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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6년 5월 10일 새벽 4시 40분께 대구시 비산동의 한 주택에서 갑자기 불길이 솟아올랐다.
느닷없는 비명소리와 창문이 깨지는 소리 등을 듣고 이웃들이 달려나왔을 때 이미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 있었다. 3층짜리 주택의 1층에서 난 것으로 보이는 불은 10여 분 만에 진화됐지만 당시 집 안에서 잠을 자고 있던 젊은 자매와 이들의 어머니, 외할머니 등 일가족 4명이 모조리 목숨을 잃었다.
네 사람은 모두 현관 반대편에 있는 화장실 입구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는데 워낙 연기가 심했던 데다가 하나뿐인 출입구 쪽에서 불이 난 탓에 탈출구가 없어 빠져나오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는 게 경찰의 설명이었다.
순식간에 일가족의 목숨을 앗아간 이 사건은 겉보기에 일반 화재사건과 별 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 단순 화재로 종결될 뻔했던 사건은 얼마 후 화재현장을 꼼꼼히 감식하던 경찰에 의해 화재가 아닌 ‘방화’로 드러나게 된다.
수사 결과 새벽에 불을 질러 이들 일가족을 살해한 범인은 바로 이 집에 거주하던 젊은 여성의 옛 애인으로 밝혀져 더욱 충격을 주었다.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대구서부경찰서 강력1팀 배성진 형사는 다음과 같은 소회를 밝혔다.
옛 애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젊은이의 잘못된 선택으로 네 명의 무고한 목숨이 희생됐다.
삐뚤어진 애정과 집착이 불러온 참극이랄까.
치정과 연루된 사건사고들이 끊이지 않는 요즘, 우리 형사들에게도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 사건으로 기억된다.
순식간에 일가족 네 명의 목숨을 앗아간 이 사건은 얼핏 보기에 전기누전 등으로 인한 단순 화재처럼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현관 출입문이 정상적으로 닫혀 있었던 데다 집 안에 외부인이 침입한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현장을 둘러보던 경찰은 뭔가 석연찮은 점을 느끼고 정밀 조사를 하기에 이른다.
당시 상황에 대한 배 형사의 얘기를 들어보자.
네 사람의 사인은 모두 강한 독성을 지닌 연기에 의한 질식사였다.
그런데 현장에 가보니 이상한 냄새가 너무 심하게 나는 거다.
보통 전기누전이나 합선 같은 원인으로 화재가 날 경우 이런 냄새가 날 리 없었다. 그냥 넘길 일이 아니라는 판단에 현장 감식을 두 번이나 실시했다.
그 결과 현장에서 발견된 걸레에서 휘발성 물질이 검출됐다.
순간 ‘이거 뭔가 있구나.
이건 분명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저지른 방화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집주인인 이 아무개 씨는 일 때문에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때문에 화는 피할 수 있었지만 사랑하는 아내와 두 딸, 장모의 느닷없는 사망 소식은 이 씨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현장 감식 결과 화재 현장에서 수거된 물품에서 시너 성분이 검출된 사실을 토대로 경찰은 방화범을 찾는 수사에 들어갔다.
수사팀은 일가족이 잠들어 있는 시간대에 범인이 찾아와 불을 지른 것으로 보아 모르는 사람이 우발적인 충동에 의해 저지른 일명 ‘묻지마 방화’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수사팀은 이 씨 가족의 주변 인물들을 상대로 탐문수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용의자를 특징짓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아무리 찾아봐도 이 씨 가족의 주변 인물들 중 그런 잔혹한 짓을 할 만한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건의 실마리는 곧잘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풀리는 법. 미스터리한 방화살인사건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전담반까지 편성하고 일주일 넘게 수사를 벌인 결과 수사팀의 레이더에 포착된 인물이 있었다.
유가족과 주변 사람들을 상대로 탐문수사를 계속하던 중 한 의심스러운 인물에 대한 얘기를 듣게 됐던 것이다. 당사자는 바로 사망한 자매 중 한 명의 전 애인이었던 최형준 씨(가명·당시 28세)였다.
다음은 배 형사의 설명.
조사 결과 최 씨는 이 씨네 둘째딸인 이진경 씨(가명·당시 21세)와 한때 애인관계로 지냈던 인물이었다.
진경 씨의 아버지나 언니의 남자친구까지도 최 씨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만큼 둘이 가깝게 지내왔나보더라. 하지만 사건이 발생하기 두 달 전쯤 두 사람은 헤어졌다고 한다.
헤어진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사생활이기 때문에 알 수 없었지만 듣자하니 진경 씨가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했다고 한다.
두 사람이 헤어진 것을 주변 인물들도 알고 있었다.
조사 결과 이진경 씨의 옛 애인이었던 최 씨는 대리운전 업체에서 일하고 있는 평범한 청년이었다.
그렇다면 수사팀이 최 씨를 용의선상에 올리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어지는 배 형사의 얘기.
가장 마음에 걸렸던 것은 최 씨에 대한 평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이진경 씨의 아버지를 비롯해 주변사람들도 최 씨를 그다지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유는 진경 씨와 헤어진 후 최 씨가 보인 도를 넘어선 행동 때문이었다고 한다.
최 씨는 진경 씨와 헤어진 후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했는지 진경 씨에게 계속 연락을 하며 관계 회복을 요구했다고 한다.
얼마 지나면 괜찮아지겠거니 했는데 최 씨의 집착은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진경 씨가 최 씨를 노골적으로 피하자 급기야 최 씨는 그녀를 미행하거나 ‘같이 죽자’ ‘너희 가족들까지 모두 죽여버리겠다’는 협박 문자 메시지를 수십 차례나 보냈다는 것이다.
최 씨의 집착은 도를 넘어 진경 씨의 가족들에게까지 ‘불 질러 죽여버리겠다’는 문자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최 씨는 진경 씨 언니의 남자친구와 심하게 싸우기도 했던가보더라.
주변 인물들이 방화사건의 범인으로 최 씨를 의심했던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던 것 같다.
실제로 물불 가리지 않고 덤벼드는 최 씨의 집착으로 인해 이 씨 가족들은 사건이 발생하는 날까지 적잖은 고통을 겪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당사자인 이진경 씨는 그간 협박을 일삼는 최 씨의 행동에 시달리다 못해 그 충격으로 정신과 치료까지 받는 등 상당한 정신적 고통을 겪었다고 한다.
최 씨의 신원을 확인한 수사팀은 그의 동향을 살피는 동시에 최 씨 주변 인물들을 상대로도 탐문 수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최 씨에게서 범행과 연관 지을 수 있는 의심스러운 흔적들이 속속 발견됐다.
최 씨는 범행 전 직장동료에게 헤어진 이진경 씨에 대한 강한 원망을 나타내며 ‘(이 씨 집에) 불을 질러 다 죽여버리겠다’는 말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 범행 이틀 전 달서구 두류동의 한 페인트 가게에서 시너를 사가는 등 범행계획을 뒷받침해줄 만한 수상한 행적도 확인됐다. 특히 최 씨의 통화내역과 위치추적 등을 통해 취합한 자료들은 사건 발생 시각 최 씨가 현장 근처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주변 인물들의 진술과 정황 등으로 볼 때 최 씨는 분명 유력한 용의자일 수밖에 없었다.
수사팀은 최 씨를 상대로 조사를 벌였다. 하지만 최 씨는 완강히 자신의 혐의를 부인하며 적잖이 애를 먹였다고 한다. 다음은 배 형사의 얘기.
최 씨는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사건 당일 그 시각 어디에서 무엇을 했냐는 질문에 그는 태연하게 ‘일 마치고 곧장 집으로 갔다’고 하더라.
하지만 수사팀이 수집한 증거자료에 따르면 최 씨의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특히 사건 당일 그 시각에는 비가 상당히 많이 왔는데 최 씨의 차 트렁크에서 물에 흠뻑 젖은 잠바가 나왔다.
잠바는 왜 젖었냐고 물었더니 며칠 전 대리운전 전단지를 돌렸는데 그때 갑자기 비가 쏟아져서 맞은 것이라고 둘러대더라. 그러나 기상청에 확인한 결과 최 씨가 전단지를 돌렸다는 그날 그 시간에는 비가 오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런 식으로 그의 거짓말은 속속 드러났다.
범행을 인정하지 않고 모르쇠로 일관하던 최 씨는 자신이 둘러댄 알리바이들이 거짓으로 드러난 데다가 자신의 차량 트렁크에서 범행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시너가 들어 있는 병이 발견되자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런 최 씨에게 숨진 피해자들의 사진을 보여주자 마침내 울음을 터뜨리며 범행을 인정하고 말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최 씨는 왜 이런 엄청난 범행을 저지른 것일까.
조사 결과 최 씨는 일찍이 어머니를 여읜 후 재혼한 아버지와 함께 살았으나 아버지와의 갈등으로 인해 집을 나와 원룸에서 혼자 생활해왔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사건이 발생하기 8개월여 전인 2005년 9월경부터 일곱 살 연하의 이진경 씨를 만나면서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고 한다.
두 사람은 가족들에게도 서로의 존재를 공개하며 한동안 연인관계를 이어왔지만 이듬해 3월경 이진경 씨가 무슨 이유에선지 이별을 통보했다고 한다. 다음은 배 형사의 얘기.
아마도 최 씨는 이진경 씨를 각별히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진경 씨의 갑작스러운 이별 통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한다.
결국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최 씨의 애정과 오기는 진경 씨에 대한 병적인 집착으로 변질됐고 범행으로까지 이어지게 된 셈이다.
하지만 수사팀을 더욱 놀라게 만든 것은 범행 후 최 씨가 보인 엽기적인 행동이었다. 최 씨는 범행과 관련된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였는지 사건 다음날 자신의 미니홈피에 이진경 씨에 대한 사모의 글들을 올려놓았다고 한다.
미니홈피에 이진경 씨와의 행복했던 한때를 보여주는 사진들을 공개하는가 하면 ‘진경아, 너무 보고 싶다’ ‘꿈에서라도 나타나줘’라는 등 그녀를 향한 애정을 드러내는 글들을 버젓이 게시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렇다면 최 씨는 헤어진 후에도 왜 이진경 씨에게 그렇게 집착했던 걸까.
최 씨를 조사한 배 형사는 다음과 같은 의견을 밝혔다.
최 씨는 자신과 사귀었던 이진경 씨가 자신에게 이별을 통보하고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고 한다.
최 씨가 진경 씨에게 그토록 집착한 데에는 그의 특이한 성장 환경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치지 않았나 싶다.
어린 시절 어머니를 여읜 최 씨는 성장하면서 아버지와의 관계가 소원해짐에 따라 마땅히 누구 하나 의지할 사람도 없고 충분한 사랑도 받지 못했던 인물이었다. 짧은 시간 동안 진경 씨에게 급속히 빠져들었던 최 씨에게 그녀는 자신의 전부와 다름없을 만큼 소중하고 놓치고 싶지 않은 새로운 존재였을 것이다.
그래서 진경 씨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버리지 못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대면해본 결과 최 씨는 이런 범행을 저지를 만큼 독한 성격이 아닌 것 같았다. 사건 당일에도 최 씨는 술을 많이 마신 상태에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변심한 애인을 용납할 수 없었다”고 범행동기를 털어놓던 최 씨는 “정말 죽이려고 그런 것은 아니었다.
나도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상상도 못했다”며 뒤늦게 참회의 눈물을 쏟은 것으로 전해진다.
사건 당시 최 씨는 새로운 인생을 설계하기 위해 호주 유학을 앞두고 있던 처지였다고 한다.
살인방화 혐의로 기소돼 법정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최 씨는 지난해 초 괴로운 마음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에겐 법의 징벌보다 양심의 고통이 더욱 크고 무거웠던 것이다.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