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계의 물리학 1811 참소중한당신 p36-40
김병수 대건안드레아 한국 외방 선교회, 제주도 주문모 피정의 집 책임 신부
만물은 존재 그 자체로 장력이 있다. 관계 속에서 상호 작용하는 힘이 있으니 끌어 당기는 인력(引力)과 밀어내는 척력(斥力)이 있다. 그래서 만물은 나름의 제자리를 지킬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존재 역시 장력이 있으니 어떤 공동체나 인간관계 안에서 서로 영향을 미친다. 관계의 물리학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투명인간처럼 아무 말을 하지 않는다고 장력이 없는 것이 아니다. 말이 없으면 상호 긴장관계가 조성되어 오히려 더 큰 힘을 발휘한다. 오해를 불러올 수 있고 그러면 관계는 점점 더 어려워질 수도 있으니 산다는 것은 관계를 사는 것이리라.
나와 사물, 나와 자신, 나와 너, 나와 신의 모든 관계는 서로 이어져 있으니 예외 없이 만유인력의 법칙 내에 존재한다. 50여 생을 살고 나니 세상에 어려운 것은 일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관계를 맺고 사는 것이 인간지사라지만 그 관계의 지난함, 끈적거림, 어려움에 모두들 힘들어하고 가슴 아파한다. 인간 사이의 관계는 헝클어지기 시작하면 끝없이 복잡해지고, 단순하게 생각하면 한없이 단순해질 수 있는 것이다.
중국인들의 대화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 중의 하나가 ‘꽌씨’(關系)이다. 이 두 글자 안에는 세 타래의 실뭉치(絲)가 들어 있으니 그것이 꼬이면 얼마나 복잡해질 수 있는지 말하고 있다. 우리 인간들이 세상을 살아가며 고통받고 어려워하는 것들 대부분은 인간관계의 어려움에서 기인되는 것들이다. 네가 있어 내가 살아가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 네가 있어 어려움을 겪게 되기도 한다. 비교되는 다른 사람들이 없다면 우리가 어찌 박탈감이나 열등감 때문에 괴로워하겠는가? 그래서 그런지 서점에 가보면 관계의 기술에 대한 처세술 서적이 봇물을 이루지만 관계를 기술이나 전략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특히 사람과의 관계는 기술이 아니라 영성이어야 할 것이다. 깊은 내면의 힘과 원리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그 관계의 기술이라는 것도 금세 허무한 빈 바가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 모두는 무언가의 틈새에, 누군가와의 사이에 존재한다”라는 말이 있다. 인간은 세상을 혼자 살아갈 수 없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인간(人間)이라는 한자를 풀이하면 ‘사람 사이’라는 뜻이다 한국어로는 사람을 의미하지만 중국어는 세상을 의미한다. 사람이 살아가야 하는 기본 조건이 사람들의 사이이고 그것이 바로 세상이요 삶이니 인간이란 한자(漢字)는 세상으로 쓰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이 세상에서 함께 살아가는 인간들 사이의 관계를 동굴 속에서 추운 겨울을 함께 나는 고슴도치들에 비긴 적이 있다. 동굴 속에서 함께 추운 겨울을 나고 있던 한 무리의 고슴도치들은 온몸에 송곳 같은 가시가 돋쳐 있는 까닭에 서로 찔리지 않기 위해서는 일정한 거리를 두어야만 한다. 고숨도치들은 추위를 견디지 못해 한곳에 모여들지만 너무 가까워지면 서로 상대방의 가시 털에 몸을 찔리게 된다. 그러면 고슴도치들은 서로 비명을 지르면서 다시 홑어져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상대를 경계한다. 이처럼 고슴도치들은 온 겨울 내내 모였다, 홀어졌다를 반복하면서 살고 있는데 인간 역시 마찬가지이다. 홀로 이 세상을 살아가기에 너무도 고독하고 외롭고 힘들다 보면 서로 모이고 의지하고 무슨 동아리들이나 조직체를 만들게 된다. 그러나 가까이 상종하다 보면 서로 간에 이익의 충돌이 생기게 되는 법이다. 이익의 충돌은 반목과 질시로 이어지고, 그것이 도를 넘으면 진저리를 치며 돌아서 버린다. 그래서 사르트르가 ‘타인은 나의 지옥’ 이라고 한 것이리라. ‘제가 아니면 죄다 남’이란 우리 속담과도 통하는 말이다. 고슴도치처럼 이기주의의 가시털이 온몸에 가득 돋아 있는 우리 인간들이 남을 찌르지 않고 남이 잘되는 것을 진심으로 기뻐해 주는 천사 같은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외국인이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으로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뽑혔다. 우리 속담이 시사해 주듯이 질투는 흔히 관계를 맺은 조직체나 동아리 안에서 더 심한 법이다. 남이야 땅을 사건 집을 짓건 한 다리 건너니 별로 배 아플 것도 없지 않은가? 그런데 나와 관계를 맺는 가족, 친척, 친구들의 행불행은 나와 직접 연결된다.
중국 속담께 ‘흐르는 시냇물에 두 개의 꽃병을 흘려보내지 마라’는 말이 있다. 인간관계의 어려움에서 그 나름 현명하게 대처하는 방법으로 소개되는 내용이다. 관계가 어려운 사람이라면 함께 그 관계의 진흙탕 속으로 뛰어들어 서로 부딪히고 깨어지기보다는 여유를 갖고 멀리하며 기다리라는 의미가 담겨 있으니 대륙적인 여유에서 나오는 표현이다. 한 번 아니면 끝이라는 한국인의 불나방식 관계보다는 현명한 일이 아닐까? 관계의 중요한 법칙과 원리들에 대해 많은 말을 하지만 복음서에 비추어 가장 핵심이 되는 원리는 바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는 예수님의 가르침이라 생각된다. 부화뇌동(附和雷同)이란 말은 부정적으로 많이 사용된다. 줏대 없이 남 하는 대로 따라함을 비웃는 경우에 쓴다. 그러나 본뜻은 공명(共鳴)을 말한다. 천둥이 일면 우렛소리와 진동이 같은 물건들은 함께 울린다는 말이다. 어느 한 사람이 울면 우리가 사람인 이상 마땅히 그 울음의 주파수에 영향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 남이 울면 따라 우는 일은 인지상정이다. 남의 고통이 갖는 진동수에 내가 남과 더불어 우는 일은 진정한 부화뇌동의 공감능력이다.
함께 울 줄 아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이다. 오늘의 한국 사회에 묻고 싶다. 아들딸이 아직도 물속에 수장되어 있는데, 어찌 “이제 그만하면 될 때도 되지 않았느냐?”고 말할 수 있는가? 왜 배가 뒤집어졌는지 묻고 있는데 어떻게 좌익사상이라고 몰아붙이고 눈총을 보내는가? 천둥 따라 부는 한 컵의 물만도 못한 무감각하고 매정한 사회가 지금 우리 한국의 모습이지 않을까? 행복지수는 관계지수에 달려 있으니 정말 행복해지려면 오늘도 내 주위의 수많은 관계들을 세심히 돌아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