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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의 의미(시편 34:1~6)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찬양”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노래하는 것을 떠올립니다. 단순히 노래하는 것만이 찬양의 전부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찬양하면 노래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찬양은 신구약 성경이 공통적으로 언급하는 핵심적인 신학적 개념입니다. 신구약 성경은 찬양이 노래로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를 드려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찬양을 노래나 음악으로만 한정한다면 찬양이라는 개념이 가진 깊고 심오한 의미를 다 담아낼 수 없습니다.
찬양이 우리의 삶으로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노래를 못하고, 이렇게 음악적인 소질이 없는 사람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찬양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드려서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 건강, 우리가 가진 물질, 우리의 삶의 성공과 실패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찬양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높여드리려는 마음가짐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고,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을 높여드리려는 마음만 있다면 그 삶이 찬양이 될 수 있기에 우리의 삶 자체가 찬양의 매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서 이사야서 43:21의 말씀을 통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사야 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사야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이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 전체, 존재 자체를 통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성도의 중요한 의무입니다.
하지만 인간에게 이러한 찬양에 대한 의무가 주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죄 가운데 있는 존재여서 하나님께 돌려야 할 찬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고, 다른 대상에 돌리기도 합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 대신에 다른 대상을 찬양하는 우상숭배의 죄를 종종 범하고는 합니다. 시편 34:1에 보면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시편 34:1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
시편 34:1을 쓴 시편 기자는 자신이 “항상” 하나님을 송축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시편 기자와 같이 항상 하나님을 찬양하지 못합니다. 가장 먼저 많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찬양하는 죄를 범합니다. 자기 자신을 찬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에 어긋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하나님 대신에 자기 자신을 더욱 사랑하고 찬양합니다. 이렇게 자신을 찬양하는 것은 매우 반신앙적인 일입니다.
자기 자신을 찬양했던 대표적인 인물이 성경에 등장합니다. 바로 헤롯왕입니다. 헤롯은 하나님 대신에 자신을 신으로 선포했기에, 하나님의 벌을 받아 그 몸이 벌레를 먹고 죽고 말았습니다. 이에 비해서 다윗왕은 사람들이 자신을 높일 때 그 마음이 교만에 빠지지 않도록 아주 조심스럽게 경계했습니다. “사울이 죽인자는 천천이고, 다윗이 죽인자는 만만이다”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래를 부르면서 다닐 때, 다윗은 사울의 질투로 인해서 죽을 까봐 아비멜렉왕에게 도망쳤습니다. 아비멜렉 왕에게 도망친 이후에도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다”라는 외침이 들려오자, 다윗은 미친척을 하면서 자신에게 그 정도의 능력이 없음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애를 썼습니다. 이 모습을 본 아비멜렉 왕은 다윗을 숨겨주어도 될 것이라고 판단을 내렸습니다. 이처럼 다윗은 사람들이 자신을 높일 때, 오히려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낮출 줄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민족은 너무 쉽게 누군가를 우상화하는 우를 범하고는 합니다. 얼마 전에도 정현이라는 이름의 테니스 선수가 테니스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자 모든 언론들이 그의 영웅적인 면모를 부각시키는 기사를 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지금은 순식간에 사람들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져 있습니다. 이것 말고도 여전히 북한에서는 최고 지도자를 “최고존엄”이라는 표현으로 지칭하면서 거의 신으로 떠받들고 있는 이해할 수 없는 행태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또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기업이 큰 성과를 내고 성공을 하면 그 기업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나 기업 문화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기 보다는 기업을 성공하도록 이끈 리더나 개인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우리나라만큼 아이돌 가수나 영화배우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문화가 형성되어 있는 나라도 드뭅니다. 이렇게 “개인”에 초점을 맞추고 개인의 업적을 칭찬하려는 시도는 쉽게 사람을 우상화하는 것으로 귀결되고는 합니다.
또 종종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이나 단체를 우상화하기도 합니다. 과거에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사조직들이 정치, 경제 및 사회 전반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끼쳤고, 그 조직의 구성원들은 자신이 속한 조직을 그 어느 것 보다 중요하게 여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나님보다 더욱 찬양받는 조직이나 집단을 흩으십니다. 바벨탑을 쌓아서 자신들을 하나님보다 더욱 높이려 했던 인간들을 흩어놓으셨듯이,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하나님보다 더욱 소중하게 여기는 조직이나 집단을 흩으십니다.
과거에 우리나라에 뉴키즈 온더 블록이라는 이름의 외국 가수가 방문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당시에 이 가수가 공연하려는 것을 보려 했던 관중들이 과도하게 가수 쪽으로 나아가려던 와중에 압사 사고가 일어나 1명의 여고생이 숨지는 안타까운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종종 가수나 유명인에게 열정적으로, 때때로는 광적으로 열광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타인에게 열광 받기를 원하며, 열광 받는 자리에 오르기를 간절히 원하기도 합니다. 종교인이든, 정치인이든, 예능인이든 사람들의 인기를 얻으려고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기는 영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연예인들은 자신의 인기가 순식간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큰 허무감을 느끼고는 합니다. 이 허무감으로 인해서 많은 연예인들이 정신병에 시달리기도 하고, 극단적으로는 약물에 손을 대기까지도 합니다.
그런데 피조물인 인간은 결코 하나님처럼 찬양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피조물인 인간은 모두가 동등하기에 그 어느 한 사람도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높임을 받거나 찬양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고 피조물인 인간을 찬양하는 것은 큰 죄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로마서 1:25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로마서 1:25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성경 말씀이 증거하는 대로 우리는 피조물을 찬양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에 맞게 하나님만을 높여야 합니다.
제가 미국에서 목회를 하는 동안 다른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큰 은혜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바로 남포교회 박영선 목사님의 설교입니다. 그런데 제가 시카고에서 목회를 하는데, 어떤 교인분이 이 목사님의 설교 테잎을 가져와서 저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에게 박영선 목사님의 설교를 꼭 들어보아야 한다면서 설교 테잎을 시도 때도 없이 나눠주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이분은 박영선 목사님의 테잎을 거의 강권하다시피 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테잎을 나눠주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보다 못해서 그 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예수님보다 박영선 목사가 더욱 영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매일 성경을 읽어도 모자를 판에 박영선 목사의 설교가 성경보다 더 낫습니까? 이렇게 하시는 것은 박영선 목사님도 원하지 않는 일일 것입니다.”
인간이 이렇게 쉽게 타인을 두둔하고, 나아가서 사랑하고 찬양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기에 우리는 항상 깨어있어야 합니다. 혹여나 내가 조물주보다 피조물을 더욱 찬양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늘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시편 34:1~6은 찬양이 무엇인지, 찬양은 누구에게 드리는 것인지 아주 자세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시편 34:1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
시편 34:1에서 시편 기자는 내가 “항상” 여호와를 찬양한다고 말합니다. “항상” 여호와를 찬양하는 것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지, 심지어 고난과 역경의 순간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말합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은 삶의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또 시편 34:1에서 시편 기자는 자신의 “입술”로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마음뿐 만이 아니라 입술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3:6~11은 우리의 입술에 대해서, 우리의 입과 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야고보서 3:6~11
6.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7.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8.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9.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10.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11.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우리의 입으로 다른 사람을 저주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찬양할 수는 없습니다. 성도는 야고보서의 말씀이 전하는 바와 같이 그 입을 통해서 하나님을 찬양하기만 해야 할 것입니다. 시편 34:2~3은 찬양은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으로 해야 하는지 아주 자세히 말하고 있습니다.
시편 34:2~3
2.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
3.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의 이름을 높이세
시편 34:2~3이 말하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먼저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이고, 다음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자랑하고 높이며, 죄인인 우리를 구속하고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자랑해야 합니다. 만물을 지으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만물을 회복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만물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사람들에게 자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시편 34:4~5은 우리가 찬양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것들에 대해서 말합니다.
시편 34:4~5
4.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5. 그들이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내었으니 그들의 얼굴은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
시편 34:4~5이 말하는 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찬양할 때, 우리를 모든 두려움에서 건져주시고, 우리의 얼굴을 부끄럽지 않게 해주십니다. 제가 과거에 신학교를 다닐 때, 병원 선교를 다녔습니다. 특히 중환자실에 전도를 가면 그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 때문에 전도를 갔던 저를 비롯한 학생들이 기가 눌려 있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전도하는 학생들과 함께 찬양을 하면, 어두웠던 중환자실에 하나님의 평화가 임하면서 그 자리에 함께 있던 환자들의 얼굴에 웃음이 번지는 것을 목격했던 적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찬양의 힘입니다. 시편 34편이 말하는 것처럼, 찬양할 때, 우리는 모든 두려움과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성도는 그 가사를 외우고 있는 찬양이 한 곡 정도는 있어야 합니다. 시편 34편은 더 나아가 찬양을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두려움에서 건져주실 뿐 아니라 찬양하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광채가 날 것이라고 증거합니다. 즉,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의 얼굴에는 기쁨과 미소가 떠나지 않게 됩니다. 에큐메니칼 공동체인 떼제공동체에서 부른 찬양 중에 이러한 찬양이 있습니다.
어둠도 주님 앞에 어둠 아니라
대 낮과 같이 환하오리다
근심과 불안이 많은 사람들이 이 떼제 찬양을 부를 때, 마음의 두려움이 없어지고 얼굴이 환하게 빛이 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찬양의 힘입니다.
찬양하는 것은 우리 몸에도 좋은 영향을 줍니다. 실제로 찬양, 좁게 말해서 노래하는 것은 우리의 건강에 아주 긍정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노래는 인간이 좌뇌와 우뇌를 동시에 사용하는 활동 중에 하나입니다. 따라서 노인분들께서 노래를 하고 찬양을 할 경우에 그 뇌가 노화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시편 34:6~7은 더 나아가 찬양을 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건지시고 구원하신다고 말합니다.
시편 34:6~7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그들을 건지시는도다
시편 기자는 우리가 찬양을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주변에 진을 둘러쳐서 우리를 건지시고,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신다고 말합니다.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혔는데도 밤새워 찬양하였더니 옥문이 열려 자유롭게 된 것처럼, 우리가 찬양할 때, 우리를 옥죄고 있던 모든 환난과 역경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찬양은 오류가 없는 유일한 신학이다.” 모든 신학에는 오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학이란 하나님에 대해서 진술하는 인간의 말이기 때문입니다. 또 인간의 신앙에는 조금씩 오류가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믿을 때,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과 살고 있는 나라의 문화의 영향 아래에서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오류가 없는 신학, 오류가 없는 신앙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찬양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찬양하는 신학과 신앙은 오류가 없는 완벽한 신학이자 신앙입니다. 바르트는 더 나아가 찬양을 윤리의 기반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즉,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이는 것을 윤리의 기반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치고 선하지 않은 사람이 없고, 이웃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은 그 찬양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 것이라는 점을 보증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찬양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환난에서 건지시고, 우리를 두려움에서 건지시며, 우리의 삶을 형통한 길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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