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치올림픽 개막식서 과시한 러시아의 文學을 향한 자부심… 푸시킨·톨스토이·도스토옙스키·체호프·나보코프에 이르기까지 한국인에게도 친숙한 5대 文豪… 러시아 문화의 精髓를 보여줘
박해현 문학전문기자
'눈은 온 지상을 휩쓴다/ 끝에서 끝으로'.
러시아 문학을 떠올릴 때마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시 '겨울밤'이 새록새록 되살아난다. 광활한 러시아 땅을 구석구석 뒤덮는 눈보라. 이어서 '테이블 위에 촛불이 탄다/ 촛불이 탄다'는 시행을 따라간다. 눈을 감으면 영화 '닥터 지바고'의 한 장면이 재현된다. 지바고가 얼음의 집에서 언 손을 입김으로 녹이며 시를 사각사각 써내려간다. 촛불이 어둠을 사르는 가운데 창 밖에선 늑대가 달을 향해 울부짖는다. 이렇게 러시아 문학은 젊은 날의 낭만적 동경(憧憬)이 담긴 설국(雪國)을 떠올리게 한다.
소설가 김승옥은 단편 '다산성(多産性)'에서 러시아인의 작별 인사말 '다스비다니야'로 환상을 빚어낸다. 무대는 눈 내리는 겨울밤 러시아의 어느 역. 털외투를 입은 여자가 기차에 오른다. 자리에 앉은 그녀는 증기로 얼어붙은 유리창을 손바닥으로 문지른다. 바깥에는 한 남자가 노란 등불을 들고 서 있다. 여자는 남자를 보며 '다스비다니야'를 속삭인다. 남자가 등불을 휘두르며 외치지만 차가운 공중에 얼어붙어 들리지 않는다. 남자의 애절한 외침에 아랑곳하지 않고 기차는 눈 오는 밤 지평선 너머로 달려가고….
소치 동계올림픽 개막식이 러시아 문학을 향한 향수를 다시금 뒤흔들었다. 러시아 알파벳 숫자에 맞춰 위인들이 하나씩 소개됐다. 푸시킨,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체호프, 나보코프가 5대 문호(文豪)로 등장했다. 작곡가 차이콥스키, 화가 칸딘스키, 영화감독 예이젠시테인도 소개됐지만 문학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러시아 문화의 밑바탕은 문학이라는 자부심이 역력히 느껴졌다.
푸시킨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고 한 시로 유명하다. 어릴 적 이발소에 걸린 그림과 함께 읽곤 했다. 근대 이후 수많은 외국 시인이 우리말로 번역됐다. 그러나 우리네 각박한 삶을 위로하는 관용구를 남긴 이는 푸시킨뿐이 아닐까. 모스크바를 다녀온 소설가 김주영은 "레닌 동상엔 조화가 놓였지만 푸시킨 동상엔 생화가 끊이지 않더라"고 전했다. 그런 푸시킨 동상이 지난해 푸틴 대통령 방한에 맞춰 서울 소공동에도 세워졌다. 러시아작가동맹이 비용을 대고 우리가 장소를 제공했다. 문학을 향한 러시아의 열정을 서울 한복판에 우뚝 세운 것이다.
세계 문학사에서 손꼽히는 소설은 대부분 첫 문장에서부터 독자를 사로잡는다. 톨스토이의 대표작 '안나 카레니나' 첫 문장은 세계적 격언이 됐다.'행복한 가정은 서로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기 다른 이유로 불행하다.' 행복한 가정의 조건은 가족 구성원의 사랑과 건강, 궁핍하지 않은 생활, 원만한 대인 관계에 이르기까지 여럿이다. 다 충족된 가정은 엇비슷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대부분 한두 가지 이루지 못한 조건이 불행의 씨앗이 된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세계문학사에서 가장 뛰어난 소설"이라고 했다. 이 소설의 백미(白眉)는 '대심문관(大審問官)' 부분이다. 예수가 16세기 스페인에 환생했다는 종교 우화다. 이단자(異端者)를 화형에 처하던 종교 재판관(대심문관)이 되살아난 예수를 감옥에 집어넣는다. 그는 예수와 단둘이서 만나 "너는 인간의 자유를 지배하는 대신 그 자유를 배가시켜 인간 영혼의 왕국에 영원한 고통의 짐을 지워 주었다"고 비난한다. 인간은 빵만 있으면 행복할 텐데 예수가 자유를 안겨준 탓에 유혹에 휩싸이거나 쓸데없이 초월을 고민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가 나약한 인간을 엄하게 다스려 질서를 잡아왔다는 주장이다. 교회는 돌아온 예수가 반갑지 않다. 결국 예수는 대심문관에게 입을 맞춘 뒤 홀연히 떠난다.
지난해 노벨문학상은 캐나다 작가 앨리스 먼로에게 돌아갔다. 단편소설을 주로 쓴 먼로는 '현대의 안톤 체호프'으로 불려왔다. 체호프는 서양 단편소설의 틀을 완성한 작가로 손꼽힌다. 단편은 풍자와 재치, 아이러니를 활용해 뜻밖의 반전(反轉)으로 인생의 단면을 포착한다.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가 엄숙한 문학을 보여줬다면, 체호프는 인간 희극을 형상화하는 단편의 대가였다. 일본 작가 하루키는 체호프의 말을 자주 인용한다. 체호프는 "이야기 속에 권총이 나왔으면 그건 반드시 발사돼야 한다"고 했다. 필연성이 없는 소도구를 이야기에 등장시키지 말라는 소리다.
소치올림픽 개막식에선 '롤리타'의 작가 나보코프가 러시아 5대 문호에 들어갔다. 여러모로 놀라운 일이다. 나보코프는 러시아혁명 이후 유럽으로 망명했다. 그는 '롤리타'를 비롯해 영어로 쓴 소설 덕분에 세계적 명성을 누렸다. 분명히 20세기 영미 문학사에 속하는 작가다. 그런데 소치올림픽위원회는 나보코프까지 껴안아 러시아 문학의 두께를 과시했다. '롤리타'의 도입부는 이렇다. '롤리타,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이여. 나의 죄, 나의 영혼이여. 롤―리―타. 혀끝이 입천장을 따라 세 걸음 걷다가 세 걸음째에 앞니를 가볍게 건드린다. 롤―리―타.' 저 세상에서 나보코프가 개막식을 봤다면 아마 '러―시―아'라고 웅얼거리지 않았을까.
첫댓글 지기님 감사드립니다
찾아보기 힘든 정보를 늘 제공해 주셔서 많은 도움이 됩니다
새해 賞복 넘치시고 꿈 이루시며 건강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