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가산 석탑’이라고도 불리는 ‘석탑리 방단형적석탑(方壇形積石塔)’에는 두가지 전설이 전해진다.
이 산에는 신라시대에 능인선사가 10여 년 간 수도한 능인굴이 있는데 아무리 심한 가뭄에도 줄지 않는 맑은 석간수가 요즘도 흘러나오고 있다.
이 능인굴에서 200여리 떨어진 영주 봉황산의 부석사는 삼천 승려들이 수도를 하 던 큰 사찰이었다.
삼천 명이나 되는 스님들의 식사공양은 보살들의 큰 일과였다. 아침저녁 밥이며 나물이며 수저들을 챙겨 한명의 스님도 빠짐없이 공양을 올려야 되는 보살들은 늘 신경을 써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공양 때였다.
평소와 다름없이 스님들은 공양간 큰방에서 발우를 펼치고 전발게(발우를 펴면서 외는 게송)를 염불하였다.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전해주신 적당량을 담을 수 있는 이 그릇을 내가 이제 받아 펴오니 원컨대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삼륜이 청정하게 하소서"
게송을 마치고 각자 앞에 놓여있는 밥통을 끌어다가 밥을 푸려고 하는 순간, 이제 갓 중이 된 사미승은 자기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4명이 한조를 이루도록 밥 한통씩이 놓여 있었는데 잠시 전발게를 외우는 사이 그 밥통이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사미승은 잠시 잘못 본 것으로 생각하고 급히 공양간의 보살님에게 밥 한통을 더 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공양을 올린 보살은 분명 맞게 올렸으므로 그렇지 않다고 맞섰다.
그런데 그날 저녁 때에도 밥 한 통이 또 감쪽같이 없어지고 말았다. 이렇게 없어지기 시작한 밥 한 통은 이튿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계속 없어졌다.
이렇게 공양들이 차례로 한 그릇씩 계속 없어지자 스님들은 서로 시비가 붙고 드디어는 다툼까지 벌어지게 되었다. 그러자 스님들은 부석사 조실스님을 찾아가 그 연유를 밝히고 대책을 물었다.
조실스님은 "허허 이상할 것 없지. 공양이 한 그릇씩 없어진다는 것은 누군가 먹기 때문이 아닌가?
허나 공양도둑은 이곳 부석사 안에는 없다. 조석으로 부석사 공양을 한 그릇씩 가져가는 사람은 남쪽으로 200리 떨어진 학가산의 능인선사라네."
이 말을 들은 삼천 명의 스님들은 분풀이를 하기로 하고 돌을 하나씩 들고 능인선사를 찾아갔다.
이들이 학가산의 북쪽 산등성이에 이르자 능인선사는 삼천 승려들 앞에 나타나더니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도둑은 한 가지 죄, 잃은 놈은 열 가지 죄라 했는데 오히려 잃은 놈들이 나를 벌하러 왔느냐?"며 빈정대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고 흥분한 스님들이 돌을 던지려고 하니 능인선사는 눈을 부릅뜨고 준엄한 목소리로 꾸짖었다. "살생을 금하고 자비를 추구하는 사문들로서 이것이 웬 추태인가, 오히려 자기의 공양을 남에게 주는 베풀음을 행해야 하거늘 자기의 공양을 빼앗겼다고 속세의 무리들처럼 살생을 하려드는가?
시주밥을 먹고 수행하는 출가사문이 올바로 수행치 않기에 내가 밥이 아까워 한통씩을 가져와 가난한 중생들에게 나누어 주었느니라!"
엄한 꾸중에 부석사 삼천 승려들은 크게 깨달아 능인선사를 죽이려고 들고 온 돌을 모두 한 자리에 모아 탑을 쌓았다고 한다.
다른 전설은, 명인도사(明認道士)와 마고선녀(麻姑仙女)의 이야기이다.
두 사람은 바위로 만든 집에 살면서 돌로 만든 신을 신고 돌로 만든 말을 타고 다녔다. 또 신통력으로 소백산을 왕래하면서 돌밥을 날라다 먹었는데, 이 탑의 돌은 그들이 남긴 흔적이라고 한다.
이 탑은 학가산 북쪽 계곡에 서 있으며 한쪽 변이 16m, 높이가 15m나 되는 거대한 자연석탑이 되어 지금까지 남아있다.
학가산 석탑사(石塔寺)
안동시 북후면 석탑리 방단형적석탑(方壇形積石塔) 인근에 있는 학가산(鶴駕山) 석탑사(石塔寺)는 681년(신라 문무왕 1년)에 창건된 유서 깊은 천년 고찰이다.
석탑사라는 절 이름은 위에서 살펴 본 석탑에서 유래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석탑사는 규모가 작은 주전각인 원통전과 산신각, 범종각, 그리고 낡고 허름한 작은 요사채가 있는 조촐해 보이는 절이었다.
그러나 초여름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정오 무렵에 우리 일행이 석탑사를 찾았을 때 이곳저곳 친절히 안내해 주셨다. 또한 그 작은 절집에서 적지도 않은 우리 일행의 점심식사까지 걱정해 주시는 모습에서 깊고 푸근한 정을 듬뿍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