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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목사님 설교를 듣던 많은 성도분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대부분 목사님이 전하시던 그 복음에 다른 기성의 교회와는 다르다고 그렇기에 조심스럽게 접근하다가 그 말씀의 강건함에 한번더 놀라고
그리고 논리적으로나 성경적으로나 설교 한편마다 논문수준의 난이도로 기존의 목사님들이 유치하게 기복이나 말하고 있을 시절에
인류가 만들어낸 갖가지 철학을 오직 성경으로 반격하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해석을 강해해 오셨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더구나 그 설교 한편이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엄청난 파장으로 칼로 도려내듯 아파하셨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여기에 머무르신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어느순간 김성수 목사의 설교를 듣다보면 배경음악이 되어버린 이들도 있고
어떻게 살라는 말인가라고 더욱더 모호한 의문으로 더 힘든 신앙생활을 하고 계신분들도 많았습니다.
다른 목사님들 처럼 신앙의 행동강령을 내어주었으면 하는 분들도 계셨을테고
그토록 목사님이 배격해왔던 기복주의, 율법주의, 유대주의, 샤머니즘적인 신앙을 벗어나 제대로된 기도가 뭔지도 어떻게 해야하는지도 감도 못잡은 분도 계실 것입니다.
오순절교회의 성령의 뜨거운 기도에 익숙하신 분들은 정말 그 뜨거움이 없어져 신앙생활 자체가 붕괴된 분들도 계시고
말씀으로 탄탄하게 신앙생활하시던 분들 또한 그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이 인간의 유익, 나의 유익으로 성경과 하나님 말씀을 사용해버리는 자아가 폭로되면서
갈팡질팡하시다가 원래대로 돌아가신 분들도 적지 않습니다.
특히나 목사님이 수수께끼처럼 성경에서 숫자가 뜻하는 것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를 전하거나 히브리어, 헬라어, 수메르어, 페니키아문자 등 알쏭달쏭한 것으로 말씀을 전하실때는 도데체 우리가 무식한 것인지 목사님이 너무 앞서나가는 것인지 알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목사님은 왜 이토록 고난이도로 설교를 진행하셨을까요?
저는 몇몇의 분들은 김성수 목사님 수준으로 말씀을 따라가기위해 노력하시고 공부하시는 분들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가르치는 이는 그 수준, 아니 더 깊게 말씀을 공부하여 전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김성수 목사님은 일반 성도를 대상으로 너무 과하다할만큼 깊게 접근하셨습니다.
왜일까요?
저 나름대로 판단한 것이라 정확하지는 않겠지만
우선 처음의 이유로 성도들에게 속지 말라는 것일 것입니다.
기성교회든 개혁주의든 강대상 앞에서 만행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 유익으로 사용하는 이들을 분별해 내라는 이유일 것입니다.
그것은 목사가 바뀌어서 되는게 아니라 성도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왜곡해서 전하는 이들을 통칭해서 이단들이라고 부르는데
이 이단들이 더 열심히 공부해서 더 교묘하게 성도들을 유혹하고 더 논리적으로 사용하는 것에 속절없이 성도들이 당하는 것을 보시고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의 거짓을 폭로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접근은 그렇게 하셨지만 성경에 근간을 두고 시작하신 이래로
이땅에 예수이름을 들먹거리는 모든 종파 모든 교회가 가장 근본적인 문제에서부터 문제가 있음을 발견하신것 같습니다.
바로 '나'라는 존재에 대한 자기인식입니다.
'나'를 위한 신앙은 종교에 머물수 밖에 없습니다.
기독교는 '나'를 위한 종교가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피조물입니다.
사실 글짜그대로는 모두들 알고 계신 내용일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누구도 진정으로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지 못합니다.
김성수 목사님은 이 사실을 직시했습니다. 아 이분들이 제대로 듣고 있지 않구나.
아니 받아들일 의지가 없구나라고 말입니다.
여러분을 탓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하려는 내용이 있는데 아무리 열심히 해도 전달할 수 없는 것을 고민하셨다는 것입니다.
가끔 뻘소리로 그러면 막살아도 되겠네요~라고 하신 분들도 계신것을 보면
아무래도 전하는 이나 받아들이는 이가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김성수 목사님은 기존의 성경강해의 대부분, '예수님의 비유'를 정점으로 하여 그 이전의 강해와는 다른 방향으로 로마서강해와 산상수훈 강해를 진행하시게 됩니다.
그 전까지는 인간의 죄성, 잘못된 교회의 인식, 신앙의 열심, 기복주의 등을 배격하고 진정한 의미의 개혁주의를 표방하였다면
그 이후부터는 은혜, 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긍휼에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그렇다고 기존의 설교방법을 완전히 탈피하시지는 못하셨는데
사실 성경이해를 위한 순서가 있다고 하면 아마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우선 자기인식, '나'라는 존재의 인식입니다.
그리고 '창조'라는 인간세상에서는 할 수 없는 아니 인지할 수 없는 하나님의 활동의 이해입니다.
이 과정에서 선악판단의 주체인 '나'가 도출됩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이 세상 모든 것들 속에 '나'라는 존재감은 결코 버릴 수 없는 전부입니다.
그것을 성경이 '죄'라고 규정한다는 것에 문제가 생깁니다.
그 이후는 기독교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대다수 알고 있는 그 죄에서 구하시기 위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사랑, 은혜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져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첫발부터 우리가 기독교를 받아들일때 그 하나님 사랑과 은혜를 오해해서 받아들였습니다.
즉 나라는 존재의 인식은 그대로인 상태에서 나라는 존재의 유익을 위해 그 하나님 사랑과 복음을 땡겨서
사용해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이 우리의 삶과 아니 나라는 존재와는 아무 상관없는 것으로 인지한 자들은 그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또한 나와는 아무 상관 없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가 있음의 존재라고 인식한 사람은 그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내것으로 사용해 버리게 되어있습니다.
내가 선악판단의 주체이고 그 주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 하나님을 선악판단의 결과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바로 김성수 목사님이 발견한 문제였고 그 문제를 풀기 위해 그 하나님 사랑, 이 역사속에 창조되어진 그 하나님의 은혜를 설명하기에 이릅니다.
김성수 목사의 강해내용 중 '예수님의 비유', '로마서 강해', '산상수훈 강해'를 통해 이 부분을 아주 조금씩 전하기 위해 큰 틀을 짜신것 같습니다만 끝까지 전하지는 못하셨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다 들을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 골백번 반복했으니 어느 부분을 듣더라도 그 하나님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귀결됩니다.
다만 위에서 말한 존재의 인식과 선악판단의 주체인 나에 대한 규정이 올바로 스스로 정의내리지 못하였다면 절대로 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해가 없을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은 내 가슴이 찡하게 느끼고 내가 알아차리는 그런 류의 것이 아닙니다.
제가 1년간 이 부분으로 인해 김성수목사님의 설교를 잠시 되새김질을 하게된 이유입니다. 처음에는 미친듯이 따라가다가 존재에 대한 인식이 자리잡히면서 있음에서 없음으로 인지하게 된 결과는 바로 그 하나님의 사랑뿐이었습니다. 목사님이 말하고자 한 진리는 바로 그 하나님 사랑의 시작과 그 하나님 사랑의 결과입니다.
두번째로는 목사님은 개인적으로 이런 저런 공격을 당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과거 기독교 종파를 까는 설교를 많이 하신 것도 모자라 타 종교까지 들먹거려서 거기다가 자칭 성도라고 불리우는 내부에서까지 이런 저런 공격을 당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공격으로 보기에는 애교섞인 것도 있겠지만 사실 실망감은 끝없는 좌절이 될 수 있습니다.
목사님은 간혹 설교에서 성도가 이 세상에서 예수 믿고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고 가끔씩 말씀하셨습니다.
즉 성화론에 대해 유독 배척적이셨는데 결과적으로 놓고 보자면 성화론이라는 것 자체가 인간의 선악판단의 주체에서 비롯된 결과입니다.
바로 몇몇 성경구절이 떠올르기는 하지만 이자리에서 그들과 싸우자는것이 아니기에 논외로 두고
김성수 목사님은 이런 저런 잘못된 성경인식, 잘못된 신앙에 대하여 성도들에게 그 뿌리부터 근간을 만들어 내기 위해 그토록 어렵게 구조를 만들어 주려고 애쓰셨습니다.
사실 저의 경우 김성수목사님의 의도와는 다르게 정 반대로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감히 말하자면 김성수 목사님 스스로도 저와 같지 않았을까라고 생각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그 하나님 사랑을 알게되면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그토록 어렵게 그 구조를 인지하지 않아도 알게되고 믿게되고 따르게 되어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판단하게 된 근간은 마지막설교에서의 표적에 대한 것입니다.
율법은 몰라도 표적으로 그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녹아져 있다는 것이
그 진리가 밝혀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김성수 목사님이 아마 계속 살아계셨다면 그 하나님 사랑과 은혜에 대해 집중적으로 전하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세번째로는 목사님은 성경을 텍스트, 문자를 표피적으로 이해하는 것에 대해 배격하였습니다.
몇몇분들은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알고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가 그렇게 쉽게 이해되는 부분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김성수 목사님은 하나의 성경구절을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한 노력이 강해설교에서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성경구절을 그렇게 접근한다는 것은 일반 성도들에게는 어렵습니다.
하물며 기성교회에서는 아예 그런 시도도 하지 않습니다.
그냥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라는 나에게 유익하게 보이는 성경구절을
그냥 사용해 버리기 일쑤입니다.
즉 어느 순간에 성경을 읽다보면 그렇게 받아들여 버리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자꾸 표피적으로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 증거로 히브리어 파자를 통한 접근이었습니다.
파자에 대한 것은 제가 다른 포스트에 설명하였으니 넘어가겠습니다.
파자 의미를 다만 성경 몇줄만 쫒다보면 단 한가지 진리만 남게 됩니다.
성경은 다양한 에피소드가 적혀진 것으로 인지하는데 김성수 목사님은 오직 한 주제로 성경전체가 씌여져 있다는 것을 주장하셨습니다.
맞습니다. 파자해 보면 단 몇줄만 보셔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네번째로 김성수 목사님은 후학들을 위해 많이 애쓰셨습니다.
다만 그렇게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김성수 목사님이 앞서나가면 앞서나갈 수록 후학들은 못따라잡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진리를 전하는 목사님들로 성장하시기를 바라시면서 각 강해 한편이 논문과도 같은 이 설교의 행진을 무리하게 진행하셨을 것입니다.
더 많은 김성수 목사님의 설교속 그 하나님의 진리가 있겠지만
목사님이 전하시던 복음을 오해하지 않고
성도가 그 하나님의 사랑을 올바로 깨닫는 것을 바라면서
김성수 목사님이 진행하고 마치신 내용을 무례하지만 정리했습니다.
예수 십자가 자유!!!
Only by G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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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창조'의 뜻을 번역해내기 위한 인생이기에, 지으신 자의 손에 털리고 비워져서, 그분으로 채워지고 점령되어 돌아 가는 것이 모든 성도의 이 땅에서 존재이유일 것입니다. 그 본무를 잘 보여주신 분이 김성수 목사님이셨습니다.
지금은, 남은 자들에게 그렇게만 기억되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오직 하나님에게만 집중하신 스승의 흔적을 볼수가 있습니다
인간의 그 어떠한 가능성도 열어놓지 않으신 그분의 말씀 하나하나를 되새겨 볼때입니다
정리를 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파자에 대한것은 제가 다른 포스트에 설명을 하셨다고 하셨는데"
어디에서 볼수 있을까요?
지금까지 목사님 설교의 내용, 배경, 의도를 잘 정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앞으로도 계속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많은 교제 소망합니다.
목사님께서 고향에 오신 이후로 사랑에 중점을 두시고 (요한복음),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처음자리의 올바른 자아인식과 앎과됨(로마서강해,산상수훈)에서 누림의 단계인 진리안에서의 자유를 강조하시고,창세기 언약이야기를 통해 오해된 성경해석의 바른인식을 원어와파자로 신약과 연결하시기 위해 그렇게도 설교 말씀속에서 그사랑을 매번 느낄 수 있었던 것이였군요.어느 모임에서 목사님은 '저는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왔습니다.죽기 1초전까지 올바른 진리를 전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 할 겁니다.시간이 부족해요.이렇게 이 진리를 듣는 이들이 많이 드러남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뭔가 정리해주시니 저도 정리가 되는 느낌이네요.
동감합니다 그리고 감사 합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더 나아가 2000여년동안 인간이 만들어 논 우상이된 예수를 부수어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이해한 부분하고도 상당히 공감가는 부분이 많네요. 나누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자주 올려주세요
사족입니다만, 김 목사님의 인간론을 자칫하면 어떤 사람들처럼 절망적 죄인으로만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묵시 속에서 흠도없이 거룩하게 그리스도의 피로 완성된 그 몸을 해석하기 위한 인생으로서 성도만 '사람'(인자의 계열))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위로 난 사람의 변화, 곧 세계관의 변화와 올바른 자인식, 믿음이 주체가 된 자기부인의 열매맺음, 하나님께 정복됨까지의 참된 성화론을 강조하셨습니다. 이것이 큰 의미의 '창조'의 진의입니다. 이 부분에서 이근호식의 막살자를 매 설교마다 경계하신 것이지요. 한편으론 소위 개혁주의라는 사람들의 공격에 진짜 개혁주의를 보여주신것입니다. 귀한 글 감사드립니다
정말 귀한 글 감사~~^^
목사님 설교를 들어가기 위한 입문서 같은 ??? 느낌입니다.
정리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일학교에서 부터 내년 환갑인 이 나이까지의 교회의 코이노니아에서의 느낌은
"여일함" 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어떤 교회를 찾던지 간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실히 할 수는 없었습니다. 다만,
지상 명령인 ""사랑" "은혜"
그리고 "주 그리스도와의 연합함"
이것들을 제대로 설명 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김목사님의 핵심단어인 이러함을 강조하심은 저에게 놀라웠습니다.
인터넷 성도가,
다시 신앙의 연합체인 "교회"로 돌아 가야 되는지에 대한 문제도
계속하여 그분의 인도함을 받겠습니다. 아멘~!!
님의 배경 설명
'황용환 성도님"의 글에
전적으로 동감하오며...
故 김목사님을 비롯한 모든 성도님들의 연합함을 보고 싶습니다.
너무나도 귀한 글, 감사하였습니다.~!! 서울/옴니버스 드림
+ 또 한번의 은혜 +
어떤 맑디 맑은 저녁
장대들고 망태메고 뒷동산에 올라
하늘에 짓뿌려진 별들을 셈한 헤아림은
별이 아닌 나 자신을 받친 대지였던 줄..
이기적 사랑이 지어낸
실의, 고독 속에 나에게 보다 객관화된
지. 정. 의.를 요구했을 때
우리의 철학은 그 자체가 아니요,
그 자세였는줄..
진리와 정의는
작은 두점이어서 우리네의 어느 연장으로도.
그것을 정확히 찌르기에는 .. 무디기만 하였기에..
다만, 은총이라는 이질적 능력이
"너"는 어디에 있는냐? 로 나를 알게하시고,
"형제가 어디에 있느냐?"란 말씀으로
이웃을향한 사랑과 용서로 인도함심이니..
육에 속하여서 사망의 종이었던 영혼 구속함을
나무에 달
피 흘리심으로 자녀됨을 단번에 허락 하셨으니,
이제부터
진리이신 예수의 귄위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과 같이 하는 믿음으로
받는 삶에 머무르기보다는 주고져하는 삶을 바라옵나니
영생과 평안은 우리에게 안겨지는
다시 한번의 "은혜"인 것을...
13th/Mar/1983. 북대서양 항해 중( 엄복식:1983년도 충무로 서울 침례교회 교인의 신앙고백 서간)
반복하여 읽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목사님 말씀의 줄기들이 잡히듯, 정리해 주셔서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네요!
자주 의견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