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화적 역사 (구전 역사)
고려시대 전남 화순군 동복면 유천리에 살던 홀아비 최모씨가 중병에 걸려 여러가지 약을 복용 하였으나 백약이 무효라 이제는 황천길만을 기다리게 되었는데, 이때 효자 아들이 매일 모후산 바위 밑에 가서 신선에게 부친의 병이 완치되도록 지극한 정성으로 기도를 올리던 어느날, 깊은 꿈속에서 수염이 하얀 신선이 선녀와 같이 나타나 빨간 열매가 달리고 뿌리는 사람모양과 흡사한 약초를 주며, "모후산 동북쪽 산기슭에 이와 같은 영약이 있으니 남편의 병을 치료토록 하라"하고 생시와 같이 선명하게 이야기하였다. 그 아이은 하도 신기하고 감사하여 그것을 받으려는 순간, 신선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참으로 허망한 꿈이었다.
그러나, 그 아이는 희망을 가지고 초조한 마음으로 날이 밝기를 기다려 모후산 동북쪽 산기슭을 헤매던 중, 신기하게도 꿈에서 본 약초를 발견하게 되어 조심스럽게 뿌리를 캐고 종자를 잘 간직하여 집으로 돌아왔고, 뿌리를 정성껏 달여 아비에게 먹이자 신기하게도 병이 완치되었다. 그 후 인은 종자를 파종, 재배를 하여 이를 점점 확장한 결과 큰 부자가 되었다고 전해져 오고 있다.
문헌적 역사
원래, 인삼은 예로부터 귀족들의 전유물로, 대부분의 양은 왕실이나 중국조정에 공물로 바쳐졌는데, 그후 중국조정의 끊임없는 인삼요구에 당시 산삼을 재배하여 중국조정에 공물을 바치던 고려, 조선새대에는 실로 중국의 요구가 지나칠정도로 많아서 양민들은 농사일을 관두고 산으로 들어가서라도 산삼을 캐내어 바쳐야만 했다.
중국에서 요구하는 고려삼은 산삼으로 인삼의 공급이 부족하여 궁여지책으로 가삼(家蔘-일명 장뇌삼)을 재배하여 산삼과 섞어서 중국에 공물로 보냈는데, 인삼재배를 문헌상으로 나타낼 수도 없고 공공연히 재배할 수도 없는 실정이었다. 특히, 처음에는 순수한 선물로 물물 교환 교역품으로 이용되다가 고려 중엽부터는 의무적인 공물로 수량과 회수가 늘어나서 고려 25대 충열왕은 장순용 장군을 원나라 세조에게 보내어 공삼의 감면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했고, 조선의 태조는 청나라의 인준을 얻으려고 삼 500근을 보냈다고 한다.
이를 위해, 전국 각지의 장뇌삼(조선 중기 풍기에서 인삼의 인공재배가 시작되기전까지의 인삼은 인공재배한 인삼이 아닌 산삼의 일종인 장뇌삼이었음)을 많이 공출하기위해 서민들에게 엄청난 부담을 주었으며, 이 때문에 많은 유랑민이 발생하고, 산으로 숨어들어가 도적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해마다 중국에서 요청하는 인삼의 량은 늘어나고 구내 수요량도 증가하는 반면에 생산되는 인삼의 양은 해마다 줄어들어 산삼이 많이 나는 지역에 세금으로 호당 1근씩 삼을 납부토록 함으로써, 농사를 지을 바뿐 시기에도 백성은 산을 헤매게되고 어린 삼도 마구 채취하여 산삼씨가 마를 지경이 되어 삼으로 인한 백성들의 폐해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며, 산삼을 캐지 못한 백성들은 소나 집을 팔고 심지어는 처자를 노비로 팔아서 삼을 국가에 납할 지경이 되니 온가족이 산삼이 나지 않는 타고을로 야반도주햐였다고 한다.
평안도 관찰사 정실은 임금에게 보낸 상소문에서 삼 폐가 심한 강계지방에 10명이 입산하여 8명이 허행하니, 구제치 않으면 주민들이 도망하여 변방을 지킬 장정이 없어 걱정이라고 하였고, 정인홍 장계부사의 장계에는 20,000호 주민이 모두 달아나서 4,518호 밖에 없다고 하였으니, 인삼 산지주민의 고생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인삼산지이던 풍기지방 또한, 지역에서 자생하던 나삼(신라삼)은 당나라의 가장 인기있던 인삼이었기에, 원나라와 명,청나라에까지도 그 유명세가 이어져, 더욱 심한 수탈에 시달려야 했다. 이러한 때에, 조선 중종때 신재 주세붕 선생께서 풍기 군수로 부임(1542년)하셔서 이 어려운 형편을 해소하기 위하여 산삼종자를 채취하여 풍기읍 금계동 임실 마을에 시험 재배한 것이 인삼재배의 효시가 되었으며, 이후 주세붕 선생은 풍기군수로서의 뛰어난 업적으로 인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1551년 황해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개성 지역에도 새로운 인삼재배법을 보급하여, 상업을 천시하는 조선의 건국으로 쇠락해진 개성지역이 다시 상업발전의 중심지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최인호씨의 소설 '상도'에 나오는 송도상인이 바로 그러한 예이다)
최근의 역사
조선말기, 정국의 혼란함과 동시에 상업또한 열강들의 침탈이 시작되었고, 그 결과 1899년에는 대한제국 궁내부 삼정과 설립하여, 상인들이 독점하던 인삼에 대한 국가사업화가 시작되었지만, 1900년부터 일본의 무역회사인 미쓰이(삼정)이 독점위탁받아 중국과 무역하여, 일제침탈의 경제적 도구로 사용되는 오점을 남겼다.
특히, 1908년 1월에는 미쓰이(三井)가 타 상인단체의 시장진입을 막기위해 연구하였고, 그후 조선통감부(1910년부터는 조선 총독부)의 압력으로 인하여, 홍삼전매제를 실시하게 되었다.
이로인해, 홍삼의 제조가 불가능해진, 민간에서는 조직적인 대항을 위해 1908년 3월 풍기삼업조합이 설립되었고, 1910년에는 개성삼업조합이 설립되는등, 본격적으로 일제의 경제적 침탈에 대비하였지만, 홍삼이 전매제되어 제조가 불가능해지자, 1996년 6월 31일까지 백삼 및 태극삼의 가공에만 전념하게 되었다.
그후, 일제는 중국과의 무역과 자국에서의 수요량 충족을 위해, 전매제를 확대하고, 1928년에는 '고려삼'이라고 표기하였으며, 1940년에는 소위 일제침략전쟁이 발발하게 되어, 재정이 부족해진 일제는 민간에서 그동안 몰래 유통시켜오던 홍삼이, 중국무역 및 국내 유통에 있어서의 불이익이 늘어나자, '정부가 관장하는 공장'이라는 의미에서 '정관장' 이라는 상표를 붙이고, 독점을 더욱 확대하였다.
광복후, 48년에는 대한민국 재무부의 전매국으로 통합된 홍삼전매권은 그후 1996년 7월에 이르러서야, 민간에게 전매제 폐지가 되었다.
그러나, 6~80년대에 수십%에 이르던 홍콩, 대만 무역의 시장 점유율에서 1996년에는 3%정도에 불과하게 밀려나자, 수출량이 감소로 인한 인삼공사 공급량의 국내공급으로의 전환, 전매제 폐지로 인한, 민간제조 국내의 공급량이 늘어나, 어려운 과도기를 거치게 되었다. 최근에는 인삼공사와 민간업체의 합심된 노력으로 다방면으로 활로를 모색중이지만, 아직도, 여러 가지 해결되어야할 문제점이 많이 산재해 있는 실정이다. 그 중심된 문제점으로는,
첫째, 사포닌 함량이 동일하게 나타나는 5년근과 6년근을 차별화하는 잘못된 마케팅 전략과 그로인한 소비자의 혼동이 발생하고 있으며, 특히, 이러한 시장상황은 외국으로 수출할 때에도 걸림돌이 되어 저렴한 가격의 4년근 홍삼등이 판매되지 못하고 있어 한국의 홍삼은 비싸다는 인식이 확산되어, 수출의 감소로 악순환 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둘째, 연근 구별이 힘들어 수삼의 경우 소비자에 의한 연근구별이 거의 힘들다는 점이 있다.
셋째로는 외국수출시, 가격경쟁력과, 마케팅 전략에 있어서의 차별화 미흡이 지적된다. 특히, 미국의 화기삼에 비하여, 가격은 최소 수배에서 수십배, 마케팅 전력은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여야만, 국내 인삼산업의 발전과, 세계 수출시장에서의 점유율 확대가 이루어 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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