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명시의 대표적인 서예가인 운계 신성재님이 관람객들의 무병수와 불로장생을 기원하며
'늙지 않는다' 는 뜻을 가진 '불로문' 을 예서체로 쓴 곳이다.
크고 작은 광석들을 실어 나르던 '광차' 를 옛 형태로 복원했다.
광부들이 쉽게 광석을 운반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작은 구멍인 '조구통' 도 보인다.
근대역사관에서 광산의 역사와 광부의 삶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1950년대에는 최대 500여명의 광부가 함께 근무할 정도로 우리나라 산업화에 기여를 했다.
60여 년 동안 총 길이 7.8km의 갱도가 만들어져 한창때는 하루 350톤의 광석을 처리했던 곳이다
6.25가 시작되고 마을에 폭격이 이어지자 마을 주민들은 동굴로 피신하였다.
피신한 사람 중에 산모도 있어 동굴에서 낳은 아이를 '굴댕이' 라고 불렀다고 한다.
해머, 괭이, 삽 등의 공구부터 권양기 등 채광을 위한 도구들을 모두 제작하여 사용했다
광부들이 폭파를 통해 쪼개진 광석들을 권양기를 이용하여 상층부로 이동시키는 과정까지
전시해 두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광부로 근무하면 징용을 면제해 주어
가족을 부양해야 했던 많은 사람들이 광부로 근무했다.
동굴 속에 식물이 살아가는 식물원이 있는 것은 처음 보았다. 싱싱한 잎과 꽃을 보고 있으니 신기하다
벽면을 활용하여 만든 것으로 식물이 생육하는데 필요한 태양빛과 유사한 LED 조명을 상부에 설치했다.
식물의 생장과 함께 산소 공급과 공기 정화 작용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