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 31,31-34; 히브 5,7-9; 요한 12,20-33
+ 찬미 예수님
한 주간 동안 안녕하셨어요? 어느새 사순 제5주일이 되었습니다. 이제 다음 주일이 주님 수난 성지주일이고, 그다음 주일이 주님 부활 대축일입니다.
사순시기 동안 구역 미사를 드리면서, 은혜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어떤 구역은 성당에서, 또 어떤 구역은 댁에서 미사를 드리고 모임을 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 이후로 ‘모이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고 낯설게 된 상황에서, 이를 회복하려고 노력해 주시는 정성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교회’를 그리스어로 ‘에클레시아’라고 하는데요, 이는 ‘모임’ 또는 ‘부르심 받은 이들의 모임’이라는 뜻입니다. 즉 ‘교회’는 ‘모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통하지 않고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언뜻, ‘나 혼자 성경 읽고 기도하고, 혼자 미사 참례하면서 신앙생활 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더라도 이미 교회를 통해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 자체가 교회 공동체 안에서 탄생했고, 미사와 성사, 내가 고백하는 신앙도 교회를 통해서 모양을 갖추고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소중한, 살아 있는 신앙의 유산을 우리에게 전해 준 교회 공동체에 감사드립니다. 더불어, 바로 내 옆에 계신 분, 내 앞에, 내 뒤에 계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이분들이 나와 함께 교회 공동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와 함께 미사를 드리는 이분들이 계시지 않는다면, 나 혼자만을 위한 미사는 드려질 수 없습니다.
저는 요즘에 ‘모태 신앙’에 대해 생각해 보는데요, ‘모태 신앙’ 아시지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신자인 ‘모태 신앙’ 말고요, ‘이것 좀 해 봅시다.’ ‘못해요’ ‘같이 좀 합시다.’ ‘못해요’ 하고 자꾸만 ‘못해’, ‘못해’하고 대답하는 신앙입니다.
다른 본당 신부들 얘기를 들어보면, 봉사 좀 해 달라고 부탁드리면 ‘못한다’고들 하셔서 어렵다고 아우성인데, 감사하게도 우리 본당의 많은 교우분들께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여러 봉사 직분을 희생과 사랑으로 맡아 주고 계십니다. 깊이 감사드립니다.
저는 4월부터 실시하는 본당 ‘거룩한 독서’ 프로그램에 많은 분들이 함께 해 주십사고 제안을 드렸습니다. 지난 1년간, 제가 앞으로 우리 본당 교우들께 어떤 도움을 드릴 수 있을까 기도하면서 하느님 뜻을 여쭈었고, 결론으로 내린 것이, 앞으로 3년간 교우들과 함께 성경을 읽는다는 것입니다.
지난 2천 년간 과연 이랬던 적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오늘날 성경 말씀에 대한 가톨릭 신자들의 관심은 매우 뜨겁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말씀으로 이끌어 주시는 이 은혜로운 시기에, 본당 공동체가 함께 성경을 읽고, 함께 기도할 수 있다면, 그것이 제가 성사 집전과 함께 교우 여러분들께 드리는 최상의 봉사라 생각합니다.
성경 통독을 혼자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2주에 한 번 모여서, 제가 안내 강의를 하고, 강의 후에 나눔을 하는 것이 ‘거룩한 독서’ 프로그램의 골자입니다.
‘강의 듣는 것’은 괜찮은데, ‘나눔’이 부담스럽다고, 그냥 강의만 들으면 안 되느냐고 물으시는 분들이 계신데요, 저는 이렇게 대답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안 부담스럽나요?’
저도 무척 부담스럽습니다. 제가 강의를 하지 않고 외부 강사를 모셔 오려고도 생각했는데, 그러면 제가 ‘못해 신앙인’이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강의는, 각자의 거룩한 독서와 나눔에 도움을 드리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강의보다는 나눔을 통해 더 큰 유익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드립니다. 나눔은 원하시는 분들과 같은 조에 들어가실 수 있는데요, 이 나눔조는 매학기 새로 편성될 예정입니다.
완벽하게 하지 않으셔도 괜찮고, 중간중간 빠지셔도 괜찮습니다. 다만, ‘저는 성경을 잘 몰라서 나눔은 못 해요’라는 생각만큼은 안 하셔도 됩니다. “안다는 사람과 똑똑하다는 사람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철부지 어린이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는” 아버지의 이끄심에 맡기시면 좋겠습니다.
지금까지는 나눔에 함께 하실 수 있는 분들을 대상으로 말씀드렸는데요, 함께 하시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신 분들은, 소외감 느끼지 마시고, 강의를 영상으로 올려 드리고, 진도표를 주보에 연재해 드릴 테니까, 진도에 맞추어, 혹은 각자의 진도에 따라 성경 통독을 하셔도 괜찮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말씀을 가까이하는, 말씀에 중심을 놓는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아시겠죠?
오늘 복음에서 그리스 사람 몇이 “예수님을 뵙고 싶다”고 필립보에게 청합니다. 안드레아와 필립보가 예수님께 이 말을 전하자,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들을 불러오라든가 하시는 말씀 없이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면서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좀 쌩뚱맞아 보이는데요,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백성을 모으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는데, 그들은 유다인과 이방인입니다. 오늘 복음의 바로 앞 단락에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유다인들은 환영했습니다. 그런데 뒤이어 이방인인 그리스인들이 ‘예수님을 뵙고 싶다’고 말하는데, 이는 ‘얼굴 한번 보자’는 얘기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싶다’고 청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방인들이 당신께 대한 믿음을 갖기 시작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속의 권력은 높은 자리에 앉음으로 인해 영광스럽게 될지 모르지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높이 달리심으로 인해 영광스럽게 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제 제 마음이 산란합니다.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합니까? ‘아버지, 이때를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하고 말할까요?”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복음서들과는 달리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겟세마니 동산에서 고뇌하시는 장면이 나오지 않는데요, 그래서 오늘 복음이 요한복음의 겟세마니 장면이라고들 이야기합니다.
겟세마니에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라고 기도하시듯, 오늘 복음에서는 “<그러나> 저는 바로 이때를 위하여 온 것입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라고 기도하십니다.
오늘 2독서에서 히브리서는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 주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들어주신 기도는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라는 기도이고, 기도에 대한 응답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죽음을 통한 부활입니다. 언제나, 죽음이 최종적인 응답은 아닙니다.
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하여 “새 계약을 맺으시겠다”고 말씀하시는데요,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인용하셨습니다. “나는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라는 독서의 말씀은,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루카 22,20)라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이어지고, 우리가 봉헌하고 있는 이 미사를 통해 결정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제대 뒤에 예수님의 십자고상이 있습니다. 십자가에 계신 예수님을 한번 바라보시겠어요? 땅에서 들어 올려지신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당신께 이끌어 들이십니다. 우리는 그 이끄심에 이끌려 여기에 와 있습니다. 나를 불러 주신 예수님께 감사드리고, 그 부르심을 알아듣고 이 자리에 나와 있는 나 자신에게도 감사해야겠습니다.
내 가족과 내가 사랑하는 사람 중에는 아직 부르심에 응답하지 못한 분들도 있고, 또 잠시 쉬고 계신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뵙고 싶다’는 청만으로도 당신께서 영광 받으실 때가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분들의 마음 안에 있는, 주님을 뵙고 싶은 마음, 주님께 대한 이끌림, 진리에 대한 갈망이 열매 맺기를 기도드립니다. 우리와 함께 교회를 이루고 있는 세상의 모든 분들을 위해서도 기도드립니다.
“이제 이 세상은 심판을 받는다.
이제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밖으로 쫓겨날 것이다.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