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異端의 追憶 #82, 친구 아모스를 그리며...
-내가 만난 명의(名醫)들-
군 복무를 마치고 제대 하자마자 바로 어느 회사에 입사시험을 치렀다. 면접까지 통과해서 입사하게 되었고 그곳에 근무할 때 결혼도 하게 되었다. 숱한 권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칭 동방교와는 담을 쌓고 지내면서 생활전선에 전념했고 직장생활에 충실했다. 그리고 나는 일생동안 지금껏 세 분의 명의를 만났다.
내가 만난 명의들, 그 첫 번째
당시 수출드라이브 정책에 힘입어 확장일로에 있던 기업체의 근무는 과로의 연속이었다. 세월이 흐르고 어느정도 자리를 잡아 책임자급의 위치에 이르게 되자 업무는 더욱 가중되었다. 자금사정도 원활하지 못한탓에 외부 금융기관의 출입도 잦았고 외감법에 의한 외부감사와 국세청의 세무조사에 대비하는등 회사안팎에서 발생되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해결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처리해야 되는 관련 서류들은 계속 쌓여 있는데다 퇴근후에는 접대다 회식이다 해서 집에서 저녁식사를 한적이 거의 없었다.
세칭 동방교에 빠져 못 다한 공부에 대한 미련 때문에 직장생활 틈틈이 책상머리에 앉아 익힌 실력으로 한참 아래 동생뻘 되는 아이들과 같이 대입 예비고사를 치르고 모대학 야간부에 입학, 직장의 배려와 지원으로 대학4년을 졸업하고 다시 경영대학원에 등록, 향학열을 불태우며 주경야독으로 수료하는등 강행군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수 년 동안의 강행군과 과로가 누적된 탓이었을까, 어느때 부터인가 퇴근해서 밤이 되면 온 몸에 열이 펄펄 끓고 아침이 되면 힘이 하나도 없어 출근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부산대학병원에 입원하여 진찰을 받은 결과 ‘유사장질부사’라고하는 열병이었다. 부산대학병원에서는 환자가 인턴들의 실험대상인것 같았다. 흰 가운을 입은 의대생 인턴이 아무나 들어와 눈을 까서 뒤집어 보고 입을 벌려보라 하고 고개를 뒤로 젖혀보라는 등 자기들 마음데로 시켜보고는 그 결과를 가지고 그들의 진단 리포트를 작성하는 모양이었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 며칠만에 억지로 퇴원해서 성분도 병원으로 옮겨 버렸다. 이곳은 대학병원이 아니니 이놈 저놈 아무나 들락거리면서 괴롭히지 않아 장기입원 치료를 받게 되었다. 장질부사는 얼마후 치료되었지만 간염과 신장염의 합병증세로 한때는 의식이 아름아름하게 멀어져가는것이 죽음의 문턱까지 간 느낌이었다. 조금 정신이 들면 병원 도서관에서 여러 가지 도서들을 빌려다가 병실에서 읽으면서 3개월여 치료를 계속하고 있었다.
장질부사와 간염은 2-3주의 입원치료 후 나아졌지만 문제는 신장염이었다. 계속된 3개월의 입원치료에도 불구하고 사구체 신염은 여기서는 도저히 더 치료가 불가능하니 좋은 검진기계와 시설이 있는 서울의 세브란스병원이나 서울대학병원으로 가서 조직검사를 받아보아야만 정확한 진단을 내릴 수 있고 치료가능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고 담당 주치의가 설명했다.
담당 주치의의 권고로 성분도병원의 진료기록자료를 들고 서울로 올라갔다. 직장 상사의 소개로 그분의 친구인 서울시립병원장의 가정에서 며칠 신세를 지기로 되어 있었다. 아내와 같이 서울 세브란스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으니 세브란스의 담당의사는 당장 입원하여 조직검사를 받고 치료에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집에 가서 의논하여 오겠다고 하고 서울시립병원장의 집에 돌아가 그분과 의논을 하니 세브란스 병원에 대하여 “그렇게 해서 낫는 병이 아닌데 그놈들 비싼 기계 들여놓고 본전 뺄려고 무조건 조직검사 시킨다”고 하면서 욕을 해대는 것이었다. 무슨 내용인지 그때는 잘 몰랐다.
경희대학교 한방병원인 경희의료원으로 가서 한약을 지어 먹으라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양의사인 그분의 집에서도 한약 다리는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입원하지않고 그길로 바로 경희의료원으로 가서 진맥을 한후 한약만 한재 지어가지고 쇠약하고 지친몸에 기차여행은 도저히 무리일것같아 아내와 같이 곧 바로 비행기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해서 한약을 다려먹고 집에서 조리하고 있던중에 무척이나 걱정하시던 아버지께서 어디서 들었는지 누가 신장염을 앓아 온몸이 퉁퉁붓고 병세가 짙어 모두가 회생가망이 없다고 포기했던 환자가 어떤 한의원에서 지어주는 한약을 먹고 나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오셔서 아버지와 아내가 백방으로 수소문해서 신장염이 나은 그 사람을 마산 어디엔가까지 가서 찾게 되었고 한약을 지어 먹었던 한의원을 마침내 찾아내게 되었다. 서울의 종로 뒷골목에 있는 ‘부산해강한의원’이었다.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힘이 너무나 없고 몸이 쇠약해서 장시간 기차여행을 할 수 없어 비행기를 타고 택시를 타고 물어 물어서 종로의 ‘부산해강한의원’ 간판을 찾아 들어갔다. 아내의 부축을 받으면서 한의원의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나를 쳐다보고는 흰 수염을 턱 밑까지 기르고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 원장님이 “젊은이가 참 안 됐네 ....” 하시는 것이었다. 그래도 진맥을 해 보자고 하시면서 누워라고 하더니 이리 저리 맥도 짚어보고 배도 만져보고 하시더니 이번에는 “그래, 내가 살려주지... ” 하시는것이 아닌가.
너무나 기쁘고 반가운 소리였다. 자기 시키는 대로 하겠느냐고 하면서 이 약에는 무슨 벌레가 들어가는데 정성껏 달여서 시키는 대로 꼬박 꼬박 잘 먹고 한약 한재를 다 먹으면 병리검사를 해서 그 병리검사 결과를 우편으로 보내주고 그것을 보고 다시 약재를 조절해서 약을 우체국 소포로 부쳐 주겠다는 것이었다. 한약을 우체국 소포로 받고 약값은 은행으로 송금 시키고 병리검사 결과를 우편으로 보내고 이러기를 약 3개월, 병세가 호전되는 차도가 있어 6개월만에 복직하여 회사에 다시 출근하기 시작하였고 한약은 계속 우체국 소포를 이용하여 받고 약값은 은행으로 송금시키면서 거의 10재 이상 받아서 다려 먹은것 같다.
출근할 때 한약을 보온병에 넣어 들고 회사에 가서 시간 맞춰 먹곤 했다. 성분도 병원에서 입원가료 3개월, 집에서 한약을 먹으면서 약 3개월, 도합 6개월을 회사에 출근하지 못한체로 병치료를 하게 되었고 다행히 회사에서는 월급을 100% 지급해 주어서 그때 위기를 잘 넘기게 되었는데 지금도 회사에서 배려해준 그때의 일을 아주 고맙게 여기고 있고 잊지 않으려 한다. 한약을 계속해서 먹던 어느날 병리검사를 하니 신장기능이 정상으로 돌아왔고 완치 되었다는 판정을 받았다. 그 한의사 할아버지가 나를 살려내신 것이다. 내가 만난 첫 번째 명의였다.
내가 만난 두 번째 명의
어느해인가, 신장염으로 고생하면서 쇠약했던 몸이 차츰 회복되던 그 즈음인것 같다. 목구멍이 부어 오르고 음식을 넘길 수 없도록 따갑고 목젖이 늘어져 입을 벌리면 벌겋게 달아올라 보이곤 했다. 동네 의원인 내과에 다니면서 주사도 맞고 약을 타 먹으면 좀 나은듯 하다가 며칠이 지나면 다시 그런 증세가 재발하고 치료하면 또 가라앉았다가 다시 재발하기를 수십 번, 할 수 없었던지 동네 의원 내과의사가 말하기를 ‘수술로 편도를 잘라내면 재발하지 않으니 편도절제수술을 하는것이 좋겠다’고 권했다.
그때도 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것을 함부로 잘라 내면 되겠는가, 반드시 무슨 필요가 있어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겠는가’ 생각하면서 수술하지 않고 견디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또 아내가 어디서 들었는지 유명한 침쟁이가 있다는 것이다. 밑져야 본전이라 생각하고 아내와 같이 찾아갔다.
국제시장 옆의 부평동 어디쯤인가 싶다. 한의원도 아니고 흐름한 스레트로 지붕을 얹어놓은 어느 집 안으로 들어가니 방에 벌써 여러 사람이 누워 침을 맞고 있는 것이 보인다. 소위 말하는 무허가 의료행위다. 50대 정도 된 듯한 남자분이 내 설명을 듣더니 별 말도 없이 침을 쑥 꺼내 드는데 조그만 볼펜 정도의 길이가 되는 장침이 아닌가, 깜짝 놀래서 주춤하는데 옆으로 누우세요 하더니 그대로 귀 아래쪽의 목에 사정없이 찔러 넣는것이 아닌가,
굉장히 아플줄 알았는데 아프지도 않고 반대쪽으로 튀어 나올줄 알았는데 나오지도 않았다. 단 한 대 였다. 한 20분쯤 지났을까 다시 오더니 침을 쑥 빼 버렸다. 다 나은듯이 시원했다. 그때 돈으로 2500원인가 지불하고 나왔다. 그날 이후 수십년이 지난 오늘까지 한번도 내 인생에 편도선염이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신기한 일이었다. 그때 내가 그 무면허 침쟁이 한테 물었던것 같다. 어떻게 해서 이 침이 편도선염을 낫게 할 수 있느냐, 그가 대답했던것 같다. 이 침 끝에 병원균을 몽땅 모아서 불태워 죽여 버린다고. . . 나로서도 현대의학으로서도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다. 내가 만난 두 번째 명의였다.
세 번째 만난 명의
또 어느 해 쯤이던가, 계속해서 잔기침이 나왔다. ‘어험, 어험’하는 잔기침인데 며칠간이야 감기 기운인가 하고 참을 수 있지만 이것이 몇 주일을 넘어 몇 달간 계속되면 주위 사람들에게도 민망하고 사람이 진이 빠지게 된다. 특히 잠자리에 들어서 잠이 들듯 말듯 하다가도 잔기침이 불쑥 나오게 되면 오던 잠이 다 달아나 버리고 사람이 기진맥진해 지는 것이다. 온갖 한약, 신약을 다 먹어봐도 낫지 않고 몇 달 동안 잔기침이 계속되었다. 한번은 친구들 모임에서 '이노무 잔기침 때문에 미칠 지경'이라고 말했다. 그 중에 한 친구가 말하기를 ‘그러면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우리 외삼촌 한테 함 찾아 가 볼래’ 하는 것이다. 한의사는 아니라고 하면서.
친구의 설명을 상세히 귀담아 듣고 김해 장이 서는 어느날 차를 몰고 아내와 같이 친구의 외삼촌을 찾아갔다. 설명을 들은대로 김해 5일장이 서는 시장통 주막으로 찾아가니 그 할아버지가 어느 방안에 앉아 계셨다. 찾아오게 된 경위를 말씀드리고 증세를 설명하니 누우라고 하셨다. 할아버지는 특이하게 손목을 잡고 진맥하는 것이 아니고 배를 짚어 진맥을 하시는 것이었다. 일어나라고 하시더니 부르는데로 적으라고 하신다. 양반다리 앉은 자세로 눈을 지긋이 감고는 상체를 좌우로 흔드시면서 “당귀이~” 하고 읊으시면 나는 볼펜으로 종이에 ‘당귀’를 적고 “감초오~”하고 읊으시면 나는 ‘감초’를 적고, 이런 식이었다.
20여가지 약초 이름을 한참 걸려 부르시고 나는 받아 적었는데 “다 적었으면 요 주막 앞 난전에 펼쳐 놓은 약재상 아무한테나 가서 사 가지고 집에 가서 큰 솥에 물을 붓고 반나절 정도 끓여서 헝겊에 싸서 짜게 되면 소주 큰 댓병으로 한병 정도 나올낀데 그것을 아침저녁으로 소주잔 한잔 정도씩 마시면 한 보름 되면 나을 끼다” 하시는 것이다. “할아버지, 막걸리 값 하이소” 하면서 2000원을 드리고 나왔다. 진맥값으로 돈을 많이 드리면 화를 내시고 안 받는다는것을 친구를 통해서 이미 주의를 들은 터였기 때문이다.
주막앞으로 나오니 대여섯 정도의 약재상 노점이 전을 벌리고 있었다. 그 중의 한 노점으로 가서 적은데로 종이를 내어 보이니 알았다고 하면서 이리 저리 약재를 챙겨 주는데 마대 주머니 하나에 가득이었다. 차 트렁크에 싣고 집으로 돌아와 일러준대로 마당에 솥을 걸고 물을 붓고 약재를 넣어 장작불을 붙여서 반나절 정도 끓여 헝겊으로 짜니 큰 댓병으로 한병 정도 나왔다.
아침과 저녁으로 한잔씩 먹으니 며칠동안은 잔기침이 큰기침으로 변해 사정없이 터져 나오는 것이었다. 더 심해지려는가 싶어 걱정이었지만 명현현상 이라는 것도 있다고 들은바가 있어 그래도 일러준대로 보름은 먹어보리라 생각하고 계속해서 먹었는데 딱 보름되는 날 신기하게도 기침이 똑 떨어졌다. 희한하고 신기했다. 아무리 이리 저리 몸부림을 치고 양약, 한약으로 이병원 저병원으로 다니면서 치료를 받아도 낫지 않고 무척이나 오래 끌던 잔기침이 이름없는 촌로의 진맥과 한약으로 거짓말같이 나았으니 어떻게 설명 하리요.
그 이후 수년이 지났을때 주위 사람들중에 고약한 병이 있어 또 그분을 찾아가려고 친구에게 물었더니 “우리 외삼촌 얼마전에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도리가 없었다. 원래 친구의 외삼촌은 일본의 어느 스승밑에서 의술을 배웠는데 그 스승의 말씀이 ‘자네는 의술로 돈을 벌게 되면 자네 수명을 감하게 되네’ 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해방후 귀국하여 고향인 김해에 안착해서 농사를 지으면서 생업를 일구시고 장날이 되면 시장통에 나와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여러사람의 진맥을 해주고 막걸리 한잔 드시라고 푼돈을 드리면 그것으로 막걸리 몇 사발을 거나하게 마시고 저녁나절에 휘적 휘적 자기동네로 돌아가서 평일에는 농사일을 하신다는 것이었다. 내가 만난 세 번째 명의였다.
내가 만난 세 번째 명의, 이분이 바로 ‘이단의 추억 # 62, 아... 친구 아모스’ 편에 등장하는 안타까운 내 친구 '김 아모스'의 외삼촌이셨다. 내가 만난 세분의 명의중 한분은 정식 면허를 가진 한의사이셨고 나머지 두분은 사람들이 흔히 돌팔이라고 부르는 그야말로 무면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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