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 -
☆ 2012년 11월22일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청주] 눈물을 닦아 드리자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독서 : 묵시 5, 1 - 10
† 복음 : 루카 19, 41 - 44
체칠리아 성녀는 로마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독실한
신앙인으로 자랐다. 성녀의 생존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260년
무렵에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며, 박해 시대 내내 성녀에 대한
신심이 널리 전파되었다고 한다. ‘체칠리아’라는 말은 ‘천상의
백합’이라는 뜻으로, 배교의 강요를 물리치고 동정으로 순교한
성녀의 삶을 그대로 보여 준다. 흔히 비올라나 작은 오르간을
연주하는 모습으로 그려진 체칠리아 성녀는 음악인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다.
★ 일곱 번 봉인된 두루마리는 어린양이신 그리스도 이외에 그
누구도 그 속에 무엇이 적혀 있는지를 모른다.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역사 속의 온갖 고통의 의미를 드러내 보여
주실 것이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시어 그 도성에 장차 일어날
일을 내다보시며 눈물을 흘리신다. 예루살렘 도성의 파괴는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길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 또는 ‘평화의 근원지’라는 뜻을
지닌 도성입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을 통일하고 예루살렘을 통일
왕국의 수도로 삼아 계약의 궤를 그곳에 옮겨 왔습니다.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지은 뒤로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종교적 중심지로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은 평화를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때를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때가 하느님께서 예루살렘을
구원하시고 평화를 가져다주시는 때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멸망의 길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내다보시고 안타까운 나머지
눈물을 흘리십니다. 실제로 기원후 70년, 예수님의 예언대로
예루살렘은 ‘통곡의 벽’이라고 불리는 성벽 일부만 남기고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자식이 파멸의 길로 접어드는 것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은
찢어질 듯이 아픕니다.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심정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멸망의 길에서 벗어나는 길은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주님의 눈물을 닦아 드리는
길입니다.
-매일 미사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신앙의 고수되는 법
2012년 나해 연중 제33주간 목요일
<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복음 : 루카 19,41-44
< 신앙의 고수되는 법 >
상대를 이겨야하는 모든 게임이나 스포츠에서는 ‘타이밍’만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축구를 할 때에도 순간적으로 패스해야
할 타이밍, 혹은 슛을 때려야 할 타이밍을 놓치면 1초도 안 되어서
그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게 됩니다. 1초만 늦게 패스를 하고 슛을
날려도 볼을 빼앗겨 버리거나 막히고 맙니다. 왜냐하면 상대에게
방어할 시간을 주게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테니스를 칠 때에도 혹은 더 정밀한 골프를 칠 때에도 0.1초 차이로
공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매우 다른 방향이나 거리로 날아가
버리고 맙니다.
강호동이 진행했던 무릎팍 도사에서 그가 씨름할 때에 경기가
시작하기 이전에 미리 다섯 개에서 일곱 개의 기술을 생각해
놓는다고 하였습니다. 한 기술이 먹히지 않았을 때, 다음 기술을
생각한다면 그 사이에 역습을 당하고 맙니다. 그래서 바로바로
이미 계획해 놓은 다른 기술로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이 상대에게
역습을 당하지 않는 길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운동을 잘하기 위해서는 머리 회전도 빨라야합니다. 모든
것을 미리 예상하고 준비하고 있어야 몸의 반응속도가 가장 중요한
타이밍을 놓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재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축구가 대세입니다. 너도나도 그들의 패싱
게임을 찬양하고 지향합니다. 어떻게 하면 패스를 잘할 수 있을까요?
패스할 곳을 못 찾았는데 상대방이 달려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패스 하다 빼앗길 경우엔 어떤 식으로 대응하는 게 좋을까요? 세계
축구의 ‘보물’ 안드레스 이니에스타(29, 바르셀로나)는 키도 작고
몸무게도 63킬로밖에 되지 않는 자신이 어떻게 해서 패스의 달인이
되었는지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볼을 받기도 전에 나는 패스를 연결할 동료부터 찾는다. 항상 내
주위에 누가 있는지 인지하고 있다. 킬러 패스를 내주는 타이밍을
간파해야 한다. 바르셀로나는 오랫동안 정해진 전술로 호흡을
맞춰왔기 때문에 모든 선수가 어디로 움직여야 할지를 잘 알고 있다.
볼이 어디로 움직일지를 상대보다 먼저 안다면 그만큼 유리해진다.
볼을 잡은 상태에서 어떻게 할지 생각하면 바로 빼앗기고 만다.
최고의 선수들은 생각의 속도가 무척 빠르다. 동료가 어디로
달려가는지, 오프사이드에 걸리진 않을지, 누가 충분한 공간을 갖고
있는지, 누가 볼을 받고 싶어 하는지, 발 앞으로 받고 싶어 하는지
또는 앞 공간으로 받고 싶어 하는지를 알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항상 주위에 누가 있는지를 인지해야 한다.”
바둑이나 장기를 두어도 얼마나 먼 앞 수를 미리 보느냐가 고수에
속하느냐, 이제 갓 입문한 사람이냐가 판결이 납니다. 당구를 칠
때도 눈에 보이는 공을 치는 것은 하수이고, 고수는 치고 난 다음에
공들이 흘러서 어떻게 모이게 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합니다.
관광버스를 타고 가다가 누가 멀미를 하면, 그 멀미하는 사람을 버스
맨 앞자리에 앉힙니다. 그 이유는 앞 유리창으로 버스가 달리는 길이
미리 보이기 때문입니다. 미리 보이면 좌회전을 할 것인지 우회전을
할 것인지 미리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몸이 놀라지 않아 멀미가 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운전하는 사람은 절대 멀미를 하지 않습니다.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미리 예상하고 있지 못하다면 닥치는 모든
상황을 헤쳐 나갈 때마다 멀미가 나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미리
예상하고 있다면 대처하는 것이 매우 간단해집니다. 모든 것의 하수와
고수를 판단하는 방법은 이것입니다.
“준비가 되어 있느냐, 그때그때 닥치는 대로 살아가느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보시며 우십니다. 미래에
로마인들에게 완전히 파괴될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그렇게 멸망하게 될 처지가 된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혹은 예수님께서 나타나실 때에
대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정말 그 때를 위해 가장 잘 준비가 되어있었던 삶의 고수가 계셨는데
바로 성모님입니다. 성모님은 즈카리야처럼 자신에게 닥쳐 온 운명에
대해 주저하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기다려왔다는 듯이 바로
받아들이십니다.
혹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도 보십시오.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를 바꿀
때가 아니라고 하시지만 성모님은 바로 그 때가 예수님이 기적을
하셔야 할 때임을 알아차리십니다. 그래서 첫 번째 기적을 얻어내신
것입니다.
때를 아는 것, 이것이 고수의 특징입니다.
만약 사제나 수녀님이 되려고 할 때 이미 결혼해 버린 상태라면 어떻게
할까요? 이미 때가 늦어버린 것입니다. 결혼하기 전에 하느님이 성소의
길로 불러주실 때를 미리 알고 있었어야 합니다. 일단 기차가 떠나면
그만입니다.
그렇다면 고수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관심을
가져야합니다. 내가 관심이 없으면 보이지를 않기 때문입니다.
준비한다는 의미는 그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꽃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차를 타고가다가도 그 꽃이 보이지만, 꽃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걸어가면서도 그 꽃을 보지 못합니다. 성경을 읽어도 자신이
관심 있는 것만 보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가 각자 성경을 다르게
해석해서 수많은 종파로 나눠지게 된 것입니다. 물론 가톨릭교회는
개인의 해석을 규제하고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가르침 안에서 성경을
보려 합니다. 개인의 관심사가 어떻게 그동안 성인들을 포함한 교회의
관심사를 넘어설 수 있겠습니까?
어쨌건 누구든지 하느님의 뜻에 관심이 없다면 나에게 주어질 소명이나
구원의 시기를 놓쳐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우리의 관심이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나 세상에 두게 만드는 방법을 쓰는
것입니다. 나의 관심이란 하루 중에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아가는지를
살펴보면 됩니다. 매 순간이 하느님의 뜻만을 생각할 때, 신앙에 있어서는
가장 완전한 고수가 되는 것입니다.
오산 성당 홈페이지: http://cafe.daum.net/ca-osan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청주] 눈물을 닦아드리자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 루카 19,41-44
눈물을 닦아드리자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비시는 분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주님께
기도하며 청한다고 하지만 그분은 우리 모두의 구원을 바라고 계시며
그 범주에서 벗어날 것을 염려해 우리를 위해 빌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의 구원을 바라시는 그분의 사랑이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뜻 안에 머물지 않고 있으니 눈물을 흘리며
안타까워하십니다.
예루살렘 도성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마음은 너무도 아프셨습니다.
왜냐하면 회개의 길을 걸어야 할 사람들, 평화를 갈망해야 할
사람들이 그 본연의 것에는 관심이 없고, 멸망의 길을 걷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참 평화의 길을 걸었으면 좋으련만 그들의 완고한
마음은 자신의 삶을 돌이킬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멸망의
길을 자초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우리의 완고함 때문에 우십니다. 남을 판단하고
비난하는 소리에 우십니다. 평화를 말하면서도 정작 평화를 위해
노력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도 다스리지 못하니 가슴이 아픕니다. 자기
잇속을 차리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자니 눈물이 납니다. 이기심으로
가득 차서 주님을 생각할 틈이 없으니 참된 평화는 영영 멀기만 합니다.
평화를 원한다면 먼저 마음의 무질서를 바로 세워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세상 끝 날까지 항상 함께해 주신다”는 약속을 믿는
이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마음의 고요를 누립니다. 시련과 어려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누가 알아주든 그렇지 않든 구애 없이
주님의 뜻을 행하고 그것을 기뻐합니다. 그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른 주님의 참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그 평화를 일찍 알았더라면
그렇게 사사건건 마음의 혼돈을 가져오지는 않았을 텐데 …. 주님께
대한 믿음은 모든 것을 이겨내게 하고 또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사랑은
사랑을 낳고, 미움은 미움을 낳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게 되고
마침내 구원을 갈망하며 구원을 살게 됩니다. 주님의 눈물을 씻게
됩니다. 참으로 올바르게 주님을 믿는 이에게는 참 평화가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것에서 평화를 갈망합니다.
재물이나 명예, 건강, 외모, 자식 등이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것에 전력투구하며 애를 씁니다. 그렇지만
그건 것들은 영원하지 않고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합니다. 결국 그것이
참 평화를 줄 수는 없습니다. 참 평화를 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주님만이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지켜주시고,
그것을 믿는 이는 그 안에서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오늘은 믿음으로 주님의 눈물을 씻겨드리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웃을 위해 울어줄 수 있는 넉넉한 마음과 주님의 눈에서 눈물을
그치게 해드리고 웃음꽃이 피게 할 수 있는 새 삶이 지금 여기서
시작되기를 희망합니다. 세실리아 축일을 맞이하여 축하와 사랑을
드립니다. 행복하십시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수도회] 눈물 흘리시는 예수님
2012년 11월22일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 루카 19,41-44
눈물 흘리시는 예수님
사랑하는 예루살렘 도성을 바라보시며 눈물 흘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가슴 아프게 다가옵니다. 고색창연한 아름다운 도시
예루살렘,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랑
예루살렘, 온갖 지혜와 은총의 보고인 예루살렘, 그 사랑스런
도시를 바라보며 감탄하고 환호성을 터트려야 마땅할 텐데,
예수님께서는 왜 우셨을까요?
원인은 너무나 간단했습니다. 겉은 호화찬란하고 그럴 듯 해 보였지만
속으로는 부패와 타락으로 곪아 터져가는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그토록 돌아서라고 목이 터져라 외쳤지만 끝끝내 우상숭배와 배신의
길에서 벗어나지 못한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자식들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 세상 모든 부모들의 한결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그런데 많이 빗나간 자녀, 맛이 간 자녀, 생명의 길이
아니라 죽음의 길로 접어드는 자녀가 있다면 부모 입장에서 어떻게
처신하겠습니까? 정말 그 길이 아닌데, 정말 가지 말아야 할 길인데도
불구하고 계속 가고 있다면 부모 입장에서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처음에는 불러 앉혀놓고 차근차근 설득도 시도해 볼 것입니다. 그게
안 먹혀들면 너무도 안타까운 나머지 언성도 높일 것입니다. 완력도
사용할 것입니다. 갖은 수단을 총동원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모든 수단들이 전혀 먹혀들지 않을 때, 어떤 부모는
그 자녀 앞에 눈물로 호소할 것입니다. 제발 돌아오라고, 제발 초심으로
돌아가자고.
오늘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부모의 마음으로 당신의 아리따운 딸
예루살렘을 향해 눈물 흘리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성들과 온 세상이 지금 자신들의 목전에 들이닥친
이 시간의 중차대한 의미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가슴 아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육화강생하시고 그들 사이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지금 바로 이 시간이 구원의 때이며 은총의 시기라는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함을 슬퍼하십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메시아께서 카이사르처럼 자신들에게 세속적인
힘과 권세를 부여해줄 것을 바랐었지 실제적인 메시아 본질적인
메시아의 도래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세상의 왕처럼 화려한 모습으로 인간 역사의 전면에 등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지만 정작 참 메시아께서는 세상에서 가장 겸손하고
가난한 얼굴로 이 세상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아무리 부르짖어도 돌아서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 아무리 눈물로
호소해도 회개하지 않는 예루살렘 사람들, 머지않아 영원할 것 같던
성채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이며 더 이상 도성 안에서는 찬미가가
울려 퍼지지 않을 것이며, 그 대신 비탄과 통곡소리, 칼부림이
난무할 것임을 예견하신 예수님이셨기에 그리도 슬피 우셨던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울고 계십니다. 우리의 배신과 타락으로 인해,
우리의 절벽같이 완고한 마음으로 인해 슬피 우십니다.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고 끝까지 애타는 하느님의 마음을
저버리는 예루살렘,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행하기는커녕 언제나
반대하고 거부하는 예루살렘의 최후를 내다보시던 예수님이셨기에
그리도 슬피 우셨던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인천] 획일화가 만들어 내고 있는
언젠가 맛 집이라고 이름을 날리고 있는 곳을 찾아갔습니다. 이곳은
특히 짬뽕에 있어서는 그 어떤 집보다도 독특한 맛을 낸다고 하더군요.
가보니 그 중화요리 집에는 사람이 참 많았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정말로 ‘맛 집은 맛 집인가 보다’ 싶었지요. 한참을 기다려서
겨우 짬뽕 한 그릇을 받았습니다. 군침을 흘리며 가장 먼저 국물을
숟가락을 퍼먹는 순간, 동시에 큰 실망감만 가져올 뿐이었습니다. 짬뽕
국물이 너무 매운 것입니다. 겉으로는 매우 먹음직스러운 음식인지는
모르겠지만 또한 많은 사람들이 좋아할지는 모르겠지만, 매운 음식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저에게는 좋아할 음식이 될 수 없는 것이지요.
생각해보니 맛 집의 기준은 과연 무엇일까 싶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맛있다고 하는 집이 과연 맛 집일까요? 사람마다 다 입맛이 다른데
어떻게 이곳은 맛 집이고 저 집은 맛 집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제가 요즘 즐겨가는 곳이 있습니다. 너무나 친절하고 밑반찬도 잘
나와서 특별히 갈 곳이 없으면 이 집을 갑니다. 그래서 지난번에는
신부님들께 인천 맛 집으로 선정된 곳이 있다면서 모시고 갔었지요.
그런데 신부님들께서는 조미료가 너무 많이 들어갔다면서 별로라고
말씀하네요. 저한테는 너무나 맛있는 집인데 말이지요.
우리 주변을 보면 이렇게 획일화 시키는 것들이 너무나 많지 않은가
싶습니다. 자신의 입맛이 절대 기준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사람과
사람의 만남 안에서도 이러한 획일화로 아픔과 상처를 줄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내 기준에 의해 저 사람은 옳은 사람,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평가된다는 것 자체가 큰 잘못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획일화를 시키는 가운데에서 하느님을 만나기란 쉽지 않습니다.
획일화는 하느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뜻이 더 윗자리에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도성을 보시면서 우십니다. 평화의 도시,
평화의 근원지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도성이지만, 이 안에 참된 평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알지 못하며 또한 그 뜻을 따르지
못하기 때문에, 후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큰 죄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지요. 자신의 생각만 옳다는 획일화가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러한 획일화가 큰 죄를 만들고 있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도 바로 자신들의 이권만을 생각하는 획일화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그래서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들이
죽음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 고통과 아픔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일까요? 이러한 획일화가 만들어내고 있는 지금의 현 상황을 보시고
주님께서는 어떠하실까요? 어쩌면 단순히 우시는 정도가 아니라,
통곡하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제 나의 뜻을 더 윗자리에 올려놓는 획일화를 버려야 하겠습니다.
이제는 주님의 얼굴에 슬픔이 아니라 웃음을 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인간이 모두 똑같기를 원했다면 신은 인간을 그렇게 창조했을 것이다
(코란).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다는 곳에 세운 눈물성당.
주님께서 침묵하시는 이유
제게 상담을 청하시는 분들을 종종 만납니다. 그 사연도 참으로
다양합니다. 가족사, 연애, 금전적 문제, 신앙적인 갈등 등등...
참으로 많은 종류의 상담을 하게 됩니다. ‘나도 잘 모르는데 왜 내게
오셨을까?’라는 생각도 해보지만, 얼마나 답답하시면 제게 오셨을까
라는 생각으로 최대한 들어주려고 노력합니다. 하긴 고해소에 들어오셔서
이렇게 질문하시는 분도 뵌 적이 있었지요.
“신부님, 제가 지금 주식투자를 하고 있는데 계속해야 할까요? 아니면
멈춰야 할까요?”
경제에 대해서는 완전히 숙맥인 제가 어떻게 판단해서 답을 내리겠습니까?
아무튼 사람들의 모든 질문에 답변하기 힘든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들어드리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꼭 잊지 않는 것은 함께
기도하겠다는 약속이지요.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것은 상담이 끝난 뒤에
많은 분들이 “신부님 덕분에 큰 도움이 되었어요.”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저는 들어만 주었을 뿐인데 말이지요.
우리 주님께서 침묵하시는 이유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됩니다. 만약
제가 기도하는 내용에 하나하나 꼭 집으면서 토를 다신다면 어떨까요?
그리고 계속해서 “이건 하지마. 저거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해야 해.”
라는 식으로 모든 점에 있어서 간섭을 하시면 어떨까요?
주님의 전지전능하심을 깨달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사는 것 자체가
재미없을 것입니다.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자유가 없는 상태에서 무슨
기쁨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께서는 침묵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와 늘 함께 하시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랑하시기 때문에
침묵하시면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러한 주님의 인정해주는 사랑에 비해 우리의 사랑은 어떤 모습일까요?
계속해서 간섭을 하고 방해하는 사랑은 아니었을까요?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전주] 예수님의 눈물
예수님께서 비통한 심정을 가눌 길 없어 눈물을 흘리신다. 이스라엘
백성의 영원한 도성, 그들의 삶을 지탱해 주는 유일한 희망인 예루살렘이
멸망을 앞두고 있다. 유다인의 가문에서 태어난 예수님이시기에 동족의
아픔은 곧 자신의 아픔으로 다가왔으리라.
복음서에 단 한 번 언급된 예수님의 소년 시절에서도 예수님은 축제 때
관습에 따라 예루살렘에 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부모님께서
잃었던 예수님을 성전에서 사흘 만에 찾았을 때 ‘제가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라고 당차게 답변한다. 그 아버지의
집이 왜 멸망하려 하는가?
오늘 복음은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노아 시대에도 사람들은 온갖 타락으로 얼룩져
있었고 방주를 만들던 노아를 비웃으며 흥청망청하다가 홍수의 심판을
받는다. 하느님의 도성 예루살렘이 물신숭배와 갖가지 부패로 얼룩져
있었지만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다. 예루살렘은 더 이상 평화의 도성이
아니었다. 그래서 예수님의 눈물은 사랑하는 이의 멸망을 지켜봐야
하는 단장斷腸의 아픔으로 다가온다.
지금 우리 시대에 하느님 백성은 그분 보시기에 어떠할까? 이상적인
교회의 모델인 초대교회처럼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는지. 주일미사가 끝나고
모두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성전에서 여기저기 흩어진 주보를 정리하며
잠시 묵상해 본다. 언젠가 예수님께서 나를 찾아오시어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하고 안아주시는 꿈을 꾸는 내 가슴에 환한
무지개가 희망처럼 떠오른다.
- 신현숙(전주교구 나운2동천주교회) -
◈ [수도회] 평화의 길
인도의 옛 우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히말라야 산 밑에
아주 평화롭고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의 마을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서로 서로를 잘 이해해 주었고, 서로 서로를 사랑해
주었기 때문에 그 마을에는 싸움도 없었고, 다툼도 없었죠.
그들은 모두 신의 뜻에 의해 살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악마가 이것을 보고 하느님께 시비를 걸었습니다.
악마는 하느님에게 “신이시여, 저 사람들이 항상 행복하리라
봅니까?” 그러자 하느님이 “그들은 언제나 행복할 것이다.
보아라. 얼마나 아름다운가!” 악마는 사람들이 행복하게 웃는
모습에 심통이 나서 “좋아요. 나하고 내기합시다. 나는 저 마을
사람들을 아귀다툼하는 인간들로 만들어 놓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악마가 끈질기게 졸라대기도 했고, 사람들을 믿었기에
그럼 해 보라고 하였습니다. 악마는 세 번의 기회를 얻어 사람들을
유혹하러 지상에 내려 왔습니다. 악마가 지상에 내려와 행복한 마을의
사람들을 관찰하면서 어떻게 하면 이들을 아귀다툼의 구렁텅이로
빠뜨릴 수 있을까하며 살펴보다가 한 가지를 발견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마을 한 가운데에 있는 “사랑의 마음”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랑의 마음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바로 보면서
서로가 그렇게 이해해 주고, 아껴주고,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악마는 이것을 사람들에게 빼앗아 히말라야의 제일 높은
봉우리에 갖다 놓았습니다. 마을에서는 일대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더욱이 그들이 매일 바로 보던 사랑의 힘이 없어졌기에 불안과
초조가 엄습했죠. 그래서 마을의 원로들은 특공대를 조직하여
그 “사랑의 마음”을 찾아오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히말라야의
눈보라를 헤치고, 어떤 어려움도 다 물리치고는 그 “사랑의
마음”을 찾아왔죠. 악마는 마을 사람들이 “사랑의 마음”을
찾아가자 이번에는 사람들에게 “사랑의 마음을 빼앗아 태평양
바다 깊숙한 곳에 숨겨놓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다시 특공대를 조직하여 오랜 고난과 시련 끝에
결국 이것을 다시 찾아왔습니다. 하느님은 흡족해 하셨습니다.
악마는 고민에 빠졌고, 어떻게 하면 인간을 고통 속에 살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다 그러다 한 가지 묘책이 떠올랐습니다.
이번에는 그 사랑의 마음을 산산이 부수어서 한 조각씩 사람들의
마음에 넣어보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사랑의 마음을 조각내 행복한 마을 사람들의 마음에 한
조각씩 넣어주자 마을 사람들은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특공대를
만들어 세상 곳곳에 다 보내봐도 사랑의 마음은 그 어디에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사람들이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들 마음속에 그것이 한 조각 한 조각씩 들어 있다는 것을 그때부터
사람들은 이 사랑의 마음을 차지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훔치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마침내 살인을 해서라고 차지하려고 했죠.
히말라야의 행복한 마을은 이제 악마가 원하던 데로 아귀지옥이
되어버렸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사랑받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 안에서 행복하고 싶어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불행을 보시며 눈물을 흘리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하고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평화의 길은 “하느님의 뜻, 바로 구원의 의지를 받아들이는 길”
입니다. 그러기에 평화의 길은 “함께 사는 길”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고, 하느님이 각자에게 보내준
사람들과 함께 사는 방법을 배우며, 자신을 둘러싼 세상 모든 것들과
함께 사는 방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 “함께 사는 길”이 흔히 가장
크게 위협 받는 것은 사람의 이기심 때문일 것입니다. 누구나 사랑받고
싶고, 누구나 행복하고 싶습니다. 그러기에 무엇보다 더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그 사랑과 행복을 “함께 모색하는 것”, 그것이 바로
“평화의 길”로 나서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주님, 저희를 평화의 길로 나서게 이끌어 주소서. 아멘”
- 글라렛 선교 수도회 이회진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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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