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경자(1924 - )
1924년 생으로 1944년에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43-44년에 선전에 입선함으로 미술활동을 하였다. 광복 이후에는 55년에 대한미협전에서 대통령 상을 수상하였다. 1954년에 홍대 미대 교수를 역임하였고, 76년에 국전 운영위원이 되었다.
천경자는 동양화가이면서도 강한 채색화가이다. 여성다운 감성적인 표현을 하였다. 뱀을 그린 화가로 이름이 났다. 50년대 전반기까지는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그림을 그렸다.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환상적인 주제의 전개와 자율적인 색상미를 화면을 감미롭고 낭만적인 분위기로 표현하였다.
그는 특히 꽃 그림을 통하여 색채를 통한 환상을 이끌어 내었다. 수필도 쓰면서 자신의 감성적 표현을 통하여 여성 독자를 매료시켰다.
1970년대 중반 이후로는 이국의 여행을 통하여 이국적인 정취를 담아 냈다. 이국의 풍경을 통하여 갋망하는 낙원을 표현하였다고 평한다. 그의 그림은 그의 독자적인 양식이다. 대중적인 상징 언어를 가지고 있어서 대중에게 인기가 있다. 아름다우나 다소 퇴폐적인 여인, 꽃, 동물의 소재, 전통적인 원근법 등을 무시한 기법이 나타난다. 60년 대는 한국회화의 한 경향인 추상화 경향도 잠시 보였다.
천경자 회화는 한국화의 장르 화가이지만 그림의 수법은 동, 서양을 망라한다. 샤갈과 로랑 생의 환상주의 영향이 많이 보인다. 대중에게 쉽게 어필한 것은 화려한 색상에 의한 대중 친화력과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경직된 필법과 표현의 도식화, 그리고 일본 채색의 냄새가 너무 풍긴다는 평도 듣는다.
천경자(1924 -2015 )
1924년 11월 11일 전라남도 고흥군에서 군서기였던 아버지 천성욱과 무남독녀였던 어머니 박운아의 1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외동딸을 남장을 시켜 서당에까지 보낼 정도로 깨어 있던 외할아버지는 그 딸이 낳은 큰 손녀를 금지옥엽으로 예뻐하며 옥자(玉子) 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손녀는 밤마다 외할아버지의 무릎에 누워 '심청전' '흥부전' '수호지' '춘향전'을 듣다 잠이 들었고 천자문과 창까지 배우며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일본 유학 중이던 1942년 제22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외할아버지를 그린 '조부(祖父)'가 입선하고 1943년 제23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외할머니를 그린 졸업 작품 '노부(老婦)'가 입선하면서 재능을 인정받는다. 도쿄에서는 야수파나 입체파 등을 가르치던 서양화 고등과 보다는 곱고 섬세한 일본화 풍이 마음에 들어 일본화 고등과로 가서 모델을 보고 관찰해 섬세하게 사생하는 법을 집중적으로 교육받는다.
1944년에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43-44년에 선전에 입선함으로 미술활동을 하였다. 광복 이후에는 55년에 대한미협전에서 대통령 상을 수상하였다. 1954년에 홍대 미대 교수를 역임하였고, 76년에 국전 운영위원이 되었다.
표를 구하지 못해 안절부절못하던 자신을 도쿄역에서 우연히 만나 표를 건넨 명문대생 이철식과 1944년 결혼을 하고 1945년 첫 딸 이혜선을 낳는다. 1946년부터 전남여자고등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했지만, 남편과의 결혼생활은 길지 못했다. 그러다 전남 모신문 사회부 기자였던 두 번째 남편 김남중을 만난다. 1950년 전쟁 통에 여동생 천옥희마저 폐병으로 숨진 후 남편 없이 두 아이를 기르던 천경자 화백은 유머 넘치고 건장했던 그에게 푹 빠지고 만다.
"청춘에 메말라 버린 나는 목 타는 사막에서 감로수를 마신 듯한 기분이었다"
천경자 화백은 자녀 2남 2녀를 낳았다. 첫 남편 이철식과의 사이에 1남1녀를 두고, 김남중과 사이에 1남 1녀를 둔다. 이 가운데 맏딸이 뉴욕에서 어머니의 마지막을 지킨 이혜선이다. 2006년 갤러리현대 전시에서 처음 공개된 작품이었던 '모기장 안의 쫑쫑이'에 등장하는 모 서점 대표 김종우는 천경자의 막내이다. 아이들에게는 남미짱(이혜선), 후닷닷(장남 이남훈), 미도파(둘째딸 김정희), 쫑쫑이(막내 김종우)라는 애칭을 붙여주고 아이들을 모델로, 때로는 사랑했던 남자를 모델로 그림을 그렸다. 물론 천경자 화백 그림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여인의 모델은 그 자신이다.
천경자는 동양화가이면서도 강한 채색화가이다. 여성다운 감성적인 표현을 하였다. 뱀을 그린 화가로 이름이 났다. 50년대 전반기까지는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그림을 그렸다.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환상적인 주제의 전개와 자율적인 색상미를 화면을 감미롭고 낭만적인 분위기로 표현하였다.
그는 특히 꽃 그림을 통하여 색채를 통한 환상을 이끌어 내었다. 수필도 쓰면서 자신의 감성적 표현을 통하여 여성 독자를 매료시켰다.
1970년대 중반 이후로는 이국의 여행을 통하여 이국적인 정취를 담아 냈다. 이국의 풍경을 통하여 갋망하는 낙원을 표현하였다고 평한다. 그의 그림은 그의 독자적인 양식이다. 대중적인 상징 언어를 가지고 있어서 대중에게 인기가 있다. 아름다우나 다소 퇴폐적인 여인, 꽃, 동물의 소재, 전통적인 원근법 등을 무시한 기법이 나타난다. 60년 대는 한국회화의 한 경향인 추상화 경향도 잠시 보였다.
천경자 회화는 한국화의 장르 화가이지만 그림의 수법은 동, 서양을 망라한다. 샤갈과 로랑 생의 환상주의 영향이 많이 보인다. 대중에게 쉽게 어필한 것은 화려한 색상에 의한 대중 친화력과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경직된 필법과 표현의 도식화, 그리고 일본 채색의 냄새가 너무 풍긴다는 평도 듣는다.
여동생마저 6·25전쟁이 끝나자마자 폐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아픔을 견디지 못한 천 화백은 자신의 고통을 마비시킬 만큼 무섭도록 끔찍한 자극을 줄 수 있는 소재를 택해 화폭을 35마리의 뱀으로 가득 채운다. 1952년 피란지인 부산에서 연 개인전에 내놓은 그림 '생태(生態)'는 천경자 화백의 작업을 화단이 주목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1965년 동경 이도 화랑(畫廊)에서 개인전을 열고, 홍익대학교 교수가 되었으며, 홍익대학교 동양화과 과장을 역임했다.
1972년 베트남전 당시 문공부에서 베트남전 전쟁 기록화를 그리기 위해 화가 열 사람을 파견한다는 기별을 받고 김기창, 박영선, 김원, 임직순 등 남자 화가들 틈에서 홍일점 종군화가가 된다. 맹호부대에 종군해 1주일간 종군하면서 M-16소총을 들고 꽃나무 그늘에 잠복하는 병사들, 연분홍 아오자이를 입고 자전거로 거리를 누비는 아가씨들을 많은 스케치와 담채 작품으로 남겼다.
천경자는 당시로는 드물게 해외여행을 즐겼다. 40대 후반에서 70대 초반까지 타히티를 시작으로 유럽과 아프리카, 중남미 등 해외 스케치 기행을 12번이나 다니며 '천경자 풍물화'라는 개성적인 화풍을 개척했다. 우수에 젖은 이국적인 여인 그림은 타히티 여행 후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이후 노란 옷을 입고 꽃이 가득 달린 화려한 모자를 쓴 1973년작 '길례언니'를 시작으로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1977), '황금의 비'(1982) 등을 그렸다.[2]
1955년에는 대한미술협회전 대통령상, 1979년에는 대한민국예술원상, 1983년에는 은관문화훈장을 수상했다.[3]
그림 못지않게 문학적 재능도 뛰어났다. 수필집 '탱고가 흐르는 황혼' 등 10권 이상의 저서를 남겼다. 타고난 글재주로 1955년의 '여인소묘' 등 단행본 15건과 수필집 10권, 신문잡지 연재 12건 등으로 대중과도 호흡했다. 2006년에 새로 편집돼 나온 자서전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는 쉰둘이던 1976년 잡지 '문학사상'에 연재하기 시작했던 글을 모아 1978년에 내놨던 것이 절판된 후 2006년 갤러리 현대 개인전과 때를 맞춰 새로 나온 것이다.
누군가는 천경자 화백의 그림에 값싼 센티멘탈리즘이 흐른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녀가 표현해냈던 여인으로서의 슬픔은 인위적인 것이 아니다. 그저 그녀 인생에서 스며 나오는 것이었을 뿐이다. 그녀도 예술가이기 이전에 한 명의 여인이었고, 때 묻지 않은 모습의 길례 언니를 닮고 싶어 했다. 그녀도 자화상에 고독한 눈빛과 어두운 색채 대신 그저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그려 넣고 싶었을 것이다. 아무리 자신의 인생 전반에 깔려있는 슬픔을 팔자소관이려니 생각한 화가라지만 같은 여자로서 한 여인의 사무치는 고독이 느껴져 안타까운 감정마저 드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지 않을까.
천경자 화백의 노년에 가장 큰 고비는 1991년 '미인도' 위작 논란이었다. 당시 68세였던 천 화백은 "자기 그림도 몰라보는 화가"라는 수군거림 속에 절필을 선언하고 미국으로 떠난다. 천 화백은 4개월 후 다시 돌아와 그림에만 몰두하기 위해 카리브해, 자메이카, 멕시코로 스케치 여행을 떠난다. 생애 마지막 전시라고 생각하고 72세 때인 1995년 호암갤러리에서 15년 만에 가진 대규모 전시는 8만명이 모여 줄을 서서 볼 정도로 대성공을 거둔다.
1998년 11월 채색화와 스케치 등 자신의 작품 93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하고[4] 섬유공예를 하는 딸 이혜선을 찾아 뉴욕으로 떠났다가 2003년 7월 2일에는 뇌졸중로 쓰러지고 만다.[5]
1999년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선정 20세기를 빛낸 한국의 예술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2007년부터 천경자의 고향인 전라남도 고흥군에는 천경자가 기증한 드로잉 55점, 판화 11점 등 총 66점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고, 소장품과 아트상품 등이 갖추어져 있는 천경자전시관이 개관되었다.[6]
한국표준시로 2015년 10월 22일 천경자 가족 측은 천경자가 2015년 8월 6일 새벽5시에 타계했다고 전했다.[7]
천경자 화백이 세상을 떠났지만 미인도 위작사건은 짚어볼 가치가 있다.
1991년에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천경자의 ‘미인도’가 위작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이 사건을 취재한 중앙일보(온라인 2016. 7. 2)의 기사 제목이 ‘천경자 미인도에 비친 한국 미술의 추한 얼굴’이다.
이 사건은 1991년에 천경자가 미인도를 자기의 작품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시작했다. 그러나 미술계의 감정위원은 진품이다라고 말하면서 사건이 되었다. 그러나 감정위원과 다르게 과학분석과 외국의 전문기관(프랑스)에 감정에 의뢰한 결과는 위작에 가깝다 였다.
위작 논란이 일었을 때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이경성씨이고, 화랑협회장은 김창실씨였다.
문범강(조지 타운 대학 미술과 정교수-천경자의 사위)의 컴퓨터 분석 결과는 이렇다.
“작가의 의견이 무시되었고, 동시대의 작품에 미학적 분석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었으며, 과학기술 수준이 낮아 제대로 감정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라고 지적했다. 그 외에도 여러 말이 있지만 부정적인 말이었어 생략하겠다. 덧붙여서 “객관적인 사실에 의하지 않고 미인도를 천화백의 진작으로 판단하는 것은 미술권력의 폭력에 가깝다.”
2015년에 위작시비가 새롭게 불 붙었다. 그리고 법원으로 갔다. 문벙감의 분석자료도 증거로 법원으로 갔지만, 문화권력의 힘 앞에 어떨는지.
최광진 미술평론가의 말을 인용한 소설가 정찬의 컬럼도 인용하겠다.
“거짓을 지키려면 수많은 거짓이 필요하다. 미술계 전체가 거짓의 피라미드에 연루된 것은 국립현대미술관이 미술계 권려구조의 정점에 있기 때문이다.” 라고 했다.
천경자 미인도의 위작 논쟁에서 보면 마치 미술계의 권위가 걸려있는 듯 하다. 하지만 위작을 하는 대부분의 이유는 돈이다.
위작의 방법을 보면
1. 끼워넣기 - 전시도록에 위작 작품을 슬쩍 끼워넣는 수법이다.
전시출품자이라고 하면, 슬쩍 진품이 되어서 가격이 올라간다.
2. 베끼기 - 베지를 벗겨내겨나. 등등의 방법으로 베낀다.
3. 늘리기 - 소품의 진품에 그림을 그려 붙여서 늘린다.
그림이 커지면 가격이 비싸진다.
4. 바꿔치기 -- 작품을 이동하는 과정에서 (전시실로 옮긴다 등지 할 때)
위작과 진품을 바꿔치기 한다. 이럴 때는 전시품이 가짜가 진품으로
이 과정에 거대한 권력이 개입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