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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44: 1-15
요셉이 그 청지기에게
모세는 요셉이 그 형제들의 진실성을 알아보기 위하여 다시 시험한 사실과(1-2), 요셉의 청지기가 길 떠난 요셉의 형제들을 따라잡고 그들더러 은잔을 도적 했다고 문책한 사실(3-9), 은잔이 베냐민의 자루에서 발견될 때에 그들이 낙심한 사실(10-13), 요셉이 그들을 꾸짖은 사실(14-15)을 기록합니다.
1. 본문 1절은 "요셉이 그 청지기에게 명하여 가로되 양식을 각인의 자루에 실을 수 있을 만큼 채우고 각인의 돈을 그 자루에 넣고" 입니다.
여기서 모세는 요셉이 자기 형제들의 성품을 얼마나 잘 시험하고 있는가를 알려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단순하고 순수하기를 원하시는데 반해 우리들은 비슷한 것이라도 쫓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옆으로 빠져 나가고 구부러지고 복잡한 길을 택하려고 합니다.
요셉은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 형제들의 마음을 시험하게 됩니다.
요셉은 형제들의 마음을 엄격하고 정확하게 시험해야만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을 향한 애정은 의심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는 형제들을 믿지 않고 있는가?
왜 그는 자기가 가장 심한 시험을 할 때까지는 그들의 마음이 선하다고 생각지 않았을까?
사실 요셉은 형제들에게서 지나치게 잔혹하고 신뢰할 수 없는 성품을 보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회개한 확증을 얻지 못하면 참회하고 개과천선했다고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자기 형제들을 의심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를 당했다고 생각했을 때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공정하게 판단할 수 있는 중용의 입장에 설 수 있다는 것은 매우 힘든 덕에 속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이 모든 일을 진행해 가면서 보여 준대로 복수심이나 증오심을 버리고 냉정하고 정연한 모습, 순수한 태도를 지키도록 우리도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결정이라고 하더라도 때묻지 않은 순수한 사랑만이 가장 올바른 결정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만일 야곱의 아들들이 베냐민의 안전을 위임 맡은 책임을 쉽사리 저버렸다면 요셉은 어떻게 했었을까?' 하는 질문을 갖게도 됩니다.
요셉이 그들의 진실성을 시험해 보았을 때 그들이 정직하지 못하고 아직도 그 잔인성과 불성실을 회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밝혀졌다면 요셉은 베냐민을 자기가 거두고 다른 형제들에게 숱한 수모를 주어 내쫓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었다면 그의 아버지 야곱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가히 짐작이 가는 것이고 하나님의 교회는 다 없어져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 일이 벌어졌을 것입니다.
그들을 그렇게 놀라고 당황하게 하면서도 요셉도 일종의 모험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염려가 없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이 아직도 타락한 경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요셉은 공공연하게 자기 형들을 혹독한 방법으로 처벌해야만 했을 것이기에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 형제들이 요셉이 걱정하고 우려하는 그런 타락한 상태가 아니고 이제 성실하고 형제를 아끼는 사람들이 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니까 요셉이 형제들에게 행했던 시험 결과 두 가지 좋은 점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첫째는 자기 형들이 성실성이라든지 형제애라든지 하는 것들이 완전할 만큼 두텁다는 사실을 확인함으로써 요셉이 형제들에게 마음 문을 활짝 열고 그들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둘째는 자기들이 옛날에 저질렀던 나쁜 일이 바로 자기들의 잘못으로 된 일이긴 하지만 하나님의 역사라는 점에서 다시 경감될 수 있었습니다.
2. 본문 2-4절은
"②또 내 잔 곧 은잔을 그 소년의 자루 아구에 넣고 그 양식값 돈도 함께 넣으라 하매 그가 요셉의 명령대로 하고
③ 개동시에 사람들과 그 나귀를 보내니라
④ 그들이 성에서 나가 멀리 가기 전에 요셉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일어나 그 사람들의 뒤를 따라 미칠 때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악으로 선을 갚느냐" 입니다.
요셉의 지위와 부요를 생각할 때 그가 늘 쓰는 잔이 금잔이 아니었다는 점은 놀랍습니다. 그 때만 해도 절제의 미덕이 높이 평가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후 절제를 아름답게 생각하는 풍습이 쇠퇴하고 사치가 고개 들기 시작하였을 것입니다. 또 호화롭고 굉장히 사치를 누리며 살아도 될 겸손한 사람 요셉이 평범하고 점잖고 검소한 생활을 즐겼기 때문이거나 이 우주적인 은혜와 허락을 받고 있는 사람이 검소한 생활을 몸에 익혀 늘 검소한 생활을 했기 때문에 금잔이 아니라 은잔을 쓰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특별히 은으로 세공을 하는 뛰어난 장인의 솜씨 덕분으로 금잔보다 은잔이 값진 것이 아니었다면 그러합니다. 세상에는 흔히 그런 일도 있습니다.
또 세공 기술이 그 일의 재료보다 더욱 값나가는 때도 있습니다.
어쨌든 요셉은 부요와 능력을 사치나 호화로움으로 나타내지 않았다는 사실로서 주위로부터 질시를 피하였습니다.
그가 수위들까지 조심성 있고 세심하게 대함으로써 다른 정격들 사이에 경쟁심을 불러 일으켜 문제를 만드는 것을 막았습니다.
좌우간 요셉은 베냐민이 맡은 자루에 자기 은잔을 넣도록 명령했고 베냐민에게 도둑 누명을 씌워 그를 자기에게로 데려오고 나머지 사람들을 보내 버릴 수 있는 길을 터 놓았습니다.
비록 은잔은 베냐민의 자루에 들어가 있었으나 그들 중에 누가 그런 일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는 이유로 요셉은 그들 모두에게 혐의를 씌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첫째로 자기가 저들에게 그렇게 은혜를 베풀었는데 그 은혜를 악으로 갚는 그들의 배은망덕을 책할 수도 있습니다.
둘째로 자기 가장 귀한 물건을 도적질해 간 그들의 죄를 극형으로 다스릴 수도 있습니다.
그 은잔은 마시는데 뿐만 아니라 식탁에 쓰여지는 잔으로 알려진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든 일들이 요셉의 개인 비서나 다름없는 청지기를 통해서 진행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문책하고 치죄(治罪)하는 일은 앞의 일을 전혀 모르는 자기의 종들 중 사람을 난폭하게 잘 다루도록 훈련된 종을 시킬 수도 있습니다.
3. 본문 5-6절은
"⑤ 이것은 내 주인이 가지고 마시며 늘 점치는 데 쓰는 것이 아니냐 너희가 이같이 하니 악하도다 하라
⑥ 청지기가 그들에게 따라 미쳐 그대로 말하니" 입니다.
5절을 우리는 잘 보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 구절을 요셉이 도둑을 색출해 내기 위해서 점치는 사람처럼 말했을 뿐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들의 본성이 어떤 녀석들인지 알아내기 위함' 이라고 해석합니다.
어떤 이는 은잔을 잃어버린 것이 요셉에게 좋지 못한 징후로 나타났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구절의 뜻은 요셉이 그 은잔을 점치고 예언을 하고 하는 일련의 의식 중에 쓰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어쨌든 그는 그 은잔으로 그들에게 도둑의 혐의를 걸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할 때 문제와 의문이 생깁니다.
과연 요셉이 점을 치는 그런 쓸모 없는 방법에 의존하고 있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점을 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에게는 있어서는 안될 죄악이 아닌가?
그가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모든 계시와 하나님께 돌려야 할 찬양을 슬며시 자기에게로 돌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꿈 해몽을 자기 힘으로 알아낼 수 없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말했습니다.
그는 공공연히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알려 주셔야만 되는 것으로 말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이제 와서 그 모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찬양을 숨기고 감추려고 하는 것일까?
아니면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선지자가 아니라 일개 능력 있는 요술쟁이나 복술가로 이름을 날리려고 하는 것일까?
의심할 여지없이 이것을 통해서 보건대 그가 크나 큰 죄악을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요셉이 처음에는 최선을 다해서 자기에게 돌아올 찬양과 영예를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애굽의 온 왕국의 우매한 왕과 대신과 국민들은 그들이 지금까지 보아온 마술이나 요술이 아닌 특별한 재능을 그가 지니고 있었으나 그것은 그의 기술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사실을 모른다고 해서 요셉의 잘못일 수는 없습니다.
한편 그때까지도 애굽 사람들은 그런 허황된 것에 젖어 살며 그런 것밖에는 알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요셉을 마술사와 똑같은 부류로 생각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굉장한 술법사라는 소문은 전국에 대단히 거센 속도로 돌아 퍼졌을 것입니다. 한편 지금 요셉은 자기가 점도 치고 요술도 하는 이방인으로 말하며 자기 신분을 형제들에게 감추기 위하여 '점치는 잔'이란 말을 하였을 것입니다.
이제 사람은 한가지 잘못을 저지르면 그 뒤를 따라 여러 가지 잘못을 또 범해서 악의 구덩이에 빠지게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일에서 우리가 배우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거짓을 피하는 것입니다.
4. 본문 7-15절은
"⑦ 그들이 그에게 대답하되 우리 주여 어찌 이렇게 말씀 하시니이까 이런 일은 종들이 결단코 아니하나이다
⑧ 우리 자루에 있던 돈도 우리가 가나안 땅에서부터 당신에게로 가져왔거늘 우리가 어찌 당신 주인의 집에서 은금을 도적질하리이까
⑨ 종들 중 뉘게서 발견되든지 그는 죽을 것이요 우리는 우리 주의 종이 되리이다
⑩ 그가 가로되 그러면 너희 말과 같이 하리라 그것이 뉘게서든지 발견되면 그는 우리 종이 될 것이요 너희에게는 책망이 없으리라
⑪ 그들이 각각 급히 자루를 땅에 내려놓고 각기 푸니
⑫ 그가 나이 많은 자에게서부터 시작하여 나이 적은 자에게까지 수탐하매 잔이 베냐민의 자루에서 발견된지라
⑬ 그들이 옷을 찢고 각기 짐을 나귀에 싣고 성으로 돌아오니라
⑭ 유다와 그 형제들이 요셉의 집에 이르니 요셉이 오히려 그 곳에 있는지라 그 앞 땅에 엎 드리니
⑮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행하였느냐 나 같은 사람이 점 잘 칠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자기들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 때문에 대담하게 자신들을 변명합니다.
그들은 큰 문제로부터 작은 문제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를 논술했습니다.
그들은 알지 못하게 자기들 자루 속에 들어온 돈은 자기들이 써도 되는 형편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다시 가져온 사람들인데 아무리 생각이 모자라는 사람들이라 해도 한번 양식을 사 가지고 가면 며칠 안되어 다시 돌아올 처지에서 이렇게 도둑질 같은 적은 일로 앞으로 생계를 망가뜨릴 짓을 할 사람들은 아니라는 것 등, 자기들 결백을 주장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도둑의 결과가 자기들에게 발견되면 어떠한 처벌도 감수할 것을 선언합니다. 그러나 은잔이 베냐민의 자루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 장면에서 모세는 그들이 불평을 늘어놓거나 잔소리를 했다고 기록하지 않니다.
단지 그들은 자기들의 옷을 찢으며 자신들의 괴로움을 나타냈을 뿐입니다.
크나큰 슬픔과 자기들이 당해야 할 형벌을 생각했을 때 그들은 자기들의 예측하지 못한 결과에 그만 말문이 막혔을 것입니다.
그들이 요셉 앞에 끌려왔을 때 그들은 죄를 시인하고 말았습니다.
어떤 말을 해도 그런 변명이 통할 수 없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자명(自明)한 일을 부인해봤자 소용없는 짓이다' 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죄가 하나님 앞에서 드러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무리 그들이 남모르게 그것도 자기들은 스스로 보호한다는 합당한 이유로 한 일이지마는 저질렀던 악행 때문에 그 죄 값을 하나님께로부터 지금 받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어떤 주석가는 그들이 요셉을 아버지 몰래 처치한 것을 아버지에게 고백했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쉽게 반박을 받기 마련입니다.
그들은 계속 요셉이 사나운 짐승에 찢기어 죽었노라고 주장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단순한 생각이지마는 아직도 그 사실은 은폐된 채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죄 값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거짓을 말하고 빠져나가려고 애쓰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당혹스럽고 도대체 알 수 없는 일이란 하나님께서 내리는 남모르는 벌이 아니고는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그들은 마음 속으로 감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나 이렇게 하나님의 채찍으로 다스림을 받았을 때나 또는 사람들이 자기를 부당하게 취급하고 마음에 아픔을 주었을 때는 언제나 하나님의 숨은 심판을 생각하고 겸손히 그분 앞에 무릎을 꿇을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가 그의 형제들을 대표해서 대변하고 있는데 이것을 보고 우리는 그가 벌써 장자의 위를 얻은 것으로 생각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모세도 "유다와 그 형제들이 요셉의 집에 이르니"(14절) 라고 말하면서 유다를 그 형제들의 우두머리 격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사실 장자의 위가 아버지로부터 정식으로 엄숙하게 그에게 아직 내려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장자직이 내려지리라는 것은 모두가 기대하고 있던 사실입니다.
사실상 그가 말하는 풍으로 보아 다른 형제들을 대신하는 권위가 나타나 있었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요셉이 하인들에게 분부했던 바를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처음에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려고 노력을 했었고 지금은 그가 점술가인 양 위장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정말 죄를 짓고 있다고 말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단지 그가 위장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애굽인들이 그를 점술가로 알고 있다고 변명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요셉을 변명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옛날 애굽에서는 잔에 물을 붓고 거기에 돌이나 쇠 조각을 던져서 물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일을 알아 맞혔다고 합니다.
요셉은 실상 그런 미신적인 점술을 행하지 않았으나 이때에 그가 어디까지나 자기를 애굽 사람으로 가장하기 위하여 이런 말을 꾸며낸 것입니다.
이 말은 자기 형제들을 해롭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좋은 뜻으로 시험하기 위한 것이니 단순한 거짓말과는 다른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에게 주신 말씀에서 요셉도 드러나고, 유다도 드러나고, 야곱의 아들들도 드러납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성 삼위 하나님이 드러나십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드러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