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경주(慶州). 아버지는 소금장수이며, 어머니는 옥령사(玉靈寺)의 비(婢)로서 천계(賤系) 출신이었다.
생애 및 활동사항
1170년 무신정변에 행동파 무신으로 가담하였고, 1174년조위총(趙位寵)의 난을 진압하면서 급속히 출세하였다. 정중부를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경대승이 사망하자 무인집정의 자리에 올라 10년 넘게 권력을 오로지 하였다. 이의민집권기는 무신정변에 참여했던 무신들과 천계 출신 무신들이 천하를 호령하던 시기였으며 전체 무신정권기(1170∼1270) 가운데 전기의 말엽에 해당한다.
신장이 8척에 이를 정도로 장대했고, 용력이 뛰어나 경군(京軍)에 선발된 뒤 수박(手搏)을 잘해 의종의 총애를 받아 별장(別將)이 되었다. 1170년(의종 24) 무신정변에 가담해 중랑장(中郎將)이 되었다가 장군으로 승진하였다. 이의민의 빠른 진급에 대해 『고려사』에는 이의민이 ‘정중부(鄭仲夫)의 난’ 때 많은 사람을 죽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1173년(명종 3)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 김보당(金甫當)이 정중부의 집권에 반발해 의종 복위를 꾀하자, 유배지인 거제에서 경주로 나와 있던 의종을 살해하였다. 그 공으로 대장군(大將軍)이 되었다. 1174년 서경유수(西京留守) 조위총의 난 때에는 정동대장군 지병마사(征東大將軍知兵馬事)가 되어 토벌했고, 그 공으로 무반의 최고직인 상장군(上將軍)에 올랐다.
1179년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던 장군 경대승(慶大升)이 정중부세력을 타도하고 실권을 장악하자, 1181년 형부상서 상장군에 올랐으나 고향인 경주로 내려갔다. 경대승이 병사하자 명종이 이의민을 불러들여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수사공좌복야(守司空左僕射)가 더해진 뒤 1190년에는 동중서문하평장사 판병부사(同中書門下平章事判兵部事)가 되었다. 1194년에는 공신에 책록되었으며, 인사권을 비롯한 정치의 제반 사항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이의민은 무신들의 문반직 겸임을 확대하였으며, 문신 가운데서도 특별히 가문이 좋거나 학문이 뛰어난 사람들만 보임되던 내시(內侍)나 동수국사(同修國史)에도 무신을 임명하였다. 또한 막대한 권력을 기반으로 백성들의 토지를 함부로 수탈했으며, 가족들 역시 탐학을 자행했는데 두 아들은 항간에서 쌍도자(雙刀子)라고 불렸다.
정권을 장악한 이의민은 고참(古讖: 참언)의 “용손(龍孫)은 12대에서 끝나고, 다시 십팔자가 나온다(龍孫十二盡 更有十八子)”라는 말을 믿어, 십팔자(十八子)가 곧 ‘이(李)’의 파자(破字)이므로 자신이 왕이 될 생각까지 품게 되었다.『고려사』에는 이의민이 경주 일대에서 난을 일으킨 효심(孝心)·사미(沙彌) 등과 내통하는 등 왕이 되기 위해 신라부흥운동을 지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이의민을 제거하기 위한 최충헌 등 정적들의 조작인 것으로 보인다.
이의민은 1196년(명종 26) 아들 이지영(李至榮)이 최충헌(崔忠獻)의 동생인 최충수(崔忠粹)의 비둘기를 뺏은 것을 계기로 살해되었다. 최충헌은 상장군 최원호(崔元浩)의 아들이었지만 이의민의 정권 하에서 정치적 성장에 일정한 제약을 받았었다. 이렇게 정치적으로 소외되었으나 가문 출신이 좋은 무반들은 최충헌을 중심으로 세력을 모으고 있었다. 최충헌이 이의민을 살해하자 “여러 해를 막히고 뜻을 얻지 못한 많은 사람이 이로써 희망을 품었다”고 기록할 정도였다. 즉 이의민의 죽음은 이의민정권에서 소외된 세력들이 비둘기 쟁탈이라는 사건을 계기로 그 불만을 폭발시키는 과정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이의민정권이 붕괴되자 최씨무신정권시대가 개막되어 4대 62년간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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