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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한국시와 미래적 조망
참가자 - 김정란 (시인, 문학평론가)
박주택 (시인)
박철화 (문학평론가, 사회)
때·곳 - 1999. 11. 4 (목) 현대시 사무실
박철화 : 여러 모로 바쁘실 텐데 이렇게 나와 주셔서 주최측을 대신하여 감사드립니다 이번 좌담이 90년대 마지막이자 금세기의 마지막이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른 해와는 달리 한 해만을 결산하는 자리가 아니라, 90년대의 시 전체를 포괄하면서 자연스럽게 올해의 시까지를 언급하는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게다가 두 분 선생님 모두 시작과 비평을 겸하며 지난 90년대를 부딪쳐 오셨는데, 그 싸움의 지혜를 얻는 장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급적 두 분 선생님께서 발언을 하시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실무적 진행만 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90년대에 많은 문학적인 변화가 있었는데 이것을 간략하게나마 짚고 넘어 가야겠습니다.
90년대의 한국시
박주택 : 우선 논의의 편의를 위해서 90년대를 전체적으로 조망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90년대는 80년대 민중문학이 가지고 있었던 강고한 이데올로기가 소련의 붕괴와 동구권의 몰락, 김일성 사망 등으로 인해 해체, 분열되는 양상으로 변모해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따라 분단의 문제나 통일의 문제를 비롯하여 민족, 민중, 계급, 계층의 사회 경제사적 문제는 약화된 반면, 서구적 근대를 극복하고자 하는 동아시아 문학 담론이나 북한 문학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도 고조되었던 시기라 할 수 있습니다. 동아시아 문학 담론은 한국문학의 주체적 세계주의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북한 문학은 여전히 반제국, 반자본주의의 사회주의 예술론을 내세우고 있지만 김일성 사망 이후 서정성의 확보와 더불어 통일 문학관을 강하게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하는 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는 무엇보다도 90년대 문학의 기반을 마련하고 있는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김정란 : 포스트모더니즘 논의가 분명한 실체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은 논의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어쨌든 90년대가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으로 시작되었던 것은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이겠지요. 저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상당히 유보적인 입장입니다만, 일단 박선생님 말씀을 마저 듣고 제 견해를 덧붙이도록 하지요.
박주택: 80년대로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잠식하고 있었던 해체시, 키치시, 패러디 시는 언어가 가지고 있는 확정적 믿음과 공허한 이성의 힘, 절대 권위의 문학 등을 붕괴시키면서 존재의 형이상학이나 문학 본질주의를 내파하는 태도를 보여왔습니다. 이에 따라 베끼기와 모방, 무차별한 해체와 상호 텍스트성은 현대성이라는 비호 아래 반문학적 태도를 일정하게 견지하는 태도를 취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주체와 이성, 문명의 탈중심화는 타자나 여성, 자연과 같은 주변부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새로운 변화를 가져다주는 현실적인 힘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특히 여성시에 내재되어 있는 독립성과 정체성 등은 이 같은 것의 연장선상에 있으면서 남성 중심문학에 비판적 퍼스낼러티를 가져다줌은 물론 여성시가 가야 할 길과 방법을 깊이 있게 모색하며 보여주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박철화: 잠시 사회자로서 본분을 망각하고 끼어 든다면 여성성의 문제는 자연스럽게 생태적 문제와도 연관이 되겠죠. 그것은 90년대의 ‘몸’의 담론을 우선 육체로서 살고 있는 분들이기도 하고, 개발과 파괴라는 남성성의 면모에 대한 비판과 대안으로서의 의미를 가질 테니까요,
박주택: 그렇습니다. 과학 기술이 가지고 있는 환경 파괴는 인간의 생존 위기라는 인식 아래 자연과 생태에 대해서도 깊이 있는 자각을 불러왔으니까요. ‘몸’의 시학 역시 이 같은 경향에 일정하게 연계하고 있고요. 그리고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될 것은 정보화와 멀티미디어와 같은 문화 환경의 발달이 글쓰기의 형식과 내용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 왔다는 것입니다. 컴퓨터와 비디오의 보급과 확산은 동시성과 다양성을 확보하면서 활자 매체를 위협하는 존재로 부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김정란: 이 문제는 나중에 좀더 심도 있게 다루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일단 문학과의 관련 하에 PC 통신이 뜨겁게 가열되어 있는 것은 대단히 흥미로운 사실이죠. 시 동호회도 엄청나게 많고, 또 수많은 아마추어 시인들이 인터넷에 시를 띄워놓고 있어요. 문학성 문제로 넘어가면, 논의의 방향이 좀더 달라지겠지만, 일단 이러한 사실 자체가 문학 환경의 커다란 변수로 작용할 것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박주택: 이에 따라 90년대에 아마추어 시인들에게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통신시’나 일부 시인들이 시와 미디어와의 결합을 시도하고 있는 것 역시 90년대의 중요한 징후라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무엇보다도 제 생각에는 우리 문학에 광범위하게 전포되어 있는 것은 거대 담론의 붕괴 후에 보이고 있는 서정시의 출현이라고 봅니다. 동양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정신주의 시나 사물이 사물 스스로의 존재성을 말하고 있는 극서정시나 인간의 내면, 여행에서 얻어진 사유, 일상과 도시에서 환기될 수 있는 순수 발심을 노래하고 있는 수많은 시들은 서정의 맥락에 기대면서 자기 나름대로의 시세계를 확산시키고 있는 다양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총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90년대의 시는 80년대와는 달리 보다 개방되고 반형식, 반내용, 반해석 성격을 띠면서도 후기 산업사회가 가지고 있는 모순을 드러내면서 다원 문화적 특징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박철화: 박주택 선생님께서 대단히 의욕적으로 한꺼번에 여러 가지 논의를 언급해주셨기 때문에 하나 하나 분간해서 정리를 하는 일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김정란 선생님께서는 혹 다른 견해나 미진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을 지적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김정란 : 저도 박주택 선생님이 굉장히 잘 정리해 주셔서 독자들에게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에 제가 몇 가지만 덧붙여 말씀드릴께요. 90년대 시의 가장 커다란 특징은 (소설도 마찬가지이고) 90년대의 정치, 사회학적인 담론의 획일성을 벗어나서 다양한 목소리를 냈다는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것은 내면성의 탐구이지요. 그러나 90년대 소설이 확보한 내면성과 시가 확보한 내면성은 비교가 되질 않습니다. 소설은 대체로 사사로움에 머물러 있어요. 그러나 시는 상당한 수준의 내면성에까지 나아가 있습니다. 이 점은 훨씬 더 정교한 고찰이 필요합니다만, 저는 그 이유가 소설이 ‘문화’를 쫓아간 반면, 시는 ‘철학’을 찾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달리 말하면, 소설은 편안하고 쉽게 대중성에 편승하는 방식을 택했고, 시는 내면적 맥락을 깊이 탐험하는 방식을 택했기 때문이지요. 사실 90년대 시단에 떠올랐던 문학적 주제들은 만만한 것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문학 역학적 지형도 안에서 권력의 지원 사격을 받지 못했어요. 평론가들이나 매체들이 소설의 대중성 대신 시의 문학성을 선택했더라면, 90년대 문학 지형도는 아주 달라졌을 걸요. 공연히 프랑스제 담론 들여다가 공허한 담론 논쟁만 하지 말고, 텍스트의 육체성에 관심을 기울였더라면, 오히려 대중에게 깊은 존경을 받았을 겁니다. 한국 문학 수준이 성큼 높아졌을 거예요. 저는 90년대에는 시가 소설보다 훨씬 더 높은 성취를 이루었다고 생각해요. 대중과 평론가들이 돌보지 않는 동안에, 소외를 견디며 문학적 발성법을 익혔기 때문이죠. 소설이 대중성이라는 늪에 빠져서 답보하고 있는 동안, 시는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고 생각합니다. 외형뿐만 아니라, 인식에 있어 상당한 성취를 이루었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언론이나 비평가들에 의해 간과되어 왔고, 시인들을 담론의 장으로부터 쫓아냈지요. 그러나 저는 이 상황이 앞으로 아주 빨리 극복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시인들이 잃어버린 주권을 찾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으니까요.
박선생님께서 ‘동아시아 문학 담론’을 자명한 것처럼 말씀하셨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오히려 ‘동아시아 문학 담론’이 아주 위험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새로운 형태의 민족주의나 극우 파시즘과 결합하는 경향마저 보이고 있어요. 이러한 경향은 우리사회가 지금 빠르게 확보해야 할 보편적 합리성을 차단시키는 반시대적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전근대적 요소나 비합리적인 요소들마저 ‘아시아적 가치’라고 우기려는 경향이 분명히 존재하거든요. 그래서 저는 동아시아 문학담론은 깊이 있는 성찰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박주택 : 동아시아 문학 담론이 자문화 중심주의를 완고하게 내세울 때는 물론 그 위험성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세계주의, 보편주의에 도사리고 있는 정체성의 상실이나 주체적 민족주의의 결핍은 더 큰 위험이라고 생각합니다. 문화 제국주의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리라고 생각됩니다. 포스트모더니즘만 봐도 우리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끼쳤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우리 문학 내부에 얼마만큼 정신의 깊이나 서구 문학과의 차별성을 획득했는가는 대단히 회의적이쟎습니까? 저는 우리 문학이 비록 서구 문학을 바탕으로 이루어 왔지만 거기에는 분명 자생적인 우리 문학의 특수성이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들떠 있는 서구 문학 중심의 담론을 진지하게 반성하면서 한편으로는 근대를 극복할 새로운 문학주의를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김정란 : 그러나 합리성의 추구가 반드시 서구추수주의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시아적 가치가 반드시 서구적 가치와 대치되는 것이라고 보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민족주의’라는 것이 과연 그렇게 절대선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일까요? 얼마 전에 사학자 임지현 교수가 좮민족주의는 반역이다좯라는 책을 낸 바 있습니다만, 오히려 우리 사회는 지금 ‘민족주의’의 이름으로 정당화되고 있는 모든 집단주의의 망령을 단호하게 물리쳐야 할 시점이 아닌가요?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운 독립적 주체를 발생시켜야 할 때라는 거지요. ‘민족주의적’ 정체성의 결핍 때문이 아니라, 명민한 인식적 주체성의 결핍 때문에 늘상 남의 나라 담론을 쫓아다니는 것 아닌가요? 포스트모더니즘이 만들어냈던 거품이야말로 바로 이 주체성의 결핍을 단적으로 증명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무분별한 포스트모더니즘 수입 때문에 우리사회의 자생적 맥락이 왜곡되었던 부분이 상당히 있습니다. 사회적 현상과 치열하게 싸우면서 내적 맥락을 심화시키는 대신, 외래담론의 문화적 코드에 편하게 편승함으로써 지적 헤게모니 장악에 바빴으니까요. 문제는 외국담론 수입 그 자체가 아닙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세계는 지금 한덩어리로 돌아가고 있으니까요. 무턱대고 외국 것이라고 외면할 수만은 없습니다. 문제는 그 외래담론이 생성된 맥락에 대한 인식이 없고, 그것을 수용하는 실존적 절박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맥락은 뚝 떼어먹고 표면만 가져다가 흉내를 냅니다. 이러한 현상이 90년대에 유난히 심했습니다. 80년대 말과 90년대 초를 풍미했던 키치시 등도 그러한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훨씬 더 깊고 치밀한 사유에 실어 심화시켜야 했습니다.
그러는 중에도 90년대 시단에서 몸의 시학, 생태 시학, 여성시는 두드러진 성과를 보였죠. 이 경향들은 앞으로 정치한 담론 구성 단계로 진입하게 될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박주택 : 저 역시 90년대 시단에 있어서 포스트모더니즘이 생태시, 여성시들과 같이 문학의 영역을 넓히고 현실의 문제를 감당하고 있다는 점은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여성의 문제, 생태의 문제는 세계적 상황이면서 한국적 상황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김정란 : 아까 박선생님께서 미디어 환경 변화를 우려하셨는데요, 저는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터넷 공간을 돌아다녀보면, 엄청난 ‘말에 대한 열망’이 느껴집니다. 그것은 일단 문학적 환경으로는 의미가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말의 열망이 문학적 열망으로까지 이어질지는 미지수입니다. 하지만 문인들이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상황이 많이 달라질 겁니다. 이대로 두면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현상으로 나타나게 될지도 몰라요. 아마 당분간은 상당히 혼란스러운 상태가 지속되겠죠. 그러나 서서히 분화가 일어날 겁니다. 벌써 고급 사이트들에서는 수준 높은 문학논쟁들이 이루어지고 있어요. 그러다 보면, 본격적인 수준의 문학인식을 확보한 네티즌들이 나타나고, 이들이 느슨하게 링크하게 될 거구요. 이런 상황을 본격적으로 문학적인 환경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시인들이 적극적으로 사이버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저는 긍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새로운 멀티미디어 환경은 소설보다 오히려 시에 더 적합해요. 소설은 우선 공간을 많이 잡아먹는데다가, 이미지 언어나 음성언어와의 결합이 용이하질 않습니다. 그러나 이 환경 변화를 문학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시인들 자신이 비평적으로 무장하는 것이 필요하지요. 왜냐하면, 이러한 노력이 어설프게 이루어지면, 장르 자체의 내파로 이어질지 모르기 때문에, 미디어와 미디어의 접합점을 비평적으로 잘 갈무리해야 하거든요. 저는 이것도 낙관적으로 봅니다. 90년대 시인들의 특징 중의 하나가 비평 작업을 겸한다는 건데요, 우선은 비평가들에 대한 불신 때문에 시작된 자구적 노력이기는 합니다만, 그러나 세계적 맥락 안에서 볼 때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봅니다. 현대적 의미에서 시는 비평적으로 무장하는 특성을 보이거든요.
박철화 : 두 분 선생님께서 이미 위에서 많은 논쟁점을 짚어 주셨기 때문에 저는 계속된 논의를 위하여 한 가지만 정리하고 넘어가기로 하겠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80년대의 우리문학이 스스로를 변모시킬 충분한 역량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지나치게 현실에 밀착되어 예술로서의 객관적 거리감을 - 저는 그 거리감이 바로 문학을 실천으로서의 정치가 아닌, 실천에 대한 탐구로서의 정치학을 만드는 기본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 놓친 것이죠. 물론 현실과 밀착되어 거둔 80년대 문학의 성과를 부인하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단지 포스트모더니즘 사조의 수입과 동구권의 붕괴라는 담론 안팎의 변화를 충분히 소화할만한 수준이 되지는 못했다는 것이죠. 그리하여 탈중심화, 다원화 현상이 전개된 이후의 문학과 삶의 흐름에 대한 전체적인 시각을 마련하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아마도 한편으로는 김정란 선생님께서 ‘동아시아 문학 담론’에 대한 경계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는 미처 서구만의 것은 아닌 합리성의 세계, 모더니즘의 성숙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 성숙의 과정을 반드시 서구인들이 걸어간 길을 거쳐서 갈 수 있는 것만은 아니겠죠. ‘동아시아 문학 담론’은 그런 점에서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다 지니고 있지 않겠습니까. 물론 그것이 서양문학 이론의 배척으로 흐르지 않는다는 점을 전제로 하고서 말입니다. 사실은 ‘동아시아 문학 담론’도 우리 안에서 오래 타자로 머물렀던 것입니다. 그 근간을 이루는 것 가운데 하나인 노·장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우리는 아주 초보적인 독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쨌거나 저로서는 우리 스스로를 여는 계기로서의 새로운 문학담론에 대한 관심은 그것의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또한 우리 것과 남의 것을 가르지 않고 더욱 더 증대되었으면 싶습니다. 수사적 차원에서의 모방과 답습을 넘어 새로운 생성이라는 차원에서의 섬세한 분별만 있다면 괜찮지 않나 싶습니다. 문제는 텍스트로서의 생산이죠. 사실 두 분 선생님께서 지적하셨던 포스터-모더니즘은 이론만 성행했지 실제로 시작업이 개화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 점에 대해 지적해 주셨으면 합니다.
현대시와 포스트모더니즘
김정란 : 우선 가장 많이 거론된 유하, 장정일 시인들의 시작업을 들 수 있습니다. 또 이들과는 조금 다르긴 합니다만 박남철 시인의 시작업도 있고요. 또 여기에 박상순 시인의 시작업도 포함시킬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포스트모더니즘의 대표주자로 꼽는 유하 시인의 경우, 지나치게 과대포장된 측면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내적인 모순으로 가득차 있어요. 전근대와 탈근대가 어정쩡하게 동거하고 있는 형국이거든요. 저는 오히려 평가받지 못하고 요절했던 진이정 시인의 시세계가 훨씬더 깊은 문학성을 지니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유하의 시가 지닌 포스트모던적 요소들은 후기산업사회의 모순을 격파하는 데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고 봅니다. 오히려 그 모순과 동화되어 버린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지니고 있습니다.
박주택 : 포스트 모더니즘에 대해서는 수없이 논의되고 깊이 있게 정리되어 굳이 새롭게 더 논의할 것이 없으리라고 봅니다. 다만 포스트 모더니즘 시가 사회와 문화에 어떤 관련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흔적으로 오늘날의 시에 영향을 주고 있는가를 살피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먼저 박남철의 경우 그의 시는 애시당초 사회 문화라는 의미를 의식하지 않고 자유 분방한 글쓰기의 정신을 보여 주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엄격히 말해서 그의 시는 시의 구조를 해체하거나 시가 가지고 있는 논리를 조소하며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개성성을 유감없이 보여주는데 있지 결코 이론적 틀이나 이데올로기에 매어 자신을 옹색하게 만들고 있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박남철이 자기 부정과 타자의 부정을 통해 엄숙한 인간의 형이상학을 경멸하고 있는데 반해 황지우는 자본주의적 허구와 혼혈의 문화, 나른한 일상과 검게 탄 희망의 부질없음을 구획된 지도 아래 그의 유토피아적 글쓰기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의 시는 도시와 광주 그리고 화엄에 기대면서 화려하면서도 깊이 있는 사유 체계를 내보입니다. 따라서 그의 시에는 ‘지금 여기’라는 현실적 부정이 폭넓게 용해되어 있으며 파시즘적인 자본 논리가 날카롭게 파헤쳐져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장정일이 보여 주었던 세계는 분명 포스트모더니즘적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장정일은 현실 문화를 비판하기보다는 그것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여 향유하는 미래파적 태도를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 TV나 비디오, 영화나 광고, 햄버거는 부정의 대상이 아니라 시인과 상호 교통의 대상입니다. 유하의 경우는 이와 좀 다릅니다. 그는 도시적 감수성을 바탕으로 도시에 내재되어 있는 감각적이고도 성적인 것을 야유하며 조롱합니다. 따라서 그의 시는 진지함보다는 부박함, 엄숙함보다는 가벼움이 깔려 있어 웃음과 즐거움을 우리들에게 선사해주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박상순에 이르면 시가 가지고 있는 본원적 가치나 개념은 무너지고 시가 지니고 있을 정보조차 입을 굳게 다무는 해체의 극점을 보여줍니다. 최근의 경향은 이와 좀 다르지만요.
포스트모더니즘은 그 이론적 수용의 무분별로 인해 많은 공격을 받아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0년대 사회 문화적 배경과 맞물리면서 우리 문학상의 뚜렷한 증좌를 형성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수많은 대중 독자를 재미성으로 불러 모아 문학의 민주화는 어느 정도 이루어냈는지는 몰라도 문학의 깊이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는 아직 의문으로 남아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김정란 : 저는 초기의 장정일이 보여주었던 포스토모더니즘은 일정 수준 당대적 의미를 확보하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장정일의 초기시들을 아주 높이 평가합니다. 저는 박선생님과는 달리, 장정일이 미래파적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그의 시는 탈근대적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차용하고 있지만, 무비판적으로 향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게다가, 그의 시는 지적으로 대단히 탄탄합니다. 그 지적 긴장 때문에, 느슨하고 수동적인 탈근대적 풍경의 나열이 아니라, 비판적인 재구성이 가능해지는 거지요. 또한 저는 장정일의 시들이 보여주는 정서적 절절함이 마음에 와닿았어요. 흔치 않은 시적 재능의 소유자입니다. 그런데 소설가 장정일은 높이 평가할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함부로 써댄 좮독서일기좯는 시인 장정일의 이미지를 너무나 깍아먹었어요.
박남철 역시 뛰어난 해체의 전사로서 부정할 수 없는 시적 역량을 과시했습니다. 그의 시적인 힘은 어디에서 오는지 잘 모르겠어요. 남의 시를 따다가 적당히 배열하고, 몇 자 토만 달아놓아도 기묘한 품격을 발하거든요. 철저한 자기 고백과 응시에서 오는 힘일까요? 박남철 역시 지적 조작에 매우 능한 시인이죠. ‘해체’라는 용어에 저는 불만이 많습니다만, 어쨌든, 가장 ‘해체’의 정신에 철저한 시인은 박남철입니다. 나중엔 ‘해체’에 갇혔다는 아쉬움이 듭니다만.
황지우 시인은 90년대 시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80년대 시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주 적실했던 시적 정치성의 세계, 촌철같은 풍자는 그를 일세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만들었죠, 그러나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이번 시집은 실망스러웠습니다. 지나친 자기연민, 지적 엄살, 또 반여성주의적 태도, 세기말적 절망의 과장된 포즈 등, 불만스러운 점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대단한 지적 역량과 감성의 소유자라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려웠습니다.
같은 계보는 아닙니다만, 이들의 앞쪽에 기형도를 놓아야겠지요. 기형도의 시적 특질들은 낭만성과 황폐한 도시적 서정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저는 그가 진정한 내면탐구의 길을 따라가기 시작했던 시인이었기 때문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진정한 가능성은 사실 실험단계에서 끝났죠. 그러나 요절 때문인지 지나치게 신화화된 측면이 없지 않고, 또 그를 둘러싸고 일종의 세대론적 예배 같은 분위기가 만들어졌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90년대 시문학의 문을 연 시인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박철화 : 포스터-모더니즘의 시작업이 해체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90년대적인 생성의 차원에서는 아직 미진한 부분이 많이 남아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다음 주제로 넘어가자면, 80년대가 그 중심에 어쩔 수 없이 남성이라는 주체를 두고 있다면, 그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90년대는 시만이 아니라 소설, 비평의 장르에 이르기까지 여성들의 목소리가 새롭고도 중요한 몫을 차지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시인들에게 90년대 시에 있어서의 페미니즘화 경향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짚어봤으면 합니다.
박주택 : 여성시 혹은 여성주의 시는 수사학적 이론이나 전위성에도 불구하고 아직 만족할 만한 성과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은 여성시가 저항과 선언적 의미를 넘어서 이제는 실천하고 완성하는 단계에 이르렀어야할 시기가 아닌가 하는 문학 내부의 암묵적 기대감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고군분투하는 몇몇 이론가의 엄호를 받으면서도 여성 시인들 자체가 페미니즘 문학에 대한 뚜렷한 자각이나 여성 정체성에 대한 탐험과 노력이 구체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페미니즘으로 분류되고 있는 몇몇 시인에게서조차 남성 지배주의나 사회적 성차별, 정신적 억압과 같은 사회의 보편적인 문제 의식보다는 일상적 감정을 개인화시키는데 머무르고 있다는 인상이 강합니다. 이같은 사실은 여성 문제가 여전히 일부에 국한되어 있다는 공동체의 부재를 반증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이같은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지하고 있는데 정치나 권력에 숨어 있는 남성 지배 중심적 환경을 파헤치지 못하고 자신의 몸과 정신이 시원적이고도 상상적 질서의 중심지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만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를 생성하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에 무관심하거나 게으르다는 것을 강하게 근거해 줍니다. 여성시만 있고 텍스트는 부재하는 이 아이러니가 90년대 여성시의 한 구조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김정란 선생님의 여성 시학 비평과 여성시에 대한 담론 구축은 가치 있게 평가되리라고 믿습니다. 제 생각으로 이 작업이 귀중한 의의를 갖는 것은 진술과 어법에 있어서 여성의 언어 체계를 완성하려는 노력과 여성 중심적 시관을 문학 내부에서 공동의 문제로 쟁점화시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강은교, 김승희, 최승자로 이어지는 여성시는 최승자에게서 꽃피우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그에게는 여성 언어가 갖는 사유의 느슨함과 억압의 단계에서 나올 수 있는 괴음성이 안으로 삭혀져 있다는 점에서 호감이 갑니다. 나희덕 역시 부드러운 모성성을 바탕으로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조응하고 그 의미를 자신만의 문체 미학으로 삶의 문제를 숙고하는 진지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 점은 이진명에게서도 발견되는 점인데 그에게는 이야기체의 평면 진술임에도 불구하고 여성만이 가질 수 있는 진술 어법을 담백하게 풀어 내는 강력한 신뢰의 힘이 있습니다.
90년대의 여성시는 대체로 두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보편적 관점에서 여성의 문제를 관점화시키는 것이며 하나는 개인적 문제를 개인적 문제로 국한시켜 이야기 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둘 다 시적 완성도가 다소 떨어지는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김정란 : 저는 여성시가 90년대 한국문학의 가장 커다란 성과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 자신도 텍스트와 이론 생산에 주력했고요. 저는 90년대 여성시는 80년대에 민중이 계급 의식을 통해서 주체의식을 확립했던 경험을 내면화하면서 출발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문학적인 진술 방법을 택했고, 존재론적으로 심화된 양상을 보이지요.
박철화 : 그런데 기존의 남성 중심의 세계에 대한 대타적 인식으로서의 자의식이 지나쳐서 혹 감동의 폭이 적어지는 건 아닐까요. 문학에는 인식의 기능과 함께 즐김의 몫, 즉 향유의 기능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성시가 그 둘을 통합할 수 있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고는 아직 볼 수 없겠죠. 여성은 억압의 자리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솟아나오는 창조의 자리입니다. 그런 점에서 여성시의 가능성은 무한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김정란: 그런 점도 있겠죠. 그리고 그 자의식이 언술적 자의식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더더욱소통의 문제를 야기시켰는지도 모르겠어요. 언술 자체에 사회Αㅔ÷퓰컥 포함되어 있어요. 90년대 여성시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정치적이며 사회적이라는 겁니다. 여성시인들은 ‘다른’ 방식으로 말해요. 따라서, 90년대적 언술을 이해해야만, 여성시의 문학적 의의를 이해할 수 있어요. 민중시처럼 직접적인 방식으로 말하지 않거든요. 그러므로 여성시 안에서 사회저항의 메시지는 직접적인 방식으로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앞서 최승자 시인을 거론하셨습니다만, 최승자 시인은 언술적 자의식 확립에 주력했다기보다는 여성적 억압을 폭로하는 데 주력했던 시인이라고 볼 수 있고, 그런 의미에서 90년대 시인이라기보다는 80년대 시인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매우 독특하고 뛰어난 시세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연대의식이 없다는 점에서 불만스럽기는 합니다만, 저는 선배 여성시인으로서 늘 문학적 경의를 표해 왔습니다. 90년대적 여성시의 계기는 김혜순 시인에게서 처음으로 구체화됩니다. 김혜순 시인의 시적 특성은 여성의 말하기 방식이 다르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지했던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나희덕 시인의 말씀을 하셨는데, 훌륭한 시적 자질을 갖고 있는 시인이라는 점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시인의 여성성이 전통적이며 타협적이며 언어 또한 낡았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진명 시인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두 여성시인들의 여성정체성은 전시대의 연장선 위에 놓여 있거나, 오히려 퇴보하고 있습니다. 전시대적 여성성과 분명히 절연한 시인은 박서원입니다. 젊은 비평가들과 시인들 사이에서 이론의 여지없이 중요한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문학권력자들은 어쩐지 불편해하죠. 저는 이 특성 자체가 박서원 시인의 가치를 반증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만큼 그녀의 시적 언술이 새롭다는 의미니까요. 시적 완성도도 뛰어납니다. 이 시인은 여성적 무의식에게 입을 달아준 최초의 시인입니다. 저 역시 박서원이라는 존재가 없었더라면, 그렇게 겁없이 내면 깊은 곳으로 여행을 떠나지 못했을 겁니다. 그 외에도 많은 뛰어난 ‘아줌마시인들’이 있습니다. 그녀들의 작업을 제가 단지 ‘아줌마’이기 때문에 지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학성에 대해 확신이 있기 때문에 비평적으로 투자하는 것입니다.
90년대 후반에 단연 두각을 나타낸 여성 시인으로는 노혜경을 꼽을 수 있습니다. 비평과 시 양쪽에서 분명한 성취를 보였죠. 그녀는 굉장히 포스터-모던하면서도 동시에 본질적이고 래디컬한 여성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권력자들은 모르고 있겠지만, 노혜경의 시는 시인들 자신에게 많은 충격을 주었습니다. 80년대 말에 첫 시집을 상재했던 정화진 역시 놀라운 시인입니다. 시적 감수성이 다른 시인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납니다. 매우 독립적인 여성성을 지니고 있고요.
여성시는 90년대 한국문학이 얻은 가장 분명한 성과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권력자들은 여성시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들죠. 분명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만, 어쩐지 싫다는 거죠. 그러나 여성시는 앞으로 계속 발전할 것입니다. 척박한 환경을 이겨나가면서 점차로 세련되어 가고 있거든요. 앞으로 담론 생산과 텍스트 생산 양쪽에서 분명한 성취를 보일 것입니다.
박주택 : 제가 여성시가 문학성이 떨어진다고 말한 것은 완성도의 문제보다는 진술 어법이나 감정 표현에 있어 지나치게 수다스럽고 요설스럽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밀도 있는 자기 확보를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문학적 공감을 유도해내기보다는 세계나 상황을 직선적이고 메시지 중심으로 전달하고 있어 읽기에 다소 거북스럽다는 것입니다.
여성시 또는 페미니즘
김정란 : 저 자신도 그렇고 최근의 여성시인들의 작품이 그렇게 수다스럽거나 요설스럽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제 시를 가지고 말씀드리기가 거북스럽습니다만, 오히려 제 시는 정서적으로 정제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최승자 시인처럼 거친 어법을 가지고 있는 시인의 시는 오히려 ‘안으로 삭혀져 있다’고 보면서도, 오히려 정제된 어법으로 말하는 90년대 여성시인들의 시를 ‘시끄럽다’고 느낀다는 사실입니다. 정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끄럽게 들리는 것은 이 언어들이 남성들이 편안하게 파악하는 가청지대를 벗어난 곳에서 발성되어서 그런가요? 들리지는 않지만, 초음파가 아주 시끄럽다고 느껴지는 것처럼요?(웃음)
박주택 : 선생님 시가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모두 웃음) 여성 문학 전체와 관련해서 다시 말씀 드리자면 금제되고 억압된 감정이 여과없이 표현되고 있다는 생각이지요. 때로는 이 언어가 과연 여성들만의 표현으로 남성의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을까 하는 자문을 해볼 때도 있습니다. 정서적 층위가 서로 달라서인지는 모르지만.
김정란 : 제 시가 문제가 아니죠. 여성의 독립적인 말하기 방식을 인정하지 않으려 드는 전반적인 풍토가 존재하는데, 저 하나 인정받는 것이 무슨 큰 의미가 있겠어요? 남성들이 여성시에 대해서 가지는 거부감은 논리적인 것이 아니라, 정서적인 것 같아요. 여성시인들은 누구보다도 문학적 자의식이 강한 메타적인 시들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직설적’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 점이 정말 신기하고 이상해요. 그러나 시간이 해결해 주리라 생각합니다. 여성들 자신도 결국에는 소통되는 밝은 곳으로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평자들은 여성시가 지적 조작의 산물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 낯선 언어가 지적 조작의 결과물이 아니라는 사실은, 남성들이 그토록 낯설어하는 이 언어를 별 문학적 교육을 받지 못한 여성들이 거의 완전히 이해한다는 사실입니다. 아주 고통스러운 자기 추구의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지만요. 남성들의 경우에도 같은 정서를 감각적으로 거의 완전히 내면화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 언어가 존재론적으로 상당한 훈련을 거친 언어라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지적이기는커녕, 오히려 반이성적 언어지요. 신화적 인식의 문제입니다. 제가 남성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마음을 좀 여시라는 겁니다. 수천 년 동안 남성들이 기득권을 가지고 세계를 경영해 오지 않았습니까? 이제는 여성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십시오. 왜 인류의 절반이 가지고 있는 개발되지 않은 능력을 그토록 완강하게 외면하십니까? 시간을 두고 진정으로 만나려는 노력을 해달라는 겁니다. 남성들이 관용을 가지고 이 언어에 관심을 기울여주시면 좋겠어요.
시와 육체성의 담론
박철화 : 여성들만의 노력이 아니라 다른 방식의 언어를 이해해 보려는 남성들의 관심과 참여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죠. 물론 여성들 스스로 자신들만의 ‘게토’에서 걸어나오는 용기 또한 필요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용기가 싸움만을 염두에 둔 배타적 결단보다는 고통스럽더라도 포용을 지향했으면 합니다. 그것이 한 남성 독자로서의 소박한(?), 그러나 양보할 수 없는 주문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이렇게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두 가지 차원에서 육체라는 것에 관심을 쏟게 되는데, 80년대 문학이 남성 지식인 위주의 보수적이고 정신주의적인 옷을 무겁게 껴입고 있었다면, 90년대의 문학은 그 갑갑한 장식을 벗어 던지고, 새롭게 우리의 몸, 육체에 관심을 쏟은 것이 사실입니다. 거기에서 여성 문학에 대한 관심도 구체화되었죠. 우선 여성들 자신이 잉태와 출산의 주체로서 자신의 몸에 대한 예민한 자각을 갖고 있는 존재들이니까요. 어쨌든 문학에서의 몸에 대한 관심은 과도한 정신주의의 공허한 추상성을 극복하는 계기가 됩니다. 일상에 대한 관심의 증대가 바로 그 증거이죠. 몸에 관한 담론은 정치·경제적 편향에 대한 균형감각 회복, 여성 문학, 생태주의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며 우리 문학의 폐쇄적인 벽을 허무는 중요한 출구가 되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김정란 : ‘몸의 담론’ 역시 90년대의 중요한 시적 관심사였죠. 하지만 이 주제에 대해서 저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어요. 이 ‘문학적 몸’은 어떤 몸일까? 문학 안에서 ‘몸’을 다루면, 그 자체로 저절로 의미를 가지는 걸까? 어떤 경우에는, ‘몸’을 다루고 있지만, 그 ‘몸’이 여전히 관념적이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몸’이 아니라, ‘몸의 담론’이 전경화되어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박주택 : 90년대 들어 육체는 그야말로 새로운 평가를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까지 정신만이 중요한 가치로 인식되어 왔음을 상기할 때 이는 엄청난 변화입니다. 육체의 욕망은 사회적 욕망이며 정신과 조화를 이루기 위한 자연성의 욕망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자본주의는 육체를 기호화하여 소비 이미지와 기계적 이미지로 육체를 전락시키고 있습니다. 이같은 메커니즘에 의해 왜곡되고 훼손되는 육체는 병들어 신음할 수밖에 없으며 권력과 정치의 희생양이 될 수도 있습니다. 뮤직 비디오나 광고를 통해 드러나는 육체만을 보아도 알 수 있쟎습니까? 이같은 상황에서 많은 논자들이 정신과 육체를 일원론적으로 파악하는 동양적 사유를 사회적 텍스트로 삼고 몸의 세속화의 문제를 진지하게 반성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봅니다. 근대성의 반성과 함께 제기된 육체에의 관심이 전면에 떠오른 90년대 이같은 물줄기에 닿아 있으면서 ‘알’로 대표되는 생명 의식에 깊이 천착하는 시인으로는 정진규를 손꼽을 수 있습니다. 그의 시에 나타난 육체성은 환상이나 상상이라기보다는 일상성을 정초로 하는 살아 있는 건강한 몸으로서의 현실성입니다. 정진규는 몸의 사회적 의미를 시 속에 끌여 들여 몸 속에 일고 있는 강한 생명력을 분산시키기보다는 자신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삶 속에서 공동체와의 본유적인 동일성을 발견하고자 합니다. 그 본유적인 동일성은 곧바로 알의 생명 시학과 매개하면서 근대 정신이 품고 있는 건강한 육체의 복원을 완성시켜 놓고자 하는 열의를 보이기도 합니다.
박철화 : 김기택 시인 역시 독특한 몸의 상상력을 보여주고 있죠. 그런데 ‘몸’의 문제는 자연스럽게 섹슈얼리티의 문제로 연결되겠죠. 그런 점에서 김기택씨의 개성이 드러나지 않습니까.
박주택: 시적 메시지를 비교적 분명하게 전달하고 있는 김기택은 남성적 글쓰기의 전형을 보여 주면서 육체가 가지고 있는 힘의 골격을 담을 쌓듯이 건조한 언어로 단단하게 구축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 육체는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하나는 문명과 전쟁, 자본과 폭력에 의한 의식의 훼손을 훼손된 육체를 통해 드러내고 있는 특징을 보이고 있으며 다른 하나는 육체가 가지고 있는 제특성을 치밀한 관찰력과 묘사를 통해 통찰해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김언희는 이와는 다릅니다만 여성 육체를 남성에게 드러내 보임으로써 피학과 관음을 교묘하게 교차시켜 일그러진 섹슈얼러티를 이끌어 내기도 하며 남성 육체에 도전적인 가학을 통해 에로티시즘의 노출 시학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채호기의 경우는 한 육체가 한 육체에게 집요하게 파고 들며 상호 일체성을 꿈꾸는 악마적이면서도 괴기적인 육체의 시학을 보여 줍니다. 그는 김언희가 노골적인 성 윤리 해체하는 것과는 달리 시적 의장을 동반한 채 육체와 육체와의 완전한 결합을 꿈꾸고 있는 특징을 보이고 있습니다. 육체의 시는 데카르트적 사유를 분쇄하고 그 존재 자체의 완전성을 꿈꾼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같은 맥락에서 생명의 복원을 담지하고 있는 육체의 시는 인간 존중의 인문주의적 태도를 보여 주는 중요한 담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김정란 : 탈근대적 맥락에서 몸이 부활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이지요. 그런데 몸담론이야 말로 서구의 문화 논리에 아주 편하게 무임승차하는 특성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 특히 선정적 포르노그라피에 기대는 시인들이 그래요. 이 주제는 앞으로도 긴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저는 다른 점은 다 접어두더라도, 과연 지금 몸이 온당한 방식으로 부활하고 있는가 물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육체는 전시되고 팔림으로써 또다시 타자가 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지금 우리가 육체의 복원에 대해 말하는 것은, 그 동안 인류가 정신의 이름으로 육체를 지나치게 억압해왔기 때문에, 균형을 잡기 위해서이지, 육체에게 우위를 부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번에는 정신이 타자화되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그건 근대 동안 저질러왔던 실수를 거꾸로 반복하는 것이지요. 지금 현재 육체를 육체라는 고깃덩이로 전시하고 있는 시도들이 과연 육체에게 온당한 권리를 되돌려주고 있는 것일까요? 그건 또다시 육체를 대상화하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까요? 순전히 무수한 볼거리들 중의 하나로 말이죠.
저는 육체와 정신의 통합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즉, 육체 자체가 지니고 있는 물질적 혼인 영성을 회복시켜야 한다고 보는 거죠. 여성적 육체의 의미도 이러한 점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무수한 진화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육체, 영성의 거점으로서의 육체. 동물적 육체만을 강조하면, 존재는 또다시 균열을 겪게 됩니다. 전 그게 두려워요. 전 탈근대적 존재론의 소명은 존재의 연속성의 회복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육체는 타자를 발견하는 겸손한 거점이 아니면 안된다고 생각해요. 이기적 욕망만을 담고 허기진 채 돌아다니는 정신이 빠진 좀비의 육체들이 저는 너무나 두렵습니다. 그 육체는 자신의 육체를 유지하기 위해서 타자의 육체를 파괴하는 것만을 꿈꾸거든요. 육체에 대한 지나친 관심이 육체의 파괴로 이어지는 것을 우리는 얼마나 종종 목도하게 됩니까.
박철화 : 육체라는 것과 육체성에 대한 섬세한 분별이 있어야겠죠. 단순히 육체를 끌어들인다고 해서 시가 되지는 않습니다. 정신적 편향에 대한 대안으로서 육체에 대한 관심은 당연히 옹호되어야 하겠지만, 사실 육체에 대한 또 다른 신비화는 여전히 경계해야 할 위험한 요소가 아닌가 싶습니다. 김정란 선생님은 그것은 융의 시각을 빌어 ‘영성’과 ‘존재의 연속성’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육체와 정신이 함께 공존하고 소통하며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라는 지적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생태’와 ‘환경’이라는 주제를 다룰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것은 물질적 차원에서의 보존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정신적인 차원에서의 성숙 또한 주요한 과제이지요. 여기에 대한 말씀을 함께 나눴으면 합니다.
현대시와 생태환경
박주택 : 생태환경에 대한 문제는 비단 90년대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문제가 우리들 앞에 중요한 가치로 자리하고 있는 것은 환경의 문제가 인간의 생존과 직결되는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지하다시피 자연과 생태의 파괴는 인간 중심주의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다 역사의 낙관론적 진보를 꿈꾸며 테크노피아의 세계를 건설하려는 야심찬 신념을 가지고 있는 과학 중심주의도 한몫을 더했으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같은 패러다임은 인간의 욕망만을 무한히 증식시키며 자연과의 연결 고리를 끊어 버리는 비극을 초래하여 급기야는 인간이 자연에게 소외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 미래적 위기는 동양 정신, 노장사상, 불교사상, 우주공동체적 모성성 등과 같은 것에서 그 실천의 원리를 찾으려고도 합니다.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환경에 관한 명제는 시민 운동과 수많은 지식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에게 뿌리 깊게 자리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분명 오늘날 환경의 문제는 운명의 모순입니다.
70년대의 산업화의 부산물인 공해의 문제를 리얼리즘적 관점에서 다루기 시작한 환경에 대한 문학적 인식이 80년대의 도시시, 문명비판시에 이르러서는 70년대의 계도적 차원을 넘어 환경의 문제를 시 속에 깊이 있게 용해시키는 성숙함을 보였습니다. 이것이 90년대에 이르면 문학의 중요 쟁점화되고 있는 양상을 띠며 시의 큰 주류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같은 경향의 바탕에는 기술 문명이 주는 부작용에 대한 자각과 포스트 모더니즘의 한 갈래라 할 수 있는 타자로서의 주변인 자연에 대한 관심에 힘입은 바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환경의 문제가 당위의 문제로 떠오른 것은 환경이 우리의 생명을 크게 위협하는 데 있다는 공통된 인식의 바탕을 이루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따라서 90년대 초 고진하, 이경호 편의 환경 시집 좮새들은 왜 녹색별을 떠나는가좯이후 김지하, 정현종, 고형렬, 최승호, 고재종, 이문재, 박용하 등의 시인을 비롯하여 거의 모든 시인이 이 문제에 깊이 천착하고 있는 양상은 어쩌면 당연해 보입니다. 김지하는 생명 사상을 기반으로 시세계를 전개하고 있고 고형렬은 그의 장시 <리틀보이>에서 보이고 있었던 반생명적 문명에 대한 비판을 지속화시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문재는 좮마음의 오지좯에서 보여주고 있는 대안적 세계로서의 농업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이성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최승호와 고재종입니다. 이미 시집 좮대설 주의보좯에서 문명 비판의 시를 보여준 최승호는 깊이 있고 예리한 통찰력을 바탕으로 완성도 높은 환경, 생태시의 세계를 끊임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재종은 농촌 서정과 농촌 현실을 바탕으로 한 신뢰할 수 있는 목소리로 우리가 최후의 대안으로 생각하고 있는 바로 그 농촌조차 더 이상 우리들의 에코피아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갈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채롭습니다.
환경의 문제는 분명 인류의 문제이자 현실의 문제입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이제는 우리 생태 환경 문학도 교시의 차원을 너머 공동체적 질서의 비전을 제시하는 시문학으로 거듭나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김정란 : 저는 생태주의는 90년대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시적 대안들 중의 하나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제가 가지고 있는 ‘문학생태주의’의 개념은 생태적 메시지를 계몽의 차원에서 제시하는 시인들과 약간의 변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체로 생태주의적 상상력에 기대어 작업하는 시인들의 작업은 두 가지 정도로 나타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문명의 야만을 고발하는 경우이고, 두 번째로는 자연을 예찬하는 경우이지요. 첫 번째 시도는 최승호 시인이 대표하고 있는데, 이하석 시인의 작업도 현대문명의 무기질적 성격을 잘 형상화화고 있죠. 두 번째 작업에서는 정현종과 김지하의 생명주의 시들을 들 수 있습니다. 최동호의 동양적 세계관의 회복 노력도 이 맥락 위에 놓여 있고요. 최근에는 송찬호의 시에서도 생태적 메시지가 읽힙니다. 저는 생태주의 분야에서 가장 성공적인 시편들을 써내는 시인은 고재종 시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단순히 생태적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농본적 상상력을 기초로 해서 언어의 튼실하고 근육질적인 결을 회복시킴으로써, 힘찬 시세계를 구축하는 데 성공하고 있습니다. 말의 맛이 살아 있죠. 그런데 저는 시가 생태적 메시지 전달에 치중하는 것으로는 시적 소임을 다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생태성은 현재의 문명적 상황 안에서 ‘당근’이거든요(웃음). 자연을 살리지 않으면 인간도 살아남을 수 없으니까요. 저는 시적 모색은 이러한 자연주의적 생태성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태성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존재를 치유하는 역할까지 해내야 한다고 보는 거죠. 즉, 인간 자체가 거듭나야 하는 것이죠. 그렇게 하기 위해서 문학이 떠맡아야 하는 역할은 문명이 오염시켜 버린 언어의 순결성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것이 진정한 문학적 생태주의라는 거죠. 언어의 순결성을 회복하고, 그 회복된 순결성을 바탕으로 존재의 순결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제가 가지고 있는 여성주의의 플랜과 겹쳐집니다. 아무래도 오염되지 않은 언어를 더 잘 알고 있는 것은 남성들이라기보다는 여성들이라고 생각되니까요. 따라서, 저의 생태적 전망은 자연의 자연뿐만 아니라, 인간의 자연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존재의 전체성, 즉 영성을 회복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태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으로는 문학적 소임이 끝난다고 볼 수 없습니다. 이 점에 관해서 시인들은 공동체를 대표해서 영혼 깊은 영역으로 모험을 떠날 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이 모험이 전근대적 미분화 상태로의 퇴행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근대적 의식적 자아를 데리고 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영성의 당대적 의미를 파악할 수 있어요. 치열한 변증법적 모색이 있었으면 합니다.
서정성의 회복
박철화 : 앞에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80년대 문학의 얼굴인 이성에 대한 회의와 90년대의 감성과 감각에 대한 찬양은 육체로서의 ‘존재’와 정신으로서의 ‘영혼’을 다 아우를 수 있는 지점을 찾아 고통스런 모색을 거듭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존재의 총체성의 표현으로서 언어에 내재되어 있는 음악성의 회복은 아주 의미 있는 하나의 계시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산술적 차원에서의 심장 박동과는 또 다른 육체의 리듬과 영혼의 가락에 닿아 있기 때문이죠. 서정성과 음악성의 차원에서 90년대 문학이 어떠한 결과를 얻었는지 한 번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김정란 : 90년대 초반에 특히 서정성의 회복이 많은 관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른바 ‘신서정’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지요. 이는 80년대의 정치편향적 민중시와 해체 실험에 대한 반동으로서 아주 당연한 귀결이었다고 생각돼요. 장석남이나 함민복의 독특한 새로운 서정성이 있었고, 아울러 이선영의 정서도 함께 언급할 수 있는데, 이선영의 서정성은 일상성과 접합된 독특한 서정성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 외에 박정대의 빼어난 작업이 있지요. 이 시인은 이른바 ‘댄디즘’라고 불릴 수 있는 도시적 정서를 보여주는데 (소설에서 이야기되어지는 ‘댄디즘’은 정말 문제가 많습니다. 나중에 본격적으로 거론할 생각입니다), 그런데도 고결한 서정성으로 도시적 황폐함을 이겨내고 있어요. 이러한 서정성들은 당대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서정성을 90년대 한국 문단에서는 쉬운 감상성과 혼돈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인 것 같아요. 센티멘탈즘과 리리시즘은 전혀 다른 것이죠. 저는 현대적 의미의 서정성이란 에밀 슈타이거의 동일성의 원리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구시대적 방식으로 쓰여진 애매한 이름의 전통적 서정이 여전히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대중시 분야에서 특히 그렇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변별적 서정성을 지닌 아주 좋은 시들이 많이 쓰여지고 있다는 사실이죠. 박형준, 이윤학, 이대흠 시인 등이 성공적으로 써내고 있는 시들의 서정성은 전시대 서정성과 분명히 다릅니다. 저는 현대적 의미의 서정성이란 위안을 주는 정서, 즉 세계와의 동화라기보다는 자기 원리를 밀고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오히려 서정성은 세계와 길항하면서 생겨나는 것이지 세계와 타협하는 정서에 의해 생겨난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박주택 : 서정성이라는 것은 시가 지닌 공통적인 특징으로 그다지 특별한 것은 아닙니다. 굳이 따지자면 80년대적 상황에서 벗어 나려는 탈정치, 탈이념적인 성향과도 무관치 않다고 봅니다. 어떻게 보면 삶의 문제를 진지하게 궁구하고 사유하고자 하는 정신의 여유로움에서 논의되고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좀 더 역설적으로는 사회 현실을 둘러싸고 있는 외적 가치로부터 자신만의 의지와 신념을 고수하며 자기만의 언어로 표현하고자 하는 견고한 욕구의 산물일 수도 있습니다. 쓴다는 의미보다 제작한다는 의미가 강해진 오늘의 시 현실을 생각할 때 독자의 정서적 공감을 이끌어 낸다는 점에서 이는 일정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감상성을 바탕으로 정리되지 못한 자의식을 기표화하는 것에 그친 시는 그다지 바람직하게 보이지 않아 보입니다. 뿐만 아니라 지적 통제도 받지 않고 마치 주문술사처럼 뱉어내는 방언적인 시도 그리 바람직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이는 특히 비평가의 몫이겠지만 그 본연의 임무를 소홀히 한 채 서정시가 지니고 있는 다양한 내용을 하나의 카테고리에 묶어 시적 의미를 단순화시키는 것은 우려할 만한 일입니다. 시를 읽지 않는 사람이 비평가라는 오늘의 현실에서 서정시 내부에 살아 숨쉬고 있는 삶들은 한동안 구제받을 길이 없어 보입니다.
김정란 : 비평가들의 문제는 이따가 언론의 문제와 함께 묶어 얘기하도록 하죠. 할 말이 많으니까(일동, 와, 큰일났다, 하고 큰 소리로 웃음).
노래성의 회복
박철화 : 서정성의 회복이란 자연스럽게 노래성의 회복의 문제로 이어질 것 같습니다. 그 동안 시가 지나치게 ‘문자적’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럼으로써 대중이 떠나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위에서 이미 언급한 것이지만 대중의 존재와 영혼 안에 내재된 리듬과 가락을 일깨우는 일에 소홀한 것이죠.
박주택 : 시가 노래였을 때는 행복했으나 시와 노래가 서로 독립된 예술로 전문화되어 계층과 향수자가 분리되면서 비극이 탄생되었다는 말은 일견 타당해 보입니다. 시는 본시 노래성에서 출발했습니다. 굳이 시의 본질을 들먹거리지 않더라도 인간의 호흡을 그대로 담고 있는 것이 시입니다. 그러나 이는 전통적 운율을 거론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생각이 듭니다.시에는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과거의 것에 대한 저항과 위반의 의지가 있고 운율 역시 재편성의 과정을 거친 것은 확실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시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리듬의 창조나 운율적 미감은 시를 읽거나 듣는 즐거움이 배가 될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유행을 지나 제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시에 대해 곰곰히 따져 보아야할 것으로 봅니다. 다시 말해 시인 각자의 개성적인 호흡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지나치게 작위적으로 호흡을 분절시키거나 일탈시키는 것은 현대성이라는 엄호를 아무런 책임감없이 받아 들이기에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습니다. 시의 미묘한 기술적인 방법이지만 서두요.
박철화 : 내면의 숨결을 찾는 차원에서의 서정성의 회복이 바람직하겠지요.
김정란 : 도도한 물질주의에서 견뎌낼 수 있는 내면의 힘을 회복함으로써 진짜 노래를 부르게 되겠죠. 그렇지 않다면, 서정성을 빙자한 노래성은 세계의 현상황을 추인하고 인정하는 달착지근한 감상으로 떨어져 버리고 말 거예요.
박주택 : 이를테면 이런 것들을 서정성이라고 하기에는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시대 착오적으로 자연의 아름다움만을 반영하고 있는 순진한 서정이 그 하나의 예가 되겠지요. 이와 더불어 지적해 둘 것은 요즘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는 코드의 파악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노래성의 회복이라는 것은 시가 갖고 있는 본래의 호흡을 찾는 것일 겁니다. 요즘 부쩍 많아 지고 있는 시낭송도 시의 노래성을 회복하는 대안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김정란 : 저 역시 시가 근대를 통과하면서 지나치게 자기 순결성의 신화에 매달린 나머지 삶과의 통로를 잃어버린 결과를 낳았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적으로 지나치게 정교해짐으로써 운명이라는 보편적 문제와의 접촉을 잃어버렸다는 거죠. 저는 문학이 자신이 태어나던 당시의 지점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즉, ‘운명의 해결방식’으로서의 형이상학적 소임을 다시 내면화해야 한다는 거죠. 방법적 추구에 지나치게 매어달림으로써 서구의 모더니즘은 빈혈상태가 되었거든요. 그러나 시인이나 작가가 자신의 작업에 대한 자의식을 가지는 것은 여전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그 자의식을 커뮤니케이션으로 연결시키는 거죠. 저 자신도 이 딜레마를 극복하기 위해서 무지 애쓰고 있고요. 문학적 시도들은 자기 현실의 회복과 극복이라는 명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봅니다.
박철화 : 어떤 방식이 있을까요?
김정란 : 저는 시인들이 몸을 낮추고 대중을 찾아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해서 문학성을 포기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고요. 자신의 문학이 확보한 문학성을 소통의 회로에 올려놓으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양한 미디어를 활용하는 방안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시가 꼭 문자로 쓰여져야 하는 건 아니라고 보거든요. 이 점과 관련해서 저는 ‘숨결의 회복’이라는 개념을 제시한 바 있습니다. 최근에 젊은이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테크노 음악이나 랩 등도 이 숨결의 회복과 관련이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생 그 자체의 리듬을 몸의 통로를 통해 회복시키려는 시도라고 보고 있는 거죠. 이 시도를 시로 끌어들여 볼만하다고 봐요. 말하자면 언어의 직접성을 회복하자는 건데, 그래서 저는 시인들이 쓰는 대신 말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다고 봐요. 저 역시 쓰지 않고, 말하려고 애씁니다. 이와 관련해서 저는 젊은 시인들이 고급 랩 같은 것을 시도하는 건 어떨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랩은 결국 가슴에 가득차 있는 말을 자발적으로 몸의 리듬에 실어내는 것이잖아요? 시인들의 가슴처럼 말로 가득차 있는 가슴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시인들이 굳어있는 몸을 풀어버리기만 하면, 굉장히 멋진 랩들이 쏟아져나올 것이라고 생각해요. 몸의 리듬 자체가 바뀌어버렸기 때문에, 호흡도 달라져 버렸죠. 따라서 더 이상 전통적인 방식의 호흡 분절은 의미가 없습니다. 저는 젊은 시인들에게 몸을 해방시키라고 말하고 싶어요. 그러면, 몸이 가슴과의 연결통로를 발견할 거예요. 그러면, 노래들이 쏟아져나오겠죠.
멀티미디어시대의 시
박주택 : 시가 점점 대중과 멀어지고 있다는 지적은 문학 외적인 것도 있지만 문학 내부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언어를 의도적으로 굴절시키고 일탈시켰을 때 이러한 시들이 과연 독자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지에 대해 의문이 생깁니다.
김정란 : 그러나 시인들의 언어추구는 계속되어야 해요. 우리 사회 안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대중의 언어의식이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지나치게 대중과 타협하려고 하면, 죽도 밥도 아닌 것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나 대중이 이제 문자를 더 이상 매력적인 것으로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다양한 매체를 통해서 소통 가능성을 실험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실험이 가시화된 경우가 현대시에서 올해 힘겹게 이루어낸 사이렌 사이키 음반 제작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 자신도 이 작업에 참가했지만 저는 멀티미디어의 시대라고 하는 것이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굉장히 좋은 여건을 마련해 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멀티미디어 환경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독자와의 통로를 마련해 주니까요. 멀티미디어라고 하는 것이 굉장히 빠른 속도로 변화되어 가고 있다는 점에서 독자에게 다가갈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것이지요. 소설이 특성상 시간과 공간적인 면을 많이 점해야 하는 데 반해서 시는 아주 적은 분량만으로도 독자를 더욱 충격적이고 감동적으로 이끌 수 있는 장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실험을 해가면서 시는 점차 통장르의 길을 걸어가게 될 것 같아요. 제가 제안하는 통장르라는 것은 기존의 장르를 해체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시의 특성을 더욱 잘 반영한 수 있다는 점에서 장르의 파괴가 아닌 장르의 진화라고 보는 게 타당할 것입니다.
박주택 : 지식 정보의 생산과 전달을 근간으로 하는 정보화 사회는 이제 인터넷과 인터넷 TV, 광폭 액정화면 TV, 디지털 VCR, 디지털 비디오 플레이어를 비롯하여 개인 휴대 단말기 PDA, 팩스폰, 말하는 컴퓨터, 가상현실 VR 등 그야말로 정보 테크놀로지의 시대에 접어 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각종 전자 기기를 결합한 멀티미디어의 도래는 전자 사회의 핵심으로 떠올라 사회 전반에 걸쳐 많은 변화를 가져다 준 것은 물론 정보의 무제한적 개방은 정치적 의식, 사고와 행동 양식, 문화적 형식, 경제적 자본의 양상 등 전분야에 걸쳐서 동요와 변화를 실감케 해줍니다. 더우기 독립적이었던 미디어가 타기기와 결합함으로써 정보의 종합적 시스템을 창출해내는 멀티미디어는 문화적 동시화 뿐만 아니라 문화 엘리트 중심의 문화와 하위 문화의 경계도 무너뜨려 버렸습니다. 문학 상에도 이러한 변화는 현저하게 드러납니다. 수단인 미디어가 글쓰기의 내용과 형식을 지배하는 것은 물론 소통 방식의 변화에 따라 생산자와 수용자 간의 의식이 변화되어 이제까지 지속해오던 시에 대한 텍스트 개념도 변화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 텍스트는 책의 언어가 아니라 컴퓨터상의 전자 언어인 비트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같은 변화는 일찍이 없었던 가히 혁명적인 변화 입니다. 사이버 스페이스에서 행해지고 있는 하이퍼 텍스트는 그간 문학이 지니고 있던 권위와 도그마를 위반하며 탈중심화하며 글쓰기의 개인적 욕망을 거침없이 분출합니다. 따라서 앞으로의 글쓰기는 이러한 변화에 대응해야 할 창의와 감수성이 절실히 요구된다고 봅니다. 이를 위해서는 시인들의 매체 변화에 대한 자각과 능동적이고 지속적인 대처가 필요합니다. 좀 더 말씀 드리면 시가 다중 매체와 결합을 꾀하거나 새로운 시 개념을 창출하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 시의 시디 롬화, 애니메이션화, 사이버 매체의 활용, 전자 시집, 시와 영상과의 만남 등이 그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문학이 현실을 반영한다고 볼 때 정치적 현실이 거세화되고 문화적 현실이 현실의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잡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서 시의 이러한 매체 환경과의 수용 의지는 앞으로의 시의 방향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리라고 믿습니다.
박철화 : 개개인이 자신의 내면의 숨결을 가지고 있고, 그러한 숨결의 표현으로서의 개개인의 리듬이 모아져 하나의 교향악처럼 세계의 리듬을 형성해 갈 것입니다. 이는 은폐되어 있거나 혹은 잠재되어 있지만, 그 리듬을 지향하고 찾아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대중들은 자신의 리듬을 찾을 것입니다. 세계의 리듬은 선험적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겠죠. 부단히 생성되고 있는 것입니다. 한 예를 들자면 멀티미디어라는 환경도 이러한 생성의 한 요소일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선 그것의 유동성을 낯설어하거나 두려워하지 말아야겠죠. 보다 더 성숙한 존재로 나아가는 길 자체가 그것이 진정한 것이라면 하나의 개인적 리듬이자 동시에 우주의 리듬으로 확장될 가능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웅장한 음악으로 통합이 이루어지겠죠.
김정란 : 덧붙여 말하자면 지금은 통합이 분명히 필요한 시대라는 것입니다. 미디어 작업은 결국 통합의 필요에 부응하는 시도인데요, 이러한 시도가 이 시장르의 파괴로 이어지지 않을까 걱정하시는 시인들도 많습니다. 저는 근대적 의미의 총체성의 개념에 매달려 있어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얘기하는 통합은 근대적 의미에서의 총체성이 아닙니다. 이제 더 이상 그런 총체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존재는 이미 터져 버렸어요. 지금 얘기되는 통합이란, 단 하나의 이데올로기 아래 집결해 있는 총체성이 아닌, 다양한 의식과 방법 아래서의 포괄적인 통합이죠. 말하자면, 보편성이라는 판대기 위에서 자유로운 조합이 가능한 퍼즐들로 존재하는 형식이죠. 하이퍼텍스트의 존재방식이 이미 그렇지 않습니까? 따로따로 개체로 존재하면서도 전체와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는 거죠. 테크노 음악의 구성 방식도 마찬가지고요. 무수한 계열체들을 생산해 내면서도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어요. 제 식으로 표현하면 홀로/함께. 저는 지금 현상황은 이런 식으로 전격적인 패러다임 쉬프트가 일어나고 있는 시대라고 보고, 거기에 걸맞는 통합장르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제가 제안하는 통장르는 그런 의미입니다. 따라서 지금은 결정적인 발상의 전환, 즉 인식의 도약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그 도약은 시적 상상력에 의해서만 가능해요. 시인들은 자신들이 지금 문명사적으로 소환받은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해요. 지금이야말로 산문이 아니라 시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올해의 시집과 시
박철화 : 지금까지 80년대 문학과 90년대 문학의 연속성과 단절의 관점에서 여러 가지를 짚어 보았습니다. 이제 올해의 시들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어 보겠습니다. 올해에도 많은 시와 시집들이 발표되고 출간되었습니다. 과연 어떠한 새로움이 담겨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겠죠?
박주택 : 전체적으로 얘기해 보겠습니다. 전체적인 올해의 시집들을 통괄해 보면 중진 시인들의 약진이 두드러졌다는 점입니다.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시집의 출간이 비교적 활발하게 이루어졌다는 것도 손꼽을 수 있는데 대표적인 중진 시인으로는 오세영, 오탁번, 김명인, 이성선, 김윤배, 허형만, 정호승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먼저 오세영의 시집 [벼랑의 꿈]은 순수 서정을 바탕으로 자연 속에서 발견되는 예지와 쓸쓸하고도 고즈넉한 삶의 맑은 통찰력으로 사물과 세계에 대해 대화하는 명징한 음성이 배어 있고 오탁번의 [1미터의 사랑]은 일상성에서 얻어지는 사고의 강인함과 고절함이 때로는 장난스러움과 여유로움이 혼융되어 그 연배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위압적 자세가 거세되어 있습니다.
김영석의 [나는 거기에 없었다]는 시의 새로운 변경을 개척하며 철저히 새로움을 향한 억압적 욕망이 압축되었다 폭발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로왔고 김명인의 [길의 침묵]은 여행 체험과 길의 시학을 단단한 시적 구조를 바탕으로 치밀하게 사유하고 있어 이제까지 해오던 자신의 시작업을 지속화시키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김윤배의 [슬프도록 비천하고 슬프도록 당당한]이 치열하게 자신의 예술 세계를 구축한 예술가를 반추하며 느슨하게 풀려 있는 시혼을 위해 스스로 채찍하고 있는 비장한 목소리가 공명을 이루고 있는 시집이라면 허형만의 [비 잠시 그친 뒤]는 가락과 회억의 서정이 어우러져 특유의 재미스러움을 가져다 주는 시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젊은 시인으로는 김정란, 김기택, 정한용, 조윤희, 노혜경, 이문재, 강성철, 이선영의 시집을 들 수 있습니다. 김기택의 [사무원]은 분주한 도시적 삶 속에서 발견되는 군상들의 모습을 점묘적 기법으로 형상화하고 있고 정한용의 [나나 이야기]는 상실과 고통, 눈물과 비애, 죽음과 재생 등의 이미지가 시집 전체를 얼룩지우면서 자신의 바닥 밑에서 혼신을 다해 사랑을 길어 올리고 있습니다. 이 번이 첫시집인 조윤희의 [모서리의 사랑]은 어둡고 음습한 미래에 대한 비관과 세련된 감수성을 기본 인식으로 나를 둘러싼 주체에 대한 저항적 자의식의 분출시키고 있으며 노혜경의 [뜯어 먹기 좋은 빵]은 자유스럽고 풍요로운 상상력으로 의식 저편과 삶의 비극을 수사적으로 노래하고 있어 재미 있게 읽은 시집 중의 하나였습니다. 강성철의 [사강을 지나며]도 주목을 요하는 시집입니다. 풍자와 지적 유머, 과거적 시간에의 원초적 회귀 의식, 진솔한 자의식이 혼융되어 있는 이 시집은 그 진솔함에도 눈길을 끕니다. 이문재의 [마음의 오지]는 도시 속에서 고독하게 몽상하는 자의 초상과 문명 속에서의 농업적 세계관을 꿈꾸고 있는 시집이며 김정란의 [스타카토 내 영혼]은 현실의 고통과 비극을 자신 안에 깊숙히 들어 앉히고 그 의미가 주는 생성과 소멸의 미학을 모험적 언어로 은유하고 있는 시집이랄 수 있습니다.
김정란 : 올해에는 젊은 시인들이 주춤한 반면, 중진들의 활약이 돋보였던 한 해였습니다. 그것도 예견되었던 것이지요. 그동안 쉽고 가벼운 문학이 물러서고, 무거운 문학이 돌아오고 있는 현상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중진들과 원로들의 한결같은 추구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춘수 선생님의 시집을 너무나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무의미시에서 다시 의미시로 귀환한다는 느낌이 들어, 개인적으로 반가웠고요. 최하림 선생님의 시집도 깊은 감명을 받으며 읽었고, 오규원 선생님, 그리고 허만하 선생님의 시집을 읽으며 숙연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특히 허만하 선생님 시집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후학들에게 본을 보이셨습니다. 등단한 지 일년도 안되서 겁없이 시집을 내는 시인들이 부지기수인 풍토에서 일생 동안 다듬고 심화시킨 시편들을 읽는 느낌은 남달랐어요. 아주 오랜만에 시를 발표한 이산하 시인은 시운동 동인 초기에 이륭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했던 시들과 많은 변모를 보이고 있습니다만, 역시 당시의 명성이 단순한 허명이 아니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었고요. 김연신 시인의 시집도 심화된 시적 인식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김참 시인의 시집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 시인은 ‘환상성’이라는 새로운 경향을 대표하는 흥미로운 시인이지요. 사이버 세대 특유의 환상적 리얼리티가 이미지 언어에 실려 분출합니다. 다만, 기법적으로 좀더 다양해질 필요는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구요. 박주택 시인의 시집도 건강한 남성적 상상력을 보여주었다는 점, 그리고 원시적 힘으로 문명의 황폐함을 극복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웠고요. 개인적으로 가장 주목했던 시집은 노혜경 시인의 [뜯어먹기 좋은 빵]이었습니다. 대단한 상상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지간한 시인들은 10년이 가도 하나 얻어낼까 말까 한 시들을 국자로 푸듯이 퍼내고 있습니다. 시인들에게 많은 충격을 주었어요. 그런데도, 중요 문학지들에서는 전혀 귀하게 취급하지 않더군요. 놀랐습니다. 시전문지마저도 외면하는 것을 보고 진짜 너무들 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비평가들은 대체 뭐 하는 사람들입니까?
언론과 제도 그리고 시비평의 문제점
박철화 : 아직도 많은 이들이 시에 대한 오해와 편견과 곤혹스러움을 지니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리고 저 자신 비평가의 업을 갖고도 시를 좇아가는 일에 게을렀다는 반성을 해 봅니다. 어쨌거나 시인들의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시가 충분히 수용되고 있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언론과 비평에 대한 문제점이 많이 제기되었고, 제도적인 문제점 또한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에 대해 말씀을 좀 나누셨으면 합니다.
김정란 : 이 문제는 이야기하기 쉬운 것은 아닙니다만 저는 비평가와 언론이 문학적인 위기 때문에 시를 경시하고 있는 게 아니라 문학적 인식이 부재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비평가들이 시가 죽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대중이 시를 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대중이 시를 읽게 해 보았는지에 대해 묻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는 문학 교육이나 제도에 대한 문제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비평가들의 직무유기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현대시의 특성상 제도에 얽매이게 된다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우리나라 대중들은 시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계몽되지 않았을 뿐이지 시를 찾지 않는 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비평가들이 문학적인 권력에만 집착하지 말고 본연의 초발심으로 돌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언론도 문학의 진정성에 좀더 신경을 써 주었으면 합니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한국의 고급문학은 다 죽습니다. 그것도 타살이 아니라 자살의 형식으로요. 얼마 전에는 한 시인 겸 비평가가 “시는 죽었다” 그러니 시가 죽어가게 가만히 내버려두어라, 죽어가는 시를 살리려는 모든 시도는 ‘추태’다, 라고 쓴 글을 읽고 충격과 분노를 함께 느꼈습니다.
박주택 : 시의 위기라는 말은 시인에게 있어서는 언급하기조차 싫은 문제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시가 소외되어 있는 건 아니라는 점입니다. 시를 읽는 이들이 저변에 많이 깔려 있다는 것입니다. 시의 위기라고 하지만 많은 독자들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시 비평가는 독자와 시인 사이에서 교량 역할을 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는 비평가가 열심히 시를 읽지 않는다는 것은 이야기해보면 금방 압니다. 시 비평가들이 시 전문 월간지를 읽지 않는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여러 종류의 시 전문지가 나오지만 월평이나 비평도 종합 문예지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언론에 대해서는 별로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만 일정 부분 자본메카니즘과 연관된 부분도 있고 인간적인 유대감이나 친소력이 없을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공정성을 넘어선 지나친 편애와 일관된 칭찬으로 언론이 문학을 몰아가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결국 읽어야 된다는 소리지만요.
김정란 : 정말 흥미로운 일이지요. 시전문지조차 읽지 않으면서 시비평가로 행세하고 있다니 말입니다. 이건 시인들에 대한 모독입니다. 비평가들이 시전문지보다 계간지에 더 관심이 많다는 것은, 계간지를 중심으로 문학권력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인데요, 이 현상은 한국문학의 아주 특수한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일종의 문학귀족들이 있어요. 그리곤 자기들끼기 닫힌 서클 안에서 언론을 끼고 주거니받거니 합니다. 어떤 엘리트주의에 함몰되어 있어요. 이 잘나가는 귀족들은 시전문지 따위 안 봅니다. 무엇하러 봅니까? ‘하인과 하녀’들이 만드는 책인데요. ‘아씨와 도련님’들이 만드는 권력지들만 보면 되죠. 자기들이 하는 문학 외엔 문학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서클의 멤버들은 각종 영향력있는 문예지는 물론, 일간지와 시사주간지 지면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권력 문제를 언급하면, “우리가 무슨 권력이냐”라고 말합니다. 이 문제는 대단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툭하면 탈근대 담론에 기대는 이들이 전혀 탈근대 상황에 대한 인식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거든요. “중심이 해체되었다”는 소문이 무성합니다만, 우리 사회에서는 중심이 해체되지도 않았을뿐만 아니라, 한결 노회해진 모습으로 각종의 미시권력들과 끈끈하게 얽혀 있어요. 우리 사회에서는 미시권력이 더 큰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학연, 지연, 인맥 등으로 얽혀 있어서, 그만큼 더 권력의 간섭을 피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미시권력의 억압은 거대권력의 억압보다도 더 깊이 내면화되어 있어요. 그야말로 ‘우리 안의 파시즘’의 형태로 말입니다. 정말 걱정스럽습니다. 문학에서마저 ‘줄서기 기술’이 필요한 나라는 아마 우리 나라밖에 없지 싶어요.
박철화 : 그래도 몇몇 신문에서 전문성을 가진 기자들이 비평가의 역할을 대신하며 최소한의 몫을 해준 공로는 절대적으로 인정해야겠죠. 그런 점에서 모든 언론 종사자를 일괄적으로 묶어 폄하 하려는 것은 아니라고 이해합니다. 저는 사실 비평에 있어 시인들의 자각과 분발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좮악의 꽃좯의 시인 보들레르는 “위대한 시인은 그 안에 위대한 비평가를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물론 “그 역도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라고 전제를 달면서요. 시에 대해 왜 비평가들의 말에 도움을 청해야 하나요. 소설가들도 마찬가지이죠. 자신의 문학을 비평의 언어를 통해 지적으로 분석하고 표현할 수 없다면, 그는 결코 좋은 작가는 아닙니다. 물론 지적인 것이 다는 아닙니다. 하지만 적어도 지적이지 못하면 아무 것도 아니죠. 우리 문학에는 창작에 대한 일종의 편견이 있습니다. 창작 자체가 가장 뛰어난 비평행위가 되어야 합니다. 프랑스에서 보들레르-아폴리네르-발레리-본느프와로 이어지는 시인·비평가의 계보를 염두에 두시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이 왜 쓰는지, 무엇을 쓰고 있는지, 다른 작업과 어떤 차별성이 있는지, 그런 질문에 답하는 것이 바로 창작의 시작이자 비평의 결론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 자리에 계신 두 분 선생님은 그 창작과 비평 작업을 겸하시는 분들이지만, 시만이 아니라 소설의 분야에서도 그런 분들이 더욱 많아졌으면 하는 것이 제 희망사항입니다. 그리하여 시인 소설가 비평가가 아니라 작가라는 한 단어로 글쓰기의 주체가 포괄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것이 서로에 대한 오해를 불식하는 계기도 되겠죠. 글쓰기가 무엇인지 아무런 개인적 경험조차 갖지 못한 사람들이 몇 가지 화석화된 지식에 기대어 텍스트의 창조적 힘을 훼손하는 것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텍스트 생산자들이 나서야 할 때입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위대한 철학자, 위대한 문학 이론가는 다 시라는 텍스트와의 사랑 속에서 성장했습니다. 텍스트의 위대함이 바로 그들의 사유의 모태가 된 것이죠. 심지어는 소설조차도 어느 순간 시가 되지 못하면 그저 잡설일 따름입니다. 그런 점에서 시 텍스트를 그리고 그것의 생산자를 존중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더 이상 언어를 맡겨두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은 사실 말을 할 줄 모르니까요.
김정란 : 비평가나 시인, 소설가들은 본질적으로 별로 좋은 관계라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어느나라에서나 그렇지요. 또 그래야만 서로 성장하는 것이구요.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비평가들의 권력이 지나치게 막강하다는 데에 문제가 있어요. 80년대 상황에서 유행했던 이른 바 ‘지도비평’이라는 괴이한 이름으로 비평이 텍스트에 군림하는 관행이 정착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비평가들이 텍스트에 대한 존경심이 너무 없어요. 그런가 하면, 잘 팔리는 소설 텍스트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아부를 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박철화 선생님의 지적처럼 시인들 자신이 의견표명을 하셔야 합니다. 권력의 눈치를 보지 말고 당당하게 발언하세요. 텍스트 없는 비평가는 없어요. 하지만 비평가 없는 텍스트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숩니다. 주권을 찾는 것은 참정권 행사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문학의 장에서 이루어지는 권력의 횡포에도 저항할 수 있어야 해요. 미시권력과의 싸움은 더욱더 힘들어요. 문학적 시민의식을 가지세요. 이제는 더 이상 정치라는 거대담론과 드잡이할 때가 아니라, 문학의 이름으로 허위의식에 기대어 권력을 생성시키고 있는 문화권력과 싸워야 할 때입니다.
박주택 : 시인들도 창작 주체이면서도 그들은 비평가들에게 대한 불만이 있습니다. 지금은 고학력 시대이고 그들의 생각이 겸허해지는 시대에 앞으로의 전망과 세기말적인 헌신과 괴별감 자멸감이랄까? 올해의 시는 요 몇 년 전과 그다지 차별성이 없어 보입니다. 다만 지금까지 논의된 생태 환경시, 몸시, 여성시를 비롯하여 세기말적 증후를 드러내는 시가 여전히 담론을 형성하며 일부 씌여지고 일부는 이같은 담론과는 무관하게 자신의 시작업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담론은 시를 재단하고 분류하여 논리적 체계성을 가져다 주고 명쾌한 이론적 준거를 마련해 주기도 하지만 자칫하면 몇 가지를 소홀히 할 수 있습니다. 먼저 담론 안에 묶을 때 생기는 해석상의 오류로 시가 가지고 있는 다의성을 일방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이같은 오류를 막기 위해 일부 비평가들은 정보 중심의 진술적인 시를 선택하여 자신의 논리를 개진시킵니다. 그러다 보니 시인들도 몰주체적으로 담론 성향에 시를 창작하는 경향도 없지 않습니다. 서구 담론 위주의 비평과 시 창작 태도는 새로운 세기에는 제발 그만 두었으면 합니다. 90년대만으로 이미 그것은 과포화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우리의 담론을 만들 때가 되었다고 봅니다. 이같은 맥락에서 저는 꾸준히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이땅의 많은 시인들에게 더 후한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시류에 좇는 몇몇 명망있는 시인들보다 그들이 훨씬 좋은 시를 쓰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에서입니다. 올해의 시의 특징은 대체로 세 가지로 대별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두각을 나타내는 신인이 등장하지 못한 채 답보된 상태로 한 해가 마무리되고 있다는 인상입니다. 제 개인적으로 는 기형도와 장정일이 없는 90년대는 너무나 재미없고 쓸쓸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영토 분할식의 할거 속에서 신인들에게 기대를 걸 수밖에 없는데 그들조차 올해는 휴면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런 가운데 신인은 아니지만 김형술, 이원, 이수명, 김수영의 시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다음으로는 서정시가 눈에 띄게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생태시, 여성 시, 세기말적인 시, 몸 시가 이미 논의의 단계를 너머 고착화되는 사이 새로운 수 많은 시가 다양한 색깔을 가지고 제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어쩌면 현란스럽기도 하지만 그러나 이는 아주 당연한 현상이라고 생각됩니다. 오정국, 원구식, 고진하, 박용하, 정끝별, 장옥관, 김참, 함성호, 이희중, 성기완의 시들은 각기 독특한 제 음성이 시 속에 배어 있어 앞으로의 작업에 기대를 걸만하다고 느꼈습니다. 앞으로 다가오는 21세기에는 당분간 지금까지 논의되고 정착되고 있는 담론들이 깊이 뿌리를 내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며 서정시의 양상도 좀 더 다양화되고 세분화되어 가리라고 생각됩니다. 섣부른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내년은 새로운 시작의 의미를 담는 밝은 시가 좀 더 창작되리라 예상되는데 이는 사회 문화적인 환경이 문학 깊숙히 가세되리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이와 아울러 근대 문학이 도입된 지 100년이 넘어선 이 마당에 우리의 문학도 이제는 시의 내용과 형식에서 뿐만 아니라 비평가, 시인 모두가 한층 성숙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박철화 : 이제 20세기가 다 지나가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불안하며 한편으로는 매혹적인 한 세기의 발걸음이 들입니다. 우리의 시도 새로운 얼굴을 더욱 많이 보여주었으면 합니다. 어떤 것이 있을까요. 끊임없이 가면, 다시 또 오면, 새롭게 태동될 새로운 언어의 가면들은...
김정란 : 이제 20세기가 끝나고 21세기가 다가옵니다. 하지만 물리적 구분이 무슨 큰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새로운 1000년이 시작되는 시점에 감회가 없을 수는 없겠지요. 저는 이런 저런 전망을 말하는 일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대개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들이거든요. 그보다는 현실에 성실하게 대처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비젼을 가지는 건 중요하죠. 그것에 기대어서 현재를 성실하게 살아가는 힘이 생기는 것이니까요. 저는 21세기는 근본적인 변화의 시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에 맞추어 문학도 새롭게 태어나야 하겠지요. 당분간은 가벼운 문학이 계속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곧 분화가 일어날 거예요. 벌써 진지한 문학을 요청하는 대중의 분위기가 감지되고, 아주 젊은 층을 중심으로 문학적 허위의식을 비판하는 시도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앞서 이야기한 바대로 대체로 낙관적인 전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지금 우리가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해요. 미래는 노력하는 자의 몫입니다. 시인들이 그 점을 유념해주면 좋겠어요. 지금 자신이 타자라고 느끼십니까? 그러나 역사는 타자의 천사가 아닌가요? 제 식의 표현으로 바꾸어 말하면, 역사는 상처의 통로를 통하여 인간들을 존재의 피안으로 데리고 갑니다. 시인들은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시인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진실이기 때문이죠.
박철화 : 새로운 세기에도 우리의 가면은 결국 스스로의 얼굴입니다. 그것은 이미 있는 얼굴이 아니라 있어야 할 얼굴, 새롭게 찾아낼 그리고 그려질 얼굴입니다. 그 가면과 자신의 얼굴이 하나가 될 때까지, 그리고 언어의 관능을 통해 다른 얼굴들과 말의 침을 함께 나눌 수 있을 때까지 우리는 절망을 살아내야 합니다. 하지만 희망은 늘 그 안에서 태동되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외로워하지 말고, 끝까지 싸울 것. 승리자는 시라는 이름을 갖고 있음. 아마도 그것이 두 분 선생님의 심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랜 시간 감사합니다.
[출처] 1990년대 한국시와 미래적 조망 |작성자 툭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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