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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1-63
장자의 축복을 누리라
여호수아를 공부하면서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행복한 것인지를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호수아서는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보잘것없던 한 민족이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약속 하나를 붙잡고 요단을 건너 가나안의 일곱 족속을 몰아내고 그 땅을 정복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를 읽으면 용기가 생기고, 우리의 지경이 계속해서 넓어지는 듯한 희망이 생깁니다. 가나안을 정복하고 점령해 나가는 그들의 진취적이고 용기 있는 도전을 통해 우리는 어려운 이 시대를 살아가는 힘을 얻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가나안 땅을 정복한 이후에 가나안 서편의 본토를 분배하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는 부분 중에서 가나안 땅을 첫 번째로 분배받은 유다지파의 기업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다 지파가 받은 기업은 요단 서편의 중심 지역으로서 중앙 고원지대와 그에 연속한 골짜기들, 곳곳의 구릉 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유다 지파가 받은 기업의 중심지는 벧엘에서 브엘세바에 이르는 중앙 고원 지대로서 고원 위에 예루살렘, 베들레헴, 헤브론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고원지대는 백성들의 삶의 중심지로서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몰고 오는 구름으로 말미암아 농사와 목축이 가능하여, 이 지역에서는 이른바 지중해식 농업이 발달, 포도와 올리브 등을 생산할 수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유다 지파가 분배받은 지역은 이스라엘 역사의 가장 중심적인 무대가 되었으며, 120개의 성읍들은 많은 역사적인 사건의 무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장 먼저, 그것도 가나안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된 유다 지파는 이스라엘 민족의 장자 지파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유다는 야곱에게서 네 번째 태어난 자식입니다. 장남도, 차남도 아니고 사남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가나안의 유업을 가장 먼저 받은 지파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들에게 참으로 중요한 교훈을 가르쳐 줍니다.
장자의 축복을 빼앗기지 말라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장자의 권리는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성경은 모든 처음 난 것은 하나님의 것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첫 열매가 하나님의 것인 것처럼 첫 번째 태어난 아들도 하나님의 것이라 하여 장자의 권리를 신성한 것으로 여겨 특별한 구별을 두었습니다. 또한 장자는 아버지의 기력의 시작으로(아버지의 첫 번째 힘/창49:3) 가족의 두 번째 우두머리가 되어 가족을 지키는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는 자로서 일정한 권위를 가지고 행동하였습니다. 그에 따라 장자에게는 모든 형제들보다 우선적인 대우를 받았는데, 장자 상속권을 소유함으로써 가족의 축복을 주장했고, 다른 형제들보다 두배의 가산을 상속받을 수 있게 하였습니다(신21:10). 그러나 딸의 경우에 있어서는 "첫 번째 태어난" 단순한 연장자로 취급했을 뿐, 상속권 자로서의 대우는 특별하게 받을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혈통과 장자의 권리를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약속의 땅 가나안을 첫 번째로 분배받은 유다지파는 본래 장자가 아니었습니다. 야곱은 네 명의 부인에게서 열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장자는 르우벤이요, 둘째는 시므온이며, 셋째는 레위요, 넷째가 유다입니다. 유다는 장남도 아니고 차남도 아니고 사남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다가 장자의 유업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말은 장자인 르우벤이 장자의 권리를 빼앗겼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이 임종을 앞두고 자식들을 불러 놓고 유언과 함께 자식들을 축복하는 이야기가 창세기 49장입니다. 3절에 보면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나의 능력이요, 나의 기력의 시작이라 위광이 초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마는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치 못하리니 네가 아비의 침상을 더렵혔음이라". 르우벤은 장자로서 많은 특권과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서모와 동침한 죄로 인하여 그 모든 것을 빼앗겼습니다. 장자로서 가족을 책임지고 돌보아야 할 책임은 제쳐두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에 혈안이 되었던 르우벤은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여 장자의 축복을 빼앗기고 만 것입니다.
유다의 바로 위의 두 형제 시므온과 레위는 어떤 문제가 있었습니까? 그들 형제는 자신의 여동생 디나가 세겜성의 추장의 아들에 의해서 강간을 당한 일로 인하여 세겜 성 사람들에게 거짓으로 평화 조약을 맺고 그들을 무자비하게 복수 극을 벌인 일 때문에 아버지의 미움이 되고 말았습니다. 야곱은 그들 형제를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의 칼은 잔해 하는 칼이로다.....그들이 그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창49:5-).
성경에는 이러한 일들이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 이어지는 족장의 역사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본래 야곱은 장자가 아닙니다. 에서와 쌍둥이로 태어날 때, 에서의 발뒷꿈치를 붙잡고 나온 차남입니다. 그런데 에서는 장자의 권리를 야곱에게 빼앗겼습니다. 여기에는 많은 설명이 필요하지만 에서가 장자의 권리에 대해서 어떤 중요성을 느끼지 못하였다는 사실이며, 하나님의 역사는 반드시 혈통이나 장자권에 의해서 진행되기 보다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믿음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첫 번째 아들은 암논입니다. 그러나 그의 이복 누이동생 다말을 강간하고 압살롬에게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길르압은 일찍 죽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 왕위를 이어갈 자가 압살롬인데, 그는 아버지를 대항하여 구테타를 일으켰다가 진압군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고, 아도니야도 아버지께 반역하였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고 죽었습니다. 그리고 열 번째 아들인 솔로몬이 왕위를 계승하였습니다.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세상 역사는 우연히 저절로 자연적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와 간섭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한치의 오차도 없이 자연과 인간들의 역사를 진행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역사를 진행하실 때, 반드시 사람을 통해서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배우고 있듯이 하나님의 역사는 반드시 혈통과 장자의 권리를 통해 진행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혈통의 계승자요, 축복의 상속자로 태어난 장자일지라도 하나님의 역사에서 쓰임 받지 못한 경우가 다반사이며, 하나님의 역사의 중앙에는 남성들뿐만 아니라 여인들, 그것도 조금은 부끄러운 이력을 가진 여인들이 등장하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예수님의 족보에 등장하는 다섯 여인들 - 다말은 남편이 죽자 혈통을 잇기 위해 시아버지와 동침하였던 여인이었다. 라합은 가나안 땅 여리고 성의 기생이었으며, 다윗의 증조모가 된 룻은 모압 여인으로 남편과 사별한 후 보아스와 재혼한 여인이다.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는 다윗과 간통죄를 지은 여인으로 솔로몬의 어미가 되었으며, 예수님의 모친이 된 마리아는 정숙한 여인이었지만 세상적인 가치로 보았을 때 처녀의 몸으로 잉태해야 하는 수모를 겪은 여인이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절대로 교만하면 안됩니다. 세상적인 지위에 너무 안주해서도 안됩니다. 여러분 속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누리고 있는 세상적인 지위과 물질적 풍요는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흩어질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손이 떠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는 이미 늦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믿으면 아멘 합시다.
구원받았으면 아멘.
그렇습니다.
우리는 본래 외인이요, 이방인이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받을 축복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다 끝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교만하여 하나님을 떠나고 세상의 지위와 물질적 풍요에 안주하며 주의 백성답게 거룩하게 살지 못하면 언제든지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축복과 장자의 축복권이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송악교회 성도들에게서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지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송악교회 성도들에게서 축복이 떠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송악교회 성도들의 삶에서 언제나 신실하신 하나님의 축복이 지속되기를 축원합니다.
장자의 축복은 행동하는 신앙인에게 돌아간다.
두 번째로 생각해보고 싶은 것은 누가 장자의 축복을 누릴 자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창세기 49장 8-12까지의 말씀을 보면 야곱이 유다를 축복할 때, 유다가 아주 적극적인 인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형제들의 찬송이 될 것이다.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다. 네 형제들이 네 앞에 절하리라. 유다는 사자 새끼라, 암사자, 수사자......등" 유다는 본래 겁이 없고 사자의 힘을 가진 지도자로 태어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들 중에서도 책임성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창43:1-10). 야곱은 유다의 이러한 면을 높이 샀고, 결국에 유다에게 장자가 받을 축복을 준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유다 지파의 지도자로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기업을 얻은 갈렙 역시 말로만 믿음을 보이는 사람이 아니라 행동하는 신앙이었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가나안 땅 정복 작업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85세나 된 노구를 가지고 아낙 자손과 맞서서 싸운다는 것이 말로만의 믿음 가지고 될 일입니까? 갈렙은 행동하는 신앙인 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아낙 자손을 추방하고 헤브론을 차지하였습니다. 그의 의지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드빌을 정복하는 자에게 자기 딸을 아내로 주겠다고 제의할 만큼 그의 의지는 빛이 났습니다. 나는 그의 딸 악사와 사위인 옷니엘의 믿음도 귀하게 봅니다. 그런데 이들의 믿음 뒤에는 갈렙의 행동하는 신앙이 본이 된 것입니다.
나는 야곱을 좋아합니다. 그의 인격이나 성격이 저를 닮았기 때문입니다. 욕심도 많고, 질투심도 많고, 언제나 앞서서 나가려는 그의 도전 정신은 저에게 꿈을 줍니다. 나의 좋지 않은 인격을 포장하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결정적으로 제가 야곱을 좋아하는 단 한가지 이유는 그의 행동하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는 환경을 탓하고 앉아 있지 않았습니다. 둘째이기 때문에 받을 서러움을 곱씹으며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까 늘 고민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기회가 왔습니다. 배고픈 형 에서가 장자의 가치를 별로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아버지로부터 축복권을 가로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야곱의 행위가 정당한 것은 절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입니다. 야곱은 축복기도만 받으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축복 기도를 받고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장자권을 빼앗은 대가로 집에서 나와 광야로 떠돌아야 했습니다. 축복기도를 받고 오히려 곤궁해졌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서 광야 한 복판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늘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붙잡았습니다. 그것이 야곱이 축복을 받은 비밀이 된 것입니다. 야곱은 장자의 권리와 축복보다 더 큰복을 바라보고 쟁취한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의 위대성입니다. 외삼촌의 집에 가서 20년간 수없이 속임을 당하면서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광야에서 만난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아내를 얻는 일에도 적극적입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라헬과 결혼하기 위해 14년을 수일처럼 여기며 살았다고 했습니다. 얍복강 나루터에서 "나를 축복하지 않으면 나는 당신을 가게하지 않겠나이다" 라고 매달리던 그의 열정과 행동하는 신앙이 이스라엘의 기원이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좀 더 높은 이상을 바라보고 사는 백성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엘리야를 따라다니며
갑절의 영감을 구한 엘리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끊임없이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유다는 네 번째 아들이었지만 장자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야곱도 요셉도 모세도 솔로몬도 장자는 아니었지만 하나님의 역사의 중요한 역할을 감당을 하였습니다. 만약에 그들이 시대적인 상황과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면서 낙심하였다면 그런 큰 일에 쓰임을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어느 철도 역무원이 한 여름에 냉동차 안에 갇혀 사망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냉동차 안에서 일하던 그 사람은 뒤늦게 자신이 그 속에 갇힌 사실을 알고 문을 두들기고 소리를 지르며 몸부림을 쳐보았지만 밖에서 잠근 문을 열리지를 않았습니다. 점점 자신의 몸이 얼어 들어가는 느낌이 들면서 추위와 싸우던 그는 바닥에 이런 글을 남기고 죽어갔습니다. "너무도 추워서 몸이 얼어붙는 것 같다. 차라리 그냥 잠이 들어 버렸으면 좋겠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이 될 것이다" 그 다음 날 아침 늦게서야 다른 직원들에 의해 발견된 그의 시체는 얼어죽은 것이 아니라고 판명이 났습니다. 왜냐하면 그날 밤에 그 냉동차는 가동이 되지 않았고, 냉동차 안의 온도계는 사람이 얼어죽을 만큼 차갑지를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냉동차 안에 갇혀 있다는 절망과 이제 얼어죽을 것이라는 공포심이 원인이 된 것입니다. 사방으로 우겨 싸임을 당하는 역경 속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좀더 높고 고상한 인생의 목표를 지니고 살아가야 합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오른 손을 내밀어 붙드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행동하는 신앙인들이 되셔서 장자의 축복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장자의 축복은 구체적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유다지파가 받은 땅의 사면 경계와 120개의 성읍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은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체적인 축복의 증거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뜬구름 같은 허상이 아니라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필요한 모든 것에 구체적으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실제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달콤한 약속으로 그치지 않고, 우리를 위해 건강의 축복, 부와 번영의 축복, 사회적인 평안과 의식주의 해결 등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것들로 축복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축복을 좋아한다는 세상적인 비판에 예민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하나님께서 복의 근원이시며, 아브라함을 불러서 놀라운 축복을 약속하셨고, 그대로 이루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계시면서 사람들의 궁극적인 문제들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예를 들면, 각색 병에 든 자들을 고쳐주셨으며, 먹을 것이 없을 때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굶주림을 해결해 주시기도 했습니다. 세리와 창기 같은 죄인들이 진정한 자유를 원하면 그들을 용서하시고 축복하시면서 새로운 삶을 살도록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죽어 슬픔에 빠져 있을 때, 찾아가셔서 살려주시고 기쁨을 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구체적인 축복들입니다. 그러므로 축복은 받아서 잘 누리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신명기 28장 1절-14절까지 이어지는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보았습니다. 그곳에 보면 하나님의 축복이 아주 실질적이고 구체적입니다. 한번 다함께 읽어볼까요? 핵심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종만 하면 그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강금형 성도께서 뽑아 놓은 데이터 이야기). 이스라엘 백성들은 손으로 만지고 느낄 수 있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유업, 가나안 땅을 축복으로 받았습니다. 나는 송악교회 성도들이 여기에 나오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자녀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000년을 축복의 원년으로 삼고 "주께서 내게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소서"라는 주제를 정하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빚이 모두 청산되었습니다. 이제는 여러분들의 가정에 하나님께서 필요한 모든 것들을 채우시는 역사가 일어나리라 믿습니다. 먼저 믿음의 지경이 넓어지시기를 바랍니다. 교회의 사역의 장이 커지기를 바랍니다. 자녀들의 꿈이 넓어지기를 소원합니다. 나아가서 여러분들의 사업과 농토와 기업 위에 하나님의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축복이 임하도록 열심히 구합시다.
출처: 송악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