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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신앙의 신비, 기도] (14) 교회 시대의 기도(「가톨릭 교회 교리서」 2623~2649항)
다섯 가지 기도 중 찬미와 흠숭
개관(2623~2625항)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오순절에 제자들이 모여 기도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한 성령께서 제자들 위에 내려오십니다. 성령께서는 교회를 가르치시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되새기게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또한 교회가 기도 생활로 성장하게 하십니다.
이는 예루살렘의 첫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모습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이렇게 전합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사도 2,42). 교리서는 이것이 “교회가 드리는 기도의 전형적인 모습”(2624항)이라고 설명합니다. 곧 교회의 기도는 △ 사도들의 신앙에 근거를 두고(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 사랑으로써 그 진실성이 입증되고(친교를 이루며) △ 성체성사로써(빵을 떼어 나눔으로써) 양육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들은 이와 함께 성경에 나오는 기도들, 특별히 시편의 기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된 것을 근거로 해, 이 시편들을 현재 상황에 따라 새롭게 이해하고 자기 것으로 삼아 바칩니다. 구약의 시편 기도에서 살펴봤듯이, 시편은 “신분이나 시대를 초월하여 누구든지 바칠 수 있는 진실한 기도”(2588항)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교회를 온전한 진리로 인도하시는 성령께서는 또 “교회 생활과 성사와 교회의 사명에 적용하는 그리스도의 헤아릴 수 없는 신비를 표현하게 될 새로운 기도문들이 생겨나게 하십니다”(2625항). 기도문들은 전례의 영적 전통 안에서 발전해 나가는데 신약성경을 포함해 정경(正經)에 들어 있는 기도문들은 그리스도 기도의 규범이 됩니다.
교리서는 이 기도들을 크게 다섯 가지로 구분해 설명합니다. 찬미와 흠숭, 청원, 전구, 감사, 찬양 기도가 그것입니다. 차례로 살펴봅니다.
Ⅰ. 찬미와 흠숭(2626~2628항)
찬미는 사랑으로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과 사랑이신 하느님을 향하는 인간의 만남입니다. 이 찬미 기도는 “그리스도인 기도의 기본 움직임을 드러낸다”(2626항)고 교리서는 설명합니다. “찬미 안에서 선물을 주시는 하느님과 이 선물을 받아들이는 인간이 서로 대화하며 결합하기”(2626항) 때문입니다.
그래서 찬미 기도는 “하느님의 선물에 대한 인간의 응답”입니다. “하느님께서 강복해 주시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은 그에 대한 보답으로 모든 축복의 근원이신 하느님께 찬미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2626항).
찬미 기도가 기도의 기본 움직임을 드러낸다고 했는데, 이 움직임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성부께 올라가는 움직임”입니다. 이것이 찬미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부에게서 내려오시는 성령의 은혜”입니다(2627항). 이는 강복입니다. 말하자면 성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강복하셨기에 우리는 성부를 찬미하는 것입니다.
흠숭은 “창조주 앞에서 피조물임을 깨달은 인간이 취하는 기본 자세”로 “우리를 지어내신 주님의 위대함”과 “우리를 악에서 구해 내시는 구세주의 전능”을 드높이는 것입니다(2628항). 흠숭은 하느님 앞에서 인간이 마음을 쏟아 꿇어 엎드리는 것이며, 존경 어린 침묵을 지키는 것입니다.
교리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지극히 거룩하시며 최고의 사랑을 받으셔야 할 하느님께 대한 흠숭은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우리의 간청에 대한 확신을 심어 준다”(2628항). [평화신문, 2016년 9월 4일, 이창훈 기자]
[위대한 신앙의 신비, 기도] (15) 교회 시대의 기도(「가톨릭 교회 교리서」 2623~2649항)
청원기도에는 순서가 있다
II. 청원 기도(2629~2633항)
청원 기도는 글자 그대로 원하는 바를 요청하는 기도입니다. 청원 기도를 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우리가 하느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깨닫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이 누구이신지 어떤 분이신지를 알지 못하면서 청원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청원 기도와 관련해 교리서가 설명하는 다음의 내용은 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피조물인 우리는 우리 자신의 기원(起源)도 아니고, 우리가 당하는 역경을 우리 마음대로 없앨 수 있는 주인도 아니며, 우리의 궁극적 목적도 아니다. 도리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아버지께 등을 돌린 죄인임을 알고 있다. 청원은 이미 아버지께로 돌아섬을 의미한다”(2629항).
그래서 청원 기도의 첫 단계는 “용서를 청하는 것”(2631항)입니다. 루카 복음 18장 13절에 나오는 죄 많은 세리의 기도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용서를 청하는 것은 순수한 기도의 전제 조건입니다. “겸손하고 신뢰심을 가져야만 우리는, 아버지이신 하느님과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을 수 있고 다른 사람들과도 친교를 나눠. 다시 빛 가운데서 살 수 있기”(2631항)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단에 예물을 바치기 전에 먼저 용서를 청하고 화해하라고 하셨듯이(마태 5,23-24 참조), 용서를 청하는 행위는 성찬 전례에 앞서 이뤄져야 합니다.
청원 기도라고 하면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청하는 기도라고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기도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의 청원은 ‘하느님 나라’에 집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에서 먼저 아버지의 나라가 오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치십니다(마태 6,10 참조). 교리서는 하느님 나라를 바라는 이 청원에 “순서가 있다”고 밝힙니다 “먼저 하느님 나라를 청하고, 다음에는 하느님 나라를 맞이하고 그 나라의 도래에 협력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을 청해야 한다”(2632항)는 것입니다.
교회의 시대에, 하느님 나라가 오는 데에 협력하는 일은 교회의 사명입니다. 교회의 사명이라는 말은 또한 교회를 이루는 모든 그리스도 신자들의 사명이라는 말입니다. 이 협력은 행동으로만이 아니라 기도에서도 드러나야 합니다. 곧 “세례받은 모든 사람은 기도를 통해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위해서 노력해야”(2632항)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오도록 협력한다는 것은 또한 하느님 사랑에 참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사랑으로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느님 사랑에 참여하게 될 때 다른 필요한 모든 것이 또한 청원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청원 기도를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청원 기도의 첫 단계는 용서를 청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를 구하는 것입니다. 단지 하느님 나라가 오기만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가 오도록 협력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필요한 다른 모든 것을 청하는 것입니다. 청원 기도를 바칠 때 예수님의 이 말씀을 늘 떠올립시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 [평화신문, 2016년 9월 11일, 이창훈 기자]
[위대한 신앙의 신비, 기도] (16) 교회 시대의 기도 (「가톨릭 교회 교리서」 2623~2649항)
타인 위해 청원하며, 감사하고 찬양
Ⅲ. 전구(2634~2636항)
전구(轉求)는 다른 사람을 위해 청원하는 기도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청원하는 대표적인 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해 주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로마 8,34)라고 로마 신자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해, 특히 죄인들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드리는 전구자”(2634항)이십니다. 또 성령께서도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로마 8,26).
다른 사람을 위해 청원하는 전구는 아브라함 이래로 “자비로우신 하느님과 일치된 인간 마음의 특징”(2635항)입니다. 교회 시대에 와서 그리스도인의 전구는 △ 그리스도의 기도에 참여하는 것이며 △ 성인들의 통공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통공(通功)’이란 ‘공로가 통한다’는 뜻으로 내가 쌓은 공로를 내 것으로 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돌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아픈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전구)은 통공 교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전구에서, 기도하는 사람은 제 실속만 차리지 않고 남의 이익도 돌봅니다. 또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을 위해서까지도 기도합니다. 자신을 못 박은 이들을 위한 예수님의 십자가 위 기도(루카 23,24 참조)와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스테파노가 바친 기도(사도 7,60)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의 전구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을 위해, 박해하는 사람들과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도. 원수들을 위해서도 전구합니다(2647항; 1티모 2,1; 로마 12,14; 로마 10,1 참조).
Ⅳ. 감사 기도(2637~2638항)
“감사 행위는 교회의 기도를 특징짓는다”(2637항)고 교리서는 설명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원의 희생 제사인 성찬례는 또한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리스도를 통해 구속하신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와 찬미의 제사이기도 합니다(1359항 참조). 그리고 이 성찬례는 교회 생활의 중심이요 정점입니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례헌장」 10항 참조).
그래서 교리서는 “교회는 감사제인 성찬례를 거행하여, 자신의 정체를 더욱더 분명하게 드러내고, 자신의 본질에 한층 더 가까워진다”(2637항)고 밝힙니다. 사실,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가 없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또한 감사 기도를 바칠 때 언제나 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바칩니다. 하느님께서는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만물을 창조하셨고, 그리스도를 통해 만물을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감사 기도는 청원이 받아들여졌을 때만 바치는 기도가 아닙니다. “모든 기쁨과 모든 슬픔, 모든 사건과 모든 필요가 다 감사를 드리게 하는 동기가 될 수 있습니다”(2648항). 이와 관련,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18).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깨어 있으십시오”(콜로 4,2).
Ⅴ. 찬양 기도(2639~2643항)
“찬양은 하느님께서 진정 하느님이심을 한결 더 직접적으로 인정하는 기도의 형태”, 말하자면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하느님을 기리는 것”(2639항)입니다. 하느님이 어떤 일을 행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이시기에 그분께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위대한 신앙의 신비, 기도] (17) 기도의 전통(「가톨릭 교회 교리서」 2650~2696항)
기도 원천에 이르는 네 갈래 길
이번 호부터는 교리서 제4편의 제2장 기도의 전통을 살펴봅니다. 교리서는 기도라는 내적 충동이 자연 발생적으로 분출해서 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말하자면 기도하면 기도하고 싶은 마음(원의)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성경에서 기도를 알려 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지적합니다.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거죠. 이런 측면에서 그리스도교 기도 전통의 관점에서 기도를 살펴보는 것은 중요합니다.
기도의 원천 ①
그리스도 신자들의 삶의 중심이자 원천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우리에게 샘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통해 우리가 샘이신 당신에게서 생명의 물을 얻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다. 말하자면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의 샘에 이르는 수로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기도의 전통에서 기도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는 그 수로는 크게 네 가지로 나뉜다고 교리서는 밝힙니다. 하느님 말씀과 교회의 전례, 향주덕(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덕), 그리고 ‘오늘’이라는 특별한 시간입니다. 이 가운데 두 가지만 우선 살펴봅니다.
하느님 말씀(2653~2654항)
교회는 “모든 신자 특히 수도자들이 성경을 자주 읽음으로써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을 얻도록 강력하고 각별하게 권고합니다.” 이와 함께 “성경을 읽을 때는 하느님과 인간의 대화가 이뤄지도록 기도가 따라야 함을 명심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는 하느님께 말씀을 드리는 것이고,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읽을 때에는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이기 때문”입니다(계시헌장 25항; 교리서 2653항).
예수님께서는 기도와 관련해서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마태 7,7).
교회 영성의 교부들은 이 말씀을 풀이하면서 기도 중에 하느님 말씀으로 들어 높여진 마음가짐을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읽으면서 찾으십시오. 그러면 묵상을 통해서 발견할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두드리십시오. 그러면 관상을 통해서 열릴 것입니다”(2654항).
앞으로 살펴볼 기회가 있겠지만 여기서 묵상과 관상의 차이를 간단히 알아보는 것도 괜찮을 듯합니다. 위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묵상은 기도하는 사람의 의지가 발동합니다. 그러나 관상은 나의 의지가 발동하기보다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의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열어 주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전례(2655항)
하느님께 바치는 교회의 공적 예배인 전례는 “성령 안에서 성부께 드리는 그리스도의 기도에 참여하는 것”(1073항)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리스도인의 모든 기도는 전례에서 시작되고 전례로 완성된다”고 가르칩니다. 교회의 성사 전례를 통해 구원의 신비를 선포하고 구현하고 전달하는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명은 신자들의 기도하는 마음 안에 계속됩니다.
신자들은 전례가 거행되는 동안만이 아니라 전례가 끝난 후에도 기도를 통해서 전례를 내면화합니다. 전례는 교회의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성무일도, 곧 시간전례까지도 비록 골방에서 바친다 하더라도 그 기도는 언제나 교회의 기도이며, 이 기도를 통해 신자들은 거룩하신 성삼위와 일치를 이룹니다. [평화신문, 2016년 10월 2일, 이창훈 기자]
[위대한 신앙의 신비, 기도] (18) 기도의 전통 (「가톨릭 교회 교리서」 2650~2696항)
믿음 · 희망 · 사랑을 바탕으로 오늘 기도하라
기도의 원천 ②
향주덕(2656~2658항)
주님을 향하는 덕이라는 뜻의 향주덕은 또한 대신덕(對神德)이라고도 합니다. 믿음(신덕), 희망(망덕), 사랑(애덕) 이 셋을 향주덕이라고 부르지요.
믿음을 갖는다는 것,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인생을 보람있게 살려면 가족도 있고 돈도 있고 명예도 있고 봉사도 하고 한편으로는 믿음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을 내 삶의 기반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날아봤자 부처님 손바닥 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신자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이런 믿음의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손오공처럼 필요할 때만 부처님을 찾고 그렇지 않을 때는 부처님 손바닥에서 달아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께 전폭적으로 귀의함으로써, 하느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그분께 맡겨드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리서는 이렇게 제시합니다. “우리는 신앙의 좁은 문을 통하여…기도 안으로 들어간다.…우리가 찾고 소망하는 것은 주님의 얼굴이며, 우리가 귀담아듣고 간직하고자 하는 것은 주님의 말씀이다”(2656항).
희망의 덕은 그리스도의 약속을 신뢰하는 가운데 성령의 은총의 도움으로 참된 행복을 주는 하늘나라와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게 하는 덕입니다(교리서 1817항 참조).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희망을 갖고 기도할 것”을 가르치십니다. 구약성경 시편은 이를 놀랍게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님께 바라고 바랐더니 나에게 몸을 굽히시고 내 외치는 소리를 들으셨네”(시편 40,2).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희망과 사랑의 관계를 잘 설명합니다.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 5,5). 특별히 전례 생활의 기도를 통해 우리는 이 사랑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을 받은 우리는 마치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하느님께서 베푸신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은 기도의 원천”입니다. 또 사랑에서 우러나는 기도를 하는 이는 “기도의 정상”에 도달합니다(2658항).
오늘(2659~2660항)
우리는 특별한 순간에 기도를 배웁니다. 예를 들면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리고 주님의 파스카 신비(성찬례)에 참여할 때에 기도를 드리며 기도를 배우지요. 하지만 매일매일의 사건 속에서, 바로 ‘오늘’이 순간에도 언제나 기도를 샘솟게 하는 주님의 성령을 받습니다. 교리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시간은 아버지의 손안에 있다. 우리는 지금 아버지를 만난다. 어제도 아니요, 내일도 아닌, 바로 오늘 만나는 것이다”(2659항). 이럴 때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요? 시편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 오늘 너희가 그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너희는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마라”(시편 95,7ㄷ-85ㄱ).
날마다, 순간마다 일어나는 일들 안에서 기도한다는 것은 “하느님 나라의 비밀 가운데 하나”라고 교리서는 설명합니다. 정의와 평화의 하느님 나라가 도래하도록 기도하는 것도 좋고 마땅한 일이지만, “일상의 사소한 상황들에 기도가 배어들게 하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2660항). “하느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
‘오늘’은 우리 신앙인들에게 삶의 매 순간이 기도가 되도록 하라고 일깨웁니다. [평화신문, 2016년 10월 9일, 이창훈 기자]
[위대한 신앙의 신비, 기도] (19) 기도의 전통 (「가톨릭 교회 교리서」 2650~2696항)
기도의 길 끝에는 하느님이
기도의 길 ① (2663~2672항)
교회는 살아 있는 기도 전통 안에서, 역사적 사회적 상황에 따라 기도의 언어를 신자들에게 제시합니다. 기도의 언어란 기도를 표현하는 것으로, 말과 음악과 동작과 성화같은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기도의 표현 곧 기도의 길들이 사도들의 신앙 전통에 충실한지를 판단하는 것은 “교도권의 권한”이며, 이 기도의 길들에 담긴 의미를 설명하는 것은 “사목자들과 교리교사들의 일”입니다. 한 가지 유념해야 할 것은 이 기도의 길들이 “언제나 예수그리스도와 관련돼 있다”는 것입니다(2663항).
성부께 드리는 기도
우리의 기도는 궁극적으로 성부이신 하느님 아버지께 바치는 것입니다. 이 기도의 표현 곧 기도의 길들은 여러 가지이지만, 그 길들은 사실은 하나일 뿐입니다. 교리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리스도교 기도의 길은 오로지 그리스도뿐이다. 우리의 기도는 그것이 공동체적이든 개인적이든 소리를 내어 하는 것이든 마음속으로 하는 것이든,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기도가 되어야만 성부께 다다르게 된다. 예수님의 거룩한 인성은 성령께서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는 길이다”(2264항).
예수님께 드리는 기도(2665~2669항)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 기도하는 법을 배웁니다.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하면서 다양한 호칭으로 예수님을 부르며 기도를 바칩니다. 예를 들면, 하느님의 아들, 하느님의 말씀, 주님, 구세주, 하느님의 어린양, 임금님, 사랑하는 아들, 동정녀의 아들, 착한 목자 등등으로 말이지요.
이 모든 호칭을 집약하는 이름이 ‘예수’입니다. 예수란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마태 1,21 참조). 교리서는 “예수라는 이름은 모든 것, 곧 하느님과 인간, 창조와 구원의 경륜 전부를 내포한다”고 밝힙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부르면서 기도한다는 것은 또한 예수님께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는 동방과 서방 교회의 기도 전통 안에서 다양한 형태로 발전해 왔습니다. 그중 가장 흔한 기도는 “하느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님, 저희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소서”하고 바치는 기도입니다.
교리서는 또 “예수님의 거룩한 이름을 부르는 것은 늘 기도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길”(2668항)이라고 설명합니다. 사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는 어느 때라도 가능한 기도입니다.
오소서 성령님(2670~2672항)
그러나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 하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기도를 드린다고 하지만 사실은 성령께서 미리 은총을 베푸시어 우리를 기도의 길로 이끄시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우리에게 “날마다, 특별히 모든 중요한 활동을 시작하고 마칠 때에 성령께 간청하라”(2670항)고 권고합니다.
어떻게 성령께 간청해야 할까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위로자이신 성령을 보내 주시기를 성부께 간청”(2671항)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청하면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요한 14,16 참조).
하지만 “오소서, 성령님, 믿는 이들의 마음을 충만하게 하시고, 그들 안에 사랑의 불을 놓으소서!” 하고 성령께 직접 간구하는 기도 역시 교회의 오랜 전통 안에 있는 기도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성령과 일치할 때 교회의 기도가 됩니다. [평화신문, 2016년 10월 16일, 이창훈 기자]
[위대한 신앙의 신비, 기도] (20) 기도의 전통 (「가톨릭 교회 교리서」 2650~2696항)
길잡이 성모님께 바치는 기도
기도의 길 ② (2673~2682항)
천주의 성모님과 일치하여
마리아는 성령께 협력하심으로써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실 뿐 아니라 또한 우리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어머니이신 마리아께서는 길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그대로 비춰 주십니다. 그래서 성모님은 길잡이이십니다. 길이신 예수님께 이르는 이정표이십니다.
마리아께서 성령께 탁월하게 협력하신 사실을 토대로 교회는 천주의 성모님께 바치는 기도를 발전시켜 왔습니다. 이 기도는 크게 두 가지로 드러납니다. 하나는 주님께서 성모님께 그리고 성모님을 통해서 모든 사람에게 해주신 “큰일”(인류 구원)에 대해 주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마니피캇(Manificat)’이라는 찬양이 그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어머니이시며 그래서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 자녀들의 애원과 찬미를 맡겨 드리는 것입니다. 마리아께 드리는 기도의 이 두 가지 큰 움직임을 아주 잘 드러내는 기도가 바로 성모송입니다. 성모송을 살펴봅시다.“마리아님, 기뻐하소서” : 성모송은 우리 말로 번역했을 때 “은총이 가득하신…”으로 시작하지만, 원래 시작은 “기뻐하소서, 마리아님”(Ave Maria)입니다. 이 말은 가브리엘 천사의 인사입니다. 하느님께서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친히 인사를 건네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시선으로 우리 또한 마리아께 다시 인사를 드리는 것으로 성모송을 바치는 것입니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 마리아께서 은총이 가득하신 것은 주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마리아 안에 주님이 친히 와 계시는 것입니다. 마리아께서는 사람들과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집이십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함께 계셔서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께서는 자신 안에 머무르러 오시는 분, 자신이 세상에 낳아 줄 그분 곧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자신을 온전히 바치십니다.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들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 이 인사는 사촌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을 받았을 때 한 말입니다(루카 1,42 참조). 엘리사벳은 이렇게 인사한 후에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5) 하고 거듭 인사합니다.
마리아는 믿음을 통해서 믿은 이들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또 세상 모든 민족은 마리아 덕분에, 하느님의 복 자체이신 분(예수 그리스도)을 받아 모십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마리아께서는 당신 아들이신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셨기에, 우리는 천주의 성모이시며 우리의 어머니이신 마리아께 우리의 모든 근심과 청원을 맡길 수 있습니다. 마리아께서는 천사의 전갈에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하고 응답하셨듯이, 우리를 위해서도 기도하십니다. 우리는 마리아와 함께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하고 우리를 하느님 뜻에 맡기게 됩니다.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 우리는 마리아께 지금 우리를 위해, 죄인인 우리를 위해 빌어 주시도록 청합니다. 또 죽을 때에도 빌어 주시도록 청합니다. 시간은 지금의 연속입니다. 그리고 우리 각자에게 시간의 끝은 죽음이지요. 따라서 이 기도는 언제나 죄인을 위해 빌어주시도록 청하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교리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가 마리아께 기도하는 것은,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당신 아들을 보내신 성부의 계획에 마리아와 함께 동의하는 것이다”(2679항). [평화신문, 2016년 10월 23일, 이창훈 기자]
[위대한 신앙의 신비, 기도] (21) 기도의 전통 (「가톨릭 교회 교리서」 2650~2696항)
성인들께 의탁하며 성당에서 기도
기도의 길잡이 ① (2683~2696항)
교리서는 기도의 길잡이로 수많은 증인과 기도 봉사자들을 듭니다. 이와 함께 기도에 적합한 장소들에 대해서도 설명합니다. 차례로 살펴봅니다.
수많은 증인들(2683~2684항)
우리보다 앞서 하늘나라에 들어간 증인들, 특히 교회가 ‘성인’으로 인정한 이들은 △ 모범적인 삶 △ 남긴 글 △ 그리고 기도를 통해 오늘도 살아 있는 기도의 전통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고, 찬양하며, 지상에 남아 있는 이들을 끊임없이 돌보아 줍니다. 그들의 전구는 하느님 계획을 이루기 위한 그들의 봉사 중 가장 고귀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과 온 세상을 위해 전구해 주시도록 그들에게 기도할 수 있고 또 해야 합니다.
교회 역사가 흐르는 동안, 모든 성인의 통공 안에서 다양한 영성이 발전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갖가지 영성은 기도의 살아 있는 전통에 참여하는 것”으로서, 신자들에게는 “필수적인 안내자”(2684항)입니다.
기도의 봉사자들(2685~2690항)
그리스도인 가정은 기도를 가르치는 첫째 장소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가정 교회’입니다. 가정에서 하느님의 자녀들은 ‘교회로서’ 끊임없이 기도하는 법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 날마다 바치는 기도는 교회의 생생한 기억을 특히 어린이들에게 처음으로 증언해 줍니다.
서품된 봉사자인 성직자들도 기도의 봉사자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가 된 신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칠 의무를 지고 있습니다. 하느님 백성을 기도가 솟아나는 샘, 곧 하느님 말씀과 전례와 하느님을 향한 삶으로 인도하기 위해 서품됐기 때문입니다.
수도자들, 곧 봉헌생활을 하는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수도자가 그들의 전 생애를 기도하는 데에 바쳤습니다. 또 많은 은수자와 남녀 수도자가 하느님을 찬양하고 백성을 위해 전구하는 데에 일생을 보냈습니다. 사실, 봉헌생활의 힘은 기도에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고서는 봉헌생활을 유지하거나 확산할 수 없습니다. “기도는 교회 안에서 관상 생활과 영성 생활이 솟아나는 원천 중 하나”(2687항)입니다.
교리교육도 기도의 봉사자입니다. 교리교육의 목표는 △ 개인 기도 중에 하느님 말씀을 묵상하고 △ 전례 기도 중에 하느님 말씀을 현재 상황에 연결시켜 그 말씀을 항상 내면화하여 열매를 맺도록 하는 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 생활을 위해서는 기도문을 암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의미를 음미하도록 하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기도 모임 또는 기도 학교들도 기도의 봉사자입니다. 성령께서는 어떤 신자들에게는 지혜와 믿음과 식별의 은총 곧 영적 지도의 은총을 주십니다. 기도라는 공동선을 위해서지요. 이들 역시 기도의 봉사자들입니다.
기도에 적합한 장소(2691항)
하느님의 집인 성당은 본당 공동체가 바치는 전례 기도에 적합한 곳입니다. 본당은 또한 성체 안에 실제로 현존해 계시는 그리스도를 흠숭하기에 가장 알맞은 장소이기도 합니다.
개인 기도를 드리기 위한 장소로는 성경과 성화들이 비치돼 있는 ‘기도의 골방’이 적합한 기도 장소입니다. 가정에 이러한 작은 공간이 있으면 개인 기도만이 아니라 가족의 공동 기도를 촉진시켜 줍니다.
수도원과 순례지(성지)들도 기도에 적합한 장소입니다. 순례는 천국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의 여정을 상기시켜 주며, 순례지(성지)는 기도를 체험하는 특별한 곳입니다. [평화신문, 2016년 10월 30일, 이창훈 기자]
[위대한 신앙의 신비, 기도] (22) 기도의 전통 (「가톨릭 교회 교리서」 2650~2696항)
의식적으로 시간 정해 기도 바쳐라
기도 생활이란(2697~2699항)
신앙생활은 한 마디로 사랑의 이중 계명을 실천하는 생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이중 계명이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것을 말하지요. 이 사랑의 이중 계명을 실천하는 데에 기본이 바로 기도 생활입니다.
교리서는 기도를 “새 마음의 생명”이라고 부르면서 그리스도 신자들은 “순간순간 기도에서 생기를 얻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2697항).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330~390) 성인은 “숨을 쉬는 것보다 더 자주 하느님을 생각해야 한다”고까지 말하면서 그리스도 신자 생활에서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이 말은 호흡하는 것처럼 언제나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교리서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그러나 일정 시간에 의식적으로 기도하지 않으면, ‘어느 때에나’ 기도할 수 없다”(2697항). 말하자면 기도는 호흡을 통해 육신이 생기를 얻는 것처럼 영혼에 생기를 주는 것이지만, 호흡하지 않으면 금방 숨이 차오르고 고통을 느끼는 것과 달리 기도는 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고통을 금방 느끼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기도를 하지 않으면 영혼은 차츰 생기를 잃고 우리는 영적으로 병이 들게 됩니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기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또 의식적으로 기도하는 것이 마치 호흡하는 것처럼 습관이 될 때 비로소 언제나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의식적으로 기도하려면 일정한 시간을 정해서 기도를 바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전통적으로 지속적인 기도를 함양시켜 주는 주기적인 기도를 신자들에게 권해 왔습니다. 날마다 바치는 기도로는 아침기도와 저녁기도, 식사 전후의 기도, 시간전례인 성무일도가 대표적입니다. 삼종기도 역시 날마다 일정한 때에 바치는 기도이지요. 그리고 주일에는 성찬례를 중심으로 무엇보다 기도로써 거룩하게 지냅니다.
교회는 또 인류 구원 역사의 핵심이자 절정인 강생(예수님 탄생)과 파스카(수난과 부활)를 중심으로 구원 역사 전체를 1년 주기 안에 기념하고 있는데, 이를 전례주년이라고 하지요. 이 전례주년 역시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의 기도 생활에 근본이 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대림시기에는 종말에 오실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하느님이 사람이 되심을 기념하는 성탄을 기다리며 그에 맞는 삶을 살고자 노력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 생활에 기본이 되고 도움이 되는 시간을 통해서 우리는 기도할 뿐 아니라 평소에도 기회가 되는 대로 기도를 생활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모 마리아와 함께 예수님의 구원 신비를 묵상하며 바치는 묵주기도와 화살처럼 짧은 순간에 지향을 담아 기도한다고 해서 ‘화살기도’라고 부르는 기도들이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바칠 수 있는 대표적인 기도들입니다.
그리스도 신자 생활에서 이렇게 중요한 기도 생활을 교회는 전통적으로 세 가지 방식으로 표현해 왔습니다. 소리 기도, 묵상 기도, 그리고 관상 기도입니다. 이 세 가지 기도 형태의 공통점은 마음을 가다듬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간직하고 또 하느님의 현존 앞에 머물고자 하는 노력에 따라, 이 세 가지 기도의 형태는 기도 생활을 깊이 있게 해준다”(2699항)고 교리서는 설명합니다.
[위대한 신앙의 신비, 기도] (23) 기도의 형태(「가톨릭 교회 교리서」 2700~2724항)
기도의 두 가지 방법
소리 기도(2700~2704항)
기도는 마음속으로 바치는 말이나 입으로 하는 말을 통해서 구체화됩니다. 이를 ‘소리 기도’라고 합니다. 소리 기도에서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언변이 뛰어나 ‘황금 입’이라는 별명이 붙은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우리의 기도가 받아들여지는 것은 말을 많이 하는 데 달린 것이 아니라 우리의 열성에 달린 것이다”라며 마음을 쏟는 정성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소리 기도는 그리스도 신자 생활에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침묵 중에 기도하시는 예수님 모습에 끌린 제자들이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청하자 예수님께서는 소리 기도인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육체와 정신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우리의 감정을 외적으로 표현해야 할 필요성을 느낍니다. 소리 기도는 여기에 부합하는 기도입니다. 우리의 청원에 가능한 모든 힘을 부여할 수 있도록, 우리는 온몸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이는 또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바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하는 사람, 곧 영혼의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살아 있는 기도를 드리는 사람을 찾으십니다”(2703항).
소리 기도는 외적이고 지극히 인간적인 기도이기에, “가장 훌륭한 일반 대중의 기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중의 기도라고 해서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교리서는 이렇게 밝힙니다. “기도는 우리가 말씀드리는 그분을 의식하면 할수록, 내적인 것이 된다. 이리하여 소리 기도는 관상 기도의 최초 형태가 되는 것이다”(2704항).
묵상(2705~2708항)
묵상은 “탐색”입니다.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일을 받아들이고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도 신자로서의 삶을 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해하고자 애씁니다. 이렇게 탐색하는 일, 곧 묵상은 주의력을 집중해야 하므로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묵상할 때는 도움을 받습니다. 주로 성경, 특히 복음서, 성화상, 그날의 전례문, 신심 영성 서적들을 통해 묵상거리를 찾지요. 하지만 책만이 아니라 주변의 모든 것이 묵상의 소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묵상의 한 축을 이룰 뿐입니다. 다른 한 축이 필요합니다. 삶이 그것입니다. 묵상의 핵심은 생각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생각에서 현실로 옮아가도록 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교리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겸손과 신앙의 정도에 따라, 우리는 묵상 중에 마음을 움직이는 감동을 발견하게 되고, 그것을 식별할 수 있게 된다. 빛에 이르기 위해서는 어떻게 진리를 실천하느냐가 문제이다. ‘주님,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2706항).
묵상의 방법은 다양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떤 방법을 사용하느냐가 아니라 “성령의 도움으로, 기도를 위한 유일한 길, 곧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것”입니다(2707항).
또 묵상에는 사고력과 상상력, 감정과 의욕 등이 모두 동원됩니다. 이러한 것들은 신앙의 확신을 깊게 하고 마음의 회개를 불러일으키며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의지를 강화하는 데에 필요합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거룩한 독서’나 신자들이 즐겨 바치는 ‘묵주기도’는 그리스도의 신비를 묵상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됩니다. 이런 묵상 기도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분과 결합하기 위해 더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평화신문, 2016년 11월 13일, 이창훈 기자]
[위대한 신앙의 신비 기도] (24) 기도의 형태(「가톨릭 교회 교리서」 2700~2724항)
침묵 속에 바치는 사랑의 기도
관상 기도(2709~2719항)
16세기 가르멜회의 대 데레사 성녀(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관상 기도란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하느님과 자주 단둘이 지냄으로써 친밀한 우정의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관상 기도는 내 영혼이 “예수님을 찾고 또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를 찾는 것”(2709항)입니다. 관상 기도 중에도 묵상할 수 있지만, 우리의 시선은 언제나 주님께 고정되어 있습니다.
관상 기도를 하려면 먼저 주님을 위해 시간을 내야 합니다. 그 시간 동안에는 어떤 시련이 따르더라도, 또 아무리 마음이 무미건조하게 느껴지더라도 도중에 그만두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을 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 ⓐ 마음을 모으고 ⓑ 성령께서 움직여 주시도록 우리의 전 존재를 집중시키며 ⓒ 주님께서 머무시는 거처인 우리 자신 안에 머물고 ⓓ 우리를 기다리시는 주님의 현존을 깊이 인식하면서 ⓔ 우리의 가면을 벗어 버리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 우리의 마음을 향하게 하고 ⓕ 우리 자신을 정화되고 변화되어야 할 제물로 그분께 맡겨 드립니다.
이렇게 바치는 관상 기도는 “하느님 자녀의 기도”입니다. 또 “하느님께 받은 사랑을 받아들이기로 동의하고 더욱 사랑하여 그 사랑에 응답하기를 바라는 용서받은 죄인의 기도”입니다. 관상 기도는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과 더욱 깊이 일치함으로써, 사랑하시는 성부의 뜻에 겸손하고 빈 마음으로 승복하는 것”(2712항)입니다.
관상 기도는 “기도의 신비를 가장 단순하게 표현하는 것”으로 겸손하고 빈 마음을 가져야만 받을 수 있는 선물이자 은총입니다. 우리 존재의 깊은 곳에서 이루어지는 관상 기도는 “성삼위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모습인 인간을 당신과 닮게 하시는 친교”(2713항)입니다. 관상 기도를 하는 시간은 기도 생활에서 가장 알찬 시간입니다. 관상 기도 안에서 성부께서는 성령을 통해 우리의 힘을 돋우어 내적 인간으로 굳세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분을 보고, 그분은 저를 보고 계십니다.” 요한 마리아 비안네 성인이 아르스의 본당 신부로 있을 때 감실 앞에서 기도하던 농부가 한 이 말은 관상 기도를 잘 설명해 줍니다. “예수님의 눈길은 사람의 마음을 정화시켜 줍니다. 예수님께서 보내시는 시선은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 줍니다”(2715항).
관상 기도는 또한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것입니다. 마치 어린이가 부모를 사랑하여 따르는 것처럼, 마리아께서 아들을 낳으리라는 천사의 전갈에 “그대로 이루어지소서(Fiat)” 하고 응답하신 것처럼 그렇게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관상 기도는 말이 아니라 침묵입니다. 침묵 속에서 바치는 사랑의 기도입니다. 때로는 관상 기도 안에서 하느님이 계시지 않은 것 같은 ‘신앙의 어두운 밤’을 겪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럴 때에 그 기도는 “많은 사람에게 생명을 가져다주는 사랑의 일치를 이루는 기도가 된다”(2719항)고 교리서는 설명합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그분과 함께 깨어 있겠다고 동의하는 것입니다.
교리서는 관상 기도를 이렇게 요약, 정리합니다. “관상 기도는 기도의 신비를 단순하게 나타내는 기도이다. 관상 기도는 예수님께 신앙의 눈길을 고정시켜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말없이 우리 사랑을 나타내는 기도이다. 관상 기도를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비에 참여하는 만큼, 그리스도의 기도와 합쳐지게 된다”(2724항).
[위대한 신앙의 신비, 기도] (25) 기도의 싸움(「가톨릭 교회 교리서」 2725~2758항)
기도는 자신과 유혹자에 맞서는 싸움
“기도는 하느님께서 은총으로 주시는 선물인 동시에, 이 선물에 대한 우리들의 결정적인 응답”이라고 교리서는 밝힙니다. 기도가 우리 인간 편에서의 응답이라는 점은 기도에는 노력이 따른다는 것을, 즉 “기도는 언제나 노력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2725항).
그래서 기도는 일종의 싸움입니다. 누구와 싸우는 것인가? 교리서는 두 가지를 지적합니다. 우리 자신과 싸우는 것입니다. 또 유혹자의 계략에 맞서 싸우는 것입니다. 유혹자는 우리에게 기도를 외면하게 하고 하느님과 우리가 일치하는 것을 깨뜨리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교리서는 나아가 “우리는 기도하는 대로 살기 때문에, 또한 사는 대로 기도한다”고 지적합니다. 이 지적의 의미를 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그리스도의 성령에 따라 행동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늘 기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새 생활을 위한 ‘영적 싸움’은 기도의 싸움과 분리할 수 없습니다.
기도에 대한 반대(2726~2728항)
기도의 싸움과 관련해서 우선 기도에 대한 그릇된 견해들을 극복해야 합니다. 기도에 대한 그릇된 견해들은 우리 자신 안에 있을 뿐 아니라 우리 주위에도 있습니다. 그런 잘못된 견해들 가운데는 기도를 △ 단순히 심리적 활동으로 보는 견해 △ 정신적 공백 상태에 이르려는 집중 노력으로 보는 견해 △ 의례적인 태도와 말에 불과하다고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또 기도와 일이 양립할 수 없다고 무의식 중에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여기서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기도는 선물이라는 사실입니다. 기도는 인간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도움으로 한다는 사실을 깊이 새겨야 합니다.
기도와 관련해서 경계해야 할 또 한 가지는 ‘이 세상’의 사고방식입니다. 이 세상의 사고방식이란 무엇일까요? ① 이성과 과학을 통해 검증되는 것만이 참되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기도는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을 넘어서는 신비입니다. ② 사람들은 생산과 효율성의 가치만을 높이 평가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도를 비생산적이며 따라서 쓸모없는 것이라고 여기지요. ③ 이 세상의 사고방식은 관능주의와 안락을 진선미의 척도로 내세웁니다. 그러나 기도는 관능주의가 아닌,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이며,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느님의 영광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④ 기도는 세상에서 도피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현실에서 벗어나는 것도 아니고 삶과 결별하는 것도 아닙니다.
기도와 관련, 배격해야 할 마지막 하나는 기도에 실패했다는 느낌입니다. ① 마음의 무감각 때문에 낙심하는 일이 있고 ② 재산이 많기 때문에 주님께 다 드려야 한다는 사실에 슬퍼하는 일이 있으며 ③ 소원이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실망하는 때가 있습니다. 또 ④ 죄인으로서 무력감을 느껴 상처를 입은 자존심이 더욱더 완고해지는 일도 있고 ⑤ 기도가 무상의 선물이라는 사실에 대한 잘못된 반감도 생겨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기도를 한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느냐 하는 회의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 모든 난관을 극복하자면, “겸손과 신뢰와 인내로써 싸워야”(2728항) 합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6년 11월 27일, 이창훈 기자]
[위대한 신앙의 신비 기도] (26) 기도의 싸움 (「가톨릭 교회 교리서」 2725~2758항)
기도할 때 겪는 네 가지 어려움
겸허한 경계심(2729~2733항)
기도할 때에 가장 흔히 겪는 어려움은 분심입니다. 분심이란 기도 중에 온갖 잡생각이 일어나 기도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입으로는 기도를 바치는 데 마음은 콩밭에 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분심이 생길 때에 “분심을 몰아내려고 쫓아다니는 것은 오히려 함정에 빠지는 것이 됩니다”(2729항). 쫓아내려고 신경을 곤두세울 것이 아니라 그냥 다시 처음 기도하는 상태로 돌아오면 됩니다.
교리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분심은 우리가 무엇에 집착하고 있는지를 알려 주므로, 이것을 하느님 앞에서 겸손되이 깨달으면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우선적인 사랑이 일깨워질 것이다”(2729항). 내가 분심이 들었다는 것을 깨닫고 겸손하게 하느님께 다시 돌아와 마음을 집중한다면,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정화해 주실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계속 분심에 빠져든다면 기도의 싸움에서 지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에 생기는 또 다른 어려움은 마음의 메마름입니다. 마음의 메마름은 특히 마음을 다해 기도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부닥치는 어려움입니다. “이 메마름은 관상 기도의 한 부분”(2731항)이라고 교리서는 설명합니다. 이렇게 마음이 메마를 때는, 생각도 기억도 느낌도 의욕도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영적인 감흥도 느끼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낙담할 필요는 없습니다. “고뇌와 무덤 속에서 예수님과 함께 머무는 참된 신앙의 순간”(2731항)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메마름은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요한 12,24) 메마름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마음의 메마름이 돌밭에 떨어진 씨앗처럼 뿌리를 내리지 못해서 생기는 것이라면 회개가 필요합니다. 이메마름은 시련을 만나면 견디지 못하고 떨어져 나가는 데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루카 8,13 참조).
기도할 때에 경계해야 할 또 다른 유혹은 신앙의 부족입니다. 이는 가장 흔하면서도 매우 은밀하게 다가오는 유혹입니다. 기도를 시작하지만 다른 급한 일이나 걱정거리가 떠올라 기도에 집중하지 못하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는 “또다시 무엇엔가 집착하고 있는 마음의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2732항)입니다. 말하자면 주님께 의탁하고 기도한다고 했는데 믿음의 부족으로 근심거리가 계속 생각나는 것입니다.
이런 유혹에 대해 교리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합니다. “주님을 우리 최후의 피난처로 여겨 그분께 갈 때에도, 우리는 참으로 그분을 믿는가? …이 모든 경우에서 우리 신앙의 부족, 곧 우리가 아직 겸손한 마음을 가지지 못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2732항). 이런 유혹에 빠지지 않으려면 “너희는 나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는 말씀을 되새기며 주님 안에 굳건히 머물러 있으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게으름도 자주 빠지게 되는 유혹입니다. 게으름은 “금욕 정신이 해이하고 경계심이 감퇴되어 마음이 태만해짐으로써 나타나는 일종의 의기소침”(2733. 2755항)입니다. 자만 또는 교만함에서 빠지게 되는 유혹일 수 있습니다.
교리서는 “높은 데서 떨어질수록 더 많이 다치게 된다”면서 “고통스러운 좌절감은 교만의 이면”이라고 지적합니다(2733항). 이런 유혹에 맞서 요구되는 자세는 겸손함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비참함에 놀라지 않는다. 자신의 비참함을 느끼는 겸손한 사람은 더 깊은 신뢰심을 갖게 되고 더욱 끈기있게 참아 견딘다”(2733항).
[위대한 신앙의 신비 기도] (27) 기도의 싸움 (「가톨릭 교회 교리서」 2725~2758항)
시련 속에서 드러나는 신뢰
자녀다운 신뢰(2734~2741항)
난간 위에 아이가 있고 아래에는 아빠가 있습니다. 아빠가 아이에게 걱정하지 말고 뛰어내리라고 합니다. 대낮이면 아이는 별 걱정 없이 뛰어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칠흑 같은 밤이라면 아이는 주저할 것입니다. 이럴 때 요구되는 것이 신뢰입니다. 교리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자녀다운 신뢰는 시련 속에서 드러난다”(2734항). 하지만 시련 속에서 신뢰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간절히 기도했는데 청원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기도를 그만두기까지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1) 왜 우리의 기도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불평하는가?
우리는 보통 하느님을 찬양하거나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할 때에,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 위주로 합니다. 우리 기도가 진정으로 하느님 마음에 드는 것이었는지 알려고 애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또한 우리의 기도가 이뤄지는지 그 결과를 보아야겠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심각한 질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해 그분께 기도를 드리는지요? 하느님을 우리가 바라는 바를 채워 주는 수단으로 여기는지요? 아니면 진정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이해하는지요?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구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면서도 우리의 청원을 기다리고 계시는 것은 우리가 “자유로워야만 하느님의 품위 있는 자녀들이 되기 때문”(2736항)입니다.
나아가 교리서는 야고보 서간의 말씀을 인용해 이렇게 밝힙니다. “여러분이 얻지 못하는 까닭은 하느님께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해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욕정을 채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2737항; 야고 4,2.3 참조).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 때에 우리는 먼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자유의 성령과 함께 기도해야”(2736항) 합니다. “그분의 성령께서 원하시는 것을 우리가 받아들이면, 우리의 청원은 받아들여질 것입니다”(2737항).
2) 어떻게 효과 있는 기도가 되는가?
기도는 믿음을 전제로 합니다. 여기서 생각해 봅시다. 우리의 믿음은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지요? “역사 안에서 하느님께서 이룩하신 업적”(2738항) 곧, “당신의 외아들을 우리에게 내어주신 성부의 성실하신 사랑”(2739항)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효과 있는 기도가 되려면 내가 원하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성실하신 사랑’을 굳게 신뢰할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이 먼저 변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리서는 “기도하는 마음의 변화가 바로 우리의 청원에 대한 첫 번째 응답”(2739항)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교리서는 나아가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의 모범이신” 예수님의 기도 덕분에 그리스도인이 하는 기도는 유효한 청원이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기도하실 뿐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에게 이롭도록”(2741항) 기도하십니다.
따라서 “우리의 기도가 자녀다운 신뢰와 대담성을 지녀 예수님의 기도와 튼튼히 결합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모든 것을 얻을 뿐 아니라, 이러저러한 것들보다 훨씬 더 좋은 것 곧 모든 선물을 지니신 성령 바로 그분을 받게 된다”(2741항)고 교리서는 설명합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6년 12월 11일, 이창훈 기자]
[위대한 신앙의 신비, 기도] (28 · 끝) 기도의 싸움(「가톨릭 교회 교리서」 2725~2758항)
언제 어디서나 기도하는 삶 살아야
항구한 사랑으로(2742~2745항)
바오로 사도는 신자들에게 늘 기도하라고, 언제나 감사하며 끊임없이 기도하라고 당부합니다(1테살 5,17; 에페 5,20; 6,18 참조). 기도에 대한 이런 지치지 않는 열성은 사랑에서만 나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의 싸움은 겸손하고 신뢰하며 항구한 사랑을 가진 사람이 벌이는 투쟁”(2742항)이며, 이 사랑은 기도에 대한 우리 믿음에 빛과 생명을 주는 세 가지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고 교리서는 가르칩니다(2743~2745항).
첫째, 기도는 언제나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일찍이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설파했습니다. “저잣거리에서나 혼자 산책할 때에도… 가게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중에도, 또는 요리하는 중에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둘째, 기도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따르지 않는다면, 곧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시 죄의 노예 상태로 빠지게 될 것입니다. 18세기의 뛰어난 윤리신학자 알폰소 리구오리 성인은 “기도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구원을 받고,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어김없이 영벌을 자청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셋째, 기도와 그리스도인 생활은 분리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삶과 기도는 모두 같은 사랑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오리게네스 교부는 “기도를 일과 결합시키고, 일을 기도와 결합시키는 사람은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때가 되어 예수님께서 드리신 기도(2746~2751항)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때’가 되자 아버지께 기도하십니다. 요한 복음 17장에 나오는 기도가 그것으로, ‘대사제의 기도’라고 하지요. “이 기도는 예수님의 희생 제사와 분리될 수 없고, 그분의 성부께 건너가심(파스카)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2747항). “이 희생 제사와 파스카의 기도 안에서 모든 것이, 곧 하느님과 세상, ‘말씀’과 살(肉), 영원한 삶과 시간,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과 사랑을 저버리는 죄, 이미 제자가 된 사람들과 제자들의 말을 듣고 그리스도를 믿게 될 사람들, 자기 낮춤과 영광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하나가 된다”(2748항)고 교리서는 제시합니다. 그래서 이 기도는 또한 ‘일치의 기도’로서 “창조와 구원 경륜 전체를 요약”(2758항)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주십시오”(요한 17,20) 하고 우리를 위해 대사제로서 바치신 예수님의 기도는 우리 마음 속에 예수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에 포함된 중요한 청원들을 떠오르게 합니다. 그 청원들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도록 하는 것, 아버지의 나라가 오도록 하는 것, 아버지의 뜻과 아버지의 구원 계획이 이뤄지기를 바라는 것, 그리고 악에서 구원되는 것입니다.
정리합시다
- 우리의 청원이 들어지지 않는다는 느낌이 올 때 우리의 자녀다운 신뢰는 시련을 겪게 됩니다. 복음서는 우리의 기도가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과 일치하는지 생각해 보기를 권고합니다(2756항).
- 우리는 언제나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서 기도와 삶은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2757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