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계 12장 1-6절
설교제목 : 아이를 품은 여인
묵시적 세상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주간 평안하셨습니까? 점점 뜨거워지는 열기와 습도 속에서 건강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지난주 화성 리튬 일차전지 제조업체의 화재로 23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주 노동자들이 대다수였던 것으로 보도되었습니다. 안전한 대피로, 사용 설명서를 이해하기 어려운 이주 노동자들의 언어적 취약성이 더 큰 화를 불러왔다고 분석하기도 했습니다. 부부, 자매, 사촌이 한 날 한시에 참변을 당한 사건으로 더욱 마음을 무겁게 하였습니다. 아직까지 전지 원료를 제대로 진압할 것이 없다는 것도 놀라게 하였습니다. 고통을 받은 유가족들에게 위로가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그 불덩이를 보면서 꺼뜨릴 수 없는 불길이 묵시적 세상을 연상케 하였습니다. 전쟁의 불길이 꺼지지 않는 것처럼 꺼지지 않는 불구덩이가 여전히 도처에 있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것은 우리 마음의 불덩이가 활활 타오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현대 대중 속에 있는 분노와 화, 짜증이 바로 묵시적 세계의 심판의 불덩이와 흡사합니다. 튀르기예와 그리스 성지순례를 다녀온 후 시차적응에 문제가 생기면서 날을 새면서 정서성이 극대화되는 순간에 제 자신의 밑바닥에 올라오는 거대한 불덩이를 발견하였습니다. 반드시 이 아니마가 일으키는 정서성을 다룰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강하게 하였습니다. 짜여진 계획과 일 속에서 폭발하듯 증가는 통제불능의 정서가 어디로 향할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불의 고통은 새롭게 변화를 촉구하는 목적의미가 있습니다. 이런 고통과 불덩이가 가득한 묵시적 세상은 새로운 질서를 향한 고통일 것입니다.
아이를 품은 여인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기 위해 고통은 반드시 통과의례처럼 거쳐야 합니다. 인위적 무통분만이 있을 수 있지만, 무통으로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법입니다. 새로운 질서는 혼란과 어둠을 뚫고 탄생합니다. 계시록을 기록한 요한의 시대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엄청난 핍박과 압제 속에서 모든 이의 무의식 속에 새로운 질서를 갈망했을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새로운 질서와 탄생을 향한 비전이 펼쳐진 것입니다.
오늘 이야기는 전체 환상에서 중간 삽화이자 이야기의 중심부에 있는 내용입니다. 일곱나팔의 심판이 일어나고 일곱 대접의 심판이 일어나는 사이에 독특한 환상이 끼어듭니다. 형언하기 어려운 한 여인의 상이 첫 번째 표징으로 압도적으로 나타납니다. 그 여인은 해를 둘러 걸치고, 달을 그 발 밑에 밟고, 열두 별이 박힌 면류관을 머리에 쓴 여인이었습니다. 그 여인은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을 두고 유대인들은 열두지파와 열두 별을 연관시켜서 유대인 공동체, 유대민족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기독교에서는 기독교 공동체로서 교회를 표상한다고 여겼습니다. 과거적 해석으로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로 보기도 하고, 어떤 경우는 야훼의 신부로서 해석하는 종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의 상은 기독교나 유대교의 전통적 이미지가 아니라 이교적 신화와 흡사합니다. 12장의 환상은 아폴로와 아르테미스를 낳은 그리스 신화의 레토이야기와 아주 닮아있습니다. 레토가 임신한 아폴로와 아르테미스는 쌍둥이로 태양과 달의 의인화된 형상과 연관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인을 위협하는 괴물 피폰의 위협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리스 신화의 이미지와는 달리 해와 달의 여인은 독립된 실체로서 달 위에 서 있고, 해를 입고 있어서 해와 달을 통합한 이미지이며, 쌍둥이가 아닌 한 아이를 낳습니다. 이런 탄생의 이미지는 기독교 전통과 달리 요한의 무의식적 산물임을 드러냅니다. 의식에서 거부된 것은 무의식 속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마련입니다. 이런 해와 달을 융합한 이미지는 전체성을 담지한 여인의 이미지로 여성성이 고양된 형태로 표현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여인이 품고 있는 아이는 신성한 아이이며, 생명의 총체이며, 장차 나타날 구원자의 이미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고 새로운 미래의 가능성으로 나타날 구세주입니다. 이 형상은 오랜 세월 삶을 살아온 경건한 노인인 요한이 내다본 다가올 먼 시대의 전조이자 본보기였습니다.
요한계시록 12장, 이 본문을 볼 때마다 제가 만났던 교회의 한 여성이 생각납니다. 그 여성은 과대망상과 종교망상을 가진 양극성 장애를 앓고 있었습니다. 정신과 병원에도 여러번 입원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여성은 남편에 대한 험담과 분노를 자주 표출하였고, 급기야는 자신이 계시록 12장의 여인이며 아이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남편은 몇 월 몇 일에 죽을 것이라고 말하고 다녔습니다. 이 여성의 이런 과대망상은 사람들을 힘들게 하였고, 병적인 상태에 있는 그녀를 저 또한 다소 피해 다녔습니다. 제가 분석심리학과 정신병리학을 공부하고, 환자들에게 대한 보다 깊은 이해가 생겼을 때 그녀의 망상을 깊이 통찰할 수 있었습니다. 이 우주를 구원할 아이의 탄생, 자신의 미래의 가능성이 태어나리라는 망상은 그녀를 구원할 마지막 희망이며 확신이었던 것입니다. 그녀의 망상은 그녀에게 최고로 합당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녀는 우주의 구원자를 기다릴 만큼 고통받고 있었고, 그런 구세주를 품은 여인이 되어야만 할 정도로 비참한 인생이었던 것입니다. 그 망상이 그녀에게 진정한 정신적 현실인 것입니다. 돌이켜 보면 그녀의 삶이 얼마나 비참하고 이해받지 못하고 고통받아왔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이를 품은 여인의 환상은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우리 또한 아이의 탄생을 그토록 갈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갈망하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잠재력이 이 세계 위에 드러나고 나의 삶이 고통과 불안에서 구원받기를 그토록 갈망하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이 유대인과 기독교인 공동체라는 표상한다면 새로운 구세주 아기의 탄생의 그릇이 될 여인은 바로 우리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이 미래에 인간 안에 살게 된다는 전진하는 육화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경험적인 인간은 아이가 탄생할 그릇이 되고, 그럴 때 비로소 미래의 가능성이 열릴 것입니다.
용의 위협
그런데 또 다른 표징이 보입니다. 이 여인을 위협하는 큰 붉은 용입니다. 그 용은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요 그 머리에 왕관을 일곱 개 쓰고 있었습니다. 그 용은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 아이를 삼키고자 노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용의 형상은 해와 달을 걸친 여인과 대립하는 요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용은 붉고,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 개라 표현 속에서 용이 가진 특성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붉다는 표현은 정서적인 열광과 광폭한 특성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머리가 일곱은 강력한 지성적인 특성을 지니며, 열 개의 뿔에서 공격적인 권력의 특성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것이 여인과 아이를 위협하는 거대한 권력과 정동적 열광을 조장하는 악마의 특성을 아주 잘 대변합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도 이런 엄청난 권력 충동으로 대중들을 사로잡고 파괴적인 힘을 드러내는 일들은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용의 위협은 개인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나는 듯 보입니다. 한 내담자는 용과 거미가 자신을 위협하는 느낌이 들고 그것들을 자신을 사로잡을까 두렵고 불안하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그 안에 있는 파괴적인 어머니 상이 그를 병적으로 붙들고 있으며, 그의 발달을 저지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용의 위협은 하늘 별의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으로 던지고 태어날 아이를 집어삼키는 것입니다. 용은 인간에게 배정된 잠재력과 가능성을 끌어내려 파괴하고 집어삼키려는 준비태세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도 무언가 절정의 순간에 새로운 것이 태어나려할 때 위험이 함께 도사리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때 이 악마는 입을 벌리고 그를 집어삼키려 합니다. 인간이 새로운 것이 탄생하고, 무언가 성취하고 성공하는 순간, 마귀가 등을 두르리며 잘 한다고 부추기며 급기야는 인간을 집어삼켜 버립니다. 이런 용의 위협은 매 시대마다 집단과 개인에게 있었음을 잘 알아차렸으면 좋겠습니다.
예비하신 곳 : 광야
그런데 아이가 태어나자 그 아이는 하나님 앞으로 올려 가고 여자는 광야로 도망칩니다. 여기에서 아기가 하늘로 올려간다는 것은 끌어 올려진다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아이의 형상이 무한한 시간 동안 잠재되어 있을 것이며, 그 활동이 미래에 유보되어 있음을 시사합니다. 당장은 구세주의 아이는 활동하지 않을 것임을 시사합니다. 어떤 잠재력이 태어났다고 해서 그것이 당장 어떤 영향력과 활동성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일정기간 동안 유보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인은 홀로 남아 3년 반 동안 사람들이 그 여자를 먹여 살리도록 광야로 도망칩니다. 그런데 그 광야가 바로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곳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런 광야로의 도망이야기는 이스마엘을 임신한 하갈이 자신의 여주인의 학대로부터 광야로 도망친 사건과 연결이 됩니다. 천사가 그녀에게 나타나 샘으로 인도하였고, 그녀를 지켜주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광야에 그 여인이 피할 곳을 예비하신 것일까요? 안락하고 안전하고 풍요로운 곳으로 안내해주실 것이지 왜 하필이면 삭막하고 불모의 땅인 광야일까요? 여러 해석들이 있지만, 이미지와 충첩되는 것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공동체가 맞닥뜨린 광야와의 유사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이 때로 광야일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광야는 온갖 위험이 도사리는 곳입니다. 배고픔과 목마름, 적들이 한계상황으로 내모는 장소입니다. 원시 시대로부터 광야는 악마들의 발원지입니다. 원시인들에게 낯선 금기의 영역입니다. 어떤 원시부족은 거칠게 성인식을 치른 소년들을 광야로 내몰아 고통 속에 밤을 지새우게 한다. 광야에서 고통의 밤을 보낸 자는 한 부족의 독립적 개체로 받아들여집니다. 이런 광야는 입문의 장소이다. 이런 의미에서 광야는 일종의 변환이 일어나는 영역이다. 예언서에 보면 광야는 대극의 일치가 형성되는 곳으로 메시아의 충만한 상태가 이루어지는 장소입니다. 융은 “세대 밖에서의 창조의 장소(대극의 연합이 일어난 곳) - 추측컨대 ‘자연을 거스르는 작업opus contra naturam’- 는 낙원이 아니라 광야, 즉 사막과 황무지입니다. 따라서 광야는 새로운 변환과 보호, 시험의 장소입니다. 광야는 오롯이 하늘을 기대여 하늘을 신뢰하며 기다리며 나를 변화시키는 곳입니다. 우리의 인생 전체도 광야입니다. 그 예비하신 광야에서 변화하고 하늘을 향한 신뢰를 굳건히 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