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31] 정수원(鄭壽源) - 소명하신 뜻길 따라 4. 경남 지구를 맡고 - 2
8 얼마 후에 득남했다는 소식을 들으니 어리벙벙하면서도 기쁜 마음이 더해 가며 아빠가 되었다는 실감이 왔다. 선생님께서는 애기 이름을 진우(珍雨)라고 지어 주셨다.
9 그후 100일이 지나자 집사람이 애기를 데리고 와서 결혼한 지 1년이 지나서야 가정생활을 시작했지만 식구들은 대부분 혼자서 교회에 오는데 지구장 부부가 안락한 신혼생활을 하게 되니 미안하고 송구스러워 애기를 데리고 부부가 마주 앉아서 아기자기한 얘기를 나누지 못하고 식구들과 한자리에서 화동하며 지내도록 노력했다.
10 어떤 때는 식구들 보기가 미안해서 저녁 먹은 후에는 방에서 나와 가지고 2층 예배실로 가서 한참 있으면 집사람이 애기를 안고 온다. 그러면 나는 옥상으로 올라 간다. 얼마가 지나면 집사람이 또 올라온다. 이렇게 숨박꼭질을 하면서 신혼생활을 했지만 나혼자 있을 때보다 집사람과 애기가 함께 있으니 교회의 분위기가 훨씬 좋았다.
11 1962년 하계 40일 계몽기간에는 전식구들을 개척전도에 동원시키고 순회를 하였다. 나는 순회를 하면서 ‘어떻게 하면 부모의 사랑을 식구들에게 충분히 줄 수 있을까’ 하고 항상 조급하였다.
12 내가 경남지구에 1년간 시무하면서 전 지역본부를 2회 이상 순회하였다. 어떤 때는 부산(釜山)을 출발하여 마산(馬山)에서 하룻밤을 자고 진주(晉州)와 산청(山淸), 함양(咸陽)을 거쳐서 거창지역(居昌地域)의 가조면(加祚面) 교회 헌당식(獻堂式)에 참석하느라고 혼난 적도 있었다.
13 40일 계몽을 할 때는 관(官)에서까지 제지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아신 선생님께서는 긴급히 지구장회의를 소집하시고 “우리 교회는 간판을 떼는 일이 있을지라도 계몽과 봉사로써 하늘의 뜻을 전하는데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간곡히 지시하셨다. 그후 우리는 더욱 열심히 활동하여 주위로부터 인정을 받아서 우리를 반대하는 공문까지도 취소하는 일까지 있었다.
14 1962년 9월경에 선생님께서 전국순회 도중에 경남지구에 오셨다. 나는 부산역에서부터 영접하여 택시로 교회로 모셨다. 식구들은 연도에 2열 종대로 서서 환영하였다. 선생님을 모시는 데는 여러가지 어려움이 많았다. 식당과 침소 등이 매우 불편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