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 들이 만나는 곳
32: 1-6
1.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아론에게 이르러 가로되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2.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 아내와 자녀의 귀의 금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 오라
3. 모든 백성이 그 귀에서 금고리를 빼어 아론에게로 가져 오매
4.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
5. 아론이 보고 그 앞에 단을 쌓고 이에 공포하여 가로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하니
6. 이튿날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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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7:1-8
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2.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3.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4.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6. 제자들이 듣고 엎드리어 심히 두려워하니
7. 예수께서 나아와 저희에게 손을 대시며 가라사대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 하신대
8.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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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산을 좋아하는 민족입니다.
그래서 도인(道人)들은 산에서 도를 닦고 기도하기를 좋아하고, 무인(武人)들은 산에서 무예를 닦고, 예인(藝人)들은 산에서 예를 익히고 학자들을 산에서 학문을 완성하기를 좋아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민족도 산과 깊은 관계가 있는 민족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 속에 중요한 사건들은 모두 산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에덴 동산으로부터 시작해서, 노아의 아라랏산, 이삭의 모리아산, 모세의 호렙산과 시내산, 엘리야의 갈멘산 그리고 헬몬산, 시온산, 겟세마네 동산과 골고다 언덕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계시와 응답이 있었던 신성한 곳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산은 전통과 함께 무수한 의미를 더해 왔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진 모리아 산이 좋은 예입니다.
오르난의 타작마당이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린 모리아였고 그후 솔로몬이 여기에 성전을 세웠고 바벨론 포로 이후에는 느헤미아가 이곳에 성전을 재건을 했습니다.
반면, 성경에서의 광야, 즉 들은 대부분 부정적인 의미로 쓰여졌습니다. 성경에서 광야하면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와 시내광야에서 40년간 방황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의미로는 시련과 투쟁의 장소이고 죄와 죽음의 장소이고 시험과 심판의 장소입니다.
그러면서도 이 광야는 하나님의 임재를 가장 크게 체험한 장소였습니다.
여기에, 산과 들의 만남의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산과 들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출애굽기 32:1-6절의 말씀은 들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 하나님께 십계명을 받고 있는 동안 들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섬긴 사건입니다.
모세가 입산한지 40일이 가까워와도 아무 소식이 없자 조급해진 백성들은 동요하기 시작했습니다.
모세는 어찌 되었는지 모르니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고 아론에게 재촉을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지난 날 우리를 인도하던 유목민이 아닌 농경민의 신인 평원의 신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백성들은 스스로 자원해 금붙이를 내놓아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경배하며 춤추고 뛰놀았다는 말씀입니다.
반면, 마태복음 17:1-8절의 말씀은, 산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께서는 고난 받으실 날을 얼마 앞에 두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높은 산에 오르셨습니다. 이때, 주님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변형되셔서 그 얼굴이 햇빛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아가 나타나 주님과 더불어 말씀을 하셨습니다.
황홀한 베드로는 여기가 좋사오니 주께서 원하시면 여기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했습니다.
이때,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워 엎드려 있었으나 주님이 일으켜 일어나 보니 예수님 이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세 장소를 주목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이 세공간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째는, 산이란 장소입니다.
출애굽기 32:1절에 보면,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하였고,
마태복음 17:1절에는,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위의 두 말씀 모두 모세는 시내산에 올랐고 주님은 헬몬산에 오르셨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브리말로 산을 "하르"라고 합니다. "높은"이란 뜻인데 이 말은 신성한 의미와 함께만 쓰여졌습니다.
즉, "하르"는 하나님의 계시의 장소요, 하나님과의 만남과 대화의 장소요,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는 장소로 쓰여졌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산을 좋아하셨습니다. 그래서 자주 산에서 기도하시고, 산에서 가르치시고, 산에서 변화하시고, 산에서 승천하셨습니다.
산이란, 자연적 웅장함과 풍성함과 신비함 뿐 아니라 영적인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속세와 구별되는 신성함과 충만한 생명의 신비와 창조주의 놀라운 위대하심을 느끼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호렙산, 시내산, 시온산, 헬몬산 등이 특별히 성별된 장소의 역할을 한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산은 자연의 신비로서만이 아니라 민족정기의 근본으로 삼고, 종교와도 깊은 관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의 의미는 자연의 산이 아니라 계시요, 말씀이요, 도덕적 이상이요, 신앙적인 꿈입니다.
그러나, 이 거룩한 산의 영성도 들이 없이는 공허합니다. 말씀도, 높은 도덕적 이상도, 죄인이 믿고 변화될 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들이란 장소입니다.
출 32:6절에 보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 하였고 마태복음 17:5 하반절에 보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위의 두 말씀은 모두 들에서 되어지고 되어질 일들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히브리말로 "들" 혹은 "광야"를 나타내는 말은 "미드바르"라고 합니다. 이는 주로 광야 40년간의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삶의 현장을 의미했습니다.
즉, "미드바르"는 인간의 본능적 욕구와 탄식, 배신과 우상숭배, 투쟁과 시련, 회개와 용서의 장소로 쓰여졌습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믿기 어려운 존재입니다.
우상숭배의 가장 큰 죄악성은 그것이 영적 무지 때문이 아니라 영적 지식과 불신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우상이란 인간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신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인간이 순종할 것을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대리 위안을 얻으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람들의 박수갈채로 하나님의 대리 위안을 삼으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행복감으로 하나님의 대리 위안을 삼으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 왔다 가는 것으로 하나님의 대리 위안을 삼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대리위안은 우상입니다. 많은 소유, 높은 지위, 큰 성공의 대리위안에는 항구한 안정과 진정한 기쁨이 없습니다.
들은 우리에게 영원한 기쁨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들에서 벗어나 영산에 오르는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새 생명과 변화는 산에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산과 들의 만남의 장소입니다.
우리는 본문 말씀이 들에서 배신한 무리들이 마침내는 산에서 온 십계명을 받고, 산에서 황홀하던 제자들이 들에서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는 일과 연결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은, 산에서만 살수도 없고, 들에서만 살수도 없습니다. 산과 들은 매우 중요한 생명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산 없는 들은 멸망할 수밖에 없고, 들 없는 산은 공허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이상이 없는 현실은 쇠퇴할 수밖에 없고 현실 없는 이상은 공허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들의 생활은 언제나 산의 경험으로 순화 되야 하고, 우리의 산의 경험은 언제나 들의 생활에서 새로운 변화로 나타나야 합니다.
어느 부인이 어린아이를 데리고 교회엘 갔습니다.
설교시간에 목사님이 설교를 하면서 "성도 여러분, 지금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이 은혜 받은 감사한 마음으로 한 주간을 사시기 바랍니다. 아이들이 잘못했다고 하루종일 야단을 치거나, 아내나 남편의 한번의 실수를 두고두고 원망한다면 여러분의 은혜 받고 감사한 마음은 거짓입니다.
이 말을 곁에서 듣고 있던 꼬마가 엄마를 힐긋 쳐다보면서 "엄마, 엄마, 목사님이 지금 엄마 얘기하고 있지 않아?" 엄마는 무안해서 "얘가" 하고 팔뚝으로 툭 쳤습니다.
그 날밤, 천진하게 잠든 애 얼굴을 드려다 보며 이 부인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습니다.
"주여, 나를 감사한 마음으로 살게 해 주소서" 여기가 산과 들이 만난 곳입니다.
산에만 머무르던 사람은 이제 문제가 있는 들로 내려가야 합니다.
들에만 얽매어 연연하던 사람은 이제 신령한 산에 올라야 합니다.
이 산과 들이 만나는 곳이 삶의 변화와 감동이 있는 곳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벽기도, 성서연구, 중재기도, 여선교회의 월례기도회에 참석해 보지 못한 분은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가까운 산에 오르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렵고, 골치 아픈 문제들을 회피하지 말고, 미루지 말고, 주저하지 말고 말씀으로 대면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놀라운 변화가 있습니다.
말씀과 문제의 진지한 만남을 통해 매일 매일이 감동과 감사가 있는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