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말씀은 시편 23편입니다.
아마도 시편의 모든 시들 중에 가장 유명하고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시입니다.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영어로 보면 좀 더 좋습니다. (개인적으로)
The LORD is my shepherd,
I shall not be in want.
He makes me lie down in green pastures, he leads me beside quiet waters,
he restores my soul. He guides me in paths of righteousness for his name's sake.
Even though I walk through the valley of the shadow of death, I will fear no evil,
for you are with me; your rod and your staff, they comfort me.
You prepare a table before me in the presence of my enemies.
You anoint my head with oil; my cup overflows.
Surely goodness and love will follow me all the days of my life,
and I will dwell in the house of the LORD forever.
시편 23편을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자신의 심신을 위로해 주는’ 음악이나 그림을 좋아합니다.
시편 23편을 읽고, 떠오르는 그림은
목자가 양을 품에 안고, 잔잔한 물가와 푸른 풀밭에 서 있는 그림입니다.
아주 목가적(牧歌的)적인 풍경입니다.
그런데 시편 23편은 그런 ‘목가적인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배경이 있습니다.
4절에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있습니다.
사망의 그늘이 덮여 있다면 곧 죽는 자의 모습입니다.
5절에서는 ‘원수’가 등장합니다.
즉 ‘죽이려고 달려드는 원수’를 배경으로 시편 23편의 찬송이 있습니다.
시편 20편에서 ‘왕의 승리’를 기원합니다.
시편 21편에서는 ‘왕이 이미 승리하였고, 앞으로도 승리할 것’을 노래합니다.
그런데 그 왕의 승리가 시편 22편에서 ‘십자가로 승리’임을 보았습니다.
십자가로 승리하신 그 왕이 선한 목자가 되어 양들을 인도하심이 시편 23편입니다.
선한 목자는 자기 양들을 잔잔한 물가와 푸른 풀밭으로 인도하십니다.
그 물과 풀은 ‘생명의 양식’을 말하기에 ‘영혼의 소생’을 말합니다.
양들이 사망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선한 목자가 함께하십니다.
선한 목자만 자기 백성들의 사망의 자리에 함께 하시고,
자신이 대신 죽으심으로 그들을 사망에서 건져내어
영원히 아버지 집에서 살게 하십니다.
이사야 53:5~7절.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갔습니다.
이런 양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리신 목자가 예수님입니다.
요한복음 10장 7~18절. “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13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17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자신이 친히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릴 뿐 아니라 얻을 권세도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잃어버린 양들’에게 버림을 받아
그들을 끌어안고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생명을 얻으시고, 또 양들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목숨을 얻는 일을 하실 수 있는 유일한 선한 목자는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구약의 자기 양들에게 생명을 주셨고
신약의 양들에게도 생명을 주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가 십자가로 다 이루시고, 그 십자가로 이끄시는
주님의 음성이 들린다면 ‘주님의 양’입니다.
우리는 각기 제 길로 갔지만
우리의 죄악을 그가 담당하셨음을 믿기에
오늘도 선한 목자를 따라 갑니다.
우리들은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만 계시면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이 전부이기에 예수님 외에 더 원할 것이 없습니다.
오늘도 선한 목자이신 주님만 따라가는
주님의 양으로서의 삶을 잘 감당하길 기도합니다.
주님은 저의 선한 목자이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