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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옆에 있는 분들과 인사 나누겠습니다.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네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오늘 반가운 분들이 한 가정이 오늘 오셔가지고 우리 한번 박수로 우리 환영하겠습니다. 목사님 가정은 제가 같이 교제를 하지는 않았는데 워낙 사진과 또 이 말들로 많이 들어가지고 진작 연락을 주셨으면 오늘 좀 제가 편히 쉬는 주일로 좀 만들어줄 수 있었는데 다음에는 연락 주시고 한번 오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우리는 뭔가를 선택해야 되는 그런 상황들을 늘 마주합니다. 오늘도 여러분들은 선택을 해서 이 자리에 오셨어요. 그렇죠. 이 자리에 올까 말까 고민하고 오신 분들 혹시 있지 않으신가요?
하루하루의 작은 선택들도 있지만 신앙의 여정 가운데 있어서도 그렇고요. 또 우리 진로를 결정하는 친구들 오늘 우리 이학현 안수 집사님이 칼을 갈고 다음 세대를 위한 기도를 하셨는데 다음 세대들의 진로를 위해서 얼마나 고민들이 많을까요?
그 진로를 결정해야 하는 과정들, 또 어디로 여행을 갈까 누구를 만날까 수많은 선택을 해야 되는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선택을 할 때 어떤 기준으로 우리가 그것을 선택하는가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대부분은 내 생각, 내 경험, 내 뜻, 때로는 내 느낌 다양한 그런 생각들을 앞세웁니다.
그런데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는 너무 연약한 인간이라는 것을 늘 느낄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들입니다.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사람이 감히 내가 지금까지 경험한 거를 전제로 다음 일을 결정한다. 이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몰라요. 내 뜻 내 경험 내 생각을 의지하다가 선택을 해서 잘못된 선택을 하는 바람에 시행착오를 겪는 일이 우리의 인생에는 그래서 다반사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그래서 내 생각 내 뜻 내 계획 뭐 이런 것들보다 하나님의 뜻을 우리는 더 의지합니다라고 고백을 하고 하나님의 뜻을 붙들려고 나름 애를 쓰는 것이 우리의 신앙인들이죠.
근데 여러분 어떻게 내 생각 내 뜻과 하나님의 뜻을 이렇게 분별하는 일이 만만치 않음을 또 느끼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울 사울은요 지금 어마어마한 무서운 일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자기 나라에 장수였던 다윗을 군인들을 몰고 가서 죽이겠다고 지금 쫓아다니고 있는 거예요.
근데 명분이 분명합니다. 군대를 동원해서 폭력을 정당화시키고 있습니다. 블레셋의 전쟁에서 돌아온 사울이 다윗이 앵게리 광야에 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외부의 적을 막기 위해서 모집했던 그 3천 명의 군사들을 이끌고 다윗을 찾으러 갑니다. 그 명목은 다윗이 내란 부하들을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내란을 일으켰다. 전혀 있지도 않은 이야기들을 명분으로 삼아서 그 일을 자행합니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었던 사울은 처음에는 뭔가 겸손한 사람같이 보였지만 점점 갈수록 어둡고 부정적인 리더십의 본보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근데 이런 상황에서 다윗 다윗에게 뭔가 이 상황을 뚫고 나갈 반전의 기회가 생겼습니다. 엔게디 광야에 도착한 사울이 갑자기 배가 아파서 큰일을 보기 위해서 굴로 들어갑니다. 그 엔게디 광야에는 굴이 수없이 많이 있는데 그 수없이 많은 동굴 중에 하필이면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숨어 있는 그 동굴로 사울 왕이 혼자 큰 일을 보기 위해서 들어간 거예요.
여러분 이 상황에서 다윗과 그의 신하들이 볼 때 이 상황은 지금 어떤 상황으로 여러분들이 판단하시겠습니까?
성경으로 지금 우리가 들어가서 우리가 그 사람들의 입장이 돼보자고요. 지금 막 몇 날 며칠을 쫓겨다니고 정말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인데 갑자기 사울이 자기들이 숨어 있는 그곳에 자기들 눈앞에 홀로 들어온 거예요.
어쩌면 그들은 아 드디어 하나님이 이 사울을 우리에게 맡기셨구나 드디어 이 사울을 제거하고 제거할 절호의 찬스를 우리에게 이거는 주신 거다. 어떻게 그 많은 동굴 중에 우리가 숨어 있는 이 동굴로 들어올 수 있지 그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상황에서 먼저 우리의 본분을 다시 한 번 점검해 보려고 해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내 육신의 욕망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 살아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신앙의 여정이 그것들을 훈련하는 과정이에요.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나라에 백성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천국 가기 위해서 하나 지금 신앙생활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수없이 말씀드리잖아요. 이미 하나님의 나라는 시작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에요. 다만 이 땅의 끝이 되었을 때 우리 인생이 마감이 되었을 때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겁니다.
그런데 그 과정 속에서 반드시 훈련해야 될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선한 뜻이 무엇인지 그것을 분별하는 겁니다. 신앙은 시행착오를 겪지만 그 시행착오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가는 과정을 배워가는 거예요.
로마서 12장 2절 말씀을 우리 한번 다 같이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아멘 여러분 분별 분별이라고 하는 것은 나의 소망, 나의 소망, 간절한 소원과 하나님의 뜻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내 소원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내 마음을 맞추는 것 그게 바로 분별이에요.
지금 사울에게 너무나도 억울하게 이렇게 도망을 다니고 있는 다윗, 그리고 그를 따라다니고 있는 그 부하들, 그들에게 가장 큰 소원은 무엇일까요? 여러분들이 그들이었다면 지금 가장 간절한 소망이 뭘까요?
어려운 질문 아니죠 지금 이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는 거죠. 그쵸? 아니 지금 아무런 잘못하지 않았는데 끝없이 방황하며 방랑하며 도망자처럼 숨어 다니는 이 삶을 끝내고 싶지 않았을까요? 억울하잖아요. 그런데 힘이 없으니까 도망다닐 수밖에 없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도망자의 삶을 정말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그게 이들의 간절한 소망이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어떤 소망이 있나요? 다양한 기도 제목들이 있죠.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잘 되기를 원하는 분들, 또 건강이 회복되길 원하는 분들, 지금보다 더 나은 삶, 안전하고 평안하고 더 풍성한 삶을 우리는 다들 추구합니다. 소망해요. 그런데 이것들이 내 안에 욕망이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내가 소망하는 것을 이루었는데도 거기서 만족하지 못하고 오히려 불만족해요. 그리고 더 큰 걸 요구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 다윗과 이 부하들이 볼 때 이 기회는 하나님이 주신 기회라고 해석하기가 참 쉽습니다.
그렇죠 아니 어떻게 그렇게 수없이 많은 동굴 중에 우리가 숨어 있는 동굴에 그것도 사울이 홀로 들어와 3천 명의 군사를 놔두고 이 상황 속에 다윗의 부하들은요. 하나님의 뜻이라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확신하며 말합니다. 24장 상반절을 보십시오. 24장 4절 다윗의 사람들 부하들이 말하는 겁니다.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날입니다. 좀 쉬운 말로 하면 하나님이 원수를 당신 손에 넘기실 건데 지금 오늘이 그날이다. 당신 마음대로 사울을 치기만 하면 드디어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잡는 거다.
그렇게 지금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근데 여러분 하나님이 사울을 죽이고 다윗에게 왕이 되어라라고 말씀하신 적이 성경에 등장할까요?
전혀 등장하지 않아요.
근데 어떻게 이 부하들은 이런 말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요?
사무엘상 15장 28절에 보면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왕에게서 떼어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에게 주셨나이다.
그러니까 사울이 범죄하는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이 사울을 패하시고 새로운 왕을 세우실 것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 말은 이미 선포된 말씀이긴 한데 이 말을 자기들 나름대로의 상황 속에서 재해석을 해가지고 사울을 당신 손에 맡기셨으니 당신이 죽이고 왕이 되십시오 이렇게 해석을 한 겁니다.
다윗의 부하들 그들도 다윗과 동일하게 지금 도망자로서 얼마나 고생스러울까요? 그리고 얼마나 간절한 바람과 소망으로 이 상황이 끝나기를 바라고 있었을까요?
그런 마음들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이미 주어지긴 했었지만 그 말씀을 자기들의 속에서 왜곡하고 조작해버린 겁니다. 사울을 죽이라고 당신에게 드디어 주신 기회라고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기독교 역사 중에 정말 너무나도 부끄러운 역사 중에 하나를 꼽으라고 한다면 십자군 전쟁을 이야기합니다. 십자군 전쟁은요. 철저히 종교적인 의식을 가지고 일으킨 전쟁이라고 합니다. 그 당시에 예루살렘 성전을 탈환하겠다고 하는 대의명분을 가지고 정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역사적으로 잘 알고 있지만 이 십자군 전쟁은 그 당시에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기 위한 전쟁으로 몰락하고 말았어 하나님의 뜻이라고 신앙을 가장 우선순위라고 내세우면서 그 전쟁을 치렀지만 결국 그들 안에는 탐욕 때문에 그 전쟁은 완전히 우리 기독교의 몰락을 시키는 주요한 전쟁이 되고 맙니다.
근데 여러분 지금 다윗의 부하들이 이 사건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부를 수 있는 상황적인 이유도 분명히 많습니다. 사울이 정말 죽어야 할 사람이라고 하는 그러한 이유들이 많아요. 먼저 사울은 무고한 노베 제사장들과 그 마을 사람들의 피를 너무나도 많이 흘린 잔혹한 학살자였습니다. 아무런 이유 없이 그냥 다윗을 도왔다는 그 이유만으로 다 죽여버렸어요. 학살자. 그리고 지금 이 사울은 미쳤습니다.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게 아니에요. 그래서 이 미친 사울을 제거하기만 하면 온 이스라엘이 평화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로부터 이 나라가 다시 회복할 수 있다고 하는 명분이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다윗은 이미 하나님의 사람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았고, 이 사람이 이제 사울 뒤를 이어서 왕이 될 것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도 있었습니다.그러니까 이런 여러 가지 요건들을 따져보면 지금 이 엔게디 동굴에서 맞이하고 있는 이 상황을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라고 충분히 해석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 가운데요. 우리가 처해 있는 어떤 상황 지구 맞이하게 되는 어떤 여건 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어떤 숨어 있는 욕망 그리고 그 모든 이정표들이 다 지금 사울을 죽이는 것이 가장 깔끔하다. 가장 쉬운 길이고 가장 빠른 길이고 가장 확실한 길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걸리는 게 있는 겁니다. 뭐가 걸릴까요?
하나님이 한 번도 다윗에게 사울을 죽이고 왕이 되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었다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의 일상에서 마주하는 유혹 이러한 비슷한 유혹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말씀을 제외하고 내 삶의 어떤 환경들 내가 기도를 열심히 하고 있었어요. 내 마음에 어떤 소망을 가지고 기도하고 있는데 내 옆에 상황들이 그렇게 몰아갑니다. 그리고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이 또 그렇게 말을 합니다. 그리고 내 안에 있는 갈망도 계속 이 세 가지가 다 일치해서 한 방향을 마치 방향을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보여요.
그럴 때 우리는 이게 하나님의 뜻이지라고 쉽게 결정 내리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룰 기회라고 우리에게 들어온 가장된 유혹일 수도 있다고 하는 생각을 분명히 해보는 거예요. 우리가 살다 보면 숱한 이런 기회 같은 유혹을 마주할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 승진하고 성공할 수 있는 기회, 또 큰 돈을 벌 수 있는 기회, 좋은 사람을 만나 또 뭔가 큰 이득을 볼 수 있는 기회, 악을 갖고 공의를 세울 수 있는 기회, 제가 지금 나열한 이런 것들이 악한 것은 아니잖아요. 그쵸 악한 것은 아닙니다. 근데 그것들이 다 선하고 좋은 것들이라고도 말할 수 없어요.
그런데 다만 우리가 뭔가 소망하는 그 제목들이다 보니 내가 생각할 때 이것이 정말 하나님의 뜻이라고 보이는 것들을 잘 분별해야 될 이유가 어디에 있냐면 그것들을 우리가 잘 분별하지 않았을 때 오히려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기회로 보이는 유혹일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길 원합니다.
요나가 그랬어요. 니느웨로 가라고 말했는데 니느웨로 가고 싶지 않아 그리고 다시스로 가려고 마음을 먹고 항구로 갔더니 마침 날씨도 좋고 또 배도 준비되어 있고 선원들이 이미 떠날 준비를 다 마쳤습니다.
야 다 준비됐네. 내가 원하는 뜻대로 다시스로 가면 되겠구나. 하나님이 나를 순적하게 인도하시는구나.
배를 탔습니다. 그 결과는 뻔히 우리가 알고 있지 하나님의 뜻은 정반대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요나는 자기가 원하는 뜻대로 했는데 상황들이 잘 이끌어주니까 그것이 마치 순적한 길이라고 여기고 그 배를 탔던 것이죠.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삶 가운데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일에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는 그러한 요지가 충분히 있다라는 사실을 늘 기억하길 원해요. 다윗도 그런 거 아닙니까? 하나님의 뜻과 그리고 기회처럼 보이는 지금 아주 큰 유혹에 빠져 있는 겁니다. 여러 전쟁 속에서 뛰어난 용사로서 나라를 위해서 왕을 위해서 충성을 다했던 하나님의 용사 다윗이 지금 칼 한 번 들어가지고 내려치기만 하면 사울을 내려치기만 하면 단 한 방으로 불안한 삶, 박해받는 삶, 비난받고 비웃음 당하고 도망자로서 사는 그 삶이 한순간에 끝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광야가 아닌 왕으로서 따뜻한 침대에서 왕궁에서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길이 그 앞에 열려 있습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다윗이 어떻게 했습니까? 그 부하들이 설득함에도 불구하고 사울에게 가까이 가서 그의 겉옷자락을 한 보통이를 잘라올 뿐입니다. 부하들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을 거예요. 아니 이렇게 주신 기회를 어떻게 이렇게 그냥 허비하십니까?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이야기하죠.
그 옷자락을 자른 것만으로도 다윗은 마음이 찔렸다
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윗이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분별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어요. 이게 정말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구나라고 본 것이 아니라 사울은 다윗은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가장한 유혹이라고 하는 것을 분별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6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죠 네 한번 같이 읽어볼까요? 6절 시작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내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받은 내 주를 치는 거. 여호와께서 바라시는 것이 너와의 기도를 받으라.
아멘 다윗은 지금 부하들에게 타이르고 있는 겁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복수하는 게 아니야. 그건 하나님이 금하시는 거야. 어떤 이유로든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이 상황이 기회가 아니고 감히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받은 자를 죽일 뻔한 유혹을 당할 뻔했다
라고 판단하고 있는 겁니다. 도대체 다윗은 어떻게 이걸 이런 상황에서 분별할 수 있었을까요?
먼저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건 다윗은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상황 가운데서도 다윗은 기도하는 사람이었다는 걸 우리는 기억하길 원해요.
여러분 기도하는 사람들이 깨닫고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분들은요. 절대 느끼지도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그 영의 세계가 있어요.
다윗은 어떤 기도를 했을까요?
시편 54편에 보면 다윗이 십 사람들의 그 다윗을 밀고 했을 때 다윗이 이러한 고백의 찬양을 드립니다. 1절에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하소서 그러니까 다윗의 일상 속에 있었던 뭔가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드리는 기도 내용이에요. 한마디로 자신의 정당함을 변호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놀라운 섭리 가운데 이 기도에 응답해 주셨습니다. 오히려 다윗이 지금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였다는 건 모든 사람들이 다 아는 거예요.
그렇죠 사울도 알고 그 3천 명의 군사도 알고 다윗을 따르는 그 부하들도 압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그 사울을 죽이지 않음으로 무엇을 드러내는 걸까요?
자신이 반역죄를 저지르고 지금 도망다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무죄함을 분명하게 드러낼 기회를 얻게 된 것입니다. 오히려 복수의 기회가 아니라 자비를 베풀 기회로 그리고 자기가 무지함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로 그것을 세운 거예요.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바로 그 이유가 다윗의 삶 가운데 평상시에 이루어졌던 기도로 가능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 가운데 하나님이 그 마음 중심을 분명히 붙드시고 깨닫는 지혜를 더하심을 믿습니다. 여러분 다윗이 그러했듯이 우리도 우리의 삶 가운데 어떠한 결정할 일이 있을 때 그냥 순간적으로 내 생각, 내 뜻, 내 경험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먼저 맡겨드리고 우리가 나아갔으면 좋겠어요.
근데 우리가 중요한 건 큰 일들은 잘 맡겨드릴 때가 많은데요. 작은 일들은요. 너무 쉽게 그냥 내 마음대로 할 때가 많아요.
근데 아시죠? 작은 일들이 모여가지고 큰 일들이 만들어지는데 우리는 너무 큰 일들만 맡기는 것에 익숙해요. 삶의 작은 일들부터 하나님께 맡겨야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작은 일에 충성한 종이라고 칭찬받을 수 있습니다. 다윗이 유혹을 분별할 수 있었던 더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있었습니다. 다윗이 기도한 그 기도조차도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기도였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손으로 사울을 죽이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정의로운 심판 하나님께 복수를 맡겨드렸습니다. 사울을 죽이지 않는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있었습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누군가가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그거를 그냥 무조건 따라가면 안 됩니다. 이단 사이비가 그걸 노려요. 예수님도 광야에서 사탄에게 시험받으실 때 뭘 인용하셨습니까? 말씀으로 마귀를 무찌르셨어요 그렇죠 마귀도 마귀도 성경을 사용했습니다. 성경을 가지고 유혹했어요. 성경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유혹했습니다.
말씀도 잘못 해석을 하면 이렇게 왜곡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은 말씀으로 해석을 해야 하고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기반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리고 단어나 문자적으로만 해석하면 안 되고요. 전체 문맥을 바라보면서 해석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래서 큐티 훈련이 필요해요. 주일날 한 번 여러 번 예배드리는 것만으로 여러분들의 신앙이 계속 자랄 수 없습니다. 매일매일 말씀을 묵상하고 전체적인 성경의 흐름을 여러분들이 배워가는 과정 속에서 그런 분별할 수 있는 은혜를 지혜를 발견할 수 있는 거예요.
다윗이 사울을 죽이지 않은 이유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에 대적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이미 그 오래전 구약 시대 때부터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에 반역했던 사람들이 당했던 일들을 다윗은 알고 있어요. 모세에게 대항했던 미리암 피부병을 앓게 되었습니다. 고라자손은 지진으로 그들은 심판을 받았습니다. 이런 수없이 많은 성경 속의 이야기들을 다윗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가운데 이 사울이 주님이 기름부음 받아서 세운 사람이라고 하는 명확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 사울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사울의 인격 자체는 문제가 있고 그리고 정말 너무 억울하지만 그가 가진 왕권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므로 내가 그것을 함부로 할 수 없다 이런 분명한 말씀을 기반한 인식이 있었다는 거예요.
근데 요즘 이제 우리가 그러면 시대적인 상황에서 그러면 우리가 이 성경의 말씀대로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에 대해서 우리가 인정하고 세워가야 된다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의 대통령이라든지 국회의원이라든지 뭔가 리더 그룹에 있는 사람들이 잘못하고 실수하고 뭘 해도 우리는 그러면 눈 감고 참고 인내하고 기도만 하고 있으면 되는 건가요라고 질문하는 분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근데 여러분 사울과 같은 불의한 그 권위에 대해서도 무조건 순종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순종하지 말아야 할 마지노선이 있어요. 마지노선 그것은 국가나 불의한 권위에 대한 순종이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을 유발하는 상황이 되면 그건 우리가 순종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도 그런 예들이 나와요. 출애굽할 때 출애굽기에 보면 아기들을 태어난 아기들을 다 죽이라고 하는 그 왕의 명령을 받은 산파들이 어떻게 합니까?
안 죽여요 거부합니다. 다니엘에서 친구들이 금신상에 절하라고 하는 왕의 명령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명령을 거부합니다.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면 너희들 죽인다고 협박하는데도 내가 어떻게 예수님을 전하지 않아 거부합니다.
이런 것처럼 다윗은 사울을 직접 죽이는 그러한 일을 하는 대신 처음에는 그를 피해 다니고 불의를 참아내는 방식으로 저항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 이후에 보면 그냥 침묵만 하고 있지는 않아요. 당당하게 사울이 불의함에 대해서 외치는 장면도 나오게 됩니다. 다윗은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그것을 행하지 않았고, 그가 죽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이지 않았다라고 하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정당성을 사울과 그의 군사들 앞에서 큰 소리로 외칩니다. 사울의 악을 선으로 갚은 거예요. 복수할 기회를 긍휼의 기회로 바꿨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갚으실 것이다. 행하실 것이다
라고 하는 믿음 안에서 그렇게 했습니다. 이 상황에서 사울의 반응을 보면요. 24장 20절에 사울이 이렇게 반응합니다.
목놓아 울듯이 보라 나는 내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알고 이스라엘 나라가 내 손에 경고히 설 것을 아노니
지금 이 말을 누가 하고 있어요? 사울이 하고 있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울의 입에서 다윗을 향한 이 말을 지금 이렇게 선포되는 이 과정은요. 지금 일반적인 상황이 아닙니다. 놀라운 이거는 기적과 같은 역사죠. 이것이 바로 참된 승리입니다.
우리 인생의 갈림길에 있어서 이것이 기회인지 유혹인지 참 분별하기가 어려울 때가 참 많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잠깐 점검했습니다. 더 하나님의 뜻을 물으며 기도해야 하고요. 또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목적이 아무리 좋아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수단과 과정인지를 생각하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 말씀을 제가 묵상하고 여러분들과 나누게 된 배경을 오늘 간략하게 말씀을 나누고 이제 기도하려고 합니다. 두 주 전에 제가 깜짝 기도 제목을 선포했죠. 우리 교회가 뭔가 이제 변화의 상황 속에 이렇게 기도를 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어떠어떠한 과정을 통해서 좀 어려운 교회가 통합을 제안을 했고 그 통합의 과정들이 진행될 수 있습니다.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말씀을 드렸어요.
근데 솔직히 처음에 그 제안을 들었을 때는 너무 부담스럽고 너무 이게 가능한 일인가 막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근데 제가 참 신기한 거는 우리 성도들이 말씀에 참 순종을 잘해주셨어요. 제가 어느 교회인지 궁금해하지도 말고 기도만 하라고 그랬더니 물론 이제 몇몇 분들은 어디지 막 이렇게 막 찾아보시고 우리 교회에서 10분도 안 되는 거리라는데 하면서 교회들을 검색하셨다는 걸 제가 알고는 있지만 아무튼 서로서로 따지지는 않으셨더라고요.
근데 교회가 굉장히 큰 교회였어요. 그래서 너무 처음에는 제가 이제 개인적으로 먼저 기도를 하기 시작했는데 너무 부담스럽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이제 평상시에 여러분들 앞에서 던져놨던 것들이 있었잖아요. 우리가 지금 여기에 개척된 이유가 무엇일까 한국교회가 지금 이렇게 무너져가는 상황 속에서 우리가 해야 될 일은 무엇일까 그러면서 제가 한두 달 전에 제가 그 이야기를 했었던 것 같아요.
한국교회가 지금 이제 점점 가면 갈수록 어려워져서 건물이 있는 교회들 중에서도 문을 닫는 교회들이 생길 텐데 우리 교회는 건축에 대해서는 제가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말씀을 드렸던 것처럼 그런 교회들이 어려움을 겪을 때 우리 교회가 통합하는 과정이 있을 수도 있겠다라는 말을 그냥 저도 이제 제가 가지고 있었던 비전들 가운데 한 가지였기 때문에 말씀을 드린 적이 있는데 그게 이제 불과 얼마 안 돼서 이런 일이 있으니까 이것이 또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뜻인가 그래서 개인적으로 기도하면서 저 혼자 이걸 분별하는 게 처음에는 헷갈리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이제 장로님 가정에게 또 우리 비전의원들에게 차츰차츰 넓히면서 이제 이것들을 같이 기도하자고 같이 분별해 보자고 그렇게 됐습니다.
근데 이제 중요한 건 우리가 분별하는 과정에서 이건 분명히 우리에게 주신 기회입니다. 합시다라고 하지 않고요. 기회일 수 있습니다. 우리 한번 그러면 같이 이야기 나눠봅시다. 여기까지 갔어요.
물론 상황들은 디테일한 준비들까지도 같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과정에서 그 교회가 마음이 이렇게 하나 되지 않아서 준비되지 않았다는 상황을 결과적으로 제가 주일날 말씀드리고 그다음 날 확인이 된 거예요. 그래서 더 이상 진행을 하는 게 큰 의미가 없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제가 바로 여러분들에게 공지를 드렸죠. 지금 이 상황은 우리 교회하고 지금 이게 통합이 이루어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 같습니다라고 해서 바로 이제 말씀을 드렸는데 또 여러분들의 다양한 제가 반응들을 봤어요.
근데 그 다양한 반응 속에서 제가 느끼고 깨달은 건 뭐냐면 우리 하늘 소망 공동체가 이제 뭔가 변화를 원하는 마음들이 지금 모아지고 있구나 그래서 아니 어느 교회인지도 모르고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는데 제가 기도해 달라고 말을 했는데 그날 오후에 여러분들 소그룹에서 분위기를 제가 들어봤더니 다들 좋아 좋아가지고 우리가 건물 있는 교회로 통합한데 근데 목사님 두 명이면 목사님이 힘들어지지 않을까 그래도 우리는 괜찮지 뭐 이렇게 하는 말씀도 들었고 아무튼 여러분들의 반응을 보면서 이분들이 어떤 상황으로 교회가 변화가 되어도 지금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었구나라고 하는 사실은 분명히 발견이 됐어요.
그리고 두 번째는 여러분들이 지금 이 상황에서 이제는 변화되고 뭔가 도전해야 되겠다고 하는 인식을 하나님이 발견하게 하셨어요. 제가 그래서 비전위원들한테도 준비 과정에서 계속 말씀드렸습니다. 이 과정은 지금 중간에 어그러질 수 있는 요지들이 굉장히 많아요. 근데 저도 솔직히 그 과정에서 잘 돼서 우리 교회가 그 교회와 시너지가 나서 건강하게 세워지는 교회로 통합되었으면 하는 그런 바램도 제 안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제가 어그러질 수 있다는 그 상황을 염두에 두고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이 플랜b에 대한 것들도 충분히 기도하면서 준비하라고 말씀하신 플랜b는 뭐냐면 어그러졌을 때 그냥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끝내는 게 아니라 그러면 도대체 이 상황을 우리에게 허락하신 이유가 무엇일까라고 하는 질문을 던지고 그리고 두 번째 계획에 대해서 고민하라는 거예요.
두 번째 계획은 이미 우리가 2년 전에 계획을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2년 전에 여기가 우리가 건물이 매매되고 우리가 나가야 될 상황이 잠깐 있었잖아요. 그때 우리 잠깐 고민하지 않았습니까? 우리 여기 우리가 원하는 때까지 있을 줄 알았는데 이 건물이 이렇게 매매되고 우리가 나가야 되는 상황이라니 막 하면서 그때 막 되게 혼란스럽고 어떻게 해야 되는지 고민하는 시기가 있었잖아요.
물론 잠깐 그 시기가 지나고 다시 우리가 여기에 계속 있을 수 있는 상황이 되어서 지금 있지만 그때의 상황 그리고 두 주 전에 있었던 그런 상황 이 두 가지의 상황 속에서 저는 아 이제 본격적으로 기도해야 될 때다라고 하는 상황을 분명히 여러분들에게 나눕니다.
여러분 그냥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여러분들 안에 있는 그 소망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깨닫게 하셨습니다. 저도 마찬가지고요. 그리고 우리가 큰 교회를 이루기 위해서 지금 여기 개척한 게 아니잖아요. 그러면 굳이 우리가 여기 개척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저도 그것에 대한 질문이 계속 많았거든요. 우리가 저렇게 큰 교회를 통합하는 과정에서 들어가서 지금 이게 무엇일까 근데 그것마저도 내려놓으려고 했어요. 이것도 내 생각일 수 있다는 생각에서 여러분 제가 지금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다윗과 같이 우리가 기도로 이 과정들을 맞이하고 소망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영적인 눈을 좀 더 크게 떴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하나님 우리가 이곳에서 뭔가 움직여야 할 상황이라고 하는 우리의 마음을 통일하게 하셨는데 그렇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라고 하는 눈을 목회자인 저에게만 맡기지 마시고요. 제가 생각보다 눈이 짧아요. 저는 제가 보고 싶은 것만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근데 저 혼자 개척한 게 아니잖아요. 우리가 같이 한 거잖아요. 여러분들이 같이 지금 교회를 이루고 있는 거니까요. 한번 눈을 뜨고 보십시오. 그게 어떤 연약해져가는 지금 무너져가는 이제 곧 문을 닫기 직전인 교회가 될 수도 있고요. 때로는 어떤 다른 상가가 될 수도 있고요. 또 작은 건물이 될 수도 있고 그건 모르겠습니다.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드리고 하나님이 어디로 인도하시는지를 저는 분별해야 되겠다고 하는 분명한 인식이 이번에 분명히 들었어요.
그래서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도 나도 다윗처럼 이렇게 해야 되는데 옆에서 이게 기회입니다. 그렇지 기회인가 이게 정말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렇지 뜻이지 저도 갈대같이 흔들렸던 그 마음을 회개하는 마음들이 좀 들더라고요.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이건 우리 교회적인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도요. 분별에 있어서는 정말 중요한 말씀인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뜻을 더욱더 분별하여 하나님이 기뻐하는 그 삶,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