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근세조선 – 옮긴이 아사달. 아래 ‘옮긴이’) 말엽까지 왕성하게 유행하던 택견은 일제시대(대일 항전기 – 옮긴이)에 들어와서 자취를 감추고 만다. 일제가 택견을 금지했다는 문서 기록은 찾아볼 수 없으나, 송덕기와 고령자로서 택견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일제가 택견을 금지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일제는 명분상 ‘택견이 미풍양속을 해친다.’고 몰아붙여 택견판을 열지 못하게 하였다. 심지어 어린아이들이 장난 삼아 하는 애기택견마저 순사들이 채찍을 휘두르며 쫓아다니면서 말렸다고 한다. 순순히 말을 듣지 않을 때는 그 마을의 어른이나 집안 어른을 위협하였으므로, 청소년들은 어른들의 간곡한 만류 때문에 결국에는 택견을 멀리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마지막 택견꾼인 송덕기는 택견이 성했던 서울의 우대마을에서 태어나서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택견을 익힐 수 있었다. 13세 때부터 택견판에서 애기택견을 얼렀으며, 18세 때는 당시 유명한 택견꾼으로 명자(名字. 널리 알려진 이름 – 옮긴이)를 날리던 임호(林虎)에게서 본격적인 지도를 받기도 하여 인근에는 꽤 알려진 택견꾼이 되었다. 그러나 20세 때까지 일본(근대 왜국[倭國] – 옮긴이) 순사들의 눈을 피하여 열리던 택견판이 차차 사라지고 경찰에 불려가 협박을 받은 가친(家親. 남에게 자기 아버지를 일컫는 말 – 옮긴이)과 큰형님이 극구 말리는 통에 어쩔 수 없이 택견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해방 뒤 (열세 해가 흐른 – 옮긴이) 1958년 이승만 대통령 탄신 기념 경찰 무도 대회에서 송덕기는 경무대의 요청으로 택견 시연을 보이게 되었다. 신명이 난 송덕기는 함께 시연을 할 택견꾼을 찾아 백방(百方. 여러 방향 – 옮긴이)으로 알아보았으나, 예전에 그렇게 많던 택견꾼이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았다. 별 수 없이 예전에 임호로부터 택견을 함께 배웠던 이웃에 사는 김성환이라는 사람에게 부탁을 하였다. 김성환은 일제시대에 집안이 아주 망하자 실의에 빠져 매일(날마다 – 옮긴이) 술에 취해 있던 폐인이나 다름없어서 이미 택견 기능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는 처지였으나, 그 사람 외에는(밖에는 – 옮긴이) 달리 택견꾼을 찾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1964년에는 『 한국일보 』에서 송덕기를 취재하여 인간문화재로 소개하기도 했으나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하였다.
70년대 초부터 송덕기에게서 택견을 전수받고 있던 신한승은 택견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받을 결심을 하게 되었다. 신한승은 낱 기술 20내지 30여 수에 불과한 송덕기의 택견을 분석, 체계화하여 80여 종의 기본기로 정리하였다. 그리고 씨름, 권투, 유도의 수련 체계와 비슷한 송덕기의 택견 학습 체계를 가라테, 태권도와 유사한 순열로 재구성하였다. 그는 마치 그림 짜 맞추기 퍼즐처럼 부족한 부분에는 새로 만든 동작을 메워 넣었다.
이러한 신한승의 집념이 끝내 결실을 맺어 택견은 1983년 6월 1일 중요무형문화재 제76호로 지정되었고, 송덕기와 신한승이 기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또 1984년에는 부산에서 이용복(李容福)이 주도하는 한국전통택견연구회가 사회 단체로 발족하여 민족 무예인 택견의 중흥을 주창하게 되면서 마침내 택견의 대중화 시대가 개막되었다. 그 뒤 1990년에 택견연구회를 주축으로 대한택견협회가 결성되고 1991년 1월 14일 당시 체육청소년부로부터 공익 법인 인가를 받았다.
이와 같이 우리 민족사와 부침(浮沈)을 함께해 온 택견은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인멸(湮滅. 흔적도 없이 모두 없어짐 – 옮긴이)의 위기를 겪기도 하였으나, 상승하는 민족운의 표상처럼 다시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 『 택견 』(글 ‘이용복’/ 사진 ‘이갑철’, 주식회사 대원사 펴냄, 1995년)에서
▶ 옮긴이의 말 :
나는 일제가 택견을 말살하려 했다는 사실을 믿는데, 그 까닭은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도 자신이 침략/정복/점령/지배한 나라의 전통 무술을 없애려고 했기 때문이다.
한 예로 에스파냐는 16세기에 필리핀을 점령한 뒤 필리핀 원주민이 자신들의 전통 무술인 ‘아르니스(“칼리”라고도 한다)’를 수련하지 못하게 막았고, 미국은 19세기에 하와이 왕국을 무너뜨린 다음 하와이 원주민들이 자신들의 전통 무술인 ‘루아(Lua)’를 수련하지 못하게 막았다.
이는 원주민의 저항 의지를 꺾고, 혹시나 일어날지도 모르는 민중봉기나 독립전쟁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렇다면 근대 왜국(倭國)도 한국인의 저항 의지를 꺾고 한국인이 왜국에 맞서 들고 일어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 택견을 금지했다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나는 전통 무술이자 문화의 한 부분을 말살함으로써 한국인을 아예 없애 버리려고 했던 일제의 집요함에 치를 떨 수밖에 없으며(일제의 택견 말살 정책은 내가 왜국의 ‘근대화 정책’에 감사하지 않는 까닭들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나아가 그런 탄압을 뚫고 살아남아 오늘날에는 온 누리의 무술들 가운데 하나로 우뚝 선 택견에 경의를 표하는 바다.
- 음력 3월 26일에, ‘임진왜란과 개화기와 대일 항전기를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왜국을 믿을 수 없게 되고 좋아할 수도 없게 된다.’고 생각하는 아사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