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나는 대규모 프랜차이즈의 제로섬 경영 전략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한국에선 소이라떼를 취급하는 카페가 드물었기 때문에 종종 스타벅스를 찾곤 했다. 아메리카노나 카라멜 마끼아토가 주력인 한국에서와 달리 일본의 커피 전문점에선 어디에서나 쉽게 소이라떼를 찾아볼 수 있다고, 카나는 말했다. ‘안정의 소이라떼’라고 할 만큼 보편적인 메뉴라고 했다.
우유를 넣은 라떼와 비교해 소이라떼는 고소한 맛이 더한 반면, 두유 특유의 텁텁함도 함께 따라오는 것이 단점이다. 이 때문인지 한국의 스타벅스에선 소이라떼를 주문할 경우 무료로 바닐라시럽을 추가할 수 있게끔 되어있다―이따금 그런 사실을 인지하지 못 한 채 오백 원을 추가로 청구하는 신입 아르바이트생들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카나는 항상 바닐라시럽을 넣지 않고 마셨다. 카나는 그 텁텁함이야 말로 소이라떼의 매력이라고 주창했다. 어쩌면 그것만큼은 카나에 관해 내가 끝내 이해할 수 없는 부부인지도 모르겠다.
한국에 처음 올 때부터 카나는 한국말을 충분히 유창하게 구사했지만, 카페에서 주문을 할 때만큼은 늘 나를 앞세우곤 했다. 카나는 나의 쓸 데 없이 발음만 좋은 영어를 사랑했다. 두음 S의 거센 소리와 입을 동그랗게 모아 발음하는 oi, 부드럽게 강조되는 두 개의 t를 사랑했다. 그 애는 나에게 자신의 소이라떼를 주문시키곤 뒤에선 까르르 웃곤 했다. 혹여 내가 콩글리쉬 특유의 분절체로 소이라떼를 발음하거든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닌 표정으로 노려보곤 했다.
내가 다니던 학교에선 영어 발음이 너무 유창하면 되레 친구들한테 놀림을 받았어. 그래서 다들 일부러라도 음절을 끊어 읽곤 했던 거야. 자기가 할 수 있는 걸 숨겨가면서 ‘나도 너희들과 다르지 않아!’라고 말하는 것 같았어. 그런데 어릴 때 나는 만약에 영어를 잘한다면 네이티브처럼 발음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거야. 왜냐하면 우리 엄마가 영어 선생님이었거든. 엄마는 외국 드라마를 좋아해서 영어 공부했대. 그래서 집에서도 늘 외국 드라마만 봤어. 나는 자막에 쓰인 한자를 읽지도 못 하는 나이부터 엄마가 보던 드라마를 같이 봤던 거야. 그러니까, 영어를 하는 사람들은 드라마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말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거야.
본의 아니게 가능한 한 백인들의 영어 발음에 가까워지는 것이 영어실력의 척도 중 하나였던 시절에 교육을 받았던 것이 내가 카나의 환심을 산 계기였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엄밀히 얘기하자면 소이도 라떼도 프랑스어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 봄에, 나는 집으로부터 도보로 삼십 분 정도 떨어진 상가건물 삼 층에 작업실을 하나 얻을 수 있었다. 가족들은 내가 작업실을 얻었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 했다. 어차피 책상 위에서 하는 일에 작업실이 무슨 필요인지 의아한 듯했다. 예상할 수 있었던 것처럼 헛돈을 썼다는 핀잔을 듣기 시작하자 집에서보다 작업실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날들이 늘어갔고 침대는 없었다. 딱딱한 바닥에서 잠드는 밤이 싫어 나는 난생 처음으로 수면시간을 줄여보기로 결심하고 자정 넘어서까지 동네를 산책하곤 했다. 뒤숭숭한 세상인 탓에 밤 산책을 즐기는 이들이 많지는 않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언제나 동료들이 적어도 한 명은 있다. 재밌게도 우리가 선택하는 산책로는 대개 일치하는 듯하다. 나는 아마 나와 마주보며 걷는 저들의 머릿속이 나와 같은 망상과 경계와 낭만으로 가득하리라 생각한다. 그 증거로, 우리는 똑같이 두 발로 서서 걷고 눈 마주치는 것을 꺼려한다.
이따금 참을 수 없을 만큼의 졸음이 쏟아지면 몸이 카페인을 필요로 했다. 역전의 편의점을 찾아 초콜릿이 듬뿍 들어간 커피 한 잔과 샌드위치로 요기를 하고 있자면 거의 매번 똑같은 시간에 찾아오는 키 작은 여자애와 마주칠 수 있었는데, 나는 점원과 나누는 대화로부터 그의 한국어가 비록 웬만한 한국어 학습자에 비해 월등히 유창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모국어가 아님에는 틀림없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 애가 카나였고, 늘 파이터즈의 야구 모자를 쓰고 있었고, 짧은 머리칼에 뚜렷하게 각진 콧날은 다소 차가운 인상을 주었고, 평소엔 커피 한 캔을 사선 곧바로 편의점을 빠져나가곤 했지만, 그날은 왜였는지 내가 앉은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휴대폰을 잠시 들여다보았다. 나는 별다른 이유도 없이 맞은편에 앉은 그 애를 관찰하듯 주시했고, 카나도 내가 자기를 쳐다보고 있음을 알았던 것 같다. 그러나 이후에는 정말로 의도치 않게 둘이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고, 쓰레기를 처리하고 편의점 문을 함께 빠져나오며 나도 모르게 먼저 말을 걸고 말았다.
자주 보는 것 같네요? 나는 그렇게 내뱉고 나선 평소에 종종 오해를 받곤 하던 것처럼 내 어투가 이 외국인에게 다소 시비조로 들리지 않았을까 걱정스러웠다. 하기야 애초에 그 인적도 드문 시간에 이름도 모르는 낯선 이가 말을 걸어오는 것부터가 카나에겐 내심 적잖이 두려운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 카나는 조금도 당황한 것 같지 않았고, 오히려 내가 정확히 이 시간에 말을 걸어오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당돌하게 나를 돌아보며 자기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대꾸했다. 편의점 불빛에만 의존하고 있던 내 시야는 그 당시 카나의 표정을 정확히 살피지 못 했던 것 같은데, 불분명한 기억이나마 반추해보자면 어쩌면 카나는 아주 차갑게 웃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집이 가까워요? 이번엔 카나가 물었고, 나는 집은 멀지만 작업실이 가깝다고 말했다. 작업실에서 지내고 있다고. 카나는 내가 작업실이라고 말한 부분에 대해 내 ‘작업’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신경 쓰이는 눈치였고 나는 작업실을 얻고 나서 처음으로 누군가를 초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와볼래요? 아직 나 말곤 아무도 온 적이 없는데. 나는 스스로 말하고도 이 말이 적잖이 수상쩍게 들린다는 것을 알았고 아마도 그 애가 정중하게 거절하리라 예상했지만, 의외로 카나는 별달리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나로서는 드물 정도로 금세 친해질 수 있었다. 카나는 스물한 살이라고 했고, 어쩌면 조금 아쉽다고 할 정도로 무색무취했고, 그럼에도 굳이 어떤 향을 첨가할 수 있다면 석류와 같은 과일이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우리 가족은 이사를 하도 많이 다녀서, 나도 내가 어느 지역 사람인지 헷갈릴 정도야. 태어난 곳은 야마나시 현 어디쯤이었다고 들었지만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우리 가족이 나고야에 살던 시절부터야. 그러다가 열한 살이던 해에 도쿄로 이사해서 잠깐 살았고, 그 이후엔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센다이에서 살다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니이가타로 이사했어. 대학은 다시 도쿄로 갔다가, 지금은 아예 일본을 벗어나서 서울에 있으니, 어디 출신이냐고 물으면 솔직히 할 말이 없어.
카나는 내 작업실에 하나뿐인 책상 위에 걸터앉아 말했다. 사람을 들일 일이 없었으니 접객용 의자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 한 탓에 달리 앉을 곳이 없었던 탓이다.
이사를 자주 다녔다는 게 나는 좀 부러워. 우리 가족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줄곧 이 동네서만 살았어. 의심할 여지도 없이 서울사람이지. 그 때문인지, 나는 늘 내 시야가 남들에 비해 너무 좁지는 않은지 걱정이야. 난 여행으로라도 비행기 한 번 타본 적 없는걸.
결국 무슨 일이든 밸런스가 가장 중요한 건지도 몰라. 카나가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나중에야 안 것이지만 카나는 매사에 어떤 식으로든 결론을 내기를 좋아했다. 카나는 자신의 기억력이 나쁜 탓이라고 했고, 실제로 카나는 사사로운 일들을 종종 망각하곤 했다. 어쩌면 나는 카나의 기억들에서 소실되어가는 것들의 가련함 탓에 카나를 더욱 애틋하게 여겼던 것도 같다.
나는 어느새 잠이 들었고 잠에서 깨니 카나는 돌아가고 없었다. 대신 카나는 자신이 걸터앉았던 테이블 위로 자신의 연락처가 적힌 메모를 남겨두었고, 그러나 나는 곧장 카나에게 연락할 생각일랑 하지 못 하고 메모를 서랍 속에 넣어둘 뿐이었다.
그로부터 대략 한 달 간 나는 카나의 존재를 완전히 잊고 지냈다. 이따금 카나와 마주치곤 하던 한밤중의 편의점에서도 카나와 다시 마주치는 일이 없었다. 그 대신이라고 할 건 아니지만, 나는 무슨 바람이 불었던지 평소 거의 가질 않던 선술집 따위를 이따금 찾아들어가기 시작했다. 두 번째로 홀로 술을 마시러 갔을 때 그곳에서 웬 낯선 남자와 합석하게 되었고 그 여세와 술기운을 몰아 통성명도 없이 하룻밤을 같이 지내게 되었다. 뭐 그리 불만족스러울 것 없는 밤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벽 공기를 맞으며 터덜터덜 작업실로 돌아가는 길에선 참기 힘들 정도의 탈력감에 마치 고된 노동을 마친 직후인 양 손끝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허망하게 잃어버린 생기를 되찾기 위해선 중독되지만 않을 만큼의 충분한 카페인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건 편의점 설탕 커피론 채울 수 없는 용량이었다.
작업실로 돌아와서 나는 곧장 카나와 연락을 취해보았다. 여전히 제법 이른 아침이었지만 카나는 내 전화를 기다리고 있기라도 했던 양 곧장 전화를 받았고,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났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선명한 어조였다. 처음으로 전화를 걸어서 나는 대뜸 오후에 카페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잡았고, 오늘은 커피를 아주 많이 마시게 될지도 모른다고, 미리 경고를 했다. 카나는 알겠다고 대꾸한 후 전화를 끊었는데, 전화가 끊기고 나서야 뒤늦게, 나는 내가 좀 더 통화를 이어가고 싶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첫댓글 재밋다...재밋어..!! 이어서 바로 올려줘요!!
잘 읽었어요~ 소이라떼의 맛이 궁금하네요! 다음 이야기도 궁금하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