국주의를 직시하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 김필순은 세브란스 병원에서 의사생활을 하면서 안창호 선생의 신민회 활동을 돕던 독립운동가였다. 일제의 체포망이 조여오자 김필순은 만주벌판의 치치하얼로 도망갔다가 그곳에서 일본 스파이들에 의해 독살당하고 만다.
조선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자신의 기득권을 버리고 싸우다가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아버지는 그의 가슴 속 깊은 곳에서 항일의 불꽃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티엔한(중국의 대표적인 현대 극작가), 니에얼(중국 국가인 ‘의용군행진곡’ 작곡) 등 항일 예술인들에게 자신의 집을 은신처로 제공하며 은밀하게 후원했다. 바쁜 촬영스케줄 중에도 난징을 방문해 백범 김구 선생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그의 항일투쟁 의지는 중국영화 5대 걸작으로 꼽히는 영화 “대로”(1934년작)에서 꽃을 피웠다. “대로”에서 김염을 비롯한 주인공들은 일본군 앞잡이의 방해 공작을 뿌리치고 항일투쟁을 위한 도로를 개통한 후 적기의 공습에 장렬하게 전사한다. 영화의 말미, 연인의 눈에서 부활한 청년들이 ‘대로가(大路歌)’를 부르며 전진하는데 이 장면이 중국인의 심금을 울렸다. “무거운 짐을 지고 나아가세. 자유의 길이 이제 곧 열리리니.”
‘대로가’는 중국 전역으로 퍼져나가며 중국인의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 영화 “대로”가 항일을 선동한다고 판단한 국민당 정부는 일본과의 관계를 의식해 상영을 금지하고 필름을 불살랐다. 그러나 김염의 가슴에서 피어오른 항일의 불꽃은 걷잡을 수 없이 타올랐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중국의 젊은이들은 저마다 영화 “대로”의 주인공이 돼 항일전선으로 달려 나갔다. 김염이라는 배우가 신중국 건설의 역할모델이 된 순간.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 김염은 중국영화협회 이사 등을 맡으며 중국영화 발전을 위해 애쓴다. 그러나 당대의 지식인과 문화예술인들이 대개 그랬듯 그 역시 문화혁명의 어두운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사상 개조를 위한 노동 학습’을 강요받던 김염은 위출혈이 도지며 기나긴 투병을 시작한다. 1983년 김염이 병상에서 세상을 떠나자 중국의 지도자들은 일제히 조의를 표하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김염의 묘는 상하이 복수원(중국의 국립묘지)에 마련됐다. 영화인으로서는 유일하다. 이곳에 있는 그의 부조는 ‘영화황후’ 롼링위(완령옥)의 전신와상과 함께 빛났던 상하이 영화의 전성기를 돌아보게 만든다. 김염의 불꽃같은 삶은 시대정신의 발로였다. 봉건사상을 혁파하고 항일투쟁을 통해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는 시대의 열망을 온몸으로 연기하고 표출했다. 요즘 한류가 식었다고 걱정들이다. 얄팍한 상술을 반성하고 김염의 시대정신을 되새겨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