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글 본문내용
|
다음검색
제2장 살인마를 찾아서 황약사는 옥녀의 시체를 이불로 둘둘 말아 가지고 성밖에다 묻고 비석을 세웠다. 그는 옥소로 비석에다 '옥녀의 묘'라고 쓰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옥녀야, 이렇게 억울하게 죽다니 가엾기 짝이 없구나. 내 기어코 소인이란 놈을 찾아내어 너의 서러운 한을 반드시 풀어 주고야 말겠다. 부디 고이고이 잠들기를 바란다.' 황약사는 옥녀의 무덤 앞에서 어디로 가면 좋을지 몰라 한동안 망연히 서 있었다. 그는 건강부(建康府)를 떠나 태호(太湖)에 가서 자연이나 즐겨 볼까 하다가 결국엔 생각을 달리했다. 소인이란 놈이 여자의 음력을 뽑아 들여 내력을 연마하려는 이상 이 근처에서 옥녀와 같은 사냥물을 노리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는 아름답고 젊은 여자라면 무슨 방법으로든 손에 넣어 내력을 연마하는데 이용하고 잔혹한 방법으로 죽여 버리는 악귀 같은 놈인 것이다. 그러한 놈의 횡포를 그냥 묵인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한 황약사는 다시 건강부로 들어갔다. 황약사는 크고 작은 술집에 드나들면서 한가한 술꾼들이 주고받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렇게 며칠간이나 소인의 종적을 추적해 보았지만 아무런 실마리도 잡아내지 못했다. 황약사의 마음은 점점 다급해졌다. 어느 날 저물녘이었다. 황약사는 역시 자그마한 술집에 들어섰다. 예쁘장한 아가씨가 교태를 부리며 손님들의 술시중을 들고 있었다. "어머나, 멋진 도련님 한 분이 들어오시네?" 그녀는 황약사가 들어서자 방긋 웃는 얼굴로 반겨 주었다. 황약사가 술과 안주를 청하자 그녀는 한 손에는 술잔과 젓가락 따위가 놓인 소반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술단지를 들고 바삐 건너왔다. 그녀는 잽싸게 술상을 차리면서 상냥하게 말을 건넸다. "공자님의 안색을 보니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있으신가 봐요? 하지만 두어 잔 들다 보면 다 잊혀질 거예요." 그녀는 살갑게 술을 권하며 빙긋이 웃어 보였다. 황약사는 넌지시 그녀를 건너다보았다. 그녀는 마냥 웃는 얼굴로 술꾼들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시중을 들고 있었는데 야들야들한 몸매며 진주처럼 빛나는 눈매가 뭇사내들의 간장을 녹이고도 남음이 있었다. 황약사는 시선을 돌려 술꾼들을 둘러보았다. 여느 술집과는 달리 늙은이는 한 사람도 없고 전부 패기 만만한 젊은 사람들 뿐이었다. 아마도 이 아가씨에게 반해서 매일마다 찾아오는 젊 은이들인 것 같았다. 갑자기 밖에서 건장한 사나이 서넛이 한꺼번에 몰려들더니 술상하나를 차지하고 빙 둘러앉았다. 그 중의 한 사내가 급히 주인을 불렀다. "술을 가져와, 술을!" "예, 갑니다!" 아가씨가 날렵하게 몸을 움직여 그들에게 달려갔다. 어느새 술상이 차려지고 네 사나이는 술잔을 쭉쭉 들이키면서 왁자지껄 떠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술을 바닥낸 그들은 한꺼번에 술을 세 단지나 청했다. 아가씨는 곧 술을 날라 왔다. 한 사내가 진흙으로 봉한 단지 뚜껑을 열고는 술잔에 술을 붓다 말고 흠칫 놀라며 소리쳤다. "이봐!" 그는 기가 막힌 듯 다시 한 번 술단지를 들여다보았다. 그는 얼굴이 벌개져서 재차 소리쳤다. "주인 어디 있어? 냉큼 와 보지 못할까!" 아가씨가 잔걸음으로 다가와 한 손으로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면서 상냥하게 웃어 보였다. 사내가 버럭 성을 냈다. "이게 뭔가? 술단지에 죽은 사람의 해골이 들어 있지 않나, 엉?" 아가씨는 술단지를 들여다보더니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의 말대로 술단지 안에는 새하얀 뼈가 동동 떠있었던 것이다. "죄, 죄송합니다. 이게 어찌 된 영문인지……." 아가씨는 말끝을 맺지 못하고 하얗게 질린 얼굴로 사나이를 쳐다보았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이 집에서는 술단지들을 움 속에 깊이 쌓아 두고 타인은 얼씬하지 못하게 하는데 누가 이런 짓을 했단 말인가. 아가씨는 난색을 거두며 얼른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녀는 다시 본래의 태도로 돌아가 상냥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를 어쩌지요? 아마도 고깃덩어리를 집어 넣은 줄 모르고 술을 담아 놓은 것 같군요. 원 참, 술 빗는 남정네들이 잠깐 헛눈을 팔았던가 봐요. 제가 얼른 바꿔 올게요." 그녀는 간드러진 웃음으로 능청을 떨며 술단지를 받쳐들고 물러갔다. 그제야 사나이는 어느 정도 노기가 풀리는지 제자리에 앉으며 소리를 쳤다. "여보게들, 오늘은 모두 취하도록 마셔 보자구!" 사나이는 다시 옆에 있는 술단지 뚜껑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연거푸 석 잔씩 마신 다음 이야기를 하자구!" 그는 뜯어낸 뚜껑을 옆으로 획 던지고는 양손으로 단지를 감싸쥐었다. "으악!" 술을 따르려던 그는 다시 질겁해서 소리쳤다. 이번에는 싹뚝 잘린 사람의 손이 단지 안에 등등 떠있었던 것이다. 사내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말문이 막혀 주춤 물러앉았다. 번갈아 단지 속을 확인한 세 사내는 잔뜩 화가 나서 주인을 불러댔다. 종종걸음으로 달려온 아가씨도 술단지를 들여다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단지 뚜껑을 뜯어냈던 사내가 벌떡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이 술집 주인은 분명 나쁜 놈이야!" 그는 남은 술단지 뚜껑을 마저 와락 열어젖혔다. 역시 하얀 뼈들이 둥둥 떠있었다. "이것 보라구! 사람을 죽이구 흔적을 감추기 위해 몸뚱어리를 모두 토막내어 술단지 안에 처넣은 거야!" 사내들이 왁자지껄 떠들어댔다. "이 요망스러운 계집년아, 바른 대로 말해! 네 년들은 언제부터 재물을 노리고 사람을 죽여 왔느냐?" 아가씨는 너무 기가 막혀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울음 소리에 부엌에서 일하던 하인들이 우르르 달려나왔다. 그들은 저마다 기웃기웃 술단지를 들여다보더니 하나같이 놀라 뒤로 물러섰다. 술단지 뚜껑을 열던 사내가 흥분이 가라앉지를 않는지 무섭게 다 그쳐 댔다. "이 년아, 바른 대로 말하지 못하겠느냐? 무슨 연고로 사람을 죽이고 토막을 내서 감추어 두었느냐?" 아가씨는 방울방울 눈물을 떨구며 사시나무 떨듯 떨 뿐이었다. 황약사가 보다못해 천천히 일어나며 사나이를 향해 말했다. "이보시오, 술단지 안에 사람의 뼈가 있다니 내 보기에도 이상한 일이오만, 이 집 주인과는 상관없는 일 같소. 만일 이 집 주인이 그런 짓을 했다면 사람의 뼈가 환히 보이는 술단지를 내놓을 리가 있겠습니까?" 황약사의 말에 사내들은 모두 코웃음을 쳤다. 그중 한 사내가 쌀쌀하게 웃으며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누가 이 술단지에 뼈다귀를 넣었다고 보시오?" 황약사는 웃는 얼굴로 아가씨를 향해 점잖게 읍을 하고 말했다. "아가씨, 아마도 누군가 이 집 술창고에 들어가 술단지에 뼈를 넣은 것 같군요. 우리와 함께 그곳에 가보는 게 어떻겠소?" 아가씨는 황약사의 따뜻한 태도에 마음이 푸근해 짐을 느끼며 선뜻 응했다. 그녀는 여러 사람들을 이끌고 당장 술 창고로 향했다. 술을 저장하는 움은 좨나 널찍했다. 술통이며 술단지가 양쪽 벽에 가지런히 놓여져 있었다. "아악―!" 촛불을 켜고 이리저리 비추어 보던 아가씨가 돌연 비명을 질렀다. 맞은편 벽에 죽은 송장이 앉아 있었던 것이다. 송장은 살이 썩고 문드러져서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다. 모두들 슬금슬금 다가가 보니 그것은 한 여인의 시체였다. 하얗게 센 백발이 듬성듬성 빠져 땅바닥에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황약사는 뭔가 짚이는 것이 있었다. 그는 옥소로 죽은 여인의 머리를 톡톡 두들겨 보았다. 그러자 죽은 여인의 입에서 썩은 이빨이 후둑후둑 떨어져 나왔다. '이것은 틀림없는 소인의 짓이다.' 황약사가 조용히 물었다. "아가씨, 이 여인이 죽은 지 얼마나 될까?" 아가씨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전들 어찌 알겠어요. 사흘 전에도 술을 가지러 내려온 사람이 있었지만 아무 소리도 없었거든요." 황약사는 속으로 생각을 굴렸다. 소인이 이 부근에 숨어 다니면서 공력을 연마하기 위해 무고한 대인들을 죽이고 있음에 틀림이 없었다. 어떻게든 하루빨리 이 악귀 같은 놈을 찾아내어 죽이지 않으면 계속해서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 하지만 어딜 가서 소인을 찾는단 말인가. 어둠이 깃들자 황약사는 조용히 방문 앞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하늘엔 쟁반 같은 달이 걸려 있는데 사위는 쥐 죽은듯이 고요했다. 황약사는 무작정 소인을 기다리고 있자니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소인이 꼭 이 술집에 다시 올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다시 올 생각이 있는 놈이라면 시체를 토막내어 술단지에 넣을 까닭이 있겠는가? 사람의 뼈가 둥둥 떠있는 술단지를 보면 손님들이 혼비백산해서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것이요, 그러면 소인은 이 술집에서 마음놓고 여인들을 다를 수 있을 것이었다. 생 각이 이쯤 이른 황약사는 소인이 올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리기로 작심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터벅터벅 발자국 소리가 나더니 음산한 바람이 이는 듯싶었다. 황약사는 어둠 속을 가만히 살펴보았다. 두억시니 같은 새하얀 그림자가 흔들흔들 다가오고 있었다. 황약사는 슬쩍 몸을 피해서 집 뒤에 숨었다. 하얀 그림자는 문앞에 오더니 거리낌없이 문을 밀었다. 하지만 문짝은 안으로 잠겨 있었다. 다시 한 번 문을 밀쳐 보던 그림자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낄낄 웃어댔다. 놈은 한 손을 뻗쳐 끌날같이 날카로운 손톱 끝으로 달각달각 문을 후비기 시작했다. 잠깐사이에 문짝에는 휑하니 구멍이 뚫렸다. 놈은 그 구멍으로 손을 넣어 빗장을 빼고 와락 집안으로 뛰어들었다. 순간 집안이 발칵 뒤집히는 듯이 소란스럽더니 곧 잠잠해졌다. 황약사가 슬며시 창가로 다가가 안을 들여다보았다. 놈은 머리에 썼던 횐 보자기와 몸에 걸쳤던 흰 비단폭을 벗어 던졌는데 역시 짐작했던 대로였다. 소인은 음흉하게 소리내어 웃으며 호령했다. "다들 일어나지 못할까?" 방구석에 앉아 와들와들 떨고 있던 노부부와 딸로 보이는 곱게 생긴 처녀가 소인의 호령에 못 이겨 주춤주춤 일어났다. 처녀는 술집에서 일하던 바로 그 여자였다. 소인은 징글맞게 웃어대면서 물었다. "다들 움 속에 있는 시체를 보았겠지?" 세 식구가 고개를 끄덕이자 소인은 짐짓 점잔을 빼며 천천히 말했다. "두 어르신을 놀라게 해서 죄송하오. 오늘은 사람을 해치려고 온게 아니라 이 집 따님을 아내로 삼으려고 왔소. 따님이 하도 귀엽게 생겨서 말이오." 노부부는 소인의 험상궂은 몰골을 보고 자기들을 죽이지나 않을까 해서 가슴을 조이고 있던 터라 뜻밖에도 소인이 청혼을 하자 얼마간 마음이 놓였다. 바깥 노인이 소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손님께선 함자가 어떻게 되시는지요?" 소인은 픽 웃으며 대꾸했다. "내 이름이 뭐든지 노인장하구 무슨 상관이 있소?" 노부부는 슬하에 아들이 없고 늦게야 겨우 딸 하나를 낳아서 금지옥엽같이 귀하게 길러 온 터였다. 그런데 어떻게 출신도 알 수 없는 이 흉측하고 험상궂게 생긴 사내에게 귀한 딸을 선뜻 내줄 수 있겠는가. 바깥 노인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면서 거절했다. "천만, 천만 부당한 말씀이오!" 소인은 낄낄 소리내어 웃더니 등에 지고 있던 큰 자루를 내려 밥상 위에 주르르 쏟아 놓았다. 순간 온 방안이 찬연한 빛으로 가득찼다. 소인은 점잖게 뒷짐을 지고 너스레를 떨었다. "진주 열 말인데 어지간한 성곽하고도 맞바꿀 수 있을 거요. 두 노인장께 드리는 것이니 기꺼이 받아 주시오." 세상의 장사치들이란 돈과 재물에는 오금을 쓰지 못하는 법이다. 노부부는 밥상 위에 수북히 쌓인 진주를 보더니 입이 함박만해져서 다물 줄을 몰랐다. 노부부가 주춤주춤 망설이고 있는데 불현듯 옆에 있던 딸이 악을 쓰며 소리를 쳤다. "누가 당신한테 시집을 간대요? 죽으면 죽었지 그렇게는 못해요! 이따위 진주는 도로 가져가요!" 소인이 느긋하게 말했다. "이봐, 아까도 말했지만 이만한 구슬이면 멋들어진 성곽하고도 맞바꿀 수 있어. 진귀한 진주를 열 말이나 퍼주고서까지 임자를 데려가려는 내 마음을 그렇게도 모르겠나? 이제 나하구 살아 보면 알게 될거야. 결코 후회하진 않을 거라구. 하하하……." 술집 딸은 소인의 흉물스러운 얼굴을 보면 볼수록 소름이 끼쳤지만 마음을 다잡고 구슬리기 시작했다. "알았어요. 하지만 손님, 저에게 청혼할 생각이라면 정정당당히 밝은 대낮에 찾아와야지 이렇게 밤중에 뛰어들면 어떡합니까? 점잖게 처리할 수 있는 일을 가지고 사람을 놀라게 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러자 소인은 히죽이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과연 총명한 아가씨구려. 내겐 바로 임자같이 총명한 계집이 필요해!" 그리고는 노부부를 향해 위협조로 말했다. "이봐, 당신네 따님을 아내로 삼을 작정인데 대관절 줄 건가, 안 줄 건가?" 노부부는 겁에 질려 사시나무 떨듯 하며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소인은 갈퀴 같은 손으로 진주 한줌을 쥐고 주르르 흘러뜨리며 이죽거렸다. "이건 자그마치 진주가 열 말이야. 당신들이 고맙게 받아도 좋구 한사코 받지 않아도 좋아. 어쨌든 나는 댁의 따님을 데리고 갈 테니까." 처녀가 매섭게 쏘아붙였다. "당신은 도대체 뭐하는 사람이죠? 이런 무례한 일이 어디 있어요?" "난 소인이라는 사람이야. 난 말이야, 이 세상의 이름난 미녀들만 데리고 놀거든. 아가씨도 내 눈에 들었으니 복이 터진 줄이나 알라구." 처녀는 더는 참지 못하고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 "썩 물러가요! 물러가란 말이야! 난 죽어도 따라가지 않을 테니까 썩 꺼져 버려!" "아가씨는 나를 따라가야 할거야. 아니, 오히려 데려가 주십사하고 빌게 될걸? 흐흐……." 소인은 느릿한 어조로 중얼거리더니 성큼 나서면서 노부부의 몸에 번개같이 손가락을 연달아 세 번 튕겼다. "어이쿠!" 소녀의 부모는 대추혈(大椎穴)과 미려혈(尾閻穴)에 뜻밖의 강타를 받고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풀썩 물러앉았다. "아버님, 어머님!" 처녀가 부모에게로 와락 달려들었다. 소인이 천천히 말했다. "이봐 아가씨, 나를 따라가기만 하면 부모님도 살려 주고 이 보석도 몽땅 주고 갈 것이야. 그렇게 되면 늘그막에 술집을 하느라 고생할 까닭이 없지. 이것이면 얼마든지 놀고 먹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야. 어쩌겠나? 날 따라갈 텐가, 말 텐가?" 처녀는 몹시 고통스러워하는 부모를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어 다급히 소리쳤다. "따라가겠어요, 따라가겠다구요!" 그제야 소인은 다시 노부부의 혈도에 톡톡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두 늙은이는 부스스 일어나 앉으며 눈을 크게 뜨고 딸자식을 쳐다보았다. 악귀 같은 소인과 겨룬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다고 곱게 기른 외동딸을 두 눈 번히 뜨고 뺏겨야 한다고 생각하니 억장이 무너지는 듯했다. 두 늙은이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처녀가 부모를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버님, 어머님! 난 저 사람을 따라가겠어요. 나를 잘 보살펴 줄 사람 같으니 근심하지 마세요." 처녀가 좋은 말로 위로하니 두 音은이는 얼마간 마음이 놓였다. 이 사내가 험상궂게는 생겼지만 진주를 열 말이나 내놓는 것으로 보아 딸자식을 데려다가 호강을 시켜 줄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인이 슬그머니 재촉했다. "빨리 가자구. 앞으로 가끔 집에 돌아와 부모님을 만나 뵐 수 있을 테니까." 처녀는 부모에게 차분히 절을 올리고는 눈물을 감추며 소인을 따라 문을 나섰다. 딸자식이 떠나간 후 노부부는 한참이나 말없이 마주앉아 있었다. 밥상 위에 수북히 쌓여 뻔적거리는 진주 더미를 보노라니 마치 한바탕 악몽을 꾸고 난 듯 얼떨떨하기만 했다. 잠시 후 제정신이 든 두 늙은이는 딸자식의 앞일이 근심되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소인은 문을 나서자 처녀의 혈도를 튕겨 까무러치게 한 후 가볍게 걸머지고 나는 듯이 성밖으로 달려갔다. 한 시간쯤 달려 성밖의 평평한 언덕 위에 오른 소인은 처녀를 내려놓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런 기척이 없자 소인은 다시 처녀를 안고 언덕배기에 있는 다 쓰러져 가는 집으로 들어갔다. 그는 처녀를 내려놓고 낄낄 웃으며 중얼거렸다. "임자는 새색시인 셈이야. 오늘은 첫날밤이니까 실컷 놀아 보자구." 그는 처녀 앞에 털썩 마주앉았다. 처녀는 놀란 눈으로 소인을 쳐다볼 뿐 말이 없었다. '범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고 했어. 기왕 여기까지 온 바에는 정신을 차리고 살아날 수 있는 방책을 강구해야겠다. 저 놈에게 살갑게 굴면 며칠 후에 놓아줄지도 모르는 일이야.' 이렇게 생각한 처녀는 얼굴 가득 미소를 떠올리며 소인의 앞에 다가앉았다. 소인은 묵묵히 앉아 모르는 척 딴청을 피웠다. 처녀가 한마디 슬쩍 물었다. "아마도 조(曹)씨라고 하셨지요?" 소인은 처녀를 흘끔 건너다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 처녀는 소인의 길다란 머리를 쓰다듬으며 짐짓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살거렸다. "이런…… 머리가 너무 자란데다가 너무 지저분하군요. 제가 깨끗이 감겨 주고 벗겨 드리겠어요. 그러면 한결 영준하게 보일 거예요." 소인은 스스로 자기의 생김새를 잘 알고 있었다. 해골같이 창백한데다 너무도 험상궂게 생겨서 거리에 나서면 모두들 감히 쳐다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런데 영준하게 생겼다니 실로 소 웃다 뱃고래 터질 노릇이 아닌가? '여우 같은 계집년 같으니라구! ' 소인은 픽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소름 끼치는 듯한 웃음에 처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공연히 실수를 저질러 이 악마 같은 사내의 노여움을 사는 날에는 정말 큰일이었다. 처녀는 소인의 몸에 기대어 한층 더 아양을 떨면서 슬며시 눈치를 살폈다. 소인은 돌부처처럼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처녀는 자기의 품에 두 손을 넣고 봉긋한 젖가슴을 주무르면서 짐짓 발정한 암코양이처럼 신음 소리를 냈다. 실로 음탕한 계집년의 수작이었다. 마침내 소인은 탐욕스러운 눈길로 처녀를 쏘아보더니 와락 그녀의 가슴을 헤쳤다. 처녀가 하얀 젖가슴을 드러낸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는 여지껏 시집을 갈 생각이라곤 못했었어요. 저의 집에 찾아 오는 술손님들을 보면 하나같이 무지막지한 놈팽이들뿐이었거든요. 그런 놈팽이들한테 시집갈 생각을 하면 막 진저리가 쳐지지 뭐예요?" 그녀는 호호 소리내어 웃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저는 시집가는 날에는 반드시 꽃가마를 타고 싶었어요. 일단 혼례식을 올리고 나면 밤이고 낮이고 낭군님만 따라다니겠어요. 그렇게 해줄 수 있겠지요, 네?" 처녀의 달콤한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소인은 자기도 모르게 흐뭇한 마음이 되었다. 정말 천하의 계집들이란 말 그대로 천차만별이었다. 며칠 전에 잡아 왔던 계집은 손도 대기 전에 질질 똥오줌을 내갈기면서 까무러치지 않았던가. 한데 오늘 밤에 잡아 온 이 계집은 칭칭 감겨 들며 별의별 아양을 다 떨고 있지 않은가. 아무튼 소인은 착착 감겨 들며 살갑게 구는 처녀에게 손을 댈 엄두도 못 내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앉아 있었다. 처녀가 계속 소곤거렸다. "이봐요, 한 가지 말씀드릴 게 있어요. 들으시면 놀라실 거예요." "무슨 일인데?" 소인이 심드렁하게 묻자 처녀는 씽긋 웃으며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바로 어제 있은 일이에요. 저의 주막에 몇몇 사내들이 와서 술을 마셨는데 글쎄 술단지 안에서 사람의 뼈가 나오질 않았겠어요? 정말 기절초풍할 일이 아니고 뭐예요? 하도 이상해서 술단지들을 저장하는 움 속에 들어가 봤더니, 세상에, 여인의 시체가 번듯하게 앉아 있는 거예요. 어찌나 놀랐는지 모두 혼비백산해서 쩔쩔맸지요, 뭐." 소인이 쌀쌀한 어조로 대꾸했다. "그 여자는 바로 내가 죽인 거야." 처녀는 흠칫 놀라 소인을 쳐다보았다. 소인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순간 처녀는 너무나 암담한 기분이 되었다. 사람을 죽이고도 눈 한번 깜짝하지 않는 악마에게 잡혀 온 것이 아닌가. 그러나 처녀는 그러한 내색은 조금도 하지 않고 마음을 다독이며 다시금 소인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저는 피곤해서 한잠 푹 자야겠어요. 저를 안고 좀 재워 주지 않을래요?" 처녀는 짐짓 나른하게 교태를 부리며 살포시 두 눈을 감았다. 소인은 자기의 무릎 위에 누워 어린아이처럼 쌕쌕 숨을 내쉬는 사랑스런 처녀의 모습을 취한 듯이 내려다보았다. '아, 얼마나 아름답고 총명한 계집인가!' 차녀음공( 女陰功)을 연마하는 데는 아름답고 총명한 계집일수록 효험이 큰 법이다. 아무튼 소인도 사내인지라 무릎 위에 조용히 잠들어 있는 아름다운 처녀를 보자 욕정이 꿈틀거렸다. 그러나 연정에 이끌려 마음이 산란해지면 공력을 잘 연마할 수 없는 법이었다. 사실 소인에게 잡혀 온 많은 여인들은 대체로 울며 불며 그가 범접하는 것조차 싫어했기 때문에 그의 속을 뒤집어 놓기 일쑤였 다. 그런데 이 계집은 여느 계집들과는 달리 그를 무서워하지도 않고 나긋나긋 교태를 부리더니 무릎 위에 누워 천진스레 잠까지 자는 게 아닌가. 정녕 소인을 진짜 남편으로 섬기면서 몸과 마음을 다 바치려는 듯싶었다. 소인은 한참 동안 처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더니 그녀의 족두리에 꽂힌 비녀를 뽑아 머리를 흘러내리게 했다. 교교한 달빛에 비친 그녀의 얼굴은 한결 아름답고 신비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소인이 느릿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제 곧 너를 데리고 가서 온통 황금과 진주로 장식한 침대 위에서 자도록 해주겠다. 그러니 나하고 벗삼아 맘껏 향락을 누리자꾸나." 그 말에 소인의 무릎 위에 누워 자는 체하던 처녀가 얼른 눈을 뜨며 물었다. "어머, 좋아라! 분명히 저도 데리고 간다고 했죠?" 소인은 묵묵히 웃어 보였다. 처녀의 드러난 젖가슴이 교교한 달빛에 더욱 육감적으로 느껴졌다. 손가락 끝으로 살짝만 건드려도 터질 듯이 팽팽한 탄력 있는 가슴이었다. 소인은 슬그머니 군침을 삼켰다. 얼마나 탐스럽고 사랑스런 계집인가.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네 년은 상상도 못할 거야. 사실 난 땅 한 마지기 집 한 칸도 없이 호숫가의 나무 위에서 외롭게 사는 사람이야. 배가 고프면 물고기를 잡아 날것으로 뜯어먹고 목이 마르면 호숫가에 짐승처럼 엎드려 찝찌레한 호숫물을 벌컥벌컥 들이키지. 아마 너같이 호강만 하던 계집은 사흘도 배겨 내지 못할걸?' 소인은 생각에 잠겨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표정을 훔쳐보던 처녀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 살며시 일어나 앉았다. 그러자 소인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서로 속일 거야 없지. 솔직히 말하자면 난 공력을 연마하는데 쓰려고 아가씨를 데려온 거야. 한데 문제는 내가 공력을 연마하고 나면 아가씨는 자연히 죽게 된다는 것이지." 처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짐작대로 그는 보통 악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갑자기 소인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사납게 호령했다. "이 년, 옷을 벗거라!" 일이 이 지경이 되니 제아무리 야무지고 대담한 처녀라 해도 간이 콩알만해져서 벌벌 떨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옷을 벗을 생각도,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애원할 생각도 못하고 그저 사시나무 떨듯 와들와들 떨 뿐이었다. 소인은 회심에 찬 표정으로 그녀를 지켜 보다가 마음을 굳혔다. '공연히 늑장부릴 필요가 없어. 또 난데없이 웬 불청객이 뛰어들면 골치 아파질 테니 얼른 공력을 연마하고 죽여 없애는 게 속 편하지.' 그는 와락 처녀를 끌어당겨 거칠게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왜, 왜 이러세요? 제, 제발……." 처녀는 몇 마디 소리를 지르더니 더는 어쩌지 못하고 소인이 하는 대로 몸을 맡겼다. 그녀는 눈 깜짝할 사이에 실 한 오라기 걸치지 않은 알몸이 되었다. 그녀는 체념한 듯 눈을 질끈 내리감았다. 소인은 알몸뚱이가 된 처녀를 바닥에 반듯하게 눕혔다. 백옥같이 흰 살결에 탐스럽게 솟아오른 젖무덤을 보노라니 걷잡을 수 없는 욕정이 솟구쳤다. 소인은 혀를 끌끌 차며 중얼거렸다. "아깝군, 아까워……. 너 같은 얼굴이면 돈과 권세가 있는 집안에 시집가서 한평생 영화를 누리고 살 수가 있었을 텐데. 하필이면 나 같은 놈의 손에 걸려들어 생죽음을 당하게 되다니 팔자 한번 사납구나……." 소인은 진정 처녀의 신세가 불쌍한 생각이 들었으나 얼른 마음을 돌려 그녀를 일으켜 앉혔다. 겁에 질린 나머지 거의 반주검이 된 처녀는 소인이 하는 대로 몸을 내맡겼다. 소인은 처녀를 똑바로 앉힌 뒤 두 손을 쫙 펴들었다. 그러나 그는 처녀의 젖가슴에 손을 대려다 말고 잠시 망설이는 눈치더니 손가락을 모아 가만히 감싸 쥐었다. 뭉클한 감촉이 손끝에 전해 오자 소인은 빠른 손놀림으 로 젖가슴을 주물러 대기 시작했다. 그는 점차 숨이 턱에 차서 굶주린 승냥이처럼 야릇한 소리를 내지르기 시작했다. 욕정이 발동하여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소인은 신경질적으로 젖가슴을 홱 비틀더니 미친 듯이 음력을 뽑아 들이기 시작했다. 음공을 연마하는 데는 계집들의 음력이 크면 클수록 효험이 좋았다. 때문에 소인은 능청스럽게 처녀를 구슬리기 시작했다. "이봐 아가씨, 아까처럼 나한테 살갑게 굴고 애교를 떨어 봐. 그러면 나두 마음을 고쳐 먹구 아가씨를 잘 대해 줄게. 날이 밝으면 우리 호젓한 산속에 들어가 둘만의 보금자리를 꾸며 보자구. 난 금은보화를 산더미처럼 갖고 있는 사람이야. 나와 살게 되면 임자는 안주인이 되어 많은 하인들을 거느리고 행복한 나날을 보낼 수가 있을 거라구." 그러나 소인이 아무리 구슬리고 얼러도 처녀는 서리 맞은 풀처럼 맥을 추지 못했다. 자기의 몸을 이용해서 음공을 연마한다는 말에 완전히 절망하여 맥을 놓아 버린 것이다. 소인은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이런 상태로는 도저히 음력을 끌어낼 수가 없었다. 소인은 잔뜩 화가 나서 속으로 씹어 뱉었다. '여우 같은 년, 어디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보자.' 소인은 힘껏 내력을 운행시켜 처녀의 몸에서 최대한 음력을 빨아 들이려 했다. 이때였다. '쏴―'하는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들리더니 웬 사나이의 호통 소리가 들려 왔다. "네 이 놈, 소인! 네 놈이 하는 짓거리를 더 이상 보고 있을 수가 없구나. 너 같은 놈은 천벌을 받아 마땅하다. 내 오늘 기어코 네 놈을 없애 버리고 말테다!" 소인이 놀라 돌아보니 언젠가 만난 적이 있는 황약사였다. 소인은 슬그머니 부아가 치밀었다. "네 놈은 뭣 땜에 내 뒤를 밟아 다니며 방해를 하는 거냐?" "가련한 여자들을 데려다가 비참하게 죽이는 그 짓을 두고 보란 말이냐?" 소인은 꼼짝하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섣불리 일어나 손을 쓰다가는 낭패를 보기가 십상이었다. "이 악귀 같은 놈아, 어디 한번 맛을 보아라!" 황약사는 손을 치켜 들어 장을 내갈기려 했다. "잠깐!" 소인이 다급히 소리쳤다. 소인은 갈퀴 같은 손으로 처녀의 목을 움켜쥔 채 으름장을 놓았다. "나한테 손을 대기만 하면 이 계집은 죽는 줄 알아라!" 황약사는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그 계집이 죽든 말든 나하고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어디 마음대로 한번 해보시지 ." 소인은 말문이 막혔다. 이때 처녀가 쿨쩍쿨쩍 슬피 울기 시작했다. 그녀는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면서 울부짖었다. ""어머니, 아버지……. 아들 하나 없이 못난 딸 하나만 바라보며 사셨는데 오늘 이렇게 마지막 인사도 못 드리고 가게 되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절 용서하세요. 그리고 부디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순간 황약사의 가슴속에는 연민의 감정이 싹터 올랐다. 때를 놓치지 않고 소인이 한마디 던졌다. "일찌감치 오기를 잘했어. 미처 이 년의 음력을 다 빨아내지 못했으니 이제라도 집에 데려가서 사나흘 보살펴 주면 원기를 회복할 수 있을 거야. 자, 나도 이 계집애를 놓아줄 테니 자네도 자리를 비켜 주는 게 어떻겠나?" 황약사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교활한 자식, 네 놈의 그 빌어먹을 차녀음공 때문에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목숨을 잃었느냐? 오늘에야 요행 네 놈을 붙잡았는데 어찌 순순히 놓아보낼 수 있겠느냐?' 그러나 그는 생각을 감추고 큰소리로 대답했다. "좋아, 처녀애를 놓아주기만 하면 나도 잠깐 자리를 비키겠다. 그런 후에 한번 겨뤄 보자!" "아니야, 자네가 먼저 자리를 비켜야 이 년을 놓아주겠어." 황약사는 어처구니가 없어 말이 안 나왔다. 구렁이같이 흉물스러운 놈이 일단 황약사가 물러서기만 하면 무슨 수작을 부릴지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독사는 살려 두면 다시 물리기 마련이다. 황약사는 냉정하게 웃으면서 잘라 말했다. "일단 여자부터 놓아주어 라. 그럼 나도 어김없이 물러설 테니까." "내가 손을 떼기 바쁘게 그 솥뚜껑 같은 손으로 내리치면 이 소인이 억울하게 죽는 거 아니야!" 황약사는 하도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다. "이 놈! 사람을 어떻게 보고 하는 말이냐? 나는 동해 도화도 도주 황약사란 사람이다. 황 노사(老邪) 또는 황 노괴(老怪) 하면 세상에 모르는 사람이 없지. 그 처녀를 죽이고 싶으면 죽여 보라구. 하지만 일단 죽이기만 하는 날에는 네 놈의 등뼈에 부골독침(腐骨毒針) 세 개를 박아 넣을 거야. 그러면 죽지도 못하고 한평생 보통 고생이 아니지." 황약사는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소인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중원 땅에서 황 약사라는 인물이 어느 정도로 명성을 얻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자칭 황 노괴라 할 정도라면 분명 성깔이 사납고 괴상한 재주를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소인은 한참 망설이다가 처녀의 몸에서 손을 뗐다. "좋아, 처녀를 놓아주지." 그는 어설픈 웃음을 지으며 옆으로 두어 걸음 비켜섰다. 황약사는 옆에 있는 옷을 집어 알몸동이로 앉아 있는 처녀에게 던졌다. 처녀는 훌쩍거리면서 주섬주섬 옷을 입고는 황약사를 쳐다보았다. 애잔한 빛을 담은 두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황약사는 어쩐지 멋쩍어져서 거칠게 소리쳤다. "뭘 하구 있나, 빨리 가지 못하구!" 처녀는 잠시 어쩔 줄 몰라 하며 주춤거리더니 황약사에게 깍듯이 절을 하고는 얼굴을 싸쥐고 흐느끼며 내닫기 시작했다. 소인은 엎어질 듯 뛰어가는 처녀의 뒷모습을 흘겨보면서 분을 참지 못해 씩씩거렸다. 그는 한 번도 잡아 왔던 여자를 살려 돌려보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 저 처녀가 살아 돌아갔으니 동네방네 소문이 날 것은 뻔한 이치이고 앞으로는 처녀를 잡아다가 공력을 연마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었다. 소인은 황약사를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지난번에는 실수로 부상을 당했었지만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네 놈을 꺼꾸러뜨리고야 말 테다. 사불과 악귀가 없어서 한구석이 빈 것 같지만 죽을 힘을 다하면 제아무리 날고 뛰는 놈이라 해도 별수 없을걸?' 황약사는 소인의 앞으로 스적스적 다가섰다. "어디 시작해 볼까?" "좋다!" 소인이 쾌히 대답했다. 황약사는 불현듯 활짝 핀 복숭아꽃처럼 '도화작작(桃花灼灼)'이란 장법으로 소인의 가슴을 살같이 내질렀다. 소인도 만만치 않았다. 소인은 도포를 벗어 놓듯 '탈포양위(脫袍讓位)'라는 장법으로 두 손을 확 펴서 슬쩍 밀며 물러섰다. 황약사는 다시 달려들며 재치 있게 복숭아꽃을 따듯 소인의 얼굴을 향해 '교힐도화(巧擴桃花)'라는 장법으로 소인의 얼굴을 뜯으려 했다. 소인은 살짝 얼굴을 피하며 물러섰다. 황약사는 연거푸 세 번이나 재주를 부렸지만 소인을 거꾸러뜨릴 수가 없었다. 황약사는 오른손을 슬그머니 걷어들이면서 중지를 엄지손가락에 단단히 걸었다. 도화도의 절묘한 무공인 '탄지신공 (彈指神功)'으로 일격에 소인을 거꾸러뜨릴 심산이었다. 소인은 황약사의 탄지신공의 위력이 범상치 않음을 눈치채고 바삐 뒤로 물러서며 소리쳤다. "잠깐!" 소인이 눈을 부릅뜨며 큰소리로 말했다. "여보게 황약사, 우리 둘 다 사내 대장부요, 강호의 호걸들이 아닌가? 저잣거리의 아낙네들처럼 물고 뜯으며 싸우지 말고 장력을 겨루어 보세. 과연 누구의 내력이 센가 겨뤄 보잔 말일세." "장력? 좋도록 하지!" 황약사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소인은 황약사를 흘겨보면서 속으로 비웃었다. '미련한 놈! 내 장법은 수많은 처녀들의 음력으로 연마한 것이야. 황소 같은 장사도 내 장이 닿기만 하면 벼락맞은 놈처럼 나자빠지게 돼 있는데 나와 장력을 겨루겠다구? 흐흐흐…….' 마침내 두 사내는 담벽처럼 마주앉아 손과 손을 맞대고 내력을 겨루기 시작했다. 소인은 속으로 생각했다. '저 놈은 지금 온몸에 내력이 넘치는 상태라 내가 음독을 몰아붙여도 소용이 없을 거야. 저 놈이 아득바득 내력을 쓰다가 기진맥진했을 때 일시에 음독을 불어넣는 게 좋겠어. 그러면 십중팔구는 나동그라지게 될거야.' 소인은 이렇듯 음흉한 생각을 굴리며 황약사와 장을 맞대고 있었다. 소인은 땀을 뻘뻘 흘리며 전신의 힘을 다 썼지만 음독만은 불어넣지 않았다. '네깐 놈이 나와 내력을 겨루겠다고?' 황약사는 가벼운 미소를 지으면서 '오분력도(五分力道)'로 지그시 내력을 운행시키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어느덧 황약사의 얼굴에도 미소가 사라지고 이마에 송골송골 진땀이 내비치기 시작했다. 소인 역시 땀이 비 오듯 했다. 소인이 안간힘을 쓰면서 말했다. "이젠 그만 날 좀 놓아주게 나!" "꿈같은 소리 작작 하시지?" 황약사는 매몰차게 냉소를 던지면서 전신의 내력을 운행시켰다. 일단 맞붙은 바에야 이 악마 같은 소인을 죽여 버리지 않고서 어떻게 물러선단 말인가. 소인은 온몸이 물먹은 솜뭉치처럼 되었다. 소인은 슬그머니 꾀를 부리기 시작했다. '이젠 됐다. 이 놈, 죽어 봐라.' 그는 속으로 이를 악물며 지금껏 참고 있던 음력을 일시에 운행시키기 시작했다. 황약사는 갑자기 온몸에 싸늘한 기운이 침투해 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깜짝 놀랐다. 소인이 차녀음공을 연마한 놈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위력이 대단한 줄은 몰랐다. 황약사는 사지에 맥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음력을 막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조금만 힘을 늦추면 소인의 음력이 몸에 퍼져 목숨을 잃기 십상이었다. 소인이 한층 더 음력을 발하며 말했다. "황약사, 이젠 꼼짝못하고 죽게 됐지? 이 어른의 차녀음공은 세상에 당할 자가 없어." 황약사가 쌀쌀하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허, 꽤나 큰소리를 치는군 그래. 하지만 결국 죽는 쪽은 네 놈일걸?" 두 사내는 무섭게 얼굴을 찡그리고 필사적으로 대결했다. 소인의 얼굴은 나뭇잎처럼 새파랗게 질렸고 황약사의 얼굴은 외꽃처럼 노랗게 질렸다. 사실은 황약사도 도화도에서 무서운 내공을 연마했었다. 이 내공 역시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순식간에 적을 물리쳐서 감쪽같이 죽여 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소인을 우습게 보고 달려들어 너무 힘을 쓴 바람에 그 기묘한 내력을 펼 수가 없었다. 황약사는 여간 속이 타지 않았다. 또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두 사람은 너나할것없이 기진맥진해서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다. 그러나 돌연 황약사가 벽력같이 소리를 지르면서 두 손으로 내력을 뿜어냈다. 산까지도 밀어붙일 듯한 무서운 내력이었다. 소인은 맥없이 떠밀려 저만치로 나뒹굴었다. 황약사가 후유, 한숨을 몰아쉬는데 소인이 부스스 털고 일어나 앉더니 황약사를 건너다보며 중얼거렸다. "대단하군. 아무튼 이 소인은 탄복하는 바요!" "그럼 깨끗이 죽여 주지!" 황약사가 벌떡 일어나 일장에 때려죽이려고 달려들자 소인도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잠깐! 내 스스로 목숨을 끊을 테니 손을 대지 말아주게!" "물론 그 편이 좋겠지." 황약사는 가벼운 미소를 날리며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소인의 험상궂은 얼굴에도 애절한 빛이 감돌았다. 소인은 돌연 핏발선 눈을 부릅뜨고 부르짖었다. "황약사, 이 나쁜 놈! 황천에 가서라도 이 원수는 꼭 갚고야 말테다……." 그는 말을 마치자 품속에서 독약 한 알을 꺼내 입에 넣었다. 그러자 갑자기 눈과 코, 입 등에서 시뻘건 피가 쏟아져 나오더니 썩은 나무등걸처럼 맥없이 쓰러졌다. 황약사는 소인의 몸뚱이를 내려다보며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악덕은 악으로 보답을 받았으되 선행은 무엇으로 보답을 받을까?" 그는 곧 고개 한 번 돌리지 않고 미련 없이 그곳을 떠났다. 잠시 후, 그림자 둘이 어물어물 다가오더니 소인의 시체 옆에 와서 멈춰 섰다. 두 그림자는 시체를 찬찬히 살펴보더니 냉큼 들쳐 업고 허위허위 떠나갔다 |
|
첫댓글 감사
즐감
감사드립니다 ㅎㅎ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