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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26 09:19
http://blog.naver.com/ilamjcyong/100007000747
목차
1. 소설가의 가슴에 묻어둔 이야기들
2. 수필 모음
3. 작가가 주인공에게 쓰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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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묻어 둔 이야기
1. s 형에게-소설가 윤대녕
우리가 만난 지 그새 이 년이 지났군요.제 첫 창작집 「은어낚시통신」이 나온 직후였으니까요.캄캄한 밤 예비군 훈련장에서 우리는 만났습니다.하필이면 예비군복을 입고 만날 게 뭐였습니까? 하지만 뭐 어쩔 수도 없는 일이었지요.아무튼 우리는 그후 참으로 자주 만나 문학에 관한 숱한 담론들을 나눴지요.그때마다 당신은 제 작품에 대해 너무 조심스런 말만 했지요.그럴 필요가 없었는데요.아시다시피 저는 제가 쓴 작품에 대해 늘 객관적인 시선을 확보하려고 합니다.어떤 의미에선 앞으로 작품을 쓸 수 있는 시간이 많이 주어져 있잖냐는 것을 위안으로 삼고 있기도 합니다.
며칠 전에 만났을 때 당신은 처음으로 제가 쓴 소설에 대해 정식으로(?) 꼬집어주었습니다.이를테면 시원론,운명론 쪽으로 너무 기울고 있지 않냐는 얘기였지요.그러다 보면 현실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어 되레 어정쩡한 현실타협의 분위기로 나아갈 수도 있지 않냐는 지적이었지요.생각해오던 바이긴 하지만 당신한테 직접 그 말을 들으니 대뜸 느껴져오는 바가 있더군요.역시 자아와현실,운명과 역사에 대한 적절한 균형감각이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저는 곧 새로운 단·중편 소설에 들어갈 계획입니다.너무 많이 쓰는 게 아니냐고 우려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제 생각은 그렇지 않습니다.오래 전부터 미뤄온 얘기라 지금 쓰지 않으면 또 영영 쓰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우리는 80년대 초반에 대학을 다니고 청춘시절을 보낸 사람들입니다.한데 근래 와서 저는 저를 포함한 이들 삼십대 중반의 사람들이 왠지 모르게 주눅이 들어 있는 모습들을 많이 훔쳐보았습니다.묘하게 맥이 빠져 있는 우중충한 분위기 말이지요.따지고보면 우리 삼십대처럼 시대와 현실에 민감했던 세대도 없었는데 말입니다.물론 제가 삼십대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그러나 우리 청춘이 시작되고 끝난 기점이 80년대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 아닙니까.
그렇다고 새삼스럽게 후일담 소설을 쓰겠다는 얘기는 아닙니다.우리앞에는 바로 이천년대라는 인류사의 거대 시점이 기다리고 있고 그때 우리는 바야흐로 사회의 중심 세대인 사십대가 됩니다.그렇기 때문에 한편 구십년대라는 것이 제게는 늘 화두였던 것입니다.저는 이제 팔구십년대를 아우르고 이십일세기적 전망을 탐지할 수 있는 작품들을 쓰고 싶습니다.그러기 위해서라도 저는 곧 사십대가 될 우리 세대의 정체성을 확보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왠지 거창하게 들리겠지만 어떻게든 제가 할 수 있는 몫을 찾아보겠다는 것이지요.아무튼 저는 저 위악스럽던 시절의 얘기를 더 늦기 전에 써볼 참입니다.아직도 우리를 주눅들게 하는 그때 그 시절에 대해서 말입니다.개인사적으로 따져봐도 청춘시절을 짚고 넘어가지 않고서야 어떻게 장년의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겠습니까? 앞으로도 지금처럼 죽 지켜봐주시면 참으로 고맙겠습니다.
2. 단 한번의 예외-소설가 양귀자
하기야 작가라면 누구라도 그렇겠지만,이제까지 발표한 모든 내 소설은 원고상태에 있을때 이미 충분한 자기검열을 거친 다음 타자의 손에 넘겨진 것들이었다.아무리 시간이 촉박해도 스스로의 판단에 미흡하다 여겨지면 침식을 철폐하고라도 성에 찰 때까지 수정을 거듭했었다.비록 먼 훗날에 읽었을 때는 행간사이의 어색한 망설임을 발견할 수도 있겠지만 글을 쓰고있던 시점에서는 하여간 다른 누구가 아닌,바로 작가인 내가 정한 기준을 통과하지 않으면 원고를 넘기지 않았다는 이야기다.그리고 그 소박한 원칙을 지키는데 있어 견디지 못할 만큼의 괴로움이 수반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여기,단 한번의 예외가 있었다.단 한번의 그 예외는 게다가 등단 초기에 저질러진 것이어서 나는 아주 오랫동안 원칙을 지키지 못한 자의 자괴감을 멍울처럼 지니고 살아야만 했었다.그러나 내게도 할 말은 있었다.나는 소설을 쓰기 시작한 처음부터 이미 충분히 눈치채고 있었다.이 소설을 원래 의도했던 내 마음의 무늬대로 완성하는 일은 도저히 불가능이라고,그리고 당시로서는 아무리 많은 시간을 투자해도 결코 자기검열을 통과할 수 없으리란 사실을.
그때 불현듯 불가항력이란 말이 생각났고,그 소설은 예정대로 한 문예지에 「침묵의 계단」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많지도 않은,백장이 채 못되는 단편이었다.머뭇거리며 고백하자면,소설의 주인공은 스물 아홉의 나이에 세상을 버린 나의 셋째오빠였다.오빠는 일찍부터 천재칭호를 아낌없이 받았던 화가였으며 죽기 전까지 심한 알코올중독자였다.나는 오빠의 스물 아홉 생애를 그림과 술,이 두 단어로 간단히 요약해버리는 세상인식을 수정하고 싶었다.
그러나 실패했다.변명하진 않겠다….
변명하지 않는 대신,마음에 매듭을 매어둔 다짐이 하나 있었다.언젠가 때가 되면 다시 쓰겠다고.실제로 몇년 전 「침묵의 계단」을 중편으로 개작하는 작업에 손을 댄 적이 있었다.그러나 이내 중단하고 말았다.여전히 때가 아니라는 판단이었다.그때까지도 나는 오빠의 격렬한 삶이 던져준 파장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하지만 언젠가 한 천재의 삶을 설명할 날이 꼭 오기는 올 것이었다.나는 지금,고요히 기다리는 일을 하고 있다.
마지막 한마디.오빠는 생을 버리기 몇년 전부터 외딴 어느 곳의 한적한 계단을 끝없이,끝없이,화폭에 담고 있었다.그 이끼 낀 계단….하기야 작가라면 누구라도 그렇겠지만,이제까지 발표한 모든 내 소설은 원고상태에 있을때 이미 충분한 자기검열을 거친 다음 타자의 손에 넘겨진 것들이었다.아무리 시간이 촉박해도 스스로의 판단에 미흡하다 여겨지면 침식을 철폐하고라도 성에 찰 때까지 수정을 거듭했었다.비록 먼 훗날에 읽었을 때는 행간사이의 어색한 망설임을 발견할 수도 있겠지만 글을 쓰고있던 시점에서는 하여간 다른 누구가 아닌,바로 작가인 내가 정한 기준을 통과하지 않으면 원고를 넘기지 않았다는 이야기다.그리고 그 소박한 원칙을 지키는데 있어 견디지 못할 만큼의 괴로움이 수반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여기,단 한번의 예외가 있었다.단 한번의 그 예외는 게다가 등단 초기에 저질러진 것이어서 나는 아주 오랫동안 원칙을 지키지 못한 자의 자괴감을 멍울처럼 지니고 살아야만 했었다.그러나 내게도 할 말은 있었다.나는 소설을 쓰기 시작한 처음부터 이미 충분히 눈치채고 있었다.이 소설을 원래 의도했던 내 마음의 무늬대로 완성하는 일은 도저히 불가능이라고,그리고 당시로서는 아무리 많은 시간을 투자해도 결코 자기검열을 통과할 수 없으리란 사실을.
그때 불현듯 불가항력이란 말이 생각났고,그 소설은 예정대로 한 문예지에 「침묵의 계단」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많지도 않은,백장이 채 못되는 단편이었다.머뭇거리며 고백하자면,소설의 주인공은 스물 아홉의 나이에 세상을 버린 나의 셋째오빠였다.오빠는 일찍부터 천재칭호를 아낌없이 받았던 화가였으며 죽기 전까지 심한 알코올중독자였다.나는 오빠의 스물 아홉 생애를 그림과 술,이 두 단어로 간단히 요약해버리는 세상인식을 수정하고 싶었다.
그러나 실패했다.변명하진 않겠다….
변명하지 않는 대신,마음에 매듭을 매어둔 다짐이 하나 있었다.언젠가 때가 되면 다시 쓰겠다고.실제로 몇년 전 「침묵의 계단」을 중편으로 개작하는 작업에 손을 댄 적이 있었다.그러나 이내 중단하고 말았다.여전히 때가 아니라는 판단이었다.그때까지도 나는 오빠의 격렬한 삶이 던져준 파장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하지만 언젠가 한 천재의 삶을 설명할 날이 꼭 오기는 올 것이었다.나는 지금,고요히 기다리는 일을 하고 있다.
마지막 한마디.오빠는 생을 버리기 몇년 전부터 외딴 어느 곳의 한적한 계단을 끝없이,끝없이,화폭에 담고 있었다.그 이끼 낀 계단….
3. 첫사랑의 결실-소설가 박상우
듣는 사람들은 웃을지 모르겠지만,나는 여섯살 때 첫사랑을 경험했다.그리고 삼십년이 더 지난 오늘날까지도 그때의 일을 어제의 그것처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잠시만 보지 않아도 견딜 수 없이 마음 간절해지던 그리움,함께 있는 동안의 이를데 없던 평화로움,그리고 헤어지던 순간의 공포스런 안타까움과 헤어진 뒤로 더욱 절실하게 그리워지던 세월,혹은 순수로부터의 아득한 유배 과정.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난 건 직업 군인이셨던 아버지의 새로운 부임지에서였다.눈이 유난히도 크던 그 여자아이는 우리 가족이 세들어 살게 된 주인집의 무남독녀 외동딸이었다.형제자매만 없는 게 아니라,어찌된 셈인지 그녀에게는 엄마까지 없어서 어린 내 눈으로 보기에도 몰골이 말이 아닐 정도로 남루했었다.
인근에 사귈 만한 또래의 아이들이 아무도 없었으니 그녀와 내가 가까워진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으리라.그녀와 헤어져야 하는 저물녘을 나는 싫어했고,그녀와 떨어져 있어야 하는 밤을 또한 싫어했으며,그 모든 것에 대한 보상처럼 그녀를 다시 만날 수있는 아침을 너무나도 간절하게 기다리곤 했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근무지 변경으로 갑작스럽게 이사를 가게 됐을 때,대문 밖에 나와 서 있던 그녀를 지프에서 내다보며 내가 했던 생각은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이사간 곳에서 밤에 몰래 빠져나와 그녀의 집으로 다시 되돌아오겠다는 것.
내가 그녀의 집을 다시 찾아간 것은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뒤,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였다.긴긴 기다림과 그리움,그리고 인내의 세월이 흐른 뒤였지만,어이없게도 그 겨울에 그녀의 집이 있던 곳에서 내가 발견한 것은 거대한 과수원뿐이었다.
그 뒤로 아주 오랜 세월 동안,수긍되지 않는 걸 수긍하기 위해 을씨년스런 현실과 나는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그리운 것은 아무 것도 되돌아오지 않고,되돌아오지 않는 걸 그리워하는 인간의 가슴은 병든다는 것.
하지만 그런 결론과 아무런 상관 없이,지금도 나는 여전히 그녀를 그리워하고 있다.어쩌면 내가 쓰는 모든 소설의 밑자리,거기서 그녀와 나의 완성되지 않은 사랑이 전혀 다른 결실을 거두고 있는지도 모르리라.소설이라는게 어차피 우리 모두가 잊고 사는 인생의 시원을 말하려는 몸부림이 아니고 달리 무엇이겠는가.
4. 어머니와 엄마-소설가 이순원
최근 「수색,그 물빛무늬」라는 제목의 연작 형태의 장편소설을 낸 다음 여기저기서 인터뷰를 할 기회를 가졌다.사람들은 하나같이 어디서 어디까지가 체험을 바탕으로 한 사실이며,또 어디서 어디까지가 소설적 장치로서 허구냐고 물었다.
어린 시절,나를 낳은 어머니가 있는데도 나를 낳은 엄마로 알았던 또 한 엄마가 한 지붕 아래에서 살던 풍경.소설 속의 나는 커서 현실에서처럼 소설가가 된 다음 한 때 그 엄마가 살았다는 수색을 찾아보게 된다.아마 그런 것들이 소설적장치로 보이지 않고 체험과 허구 사이조차 짐작할 수 없게 하는 모양이다.또 처음으로 유년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자기 고백적이고 작가의 내면적인 작품을 써서 더욱 그런 질문을 받게 된 것인지 모른다.
정말 무엇이 나로 하여금 그런 유년의 아픈 상처를 바탕으로 한 자기 고백적인 작품을 쓰게 했을까.얼마 전 나를 찾아왔던 어떤 방송국의 문학프로그램 진행자도 내가 사는 곳이 소설 속의 주인공이 사는 집과 위치도 똑 같고,분위기도 똑같고,오면서 곰곰히 생각해보니 소설 속으로그대로 걸어온 듯한 느낌이라고 말했다.나는 내 마음에 잊혀지지 않는 상처가 그것을 쓰게 했다고 말했다.
소설 속에서 나는 그 부분을 이렇게 말했다.
수색에 날 낳은 엄마는 아니지만 또 한 엄마가 있다.어릴 때의 일이어서 그 엄마가 어떻게 들어왔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식구들 모두 그 엄마를 「수호(소설속의 내이름)엄마」라고 불렀다.나도 당연히 그 엄마가 내 엄마인 줄 알았다.그런데 어느날 학교에 갔다오니 그 엄마가 없어졌다.그래서 버릇처럼 우리 엄마 어디 갔어요,하고 묻자 어머니가 무겁고도 어두운 얼굴로 느 엄마 서울에 니 옷 사러갔다고 해 비로소 그 엄마가 날 두고 떠났다는 것을 알았다.그냥 그것만 안게 아니라 그 말을 듣는 순간 오래도록 잊고 있었던 무엇을 깨닫듯 직감적으로 그 엄마가 내 엄마가 아니라 어머니가 내 엄마라는 것을 알았고,그러면서도 한꺼번에 여러 마음으로 밀려오는 빈 자리의 허전함 속에 어린 마음에도 나는 그동안 그 엄마 아들 노릇을 해온 것에 대해 진짜 내 엄마인 어머니 앞에 얼굴을 들지 못할 부끄러움과도 같은 죄의식을 느꼈다.
그것이 내 어린 시절 가장 큰 상처였고,또 가장 오래도록 가슴에 묻어둔 이야기였는지도 모른다.
5. 사라진 사내-소설가 구효서
한 사내가 있었다.나이는 40대 중반.어느날 연기처럼 그가 사라졌다.
그는 궁벽했던 내 고향마을의 유일한 인텔리였다.모두들 소를 몰고 들에 나가는 아침에 그만이 양복을 입고 수리조합으로 출근을 했다.키는 작고 왜소했으나 걸음걸이는 그렇게 당당할 수가 없었다.
마을의 대소사를 논할 땐 늘 그의 의견이 존중되었다.그의 집 안마당엔 낯선 귀화화초들이 자라고 있었다.그의 아내는 항상 흰 얼굴로 웃었고,그의 세 딸도 시리도록 낯이 희었다.
화목하고 넉넉한 가정의 본보기였으며 이웃과 형제들은 그를 부러워했다.사내는 우리를 볼 때마다 집안으로 불러들여 코를 닦아주고 약과를 나누어 주었다.
그런 그가 어느날 사라진 것이다.책상 위엔 출근할 때 들고 나서던 담황색 서류가방과 주민등록증이 놓여 있었다고 한다.평소에 그가 쓰던 모든 것들을 고스란히 남겨둔 채,다만 검정색 단화 한 켤레만을 신고 어디론가 떠나버렸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 소식이 없다고 한다.열 서너 살이었던 나에겐 그 이야기가 전설 같았을 뿐이다.그 아저씬 새가 되었을까.
그러나 어쩐 일인지 그 이야긴 내게서 통 잊혀지질 않는다.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청대숲으로 둘러싸여 있던 사내의 집과,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던 가방과 주민등록증 따위가 선연하게 떠오르며 뭉클해지는 것이다.
얼마 전 가수 김광석이 죽었을 때도 나는 내 고향마을의 그 사내를 떠올렸었다.사람들은 김광석의 죽음을 두고 알 수 없다고만 말했지만 나는 그냥 고개가 끄덕여졌던 것이다.
홀연한 사라짐.그걸 꿈꾸는 사내들이 우리 주위에 의외로 많다는 사실을 마흔이 되면서 깨닫게 되었다.그 사내의 전설이 왜 내게서 잊혀지지 않고 세월이 갈수록 더욱 애틋해져만 갔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무엇이 남자들을 떠나게 하는 것인지.그 무엇에 대해 이제 조심스레 펜을 들어 쓸 수 있을 것 같다
6. 고원 위로 부는 바람- 소설가 김영현
얼마전 소설가 박완서 선생을 모시고 소설가 이경자 선배,시인 민병일씨와 함께 티베트를 다녀왔다.중국의 상해,성도를 거쳐 티베트 최대 도시 라싸에 도착한 다음,마이크로 버스를 타고 티베트고원을 지나 히말라야를 넘어 네팔의 카트만두에 이르는 멀고 먼 길이었다.
그 길을 가는 동안 각자가 보고,듣고,느낀 바야 같을 수는 없겠지만,또 그럴 필요도 없지만,이 여행이 준 깊은 정서적 충격은 우리 모두에게 삶의 근원적인 질문과 마주하게 만들기에 충분하였다.평균 해발 사천여미터의 고도에서 오는 산소결핍증과 기압에 시달리며 우리가 본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는가.
마치 볼록렌즈를 통과해 나온 것처럼 일직선으로 내리쬐는 햇살과 광활한 황무지를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거세고 메마른 바람,그리고 에베레스트를 비롯한 세계 최고의 산들이 빙벽처럼 서있는 히말라야 연봉,그 위에 펼쳐진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과 흰 구름,해발 오천미터에 떠있는 거대한 호수,그 호수가에서 퍼질고 앉아 하염없이 하늘을 바라보며 먹은 도시락 점심….
그리고 무엇보다도 티베트의 아픈 역사를 안고 살아가는 그곳 헐벗은 인간들의 모습은 돌아와서도 내내 머리 속을 떠나지 않고 무슨 화두처럼 맴돌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문명은 언제나 자기를 세상의 중심으로 생각하게 만든다.그리고 언제나 인간의 위대함,말하자면 이성적 존재로서 인간의 힘을 과신하게 만든다.그럴지도 모른다.인간은 이 척박한 우주의 한 바닷가에,또는 강가에 도시를 세우고 수많은 기계와 도구를 발명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문명 역시 지구의 다른 거대한 황무지에 비하면 그야말로 비닐하우스속의 평화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황량한 티벳 고원을 내려와 오백여킬로가 넘는다는 엄청나게 깊고 긴 골짜기를 지나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 이르렀을 때에야 비로소 안전지대에 이르렀다는 생각에 한숨을 놓았다.우리는 곧 문명이 주는 안온함과 편리함에 안겼다.고급호텔에 여장을 풀고 넓은 잔디와 갖가지 열대성 꽃들이 피어있는 정원에서 인도계 보이들이 날라주는 음식으로 식사를 했다.
그러나 나는 갑자기 이 모든 기름진 음식과 문명에 잠시 현기증이 이는 것을 느꼈다.마치 내 영혼과 몸에 뻑뻑한 지방이 끼는 것 같았다.그와 함께 마치 인간의 어리석음을 일깨워주는 듯 티베트고원 위로 불어가던 그 황량한 바람소리가 미치도록 그리워지는 것이었다.
7. 놓치지 않는 끈- 소설가 권현숙
생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할까,어떤 행동을 할까.칠팔 년 전쯤으로 기억된다.죽음에 이른 사람의 심리에 대하여 막막하기 이를 데 없었던 나는 호스피스로 봉사하는 분의 도움으로 무료병동,행려환자 병실을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얼핏 보기에 일반 병실과 다를 게 없어 보였다.그러나 채 삼십분도 지나지 않아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너나 없이 아프면 몸과 마음이 약해져 아무 것도 아닌 일에 눈물 흘리고 어디가 아프다,어떻게 해달라,하소연이 많은 법이다.그게 정상이다.그런데 무슨 일인가.이 병실은 너무도 조용하지 않은가.말 한마디 없고 신음소리도 내지 않고 뒤척이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주면 먹고,들려 누이면 들려 누여지고,옷벗기면 아무 감정없이 벌거벗겨지고….아직 숨쉬고 체온이 남아 있으나 그들은 살아있는 것이 아니었다.표정도 감정도 의사표현도 없는 살아있는 물체였다.나는 소리없는 참살의 현장을 목격한 듯 충격을 느꼈다.사람은 몸이 죽기 전에 정신이 먼저 죽는구나,그 경황에도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의사들이 들어왔다.문쪽 침대의 청년을 치료하기 위해서였다.갓 서른이 됐을까.이 방에 처음 들어올 때부터 그 젊음으로 하여 마음 쓰이던 사람이었다.그는 내가 사과 한 쪽을 권하자 눈을 감아버렸고 컵에 빨대를 꽂아주자 고개를 외면하여 나를 당황시킨 사람이기도 했다.그 청년은 결핵 말기에 두 다리 동상으로 무릎 아래를 모두 절단한 상태였다.몸은 돌이킬 수 없이 병들고 마음은 누구에게인지 모를 분노로 가득차 있었다.의사들이 그의 침대시트를 들추는 게 보였다.나도 모르게 돌아서서 창밖을 내다보았다.얼마나 아플까,나는 잘 가꾼 잔디를 건성 바라보며 손가락을 꼭꼭 누르고 서 있었다.등 뒤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또 한차례 절단수술을 해야 할 정도로 다리의 염증이 심했다고 한다.그러나 수술받을 체력조차 없는 그는 매일처럼 절단부위의 고름을 훑어내야 했고 그때마다 고통에 극한 비명을 질러대어 병동의 환자들이 공포에 떨었다고 한다.그때 젊은의사의 무심한 농담 한마디가 지금껏 내가슴에 비수처럼 박혀있다.아가씨가 있어서 오늘은 얌전하네.호스피스들은 주로 오십대였고 남자환자들 뿐인 병실이었다.내 스스로 어떤 위해를 가한 건 아니지만 내 존재 자체가 죽어가는 사람의 고통에 찬 입을 틀어막은 역할을 한 게 아닌가.그의 젊음과도 무관하지 않은 일이겠지만 사람은 죽는 순간까지 남자로서,인간으로서,부여받은 본연의 긍지를 버리지 않는다는 걸 그때 비로소 알았다.이미 생의 끈을 놓쳐버린 이의 손이 거머쥐고 있는 한 가닥 자존심….인간이란 얼마나 신비로운 존재인가.그가 누군인지,어떤 사연으로 그렇게 죽어가고 있었는지 영원히 모르겠지만 그 쾡한 눈망울만은 언제까지라도 가슴 한 구석에 남아있을 것 같다.
8. 너 운동하는 놈 맞아? - 소설가 방현석
벌써 십년도 더 전의 일이다.
지금은 내란혐의로 구속되어 있는 중죄인들이 나라를 통치하던 시절이었다.내가 다니던 대학의 총학생회를 책임지고 있었던 나는,덕분에 치안을 담당하는 관청에 부지런히 초대되었으며 번번이 매타작을 당하고 그 매의 흔적이 사라질 때까지 유치장에서 구류를 살아야 했다.
나의 지도교수였던 그분이 경찰서로 찾아온 그날도 나는 며칠동안 흠뻑 난타를 당한 다음이었다.엉망으로 부어오른 나의 얼굴을 보고 그분은 내게 물었다.
『너,방현석이 맞아?』 『예』 『그런데 얼굴이 왜 그래?』 『…』
그분은 옆에 앉은 간부에게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사람을 이렇게 만드는 경우가 어딨소?』지금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겠지만 그 당시는 쉬운 말이 결코 아니었다.『우린 안 때렸어요.그렇잖아?』
그렇게 말하는 자의 얼굴은 야비하고 능글맞은 웃음으로 얼룩져 있었고 나는 비참한 심정으로 대답했었다.『제가 넘어졌어요』
더 맞을까봐 두려워서 한 거짓말은 아니었다.맞으면서 당했던 인간으로서의 모멸,그것을 그분 앞에서다시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너 운동하는 놈이야?진짜 운동하는 놈은 검거되는게 아냐』
그렇게 말하고 그분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누구에게도 인사를 하지 않고 정보과 사무실을 나가 버렸다.그 자리에는 당시의 교수들이 꼼짝 못하던 정보기관의 담당자도 앉아 있었다.자존심이 상한 그자는 그분의 뒤통수에다 대고 소리쳤다.
『저 자식 손 한번 봐야 돼』
그분은 그 소리를 들었을까,흐려진 내 시야에서 사라져가는 그분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그분의 소설 「심야의 정담」이나 「히포크라테스 흉상」을 읽었을 때 받은 감명과는 또 다른 어떤 느낌으로 몸을 떨었다.대학을 내팽개친 나를 졸업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애쓰고 그 때문에 피곤한 일을 당했다는 사실을 안 것은 얼마 전의 일이지만 나는 아직 고맙다는 인사 한번 하지 않았다.
내년이면 벌써 그분의 회갑이다.그분이 80년대 이후로 소설을 쓰지 않는 것을 불만스러워 하는 후배들의 얘기를 듣는 자리에서 나는 십년도 더 전의 그날 정보과 사무실에서 보았던 그분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가만히 웃었다.그분은 70년대 발표했던 불꽃같은 작품들에 결코 부끄럽지 않은 문사의 길을 걸어오지 않았는가.아무도 자신의 편이라고는 없던,그 얼음같은 공간에서 떨고 있는 제자에게 그분은 문사란 모름지기 어떠해야 하는가를 몸소 보여주시지 않았던가.
9. 세번의 부정 - 소설가 김소진
나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는 사람을 대할 때면 왠지 안절부절 못하는 버릇이 있다.남들앞에서 자기 아버지를 부정해본 아들로서의 불안한 체험이 되살아나기 때문이다.그 진땀 나는 현장을 붙들어 날카로운 압핀으로 기억의 게시판에 꽂아두는 구실을 하는 게 바로 그 희미한 미소이다.
그 첫번째 기억은 초등학교 일학년 때의 운동회 날에 닿아 있다.공책이 선물로 걸린 달리기가 한창 펼쳐지고 있는데 누군가 나를 찾는다고 일러주어서 후문 쪽으로 가보았다.거기에는 당시 쓰레기 손수레를 끌던 아버지가 추레한 작업복을 입은 채 교문 너머에 서 있었다.손에는 나에게 줄 빵과 마실 것이 든 종이봉지가 들려 있었고.
아버지는 어서 다가오라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쭈뼛쭈뼛 다가가 종이봉지를 건네받았다.그때 뒤통수에서 담임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소진아,네가 뛸 차례가 다 됐는데 여기서 뭐하지?』 나는 예쁜 여선생님과 코밑 물기가 질번드르하게 번진 채 야릇한 미소를 띠고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 사이에 서서 고개를 푹 꺾었다.한참 뒤 『아버지시니?』하는 질문에 나는 고개를 저었었다.
두번째 기억은 아버지와 함께 구멍가게에 진열해 놓을 물건을 떼러 간 길음시장통의 한 도매상회안에서 이뤄졌다.나는 쪼그리고 앉아 누덕누덕 기운 정부미 부대에 아버지가 조금씩 골라내는 소주,과자,껌 따위를 주섬주섬 담고 있었다.『어머 쟤 소진이다!』 학원으로 가던 우리 학급 반장과 여자애들이 날 내려다 보고 있었다.
세번째 기억은 고등학교 이학년 말 무렵일 것이다.학교에서 학생 저축예금이 결산됐으니 길음시장 근처 은행에서 돈을 찾아가라고 했다.
나는 천 원이 채 안 되는 돈을 받기 위해 은행 의자에 앉아 아는 애들과 함께 기다리는데 도매상에 물건을 떼러 왔던 아버지가 불쑥 들어와 아는 체를 하였다.물건값이 모자란다며.『야,누구야?』 『몰라(모기만한 목소리로)…』 그때 아버지의 또 그 알듯 말듯한 미소.
최후의 만찬에서 예언한 예수의 말대로 그를 세번 부정하게 된 베드로는 새벽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크게 깨달았다고 한다.그러나 아버지를 세 번 부정한 나는 아직도 그 명쾌한 닭 울음을 듣지 못하고 미망에서 헤매고 있다.그 닭 울음소리가 들리기를 고대하는게 내 글쓰기의 한 화두라고 하면 안 될까.
10. 네 왼손은 내거야-소설가 은희경
고3 시절 내가 지독한 사랑에 빠진 대상은 같은 반 여자애였다.그애는 나와 같은 모범생 꼬마들과는 다른 뒷자리의 아이였다.수업시간에 번호로 학생들을 호명하는 선생님께 끝내 대답을 거부했고 자율학습 시간에 제멋대로 집에 가버리기도 했다.교내 체육대회 때 그애는 농구선수로 운동장을 누볐다.반바지 차림의 그애가 골을 넣을 때마다 다리를 덜덜 떨며 환호하는 아이들을 나는 질투에 차서 노려보았다.
그애를 좋아하면서 나는 더욱더 여자다워졌다.사흘이 멀다하고 교복 컬러에 풀을 먹였고 손에는 언제나 손수건을 쥔 채 사뿐사뿐 그애 앞을 지나다녔다.심지어 그애에게 몰두하기 위해서 어머니를 졸라 멀쩡한 집을 두고 학교 앞에서 하숙을 하기까지 했다.드디어 어느날 밤 자율학습 시간에 그애가 나를 불러냈다.함께 비에 젖은 운동장을 네바퀴나 돈 일은 지금까지 내가 겪은 그 어떤 데이트보다 황홀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그때 내 나이 열여덟이었던 것이다.
그 당시 지방의 고3생들은 입시 막바지에 학교의 양해를 얻고 서울에 있는 입시학원에 다녔다.내가 서울로 올라가기 전날 우리는 내 방에서 촛불을 켜놓고 밤새도록 해리 닐슨의 「위다웃 유」를 들었다.꼭 껴안은 우리는 숨이 멈출 것만 같았다.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다음해 나는 서울의 대학에 진학했고 그애는 재수생이 되어 지방도시에 남았다.떠날 때 그애가 말했다.『아무하고도 왼손으로 악수하면 안 돼.네 왼손은 내거야』 하지만 두 달도 지나지 않아 나는 축제에서 남자에게 왼손을 잡힌 채 포크댄스를 추고 있었다.여름방학에 그애를 만났지만 남자친구를 질투하는 그애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나는 변해버렸다.나는 더이상 편지도 쓰지 않았다.
이따금 만났지만 우리는 어쩐지 서먹서먹한 관계가 되었다.우리가 서먹함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결혼을 한 이후인 것 같다.나보다 먼저 결혼한 그애는 기꺼이 나의 성문제 카운슬러가 되어주었고 남대문에 데리고 가서 그릇 사는 일을 돕기도 했다.그애의 살림살이는 야무지고 깔끔하다.반면 나는 좀 대충이다.이제 굳이 여자다운 쪽을 찾자면 단연히 그애이다.
며칠 전 점심을 먹으며 그애가 말했다.고등학교 때 자기가 반항적이었던 것은 기존질서를 받아들이려는 전제가 있었기 때문이고,내가 순종적이었던 것은 그 질서로부터 얼마간 벗어나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냐고.결국 보수적인 것은 자기였다고.
요즘 내가 소설을 쓴답시고 주변에 소홀한 것을 완곡어법으로 꾸짖는 것이기도 하지만,사실 그애는 삶의 타의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11. 89년의 고마운 사건-시인 양문규
내가 맨 처음 서울 생활을 시작한 것은 80년 중반이다.선배 문인 소개로 잡지사에 첫 직장을 잡을 때였다.모든 것이 낯설고 어설퍼 소심하게 지낸 시기였다.좌절과 절망이 뼈저리게 느껴진 때도 그때였다.나는 심한 우울증에 빠져 나날을 술로 달랬다.결국 다니던 직장을 자의반 타의반으로 그만두고 무조건 고향으로 내려갔다.
내가 다시 서울 생활을 시작한 것은 낙향한 지 3년뒤인 89년 3월초다.민예총이 결성되고 사무국에서 실무를 맡아보게 된 것이 시작이다.그때 민예총의 사무총장은 신경림 선생님이셨다.선생님과의 인연은 민요기행으로 거슬러 올라간다.일년에 한 두번쯤은 산간오지마을을 찾아 다니며 민요며,민속신앙 등을 발굴하기 위해 그렇게 동분서주할 때였다.
서울로 올라오게 된 것은 선생님과의 전화대화 때문이었다.89년 음력 열엿새던가.정월 대보름날 과음한 탓으로 새벽녘 배앓이와 심한 두통으로 잠 못 이루고 있을 때,전화벨이 울렸다.『양문규씨 나 신경림인데 서울 좀 올라와야것어.이따 인사동 민예총에서 좀 보자고』 용건이 뭔지 여쭤볼 틈도 없이 전화는 일방적으로 끊어졌다.나는 무작정 뒤틀리는 몸을 이끌고 곧바로 민예총을 찾았다.
선생님은 내 손을 굳게 잡으시더니 『고생 좀 같이 하자』 그 한마디 말씀을 하시고는 자리를 마련해 주셨다.그날 이후 나는 직장 아닌 직장에서 선생님을 모시고 민예총의 실무를 3년간이나 보게 되었다.
나는 가끔 민예총 시절을 생각해 본다.선생님의 그 한마디(고생 좀 같이 하자)때문에 그냥 주저앉아 일하게 된 것이 순진해서 그런건지 아니면 어리숙해서 그런건지 분간이 가지 않을 때가 많다.하지만 분명한 것은 직장도 아닌 직장에서 선생님과 3년간 일을 했다는데 있다.
어렵고 고생스러웠던 민예총 시절.그때 민예총은 임의단체였다.호주머니(봉급)사정만이 아니라 정부의 탄압국면이 계속되는 시기이기도 해 근무조건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그런데도 나는 군소리 하나 없이 그곳에서 제 일을 묵묵히 해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건 순전히 선생님의 따뜻한 눈빛과 온정의 손길때문이었다.『고생 좀 같이 하자』는 첫 말씀 때문만이 아니라 선생님이 건네주는 다정다감한 언어들이 시처럼 나의 가슴에 짙게 묻어났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도 어떤 어려움이 닥쳐 좌절과 절망으로 고민할 때 그 시절 선생님과의 고마운 인연을 잊지 못한다.그것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자신을 지탱해주는 큰 버팀목이 되어 주었고 희망과 용기를 한껏 복돋아 주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12. 내 젊은 날의 편지-소설가 이승우
열 다섯 살이 되던 해부터 나는 서울시민이었다.전깃불도 없고 버스도 들어오지 않는 벽지에서 중학교 1학년까지 보냈던 나는 내성적이기까지 해서 당연히 도시와 도시 사람들에게 잘 적응하지 못했고,그래서 늘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지냈다.
그 무렵에 내가 열중한 것이 한 가지 있었다.아마도 외로움과 소외감이 배경을 이루었을 그것은 한 여학생과의 편지 주고받기였다.그녀는 내가 1년을 다녔던 시골 중학교의 학생이었는데,글을 제법 잘 썼고,특히 글씨를 예쁘게 썼으며,키는 작고 얼굴은 둥근 편이었다.
그녀와 나의 편지 왕래는 내가 서울로 올라온 그 이듬해부터 시작되었다.도시와 도시적 삶으로부터 소외감을 느끼고 있던 나에게 그녀는 일종의 환기구 같은 구실을 했다.나는 진지했고,어떤 의미에서는 필사적이었다.온갖 개똥철학을 다 동원하고 갖은 치기를 부려가며 장문의 편지를 여러 밤에 걸쳐 몇번씩 고쳐쓰곤 했다.그리고는 이튿날부터 그녀의 답장을 기다렸다.
내가 질서없이 읽어댄 책들 속에서 발췌한 이런저런 문장들이 내 가난하고 옹졸하며 편집적인 의식을 대변하기 위해 동원되곤 했다.나는 한 권의 책도 제대로 읽지 않은 채로 겁도 없이 니체와 카프카와 헤세와 지드를 깡그리 이해하는 양했다.어쨌든 정서적으로 불안하고 혼란스런 그 시기를 나는 그런 식으로 그녀에게의 편지쓰기에 몰두함으로써 건너갔다.그녀는 그런 점에서 나의 은인이었다.
문제는 나의 의식의 단계가 한 발짝쯤 높아진 다음에 일어났다.그런 시간이 갑자기 찾아왔다.겁도 없이 함부로 인용한(혹은 잘못 인용한),그래서 말도 되지 않는 니체와 카프카와 헤세와 지드를 나는 견딜 수가 없었다.내가 구사한 온갖 개똥철학과 갖은 폼을 다 잡고 써댄 치기만만한 문장들이 역겹고 수치스러워서 어떻게 할지 몰랐다.그 부끄러운 글들이 나 아닌 누군가의 수중에 있다는 사실이 소심하고 내성적인 고등학교 1학년 남학생의 얼굴을 화끈거리게 했다.
그리하여 그해 여름 방학 때 나는 고향에 갔다 오는 길에 광주(그녀는 광주에 있는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에서 그녀를 만나 내 편지들을 보여달라고 했다.그녀는 놀랍게도 내 편지를 한 장도 버리지 않고 모아두고 있었다.나는 빼앗듯이 그 편지를 돌려 받았다.읽어 보고 다시 돌려 주겠다는 나의 말을 그녀는 믿었을까.나는 그것들을 읽어보지 않았다.읽을 수가 없었다.서울로 올라오자마자 바로 찢어버렸고,다시는 편지를 쓰지 않았다.그리고 그 이후 그녀를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수치심 때문이었다.
나는 무슨 짓을 한 것일까.수치를 만회하기 위해서 수치를 범했다.지금은 내가 보냈던 그 부끄러운 편지들이 아니라 그 편지들을 그녀에게서 빼앗은 나의 치졸한 행동이 더 나의 얼굴을 화끈거리게 한다.그 이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그녀를 다시 만난다는 상상은 그래서 차마 하지 못한다.나는 아직도 그다지 마음이 크지 못하고 부끄러움도 여전히 잘 타기 때문이다.그때의 그 부끄러운 행동에 대해 용서를 빌기 위해 그녀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만일 우연히 그녀를 만나게 된다면 우선 용서부터 빌고 이해를 구해야 하리라는 생각은 하고 있다.
13. 그 새벽의 죽음 -소설가 박덕규
나는 잠귀가 아주 밝은 편이다.아이가 이 가는 소리,전화벨 소리,아내가 특별히 일찍 일어나려고 맞추어 놓은 시계 자명종,새벽비….이런 소리 때문에 눈을 뜨고는 더 잠 못이루고 괴로워하곤 한다.
그 중에서도 나를 깨워 놓고는 한동안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이게 하는 소리가 있다.대체 무슨 소리에 잠이 깼는가.나는 한참 생각 끝에 도어형 문이 몇 번 덜컥거린 뒤 『명화야,명화 어딨어?』하던 화급한 어머니의 음성을 찾곤 한다.
남자 형제만 있는 우리 집에는 늘 식모를 들였다.명화라는 식모가 우리 집에 산 때는 내가 중1때.고향 일가의 집에서 자라던 고아 출신이라는 명화는 그 무렵 열예닐곱 나이였다.야위고 착하다는 것 외에 별 특징이 없었다.다만 그녀는 가수가 되고 싶다고 했고,실제로 노래를 꽤 잘했다.『들에는 들국화 소소로이 피고 길에는 코스모스 두런두런 피었네』패티김의 노래 한 곡을 나는 온전히 그녀 때문에 알게 됐다.
당시 단층 양옥이던 우리 집은 안방,마루,작은방이 본채였고,도어 하나를 통과하면서 시작되는 쪽마루를 끼고왼편에 사랑방,그 맞은편에 목욕실과 화장실이 있었으며,명화가 기거하는 곳은 본채에 딸린 부엌 옆에 마련된 자그마한 부엌방이었다.그날 나는 보통 때처럼 작은방에서 자고 있었다.새벽,나는 본채에서 쪽마루로 나가는 도어가 덜컥거리는 소리를 들었다.잠시 후 어머니가 도어를 열면서 『명화야,명화 어딨어?』라며 급하게 찾는 소리가 났다.나는 누운 채 『명화,화장실 갔어요』하고 대답해 주었다.
그리고는 한참 후였다.어머니가 형들의 이름을 호명하면서 집안은 갑자기 귀기서린 분위기가 되었다.명화는 자신의 부엌방에 고이 잠들어 있었고,흔들어도 깨어나지 않는 그녀를 셋째형이 들쳐업고 대문 밖으로 달려가는 것을 나는 뒤늦게 일어나서 겁먹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사인은 심장마비,명화는 그렇게 갑자기 죽었다.
명화는 그날 새벽에 결코 화장실에 간 적이 없었다.어머니가 일어나 몇차례 도어를 여닫으면서 낸 소리 중 하나를 내가 잠결에 명화가 화장실로 가는 소리로 잘못 알았을 뿐이다.만약 그때 명화가 화장실 갔다고 내가 말하지 않았다면,어쩌면 어머니는 좀더 빨리 명화 방을 두들겼을지 모른다.내가 지금까지도 가끔씩 도어가 덜컥거리는 소리를 듣고 잠이 깨는 일도 아예 없었으리라.
14. 열 살 때 잊지 못할 추억-소설가 원재길
어린시절에 내 별명은 「빼빼」였다.워낙 약골이어서 툭하면 앓았다.장티푸스,소아마비,홍역에다가 독감이라는 독감은 도맡아서 앓았다.그것은 공포가 동반되는 아픔이었다.다만 무섭고 슬프고 다시는 못 일어날 것같은 불길한 아픔이었다.학교에서 돌아오는 길로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그대로 쓰러져서 버짐핀 얼굴로 시름시름 앓을 때가 많았다.
열살 때던가,저녁나절에 빈방에서 홀로 앓은 적이 있었다.그런 날은 불 지핀 방바닥의 그 뜨끈뜨끈한 기운이 왜 그리도 몸을 가라앉게 만드는지.찬바람을 좀 쐬면 한결 정신이 들 것 같았는데 손가락 하나 까딱거릴 기운이 없었다.그날따라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불도 켜지 않은 채였다.
대여섯 시간 동안 온몸에 식은땀을 흘리며 기다린 사람은 할머니였다.『할머니』 하고 속으로 수백 번은 더 뇌었다.『이렇게 죽고 마는구나』하는 절망감속에 점차 의식이 희미해졌다.
『얘야,많이 아프구나』
할머니가 돌아오신 건 한밤중이었다.방문을 열고 들어서는 할머니의 배경으로 달빛이 번져가는 희뿌연 하늘빛이 보였다.할머니가 머리맡에 앉아서 손으로 이마를 짚어주셨다.참으로 희한한 일이었다.이내 몸에서 열이 내리면서 모든 두려움이 사라지고 안도감이 일었다.어린 나는 곁에 누운 할머니의 쭈글쭈글한 젖을 만지다가 잠들었다.
할머니는 겨울날 어느 새벽에 마당으로 내려서는 순간 빙판에 미끄러지는 바람에 갑자기 생을 마감하셨다.그 분이 친할머니가 아니라는 걸 안 지 얼마 안되어서였다.전쟁때 친할머니가 돌아가신 뒤에 우리집에 들어온 할머니는 예순 다섯 해의 삶을 마치기 전까지 할아버지의 화분공장에서 일하셨다.늘 머리에 수건을 두른 모습이셨다.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생업과 다른 형제들을 키우는 일에 바쁘셔서,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할머니의 손에서 자랐다.할머니는 단 한번도 나를 야단치지 않았고 오로지 사랑 하나로 대하셨다.내가 아플때면 어떻게 알았는지 가장 먼저 나타나는 사람은 할머니였다.이즈음 세상살이에 치여 몸도 마음도 엉망으로 아플 때,잠자리의 어둠 속에서 『할머니』하고 조용히 뇌곤 한다.
15. 15년만의 전화-소설가 정영희
얼마전,오전 여덟 시 이십 분에 전화가 왔다.누군가 전화를 하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다.나는 시계를 보며 수화기를 들었다.목소리가 아주 굵은 남자가 나를 찾았다.누구냐고 묻자,K라고 했다.K라?어머,K!나는 놀랍고 반가워 거기가 어디냐고 물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입니다』 『아,뉴욕에 계시군요』
그는 나와 통화가 되면 꼭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고 했다.내가 왜요?하고 묻자,영희씨의 청춘 마지막장에 나타나 무척 괴롭혀드렸잖아요,하고 말했다.나는 웃음이 나왔다.K는 십오년이 지났는데도 저 연극적인 대사는 여전했다.
그는 지금의 남편이 군에 있을때 내게 다가온 남자다.그는 군엘 다녀왔고,장학생이었고,인물이 아주 좋았다.그러나 난 군에 가 있는 지금의 남편을 배신할 수 없었다.그는 언덕 위에 있던 친정집을 올려다보며 비를 맞고 울고 서 있기도 하고,매일 강의실 앞 잔디에서 나를 기다리기도 하고,우리 부모님이 다니는 성당에 매주 나가 우리 부모님이 자기 얼굴을 익히게도 했다.그러나 운명의 신은 그와 나를 묶어 주지 않았다.내가 결혼할 때 쯤 그도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결혼 후,생활이 힘겨울 때마다 K가 생각나는 거였다.그라면 내게 어떻게 대했을까.비가오거나,눈이오거나,홀로 커피를 마실 때 K는 어느덧 내게 그리움이란 기호가 되어 다가와 있었다.그런 K가 전화가 온 것이다.십오년만에.그는 뉴욕에서 내 책을 봤다고 했다.
『영희씨,지금 여기는 붉은 노을이 온 하늘을 뒤덮고 있어요』
그는 뉴욕의 제일 높은 빌딩에 앉아 저녁 노을을 바라보다,한국에 있는 내게 전화를 한 것이다.그는 언제나 보고 있으니 좋은 글 많이 쓰라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그리움이란 희망의 다른 이름일까?
평생 얼굴을 마주하지 않더라도 그리운 이끼리 잊지 않고 먼 발치서 바라봐주는 눈길만으로도 고단한 삶을 견딜 수 있게 한다.
16. 바보의 어떤 웃음-성석제
어린 시절,한 동네에 살던 사람 중에 겉보기에는 어디가 남보다 못한 것도 아닌데 팔푼이 취급을 받는 이가 있었다.성은 김이요,「씨」를 뜻하는 일본말에서 온 「상」을 붙여 「김상」으로 불렸다.그건 다른 장애자들을 그렇게 취급하듯 어른이고 아이고 막 불러대는 이름이었다.그는 동네 제일 오른쪽의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에서 혼자 살았다.아이들에게 그는 가난과 불운의 대명사였고 「나중에 김상같이 된다」는 말은 게으른 아이를 나무라는 경구였다.
그 대신 그는 일을 할 때는 두세 사람 몫을 하는 상일꾼이어서 농번기에는 영웅대접은 아니더라도 사람대접은 착실하게 받았다.남들보다 더 받은 것은 아니고 그 때에 한해 일인분의 대접을 받았다는 뜻이다.그때가 지나고 나면 그는 또 가장 가난하고 예의를 모르고 형편없는 인간으로 격이 떨어졌다.
하지만 그가 키우는 나무들은 달랐다.그의 집 안에는 감나무,대추나무,호두나무,모과나무 같은 유실수가 그가 시시로 갖다붓는 시커먼 거름을 먹으며 기름진 잎사귀를 번들거리며 울울하게 자랐고 때가 되면 기관총탄 같고 포탄 같은 열매들을 마당에 쏟아냈다.그런데 그는 그 풍성한 수확물들을 걷어들이는 법이 없었다.홍시가 발에 밟혀 터지건 말건,대추가 말라비틀어지건 말건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아이들이 참다 못해 기어이 나무 위에 매달리던 그때 겁이 많은 아이들은 언제든 도망갈 준비를 하고 멀찌감치 떨어져 구경을 하곤 했다.
언젠가 자신의 집 뒤에서 엽연초를 물고 지게작대기를 짚은 채 가만히 그 광경을 내려다 보고 있던 그를 본 적이 있다.그때 그의 얼굴에는 웃음이 흐르고 있었다.그 웃음이 따뜻해 보여서 오히려 무서운 느낌이 들었다.꼼짝할 수 없는 몇초의 시간이 지난 다음 내가 그를 보고 있다는 걸 눈치챈 그는 아래를 향해 아이들이 놀라 떨어질 정도로 무서운 고함을 질렀다.그러나 늘 그뿐이었다.도망가는 아이들을 쫓아오거나 부모에게 변상을 요구한다거나 아이들 얼굴을 기억해 두었다가 귀를 잡아챈다든가 하는 일도 없었다.그가 죽었을 때 남은 것은 나무뿐이었다.
수십 년이 지나서야 나는 그의 웃음이 인생의 비밀 한 가지를 보여준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17. 그 때 골목 어귀 사람들-소설가 김원일
골목 어귀에는 당연히 구멍가게가 있었다.평생 웃어본 적이라곤 없었을 주인 할아버지는 영동시장 상인들처럼 철따라 구색을 갖춘다고는 하였지만,그런 상술이 파리 잡는다고 내건 끈끈이주걱처럼 되려 옹색함만 보태 줄 뿐이었다.포도는 달랐다.여름 끝무렵에 나타나 먼지를 켜켜이 뒤집어쓴채 물러터질 때까지 좌판 맨앞자리를 차지한 그 포도송이들은 우리 조무라기들의 눈을 시리게 만들었다.일원에 더도 덜도 없이 꼭 일곱 알씩이었다.그 셈이 얼마나 정확한지 하다못해 깨물었다간 도로 뱉을 새파라니 덜 익은 놈 하나 개평이 없었다.그런 만큼 전기회사 다리를 주무대로 삼고 놀던 우리가 오갈 때마다 그 구멍가게 앞을 지나야 한다는 건 참으로 고역이었다.
자연,학교대신 극장에 다니던 뱀눈이형이 돋보일 수밖에 없었다.우리보다 두어 살밖에 더 먹지 않았는데 벌써 코밑 수염이 난 형은 「월하의 공동묘지」 포스터를 가게 문설주에 붙인 다음 초대권을 건네주고 나왔다.그런 그의 주머니는 어느새 불룩하였고,신이 난 우리는 『짜자자잔짜잔 캄뱃,스타링빅 모로…』 노래를 부르며 적산가옥 쪽으로 몰려갔다.희한한 물물거래가 이루어졌다.덴뿌라(튀김),딱지,다마(구슬).아무것도 낼 게 없는 아이들은 무릎을 꿇고 형의 샅께를 한번씩 쓰다듬어야 했다.그때마다 그는 두 눈을 지그시 내리감은 채 흐흐흐 야릇한 미소를 짓곤 했다.
많은 사람이 있었다.어떤 형은 사람을 죽였대서 형무소에 가 콩밥을 먹는다고 했고,능수는 넉 4자는 죽을 사자라며 한사코 4자를 피했다.우리 학교 소사 명숙이 누나는 서울에서 학교에 다니던 구두방집 상학이네 누나만큼이나 예뻤는데,우리반 꼴찌 명자가 그 누나의 친동생이라는 사실은 여태 믿기지 않는다.벌써 몇 번이고 그 사람들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 모른다.하지만 웬일일까,동업의 후배들마저 쑥쑥 잘도 쓰는데,아무리 쓰자고 해도 나는 아스라한 세월 저편의 이야기에 쉽게 손이 가 닿지 않는다.그 골목에서 뛰어놀던 친구들중 벌써 스무 해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인수의 얼굴이 너무 삼삼해서?
18. 버리지 않은 이력서-시인 채호기
나의 스승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그러나 혹시나 그분에 대한 결례를 범하게 될까봐 내 마음은 지금 드센 물결처럼 조바심친다.십이년 전,학교를 막 졸업하고 밥벌이할 곳을 찾기 위해 뚜렷한 방안도 없이 이곳저곳을 헤매고 다니던 때였다.장마가 한창인 여름이었는데,몇 군데 면접을 보고난 후 심신이 노곤한 상태로 어느 낯선 건물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었다.그때 문득 스승이 계신 회사를 인사도 드릴 겸 한번 찾아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그리고 동시에 나를 기억도 못하실텐데 불쑥 찾아가 뵈면 불편해 하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망설여지기도 했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 찾아가기로 했다.마포 신수동 근처였는데,무엇인가 열심히 읽고 계시던 스승은 나를 반갑게 맞아주시며 일부러 짬을 내어 이런저런 내 얘기를 들어주셨다.놀라웠다.스승은 나 같은 것을 기억하고 계실 뿐만 아니라 스승의 품에서 떠난 뒤의 나의 행적에 대해서도 어렴풋이 알고 계셨다.하물며 내가 편입해간 시골 대학 신문에 실렸던 나의 보잘것 없는 글까지도 읽으신것 같았다.스승의 광대한 독서의 촉수에 나의 치부를 들킨 것 같아 몹시 부끄러웠지만,한편 나는 그때 스승의 품의 넓이에 감동을 했다.그래서 용기를 내어 내보일 게 없는 이력서까지 드렸다.스승은 이력서를 받아보시곤 지금 이곳엔 자리가 없지만 한번 알아보겠노라시며 그것을 서랍속에 넣었다.
몇 개월 후 한 잡지사에 취직하게 된 나는 스승께 글을 청탁드리기 위해 다시 그곳을 찾았다.스승은 그 이력서가 기억이 나셨는지 나를 보자 갑자기 얼굴이 붉어지셨다.아마 당신께서는 묘책이 없으신데 내가 찾아가니 안쓰런 마음이 들어서 그러셨을 것이다.그래서 얼른 취직하게 된 그동안의 경위를 말씀드리고 찾아온 용건을 말씀드렸다.스승은 잘 됐다고 하시면서 일이 재미있느냐고 물으셨다.그리곤 최근에 나온 스승이 쓰신 귀중한 책을 한 권 주셨다.그런 후 오랜 시간을 나는 내 살아갈 길이 바빠 스승을 까맣게 잊고 지냈다.
그런데 몇 년의 세월이 흐른 후 스승은 나를 잊지 않고 당신 곁으로 불러주셨다.오래전에 내가 드린 이력서를 잊지 않고 보관하시다가 그때의 약속을 지키셨던 것이다.나는 스승곁에서 스승이 침묵으로 가르쳐 주신 덕분에 비로소 바로 설 수 있었다.
19. 단순하고 강한 충격-소설가 송경아
그렇다.글로 쓰기에는 힘든 경험들이 있는 법이다.그것은 너무 개인적인 일이어서 이야기하기 쑥스럽기 때문일 수도 있고 너무 커다란 의미이기 때문에 글로 쓰기 이전에 그것을 소화하는 데만도 엄청난 시간이 지나가기 때문일 수도 있다.나도 그런 경험이 있다.어릴 적에.
나는 초등학교 갓 들어갈 무렵의 2년 간을 충남 금산에서 보냈다.아버지의 발령지를 따라서 간 이사였다.어린 아이들의 놀라운 적응력에 힘입어 그곳과 금방 친해졌고 다시 발령이 나서 서울로 이사온 후에도 몇 년 동안은 그곳의 친구들과 이래저래 연락을 했었다.초등학교 5학년 쯤에는 거기서 가장 친했던 친구 집에 며칠간 놀러가기도 했다.그때의 일이다.
아쉬운 며칠 간의 여행을 끝내고 서울로 올라오기 전날이었다고 기억된다.나는 몇 년 전만 해도 내가 뛰놀던 그러나 많이 낯설어진 흙길을 친구와 함께 걷고 있었다.무슨 이야기인가 하다가 친구가 말했다.『여기도 내년에 아스팔트 포장 들어온대』 나는 진심으로 가슴 아파하며 말했다.『그래?여기는 흙길로 남아있었으면 좋겠는데』
단지 감상만은 아니었다.유난히 감기에 잘 걸렸던 나는 서울로 올라오자마자 기관지염에 가까울 정도로 심한 감기로 고생했고 탁한 공기에 신경질을 냈다.아스팔트와 차와 대기오염에 대해 나름대로 직관적인 파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그러나 내 말을 들은 친구는 눈을 둥그렇게 뜨며 약간 화난 목소리로 물었다.『넌 우리 마을이 발전하는 게 싫으니?』
그때 내가 느꼈던 충격몇 마디 말로 하기는 쉽다.의사소통의 단절,개발 이데올로기와 도시 아이의 감상 사이의 충돌,미처 생각하지 못한 점을 지적당했을 때의 놀라움.그러나 내가 그것을 글에 담을 수 없는 까닭은,그 상황이 그 모든 복잡한 것을 아울러,신기할 정도로 단순하고 강한 충격을 내게 던져주었기 때문이다.그 충격을 어떻게 글로 표현할 수 있을까?글로 쓰기에는 너무나 단순하고 강하며 오직 어린 시절의 추억 속에서만 끝없이 되울리고 있는,그 체험을.그 울림이 약화되기 전까지는 거기에 대해 글을 쓰지 못할 것이고,약화된다면 더이상 거기에 대해 글을 쓸 필요가 없을 것 같다.그래서 나는 지금도 그때 그 친구의 목소리와 얼굴을 글로 쓸 수가 없다.
20. 허구렁. 아버지의 자리-소설가 함정님
요즘들어 부쩍 나는 「소설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들려 있다.그것은 「왜 쓰는가」라는 아주 오래된 질문과 다르지 않을 터인데,나는 글이라는 형태에 하염없이 빠져들어간 스무살 무렵의 대학 초년기 이후 그 문제로부터 한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했다.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소설은 이야기가 끝나는 지점에서 길이 비로소 시작된다는 명제를 가슴 속에 비석모양 거느리고 있는 사람인 까닭이다.이야기가 끝나자 길이 시작된다?
여기서 길이란 소설 속 인물들의 길,즉 운명이라 해야 할 것이다.내가 지금껏 써온 이야기(단편)들은 순환열차처럼 머리와 꽁지가 맞물린 채 돌고돌고 있다.열차를 탄 사람들은 내릴 때가 되면 하나씩 자리에서 일어난다.그들은 처음 열차를 탄 사람도 있고 거의 매일 타는 사람도 있다.소설이란 아니,소설의 운명(인물)이란 대개 어렴풋한 실루엣 또는 형체불명의 덩어리들 속에서 불쑥불쑥 태어나는 기억 속의 악마들,그들의 표정에서 비롯되는 것이다.그들은 저마다 가슴 한 언저리를 차지하고 있다가 문득 새로운 얼굴로 다가오는사람들이다.그렇기 때문에 소설 속 주인공은 매번 가슴 속에 묻어둔 이야기의 주인공일 수밖에 없다.
그동안 내 소설의 8할은 어미(어머니)가 중심 역할을 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나에게 어머니라는 존재는 헌신적 애정과 그리움을 알게 해준 인물이면서 동시에 절망과 상처를 골깊게 안겨준 인물이기도 하다.소설을 쓰다가 멈추어보면 어느새 어머니에게 악역을 맡기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내 속의 강력한 무엇(악마)이 이야기를 그쪽으로 끌고가는 것이다.행간 속에 보이지 않는 그것의 아우라를 본다.아버지.처음부터 내게 아버지라는 존재는 철저히 부재인물이다.반쪽일 수밖에 없는 어머니의 불구성을 나는 고스란히 내 인성(인성)속에 품어온 셈이다.커다란 허구성인 아버지를 끌어안고 있는 나의 내면 역시 텅 비어 있다.사춘기 이후 내게 결핍되어 있는 아버지의 자리를 메우기 위해 나는 현기증나는 벼랑을 건너왔다.가끔 예전의 글들을 다시 보면서 나는 내 작품 곳곳에 잠복해 있는 벼랑의식을 보곤 한다.아버지에 대한 경험이 전무하지만 강렬하게 아버지(의 자리)를 형상화해보고 싶은 욕망에 시달린다.소설만이 33년동안 결핍된 내 욕망을 채워줄 것이며 나를 구원해줄 것이라는 믿음은 지나친 환상일까.
21.혼돈을 찾아가는 최인석-소설가 부희령
그의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1980년대 중반, 담배 연기 자욱한 서울 명륜동의 어느 선술집에서였다.
"너, '구경꾼' 읽어봤냐"
소설이라는 공통된 관심사로 가까워졌던 친구 녀석이 건넨 말이었다.
"최인석이라는 사람이 쓴 건데. 좋더라"
80년대 중반. 세상이 요구하는 내 존재에 대한 책임감이 버겁기만 하던 나이였다. 젖떼기, 통과의례, 성인식. 그런 것을 피해 구경꾼으로 살아갈 수는 없을까, 끝내 자괴감에 시달린다 하더라도, 그때 나는 그런 궁리를 하고 있었다. '구경꾼'? 꼭 읽어봐야겠군.
그러나 나는 여태껏 '구경꾼'을 읽지 못했다. 나에게 그 책을 권했던 친구는 어느 날 훌쩍 군대에 가버렸고, 한동안 구경꾼으로서의 정체감 속에 살았던 나는 그 책이 우연히 내 손에 걸려들 날만을 하릴없이 기다리다가, 가끔 세상일이 그렇듯, 때를 놓치고 말았다. 하지만 최인석이라는 이름 석자는 나의 뇌리에 깊숙이 박혀, 어느덧 나는 최인석 소설의 애독자가 되었다.
구렁이, 승냥이, 잉어 혹은 귀신. 세상은 이미 오래 전, 그네들이 갖고 있던 서슬 푸른힘을 빼앗아버렸지만, 내 몸 혹은 무의식은 그 이름들이 불러일으키는 미묘한 파장에 여전히 공명하려 하고, 나는 그 떨림에 의지하여 '구렁이들의 집'을 읽어 내려갔다.
최인석의 소설을 읽으며 내가 열망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순정한 사랑을 배신함으로써 그 사랑을 완성하도록 하는 힘, 불구인 현실과 완전무결한 신화의 세계가 배를 맞대고 몸을 섞도록 만드는 아주 긴 호흡, 그리하여 현실과 환상의 담장이 무너지고, 선과 악의 구별이 무색해지며, 삶과 죽음이 서로를 경계하지 않고, 빛의 중심에는 어둠이 있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마침내는 '여우와 남자가, 범과 잠자리가, 사슴과 승냥이가, 구렁이와 나비가 혼인하는' 환희를 머리가 아닌, 몸으로 경험하는 것이었다. 세상이 우리에게 감옥인 것은 의식이 몸을 가두어버렸기 때문일 수도 있으므로.
언제부터인가 혼돈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는 최인석의 뒷모습이 보인다. 혼돈이란 '무의미와 의미 사이의 지극히 짧으면서도 간혹은 영겁을 통해서도 빠져나올 수 없는 기나긴 동굴같은 영역'('구렁이들의 집' 중에서)일까.
그렇다면 그는 면도날같이 위험한 길을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소설가들의 도구인 '말'은 그가 바라보고 있을 혼돈이라는 다층다면적 덩어리와는 상극이라고도 할 수 있으니까. 그는 명료함으로 모호함을 드러내야 하고, 정연함으로 무질서를 보여주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세상이 무의미함을 극복해내기 위해 차라리 의미와 가치를 통째로 내던져 버려야 할지도 모른다.
그의 첫 소설 '구경꾼'을 읽지 못했으므로 나는 그의 길이 시작된 곳을 알지 못한다. 또한 그 길의 끝도 짐작할 수 없다. 단지 그의 여행이 모색이 아니라 체험이기를, 신념이 아니라 체질이기를, 급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반역이기를 기대할 뿐.
22.벼랑 끝에서 만난 공선옥- 소설가 이영임
공선옥, 그를 처음 만난 것은 더 이상 물러 설 수 없는 내 인생의 벼랑끝에서였다.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에서 내 손을 잡아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던 그때. 해만 뜨면 목적지도 없이 마냥 걷기만 했던 그때. 다리가 후들거리다 못해 발바닥이 쪼개지는 듯한 고통으로 쓰러질 지경이 되면 아무 서점이나 찾아들었다. 바늘 하나 꽂을 틈 없이 촘촘히 꽂혀 있는 책들을 바라보며 뼈끝을 훑는 외로움은 더욱 깊어졌다. 여기다 내 글 하나 보탠다고 무엇이 달라지나. 그런데도 못견디게 글이 쓰고 싶었다. 소설이라도 쓰고 있으면 그런 대로 나를 지탱할 수 있을 것만 같아서.
소설, 그 느낌도 없는 끈을 꼭 붙들고 읽었던 피어라 수선화, 오지리에 두고 온 서른 살, 내 생의 알리바이. 그리고 시절들. 더 이상 궁상스러울 수 없을 만큼 밑바닥 인생들이 지지고 볶는 삶인데도 하나도 천해 보이지 않는 것은 어떤 힘일까.
남편에게 버림받고 월세는 물론 땟거리도 없이 둘째를 가진 주인공 영례. 모든 사람이 미쳤다고 설레설레 도리질을 쳐도 영례는 좋았다. 슬프고삭막한 가슴을 다독일 수 있는 '생명'을 뱃속에 담고 있었으므로. '한밤중에 도둑질해온 시래기들을 불도 켜지 않고 씻어서 흙물이 제대로 가시지 않은 걸 우적우적 고양이처럼 씹어먹었고, 얇은 캐시밀론 이불 하나 뒤집어쓰고 훔쳐온 김치를 우두둑 씹어먹으며' 뱃속의 아이를 키우고 살아내었다.
'세상의 살아있는 것들이 죽기를 작심하지 않은 이상은 살아내기 그 자체가 발등에 떨어진 불임'을 섬뜩하리만치 냉정하게 보여주는 '어미'는 물론 그의 글 저 밑바닥으로부터 끈끈하게 흐르고 있는 것은 생명에 대한 거룩한 사명감이었다.
살갗을 저미는 듯한 칼바람을 맞으며 영동대교 위에 오래 서 있던 그 겨울밤. 몸보다도 더 추운 것은 마음이었다. 가슴까지 닿는 다리 난간은 손이 쩍 달라붙도록 차가웠다. 아니 손이 데이도록 뜨거웠다. 생명, 그리고 사명감…. 나는 '어미'였다.
세상에 얼굴을 내밀 때마다 공선옥, 그가 사는 곳은 매양 다른 곳이다. 남도의 농가에서 어느 날은 산골의 폐가까지 셋이나 되는 어린 것들을 이끌고 그는 참 잘도 살아내고 있다. 그의 글이 아이들에게 사줄 온갖 맛난 것들, 풍선껌, 사탕, 얼음과자 값도 넉넉히 안되는지. 그래서 파라티온을 앞에 둔 갑생이처럼 참말로 갈곳이 없지나 않은지. 언제쯤이면 그가 쓴 글들이 그의 정처없는 발길을 붙들어줄 수 있을 만큼 큰 힘이 되어 줄까.
남의 김장독 만큼은 뒤지지 않아도 되었을 그때, '정처없는 이 발길'을 돌려 그래도 돌아올 집이 있었던 나에게 발등의 불은 있었던가, 없었던가. 그 불이 빨갛기만 했지 하나도 뜨겁지가 않아 가슴이 베일 만큼 좋은 글을 아직도 못쓰고 있는지 가만히 내 발등을 바라본다.
23. 김인숙의 아파트에 갇힌 삶-소설가 부희령
김인숙의 소설을 읽다가 문득, 엉뚱하게도, 나는 한 번도 아파트에서 살아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마도 엘리베이터나 베란다, 모델하우스같이 아파트가 주된 배경인 소설의 내용 때문이었을 것이다.
오래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서울 강북의 좁은 골목길을 누비며 어린 시절을 보냈던 나는 한강변에 늘어서 있는 말끔한 아파트들과 그 안의 삶에 대해 한때 막연한 동경을 품었다. 경험하지 못한 삶에 대해 갖게 되는 기대에 텔레비전 광고나 드라마의 영향이 당의정처럼 입혀진 그런 것이었지만.
김인숙의 소설은 내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아파트라는 공간 속의 삶으로 잠입해 들어가는 것을 허락한다. 말 그대로 잠입이다. 떠들썩하고 화기애애한 방문이 아니라 몰래 숨어들어가 슬쩍 엿보는 일. 계단식이냐, 복도식이냐 아니면 32평형이냐, 57평형이냐로 결정되는 겉으로 드러나는 삶에 대해서가 아니라 깊숙이, 좀 집요하게 들여다 봐야 보이는 삶에 손전등을 들이대는 일이다.
김인숙의 시선은 아파트라는 획일적 공간 속에 묻혀있는 하나 하나의 삶과 그것을 다른 삶과 구분해 주는 고유한 색깔인 욕망을 찬찬히, 그러나 담담하게 훑어간다. 자기가 곧 죽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머리를 단정히 묶고 된장찌개를 끓이던 여자의 가계부에는 '브라스 밴드'의 사진이 끼워져 있고, 거실 창문을 내다보며 슈퍼에 간 아내를 기다리는 남편은 아내가 이혼을 요구하지 않는 것은 명예퇴직한 남자를 떠날 용기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살인미수 용의자로 경찰에 연행된 남자는 '국립대학 교수'라는 지위를 자신의 알리바이로 주장하지만, 한편으론, 자기가 누군가의 가슴을 칼로 찌를 수 있기를 갈망하기도 한다.
어떻게 생각하면 아파트는 우리의 일상과 가장 닮은 구조물인지도 모른다. 안으로 들어가거나 밖으로 나올 때나 늘 무뚝뚝하게 버티고 선 문을 통과해야 한다. 담을 뛰어 넘거나 창문으로 기어들어갈 수는 없다.
일상이란 언제나 들어가던 데로 들어가고 늘 나오던 데로 나와야 하는 것. 좀 다르게 빠져나오고 싶다면 탁 트인 베란다로 달려가 뛰어내리는 방법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설의 주인공처럼 기껏해야 아래층 화단을 향해 몰래 침을 뱉거나 할 뿐이다. 아니면 한밤중에 베란다 창 밖의 휘황한 불빛을 바라보며 가슴에 뻐근한 통증이 느껴질 때까지 러닝머신 위를 달린다든가.
사실 아파트 따위가 무슨 상관이랴. 그곳에 살아보았든 아니든 나 역시 삶에 '촌충처럼 박힌 무료함'이 무엇인지 뼈저리게 아는 것을. '그 남자와 살았더라면 내 인생이 달라졌을까'라고 묻는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아파트에서 살았더라면…' 하고 나 자신에게 물어보지만 대답이야 뻔하다. 창을 들고 드넓은 케냐의 평원으로 수사슴 사냥을 떠나지 못할 바에야, 일상에 행복하게 순응하도록 '진화'하거나 '퇴보'할 수밖에.
24. 이청해의 악보 넘기는 남자-소설가 이영임
살아가면서 힘든 것을 하나 고르라고 하면 나는 아주 촌스럽게도 버스 타는 일이라고 말한다. 버스에 오르면서 맡게 되는 기름 냄새와 함께 머리가 아픈 것은 고사하고 멈추거나 달릴 때마다 속이 울렁거리면서 진땀이 바작바작 나는 통에 염치 불구하고 팔걸이에 머리를 기대기가 일쑤기 때문이다.
어지간한 거리는 걸어다니지만 꼭 버스를 타야 할 경우에는 버스기사가 그렇게 대단해 보일 수가 없다. 차에서 내릴 때마다 정중하게 인사를 하는 것은 내 진심에서 우러나는 일이다. 그리고 생각해본다. 정말로 훌륭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하고.
이청해의 '악보 넘기는 남자'가 있다.
그것도 직업이냐고, 그거 해도 돈주는 거냐고 물으면, "누군가 해야 하니까. 중요한 일이고. 나는 사람들에게 음악이 연주되는 게 기뻐"라고 말한다. 정직하면 사이비들한테 묻혀 버리고, 진지하면 사람들이 싫어한다며 그런 건 이제 조롱거리라고 안타까워하면 그 남자는 다시 말한다.
"난 그렇게 불행하진 않아. 악보를 넘길 때 난 긍지를 느껴. 이렇게 좋은 음악을 사람들한테 들려주는 자리에 함께 있다는 것이 뿌듯해. 난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아직도 내게 음악이 있다는 사실에 안도해. 거기에 종사할 수 있다는 것이 기뻐"
이청해의 글을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창 밖을 바라보는 때가 종종 있다. 해가 짱짱 나고 있어도 비오는 날의 포근함 같은 것이, 이슬비의 속삭임 같은 것이 마음을 촉촉이 적셔주기 때문이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서적 외판원과 굴욕적인 연애를 하면서도 행복해 하는 명희를 보아도 그렇고 평생을 절절한 외로움과 가난 속에서 세상과 타협 못하고 외과로 자기 길을 갔던 진짜배기 명인들을 생각해도 그렇다.
두고 가는 시신이 그렇게도 마음에 걸리는 것이 어디 신선영이 뿐이랴.
바다로 가고 싶은 마음이 어디 숭어뿐이랴.
오늘 썼는가, 소설에 대해 생각했는가, 남의 글을 읽었는가……. 이 세 가지 물음에 충족된다면 누가 아무리 금으로 치장한 책을 수백권 내놓았다고 해도 흔들리지 않으리라 결심하는 것이 어디 이청해 혼자뿐이랴. 화려하게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사는 사람만이 꼭 훌륭한 사람일까.그리고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남에 의해 구획이 정해진 시간 안에 노예처럼 갇혀서 보이지도 않는 장소에 앉아, 오직 부여된 책임을 완수하기 위해 혼자 고군분투하는 사람'은 불행하고 시시한 사람일까. 자신이 정말로 좋아서 하고 그 일이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일이라면 세상에 훌륭하지 않은 일이란 없지 않을까. 비록 조명 밖 어둠 속에 비켜나 있다고 해도.
오랜 가뭄 끝에 비가 온다. 이 빗소리를 들으며 세상의 모든 조역들, '끝내 한 번도 전면으로 부상하지 않는 배역'들이 고향에 온 듯한, 어머니의 품에 안긴 듯한 포근함을 느꼈으면 좋겠다.
25. 백민석-목화밭 엽기전-부희령
뒤늦게 백민석의 '목화밭 엽기전'을 읽는다.
'뒤늦게'라는 말을 쓰고 말았는데, 그런 표현은 '목화밭 엽기전'이 지난해의 엽기 선풍을 타고 반짝 떠올랐던 상품일 뿐이라는 인상을 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한참 목화밭 속을 헤매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자 누군가는 "아, 푸줏간!"이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목화밭 엽기전'은 보기 드물게 재미있는 소설이다. 그리고 그 재미라는 게, 살인이라든가 강간 따위의 기사들로 가득 찬 신문의 사회면을, 불쾌한 기분이 되면서도, 그래도 눈을 떼지 못하고 빠짐없이 읽어 버리는 산뜻하지 못한 심리와 관련된 것이긴 하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런 재미만을 주는 것은 아니다.
소설의 첫 부분에는 삽을 들고 땅을 파는 한창림이 등장한다. 삽질은 '수컷'인 그에게도 생각보다 힘든 일이다. 잠이 들어서도 텔레비전이 켜져 있는 편이 더 편한 그의 아내 박태자는 리모컨이 사라지면 심각한 불안 상태에 빠진다. 소설의 주인공인 그들뿐 아니라 현대인들 모두에게 삽질이나 텔레비전 앞으로 걸어가 직접 채널을 돌리는 일, 즉 노동은 익숙하지 않다.
사람의 몸은 이제 본래의 기능이나 가치를 점점 잃어 가는지도 모른다. 노동보다는 운동을 선호하고, 근력이나 지구력보다는 다리길이나 가슴크기를 더 중요시하는 세태로 볼 때 몸이란 그저 매끈하게 다듬어 보여주어야 하는, 성적 욕망의 대상이거나 말초적 감각에 봉사하는 도구로 전락해 가는 운명인 것 같다. 아, 그래? 하고 심상히 넘어갈 일은 아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느끼는 연민이라든가 생명에 대한 존엄성은 같은 종으로서 갖는 유사한 몸의 형태와 생리구조에서 연유한다. 따라서 인간성과 몸을 분리해 대상화하는 과정의 종착점은 '인간과 마네킹이 다른 점이 무엇이란 말인가. 자르면 잘라지고 뽑으면 뽑혀지고…'라고 생각하는 박태자의 의식이다. 그러므로 소설 속에서 자행되는 납치, 학대, 살인은 피해자에 대한 아무런 감정이입 없이 가볍게 이루어진다.
게다가 '펫숍 삼촌'이라니! 펫숍이라는 단어와 삼촌이라는 호칭을 연결시킨 작가의 탁월한 감각에 매료될 뿐이다. 예쁘고 멋지게 보여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인간의 몸이라면, '삼촌'이라 불리는 애매모호한 존재에 의해 영문도 모르는 채 단지 두려움 때문에 길들여지는 게 인간의 의식이라면, 과격한 비약일지도 모르지만 애완동물과 인간의 거리는 그다지 멀지 않은 듯 싶다.
'엽기'라는 제목을 달고나온 이 소설이, 단지 튀는 소재로 독자들의 눈길을 끌려는 시도로 보이지 않는 것은, 읽어 내려가다 보면 어느 새 주인공인 한창림이나 박태자에게 공감하는 부분이 생기기 때문이다. 사실 그들은 얼마나 미성숙한 인간인가. '펫숍 삼촌'에의 공포를 극복하기보다는 어린 소년들을 대상으로 분풀이하듯 그 공포를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한창림이나 텔레비전과 약물에 의존하는 박태자, 그리고 마지막 장면, 목화밭이 무엇인지, 그게 어떻게 생긴 것인지도 알 수 없다며 길 잃은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토해내는 한창림의 모습을 들여다보면, 분노든 욕망이든 단지 그것을 소비하는 자로서만 존재하도록 양육되어, 성숙의 기회를 차단당한 인간을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그들을, 단지 소설 속에 나오는 엽기적인인물들일 뿐이라고 치부해 버릴 수 있을까. 목화밭이 무엇인지, 소설을 읽는 사람들은 알고 있는가.
26. 박완서의 해산 바가지 - 소설가 이영임
많은 소설가들 가운데 박완서씨만큼 절묘하게 제목을 잘 붙이는 작가도 흔치 않으리라. '도둑맞은 가난'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틀니' '마른 꽃' '휘청거리는 오후' '꿈꾸는 인큐베이터'. 서점의 한 면을 차지할 만큼 많고 많은 기행문 가운데 유독 내 눈길을 잡아 끈 것도 박완서씨의 '모독'(冒瀆)이었다. 미지의 세계를 향한 동경심을 유발시키기에는 너무나 거리가 먼 제목, '모독'. 그래서 더욱 궁금하게 만들었던 그 책은 티베트와 네팔의 여행기였다.
수백편에 이르는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마음에 남아있는 작품을 고르라면 나는 망설일 것도 없이 '해산바가지'부터 고른다. 해산바가지라니. 처음에는 해산바라지를 잘못 보았나 했었다. '잘 생기고, 여물게 굳고, 정한 데서 자란' 그 햇바가지는 엄숙한 해산 준비용이었다. 딸을 내리 넷을 낳도록 미간 한 번 찌푸리지 않고 여전히 희색이 만면했던 시어머니. 경건한 의식처럼 손수 그 바가지에 미역을 빨고 쌀을 씻었던 시어머니. 다섯번째로 아들을 낳았을 때도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닌 똑같은 대접을 해주던 시어머니가 말년이 되자 몸과 마음이 심하게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정신을 견디다 못해 요양원을 찾아다니다 방금 떠오른 보름달처럼 풍만하고 잘 생긴 박을 보고 며느리는 크게 후회를 한다. 해산바가지를 통해 '정성껏 산모의 건강과 아기의 명과 복을 빌었던' 시어머니가 한때 얼마나 아름다운 정신을 깃들였나를 잊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의 생명을 어떻게 대접해야 하는지를 몸소 보여준 분이 아닌가. 며느리는 시어머니가 거기에 합당한 대우를 받아야 마땅하다고 믿는다. 하마터면 큰일을 저지를 뻔했다는 자책과 함께.
자식은 전생의 빚쟁이라는 말이 있다. 끊임없이 갚고 또 갚아도 조금도 줄지 않는 영원한 빚. 그래서 자식은 부모에게 받는 것을 너무나 당당하게 생각하고 잘 해주지 못한 부모는 늘 전전긍긍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부모가 자식에게 빚을 놓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해산바가지를 통해 며느리에게 사랑의 빚을 확실하게 놓았던 시어머니를 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대가를 바라고 하는 것이 사랑의 빚은 아니겠지만.
그의 글을 읽을 때마다 한결같이 느끼는 것은 서늘한 바람이다. 차마 그냥 지나칠 수는 없고 그렇다고 한 마디 하기에는 언변도 용기도 부족해 쭈뼛거리고 있을 때, 누군가가 나서서 큰소리로 교통정리를 해 주는 모습을 바라보며 느끼게 되는 통쾌함 같은 것.
문학에 대한 열정은 가슴 속 깊이 묻어둔 채 그냥 아이 엄마로만 살아가고 있을 때 박완서씨는 또 다른 희망이었다. 홀로 된 시어머니에 다섯 아이들의 뒷바라지를 하던 평범한 아줌마가 소설가로 당당하게 새로 태어나는 것을 보고 가슴이 뛰었던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니었으리라. 작가가 된 박완서씨의 나이가 되려면 아직 멀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매달릴 만했으니까.
'나목'(裸木)이 나올 때보다도 훨씬 늦은 나이에 세상에 나온 나에게 아직도 희망이 있는 것은 고희를 넘기고도 탄탄하게 글을 쓰고 있는 박완서씨가 있기 때문이다.
27. 김연수의 이상- 소설가 부희령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국문학 지식이 빈곤한 나는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어디까지가 '이상'에 대해 고증된 사실이고 또 어디서부터가 작가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허구인지 구별할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어쨌거나 '진짜와 가짜'의 경계선 긋기 (혹은 그것이 가능한가의) 문제를 독자의 의식 속으로 끌어들이려 했던 작가의 의도가 그럭저럭 들어맞은 셈이다.
김연수씨의 '꾸ㄷ빠이, 이상'은 움베르토 에코의 '푸코의 추'나 '장미의 이름'을 떠올리게 한다. 예전에 그 소설들을 읽으며 나로서는 꿈도 꿔보지 못할 작가의 지적인 작업에 감탄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 꼭 그런 기분이다.
'천재'란 '일컬어'지는 것. 만약 어떤 사람이 재능이 있고 그 재능에 대한 과도한 자기 확신과 더불어 열정이라 불리는 에너지가 충만하다면, 그러면 일단 그 사람은 천재가 될 수 있는 조건은 갖춘 것이리라. 하지만 천재라는 타이틀을 완성하려면 타인의 칭송과 인정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천재라 불리는 사람들은 자칫 그 이름과 이미지에 휘둘려 자기 생의중심을 타인의 시선에 두고 살아야 할 운명에 처하게 될는지도 모른다. 좀 끔찍한 일이다.
'나'를 벗어나 보겠다며, 명상이니 수행이니 하는 명분을 걸어놓고 인도를 떠돌던 시절이 있었다. 내가 한동안 머물던 아쉬람에는 깨달음을 얻겠다고 몰려든 서구인들이 넘쳐났고, 이따금 그들과 어울릴 기회도 생겼다. 그럴 때마다 나는 심한 당혹감을 느껴야 했는데, 문제는 떠듬거리는 영어 실력이었다. 그들 눈에 나는 말수가 적고 농담이라고는 할 줄 모르며 지적 능력이 좀 떨어지는 멍청한 사람으로 보여지는 듯했다.
물론 서구인들이 동양인에게 갖는 편견 또한 어느 정도 작용했으리라. 하지만 나 자신 역시 내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한국에 있을 때의 나는 다른 무엇보다도 재치있고 그럴듯하게 말하는 재주로 다른 이의 호감을 사는, 혹은 사려고 노력하는 편이었기에, 나의 새로운 이미지는 나에게 혼란스럽다 못해 고통스럽기까지 했다.
사실 그들이 나와 같이 명상이나 깨달음을 동경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스쳐지나가는 여행객이나 가게 주인이었다면 그들 눈에 비친 나의 모습이 무어 그리 큰 문제였으랴. 인도에 머무르던 시간 내내 나는 내면을 들여다 본다든가 명상에 정진하기보다는, 타인의 눈에 내가 어떻게 비치는가에 전전긍긍하며 지냈던 것 같다. 힘든 수행이나 깊은 명상은 하지 못했지만 '나'라는 껍질, 혹은 이미지가 얼마나 타인에게 의존적일 수 있으며 따라서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 것인가를 공부할 수 있던 기회였다.
진짜 '나'는 무엇이고 가짜 '나'는 또 무엇인가.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눈을 뜬 그 사람이 바로 '나'라는 일관된 의식 외에는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은 얼마든지,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것일텐데. 그러므로 이 매우 지적인 소설, '꾸ㄷ빠이, 이상'에서 던지는 이상이냐 김해경이냐, 혹은 진짜냐 가짜냐의 질문은 천재가 아닌 보통 사람들도 삶의 어느 지점에서 한번은 꼭 걸려 넘어지게 되는 그런 것이 아닐까.
28. 이순원의 소설- 소설가 이영임
몇년 전 이순원의 '은비령'을 읽고는 며칠동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때가 마침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하는' 나이에 막 들어섰기 때문에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행성이 자기가 지나간 자리를 다시 돌아오는 공전주기를 갖고 있듯 우리가 사는 세상일도 그런 질서와 정해진 주기를 갖고 있다'고 하지 않는가. 2천5백만년. 그 아득한 영겁의 세월을 한 주기로 해서 현재의 삶이 다음 생애의 자신에게 고스란히 넘겨진다고 생각해보라. 공전의 진부를 떠나서 그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 할지라도 '내가 나를 싫어할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영주가 공전하는 삶을 생각했다면 조상과 연결되는 피의 줄에 '매듭을 이은 자리'가 생기도록 했을까. '뿌리'가 신의 영역이라는 그릇된 신앙을 아무리 걷어내고 싶었어도 조상의 화상에 불을 질러 할아버지가 자진을 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면 말이다.
'삐비꽃 여인'은 어쩌란 말인가.
'몸에 실리지 않고 영으로만 왔다갔다 하는 인연'으로 생명을 남기고 떠난 여인이 다음 생애에도 똑같이 '길가 풀숲에 하얀 솜털처럼 무리져 일어나 바람에 나부끼는 삐비꽃'을 한아름 꺾어 들고 도리천이 흐르는 강둑을 헤매고 다닌다면 그 여인이 놓아버린 정신은 누가 찾아다주나.
'말을 찾아서'의 아부제만큼은 공전하는 삶이 있다고 해도 조금도 두렵지 않으리라.
달이 없어도 별이 좋은 밤. 당숙은 양자 삼은 어린 조카에게 같은 말을 묻고 또 묻는다. "니가……. 니가……. 나를 애비라고 데리러 완?" "야, 아부제." '노새 애비'에게 양자 가기 싫다고 떼를 쓰는 바람에 밖으로만 돌던 자신을 데리러 온 아들은 지치지도 않고 같은 대답을 한다. 노새는 연신 딸랑딸랑 방울을 울리고, 길옆은 온통 옥수수밭이거나 감자밭, 그리고 메밀밭이었던 그날 밤. 노새를 끌고 영을 넘고 밤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오던 그 밤이 몇 번이고 반복된다 해도 싫지 않을 것이므로.
이순원의 글은 처음에는 편안한 마음으로 느긋하게 읽다가도 어느 순간 서서히 등이 곧추서면서 마지막 장까지 책을 놓을 수 없도록 잡아끄는 어떤 힘이 있다.
생각지도 않았던 일상의 한면을 통해 눈물샘을 툭 건드리기도 하고 주인공들이 오래도록 따라다니며 이런저런 말을 시키기도 한다. 주인공과 독자를 막바지까지 몰고가다가도 창문 하나쯤을 슬며시 열어 놓아서 막힌 숨을 터주기도 한다. 아무리 가슴 아픈 글을 읽었다 해도 뒷맛이 개운한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강릉 가는 옛길'을 따라 걷다가 지도에도 없는 영을 넘게 되면 혹 별 하나가 툭 떨어지지는 않을까. '수많은 별 가운데 하나가 가슴 안의 또 다른 하늘 자리에 별자리를 잡듯' 그렇게 애틋한 사랑이 그냥 비껴가는 별이 되려 한다면 다음 생을 위하여 어떻게 할까.
29. 김지원의 사랑의 예감- 소설가 부희령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김지원씨의 '사랑의 예감'을 읽어 봤느냐고 묻던 때가 있었다. 아마도 그 소설이 나에게는 시금석 같은 것이었나 보다. 세상 사람들을 '비틀스'를 좋아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가를 수 있다는 얘기가 있듯, 내가 만난 사람들을 '사랑의 예감'을 좋아하는 사람과 아닌 사람으로 나눈 다음, 그 소설이 좋다는 사람들에게 애틋한 친근감을 느낄 뿐 아니라 '우리 편'이라는 꼬리표까지 붙일 태세였으니까.
'사랑의 예감'은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물 흐르듯 담담하게 펼쳐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특한 소설이다. 대부분의 소설에는 이야기의 초점이 되는 이른 바 '주인공'이 나오게 마련이고, 그리고 그들의 행동과 심리 상태 등이 독자의 의식을 휘어잡고 어디론가 끌고가게 되는 법인데, 이 소설에는 그렇게 특별한 힘을 가진 인물은 등장하지 않는다. 작가는 잔잔한 수면에 겹겹의 동심원으로 파문을 일으키는 문제적 중심에 주목하기 보다는, 여러 개의 중심을 가진 동그라미들이 서로 중첩되고 간섭을 받아 생겨나는 다양한 물무늬를 소중하게 바라본다.
"사랑? 이 세상에 사랑이라 일컬을 수 있는 것이 혹시 있다면 그건 전부 이루지 못한 것이 아닙니까? 차가운 현실이 우리 얼굴을 갈기기 전이 아닙니까?"
이토록 냉소적인 일갈을 서슴지 않던 인물을 우연히 죽음에서 구하는 여자가 있다. 오년 전 납북되어 생사도 알 수 없는 남편과 '같은 몸을 갖기 위해' 그가 좋아했던 두부를 즐겨 먹는 여자는, 지금은 곁에 없는, 남편과의 사랑을 이렇게 기억한다. '어둠을 보고 빛을 기억하듯 사랑의 기억은 한번도 여자를 실망시킨 적이 없다.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것. 하나의 경험을 다른 사람하고 완전히 나누었다는 것…그것을 흘러간 시간 속에서 끌어내 기억한다기보다…여자는 그냥 잊지를 않는다.'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아주 먼 극단에 서 있던 두 사람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하므로써 우연히도 시간과 공간의 한 지점에서 만나게 된다.
이 소설이 남다른 이유 중 하나는 흔히 사람들이 '소설에서나 일어날 일'이라고 표현하는, 우연이라는 요소가 꽤 큰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남편을 만나기도 전에 시아버지 될 분과 우연히 버스 옆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든가, 손윗시누이 친구의 며느리가 알고 보니 이십년 전에 헤어진 소꿉 친구였다든가, 소설보다는 현실에서 더 빈번히 일어나는 우연들이다. 이런 우연은 더 나아가 때로는 조밀했다가 다음 순간 헐거워지기도 하는 인연의 그물망으로부터 아무도 자유로울 수 없음을 보여주는 장치이기도 하다.
되풀이해 읽을 때마다 숨겨져 있던 켜를 새롭게 드러내는 이 매력적인 소설이 보여주는 세계는 똑 부러지게 합리적으로 굴러가거나 누군가가 저지른 행위의 원인과 결과를 분석하여 설명할 수 있을 만큼 명료하지 않다. 또한 어느 누구도 타인의 고통이나 행복으로부터 어쩔 수 없이 자유롭지 못함을, 따라서 인간이란, 저 갠지스강의 모래알처럼 낱낱이 흩어진 채 고립되어 있는 존재가 아님을 보여준다.
그래서 사랑은 여전히 강한 흡인력으로 세상에 남아 있는 것일까. 그리고 어느 순간 우리를, '나는 나가 아니므로 나를 잘 대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요 위에 누운 자신의 몸이 가장자리 없이 넓은 벌판인 듯 아니면 가장자리 없이 넓은 바다인 듯 느껴지는' 상태로 끌어올리는 것일까.
30. 성석제의 내인생의 마지막 4,5초
성석제의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를 읽고 나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 마지막 순간에 정신이 말짱하다면 무슨 생각을 하겠느냐고. 대답은 물론 표정까지 각양각색이었다. 차분한 모습으로 기도를 하겠다는 사람과 고개까지 절레절레 흔들며 생각하기 싫다고 하는 사람은 물론 "글쎄" 하면서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사람까지.
우발적이든 아니든 피할 수 없는 '마지막 순간'을 생각하며 보내던 그 해 끝자락이었다. 안개가 짙어 시계는 반밖에 되지 않았던 새벽, 옆 차선으로 앞서 가는 중형차 외에는 뒤따라오는 차도 보이지 않았던 자동차 전용도로에서였다. 마침 커브길이라 속도를 줄이고 있었는데 저 멀리 중앙분리대에 심어 놓은 도로 경계수를 넘어 하얀 물체 하나가 날아온다. 눈을 감았다 다시 떴다. 이럴 수가…. 흰색 승용차가 틀림없었다. 차 바닥이 보일 때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어디로 떨어질까. 차선을 바꾸어야 하나, 아니면 멈추어야 하나.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들은 숨을 죽였고 나는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날아온 승용차는 속도를 줄이던 옆 차 앞으로 떨어지더니 공처럼 튀어올라 순식간에 뒤집어졌다. 119 구급대가 와서 차체를 분해하고 탑승자를 꺼낼 때까지 사람이 타고 있었다는 생각은 왜 못했을까. 구급대원에게 안긴 운전자의 까만 호출기가 허리춤에서 대롱거리던 모습이 꼭 영화의 한 컷만 같았는데. 조사결과 과속으로 달리던 차가 우회전을 하다 도로 경계석을 받고 튀어올라 110m를 날아와 떨어졌다고 한다.
110m. 짧지 않은 허공을 나르며 운전자는 정신을 놓았을까. 아니면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찰나를 쪼개가며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았을까. 도대체 4.5초란 얼마만큼의 시간이란 말인가. 하나 둘 세어서 다섯도 되기 전 지나쳐 버리는 시간.
성석제는 달리던 지프가 다리 난간에 부딪쳐 추락하는 시간을 차의 무게와 속도로 계산해내었다. 그리고 계산된 4.5초를 불교의 시간단위로 설정하고는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75분의 1초에 해당하는 찰나(刹那)는 일념(一念)과 같은 시간인데 그 75분의 1초에 한가지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말 가능한 일일까. 고공낙하의 경험이 많은 사람에게 물어보았다. 대답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한다. 비행기에서 뛰어내린 후 낙하산이 펴질 때까지 자유 낙하하는 그 몇 초 동안 아주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고. 손가락을 움직여 속도와 방향을 조정하는 극도의 긴장 상태에서 어느 누가 허튼 생각을 하겠는가.
마지막 순간에 명료한 의식이 부담스러워서일까. 많은 사람들이 한결같이 바라는 것은 자는 듯이 가고 싶다는 것이다. 나에게 마지막 순간은 어떤 모습으로 올까. 의식이 있을까 없을까. 어떤 경우라도 삶의 한 부분으로 당당하게 맞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31. 황석영의 손님-소설가 부희령
어린 시절, 명절이면 만날 수 있던 고모며 삼촌들은 모두들 거세고 퉁명스런 이북 사투리를 썼다. 그들 대부분은 이미 오래 전 미국으로 이민을 가 버려 이제는 얼굴 모습조차 제대로 떠오르지 않지만, 작가 황석영의 '손님'을 읽는 동안 그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말씨는 내 아버지 핏줄들의 낯익은 목소리로 되살아나 귓가에서 생생하게 재현되곤 했다.
텔레비전 드라마나 코미디에서 가끔 들을 수 있을까, 비록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서일지라도 주위에 그런 말씨를 쓰는 사람들이 있었던 세대는 아마도 내 또래들이 마지막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통일이 이루어진다면 또 다른 얘기겠지만.
'손님'은 한국전쟁 중 황해도 신천에서 벌어진 양민학살사건을 다룬 소설이다. 학살의 주도자이기도 했던 형의 유골을 들고 고향을 방문하는 재미교포 목사의 행적을 따라 가면서, 동네 사랑방에서 같이 고구마를 구워 먹으며 지내던 이웃들 사이에서 벌어졌던 살육과 증오의 진상을 드러내 보인다. 그리고 그 드러냄은 한을 품은 망자들이 귀신의 모습으로 나타나 서로에게 맺힌 매듭을 푸는, 한반도와 동북 아시아 일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천도굿의 형식이다.
작가가 보는 학살사건의 진상은, 서양에서 온 '손님'일 따름인 기독교와 공산주의, 즉 '네 이웃을 사랑하라'라고 가르치는 종교와 돈이 아니라 노동하는 인간이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이념, 그 두 믿음을 철저히 신봉하던 사람들 사이에 생겨난 갈등이라는 것이다.
기독교나 공산주의나 둘 다 너무나 옳은 말씀들이고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이 세상에 전쟁이나 불평등, 증오같은 것은 완전히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데, 역사를 돌이켜보면 이상하게도 기독교와 공산주의는 갈등과 분쟁을 불러일으키는 요소였던 적이 많다.
아마도 이원론적인 서양 문명에서 비롯된 모든 이데올로기가 그렇듯, 둘다 그 '안'에 있는 사람과 그 '밖'에 있는 사람을 구분하고, 궁극적으로는 '밖'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도록 확장해나가는 게 목적인 탓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그 모든 분쟁은 단지 인간이라는 존재가 갖고 있는 '적대감에 의해 편을 가르는' 본성에서 연유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본성의 또 다른 면, 그러니까 긍정적이고 밝은 면은 이웃과 가족을 사랑하고 보호하려는 마음이다. '손님'에 등장하는 인물 중 가장 이상적인 인간형으로 보이는 소메 삼촌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무슨 뜻이 있거나 가까운 데서 잘해얀다구 기랬디. 늘 보넌 식구들과 동니 사람들하구 잘해야 한다구. 길구 제 힘으루 일해서 먹구살디 않으문 덫을 놓아 먹구 살게 되넌데 기거이 젤 큰 죄라구 말이다"
'덫을 놓아 먹고 산다'니 정말 중심을 꿰뚫는 표현이다. 비단 우리 민족의 문제에 국한되어서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알지만 모르는 것과 다름없이 뒤로 젖혀놓고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가장 중요한 덕목을 일깨워주는 말들이 아닌가. 마침 소설을 읽는 내내 매스컴에서는 8.15 방북단에 대한 보도가 연일 끊이지 않았다.
32. 김형경의 모스부호 -소설가 이영임
지난 봄이었다. 보길도로 가는 마지막 배를 눈앞에서 놓치고 화흥포를 벗어나려는데 서서히 노을이 진다. 금가루를 얹은 듯 반짝이는 바다를 뒤로 하고 산모롱이를 돌자 갑자기 우리 앞을 막은 것은 활활 타오르는 태양이었다. 무연고 공동묘지를 등지고 서서 바라보는 바다에도 손에 잡힐 듯 또 하나의 태양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실눈을 뜨고 애써 바라보는 태양은 말 그대로 불덩어리였다. 아무도 말이 없었다. 아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산등성이를 타고 불어오는 바람 사이로 '민화'가 날리는 모스 부호가 귓가를 맴돌기 시작한다.
"난 이런 시간, 해가 지려고 하는 시간에는 왠지 무서워져. 세상이 저만큼 물러나 버리는 것 같아서. 그래서 허공으로 모스 부호를 날려봐. 이 세상 어느 귀퉁이에 나처럼 해 지는 걸 무서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위안이 되겠지, 생각하면서"
김형경의 '새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에 나오는 여러 주인공들 가운데 끝까지 나를 사로잡은 인물은 민화였다. '단단하고 강하며 아름다웠고 언제나 제가 믿는 것에 대한 자신감으로 빛났고' '당차고 야무지며 열정적이어서 체구에 비해 열 배나 목소리가 컸던' 여자가 날리던 모스 부호. 졸업 후 동창들이 각자의 길을 걷고 있어도 끝까지 민중 곁에서 자신의 신념을 잃지 않았던 민화에게 해가 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한 두 달밖에 살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내 몫의 삶은 다 산 듯해. 이제 이 세상에는 내가 해야 할 일, 혹은 할 수 있는 일이 남아 있지 않아" 하면서 스스로 자신의 삶을 마감하는 민화.
살아가면서 해가 지는 것만이 무서울까. 마음을 나눌 사람이 없어서, 생활을 공유할 사람이 없어서, 그리고 '은혜'의 말대로 지옥에 떨어진 사람보다 더 불행한 사람인 지옥을 짊어지고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들도 있는데….
300여기 묘에는 하나같이 비목들이 있었다. 두 뼘이나 될까. 처음부터 이름이 쓰여지지 않은 비목들은 오랜 풍상에 검은 칠이 벗겨지고 상해 있었다. 낡고 초라한 묘 사이를 천천히 걸어 보았다. 누가 갖다 놓았는지 소주 한 병이 뒹굴고 있다. 쓰러진 라면봉지 사이로 반쯤 쏟아져 나온 쌀도 보인다. 비목마저 뽑힌 무덤 앞에 서 보았다. 당신은 무엇이 두렵고 무서웠나요. 세상을 향해 어떤 부호를 날려 보았나요. 다른 사람들이 날리는 부호를 받고 혹 위안을 받아보지는 않았나요.
'새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를 읽으며 주인공들의 이름을 자주 혼동했다. 그것은 작가를 포함해 살아 남은 주인공들의 이름 가운데 똑같은 글자가 하나씩 들어 있기도 했지만 같은 세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껴야만 하는 외로움이 더욱 깊었기 때문이다.
해는 저만큼 떨어지고 더 이상 이글거리며 타오르지 않았다. 일생을 통해 한 번 볼까, 말까한 낙조의 비경을 가슴에 담고 차에 오르는데 '형조'가 내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인다.
"이데올로기도, 꿈도, 이상도 다 삶을 위해 있는 거였어. 그것을 위해 삶이 있는 게 아니라
33. 윤후명의 가장 멀리 있는 나-소설가 부희령
"왜 소설을 씁니까?"
간혹 이렇게 묻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재밌게도, 그것은 내가 소설을 쓴다는 게 주위에 알려지기 이전, 그러니까 연초에 신춘문예로 등단하기 전까지, 혼자 습작을 하며 주로 내가 나 자신에게 끊임없이 던지곤 하던 물음이었다. 왜, 써야하지? 왜,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만 하지?
왜, 라고 묻기는 했어도 그게 소설을 쓰는 이유를 대라는 것은 아니었으리라. 소설을 쓰는 이유란 어쩌면 아주 간단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뿌리가 무엇이냐를 캐고 들어가기 시작하면 복잡한 문제가 될지도 모르지만, 결국은 쓰고 싶고, 쓴 것을 보여주고 싶다는 욕망에서 나온 것일 테니. 그러니까 왜 소설을 쓰느냐는 질문은 정작 무엇을 쓰고 싶은 건지, 그리고 무엇을 위해 소설을 쓰는 건지에 대한 물음일 것이다.
윤후명의 소설을 읽노라면 문득, 이 작가는 정말로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기만을 하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한 마디로 눈치보지 않는 글쓰기다.
무 자르듯 뚝 잘라서 구분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여러 소설작품들을 접하다 보면, 그리고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 고민하다 보면 '자기를 중심에 두는 글'과 '타인을 중심에 두는 글'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말하자면 남들이 귀를 기울이거나 말거나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내는 글이 있고, 독자를 의식하며 어떻게 하면 재밌을까, 어떻게 하면 감동 혹은 자극을 줄 수 있을까 애쓴 흔적이 눈에 보이는 글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소설이 일기가 아닌 바에야 형식상의 제약 때문에라도 두 요소가 적절히 섞여 있게 마련이지만, 굳이 그런 구분을 하게 되는 까닭은, 책을 읽다보면, 이따금 작가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소설을 쓰는가를 되새겨 보게 되기 때문인 것 같다. 작가 윤후명의 '가장 멀리 있는 나'는 어머니를 찾아 떠돌던 화엄경의 선재 동자를 연상시키는, 구도의 여정으로 읽히기도 한다.
'구도'라고 표현하기는 했지만 스리랑카에서 멕시코로, 중앙아시아에서 터키로, 그리고 하얼빈에서 선양으로, 마침내는 너무 낯설어진 고향 땅에 이르기까지 그는 무엇을 찾아 얻으려 한다기보다는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버리려 애쓰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아마도 그가 버리려 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가 오랫동안 천착해온 주제이기도 하며, 어느 순간 자폐적으로 보일 정도로 몰입하곤 하던 '나'라는 존재인 듯 싶다.
언제나 탈출을 꿈꾸는 일상이라든가, 진상이 모호하기만 한 아버지의 죽음이라든가, 태어나지 못한 생명에 대한 회한이라든가, 그 모든 것이 결국 우리가 '나'라고 믿는 혼돈을 이루고 있는 인연들이기에.
언젠가 읽은 티베트불교의 책에는 '남'과 구분되는 '나'가 있다는 의식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써 있었다. 아무데도 갇혀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감옥에 갇혀 있다고 '믿는' 원숭이의 예가 나왔던가.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가장 멀리 있는 나'에게 도달하는 길은 '나'라는 환(幻)을 멸(滅)하는 여정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34. 최인훈의 웃음소리-소설가 이영임
책장 정리를 하는데 석사논문집 하나가 손에 잡힌다. 일본어로 쓰여진 그 논문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못 읽기는 마찬가지이지만 그래도 찬찬히 넘겨본다. 누렇게 변색된 책갈피에서 웃음소리가 쏟아져 나온다. 자그마한 여자. H 노부코.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대학교 기숙사에서였다. 한국어에 서투른 그녀를 도와주면서 치기 어린 내 애국심도 유감없이 발휘하곤 하였는데 그 때 일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홧홧 달아오르고는 한다. 그 날도 수업이 없는 날을 택해 쇼핑을 하기로 하였는데 나는 당연히 명동으로 그녀를 데려갔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번화가라는 설명을 누차 하면서. 하지만 명동 주변의 백화점을 모두 둘러보아도 그녀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리고 아무 것도 사지를 않았다. 그저 나 혼자 즐거운 아이쇼핑을 즐겼을 뿐.
코스모스백화점을 나서며 조금씩 초조해지는데 마침 극장이 보였다. '웃음소리'. 최고의 문학상을 받은 원작에다 남정임이 주연이라지 않는가. 바로 이거야. 그녀를 데리고 극장으로 들어갔다. 최고의 여배우에다 문학작품을 영화화했으니 무척 재미있을 거라고 하면서.
어둠을 헤치고 자리에 앉자마자 내 눈부터 의심을 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관객은 우리를 빼고 5명이었다. 토요일 오후, 그것도 명동 한복판에서 상영되는 영화에 관객이 모두 7명뿐이라니. 자존심이 몹시 상한 나는 도저히 영화에 몰입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노부코만은 달랐다. 가끔씩 '영화내용'을 이해할 수 있느냐고 물어보면 그녀는 '주인공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기회만 있으면 줄칼로 손톱만 다듬는 주인공과 낙엽진 숲속. 그리고 웃음소리. 웃음소리뿐이었는데도.
어둠이 내리는 거리는 제법 쌀쌀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우리는 아주 오래 걸었다. 딱 관객 수만큼의 재미밖에 못 느꼈던 영화였지만 언젠가는 원작을 읽어보리라 생각하면서. 얼마 후 결혼을 하면서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는데 정작 최인훈의 '웃음소리'를 읽은 것은 일본으로 돌아간다는 그녀의 편지를 받고 난 후였다.
철저히 배신을 당한 여자는 모든 준비를 끝내고 온천을 찾는다. '약을 마시고 잠들 때까지 그좁은방에서 천장을 쳐다보고 있어야 할 생각은 죽음, 그것보다 소름이 더 끼치는 일'이었기에. 사보텐마저 사라진 사막처럼 마음을 비우고 교회에 들어간 그녀는 저울의 이쪽 접시에 올라앉는다. 다른 쪽 접시에는 그녀의 결심을-죽음의 결심을 얹는다. 그리고 거의 비는 마음으로 간절히 바란다. '비누방울처럼 가벼워서 살아있는 그녀의 몸과 맞먹어주지 않는 죽음의 접시를 예수가 눌러주기'를…. 마음의 저울 위에서 한없이 갈등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애절하기만 한데 영화에서는 어떻게 표현했는지 기억에 없다.
다 늦은 나이에 현해탄을 넘어 그것도 신학대학원으로 유학을 온 이유가 늘 궁금했었는데 그녀는 웃기만 했다. 다시 살았으니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겠다고 하면서. 그의 꿈대로 지금도 저울 접시 위에 앉은 사람들의 다른 쪽 접시를 눌러 주고 있을까.
[출처] 가슴에 묻어 둔 이야기|작성자 ilamjcyong
첫댓글 아주 오래된 이야기를 네이버 어떤 블로그에서 읽고 올립니다. 여기 글은 1996-?년인가 어느 중앙 일간지에 <가슴에 묻어둔 이야기> 게재 글로 누군가 한데 모아 놓았네요.
"고생좀 같이 하자"는 신경림선생님 말씀에 응하신 양문규선생님편을 제일 먼저 읽었습니다. 말의 무게감을 새삼 느낍니다.
가슴에 묻어둔 이야기가 가슴을 쓸어내리네요.
말에도 무게가 있는가 봅니다. 물론 말에도 감정이 서넛 이상으로 들어있겠지요. 시인들 이야기만 읽었습니다.
물 안맞고 땅의 기운이 맞지 않는 타관의 생활을 잘도 견디셨네요.
부러운 마음으로 '고생 좀 같이 하자'는 인용부를 곱씹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