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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와 보수의 이해를 돕는 율곡 선생의 개혁방안과 지지 기반
2020년 4월 25일
2020년 4월 15일 국회의원 선거를 마친 뒤에 더불어민주당은 당선자가 많아 기뻐하고 미래한국당은 낙선자가 많아 조용합니다. 더불어민주당 지도자들은 오만하지 말고 겸손하자고 말합니다. 국회의원 새로 뽑았으면 좋은 정책들을 많이 내놓아 국민에게 알리려면 오히려 겸손하지 말고 많이 말하고 의견을 수렴해야할 것입니다. 미래한국당은 지도자가 없다면서 외부에서 모셔오자고 합니다. 누가 나서서 수습하는 절차보다는 먼저 정책들을 수렴하고 요약하여 국민에게 알리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어떤 정당이 되었던지 모든 상황이 곧 수습되겠지요. 정치하시는 분들이 워낙 잘나고 임기응변도 빠르기 때문에 앞으로 잘할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빠르고 높았던 고도 경제성장기를 지난 뒤에 요즘에는 경제성장이 더딥니다. 더구나 코로나 바이러스 폐렴이라는 전염병 때문에 전세계 경제가 휘청거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한국도 많은 재정지출을 감수해야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구체적인 사안에 대하여 보수와 진보, 또는 진보와 보수가 대립보다는 좋은 방안을 내놓고 좋은 결정을 찾아야합니다. 경제성장률이 빠르고 높았던 시기를 그리워하는 시민들도 많고, 또한 못사는 사람들에게도 보편적 복지를 많이 베풀어야한다고 분배정책을 강조하는 시민들도 많습니다. 현재는 고도 경제성장을 할 수도 없고 또한 재정적자를 무릎 쓰면서 분배에만 치중할 수도 없습니다. 경제성장과 경제분배는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고 오히려 상호보완되어야할 것입니다. 따라서 두 정당의 국회의원들은 정책을 놓고 더욱 치열한 검증과 신중한 결정을 내려야할 것입니다.
아무튼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겼던지 졌던지 어떤 정당이 되었거나 국회의원 선거가 지났으니까 공약하였던 정책들을 모아서 구체화시키고 차근차근 잘 실행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국회의원은 국가의 정책을 결정하는 것이 직분이기 때문에 결코 국가예산과 자원을 많이 끌어와서 자기 지역구의 발전에만 신경 써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정당마다 잘 수렴한 국가정책과 경제정책을 요약하여 국민에게 잘 설명하여야 합니다. 현재 보수와 진보,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조선시기 대동법의 정책목표와 실행방안처럼 개혁안을 제기해야합니다. 그래야만 국민이 판단하여 선택하고 지지할 것입니다. 국민의 지지를 받도록 노력해야합니다.
이런 점에서 조선시기 임진왜란 전후의 개혁방안을 살펴볼 필요가 있고, 좋은 사례로서 율곡 이이 선생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율곡 선생은 기본적으로 공정한 분배와 행복한 사회를 위하여 경제적 적폐를 개혁하려는 경제성장론자입니다. 당시에 가장 큰 개혁방안은 대동법이었습니다. 대동법의 정책목표는 안민(安民)과 자강(自强)이었습니다. 대동법이 제기되고 실행되는 기간은 상당히 오래 걸렸습니다. 임진왜란 이후의 부흥정책이 일부 성공한 시기도 있었지만 물론 실패한 시기도 있었습니다.
물론 율곡 선생의 후학들이나 성리학자들 가운데에는 대동법 개혁을 주저하거나 신중하거나 강력하게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조선시기 많은 사회과학자들과 개혁정치인들은 한결같이 대동법 개혁안을 실행하는 데 일생을 바쳤고 조선시기 중흥에 기여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세무개혁은 성리학을 연구하였던 철학자들보다는 사회과학자들의 역할이 중요하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율곡 선생에게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교훈은 지지 기반입니다. 충분한 지지 기반이 있으면 어떤 개혁방안도 성공할 수 있지만, 지지 기반이 없거나 미약하다면 작은 개혁도 이루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전제군주제 왕조시기에는 임금이 개혁 신하를 얼마만큼 지지하느냐는 지지 기반이 개혁에 가장 중요한 동력이었습니다. 율곡 선생은 사실상 선조 임금의 지지가 미약하였고 결국 큰 개혁을 실행하지도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교훈입니다. 요즘 민주정치에서 말하면 국민의 지지 여론입니다.
중국 역사에서 중요한 개혁정치가를 들자면 북송시기 왕안석(王安石, 1021-1086)과 명나라 시기 장거정(張居正, 1525-1582)이라고 합니다. 왕안석은 신종황제의 지지를 받고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나중에는 지지 기반이 무너져서 개혁을 완성하지 못하였습니다. 장거정은 만력황제의 친모 이혜지(李兮淽, 1546-1614)의 신임을 받았고 환관들과 관계를 잘 이용하여 개혁을 주도하였고 상당히 성공하여 명나라 운명을 대략 50-60년간을 더 유지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왕안석과 장거정의 가장 큰 차이점은 지지 기반이 굳건한 정도이었습니다.
율곡 이이 선생(1536-1584)은 40살(1575)에 편찬한 『성학집요(聖學輯要)』에서 국가경제정책의 목표가 안민(安民)이라고 설정하였고, 구체적인 3가지 내용은 세금이 적고 요역이 적고 형벌이 적은 이상사회라고 보았습니다. 방법은 3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도덕적 옳고 그름을 구별하고 교육하여 사회적 도덕 수준을 높이고, 둘째는 국가지출을 줄이고 경제성장정책을 실행하여 백성들의 안정된 소득을 늘리는 것이고, 셋째는 군대를 양성하여 국가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사회경제적 적폐를 제거하여 경제적 성장을 이룩하고 백성이 살기 좋은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경제정책에서 ‘절용(節用)’과 ‘생재(生財)’ 둘로 나누어 설명하고 생재를 강조하였습니다.(『聖學輯要』:“薄稅斂,輕徭役,愼刑罰三者,安民之大要也.” “辨別義利,節用生財,制民恒產,修明軍政,然後備盡安民之道.” “夫所謂安民者,爲之興利除害,使樂其生之謂也.”)
율곡 선생은 『논어』 “절용이애인(節用而愛人)”과 『맹자』 “명군제민지산(明君制民之產)”에 관한 주희(朱熹)의 설명을 각각 절용(節用)과 생재(生財) 둘로 나누어 국가의 경제정책을 체계화시켰습니다. 율곡 선생의 안민정책에는 학교 교육의 교화를 포함시켰습니다.(“富而敎”) 이밖에도 안민은 대체로 백성의 경제성장을 펼치는 정책을 시행하여 백성의 지지를 얻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상서・고도모(書・皋陶謨)』의 “안민즉혜,여민회지(安民則惠,黎民懷之)”를 경학(經學)의 근거로 삼고 과거시험용 답안작성 팔고문(八股文)의 파제(破題) 단락에서 주장하였습니다.
조선시기 가장 큰 경제적 문제는 지배층(양반층)이 백성의 노동력과 생산물을 불법적 또는 합법적으로 빼앗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백성들도 살기 어렵고 국가는 재정이 부족하고 군대 징발도 어려웠습니다. 국가는 아무리 절용(節用)을 하더라도 재정수입이 부족하고, 백성들은 아무리 많이 생산하더라도 일상생활도 어렵고 국가에 세금 납부조차 어려웠습니다. 따라서 국가와 백성 모두 경제성장(生財)을 바라보기 어려웠습니다. 가장 큰 경제적 폐해는 일부 지배층과 아전들이 경제적 이익을 얻는 방법인데 이들이 지방 특산물을 납부하는 공물(貢物)제도 안에서 농간을 부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율곡 선생은 황해도 해주(海州)의 사례를 소개하면서 공물제도를 개혁하자고 건의하였습니다. 해주 백성들은 특산물을 직접 납부하지 않고 논 마기기마다 쌀 1말을 지방관청에 납부하면 지방관청은 특산물을 시장에서 구입하여 중앙정부에 납부하기 때문에 납부가 거절되는 경우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방법을 전국에 실행하자고 건의하였습니다.(“余見海州貢物之法, 每田一結, 收米一斗; 官自備物, 以納于京. 民閒只知出米而已, 刁蹬之弊, 略不聞知。此誠今日救民之良法也。若以此法, 頒于四方, 則防納之弊, 不日自革矣。”)
일반적인 상황을 보면 특산물을 납부할 시기가 되면 상인들이 매점매석하여 특산물 가격이 폭등하고 농민들은 가격이 폭동한 특산물을 비싸게 구매하여 지방관청에 납부하더라도 지방관청의 아전들이 수납을 거절하기 일쑤였습니다. 따라서 백성들의 비용부담이 켰습니다. 가장 큰 폐해는 중앙과 지방 아전들이 고의로 트집을 잡아 특산물 납부를 받지 않고 거부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전들은 백성들의 특산물 직접 납부를 거부하고 자신들이 직접 구매하여 납부하겠다면서 오히려 더 많은 돈을 거두는 것입니다. 물론 이들은 자신들과 결탁한 상인들에게서 구매하는 것이었고 상인의 배후에는 일부 지배층 양반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모든 수익은 아전과 상인을 비롯하여 일부 양반들에게 돌아갔습니다.
율곡 선생의 제안에 앞서 조선 정부는 정공도감(正貢都監, 1570년 설치)을 설치하여 안민정책의 세무개혁을 시도하였습니다. 이준경 선생(李浚慶, 1499-1572)은 선조 원년(1568)에 백성들의 부세 체납(逋欠)을 탕감시키기 위하여 정공도감(正貢都監)을 설치하자고 건의하였고 선조 3년(1570) 11월 설치하여 전국적으로 실행하려고 하였으나 실행하지 못하였습니다.
유성룡 선생(1542-1607)은 임진왜란 초기에 군량미와 군인 징발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1594년(53살)에 지방 특산물 진상(進上)에 대하여 명나라 일조편법을 참고하여 개혁하자고 건의하였습니다. 명나라는 13개 성(省)에서 은(銀)을 받아 중앙정부의 광록시(光祿寺)에 납부하면 중앙정부는 민간시장에서 필요한 물품을 직접 구매하여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운수 비용을 절감할 수 있으며 수도 서울의 시장이 발전하고 농민은 편안하게 생업에 종사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유성룡 선생의 세무개혁 방안은 사실상 뒤에 대동법 실행에 대하여 지지하는 입장을 나타낸 것입니다. (柳成龍, 『西厓先生文集』, 卷五, 「陳時務箚」(甲午, 1594년, 四月): “臣聞皇朝無外方進上之事, 只以十三道贖銀, 付光祿寺. 凡進供之物, 皆貿買而用之. 若有別用之事, 則以特命減膳而用其價銀. 故遠地之民, 不知有輦載輸運之勞, 而四方工匠百物, 無不湊集於京都, 如探淵海求無不得, 而京師日以殷富. 田野之民, 晏然安業. 此其立法之善, 我國所當取法也.”)
임진왜란 앞뒤 시기의 가장 큰 경제개혁은 대동법입니다.(이정철, 『대동법』, 역사비평사, 2011년 7월.) 절용과 생재를 목표로 삼은 재정정책과 경제성장정책은 먼저 공물수미와 대동법이라는 납세제도 개혁을 이끌어냈습니다. 결국 대동법은 조선 성리학의 재정사상(財政思想)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조선시기 대동법의 세무개혁은 시간과 내용에서 명나라 일조편법을 참고한 것이 아니고 조선의 지방행정 경험사례에서 찾아낸 경세방안입니다. 임진왜란시기에 국가 안전을 지키는 국방력 강화의 자강(自强)정책이 시급하였고 자강정책을 위하여 충분한 국가재정과 군인 모집이 필요하였습니다. 결국에는 백성들이 잘살도록 경제성장정책이 먼저 필요하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국가의 정책순서에서 안민(安民)이 먼저이고 자강(自强)이 뒤라고 설정하였습니다. 안민정책의 구체적인 방안이 바로 대동법입니다.
그런데 율곡 선생이 개혁방안을 활발하게 제시하였던 1560년대의 명나라를 살펴보면 각 지방마다 일조편법(一條便法)을 시작하는 단계이었으며 아직 정착되지 않았습니다. 율곡 선생이 말하는 공불방납(貢物防納)의 폐해를 공물수미(貢物收米)로 개혁하자는 방안은 나중에 명나라가 전국에 실행한 일조편법에서 보면 지방관청이 필요한 요역과 특산물을 백성에게 직접 징발하지 않고 돈을 거두어 일괄 매입하여 집행하는 관수관해(官收官解)에 가깝습니다.
당시 명나라에서는 대학사 계악(桂萼, ?-1531)이 1530년(嘉靖 9년) 10월에 토지세와 요역에 관한 징세제도 개혁방안을 처음 제기하여 호부(戶部)에서 실행방안을 논의하였고, 이듬해(嘉靖 10년) 3월 기유(己酉)일에 어사 부한신(傅漢臣, 1500-1561)이 일조편법(一條編法)을 실행하고 있다고 간략하게 보고하였습니다. 부한신의 보고를 보면 일조편법을 곧바로 실행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행과정에서 엎치락뒤치락하였고 장거정(張居正, 1525-1582)이 1581년에 일조편법(一條鞭法)을 전국에 확대시켜서 백성의 납세와 요역 행정을 개혁하고 재정적자를 개선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백성의 요역을 토지세에 귀속시켜서 결국에는 인두세를 폐지하고 재산세를 걷었습니다. 그래서 장거정은 안민(安民)이 백성의 질고(疾苦)를 제거하는 국가의 세무개혁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張居正, 「請蠲積逋以安民生疏」:“致理之要,惟在於安民;安民之道,在寨其疾苦而已.”) 주목할 것은 계악과 장거정 모두 개혁정치인으로서 사회과학을 연구하였고 주자학이나 양명학을 멀리하였다는 것입니다.
안민은 조선의 대동법과 명나라의 일조편법 둘의 공통된 재정사상이며 당시 동아시아의 세무와 재정에 관한 공통된 정책사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조선에서는 쌀(米)과 옷감(布)을 걷는 실물납부이었고 명나라는 은(銀)을 걷는 화폐경제라는 것이 서로 달랐습니다. 아무튼지 조선의 대동법과 명나라의 일조편법은 동아시아 국가의 공통적 세무개혁이었고 양국 모두 100년 넘는 기간을 걸려 결국에는 실행되었기에 백성들이 경제활동(생업)에서 좀 더 자유스러워졌습니다.
* 참고자료:
『明世宗肅皇帝實錄』,卷一百十八,
(嘉靖九年十月)戊寅,戶部議大學士桂萼所奏「任民考」,曰清圖,曰清籍,曰攢造,曰軍匠開戶,曰新增田地,曰寺觀田土,曰編審徭役。請上裁得旨,新增田地、寺觀田土,編審徭役如議,餘已之以免紛擾。
『桂文襄公奏議』,「任民考」:
武英殿大學士,臣桂萼謹奏︰
“臣聞:仁政必自經界始。今之經界,存乎版圖,自正統末,天下吏書陰壞版圖,諸色、田土,散漫參錯,難以檢討。姦民猾吏,並緣為奸。實佃者或申迯(逃)亡,無田者反遭包補,始一家或止一人二人,一里或止一戶二戶,畏無業有稅之苦而逃亡飛詭。及今五十餘年,則積一人至累一戶,積一戶至累一里者,往往如是,所謂積失人心,歲引月長,其不淪於土崩者幾希。”
『明世宗肅皇帝實錄』,卷一百二十三,
(嘉靖十年三月)“己酉,禦史傅漢臣言:”頃行一條編法,十甲丁糧總於一里,各里丁糧總於一州一縣,各州縣總於府,各府總於布政司,布政司通將一省丁糧均派一省徭役內,量除優免之數,每糧一石審銀若干,每丁審銀若干,斟酌繁簡,通融科派,造定冊籍,行令各州府縣永爲遵守,則徭役公平而無不均之歎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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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儒家) 또는 성리학의 국가재정정책에서 보면 안민(安民)의 뜻은 맹자의 애민(愛民)과 조금 다르며 안민이 애민보다 나아진 국가정책이었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애민은 국가가 경상지출 이외의 지출을 줄이는 ‘절용(節用)’을 강조하기 때문에 주로 재정수지를 맞추는 양입위출(量入爲出)의 소극적 재정정책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애민은 국가의 징세정책을 개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민은 절용이라는 재정정책을 넘어 한 걸음 더 나아가 백성이 일정한 소득 곧 항산(恒産)을 유지하여 경제생활을 안정시키고 부유하도록 경제성장(生財)에 주목한 적극적 재정정책입니다. 다시 말해 일부 지배층의 불합리한 수탈을 개혁하는 백성의 경제성장정책입니다.
따라서 안민정책은 애민정책처럼 세금을 수시로 쓸데없이 많이 걷는 국가의 징수정책을 대상으로 삼지 않고 오히려 백성이 생산한 재부(財富)를 일부 지배층이 사회경제적 관행으로 착취하는 지배층의 폐해를 제거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국가간섭의 행정정책이며 세무개혁입니다. 다시 말해 지배층의 불법적 관행이 제거되면 백성은 재용이 늘어서 넉넉한 경제상황(부선, 富羨)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납세(賦稅)의 정액(定額)을 체납 없이 납부할 수 있고 국가는 안정적으로 부세의 정액을 수취하여 재정을 안정시킬 수 있다는 뜻입니다. 또한 안민정책은 적극적 재정정책을 넘어 각종 사회윤리가 통행되도록 학교 교육을 보급하는 교육복지정책도 포함합니다.(『漢書、食貨志、上』:“此先王制土處民,富而敎之之大略也.”)
국가재정의 적자 여부에 따라 국가상태를 안(安)과 위(危)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안(安)은 흑자를 유지하는 재정상태의 국가유형이며 위(危)는 재정수지의 경계선에 있거나 재정고갈의 위망(危亡)한 국가유형입니다. (『禮記・王制』:“塚宰制國用.必於歲之杪.五穀皆入.然後制國用.用地小大.視年之豐耗.以三十年之通.制國用.量入以爲出.……喪祭.用不足曰暴.有餘曰浩.……祭.豐年不奢.凶年不儉.國無九年之蓄.曰不足.無六年之蓄.曰急.無三年之蓄.曰國非其國也.” 『荀子、強國』:“僅存之國危而後戚之.” 여기에서 “國非其國”은 “僅存之國”이며 재정의 危亡상태를 말합니다.)
조선시기 재정정책 가운데 애민(愛民)에 관하여 연구한 학자 손병규는 국가의 재정수입 안에서 재정지출을 유지하는 양입위출(量入爲出)의 재정정책 관점에서 합리적 해석을 제시하였습니다. 『논어』 “절용이애인(節用而愛人)”과 『주역』 “절이제도, 불상재이해민(節以制度, 不傷財以害民)”을 인용하여, 국가의 재정정책 관점에서 애민(愛民)은 수취 대상인 백성(民)의 재원(財源)을 파악하여 백성(民)의 납세능력보다 국가의 징수액을 낮게 장기간 유지시키는 것이고 절용(節用)은 국가가 경상지출 이외의 지출을 줄여 적자재정을 피하는 것이며, 절용과 애민을 반영한 이상적 재정운용이 양입위출(量入爲出)이며, 양입위출의 재정운영이 덕치(德治)라고 보았습니다. 조선왕조는 태조 원년(1392)에 요역과 토지세를 실제 조사하여 개정하는 위원회 곧 공부상정도감(貢賦詳定都監)을 설치하였고 재정이념은 절용과 애민을 반영한 국가 예산의 양입위출을 목표로 삼았던 유가의 경세사상이라고 합니다.(손병규, 『조선왕조 재정시스템의 재발견』, 역사비평사, 2008년, 69-70쪽.)
그런데 양입위출에 관하여 서한시기(西漢, 기원전 202년-기원후 8년) 문헌에 나타난 중국고대의 재정정책을 보면, 해마다 수취한 곡물의 수량에 따라 해마다 재정지출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대체로 30년마다 경작지의 전체면적 변동과 매년 풍년과 흉년(豊凶) 정도를 통계 내서 평균액수를 1년의 재정지출액으로 결정하는 국가회계제도이었습니다.(『禮記・王制』:“塚宰制國用,必於歲之杪,五穀皆入,然後制國用. 用地小大,視年之豐耗,以三十年之通制國用,量入以爲出.”) 또한 양입위출의 국가회계정책에는 12년 경기변동주기와 곡물가격의 일정범위 유지(常平)라는 가격정책도 반영하였습니다. 12년마다 변동하는 빗물(雨水量)에 따라 곡물생산량의 풍흉(豊凶)이 결정되어 경기변동이 발생한다는 12년 경기변동주기의 기본관점을 반영하였다. 따라서 국가는 해마다 곡물의 풍기(豊饑)에 따라 국가의 곡물 수매와 방출(糶糴) 비율을 결정하여 시장에 방출된 곡물의 화폐가격이 예를 들어 1섬(石)에 30-80전(錢) 범위 안에서 유지시켜서 곡물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 피해 입지 않도록 하는 곡물가격의 상평(常平) 유지라는 물가정책도 담겨있습니다. (『管子・輕重』:"民有餘(穀)則(幣)輕之,故人君歛之以輕;民不足則重之,故人君散之以重。" 『漢書・食貨志』:“李悝曰:"糶甚貴傷人,甚賤傷農。人傷則離散,農傷則國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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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 이이 선생(1536-1584)은 안민(安民) 개혁의 구체적 방법에 관하여 여러 조목을 제시하였다.
30살(1565)에는 사간원 관원들과 상의하여 올린 개혁방안 「간원진시사소(諫院陳時事疏)」에서 개혁방안 4개 조목을 제시하였습니다.
첫째, “일반적인 폐해와 백성들의 공통된 고통을 묻는다.(詢弊瘼)”
둘째, “세금과 요역 때문에 가족이 흩어지지 않도록 국가와 사회의 기본단위가 되는 가족을 유지시킨다.(寬一族)”
셋째, “유능하고 인자한 지방행정관원을 선발한다.(選外官)”
넷째, “억울한 소송과 재판을 공정하게 한다.(平獄訟)”
33살(1568) 가을에 북경에 사신 갔다가 겨울에 돌아왔고 이듬해 34살(1569) 9월에는 개혁정책의 대강을 설명한 「동호문답(東湖問答)」을 조정에 올렸다. 군주, 신하, 학술, 현재 국가상황, 백성의 생활 안정, 교육 등 11편을 서술하였다. 율곡 선생은 중국 북경에 다녀온 뒤에 조선의 국가상황을 깊이 생각하여 개혁방안을 올렸다. 그는 고려시기와 조선 전기의 전통적 사회과학을 계승하고 원명시기 중국의 사회과학을 참고하여 개혁방안을 설계하였다.
그 가운데 백성의 경제생활을 안정시키자는 안민 방안((論安民之術)에서는 개혁방안 5개 조목을 올렸다.
첫째, “세금과 요역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간 사람(流戶)와 모두 죽어서 없어진 사람(絶戶)의 세금과 요역을 가족들이나 이웃사람들에게 전가시키지 말라.(一族切鄰)”
---국가와 사회의 기본단위 가족을 비롯하여 가족공동체와 마을공동체의 붕괴를 막자.
둘째, “각 지역 토산물의 진상을 줄이자.(進上煩重)”
---지방관원들이 각가지 핑계를 대고 토산물을 과도하게 징발하는 폐해를 막자. 실제로는 지방관원들의 가렴주구와 뇌물 횡행을 막자.
셋째, “지방정부가 특산물을 중앙정부에 납부할 때마다 관원들이 각가지 핑계를 대고 특산물을 받지 않는 폐해를 막자.(貢物防納)”
---조선시기 간사한 관원과 불량한 상인들이 많은 경제적 이익을 얻었던 것은 특산물 납부이었습니다. 지방관청은 물론이고 특히 서울에서 심각하였다고 합니다.
넷째, “군역(軍役)과 요역(徭役)의 불균등을 개혁하자.(役事不均)”
다섯째, “아전들이 가렴주구하는 횡포를 개혁하자.(吏胥誅求)”
---전통시기에 일반행정은 관원과 아전(胥吏) 둘이 실행하였습니다. 관원들은 문학(詩文)이나 철학(性理學)에 관심을 두었기 때문에 일반행정에는 익숙하지 않아 대체로 업무를 아전들에게 맡겼고, 아전들은 국가에서 일정한 봉급을 받지 않는 요역(徭役)이었기 때문에 다만 백성들에게서 행정수수료를 거두어 생활비에 사용하였습니다. 따라서 아전들은 백성들을 가렴주구할 수밖에 없었고, 심지어 중앙정부의 아전들과 지방정부의 아전들은 서로 결탁하여 관원들을 억압하는 폐해를 낳았습니다. 중국에서는 당나라를 비롯하여 송나라,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 모두 그랬습니다. 따라서 명나라 말기에 고염무(顧炎武, 1613-1682)는 명나라가 서리의 횡포 때문에 멸망하였다고 비판하였습니다.
39살(1574)에는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올려 개혁방안 5개 조목을 제시하였습니다.
첫째, “국가정책의 최고 책임자 임금이 마음을 열고 관원과 백성들의 여론 요망사항을 듣고 정책에 반영하여야 한다.(開誠心以得羣下之情)”
둘째, “국가의 필요 물품을 납부하는 방법을 개혁하여 일부 지배층이 폭리를 얻는 것을 개혁하자.(改貢案以除暴斂之害)”
셋째, “국가와 왕실이 재정을 아껴 쓰고 민간의 사치풍조를 억압하자.(崇節儉以革奢侈之風)”
넷째, “지방에서 관노비를 뽑아 서울 중앙정부 각 기관에 근무시키는 제도를 개혁하여 관노비와 사노비의 고통을 줄이자.(變選上以救公賤之苦)”
---이것은 중요한 경제정책 개혁입니다. 노비제도를 개혁하자는 것입니다. 노비의 의무 요역을 완화하여 중앙정부가 필요한 요역에 대하여 돈을 주고 사람을 고용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노비의 의무 요역을 완화시킨 만큼 노동시장이 활성화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명나라는 초기에는 중앙정부의 필요에 따라 수공업자(工匠)을 5종으로 편성하여 수도 서울에 와서 근무하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소위 공장윤반제(工匠輪班制)입니다. 홍무 26년(1393)에는 장인이 대략 232,089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뒤에는 장인들의 요역을 상당히 완화시켜서 이들이 상품을 만들어 시장에 공급할 수 있도록 개혁하였습니다. 그래서 명나라 말기에는 시장이 활성화가 촉진되었습니다.
다섯째, 군정을 개혁하여 국내와 국경의 방어를 강화시키자.(改軍政以固內外之防)
40살(1575)에 편찬한 『성학집요(聖學輯要)』에서는 개혁방안 3개 조목을 올렸습니다.
첫째, 세금을 경감하자.(薄稅斂)
둘째, 요역을 경감하자.(輕徭役)
셋째, 형벌을 신중하고 완화하자.(愼刑罰)
48살(1583)에는 「계진시무육조(啓陳時務六條)」을 올렸습니다.
첫째, 도덕적 행실이 높은 관원(賢)과 행정능력이 뛰어난 관원(能)을 선발하여 임용하자.(任賢能)
둘째, 군대를 양성하자.(養軍民)
셋째, 국가의 흑자예산을 운영하자.(足財用)
넷째, 국경방어를 강화시키자(固藩屏)
다섯째, 중요한 전쟁물자를 준비하자.(備戰馬)
여섯째, 교육을 강화하자(明敎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