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뫼루니통신 4/090306]우리 부모의 마지막 보따리
거의 60여년 동안 이어진 우리 대가족의 ‘보따리 대행진’이 지난 토요일 마침내 ‘쫑’이 났다. 아버지는 그날 새벽 동트기 전부터 대파를 뽑는 등 자식들에게 줄 보따리에 매직으로 이름을 쓰며 “진짜 마지막”이라며 울먹거렸다고 한다. 그전날 둘째딸 내외와 함께 캔 도라지 뭉치도 봉지봉지 쑤셔넣었다. 그날 진안 마이산 탑사에 어머니 49재를 지내러 오는 아들딸들에게 주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안봐도 비디오다. 73년 함께 고락을 같이 한 짝꿍을 잃고 어떻게 혼자 고향집에 계시겠는가. 딸이 당분간 모시기로 하여 3주간 경기도 여주에서 사시다 잠깐 오신 길이다. 뒷밭의 도라지와 쪽파, 대파가 왜 마음에 걸리지 않으셨으랴. 동생네는 동생네대로 짜증이 났다. 왜 이렇게 일편단심 자식들 챙기기에만 ‘광분’하실까? 이제 그러지 않아도, 당신 몸을 생각하셔도 될 터인데? 하기야 어머니도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자식들을 못잊어하셨다. 들릴 듯 말듯한 목소리로 “밥 먹어야제” 끼니 걱정을 하셨다. 아버지도 결코 그에 못지 않았다. 아니,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일심동체였던 것을.
자식들은 진작 30년 전부터 보따리 챙기는 부모 때문에 짜증이 날대로 났었다. 심지어 ‘보따리 논쟁’이 붙어 형제자매끼리 ‘니 책임이니 내 책임이니’ 말다툼까지 크게 났던 게 여러 번이었다. 오죽하면 글쟁이 넷째가 ‘보따리 대장, 울 엄마’라는 글을 잡지에 실었을까? 엄마의 대답은 늘 똑같았다. “너는 머라고 히라. 나는 글혀도 쌀팅개”. 이런 마당이니 무슨 말을 더 하랴. 대도시 마트에서 고구마나 대파 한 봉지 몇 천원도 안헌다고 그러케 말씀드렸건만, 직접 싸서 앵겨주어야 직성이 풀리는 모양이다. 짐 쌀 때에는 부모의 머리는 총알이나 컴퓨터처럼 빠르게 돌았다. 눈곱만큼한 빈틈 없애기는 기본기. 10kg 박스의 윗부분을 반절로 접어 채우고는 테이프로 칭칭 감는다. 불쌍한 이는 오직 1박스에 500원, 1천원 버는 택배아저씨들이다.
49재가 끝난 후 주차장에 나래비를 선 승용차 7개에 보따리 하나씩을 앵겨준다. “마지막 보따리”라는 한마디에 누군들 군말을 할까? 모두 말없이 받아다 트렁크에 넣는다. 그렇게 60여년간의 ‘보따리 대행진’는 숱한 신화와 전설을 남기고 끝이 났다. 대체 몇 봉다리를 쌌을까? 1만개, 2만개, 아니 그보다 훨썬 더 쌌을 것이다. 그런데, 그랬건만, 며칠 지나지도 않아, 다시 ‘그것’을 몸서리나게 싫어하던 큰딸의 보따리 행진이 시작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효녀인 큰딸이 ‘보따리’라면 질색팔색한 까닭은 이렇다. 모처럼(아니 잦은 편이다) 친정나들이에 부모와 도란도란 얘기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가까운 곳 나들이도 같이 갔으면 하는 바람이 ‘그놈의 보따리’ 챙기느라 한번도 마음놓고 그런 시간을 가져보지 못한 때문이다. 딴은 그럴 법도 하다. 백퍼(100%) 이해한다. 나도 그런 소망을 몇 번이고 꿈꾸었으니. 누군들 일이 좋아서 친정을 오겠는가. 그것도 오자마자 만사 제치고 밭에 달려가 일을 거들어야 하고, 그 부산품들을 불효자들인 오빠네로 챙겨 보내는 일에 손을 보태야 하니, 한심지경일 것은 불문가지. 어쩌다 ‘택배’라는 서비스가 생겼는지 원망이 하늘을 찌를 정도였으니.
그런 큰동생이 아버지를 ‘시한부’로 모시고 있는 바로 밑 동생댁으로 지게로 한바작쯤 되는 택배를 보냈는데, 큰 사달이 난 것이다. 초등학교 교장실에 배달된 택배를 사위가 끙끙거리며 관사로 옮겼는데, 거실에서 그만 박스가 터져버렸다는 거다. 종류도 뼈다구감자탕을 비롯하여 10가지가 넘었다는 건데, 문제는 쪽파김치 플라스틱통이 깨져 그 국물이 고스란히 거실에서 강물처럼 흘러다니게 된 것. 딸이 오기 전에 그 흔적을 없애고자 아흔이 넘은 아버지가 안절부절못하며 닦는다고 닦았는데, 퇴근하는 딸의 눈에 띄었겠다. 이 노릇을 어쩔 것인가? 성질 급한 둘째딸, 언니를 탓하기 전에 아버지에게 “이것 좀 봐요. 이러케 택배 보내는 것, 전부 아버지 어머니한테 언니가 배워서 그러잖아요” 마구마구 웨장을 쳤다는 거다. 이치를 따져봐도 그것을 아버지에게 뭐라고 할 일은 아닌 것을. 그러나 우리는 안다. 평생 ‘보따리 스트레스’를 얼마나 받았으면 눈앞의 아버지께 책임을 물듯이 들이댔는지를. ‘죄없는’ 아버지가 졸지에 갑자기 ‘죄인’이 되어버렸다는 것. 사위는 아내의 서슬과 장인어른 사이에서 쫄아갖고 아무것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있을 밖에. 동생은 아버지가 ‘시골로 가 혼자 살겠다’고 하면 ‘그리요. 시골 가서 혼자 잘 살아봐요’라고 매정하게 대꾸하려고 했다는데, 혼잣말 비슷하게 “시골에 가서 죽어야겠다”라는 말에 아연실색, 그만 “잘못했다”고 곧바로 비는 바람에 일단락이 되었다고.
문제는 ‘보따리 싸는 것’조차 ‘유전자’가 있어 대물림이 되는 것일까? 유전자를 들먹일 필요도 없이 주욱 크면서 보고 배운 것이 누가 오면 무엇이라도 싸주는 게 일상이었으니, 누구를 탓할 것인가? 결과적으로 부녀간에 싸움을 시킨 큰동생은 이 사달을 시시콜콜 듣고도 빙글빙글 웃으며 “머 몇 가지 안쌌는데, 왜들 그리싸”라고 했다는 거다. 그것조차 엄마 판박이, 엄마 아바타가 아니고 무엇이랴. “너그는 머라고 히어도 나는 싸고 또 쌀 거다” 우리 엄마가 늘 하는 말씀이었다. 그렇게 싫어라고 했던 일을 돌아가시자마자 그대로 따라 하다니? 쓸데없이 걱정하는 것도 똑닮았다. 오죽하면 생질녀석이 “외할머니 빼박은 걱정종결자”라고 했겠는가? 누가 봐도 그 엄마에 그 딸, 오촌댁의 큰딸이로소이다.
하하. 이렇게 우리집 ‘보따리 싸기’는 이제 3대째 대물림을 하고 있다. 인자 제발 적선하고 그만 좀 싸자. 돈으로 치면 몇 푼이나 헌다고? 그리도 그기 아니제. 정(情)이지, 정(情). 고거시 사람 사는 맛이 아닌개비어. 암먼. 그러코말코. 한 오백년 살자는데 무신 말이 고로코럼 만탕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