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中道)는 불교에서 '치우치지 아니하는 바른 도리'를 말한다.
고타마 붓다는 29세에 출가하여 35세에 깨달음을 얻어 불타로 될 때까지의 6년간 그 대부분을 가혹한 고행의 길에 정진하였다. 그러나
그 고행도 고타마 붓다에 있어서는 몸을 괴롭게 하는 것뿐으로서 참된 인생 문제의 해결은 되지 않았다.
출가 전의 고타마 붓다는 왕자로서 물질적으로는 풍족하여 즐거움에 찬 생활을 보내고 있었으나 그러한 물질적인 풍족함만으로는 인간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고타마 붓다는 출가 전의 쾌락(樂行)도 출가 후의 고행도 모두 한편에 치우친 극단이라고 하며 이것을 버리고 고락 양면을 떠난
심신(心身)의 조화를 얻은 중도(中道)에 비로소 진실한 깨달음의 길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의 체험에 의해서 자각하였다.
성도(成道) 후 그때까지 함께 고행을 하고 있던 5인의 비구(比丘)들에게 가장 먼저 설교한 것이 중도의 이치였다.
중도는 팔정도라고 하는 구체적인 실천에 의해서 지탱되는 준엄한 도이며, 여기서는
나태 · 번뇌 · 노여움 · 어리석음에 의해서 부지 중 어떤 것에 집착하려고 하는 어떠한 치우침도 모두 버려야 할 것이 강조된다. / 위키백과
서연 : 듣기 좋은 말도 세 번 이상 들으면 지겹다고 하잖아요? 요새는 12처 대해 계속 말하고 있으니.. 지겹다는 생각이 살짝 듭니다.
그러니 다른 주제를 갖고 말하면 좋겠어요.^^
주나 : 이심전심이라고.. 저 역시 12처만 자꾸 말하다 보니 입에서 냄새.. 향기가 너무 심해요^^ 주제를 바꾸지요.
서연 : 중도가 생각나는데요?.
주나 : 어찌하여 자꾸 어려운 주제를 들고 나오나요^^.. 지금까지 너무 어렵게 살아온 것은 아닌지..
그래서 본인도 모르게 자꾸 어려운 길을 선택하는 게 습관이 된 것은 아닌지요?.
말하는 불자가 되려면 앵무새가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카피한 것처럼 기억력이 좋아 들은대로 똑같이 말하면 아니 된다는 거지요.
보거나 들은 것이 있으면 그것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조용한 곳에서 보거나 들은 것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겁니다.().
중도(中道)에 중(中)의 뜻은 가운데 이지요. 해서 영어로 Middle Way 라고 하는데..
가운데 길이라고 글자 뜻대로 아는게 세존께서 전하려는 중도를 오해하게 합니다
서연 : 위키백과에서 설명하는 중도를 보면 정확하게 가운데라는 의미를 살려서 보여주니..
보면 볼수록 중도는 쾌락 길이 아니고 고행 길도 아닌 가운데 길로 보이는데..
선생님은 이번에도 이상하게 말씀을 하네요!
주나 : (이해한다는 눈빛으로) 세존의 설법을 정리하던 논사들은 상대 수준에 따라 법 설명하는 깊이가 다르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하여 그것을 상대에 따라 설하셨다고 대기설법이라 하셨어요.
그 말은 법을 이해하는 수준이 상중하가 있다는 게 되니.. 달리 말하면 사람들의 능력은 상중하로 나눌 수 있다는 게 되어..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 라는 말이 또 생깁니다.
서연 : 선생님이 보시기에.. 저는 어느 근기에 해당하나요?^^.
주나 : 저 보다 훨~ 뛰어나니.. 더 이상 있을 수 없는 극상근기에 해당하지요. ㅎㅎㅎ^^
서연 : 아휴, 선생님두.. 가끔 바른 소릴 하시네요. ㅎㅎㅎ^^
주나 : 업이 있으니 업보에 따라 태어날 때 사람마다 다른 근기로 태어난다고 하면 존재론자가 되지요.
해서 사람 위에 사람있고, 사람 밑에 사람 있다 하고.. 세상은 소수의 갑과 다수의 을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이죠. 그러나
업보는 있지만 작자는 없다는 말은 상중하의 다른 근기로 태어난 듯 보이나 실은 그런 근기는 없다고 하는 겁니다.
보살의 실천은 사회 약자를 보호하고 대변하는 모습이 주를 이루는 것은.. 불평등 사회에서 본래 평등으로 돌아가려고 하기 때문이지요.().
저는 서연님의 능력은 극상근기임을 인정하면서.. 사람의 차별은 본래 없다는 눈으로 봅니다.^^
위키백과의 중도 설명은 존재론자 입장에서 그것도 하근기의 눈으로 보는 설명이 됩니다.
고락 중도에서 고란 석가 당신의 6년 고행을, 락이란 왕궁에서 물질적으로 모자람이 없던 쾌락적인 생활을 말하고..
중도란 그 둘을 부정하는, 둘과는 다른 길로 8정도로 실천이 되는 길이다.^^.
중도 설명 끝!^^
그런데 의심많은 자는 저 내용을 보면 의심이 생깁니다.
석가모니 자신의 삶을 고와 락으로 보는 것은 인정. 그런데
고행림을 떠나 얼마 지나지 않아 성불을 하신 걸로 알고 있는 데..
언제 중도인 8정도를 닦았다는 건가?.
하여 중도를 다르게 설명하니..
쾌락의 길은 인생은 단 한 번으로 죽으면 나는 끝이므로 윤회로 인한 업보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 이 인생을 무조건 즐기자^^ 또는 인생은 한 번뿐이니 나 또한 죽음을 벗어날 수 없다. 이 얼마나 허무한 일인가! 하게 되는데..
인생을 단 한번만으로 보는 쾌락주의자나 허무주의자를 단멸론자라고 합니다.
한편 윤회와 윤리를 강조하며 명상이나 고행을 강조하는 자이나교나 힌두교와 같은 영혼 불멸론자가 있으니 그들을 상론자라 하지요.
그에 반해 중도란 단멸론이나 상론이 아닌 무아를 향한 길이라 하며 8정도를 통해 목적을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중근기를 향한 설명이라 하면..
서연님같은 상근기를 향한 설명은?..
본래 무아인데 무엇을 닦고 무엇을 성취한단 말인가!
한가로운 미소뿐!. 염화시중의 미소
그것이 중도.
서연 : 저는 상근기가 아니네요.. 중근기도 아슬아슬인 것 같아요.. 하근기가 딱이네요^^.
주나 : 상중하는 본래 없다니까요!^^.
세존께서 다섯 사문에게 하신 말씀은 중도 가운데 길이라 하셨지만.. 설명을 보면
둘을 관통하는 가운데 길이 아닌
그 두 세계 와는 차원이 다른 길을 중도라 하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유의 세계요, 존재 세계라 하는데.. 불교에서는 것을 욕계, 색계, 무색계로 설명..
그런 세계를 점프하여 빠져 나가거나 또는 차원이 다른 세계로 들어가니.. 그것을 중도라 하셨다는 겁니다.
서연 : 지금.. 나와 세계를 생기게 하는 12처는 심연생으로 생긴 것이지.. 6근6경이 아니다 라고 하는 차이를 설명하는 거지요!
주나 : 부처님의 설법은 한치의 차이도 허용하지 않는다고 하셨어요. 12처가 존재가 아닌 심연생이라면..
중도 설명 또한 심연생인 무아와 하모니를 이루며 설명이 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요?^^
서연님 지적한 대로예요.
12처 설명은 나라는 주체는 몸이 생기기 이전 부터 있다거나 또는 몸이 곧 나가 아닌 몸과 마음을 연해 후험적으로 생긴 것이죠.
고행주의이며 신흥사상인 자이냐교는 부처님 당시 불교보다 세력이 더 컸어요.
그런 자이나교를 세존께서는 냉정히 비판하시는데.. 그 이유가 경쟁 상대가 아니라.. 바로
지나라는 항상 존재하는 유아를 인정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당시 우파니샤드인 힌두교를 직접적으로 비판하지는 않았지만.. 힌두교 역시 유아인 아트만을 바탕으로 하기에
말하지 않아도 비웃을 수 밖에 없다는 거죠.
따라서 불교는 무아를 가르치는데
무아란 12처에서 생긴 나를 부정하는 것임을 알지 못하고, 이 몸과 마음의 주인인 나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알면..
허무주의에 빠질 확률이 매우 높지요.
서연 : 하지만 '나는 5온의 화합으로 생긴 것이니 5온이 인연따라 흩어지면 나는 사라진다'라고 알아도..
충분할 것 같은데요?.
주나 : 나는 5온의 화합으로 생긴 것이란 말은 유물론자의 주장인 '생각은 물질의 부산물'이라는 주장과 차이가 있습니까?^^.
역사적으로 공산주의가 세계에 전해졌을 때.. 동남아시아 승려들은 공산주의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어찌 중도에 서 있지 못하고.. 그런 뼈아픈 일이 벌어졌을까요?..
동남아시아 불교는.. 승려들은 5취온을 존재로 보았기 때문에 열렬한 공산주의자 편에 서게 된 것이지요.
불교는 자본주의보다는 공산주의와 가깝게 보이지만.. 중도는 결코 유물론이 아님을 분명히 보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분명히 체득하려면 나를 생기게 하는 12처가 심연생임을 깨치지는 못해도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어..
승려라면 유물론자가 아님을 실천으로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반복하지만 중도란 고와 락 중간이 아니고, 삶은 일회뿐이라는 단멸론과 윤회를 포함해 영원히 존재한다는 상론의 중간이 아닌..
그 둘에서 점프하듯 벗어나 있는 것이요, 다른 차원으로 건너가다 란 뜻입니다.
서연 : 다른 차원이라 무슨 뜻이죠?.
주나 : 요새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현재와 과거를 마구 드나드는 주제가 많은데.. 그 핵심은 3차원이라 세계에서 시간은 한 방향으로 곧 과거에서 미래로만 진행되는 데.. 차원이 달라지면 과거에서 현재로, 미래로 그냥 건너가 버리죠.
한 방향의 시간인 세계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섞여 있는 세계는 서로 차원이 다르다고 하는 겁니다.
우리는 그것을 마음 세계에서 경험하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고락중도를 설명하면..
사람들은 고 또는 낙 또는 어중간한 선택을 하고 살아간다. 그러나 중도란 그런 세계에서 벗어나 세계를 말합니다.
위키백과 설명을 따르면.. '중도는 팔정도라고 하는 구체적인 실천에 의해서 지탱되는 준엄한 도'가 되어..
바르게 보고[정견], 바르게 사유하고[정사유], 바르게 말하고[정어], 바르게 행동하고[정업], 바르게 사는 게[정명]
중도라고 하는 건데.. 어떻게 보면 바르게 보는 것이고, 어떻게 보는 게 바르게 보지 않는 겁니까?
그 기준이 뭐냐는 것이죠.
서연 : 기준이요?. 바르게 볼 때 기준이라.. 좋은 것은 좋은 것으로 나쁜 것은 나쁜 것으로 본다..^^
주나 : 강자인 갑에게 좋은 것과 약자인 을에게 좋은 것은 같은가요?^^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소련 군에게 선한 것과 우크라이나 군에 선한 것은 같습니까?.
고락중도 또는 단상중도라 할 때.. 단견이란 오직 나는 한번 뿐인 삶이라 하고, 상견은 나는 윤회하듯이 항상 존재하는 것으로
고락이나 단상은 주체인 '나'를 존재로 인정하고 세워지는 세계입니다.
중도는 바로 그런 유아[나]를 벗어나 있다는 것으로..
'나'를 선험적 존재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서연 : 휴~~~. 세존께서 "이 법은 너무 어려워 세상이 이해하기 너무 어렵구나" 하고 탄식한 게 이해됩니다.
이렇게 어려우니 배우다 이해하려다 포기하려는 자가 속출할 수밖에 없으니..
선지식들은 방편으로 "불법은 아주 쉬워요. 자기 코 만지는 것처럼 쉽습니다.^^"라고 달래는 거구요.
주나 : 불법을 이해하려면 먼저 선정에 들어 마음을 차분히 정리하라[사마타 수행]는 이유가 그것이죠. 그리고
마음이 차분하게 정리가 되었으면.. 그 힘으로 부처님의 법을 생각하며 그 뜻을 헤아리기 시작합니다[위빠사나 수행].
그것이 3학 가운데 정학과 혜학의 뜻입니다.
선정의 힘으로 법을 이해하려는 데 잘 안되고 흔들리면 일단 다시 마음을 다시 가다듬고..
그것은 수행에 많은 시간을 낼 수 있는 수행자가 할 수 있는 방법이지요.^^.
그러니 재가자는 그렇게 공부하는 수행자가 있다는 것을 알면 될 뿐!
재가자가 스스로 수행을 하고깨치려면 다친다고 눈치를 주십니다. ㅎㅎㅎ^^
제 친구 중에 철학을 전공한 자가 있는데.. 이 친구는 나보다 더 깊이 불교를 이해하고 있어요.
출가 수행자가 아님에도! 그러니 꼭 출가를 해 수행을 해야만 이런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것 물론 아니지요.^^.
오늘은 공부한 것은..
중도는 가운데 길 Middle Way 이 아니라..
차원이 다른 길 Another Dimension Way이라고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