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현필(李鉉弼, 호:방림, 1913~1964)
일생을 절식하며 맨발 벗고 다니면서 예수의 복음을 전하였다. 금욕, 청빈, 순결을 몸소 실천한 선생은 동광원을 통해 수많은 제자를 길러내었다. 예수를 닮으려는 그의 열성은 철저하고 진실했다.
이현필(李鉉弼, 호적에는 李鉉鼎으로 되어 있음)선생은 1913년 1월 28일에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용하리(권동)에서 출생했다. 이곳은 나주군 영산포나 남평에서도 산을 타고 30여리 떨어진 산골짜기에 있으며 주변에 화학산과 천태산(혹 개천산)이 있다. 아버지 이승노(李承老), 어머니 김오산(金烏山) 사이에 3남매가 출생했는데, 현필은 어머니 나이 27세 때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 형과 누나가 있다. 막내로 자라서 일곱 살까지 어머니 젖을 먹고 자랐다고 한다. 꼿꼿한 성격은 부친을 닮았고, 인정이 많고 따뜻한 점은 효자댁 출신의 어머니를 닮았다. 효성이 지극했다고 한다. 열 살이 되기까지 권동집에서 자라면서 천태보통학교를 다녔다. 이 학교는 본래 서당이었던 것을 후에 학교로 승격한 것인데, 현필은 4년 동안 언제나 1등으로 공부하여 졸업했다. 그가 보통학교를 졸업한 것이 그의 전 학력이다. 그후 현필은 혼자서 독학하고 노력하여 많은 책을 읽고 사상이 깊어 그 실력이 대학교수와 논쟁할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청년이 되어 다도면 면서기(茶道面 面書記) 시험에 응시하여 형과 함께 합격했으나 형만 서기로 다니고(후에 다도면장까지 지냄) 이현필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서기로 봉직하는 일을 시작하지 않았다.
어릴 때 이름은 싹뿌리라 불렀는데 그 이유는 전해지지 않는다. 후에 제자들이 이를 ‘뿌리고 싹 났으니’ 혹은 ‘예수를 안 후는 싹 버렸다’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선생은 자칭 ‘헌신짝’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뜻으로 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죄인이라는 뜻이다. 일생 남들이 자기를 존경하고 칭찬해주는 일은 그 마음속으로부터 싫어했다.
이현필의 집은 예수를 믿기 전에 넉넉히 살던 집안이었으나 부친의 사업 실패로 자기가 살던 집도 남에게 넘어갔다. 그 후 너무도 가난하게 살아 그는 돈을 벌어 고생하는 어머니의 소원을 풀어드리기 위해 옛집을 다시 사고 싶었다. 그래서 권동에 살면서 몇 십리 떨어진 영산포 읍에서 닭장사를 하러 다녔다. 당시 영산포에는 일본사람이 많이 살고 있었는데 일본인 교회가 하나 있었다. 담임목사는 관파라 불렀는데 그는 사람들에게 구제도 많이 하고 열심히 전도하던 분이었다. 이현필은 그를 만나 처음으로 예수의 복음을 듣고 그의 설교에 감화를 받아 예수를 믿기로 했다고 한다. 이때가 13세였을 때였다(1925년). 그의 나이 17세 때 서울 기독 청년학관(YMCA)에서 영어와 성경을 공부했는데 이때에 원경선 선생과 서로 알게 되어 서로의 교제가 평생 계속되었다. 그의 나이 21세때(1933년)에는 전남 광주 신안동교회 전도사로 시무하기도 했다. 이때 백춘성 장로와 알게 되었고, 백장로는 일생을 통하여 이현필을 도왔고, 동광원 사람들과 교제도 하였다.
이현필의 신앙생활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분은 예수를 믿고 방산(芳山)장로교회에 출석하면서 만난 등광리의 이공(李空, 이세종)선생이었다. 이곳은 용하리에서 10리 떨어진 중촌(中村)마을로 이공의 고향이다. 방산교회는 이 두 사람이 함께 신앙생활을 하던 교회로 지금은 등광리교회(1999년 초부터 현재 정칠영목사 시무)가 되었다. 그를 따라다니며 성경을 배울 때 부친은 아들을 보고 미치광이를 찾아다닌다고 꾸짖었어도 이현필은 그냥 계속 다녔다고 한다.
복음의 진리를 깨달은 후 1948년 9월 1일에 남원 지리산 골짜기 ‘서리내’에서 몇 사람을 모아 성경을 가르친 것이 최초 “한국 기독교 토착 신앙공동체”운동을 시작한 시발점이었다. 몇 달 후 서울의 Y총무인 현동완선생이 보내준 기금으로 정인세와 함께 광주에서 동광원(이현필은 歸一園이라 함)을 세워 고아원 운영에 적극 지원을 하였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고아들의 숫자는 순식간 600명으로 불어났다.
동광원은 한마디로 “한국 기독교 수도원”이었는데 순결(철저한 남녀유별), 노동, 수도, 선행, 정직, 성실, 책임, 희생의 정신을 실천해 나갔다. 효소법을 개량한 농사를 시작했고, 모든 공동체 멤버는 직접 노동을 하여 자급자족했으며, 최소한 양만 먹고 최대한 남긴 농산물을 팔아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구제하는데 사용했다. 노동을 중요하게 여기며, 근검절약하고 사치를 피하고 현대문명을 거부하는 점에서는 재침례파(Anabaptist, 미국 오하이오주와 펜실베니아주를 비롯한 10여개 주에서 신앙공동체를 형성하고 살고 있음)인 아미쉬(Amish) 공동체와 통하는 점이 있다. 김용기장로의 가나안농군학교가 일종의 농촌계몽운동이라면, 동광원은 순수한 신앙운동이었다.
현재 동광원은 남원에 그 본부를 두고 있으며, 여러 곳에 분원이 있다. 화학산 기슭 도암의 ‘청소골짜기’(정규수 수녀, 1948년 10월, 고아원운동 발상지; 고아와 머슴출신 한영우집사는 1953년에 들어와 동광원 수녀들의 농사일을 돕고 있다), 중촌(中村)의 화순(6‧25때 피신처, 김춘일 수녀가 1953년에 들어와 현재 ‘큰 언니’역할을 하고 있다), 도구밖골(도구봉) 가마터, 문바위, 이세종 선생의 유적지와 무덤, 각시바위, 소반바위, 바람재, 전남 함평, 진도, 경기도 벽제 계명산(수녀의 마을), 무등산 등지에 있다. 광주 동광원은 5‧16직후 정부에 의해 폐쇄 조치되었다가 1965년에 다시 귀일원(초대 원장=정인세 1909~1991, 초대 총무 및 2대 원장=김은연 1920~1991)이라는 이름으로 사업을 재개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선생은 주로 암굴에서 수도를 했고, 손수 움막을 지어 기거했으며, 깨끗한 동정(童貞)생활을 실천했다. 부인 황홍윤은 광주에서 목회하던 백영흠 목사의 처제인데 결혼 직후부터 이선생은 잠자리를 함께 하는 것을 거절했고, 거지와 고아들을 끌고 다니면서 집안살림을 돌보지 않자 한때는 ‘칼을 품속에 숨기고’ 다니며 살해할 기회를 노릴 정도로 남편을 미워하였다고 한다. 한 때 다른 집으로 개가하였지만 노년에 병이 들어 도장리로 돌아와 회개하고, 정월례집에서 3년간 기도하며 살다가 1998년 83세로 소천하여 이세종 부인 ‘한골 어머니’의 묘 옆에 묻히었다.
6‧25동란 때 공산당이 광주로 진입하기 직전 피신하지 않고 남아 있던 수피아여학교 교장 유화례선교사를 화학산 문바위, 박적골, 도구박골 등지에서 정성껏 숨겨주었다. ‘인공치하’ 5개월 동안 100여 동광원 식구들과 함께 피신생활을 한 것이다. 이때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 동광원은 수도생활과 성경공부 지도하는 일 외에, 고아들, 폐결핵 환자들 돌보아 주며, 지체 장애인 300여 명 돌보고 있다. 그의 말년에 성경공부 모임이 절정을 이루었는데, 밤나무골 남나무 집에 백 여명의 제자들이 매양 선생의 말씀을 사모하여 모여들었다.
이현필선생은 건강이 좋지 않아 마침내 폐결핵에 걸려 고생하기도 했으며 자주 각혈을 했다. 죽음을 예상한 선생은 자기가 고요히 죽을 장소를 찾으러 서울로 향하는 기차를 탔다. 남녀 수십 명의 제자들이 광주역에서 눈물을 흘리며 환송을 하였다. 오북환, 김준호, 정인세가 동행했다. 서울 신촌 부근 넝마주이 거지굴에서 마지막 숨을 거둘 준비를 하면서 밤중에 곁에서 지켜보고 있는 제자인 정인세, 오북환에게 먼저 가라고 해서 이 두 분은 자리를 비웠고 김준호는 곁에 남아 있었다. 아마 선생은 옛날 광주 양림다리 밑에서 거지생활을 하던 시절을 회상하며 죽는 순간도 거지하고만 함께 있으려는 듯했다. 다음날 정인세는 다시 돌아왔다. 선생은 반가워하면서 김준호와 정인세 두 제자에게 마지막 신앙간증을 하였다.
“저는 이 시간까지 예수님을 섬김에 있어서 선행위주를 해왔습니다. 오늘 지금 저는 그 동안 잘못 믿어온 점을 자백합니다. 우리 예수님의 보혈만이 저를 구원한다는 것을 저는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저는 일평생 오늘까지 밥이 귀한 줄 알며, 밥만 좋은 줄 여기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지금 와서 제게는 물이 제일 귀합니다. 생명수가 귀합니다. 이 물을 마셔야 저는 살고, 이 물을 마시지 않는 날엔 저는 죽습니다. 선행으로는 구원 얻지 못합니다. 예수님 보혈로만 구원을 얻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예수님 보혈이 내 몸에 한 방울 흘러 들어오면 저는 삽니다. 제가 앞으로 걸어갈 걸음은 주의 보혈을 의지하는 신앙으로 뛰어 들어갈 것입니다” 선생의 요청대로 정인세가 이를 종이에 받아 적었다.
서울 신촌 대피호 굴속에서 사경을 방황하다가 문득 깨달아진 이 날의 경험이 있는 뒤부터는 이현필선생의 분위기는 보다 부드러워졌고 깊은 사랑의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일반 교계에서 이현필을 산중파 금욕주의자라고 불렀다. 그 말대로 지금까지 그는 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으며 죽어도 약을 쓰지 않았다. 이공(李空)처럼 절대로 살생을 하지 않았다. 길을 걸어갈 때 보통 사람들보다는 배나 느리게 천천히 걸으면서 길가의 개미, 지렁이 등 곤충벌레가 밟히지 않게 목숨을 가진 것을 주워 옮겨 놓든가 피해서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일평생 그는 한잔의 커피도 한 점의 고기도 들지 않았다. 몸소 청빈하게 순결하게 살면서 예수를 닮으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그의 철저한 금욕생활 자체에 대한 교만을 가지지 않고 죽는 순간까지도 항상 부족한 죄인임을 고백한다. “제가 오늘 이대로 죽으면 저는 천국에서 예수 앞에 역적 같은 놈이 되리라는 느낌을 가집니다. 그 동안 제가 절대선행을 강조해 왔던 고로, 저를 따르는 이들을 온통 철저한 율법주의자들을 만들어 버렸습니다…나는 위선자입니다. 나도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여 구원 얻을 사람이지 선행이나 금욕고행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가 임종을 앞두고 깨달은 것은 예수 보혈로만 구원을 얻는 것이다. 물론 그의 과거의 신앙도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신앙이었다. 그런데 그의 제자들이 선생의 금욕생활 자체를 우상화하지 않을까 염려되어 이를 다시 강조한 것이다. 그의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2천년 전 유대땅 골고다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만 가지고는 부족하다. 바로 지금 이 시간 어쩔 수 없는 나의 마음에 뚝뚝 떨어져 오는 예수님의 보혈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평생 고기를 한번 잎에 대지 않던 선생이 신촌에 있는 거지 굴에서 기진맥진해 있을 때 굴비 국물을 달라고 해서 떠 드릴 때 제자들이 당황했다. 물론 후두결핵으로 그 국물을 넘기지는 못했지만, 금욕주의보다 복음이 우선임을 몸으로 가르쳤던 것이다. 자체 자신이 죽고 나서 율법주의파나 고행을 위주로 하는 어떤 파가 생길까봐 몹시 염려한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그의 급성 결핵병이 어느 정도 치유가 되어 위험한 고비를 넘기게 되었다. 병이 좀 회복된 후 이때의 심경을 술회하면서 “내가 저지른 이 파계 사실이 세상에 알려져 모든 사람들이 듣게 된다면 그 동안 나의 금욕주의, 고행, 불살생 때문에 나를 존경하고 따르던 제자들이나 청년들 중에 크게 실망하여 소동이 일어나 격분하여 나를 위선자라 혹은 정신이 돌았다고 욕하고 혹은 나를 저버리고 떠날 것이고, 혹은 더 분하게 생각하는 이는 몽둥이로 나를 때리며 동광원에서 쫓아내기까지라도 할 것임을 각오하면서 고기를 먹은 것이라”고 말함으로 인간 이현필을 우상화하려던 당시 제자들의 움직임을 과감히 뿌리치고 오직 예수의 복음만이 남아야 함을 강조했다. 그렇게 예수를 닮으려고 애쓰던 이현필선생.
1963년에 광주로 내려와 최흥종목사의 주선으로 제중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다. 물론 혼자 입원하기를 거부하여 결핵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제자 김준호와 함께 입원하게 되었다. 사실 병원에 간 것은 자신 때문이 아니라 김준호를 입원시키려는 생각이 더 많아서 그렇게 한 것이다. 후두결핵병이 걸린 것이다. 기침과 가래가 심하고 목이 아파서 말을 못했다. 한동안 병이 심해서 40일간이나 목으로 물도 삼키지 못했다. X-ray를 찍어보니 속립성 결핵인데 이 병은 결핵균이 혈관을 타고 전신으로 퍼지는 급성 전신결핵이었다. 결핵약이 나오기 전에는 속립성 결핵에 걸렸다 하면 모두 사망하고 마는 무서운 결핵이었다. 여성숙 의사를 비롯한 의료진들의 정성어린 치료로 회복이 빨라 열흘 후에는 겨우 목소리가 나오게 되었단다. 이리하여 3개월간 병원 음식도 비교적 들면서 치료를 받던 중 퇴원하겠다고 한다. 평소 약을 쓰지 않고, 고기나 생선도 먹지 않던 이선생이고 보면 3개월간 병원에 입원한 것도 길었다. 특히 치료에 효험이 되는 약을 주어도 먹지 않고 모았으며, 주사도 거절하여 여성숙 담당의사가 권유하였더니, ‘우리 한국의 결핵환자들이 이 약을 다 먹을 수 있게 되면 나도 먹겠습니다’고만 했다. 아직 병이 완치된 것이 아니었고 겨우 고비만 넘긴 상태인데 퇴원하고 말았다. 심지어 여의사가 주사기에 약을 담아서 왕진을 하여도 막무가내 거절하여 그냥 돌아왔단다.2) 김준호는 6개월간 입원하여 건강이 많이 회복될 수 있었다.
예상대로 선생의 파계(고기도 먹고 약도 쓰다)로 많은 제자들이 떠나갔고, 심지어 그를 위선자라고 평하는 이들도 있었다. 물론 선생은 신촌에서 고기국물로 입 다신 것과 제중병원에서 한번 약을 쓴 일 외에는 다시 과거의 습관대로 고기도 약도 입에 대지 않았다. 병원에서 퇴원한 후 본격적으로 제중병원 전도를 시작하였다. 그후 계속 그는 독신생활을 강조했다. 경기도 벽제 계명산으로 임종하러 갈 때 행한 고별(유언) 설교도 끝까지 동정(童貞)을 지키는 순결주의만은 양보하지 않았다. 선생과 동광원의 순결주의는 참으로 엄격하고 철저하여 이들 나름대로 독특한 해석을 가지고 있다. “끝까지 동정을 지켜라. 깨끗이 살아라. 청빈 생활을 사랑하라. 음란은 죄다. 동정을 지키고 깨끗이 살아라”
1964년 정초 해마다 하는 대로 광주 방림에 있는 동광원에서 한 달 동안 연속하는 수양회를 인도할 때 건강상태가 극히 악화되었다. 한번 하는 강론시간이 적어도 두 세 시간씩 계속했는데도 시종 그냥 무릎을 꿇고 앉은 채로 하였다. 강의가 끝나면 무릎이 굳어져 일어서지 못하며 제자들이 양쪽에서 겨드랑이를 끼어 부축해 세웠고, 거실까지는 업어다 모셨다. 누우면 또 다시 송장 같았다. 한 달간의 수양회를 그렇게 인도하고 나서 자신의 임종이 가까웠을 때 평소 마음에 둔 경기도 벽제 계명산 분원에서 지냈다. 도착한지 엿새만에 세상을 떠났다. 임종의 자리는 계명산 속, 동광원 분원에서 500미터나 더 산중으로 들어가 옛날 현동완 선생의 산장자리에서였다. 1964년 3월 16일 저녁, 선생은 혼수상태에서 영적인 대화를 하고 있던 것을 조정은 수녀가 들었다. “예, 예, 저는 죄인입니다…예…” 혼자의 독백이었다. 그리고 조금 후 “할렐루야, 할렐루야” 찬송을 불렀다. 그제서야 조정은 수녀는 따뜻한 물을 들고 방에 들어가서 ‘선생님 아까 새벽에 누가 왔습니까?’ 물으니 “주님께서 내일 새벽 3시에 오라고 하셨습니다.”
다음날 산장의 새벽은 너무도 고요했다. 병든 이선생은 아랫목에 누워있고 왼편에는 계명산 수녀 원장인 김한나 수녀, 오른편에는 일생 잠시도 선생 곁을 떠나 본 일이 없는 김준호, 방구석에 김희옥 수녀, 조정은 수녀가 앉아 있다. 마지막 순간까지 두 수녀에게 정결을 지킬 것을 당부하며, 준비된 선생의 수의(壽衣)로 깨끗이 빨아둔 누더기 옷 바지저고리로 갈아 입혔으나 죽는 사람은 그런 옷이 필요 없다면서 도로 헌 옷을 입은 그대로 묻어 달라고 당부했다. 관(棺)도 쓰지 말고 자기는 죄인이니 거적대기에 싸서 내다 파묻으라고 유언을 남겼다. 무덤은 평토장(平土葬) 우로 하라면서 죄인의 시체니까 아무도 모르게 하고 아무나 함부로 밟고 다니게 하라고 했다.
최후의 순간이 가까워 오면서 이선생은 기도하기를 “주님 저는 주님을 사랑하고파 무척 애썼습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고자 할 때마다 주님은 저를 피하셨습니다. 주님! 저는 지금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갑니다…. 오 기쁘다! 기쁘다! 오 기뻐! 오메 못참겠네. 아이고 기뻐! 이 기쁨을 종로 네거리에라도 나가서 전하고 싶어. 제가 먼저 갑니다. 다음에들 오시오!” 하고 눈을 감았다. 무릎을 꿇고 앉은 채로 얼굴은 하늘을 향하여 쳐다보면서 마지막 호흡을 내 쉬었다. 1964년 3월 17일 새벽 3시 정각이었다. 이리하여 만51세의 향년으로 별세하셨다. 이때 그의 외모는 80된 노인보다 더 연로해 보였다고 한다. 그의 무덤은 벽제 계명산에 있다.
맨발의 성자- 이현필 선생(동광원)
1. 아, 십자가! 십자가의 길 뿐입니다.
겨울에도 맨발로 다니던 성자(聖者)! 지리산 눈보라 속에서 십자가의 노래를 부르며 통곡하던 성자! 거지굴 속에 칠성판을 깔고 누워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총을 받은 성자! 그분이 바로 '이 현필' 이라는 인물이다. 이 현필 선생은 한국교회 인물사에 있어서 분명히 특이한 존재이면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숨겨진 보석 같은 그의 삶은 거룩한 자취의 순간들로 엮어져 있다. 스스로 알려지길 원치 않았던 겸손의 덕도 있을뿐더러, 이름 없는 들꽃처럼 순결한 삶을 사는 이 선생의 제자들 역시 스승의 뜻을 받들어 드러내지 않았기에 보석과 같은 삶은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세상과 타협하며 빛을 발하지 못하는 것에 안타가워하셔서 '이 현필' 이라는 성자의 삶을 세상에 소개하도록 은혜를 베푸셨다. 앞으로 소개될 이 선생의 삶이 물질주의와 기복주의에 빠진 한국교회를 일깨울 좋은 소식이 되었으면 한다.
이 현필 선생은 평신도이다. 그는 정규 신학공부에 관한 교육을 받은 분도 아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신학도들에게서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귀한 요소가 많다. 한 걸음 한 걸음 예수님의 삶을 실천하고 증거하고자 피흘린 사람이다. 예수님의 자취를 따르고 본받고자 철저하게 사셨던 분이다. 이 현필 선생의 삶을 자취자취 밟아가노라면 그 끝에 예수님과 하나된 거룩한 향기가 우리의 부패한 영혼을 일깨워준다. 그분의 삶이 더욱 값진 보석처럼 다가오는 이유는 물질의 풍요와 안일 속에 빠진 모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시기적절한 은혜와 경각심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 현필 선생의 삶을 살펴보노라면 '동과원' 이라는 개신교 수도단체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동광원은 이 현필 선생과 그 제자들의 신앙의 터전이 되었고 수도적인 삶의 명맥을 이어가는 귀한 단체인데, 스승의 가르침이 그대로 몸에 배인 제자들이 현재가지 남원에서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고도의 과학과 물질문명을 거부한 채 이름 없는 들꽃처럼 순박하고 순결하며 청빈하게 살아가는 그들의 삶 역시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탁월한 영적 지도자가 걸어간 자취에선 예수님의 향기가 진동하기 마련이다. 거룩한 향기에 어느덧 옷깃을 여미며 겸허하게 성자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볼까한다.
* 탄생과 성장
이 현필 선생은 1913년 1월 28일 전라남도 화순군 도압면 권동리(용하리)에서 아버지 이 승노, 어머니 김 오산 사이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영리하고 지혜로와 주위의 기대 속에 자라났다. 보통학교 졸업 후 차차 나이가 들어 성년이 되어가면서는 독학으로 공부했다. 부친의 사업 실패로 살던 집이 남에게 넘어가는 바람에 너무도 가난하게 살았다. 그러다 이 선생은 고생하는 어머니의 소원인 옛집을 사기 위해 영산포 읍내로 닭장사를 나가게 되었고, 거기서 처음 교회에 나가 복음을 듣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신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도압의 성자로 불리는 '이 세종선생'을 만나면서였다.
이 세종 선생(1880=1942, 전남 화순군 도암면)은 보통 '이공'이라 불렀는데 그는 재산을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준 뒤 초야에 묻혀 복음의 말씀대로 살다간 인물 이었다. 살생을 하지 않고 순결한 삶을 추구하며 일제시대 때는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깊은 산중에 숨어 지냈다. 성경을 읽으면 반드시 실천하고야 마는 철저한 삶을 살아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그의 삶을 좇아 사방에서 모인 청년들이 날마다 성경을 배웠고 빛된 삶을 실천하고자 노력 하였다. 이 현필 선생은 남다르게 거룩한 삶을 동경하며 실천하려고 애썼기 때문에 그의 수제자가 되었다. 특히 이 세종 선생의 순결사상은 이 현필 선생에게 그대로 전수되었다. 이 시절 이 현필 선생은 교회를 중심으로 활동을 했고 21세 때는 광주 자매교회(현 신안교회) 전도사로 시무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예수님처럼 거룩하고 빛된 삶을 철저하게 살고 싶은 열정이 생기게 되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 있어서는 생각한 바를 반드시 시행해야 하는 이 선생은, 그 후 도암 화학산으로 들어가 수도생활(修道生活)을 시작하게 되었다. 하지만 예수님을 따라가기 위해 인간적인 애정을 부인하는 수도생활은 대단히 어려운 것이다. 그 이 선생은 그 십자가의 길을 오직 순교적인 정신으로 임하였다. 거기에는 세상 사람들로는 생각지도 못하는 고민과 치열한 내적으로의 싸움이 있었으나 그는 깨끗하게 예수님만을 위해 살고자 하는 열망 때문에 평생을 수도하였다.
* 세상을 깨우기 위한 준비
이 현필 선생의 나이 30세 전후 수년간은 주로 개인적으로 산에 은거하면서 금식 명상생활을 하였다. 산에 파묻혀 기도하며 지내던 이 선생은 남원에서도 몇 십리 들어가 있는 서리내골 이라는 산중에서 기도하였고, 그와 같이 거룩한 삶을 사모하는 10여명의 소년·소녀들을 제자로 삼아 성경을 가르치고 훈련시켰다. 이곳이 바로 이 현필 운동의 발상지요, 말구유다. 그를 존경하고 그에게서 배우려는 이들이 서리내 깊은 산속에서 이 선생의 인격의 감화를 받으며 성경을 배우고 기도하고 찬양하는 등 영적 훈련을 받았다. 서리내에 사는 동안 이 선생이 잡수시는 음식은 쌀 가루에다 물을 타서 마셨으며 주로 생식을 했다. 그것조차도 어떤 때는 며칠씩이나 굶고 지내기도 했다. 보름식 산중에서 받는 교육은 경건 생활과 노동이 엄격하게 병행되었다. 초기에 훈련받은 이들이 그 후 30년 세월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하나님께 대한 정절을 지키며 수도생활을 하고 있다. 서리내에서 앞산을 타고 내려오노라면 갈보리라고 불리는 동산이 있다. 이곳 역시 서리내와 함께 수도(修道)의 도장이 되었는데, 많은 이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성경 강해를 들었으며 특히 이 선생의 순결사상을 전수받던 곳이기도 하다. 이렇게 갈보리는 서리내와 함께 이 현필 운동의 발상지가 되었고 뒷날 동광원의 모체가 되었다.
이 선생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정신을 본받는 경건훈련을 진행할 때에는 매우 엄격하고 철저했다. 그 자신 스스로가 짚신을 신었고 산중 길을 걸을 때는 추운 겨울에도 맨발로 다녔으며, 단벌 옷과 불을 때지 않는 차가운 방에서 지내며 청빈하고 가난하게 사셨던 예수님의 삶을 본받고자 몸소 모범을 보였다. 이 선생의 식생활은 일식주의(日食主義)였고 철저한 채식주의자였다. 또한 은혜받은 일이 많았으련만 자신의 신비적인 체험에 대해서는 일체 침묵하였다. 다만 성경을 가르쳤고 하루 종일 하는 대화가 그대로 설교였다. 간혹 누가 병이 들어 기도받기를 원하면 "저는 신(神)이 아닙니다"하고 거절했다. 어디가 아프다는 이에게는 "더 아프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기를 가르쳤다. 이것은 이 땅에서 겪어야 할 고통이나 시련을 감사함으로 받는것이 복 있는 신앙인데, 고통 중에 인내함으로 예수님의 거룩한 인격을 닮아갈 수 있음을 가르쳐 주려는 숨은 뜻이 담겨 있는 것이였다.
한동안 교회지도자들은 그를 '금욕주의자' '산중파'로 부르며 비방하였다. 그러나 한 번이라도 찾아와서 보고들은 이는 "이것이다!", "이 길이다!"라고 소리쳤다. 어떤 날 이 선생이 뒷산에 올라가 철야기도를 드리고 새벽에야 하산해서 초막에 돌아오는 모습을 보니 잔등에는 서리가 하얗게 엉겨 덮이고 수염에는 고드름이 달려 있었다. 순교자 같은 처절하고 엄숙한 모습을 바라볼 때는 사람과 같지 않았다. 그런 모양으로 하산해서는 떠오르는 아침 햇볕쪽을 향하여 몸을 녹이면서 창백한 얼굴로 서 있는 그 모습을 보노라면 뭐라 형용키 어려운 엄숙한 감격이 일었다고 제자들은 말한다. 이 선생은 지리산 봉우리마다 가득히 정화된 설경을 보며, 수도(修道)를 하기위해 세상도 청춘도 모두 바친 제자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아 십자가! 십자가의 길 뿐입니다"라고 호소하곤 했다.
2. 예수님의 삶과 정신을 그대로 따랐던 이현필 선생
* 제자 훈련
이 현필 선생은 서리내에서부터 훈련해온 제자들을 중심으로 탁발수도단(託鉢修道團)을 만들어 전남 광주에서 출발하여 순천, 여수, 평일도, 해남, 강진, 보성 등으로 순회했다.
이 선생은 쓰레기를 줍고, 남의 집 문전에서 걸식하는 탁발훈련을 통해 얼마나 자기를 부인하는가를 시험 하고자 하여 걸식(乞食)하였고, 제자들에게도 그 훈련을 시켰다. 모르는 사람들의 집에 가서 "밥한술 주십시오"하면 사람들은 밥을 주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아니면 편안히 집에서 살텐데'라는 생각을 하다가도 '아니다,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라고 다짐하며 탁발 전도에 임했다. 이렇게 탁발하고 숙소에 돌아와서는 서로 경과보고를 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맨발의 평화, 무소유의 기쁨과 자유! 바로 예수님으로 채워진 감격과 사랑 그것이였다.
한 겨울 맨발로 동냥 그릇을 들고 탁발을 나가는 그들의 모습은 저 아씨시의 성 프랜시스와 그의 제자들을 연상케 했다. 13c당시, 유럽사회가 극도의 사치로 타락해 가던 때, 겨울에도 맨발로 걸으며 식량 이외에는 금전이건 무엇이건 받지 않고 구걸 하며 복음을 전하고 자선을 행했기에 '걸식', '탁발'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탁발은 교파, 교리, 의식, 신학 등의 의상을 입기 전에 아직 때묻지 않은 나사렛 예수님을 그대로 따르고 방탕과 사치의 교회를 경건운동으로 건져내고자 착안해 낸 것이다. 교리나 교권보다 기독교의 본질적인 것을 청빈과 단순으로 착안, 그것을 사명으로 느꼈다는 점은 사치와 타락의 교회에 대한 혁명적 쾌사였다.
이 현필 선생은 일찍이 그것을 깨달아 탁발수도단을 감행했으며, 예수님처럼 기도와 광야와 전도를 위해 집집마다 일일이 찾아다니며 그들을 감화시켰다. 빈농을 돕고 가난한 겨레와 함께 울고 병자가 있으면 몸소 간호하는 사랑의 탁발전도였다. 이같은 헌신운동과 전도는 재산, 지식, 재주, 힘을 바치는 것보다 먼저 "제 자신을 바치라"고 료청하시는 예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다. 아울러 종교계에 대해 반성의 기회를 주는 동시에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그리스도 운동의 가치를 기대하게 하였다. 오랜 전통과 풍속에 굳어져버린 세상과 고개를 부드럽게 녹여주는 행동, 그것은 이 세상 풍속에 메이지 않고 초탈한 행동을 감행해내는 용기에서 기인한다. 이러한 제자훈련이 예수님을 향한 이 선생의 정신이요, 삶의 지표였다.
이 선생의 제자들은 철저히 모든 것에 예수님의 정신이 깃들인 생활을 훈련받았다. 침묵 속에 고요한 묵상, 몇 시간이고 무릎꿇는 기도의 자세, 두 무릎위에 가지런히 손을 모으고 부르는 찬송, 검소한 무명 옷차림, 고무신, 거지 음식보다 못할 최하의 조식(組食), 그런 음식조차 선생의 훈련에따라 땅에서 먹는 겸손, 아무 장식이 없는 숙소, 소박하고 검소하며 일체의 형식을 초탈했다. 개인의 소유란 없다. 또한 낮고 천한 곳, 사람들이 살지 않는 쓸쓸한 공동묘지 근처가 아니면 산기슭, 혹은 38선이 가까운 개명산 앵무봉 밑에 위험하고 고독한 장소를 택하여 세상을 뒤로한 채 예수님의 삶만을 닮아 매진하였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나는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8:20)라는 말씀처럼 일생 가난과 함께 육신의 평안을 거부한 채 사셨던 예수님의 삶과 정신을 그대로 단순하게 따르고자 하는 모습들이다.
*이 사람을 보라
이 현필 선생의 24시간은 기도생활이었고 기도는 그의 삶이었다. 해가 지면 거의 자리에 눕지않고 들에 나가 이슬을 맞으며 밤새 묵상했다. 제자들이 방에서 잠깐 잠들었다가 깨보면 그때까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가끔 각혈을 하기도 했다. 어던 제자가 "선생님, 모기가 많은데 낮에 기도 드리시지요"하면 "기도는 하는게 아니라 은혜를 받는 시간입니다" 라고 대답하며 주님과의 무아(無我)지경에 빠져 기도에 몰입하였다. 이러한 극도의 청빈 속에서도 밤 늦게까지 찾아와 어려운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을 때는 일일이 다 들어주고, 그들을 보낸 뒤에는 하루한끼 하던 식사도 그만두고 그들의 문제 해결을 위해 기도하였다. 그는 바로 깨닫고, 바로 말하고, 바로 행동하려고 애썼다. 제자들 앞에서 성경강해를 할 때에는 말씀 중심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강의 중에 늦게 들어온 사람이 있으면 처음부터 다시 설명하고, 더 늦게 들어온 사람이 있어도 역시 마찬가지 였다. 또한 찬송을 부를 때는 '나'라고 된 대명사는 다 '저'로 고쳐 불렀고, 어미의 '...겠네' 하는 말을 '...겠소'로 고쳐 불렀다. 이것은 예수님을 향해서뿐 아니라 사람들을 향해서도 작고 세심한 부분까지 섬기고 배려하는 그의 사랑의 마음이었다.
이 선생의 제자 중에 김 광석이란 사람이 3개월간 깊은 산 속에서 작정 기도를 할 때의 일이다.
지리산의 1월, 눈이 산처럼 덮이고 먹을 것도 없는 매우 어려운 사정이었다. 그러던 어느 새벽, 찬송가 소리가 나기에 나와보니 하얀 눈 속에 스승인 이 현필 선생이 서 있었다. 눈 덮인 깊은 한 밤중, 잘못해서 빠지면 몇 길이나 되는 눈 웅덩이에 빠져 죽을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 지리산 길이다. 이 선생은 품 속에서 간직한 것을 꺼냈다. 그것은 둥글한 떡 세 덩이었다. 당신 몫으로 받은 것을 산 속에서 굶고 있을 제자를 생각해서 가지고 온 것이다. 훗 날 제자는 고백하기를 "저는 예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을 볼 때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이 선생님의 삶 속에서 풍겨 나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함께 하는 사람은 거짓없고 진실하며 예수님과 같은 참 사랑을 계속 실천할 수 있습니다."라고 그는 간증하며 울었다.
이처럼 이 선생은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까지 바치는 지극한 사랑을 모든 이에게 실천 하고자 애쓰며 살았다.
예수님을 믿는 이는 많다. 그러나 낮고 천한 길을 자원하여 가는 이는 많지 않다. 그만큼 십자가의 좁은 길은 힘겹고 고통스러우며 쉽게 나서지지 않는 길이다. 이 ?h필 선생은 왜 누구도 마다하는 이런 고난의 길, 헐벗고 배고픈 길을 더듬어 그렇게 불쌍한 모습으로 예수님을 믿어야 했던가! 그것은 좁은 길 갈보리로 가는 험난한 길, 가시떨기와 자갈이 연해 있는 그 길을 예수님과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피 흘리기까지 자기와 싸우며(히 12:4) 가셨던 길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에게 잊혀져 가는 그 길을 이 현필 선생이 도로 찾은 것이다. 여기 저기 방황하며 신앙생활 하노라던 이들이 나중에 이 현필 선생께 뛰어들어 와서는 한결같이 "이 길이다! 이 길이다!"라고 소리치며 기뻐했다. 누가 뭐라 하든지 그 가르침 속에 예수님이 포함되어 있으면 그 길은 옳은 길이다. 이 선생님이 가신 길이었다. "넓은 길을 가르치는 자는 그가 비록 기사와 이적을 행한다 해도 곧이 듣지마라"는 신앙의 참 지표를 삶으로 제시해 준 것이다.
3. 사랑의 예수님! 닮기 원하네
하나의 영혼이 바른 삶으로 나아가는 일에 있어서는 모든 것이 희생되어야 한다. 장망성을 떠나는 기독도 같이 나가야 한다. 이 현필 선생은 그렇게 가르쳤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이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가 거룩함이다(살전4:3). 참 믿는다는 일은 자기가 먼저 거룩하고 깨끗해지는 일입니다." 일생 그의 지표는 단순했다. 예수님을 그대로 닮는 것 뿐이었다. 예수님처럼 가난하고 낮아지고 순결하고 고독하고 고통스럽게 그리고 철저하게 사는 것, 그것이 푯대요, 절실한 삶의 의미였다.
*사랑의 사도
남원에는 냐병환자가 많았다. 이 현필 선생은 떡을 많이 해 가지고 제자 몇몇과 나병환자들의 집을 일일이 찾아 다녔다. 이 선생은 곪아터져 진물이 나는 손을 꼭 잡고 악수하며 문안했다. 나병환자들은 자기네 손을 잡아주는 일이 너무도 황송해서 "선생님 고맙습니다. 이 병은 다섯 번 뒤집어 진답니다"하고 절망스런 말을 했다. 이 선생은 "형님 형님은 이렇게 눈에 보이는데 나병이 났지만 이 죄인은 보이지 않는데 병이 더 심합니다"고 대답했다. 지극한 겸손과 사랑에서 나오는 진실한 위로, 그것은 작은 소자, 상하고 찢긴 소자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의 무한한 자비와 사랑의 산 증인된 모습이었다.
어느 해 겨울 눈이 몹시 오는 밤, 이 현필 선생과 제자 김 준호 선생은 불을 때지 않아 뼈가 저리는 차가운 방에 기거하고 있었다. 다 떨어진 헌 누더기 옷을 입은 채 손에 깡통을 차고 하루종일 구걸하러 다니다가 저녁 늦게 돌아왔지만 하룻밤 따스히 쉴 구석도 없었다. 추운 겨울 입을 것도 먹을 것도 마련되지 못한데다가 냉방에서 지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시련이었다. 그날 김 준호 선생은 다리 밑에서 가장 불쌍해 보이는 3명의 아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한 아이는 금방이라도 얼어 죽을 것만 같았다. 탁발을 하고 돌아온 그는 이 선생에게 거지 아이들의 이야기를 했다. 밖에는 눈이 하염없이 오는데 밤 열시가 지났을가 그 때까지 묵묵히 무슨 생각에 잠겨있던 이 현필 선생을 보니 불쌍한 사람들의 일을 생각하고 계신 눈치였다. 눈오는 밤 배고픈사람들의 서글픈 얼굴들이 자구 떠오르는 것이다. 제자 김 준호는 오늘 밤 거리에서 가장 헐벗고 굶주린 이를 돌보고 오라는 스승의 음성을 가슴으로 느낄 수가 있었다. 그러자 이 선생은 자신 몫의 이불 한 자락을 선뜻 내어주며 가져다주라고 명하는 것이었다. 그는 할 수 없이 이불을 들고 다리밑의 거지에게로 갔지만 화가 났다. 자신의 처지도 불쌍한데 다른 이를 돌보려는 선생의 마음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막상 그 아이를 보자 가슴 밑바닥에서 영혼을 사랑하는 열정이 끓어 올랐고 그 아이가 죽기까지 간호하는 사랑을 실천하게 되었다. 스승 이 현필 선생의 삶을 어린아이처럼 이해하지 못한 채 불평을 늘어 놓다가도 결국은 스승으 참 사랑과 그 깊이에 눈물 흘리며 체험하게 된다. 알 수 없을 것같고 이해되지 않을 것 같던 스승의 행동들은 ,사랑을 실천하고 순종하는 그 자리에서 큰 감동으로 깨닫게 되는 체험을 매번 하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을 온전히 닮아 가고자 생명을 걸고 고난의 길을 지켜 나가는 이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이 하나된 성령의 능력이리라.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뜨거운 열정, 이 현필 선생의 삶은 그러했다. 자신의 모습도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비참하고 처절할 그 누군가를 생각지 않으면 않되는, 예수님을 닮은 멈출수 없는 영혼 사랑이 그의 속에서 불꽃처럼 살고 있었던 것이다. 제자들은 미처 깨닫지 못하다가 그 현장에서 눈물로 스승의 마음을 헤아리곤 하였다. 그리곤 예수님을 떠올렸다.
이 현필 선생은 주님의 고난에 몸소 동참하기 위해 행한 잦은 절제생활 때문에 여러 번 입원하셨다. 제자들 중에 마음이 흔들리고 시험을 받고 있는 제자들의 소식을 들을 때는 마음에 애통하다가 각혈을 하였다. 연약한 영혼을 특히 아끼셨다. 하나님의 은혜를 개닫지 못하고 뒤를 돌아본다든지 작은 일에 사로잡히는 사람을 볼 때는 그 때문에 피골이 상접하여 밤새 앓으며 애통하였다.
*하나님께 몰입된 삶
내가 아닌 타인의 영혼을 위해 울줄 아는 사랑의 마음은, 자신이 먼저 하나님을 향한 정도를 걷지 않고는 어려운 일이다.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랑이 삶을 통해 나타나는 법이다. 이 현필 선생의 삶 대부분은 지극한 예수님의 사랑에서 기인한, 영혼을 위한 절실한 통회에 있었다. 그는 예수님의 사랑을 이렇게 노래했다. '아! 절대적이신 그리스도의 사랑이시여! 저를 지옥 밑창까지 따라와 주시면서까지 권면하시고 훈계하시고 이끌어 내 주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이여! 참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니었던들 저란 존재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歐?? 의심할 수 없는 이 사실 앞에 이 좁은 입으로 만방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자랑할 수 밖에 없사옵니다.'
그래서 그는 울었다.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울고, 그 사랑을 바로 깨닫지 못하는 이들을 위하여 울고, 그 사랑을 실천하다가 울고, 오직 예수님 때문에 감격한 사랑의 발자취였다. 오랜기간 결핵으로 고생하던 제자 김 준호를 간호하던 이 선생은 자신도 후두결핵으로 병중에 거하게 되고만다. 그 소식을 들은 제자 김 광석이란 분이 문병을 왔다. 후두결핵으로 인하여 말씀을 하기가 어려웠던 이 선생은 찾아온 제자 앞에 떡 열 개를 내어 놓으며 필담으로 "잡수시오"하고 쓴다. 황송한 제자는 사양했으나 손짓으로 계속 권하여 한 개 먹었다. 그러자 또 먹으라고 권하고 또 먹고 나면 또 먹으라고 권하고 결국 내놓은 떡 열 개를 다 먹자 "이제야 제 배가 부릅니다"라고 기뻐했다. 그의 권함은 형식적인 것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진실한 마음으로 했다. 언제나 깊은 친절, 마음의 친절을 베풀었다. 다른이의 기쁨이 자신의 기쁨이 되고 다른이의 만족이 곧 자신의 만족이 되는, 다른 이로 인해 기쁘고 감사한 삶이 그의 삶이 었다. 병들고 지친 영혼들, 소외되고 방황하는 잃은 양들을 천하보다 귀히 여기셨던 예수님의 마음이었다. 그의 한 마디와 한 걸음은 결사적이었다. 모든 일에 생사를 걸고 십자가의 길, 희생의 길을 걸으셨다. 그는 병을 보내 주신 것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깨달아 "오! 축복하신 이 결핵 병이여! 내게서 영원히 떠나지 마옵소서"하였다. 곁에서 시중드는 이가 "얼마나 고통스러우십니까?"하면, "글세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아무리 자신의 몸이 아플지라도 주위에 자신처럼 고통 당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 고통 속에 들어가 그 사람과 하나 된다고 말했다. 한번은 이가 상해서 송곳같이 뾰족한 끝이, 긴 시간동안 열심히 말씀하시는 동안 찔러서 구멍이 뚫리고 입에서 피가 흘러 나왔다. 그런데도 그냥 긴긴시간 말씀을 계속 하셨다. 그렇게까지 자기 희생을 하며 남의 영혼을 위해 한 마디라도 더 가르치고자 하시는 선생의 모습은 거룩하고 눈물겹기도 했지만,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많은 이들이 메마르고 공허한 영혼의 갈증을 채우지 못해 혼돈하고 방황하는 세대이다. 참으로 이 현필 선생같은 영혼을 사랑하는 열정이 그리운 시대이다. 예수님을 수만번 외쳐 부른들 그 속에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가 될 뿐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그 사랑을 전하고 실천하고싶은 열정이 이 선생의 삶속에서 우리 곁으로 절박한 울림이 되어 다가온다.
"생명바쳐 섬겨 생명을 얻을 참 사랑의 예수님"
4. "제게는 고통이 주님께 대한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생애에 십자가의 길을 예비 하셨듯이 예수님의 자취를 따르는 사람들의 삶에도 십자가의 길을 마련하셨다. 이 현필 선생이야말로 십자가의 길을 피흘리며 가신 분이다.
제자들이 곁에서 지켜본 이 선생은 꼭 예수님의 모습을 방불케한다. 예수님이 그러하셨듯이 이 선생은 고통속에 내제된 하나님의 섭리를 깊이 인식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한 고통을 기뻐하였다. 그래서 고통을 회피하기보다 더 괴로움 당하기를 소원하면서 자기에게 고통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눈물을 흘리며 감사 했던 것이다. 이 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치고 훈련한 방법은 예수님을 잘 믿으면 축복을 받아 돈 잘 벌고 몸 건강하며 모든 일이 잘 된다는 한국 기독교인들의 공리주의적 신앙(功利主義的 信仰)이 아니다. 오히려 고통의 길인 십자가에 대한 갈망이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자세이며, 따라서 고통을 면하려 하지 말고 도리어 자신이 격기를 원하라고 가르쳤던 것이다.
*고난의 종
이 현필 선생이 계속 후두결핵으로 말을 못하고 사람들을 만나면 겨우 필담(筆談)으로 의사소통을 하던 때에 두 제자가 문병차 와보니, 선생은 몸이 뻣뻣이 굳어져 움직이지도 못한 채 고생하고 있었다. 한참동안 간호하다 숙소로 돌아왔는데, 밤이 되자 그 제자들은 마음이 놓이지 않앗다. 혹시 이 밤에 세상을 더나시지 않을까 걱정되어 잠 못 이루고 밤중에 몰래 선생의 방문 앞가지 와서 동정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 선생은 어느새 이 사실을 알고 방안에서 먼저 방문을 똑똑 두드리며 아직 살아있다는 신호를 해 주었다. 안심한 두 제자는 되돌아와서 자고 그 이튿날 아침 다시 찾아가 보았더니, 여전히 전신이 굳어져 곰짝도 못하고 두 눈은 충혈이 되어 무척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그 때 이 선생은 필담으로 종이에 이름 두 개를 써 놓으셨다.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걱정을 끼치고 있는 제자의 이름이었다. 밤새도록 헤매는 고통속에서도 그 제자의 일이 걱정되었던 것이다. 예수님도 그러하셨다. 십자가상에서 자신이 당하는 고통보다, 십자가 아래의 무지한 인간들을 염려하시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자신의 고통을 잊어버릴 정도의 거룩한 사랑을 예수님은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이 선생은 그 예수님의 마음을 다시 한번 우리에게 생생히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이 선생이 방에서 각혈을 할 때 한 제자가 선생의 기침 소리가 이상하여 달려가보았다. 그 때 선생은 혼자 무릎을 꿇고 똑바로 앉아 두 손을 모은 채 각혈을 하고 있었다. 제자들은 빈 깡통을 턱밑에 대고 선생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새빨간 선지피를 받아내고 있었다. 선생은 선혈을 입에서 콸콸 토하면서도 겁에 질린 제자들에게 "기도해 주시오! 기도해 주시오!" 하며 거듭 청하였다. 그 말슴에 더욱 감격한 제자들은 기도보다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며 떨고 서 있었다. "주여, 제 피를 다 쏟게 하여 주옵소서!" 그 얼굴에는 두려움이나 고통의 표정도 없이 평화스러웠다. "선생님, 누우시지 이렇게 앉아서... "아닙니다. 이 기쁜 시간에 어찌 제가 누워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 모습 속에는 육체적 고통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하늘의 기쁨이 서려있었다. 제자들은 우울해질 때 이 선생의 이러한 평화스러운 얼굴만 대하면 어느새 저절로 마음이 밝아졌다.
*예수님을 향해 멈추지 않는 사랑
이렇듯 선생의 임종이 가까운 것으로 여겨졌던 때에도 선생은 생명의 세계. 은총의 세계, 평화의 세계를 눈으로 보듯 "동정을 지키는 것은 복입니다.", "가난한 것이 복입니다.", "고통이 복입니다"라고 말씀 하셨다. 피를 쏟는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 무엇이 이토록 이 선생을 절절한 감격 가운데 거하게 하였는가? 이것은 사뭇 마음을 전율케하고 신앙인으로서의 매무새를 돌아보게 하는 충격적인 장면이다. 사랑! 예수님을 향해 멈추지 않는 사랑의 마음이 고통, 아픔, 근심, 불안 등의 단어들을 무색케 한 것이다. 이것은 고통을 극복하는 비결이 예수님을 향한 깨끗한 순결, 주님만을 소유하려는 청빈임을 나타내며, 모든 고통은 예수님 때문에 이길 수 있음을 역설해 주고 있는 좋은 실례이다.
이 선생은 고통으로 온 밤을 지새운 다음날에 감격의 고백을 하곤 했다. "지난밤에 저는 주님을 만나 뵈었고, 주님의 만찬에도 참여했습니다." 그는 육체적으로 극심한 고통을 당하는 밤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처럼, 고난을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사랑의 열정으로 승화시키고 계셨던 것이다. 그리고 이 선생은 곁에 있던 제자에게 "아무것도 안 보입니까?"하며 감격해 했다. 그리고는 기쁨에 넘쳐 "주 예수의 강림이 가까우니 저 천국을 얻을 자 회개하라"라는 찬송을 불렀다. 그리고는 "아, 이 복음을 누가 전할 것인가! 이 복음을 누가 전할 것인가!"하며 안타까운 절규를 토해 내셨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가 고통을 사랑할 수 있고, 그 고통을 감내한 자가 진실 되이 예수님을 전할 수 있는데 고통을 사랑하는 자가 없음을, 진정 거룩한 고통을 겪으신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전할 자가 없음을 안타까워 말씀하시는 것이리라. 외로운 산막(山幕)에서 각혈을 하며 고질병으로 고통 당하던 이 선생은 자신의 몸 보다, 제자 중 어떤 이들이 수도(修道)에 정진하지 못하고 세속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정신적 번민으로 더 많이 괴로워했다. 한 번은 이 선생이 모든 것을 훌훌 떠나 혼자 있고 싶어졌다. 주위에 있는 제자들을 피해 깊은 산에 들어가 고요히 주님을 뵙고 싶은 강한 열망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피곤하여 잠든 사이에 문병 온 한 제자에게 업어 달라는 부탁을 한다. 영문도 모르는 제자는 선생을 업고 미그러운 비탈길을 땀을 흘리며더듬 더듬 내려갔다. 때 마침 가을 소낙비가 내려서 두 사람은 흠뻑 젖었다. '불쌍한 제자들을 두고 나는 도망치는가?' 막상 떠나려하니 자책감이 들어 마음이 무거워?병?. 선생을 업은 제자 역시 무조건 순명(順命)을 하였지만 망설이는 눈치였다. 하는 수 없이 이 선생은 산막으로 되돌아 오고 만다. 후에 이 선생은 이때의 심정을 '내 일생에 그 때가 가장 좋은 기회였는데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 때 소리 없이 그냥 영영 떠나 몸을 감추었더라면 ' 참 좋은 기회였는데 제 마음이 약해서 그것을 결행하지 못한 것이 큰 실수였습니다. 라고 말씀하셨다.
이 선생 혼자서 얼마든지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음에도 연약한 영혼들을 위하여 자신을 기꺼이 내어 주어야 하는 희생 역시 그에게는 큰 고통이었다. 우리가 영혼들을 위하여 어떠한 자세로 대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교훈이다. 보다 철저히, 보다 더 깊이, 보다 더 높이 자기 완성과 성화에 이르려는 사람의 삶은 잠시도 안온하게 편히 쉴 틈이 없는 법이다. 쉬지 않는 정진(精進), 이것이야말로 예수님을 향하여 바르게 나아가는 길이다. 자기부인(自己否認)에서 자기완성(自己完成)으로 우리는 나아가야 한다. 거의 자기학대의 지경까지 육체를 극복하면서 정신적 순결과 정화를 완성하려면 비약이 필요한 것이다.
이 선생은 말씀하신다. "저의 고통은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눈 녹듯합니다. 조금이라도 저에게 고통이 느껴질 때면 주님이 겪으신 고통이 저를 위해 받으신 고통이라 는 사실을 극히 적게나마 알게 되어 한없이 기쁩니다. 제가 겪는 육체적 고통이나 정신적 고통이 주님이 당하신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의 고통을 몇 억분의 일이라도 하나님께서 맛보게 해 주시는 것을 생각하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제게는 고통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5.주님 가신 길이라면-태산준령 험치 않소
전쟁이 일어나자 어느새 성도들과 교회를 버린 채 피난길에 오른 많은 교역자들이 있었다. 난관에 처해 있을 때 더욱 빛나고 위대해야 할 기독교인이 양심과 얼은 목숨 보존이라는 선한 명분아래에 무참히 짓밟혔다. 그러나 선교사도 아니고 목사도 아닌 한 평신도가 아무 친분도 연고도 없는 미국 선교사를 살리려 지게에 지고 백리길을 걸어 굴 속에 숨겨 놓았다. 그리고 석달 동안이나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고락을 같이 한 것은 그리스도의 피어린 형제애로만 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순교할 각오를 굳히고 목자로서 홀로 남았던 유화례 선교사의 용기나 나환자 교인들을 지키다 순교한 손 양원 목사,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순교하신 주 기철 목사 등, 이러한 선진들의 헌신이 이 땅의 기독교 역사를 짊어지고 왔다. 그리고 그러한 삶을 통해 주의 나라는 확장되어 간다.
주님의 관심은 외형과 겉모습이 아닌 주를 향한 진실한 사랑에 있다. 그래서 이렇게 밀알 같이 썩어지는 삶을 사는 참 신앙인을 주님은 아시고, 분별하여 판단하신다. 바로 이 현필 선생의 삶이 그것을 대변해 주고 있다.
*6ㆍ25 한국전쟁
1950년 6 25 한국전쟁이 터지자, 많은 목회지들이 교회와 교인들을 버린 채 누구보다 먼저 피난을 떠났다. 그 때 광주에 살던 미국인 유 화례(柳花禮) 선교사는 "남들은 모두 살겠다고 피난 갔지만 하나님의 뜻이라면 저를 평안한 마음으로 머물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때 "환난이 닥쳐 오는 날 목자가 양을 버리고 어찌 나만 살겠다고 피난을 갈 수 있느냐?"는 양심의 소리가 그녀를 사로잡았다. 방 안식 집사라는 분이 자기의 생명을 걸고 유 선교사를 이 현필 선생에게 소개해 주었고, 그래서 유 선교사는 이 현필 선생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목숨이 위태로운 험난한 삶이 시작된 것이다. 환난 중에 참 목자를 아는 법이다. 양들을 위로하고 보살필 의무가 있는 목회 자들의 피난과 사명을 감당하려고 남아있던 유 화례 선교사, 위험을 각오하고 선교사를 돕고 제자들을 인도하는 이 현필 선생 등, 이들의 모습 속에서 참 목자와 삯군 목자를 분별할 수 가 있다.
편안하고 안전할 때는 양을 위해 희생하는 것 같지만 정작 위험이 닥치자, 내 목숨을 보존하겠다고 도망가 버리는 부끄러운 모습은 잃은 양 한 마리를 천하보다 귀히 여기시며 험산준령을 헤매시던 주님의 마음의 피눈물로 통곡하게 만든다. 그리고 단련하려고 다가오는 환난이나 시험 가운데서 고통스럽다고 주를 원망하며 저주하는 불충한 신앙인들의 입술과 행위 또한 삯군 목자들의 부끄러움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 현필 선생이 보여 준 신실한 믿음, 이웃을 향한 희생과 사랑은 이러한 신앙인들의 가슴에 참회의 경종을 울려 준다.
미국인 유 선교사를 보호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 선생을 몇 번이나 위협했다. 한번은 이 선생이 숨어 지내던 산막에 갑자기 인민군이 들이 닥쳤다. 인민군은 제자들을 다그치며 이곳 저곳을 보다가 이 선생이 거처하는 방의 문을 열어 제쳤다. 제자들은 긴장과 놀라움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분명 선생이 붙잡히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인민군들은 한참을 들여다보더니 그냥 방문을 닫는 것이 아닌가! 신기한 일이었다. 분명 선생이 있었는데 인민군들의 눈에는 선생이 보이지 않앗던 것이다. 이렇게 기적은 순간순간 일어났다. 어느 상황이건 하나님만 의지하고 따르고자 하는 이들에게 주님이 주시는 사랑의 표현이었다. 신앙인 들은 기적을 믿고 나가는 믿음의 산 증인들이다. 이 선생과 유 선교사처럼 주님의 인도하심에 전적으로 맡길 때 기적은 매순간 일어나는 것이다.
*겸손한 사랑
피난 중 어느 날 제자 김 금남 이란 분이 밥을 하다가 불을 내었다. 그녀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불길을 피해 달아나고 말았다. 얼마 후 되돌아오니 모두들 불을 끄느라 고생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가까스로 진화가 되었다. 해는 서산에 지고 산허리에 이 현필 선생을 중심으로 제자들이 둥글게 모여 앉아 있었다. 어려서부터 고생하며 함게 기도 해 온 이들, 세상에 그들보다 더 가까운 사이가 어디 있겠는가? 스승과 제자라기 보다 가족같은 그들이다. 오랜 전쟁의 참화에 움푹 들어간 두눈과 길게 자란 머리, 그들의 모습은 언뜻 보아 누가 누구인지 분간 하기조차 어려운 몰골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서로 섬기며 위로하고 사랑하는 아름다운 형제애는 감격과 기쁨을 그 속에서도 누릴 수 있게 해 주었다. 각기 사색에 잠겨 있을 때 이 현필 선생이 낮에 일어난 산불사건을 꺼내신다.
"제가 게을러서 그런 일이발생했습니다. 진작부터 그 장소를 떠나라는 주님의 뜻이 었는데 " 하시며 이 일은 자신 의 게으름과 무지함을 책망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제자 몸 둘 바를 몰라한다.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제자가 죄책감에 사로잡혀 괴로워하는 것을 보시고 사랑으로 위로하고자 함이었다. 참으로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벧전 4:8). 많은 이들이 작은 과오를 용납하지 못하고 정죄의 화살을 거침없이 이웃을 향해 쏘아댄다. 그러나 참다운 사랑은 포용하는 것이다. 그 과오가 내 것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후일 김금남 제자는 "잘못은 내가 했는데 선생님은 당신의 잘못으로 돌리시는구나. 이런 아름다운 사랑을 맛보았으니 이 사랑을 나도 남에게 베풀어야지"라고 몇 번이나 다짐을 했다.
*순교자들
이 현필 선생의 제자 중 사진관 부인, 이발소 부인, 서울 어머니, 홈실댁 등의 이름으로 불리던 이들이 있었다. 이 선생의 인격에 감화를 받고 철저한 삶으로 예수님을 따르고자 애쓰던 분들이었다. 그들의 공통점은 가정에서 살림을 하면서 이 선생을 따랐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 선생에게 감화를 받고 생사를 달관한 분들이 되어 가정이 있는 몸이에도 인간의 모든 희로애락을 예수님께만 드리려고 애를 썼다. 감정, 음식의 맛, 모습, 물질, 애정 등 이 모든 것에서 예수님을 잃지 않기 위해 자신을 채찍질하며 수도적인 철저한 삶을 살고자 몸부림치던 분들이었다. 6·25전쟁 마지막 무렵, 인민군들에게 붙잡힌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심한 고문을 받다가 대꼬창이로 전신이 찔리운 채 순교했다. 그들은 한결같이 생전에 "나의 일생에 처음으로 만나보는 거짓이 없는 참 인격은 바로 이 현필 선생이셨습니다."라는 고백을 하였다. 제자는 스승을 닮는 사람이다.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그삶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 자처하는 많은 이들이 스승의 가르침과 무관한 의식 속에 살고 있다. 이 현필 선생과 제자들의 삶은 적어도 스승이신 예수님을 따르는데 철저하던 분들이었다.
어린아이처럼 단순하고 겸손하게 삶을 가꾸어 스승이신 예수님을 기쁘시게 했다. 지나치기 쉬운 것들에서 힘든 고행에 이르기까지 예수님께 가까이하여 그분을 닮아보려는 애씀은 가히 스승 예수님의 제자라 일컬음 받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1. 주님 가신 길이라면 태산준령 험치 않소.
방울방울 땀방울만 보고 따라 가오리다.
2. 주님 가신 길이라면 가시밭도 싫지 않소.
방울방울 땀방울만 보고 따라 가오리다.
3. 주님 가신 곳이라면 바다 끝도 멀지 않소.
물결물결 헤엄쳐서 건너가서 뵈오리다.
4. 주님 가신 곳이라면 하늘 끝도 높지 않소.
믿음날개 훨훨 쳐서 올라가서 뵈오리다.
[후렴]
오, 주 예수 주님이여, 천한 마음에 오시오며
밝히 가르쳐 주옵시길 꿇어 엎드려 비나이다.
6.순결의 길은 초월의 길이다.
*파계(破戒)
이 현필 선생의 말년, 후두결핵으로 무척 고생하시던 어느 가을, 자신의 마지막을 직감한 그는 "나를 업고 어디 거지굴로 데려다 주시오"라고 부탁을 한다. 그래서 서울 신촌의 셋째라고 불리는 거지 제자가 있는 대피소로 이 선생은 모셔 졌다. 인간적으로는 참으로 처량했다. 죽음을 기다리듯 선생은 누워있고, 근심스러운 얼굴로 지켜보는 제자들 귀에는 희미하게 스승의 호흡 소리만 들릴 뿐이다. 스승은 이렇게 가시는가…몇번이나 사경을 헤매면서 지내던 한 밤, 이 선생은 필담(筆談)으로 실로 놀라운 고백을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자기의 태도를 마지막으로 정리하고 결론을 짓고자하는 결정적 순간이었다. "저는 이 시간까지 예수님을 섬김에 있어 '선행위주'(善行爲主)였습니다. 오늘 그 동안 잘못 믿어온 점을 자백합니다. 예수님의 보혈만이 저를 구원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저는 앞으로 주의 보혈을 의지하는 신앙으로만 달려갈 것입니다. 저 역시 죄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보혈만을 의지하여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이지 선행이나 금욕고행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 선생의 신앙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보혈을 의지하는 신앙이었던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세상 사람 보기에 그는 금욕주의자 같았고, 철저한 율법주의자처럼 인식되었다. 더욱이 곁에서 지켜본 제자들에게 비춰진 인상은 하나님의 은총이나 그리스도의 보혈보다 철저한 절제를 통해 자기완성을 추구하는 자로 오해될 것이 두려웠다. ?慊낮? 그는 생애의 마지막이 가까왔을 때, 자기의 근본 신앙이 '그리스도중심'적임을 분명히 천명(天命)하므로 제자들의 잘못된 신앙을 미연에 예방하려했다. 사실 그 동안 사람들이 이 선생을 다른 기독교인들보다 존경해온 점은 절대 순결생활을 강조했다든지, 거지같이 청빈하게 살았다든지, 살생을 안했다든지, 약을 안 썼다든지 하는 것들이었으나, 이 선생은 죽음을 앞두고 누운 채 철저히 자신을 반성하면서 세상 사람들의 그런 부질없는 '이 현필 관'(觀)을 뒤엎고모든 관심을 그리스도에게로 돌리려는 것이었다.
그의 일기에도 기록되듯 "이 현필이란 인간 하나가 세상에 왔다 간 뒤에 그를 따르는 이들 중심으로 또 하나의 교파가 생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매우 지혜로운 분이었다. 사실 그가 그렇게 살다가 죽고 나면 이 선생의 의도와는 달리 그를 존경하고 따르던 많은 이들을 중심으로 그리스도보다는 '절대선행'을 강조하는 율법주의 적인 교파가 생겨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위험하고 심각한 문제를 땅 위에서 해결 짓고 떠나기 위하여 이 시간 그 생명을 주님게서 연장시켜 주신 것으로 이 선생은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이 깨달은 사실을 실제 행동으로 제자들에게 알려 주어야겠다고 느꼈다.
수 십 년간 지켜오던 목숨과도 같은 채식의 정절을 의도적으로 파계하는 순간이었다. 그를 신인(神人)처럼 존경하던 이들은 이 선생의 사상이야 어떻든 밖으로 나타난 행실 -순결생활, 금욕생활, 청빈생활등- 을 보고 신성시하여 따랐는데, 지금 고기를 먹는다면 모든 이들이 큰 실망에 빠질 것이다. 그것을 지켜보던 제자들은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그러나 다만 예수님의 보혈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을 밝혀야겠다고 인식하신 그의 위대한 신앙이 살아서 빛나는 순간이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일에 자신의 의가 드러날까 죽음 직전까지 돌아보고 또 돌아보는 분! 자신을 끝없이 낮추는 사람!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랑을 전하고 싶고 표현하고 싶어 애가 타는 사람! 이처럼 에수님만을 높이고자 애쓰는 절대적인 사랑과 겸손이 눈물겨운 외침이 되어 마음을 가득 메운다. 숭고하기만 하다. 주님은 이런 사람을 높여 주시리라. 훗날 이 선생의 의도를 이해한 제자들은 스승의 파계에 경의를 표했다.
*임 종
1964년 53세 때 제자들과의 고별모임을 갖는다. 업혀 나가면서도 말씀을 증거할 때는 "아! 기쁘다"를 연발했다. 광주를 떠나 벽제 계명산 산장에서 인생의 마지막 자리를 잡았다. 계속 앓으면서도 기도에 파묻혀 지내던 3월 18일 새벽, 모든 제자들이 고요히 둘러 앉았다. 숨이 막혀 가는데 가장 나이 어린 제자에게 "나는 지금 곧 숨이 끊어집니다. 어떻게 하시렵니까?"라고 묻는다. 순결한 삶을 살겠노라는 고백을 듣고 싶은 것이다.
순결의 삶은 초월의 길이다. 마지막까지 그것을 일깨워 주고 싶었던 몸부림이 피흘리듯 묻어난다. "주님! 저는 주님을 사랑하고파 무척 애썼습니다. 이제 저는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갑니다."
그리고 잠시 쉬었다가 "기쁘다. 오! 기쁘다"라고했다. 임종 수일 전부터 천국의 기쁨이 그에게 밀려와 어쩔 줄 모르더니 그 절정에 다다른 것이다. 주위 제자들에게 "저 먼저 갑니다. 다음에들 오시오"하며 무릎 꿇은채 하늘을 바라보면서 고요히 눈을 감았다. 1964년 3월 18일 새벽 3시였다.
*이현필 선생을 기리며
한국 기독교 백년사에 이 현필 선생같이 돋특한 인물은 없었다. 청빈한 삶·순결한 삶·겸손한 삶 등 그것을 생명처럼 강조하며 몸소 그렇게 산 사람도 없었고, 철저한 자기부인을 통하여 자기완성에 이르려 애쓴 인물도 드물다. 그러나 그의 위대한 점은 이같은 금욕고행이나 뛰어난 선행에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고 자신의 존재를 십자가 앞에 낮추는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앙 때문이다. 그리고 철두철미하게 참회자의 삶을 살면서 예수님을 본 받으려고 목숨을 다한 사람이었다. 그러면서 그만큼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자주 통곡한 사람은 없었다.
진정한 하나님의 종을 핍박하고 매장하는 주님의 교회! 순교자 주 기철 목사님은 평양 노회에서 제명 당했고, 정열의 부흥사 이 용도 목사님도 제명 당했다. 예수님처럼 살아 보려고 그렇게 애쓰던 이 현필 선생도 교계로부터 외면 당했다. 주님을 향해 철저하게 살아 보려는 이들의 삶이 금욕이나 고행으로 비춰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주님을 닮기 위해서는 자신을 치며 복종시키지 않으면, 청빈과 순결과 순종의 삶을 살으신 에수님을 따라갈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갈수록 풍요와 안락의 소용돌이 속에 교회는 빛을 잃어가고 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한국교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들의 삶, 그 해답을 이 현필 선생은 너무도 선명하게 제시해 주었다.
맨발의 성자! 그는 지리산 눈 덮인 계곡을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통곡하며 걸었다.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은 빛을 잃고 세속화됨에 가슴치며 울어야 할 것이다. 청빈을 멀리하고 순결을 초개와 같이 여기는 이들의 정신에 이 현필 선생 임종시까지 피흘리듯 강조하시던 그 초월의 정신이 오늘 숭고하게 젖어들길 기도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하여 순결과 완전성화의 목표를 매진하는 제2의 이 현필이 속히 나오길 예수님은 간절히 원하실 것이다. 예수님의 눈동자는 지극히 낮은 자리에서 예수님을 닮기 위해 애통하는 상한 심령에 머문다는 것을 이 선생의 삶에서 가슴으로 느끼며 오늘 겸손히 무릎 꿇는다.
속칭 ‘산 중파’ 로 알려진
이현필의 동광원(귀일원)
이 영 호 목사
들어가는 말
한국 교회사에서 주목받는 사람들이 있었다. 웬만한 사람들이라면 이리 주현교회 이 모 씨의 나체춤 사건을 기억하리 라고 본다. 그의 존경하는 인물은 늘 흰 고무신에 검은 두루마기를 입고 다닌다는 아현동의 김현봉이라는 목사였다. 그런데 이 김현봉이라는 목사가 존경하는 인물은 바로 맨발의 성자라는 이현필 이고, 한국에서 종교 다원주의의 시조라고 불리는 유영모와 어울리는 사람도 이현필 이였으며, 이들에게 커다란 감화력을 끼쳐 본을 남긴 사람은 이세종이라는 분이었다. 이에 이들의 발자취를 두루 살피고 간추려 소개해 보고자 하는 가운데 유영모에 이어 두 번재로 이현필을 쇄하고자 한다.
1. 이현필의 생애
1) 청소년 시절
1) 이현필은 1913년 1월 28일 전라남도 화순군 도양면 권동(용하리)에서 아버지 이승노 어머니 김오산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위로 아들과 딸을 낳았는데 27세때 막동이로 이현필을 낳았다. 이현필은 막동이어서 일곱 살이 되기까지 어머니 젖에 매달려 귀찮게 굴었는데 어렸을 때의 이름은 ‘싹뿌리’ 이었다고 한다. 그는 열 살이 되기까지 권동집에서 자라면서 천태보통학교를 다녔다. 그 학교는 본래 서당이었던 것을 후에 보통학교로 승격한 것인데 이현필은 4년 동안 언제나 1등으로 졸업했다.
이곳에 천태산 혹은 개천산 이라고 하는 명산이 있는데 한국 교계에 특이한 두 인물이 나왔다. 한분은 이현필의 스승이던 이 세종 이고, 또 하나는 이세종의 제자 이현필 이다. 이 두 사람은 나주군 방산에 있는 자그마한 방산장로교회와 어느 정도 관계가 있다.(『맨발의 성자』엄두섭 저. 은성 간. 1992.p.13-27)
2) 이 세 종을 만나다.
2) 이 세종은 예수 믿기 전, 나이 40세 되기까지 남의 집 머슴살이로 살면서 푼푼이 모은 재산으로 논밭을 사서 부자가 되었다. 나이 40세에 예수를 믿게 되면서 너무도 기뻐서 매일 밤낮으로 성경연구와 암송으로 세월을 보내고 집집에 전도하는 일을 힘썼다. 그가 성경을 공부하고 있을 때에는 아무리 반가운 손님이 찾아와도 인사도 받지 않았다. 성경 공부를 다 마친 뒤에야 인사를 했고, 식사도 공부가 다 끝난 뒤에야 들었다. 예수를 믿고는 모든 일을 성경 말씀대로 실천했다. 자기에게 빛을 진 마을 사람들을 다 불러다 모조리 탕감해 주고는 그들이 보는 앞에서 빚 문서를 불 질러 버렸다. 또 자기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모조리 나눠주고 부부는 깊은 산중에 들어가 쑥을 뜯어 밀가루에 반죽해 먹으면서 여생을 보냈다.
3) 이세종의 자비심은 금수. 곤충. 초목까지 아꼈다. 자기 발밑에 개미가 밟혀 죽는 것을 보고는 서서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 이세종의 말년에는 산중에 움막집을 지었다. 겨우 사람 하나 누울 정도의 것이었다. 방문은 성경대로 아주 기어 들어갈 정도로 작았고, 세상 떠날 때는 제자들에게 사다리를 만들게 하여 그 위에 누워 그대로 묻어 달라고 유언했다. 곁에서 울고 있는 아내 보고는 “울음을 그치시오. 내가 예수님을 따라 가는데 울어서야 되겠소!” 하면서 “올라간다. 올라간다. 올라간다.” 세 마디소리를 크게 질렀다.(『좁은 길로 간 사람들』엄두섭 저. 소망사 간. p.185-186)
4) 이현필이 신생활에 나선 시기는 8.15해방 10년 전이 되는 22세 때로 잡는데 그가 예수를 믿더라도 그 생애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준 것은 전남 화순군 도암의 성자로 불리는 이 세종을 만난 뒤 부터였다. 그가 예수를 믿고 다도면에 유일한 방산교회에 다니고 있던 때 인접 이웃 도암면 등광리 뒷산인 천태산 기슭에 산당을 짓고 도를 닦으면서 가끔 방산교회를 드나드는 이 세종을 만나게 되었다. 이 세종은 도인이어서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신앙이 되어선 못쓴다” 고 늘 가르쳤다. 그는 기도 중에 “도인은 화려해선 안 된다.”는 영음을 세 번이나 들었다고 한다.
이세종을 보통 이공(李空)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빈 껍질이라는 의미의 이공(李空) 이라는 말이다. 사실 그는 세상을 완전히 버리고 재산은 털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아무것도 없는 빈 털털이였다. 밥도 땅바닥에다 놓고 먹고 살았다. 또 살생을 하지 않고 자기 아내(문순희 라고도 부름)를 누이라고 부르며 부부가 남매같이 살았고 일본 시대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깊은 산중에 숨어 살았다. 그는 성경 외에 다른 책을 절대 읽지 않았다. 남의 집에서 명절 음식이나 제사지낸 것을 보내오면 먹지 않았고 육식을 금하고 남의 집에서 자지 않았다.
그의 산당은 등광리 마을에서 가까운 곳인데 사방에서 모여온 젊은 처녀 총각들이 그의 제자가 되어 날마다 이공을 찾아가 성경을 배우고 있었는데 이현필도 그 무렵 이속에 끼었다. 이공의 성경공부는 영해 방법이었고 한 구절 한 구절을 해석한 것이 아니라 담화식 이었다. 이때에 모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성경을 토론한 사람들은 광주에서 찾아오는 최흥종, 강순명, 목사들과 홍종우 장로, 백영흠 전도사들과 임완식 오복희 전도사 이현필 등이 있었다. (이 세종에 대해서는 현대종교 1992/2월 3월호 <거룩한 혈맥을 찾아서 - 윤남하 글> 참조)
5) 이공과 이현필의 연령차이는 30년 차이다. 이현필이 이 세종을 만나 처음 대립한 논쟁 중심 문제는 이공의 순결 사상이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육신으로도 정절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고, 결혼생활까지도 금해야 한다는 사상이었다. 이공의 순결사상은 그대로 이현필에게도 전수되었다. 이런 영향으로 광주 ymca 안에는 강순명 목사를 중심으로 10여명이 주요멤버가 되어 ‘독신 전도단’ 이란 것이 조직되기도 했는데, 그 멤버들은 강순명, 이준묵, 차 남진, 운 남하, 고영노, 박철웅 등이었다. 이와 같은 독신 전도단은 원래 전주 배은희 목사가 시작했고 강순명 목사는 그 연줄로 광주에서 이 운동을 일으켰을 뿐이다.
3) 성년이 되어
6) 이현필이 예수를 믿고 등광리 이공(李空, 이 세종)을 찾아다니며 성경을 배울 때 부친은 아들을 보고 미치광이를 찾아다닌다고 꾸짖었다. 이현필이 차차 나이가 들어 성년이 되어가면서 다도면 면서기 시험에 그 형님과 함께 합격을 했으나 이현필은 그만 두고 형은 다도면 면장까지 지냈다. 21세 때 이현필은 광주재매교회 전도사 일을 보기도 했고, 틈틈이 영어공부를 하다가 한때는 서울에 상경하여 ymca에서 영어공부를 하기는 했다. 그때 서울에서 만난 원경선하고 평생 친구로 사귀었다. 그가 서울에 있는 동안 아현동 굴레방 다리 근처에서 특이한 목회를 하던 소위 기둥교회 누더기 교회(아현교회)의 김현봉 목사를 만났다.
7) 이현필은 스승 이세종을 배신하듯 23세 때 결혼 하고야 말았다. 아내는 황종원 씨로 광주의 좋은 가문의 딸이었다. 그러나 아내와의 동거 2년도 채 못 되어 자기의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싸우다가 아내를 보고 부부로 말고 남매로 살자고 요구했다. 그 다음 부터 아내를 보고 매씨라 불렀다. 그런데 그의 스승 이 세종 역시 그런 전력을 가지고 있다. 이세중은 어린 아내가 두 번이나 자기를 버리고 딴 남자에게 시집을 갈 때 아내의 살림 도구를 지게에 지고 따라가 날라다 준 분이다. 그 아내가 다시 돌아오니 곧 받아 주고 남매 사이로 살았다.
그러나 이현필의 부인은 남편을 놓지 않으려고 몹시도 애를 많이 썼으나 끝내는 한동안 여순경 노릇을 하다가 다른데로 개가해 소생 없이 살았고, 비록 개가는 했으나 이현필의 인격만은 존경하고 그를 변호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순결 사상은 본래 이공(이 세종)의 사상이었다.(『맨발의 성자』엄두섭 저. 은성 간. 1992.p.13-27)
4) 이현필의 특이한 생활
8) 이세종의 문하생인 이현필 나이 30세 전후 주로 산에 은거 하면서 금식. 명상생활을 일삼았다. 그러던 중에 남원에서 몇 십리 들어가 있는 서리내골 이라는 산중에서 십여 명의 소년 소녀들을 모아놓고 성경을 가르치며 훈련 시켰다. 일종의 수도생활이다. 이곳 서리내란 선인래(仙人來)에서 나온 듯 하다. 지금도 이곳에는 화전민들이 여러 세대 살고 있지만 이곳은 이현필 운동의 발상지이다.
해방 이듬해(1946년 이현필의 나이 33세) 그때부터 이현필은 특별한 소명을 느껴 아직 10대의 나이 어린 소년 소녀들을 거느리고 서리내로 데리고 들어와 수도를 시켰다. 이들은 대부분 이현필에 감동되어 부모님들의 집을 나온 젊은이들 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현필을 따라 다닌다고 집에서 쫏겨난자 들이다. 그들은 성경을 배우고 찬송을 부르면서 훈련을 받았다. 한번 훈련기간은 15일 이었다. 보름 훈련하고 쉬었다가 또 보름을 훈련했다. 그들은 숙식을 하기 위해 이곳에 움막을 지었다. 이곳에서의 음식은 쌀가루 에다가 물을 타서 생식을 했다. 그것 조차도 며칠씩 굶고 지냈다. 소녀들도 하루에 한 끼씩 먹었고 주로 풀뿌리와 쑥이 주식이었고, 신발은 짚신을 삼아 신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생활을 하며 초기 수도를 했던 사람은 소녀 7명이었다.
서리내 앞산을 타고 남원읍 쪽으로 20리나 내려 오노라면 갈보리라고 불리는 동산이 있다. 이 갈보리는 본래 이현필을 따라나선 김금남양 모녀의 숙부 되는 분의 농장이었다. 숙부는 초등학교 교장이면서 이곳에 농장을 장만하고 그 안에 저수지를 파고, 밤나무, 감나무, 대나무 등을 울창하게 심고 논을 만들고 아늑한 한편 구석에 농막 한 채를 지어 놓았다.
김금남 모친이 먼저 이현필을 따라 나서고 그 후에 김금남 양이 반대를 무릅쓰고 이곳에 와 있으면서 100일 기도를 하고 지내던 집이다. 이런 연고로 이현필이 이곳을 드나들면서 부터 이곳은 서리내와 함께 이현필 운동의 발상지였다. 이현필 운동의 초기에는 김금남 양 일가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김금남 양의 모친인 강남순 씨를 <갈보리 어머니>라고 불렀다.
9) 이현필의 타고난 성격에는 남보다 독특한 점이 많았다. 제자들은 그의 눈물을 잘 볼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타고난 천재보다 꾸준하고 피나는 노력이 그의 인격을 이루었다. 자기완성은 그의 일생의 목표였다. 옳다는 일에는 지체 않고 곧 실천하는 불타는 사나이, 신앙적인 정열의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인격의 진동력이 있었다. 말이 적은 분이었으나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놀라운 감화력이 있었다. 그의 감화력 때문에 그를 한두 번 대한 남녀는 주저 없이 부모도 남편도 아내도 재산도 착착 버리고 그의 운동에 뛰어 들었다. 그는 선풍적인 존재였다. 그가 성경을 가르칠 때에는 앉은 채 낮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어도 그 말 한마디는 사람들의 마음을 끌고 깊은 감동을 일으키는 신비스런 힘이 있었다. 성경을 강의할 때에는 숨소리도 죽여야 겨우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낮은 소리로 말을 하다가도 힘이 나면 벌떡 일어서서 정열적으로 간곡하게 말했다. 누구나 그의 이야기를 한번 들은 이는 그를 못 잊었다.(『맨발의 성자』엄두섭 저. 은성 간. 1992. p.28- 68)
10) 한동안 기성교회에서는 이현필 운동자들을 ‘산중파’라고 불렀고, ‘이단’ 이라고 선전했다. “그들은 결혼하지 않고 가정을 파괴하고 재산을 거의다 바치고 이나 빈대를 잡아서는 죽이지 않고 성냥갑에 담아 물에 떠내려 보낸다. 길을 가다가 아이들이 도랑에서 물고기 잡는 것을 보면 돈을 주어 그 고기를 사서는 도로 물에 방생한다. 빌어먹고 다니고 그들은 찬송도 부를지 않고 기성교회 예배에 참석하지도 않는다.” 고 악평을 했다.
1948년 이현필의 일행이 해남에 처음으로 전도대로 나갔을 때는 머리를 삭발하고 헌 바지저고리에 배낭을 짊어지고 손에 깡통을 들고 맨발벗고 갔었다. 그래도 그를 존경하는 사람들과 믿는 군수 부인 등이 나와 천사처럼 그들을 영접했다. 그는 멸시와 존경을 아울러 받았다. 이현필은 늘 하는 대로 거리 가운데로 지날 때는 신을 신고 그 거리 밖을 벗어나서는 신을 아끼느라고 벗어들고 맨발로 걸었다. 스승의 뒤를 따르는 두 자매들도 스승이 하는 대로 추운 겨울날 이지만 신을 벗어 들고 걸었다.(『맨발의 성자』엄두섭 저. 은성 간. 1992. p.28- 68)
11) 벽제 수녀원에는 다른 사람을 위해 준비해둔 관 한 개가 있어 이현필이 운명하면 사용하려고 했었는데 이현필은 유언하면서 자기 시신에 관을 쓰지 말라 하고 자기는 죄인이니까 거적때기에 싸서 내다 파묻으라고 했다. 무덤은 평토장으로 하라면서 죄인의 시체니까 아무도 모르게 하고 아무나 함부로 밟고 다니게 하라고 했다.
필경은 임종이 왔다. 안타까이 지켜보고 있는 제자들 보고 마지막 인사를 했다. “제가 먼저 갑니다. 다음에들 오시오!” 하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때가 1964년 3월 17일 새벽 3시 정각이었다. 그 전날 예고한 바로 그시간이엇다. 그때 이현필의 나이 53세였다.
4) 주변 인물 들
12) 수레기 어머니 - 이세종이 자기 후계자 격으로 두 사람을 지목 했는데 하나는 남자로 이현필이요 도 하나는 여자로 수레기 어머니였다. 그의 본 이름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그가 살던 고향 이름을 따라서 수레기라 불렀다. 그는 이 세종 의 교훈을 몹시 사모했고, 부지런하기로 유명했으며, 그의 신앙은 아주 개방적인 것 같으면서도 고지식한데 가 있다.
6. 25때 피난 다니다가 실수하여 다리가 부러졌지만 헝겊으로 그냥 되는대로 잡아매고 다녔기 때문에 그대로 뼈가 굳어 버렸다. 이세종이 세상을 떠나고 이현필을 그대로 따랐는데 정한나 집사와 정귀주씨와 함께 동광원의 3 여걸이다.
남의 본이 되고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던 수레기 어머니는 나주시 방산 뒤로 흐르는 강물에 빠져 죽었다. 강을 건너는 돌 징검다리를 장마 뒤에 건너다가 급한 물결에 휩쓸려 떠내려갔다. 이때 찾은 시체는 상처가 없었으나 1970년 아들 사무엘에 의해 동광원 농장 옆에 매장됐다. (『맨발의 성자』엄두섭 저. 은성 간. 1992.p.72-74.)
13) 현동완 - 서울 종로 ymca 의 총무로 활약하던 현동완 선생은, 유영모 선생을 몹시 존경하며 서로 손잡고 마치 다정한 애인들처럼 서로 따라 다녔다. 그러면서도 때로는 의견차이로 격론을 벌이기도 하였다. 현총무는 유영모 선생에게 공자 맹자 소리보다 성경을 더 읽으라고 하며 성경을 연구해서 강해하라고 우정 있는 솔직한 충고를 했다.
현동완 총무와 같은 그룹의 사람으로 전남 장성군 소록리에 사는 신공이란 분은 자기가 살아온 날수를 매일 계수해 가는 습관이 있었는데 유영모 선생도 어느 해 어느달 며칟날을 쓰지 않고 자기가 살아온 총달수만을 총 계산해 갔다. 현동환도 그러했다. 시편 90편 12절에 “우리에게 우리 날수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하신대로였다.
현동완 총무가 유영모와 함께 광주에 와서 처음으로 이현필을 만나 그 소감을 말하기를 “한국에 인물이 없는 줄 알았더니 광주에 와서 보니 반쪽이 있었구나!” 고 독특한 풍자로 말했다. 유영모를 처음으로 동광원에 소개한 분은 현동완 총무였다. (『맨발의 성자』엄두섭 저. 은성 간. 1992. p.86-88)
14) 유영모 - 유영모 와 이현필 그리고 동광원과의 관계는 꾸준히 계속된 오랜 관계였다.
유영모는 정주 오산학교 교장이었고 유명한 한학자요, 많은 제자를 가지고 있고 그의 사상을 본받은 사람들이 많다. 함석헌도 유영모의 제자다. 유영모는 16세때 입교하여 그때 산 성경책을 70년 가까이 종이 한 장 떨어지지 않은 채 간직하고 있다.
본래는 하루 두 번 식사하다가 1952년 2월 14일부터 하루 한끼씩을 먹었다. 일식주의자로 수십년간 하루 한끼씩 먹되 저녁때에 먹고 어디를 가나 두발로 걸어 다녔는데 고집이 대단하여 삼각산 자택에서 서울 종로까지 늘 걸어 다녔다.
동광원이 해마다 총회로 모일 때면 유영모가 와서 강의를 했는데 그 강의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되었다. 공자 석가를 높이는 일이나, 기성교인들 처럼 기도하지 않는다는 점 등으로 그는 전통적 기독교 신앙이 못된다고 평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사상이 깊어 이해가 어려워서 “선생들이나 모아 놓고 할 강의다” 라고 하는 이도 있었다.
이현필은 유영모를 평하기를 “한마디 피투성이다.” 고 했다. 유영모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은 이현필 이였다. 동정 사상(童貞. 純潔)에 있어서도 유영모의 주장은 이현필에게 만족했다. 이현필이 존경한 사람은 현동완. 김상돈. 등 여러분이 있으나 그중에서도 유영모를 가장 존경했다. 나이 80이 넘은 몸으로 유영모는 이현필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광주에서의 동광원 모임에 내려와 청년같이 유쾌하며 씩씩하게 종일 꿋꿋이 앉아 가르쳤다.(『맨발의 성자』엄두섭 저. 은성 간. 1992. p.89-90. 유영모의 생애와 사상은 《현대종교》2004/7월호 9월호를 참조.)
15) 강순명 - 강순명 목사가 광주 ymca 안에서 『독신 전도단』이란 것을 조직하고 특별한 이상 밑에 청년들을 지도할 때 그 단원으로 강 목사의 지도를 받던 분들 중에는 이준묵, 차남진, 윤남하, 고영노, 박철웅, 이현필도 끼어 있었다. 강순명 목사와 이현필 선생 사이는 “하라! 그랬네!” 하는 사제지간의 사이였다. 이현필은 강 목사에게 성경을 공부했다. 강순명 목사는 마음이 착하고 자비한 분이었고 바로 살아보려는 이상주의자였다. 성자 타입의 인물이다.
1939년에서 1942년까지 일제 말에는 강순명, 정진철(후에 목사) 여자 두명등 5, 6명이 소위 「칼갈이 대」를 조직해 가지고 전국으로 전도를 다니며 집집으로 “면도칼 갈으시오” 라고 소리치고 다녀 칼을 갈아서 번 돈으로 구제사업을 했다. 이뿐 아니라 거리 청소, 남의 집 변소 청소 등을 하였다. 임종할 때 머리맡에 우는 딸을 보고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를 위해 울라”고 타이르면서 숨을 거두었다.(『맨발의 성자』엄두섭저. 은성간. 1992.p.90-92)
16) 정인세 - 정인세가 이현필을 알게 된 것은 8.15 해방 전부터이다. 정 선생의 나이 23세 때 한 체조 지도교사로 초청되어 광주 y에서 실수학교의 사감노릇을 하였을 때 독신전도단에서 만난 것이 처음이다. 정인세 총무는 신학교에도 다녔으나 정식으로 목사 안수는 받지 않았고 그러면서도 한때 이곳 저곳 여러 교회를 목회하기도 하였으나 당시 목포에 있던 윤치호에 의해서 광주에 세워진 동광원이라는 고아원 원장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부임전 정인세는 양복에 새파란 넥타이 매고 다니던 그가 넥타이도 양복도 벗어 버리고 삭발하고 과거의 모든 사진과 책까지도 모조리 태워 버렸다.
그는 내 자식이라 해서 남보다 더 특전을 베풀지 않았다. 더 뒷바라지 해주는 일도 없었고 더 공부시켜 주는 일도 없었다. 똑같이 다루었다. 그리고 그의 자녀들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고 ‘원장님’ 이라고 불렀다.(『맨발의 성자』엄두섭 저. 은성 간. 1992.p.92-102)
2. 이현필의 사상
17) 이현필 운동이 한창 불타던 때 광주 지산동 집회소에서는 40일 동안이나 십자가의 사랑과 겸손에 대하여 성경을 들고 목이 쉬도록 가르쳤는데 그때 福音三德을 가르쳤다. 삼덕이란 순결, 청빈, 순명이다. 순결은 생명과 같다고 가르치고 나 하나의 인격 완성이 가장 귀한 것이요 그것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순결, 청빈, 순명의 수도가 필요하다고 가르쳤다.(『맨발의 성자』엄두섭 저. 은성 간. 1992.p186)
18) 이현필의 고신극기(苦身克己), 그의 기도등 특이한 생활은 남들이 도저히 다를 수 없었고 그분의 말씀은 하루 종일 한 이야기를 녹음 한다 해도 모조리 성경 중심 설교요, 사람들의 영혼을 끄는 힘이 있었다. 그래도 그는 누구를 명령해서 무슨 일을 시키는 일이 없었다. 혹시 책망하는 일은 있어도 대개 겸손하게 대했다. 그러나 그가 제자들에게 정신을 넣어 주려고 교육과 훈련을 시킬 때에는 엄격하고 철저했다. 자주독립정신, 청빈과 검소한 생활을 훈련 시킬 때에는 “비누를 쓰지 말고 아궁이 잿물로 빨래하고 털옷을 입지말자. 자기 입을 옷은 자기가 손수 베를 짜 입자.” 하며 그는 일생동안 모직물은 입지 않고 살았으며 홈스펀 짜는 기계를 사서 굵은 무명베를 짜게 하기도 했다.(『맨발의 성자』엄두섭 저. 은성 간. 1992. p.28- 68)
19) 이현필 자신은 일식주의 이었다. 여러 해를 하루 한 끼만 먹되 꼭 저녁때만 먹었다.
주로 금식으로 지내는 때가 많고, 며칠에 한번씩 미숫가루로 때우는 때가 많았으며, 생식으로 오이, 살 가루, 물로 끼니를 때웠다. 이현필의 유언이라고도 말하는 <한 숟갈 덜 먹기 운동>은 ① 밥 한 끼에 1원 모아서 불쌍한 형제들을 도웁시다(이것을 한달 계산하여 회비로 월 60원에서 최하 월 30원 모으는 운동). ② 내 몸이 세상 떠날 때 장례비로 1원도 들이지 말고 속옷 내복 한 벌만 입혀서 조용히 묻어 주시오(이것은 그의 유언이었고 그가 계명 산에서 세상 떠날 때 그렇게 했다.) ③ 의심 말고 믿읍시다. 하나님께서 내형편 잘 아십니다.(『맨발의 성자』엄두섭 저. 은성 간. 1992. p.28- 68)
20) 고아들을 위한 동광 원을 시작한지 1년쯤 지났을 무렵 한번은 y총무로 있으면서 동광은 운영을 맡고 있는 정인세 총무가 벙어리 도를 닦고 있는 이현필의 산막을 찾았다. 고요한 호롱불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종이에 필담을 나누었다. 이현필은 금식기도 중에 무슨 생각이 있었던지 종이에다 귀일원(歸一院)이라고 썼다. 그리고 정인세에게 필담으로 권하기를 “곧 나가셔서 광주 역전에서 헤매는 사람들을 데려다가 따뜻하게 대접하여 하룻밤씩 재워 보내는 운동을 하시오 이 운동은 동광원 운동이 아닙니다. 귀일원입니다. 동광원 사람만 말고 누구나 역에 나가 비참하게 보이는 사람들을 보고는 하룻밤씩 재워 보내는 운동입니다. 그리고 곧 시행 하십시오>” 이렇게 해서 귀일원 운동이 시작되었다.(『맨발의 성자』엄두섭 저. 은성 간. 1992.p.119)
21) 당시 여순 반란의 피는 이미 이 땅의 남단을 붉게 물들이고 앞으로 곧 얼마 뒤에 6.25 난리가 또 북녘으로부터 터지려고 하던 그 역사적인 순간을 이현필은 벙어리 수도를 하면서 구일원에 대한 구상이 태동하고 있었다. 환난이 온다. 올데 갈데없는 사람들 단 하룻밤도 함께 지내줄 이 없는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하겠다. 의지 없는 그들을 구원하라는 신의 계시가 있었던 모양이다. 이것이 ‘하룻밤 재워 보내기 운동’ 이었고, 후에 이현필 만년에 일으킨 일작(一勺)운동의 구상도 여기서 나온 것이다.
「일작 운동」은 이현필이 1964년에 세상 떠나던 해에 마지막 길로 서울 계명 산으로 가면서 그의 제자들과 마지막 총회 때에 제안한 운동이다. 그것은 모두가 매일 밥 지을 때 자기 먹을 몫에서 한 숟가락씩 떠서 모으자는 운동이다. 이렇게 실시해서 30명이 밥 한상이 되고 300명, 3천명으로 늘어나면 학교도 되고 병원도 되고 비행기가 된다. 그렇게만 되면 자주 국가가 되고 세계는 평화가 온다. 누구나 마음만 있으면 할 수 있는 간단한 선행, 소자에게 물 한잔 떠주는 일 같은 선행. “일작씩 거둬 귀일원에 !” “의지 없는 이 하룻밤씩 재워 보내자!” 돈으로 「십 원 운동」 누구나 돈쓸때 십 원 덜 쓰고 그것을 모아 불행한 겨레들을 재워 보내고 돕자고 했다.(『맨발의 성자』엄두섭 저. 은성 간. 1992. p123)
3. 이현필과 동광원(귀일원)
22) 동광원이 생긴 것은 6.25 반년전 여순사건 직후 광주에서 생겼다. 여순 사건은 쇼크가 컸고 피해가 심해서 부모 잃은 고아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때 목포에서 고아원을 크게 하고 있던 윤치호씨가 광주 ymca로 정인세 총무를 찾아와서 “정총무 이러고 있을 때요? 지금 고아들이 자꾸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 ” 그래서 윤치호 씨와 정인세 총무의 주동으로 광주를 중심해서 저명인사 70명이나 회집하여 대책을 의논하고 발기 위원회를 조직하여 고아원 운동을 벌였는데 이름을 동광원이라 지었다.(『맨발의 성자』엄두섭 저. 은성 간. 1992.p.95)
한편 이현필이 화학산 소반바위 밑에서 벙어리 수도를 하면서 기도 중에 받은 그의 새 운동의 이름은 『귀일원(歸一院)』이었다. 『동광원』과 『구일원』은 한 단체 이면서 두 가지 이름이다. 지금도 공식 이름은 『구일원』이다. 정인세 총무가 원장이된 고아사업 『동광원』 운동을 이현필과 손잡고 했고 실제 『동광원』 안의 모든 책임이나 실무 활동은 이현필을 따르는 그의 제자들이 나서서 해왔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동광원』 이라면 곧 이현필의 운동 단체로 알고 있다. 정인세와 이현필은 절친한 런닝 메이트로서 좋은 콤비였다. 그러니 『귀일원』이 곧『동광원』이고 『동광원』이 『귀일원』이다.
23) 『동광원』은 처음에는 고아 사업을 위해 시작된 단체이었지만 이렇게 어느새 수도 단체로 변해 버렸고 지금은 고아사업은 그만두고 순수 수도단체로 나간다. 현재(1990년) 동광원에서 수도하는 식구들은 전국에 이백명 가량이 된다. 광주 방림에 본원을 두고 분원은 전남의 곡성, 함평, 진도, 도암, 전북에 남원, 전주, 광주자매, 무등산 등지에 크고 작은 그 단체가 있고 경기도 능곡과 벽제 계명 산, 갈월에도 있다. 혹은 십여 명, 혹은 수십 명씩 모여 살며 관상수도 보다도 노동 수도를 주력하며 자급자족하는 농사에 힘쓰고 있다. 그들은 누구의 원조도 받지 않는다. 자활 생계를 철저히 세우고 있다.
24) 이현필 운동이 확대되면서 기성 기독교 안에서는 이해나 동정보다 냉대를 받았다. 그들은 기성교회 예배에는 출석하지 않고 금욕주의적 이어서 엄격한 독신생활로 동정을 지키며 가정생활을 죄악시 하여 동광원으로 들어가는 이들은 가정생활이 파괴되며 거지같이 옷을 허술히 입고 맨발 벗고 걸식 탁발도 하고 산중에 살기가 일쑤이고 해서 이 운동 초기에는 ‘산 중파’, ‘금욕주의자’, ‘이현필 파’ 라 불러 지방교회나 노회목사들은 이단자들 같이 여겼다. (『맨발의 성자』엄두섭 저. 은성 간. 1992.p.96-98)
25) 이현필을 따르던 여자들 중에는 훌륭한 분들이 여럿이 있었다. 정한나 같은 분은 이현필이 세상을 떠난 뒤 이현필의 정신을 따라 수녀들을 지도하고 있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젊어서 지금까지 일생을 운동에 바친 정한나. 정규주 등은 보래 기성교회에서 열심히 다니던 교인들이었으나 이공(이 세종)의 제자 박 모 씨를 따르다가 이현필을 비난하는 말을 듣고 불만스러워 이현필을 찾아 만나 보고 그만 감화를 받아 그 제자가 된 사람들이다. (『맨발의 성자』엄두섭 저. 은성 간. 1992.p132-133)
26) 정한나 집사는 그 후 경기도 능곡에 가 있다가 1957년 서울 y의 현동완 총무의 이야기와 이현필의 암시를 받고 혼자 경기도 벽제군 계명 산 앵무봉 밑에 있는 현총무 수양관이 있는 산중으로 분원을 개척하러 들어갔다. 이것이 후에 벽제 수녀의 마을이다. 이현필은 제자들을 훈련 시킬 때 말보다 실천을 통해 진리를 배우게 했다. 정한나를 비롯해서 현재도 이 단체를 이끌어 가는 유능한 지도자들은 몸소 실천하는 데서 그 경험을 통해서 자신을 얻었다.
전남 함평에도 만여 평의 농장이 있고, 진도 섬에도 만여 평 넓은 논밭이 있고 그밖에 경기도 벽제 계명 산, 나주시 다도면 중촌 등지에 동광원 수녀들은 흩어져 살며 묵묵히 땅을 판다. 지금도 그들은 효소법 개량농사를 실시하여 농약을 안 쓰고 수확을 올리고 있다.
경기도 벽제군 계명 산 분원에는 홈스펀 짜는 베틀을 여러 대 두고 수녀중 일부는 지계를 지고 뒷산에 올라가 나무하고 더러는 베를 짜서 굵은 무명베를 서울에 가져다가 팔았다. 이 베를 사서 옷을 해 입은 이들은 서울에서도 검소하기로 소문난 김현봉 목사의 아현교회 교인들이었다. 그 교인들은 모두 굵은 무명에 검은 물을 들여 옷을 해 입고 고무신을 신고 살았다. 동광원의 특색은 수녀들이 농사를 짓느라고 아주 힘든 노동을 하는 것이었다. (『맨발의 성자』엄두섭 저. 은성 간. 1992.p165-166)
4. 파 계
27) 이현필은 말년에 후두결핵 병으로 무척 고생했다. 기침과 가래가 심하고 목이 아파서 말을 못했다. 과거에는 죽어도 약을 쓰지 않았다. 그리고 절대로 살생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위대한 점은 금욕 고행이나 뛰어난 선행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자기주장을 끝까지 고집하지 아니하고 대오 각성하고 솔직하게 자기 잘못을 고발한 점이다.
“제가 오늘 이대로 죽으면 저는 천국에서 예수님께는 역적 같은 놈이 되리라고 느낍니다. 그동안 제가 절대선행을 강조해 왔던 고로, 저를 따르는 이들을 온통 철저한 율법주의자들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는 자기 생애의 마지막 때가 가까이 왔을 때, 자기 근본 신앙을 분명히 천명하므로 제자들의 오해나 잘못 나감을 미연에 예방한 것이다. “나는 위선자 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여 구원 얻을 사람이지 선행이나 금욕 고행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이 아닙니다.” 라고 했다. 이말은 이현필이 지금 신촌 거지굴 속에서 죽음을 앞에 놓고 누운 채 엄숙히 자기를 반성하면서 세상 사람들의 부질없는 이현필 관(觀)을 뒤집어엎는 것이었다.
28) 사경을 헤매는 이현필은 기운이 극도로 쇠약해 있었다. 제자가 쓰레기통을 뒤져 굴비를 가져다가 머리맡에 놓았더니 그 국물을 입에 떠 넣어 달라고 했다. 그는 젊어서 지금까지 멸치 꼬랑지 한 마리도 입에 대어본 일이 없는 철저한 채식주의자, 금욕주의 자요 옷에 이가 굴러도 d.d.t 약을 단 한번 사준 적이 있을 뿐이다. 수도사가 동정을 버리는 일과 고기를 먹는 일은 죄라고 까지 생각했던 그가 지금 고기를 먹으려고 하고 있다. 그는 지금 일부러 파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김한나라는 수녀가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눈으로 이 광경을 지켜보다가 이현필이 고기 국물을 마시는 것을 보고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그는 조심스레 김준호 옆에 와서 “선생님이 지금 시험에 들었는지 모르니 고기국물을 절대로 넣어드려선 안 된다.”고 심각한 태도로 제지 시키려 했다. 그때 이현필은 “당신이 하나님이오?” 하며 책망을 했다. 정인세 총무가 오자 필담으로 “이 개 같은 것을 보려고 왔습니까? 원장님, 제가 고기를 먹었습니다. 동광원에서 나를 책벌해 주십시오.” 그는 자기 스스로 파계하고는 스스로 자기를 자조했다.
29) 이와 같은 이현필의 파계를 두고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평했다. 어떤 이는 이현필이 이런 파계로 지금까지 쌓아온 자기의 공든 탑을 혁명 하노라 한 일은 그가 걸어온 반생의 주의 주장이 미완성극이라 평했다. 김준호는 “동광원의 타락은 악쓰고 고기 먹게 된 일이다.” 고 했다.
저녁 무렵, 해는 서산마루에 뉘엿거리는데 석양이 쓸쓸히 비추는 한그루 밤 나무 밑에 펴놓은 거적때기 위에 다죽은 송장같이 뻣뻣이 누운 이현필의 모습은 참혹한 모습이었다.
이제 와서는 스스로 그 자신이 평생 소중히 다듬고 지켜온 길마저 파게 한자, 모든 것을 버리고 모든 것을 부인하고 자기 자신 주의 주장마저 부인하고 이제는 제자들에게 마저 멸시받고 죽어가는 이현필이었다.
이현필은 “나는 고기를 먹고 약을 썼으나 그러나 나는 고기 안 먹고 약을 쓰지 않는 사람을 존경한다. 그런 분들의 그런 신앙도 존경한다. 그러나 구원 얻는 것은 그런 것으로 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구원은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만 얻는다. 약도 안 먹고 살생도 않는 사람들도 자기주의대로 그대로 안 먹어도 좋으나 먹는 사람도 안 먹는 사람도 서로 남의 인격과 신앙을 존경하라.” 고 했다.
30) 고아들을 위한 동광이 시작한지 1년쯤 지났을 무렵, 한번은 y총무로 있으면서 동광은 운영을 맡고 있는 정인세 총무가 벙어리 도를 닦고 있는 이현필의 산막을 찾았다. 고요한 호롱불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종이에 필담을 나누었다. 이현필은 금식기도 중에 무슨 생각이 있었던지 종이에다 귀일원(歸一院)이라고 썼다. 그리고 정인세에게 필담으로 권하기를 “곧 나가셔서 광주 역전에서 헤매는 사람들을 데려다가 따뜻하게 대접하여 하룻밤씩 재워 보내는 운동을 하시오 이 운동은 동광원 운동이 아닙니다. 귀일원입니다. 동광원 사람만 말고 눅나 역에 나가 비참하게 보이는 사람들을 보고는 하룻밤씩 재워 보내는 운동입니다. 그리고 곧 시행 하십시오>” 이렇게 해서 귀일원 운동이 시작되었다.(『맨발의 성자』엄두섭 저. 은성 간. 1992.p.401-422)
나가는 말
이상에서 주목받는 유영모에 이어 이현필이 어떤 분인가를 살펴보았다. 그에게서 기성교회로 부터 비난받는 요소가 무엇인지도 다소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 교역자들이 성공적인 목회를 통해서 대형교회를 꿈꾸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 목적을 이루려는 태도와는 전혀 다른 모습도 보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꼭 모든 기독교인들이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런 마음자세 만은 우러러 봐야할 마음자세라고 여겨진다. 우리는 한번 생각해 보자! 만일 우리 자신이 죽는다면 위에 열거한 주목받는 인물들처럼 우리를 존경하고 유업을 기리며 따라줄 사람이 몇이나 될 것인가를 …
【참 고 도 서】
1.『한국의 신흥 종교』ⅲ. 탁명환 저. 1974. p385 - 391
2.『좁은 길로 간 사람들』엄두섭 편. 소망사 간. 1985. p.185-190
3.『영 맥』 엄두섭 저 은성 간. 1989. p.103 - 164
4.『맨발의 성자 이현필』엄두섭 저. 은성 간. 1992.
5.『호세아 닮은 성자』엄두섭 저. 은성 간. 1987.
6.『순결의길. 초월의 길』엄두섭 저.
7.《김현봉 목사의 생애와 신학사상》정봉기 장로회신학대학 2001 석사논문.
8. 《현대종교》1991. 10월 김현봉 이야기. p.68 - 82
9. 《현대종교》1991. 11월 김현봉 이야기. p. 188 - 197(김현봉사진)
10. 《현대종교》1992. 01월 김현봉 이야기. p. 196 - 212
11. 《현대종교》1992. 02월 이세종 이야기. p. 46 - 57(이세종의 천태수양관)
12. 《현대종교》1992. 03월 이세종 이야기. p. 26 - 34(등광리 교회사진)
13. 《현대종교》1992. 04월 이세종 이야기. p. 26 - 40
III. 이현필과 동광원
“오 기쁘다! 기쁘다! 오 기뻐! 오매 못 참겠네. 아이고 기뻐!”
숨이 가라앉는 듯 하다가도 다시 돌아올 때마다 “이이고 기뻐! 오 기쁘다. 못 참겠네. 이 기쁨을 종로 네거리에라도 나가서 전하고 싶다.”고 외쳤다.
환희의 물결이 터져 나온 것이다. 성령의 기쁨이.... 임종 수일 전부터 기쁨이 밀려와서 어쩔 줄 모르더니 이제 절정에 이른 것이다.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보던 제자들에게 “먼저 갑니다. 다들 다음에 오시오!” 하며 고요히 눈을 감았다. 무릎을 꿇고 앉은 채 얼굴은 하늘을 향해 바라보면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때는 1964년 3월 18일 새벽 3시였다. 53세로 생을 마감한 성인 이현필선생의 임종시의 모습이었다. 마치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을 그린 성화의 모습이나 같았다고 한다.
맨발의 성자로 알려진 이현필은 1913년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권동리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3세 때 읍내에 있는 일본인 목사 관파(官波)에게 전도되어 복음을 접한 후, 1928년 광주농업실습학교 학생 때 강순명 목사를 통해 알게 된 도암의 ‘이세종’을 만나게 된다. 이현필은 남다르게 거룩한 삶을 동경하며 실천하려고 애썼기 때문에 그의 수제자가 되었고 이세종은 생전에 “내가 많은 사람과 이야기를 해봤지만 내말을 가장 빨리 이해하는 사람은 이현필 뿐이다”라고 하였다.
이세종과 달리 이현필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과 함께 수도공동체를 이루고 함께 동고동락하며 제자들을 훈련했다. 이현필 선생을 가장 초기부터 따랐던 분으로 당시 남원 읍내에서 목공소를 하고 있던 오북환 집사였다. 오북환집사는 이현필을 만나 그 감화력에 동화되어 목공소를 내놓고 집회장소로 삼았다. 그는 일생 이현필을 본받아 하나님의 충직한 종으로서 동광원을 가꾸며 헌신했다.
이현필은 나이 30세 전후 홀로 산에 은거하면서 금식과 명상생활을 하였다. 화순의 화학산과 남원의 지리산에서 수년씩 홀로 기도생활을 했다. 산에 파묻혀 기도하였고, 특별히 소명을 받아 거룩한 삶을 사모하는 10여명의 소년 소녀들을 제자로 삼아 성경을 가르치고 훈련하였다. 남원에서 몇 십리 들어가는 서리내(仙人來)라는 곳과 그 앞산을 타고 내려오면 갈보리라는 동산이 있는데 이곳에서 제자들과 생활하면서 기도 및 경건생활과 노동 그리고 성경공부 등을 통해 제자훈련을 시켰다. 남원 지방의 독신 기독교인들 중에서 그를 존경하고 따르고자 산으로 모여든 것인데 이것이 동광원의 모체가 되었다. 어머니 강남순과 딸 김금남 두 모녀는 그때부터 이현필을 스승으로 모시고 따랐다. 그때 김금남은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진로문제를 놓고 날마다 고민했다. 그래서 교회에 들어가 열심히 기도하던 중에 “네 몸을 산 제사로 드리라!”하는 신비한 음성을 들었다. 그리고 어머니와 함께 진로문제를 놓고 갈보리에서 백일기도를 했는데 이 기도를 통해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수도생활을 하기로 결심을 했다. 자나 깨나 산 제사를 드리는 방법이 무엇일까 생각하던 중에 마음에 응답되기를 일생 동정을 지켜 자신을 주님께 바치는 길이라는 깨달음이 왔다는 것이다.
그때 교육은 보통 보름씩 산중에서 행해졌다. 그는 제자들에게 예수의 정신을 본받는 경건훈련을 진행할 때 매우 엄격하고 철저했다. 그는 또한 제자들에게 자주독립정신, 청빈과 검소 생활을 배우게 했다. 성경을 배워주고 겸손과 사랑의 실천, 그리고 양심훈련을 시켰다. 먹을 것이 없던 때라 주로 풀뿌리와 쑥을 먹었다고 한다. 그 자신 스스로가 짚신을 신었고 산중 길을 걸을 때는 추운 겨울에도 맨발로 다녔으며, 단벌옷과 불을 때지 않는 차가운 방에서 지냈다. 청빈하고 가난하게 사셨던 예수의 삶을 본받고자 몸소 모범을 보인 것이다.
서래내는 남원 수지면에서 지리산을 등산하는 도중에 있는 경치가 뛰어난 곳인데 이현필은 그곳의 우거진 솔밭이나 갈대밭 속에 한 번 엎드리면 꿈적도 않고 일어날 줄 몰랐다고 한다. 산에 사는 까마귀가 송장인줄 알고 곁에 와서 ‘까악, 까악’ 하고 울다가 그래도 움직이지 않으니 부리로 쿡쿡 찔렀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화학산 기도 3년, 지리산 기도 4년을 통해 겸손과 자비와 청빈의 수도자인 성 프란치스코의 모습을 닮아갔다.
이현필은 1948년에 훈련시킨 제자들과 함께 광주 YMCA로 가서 봉사했는데 이때 이들의 모습을 본 당시 YMCA 총무 정인세는 깊은 감동을 받아 바로 이현필을 따르게 되었다. 정인세는 말하기를 그가 만난 인물 중에서 이현필선생 만큼 그릇이 크고 깊은 인물은 없었으며 이현필선생의 그 깊은 속은 자기로서 도저히 측량 할 수 없었다고 했다.
이현필의 전기를 쓴 엄두섭 목사는 “보통 생각하기를 이현필 선생은 예수를 본받으려고 하신 분이고 하나님만 사모한 분이니 그것밖에는 다른 일은 관심이 없는 분인 줄 짐작하지만 그의 포부는 세계적으로 넓었고 애국심에 불탔으며 가난한 사람들과 사회적 부조리에 대한 걱정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했던 분”이라고 전한다.
이현필은 식사생활에 있어서 일식주의자였고 철저한 채식주의자였다. 하루 한 끼만 식사를 했는데 꼭 저녁에만 했다. 주로 금식으로 지내는 때도 많았다. 또한 그는 많은 신비적인 체험에 대해서는 일체 침묵하였고 꿈 이야기도 하지 않았으며 다만 성경을 가르쳤으며 하루 종일 하는 대화가 그대로 설교였다. 그는 모든 생명을 사랑하고 아끼는 자비심으로 빈대나 벼룩마저도 죽이지 않았다고 한다.
간혹 누가 아프다고 그이의 기도를 받고자 원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나는 신이 아니오.”하고 거절했다. 그리고 아프다는 이에게는 “아프게, 더 아프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오.” 하였다.
이세종으로부터 전수된 순결사상과 남녀유별에 대해서는 무서울 만큼 엄격했다. 이현필도 27세에 결혼을 했으나 그의 스승인 이세종 선생처럼 남매지간으로 지낼 것을 권유하고 실천했다. 후일 이현필 선생의 부인은 개가했다. 이러한 순결사상은 그를 따르는 결혼한 제자들에게는 참 견디기 힘든 문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현필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이 결단하여 순결생활을 지켰으며, 때로는 많은 사람이 남편과 집을 놔두고 아이들을 데리고 동광원에 들어와 산 사람들도 많다. 그래서 이현필 선생이 한 번 지나가면 온 동내, 도시가 난리가 났다. 자신의 부인과 생이별하는 일이 벌어지거나 잠자리를 거부하는 일이 생기자 여러 곳에서 비난이 잦아졌다. 특히 전라남도 교회 목사들은 교인들이 대부분 빠져 나가 이현필을 따라 다니자 그를 ‘산중파’ ‘금욕주의자’라 비난하고 그를 이단시하였다. 그러나 한 번이라도 그를 찾아와 대면한 목사들은 “이 길이다!”하고 소리쳤다. 사람들은 “이분은 참 믿음의 사람이다. 참 사랑의 사람이다. 성경말씀대로 살면 이렇게 된다. 이런 것이 믿는 것이요 사랑이다.” 하고 감격했다.
여순반란사건 이전에는 주로 경기도 능곡을 중심으로 농사와 탁발훈련과 전도활동을 했다. 그리고 복음전도대로서 그들은 또한 남원 순천 여수 강진 해남 광주 등 남부지방을 돌며 탁발하고 전도활동을 펼쳤다.
해남 교회에서 당시 청년 김준호는 의사를 지망하며 공부하고 있었는데 이현필 선생을 만나 평생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다. 김준호는 당시 교회 내에서 살면서 손수 교회청소를 담당하고 혼자 기도하고 성경 보면서 공부하던 학생이었다. 하루는 그 교회 집사가 “우리 교회에 참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이 올 것이오. 그는 광주에 사는데 목수 일을 하고 시래기죽만 먹으면서 성경을 공부하고 사는데 항상 기쁨이 충만하여 종일 하나님만 찬양하는 사람이라오.”하고 말해주었다. 그때가 1946년 가을이었다. 강단의 책상 위에 국화를 꺾어다 화병에 놓고 예배를 준비했다. 트럭을 타고 두 분이 내려왔는데 모두 한복 바지저고리를 입었고 한 분은 톱 망치 등 목수연장을 담은 걸망을 지고 내렸다. 이현필 선생과 오북환 집사라 했는데 맨발에 고무신을 신고 있었다. 청년 김준호는 속으로 ‘저런 분이 어떻게 믿기에 잘 믿는 사람일까’ 하고 있었는데 이현필선생이 설교하러 책상 앞으로 나와 앉았다. 그런데 그가 책상 위 화병에 놓여있는 국화를 보고는 깜짝 놀라서 아주 슬프고 안타까운 음성으로 “어찌하여 이 꽃을 꺾었습니까? 꽃은 꺾지 마시고 피어있는 그대로 두고 보셔야 되는데...”하시며 한참을 말없이 슬픈 표정으로 그 꽃을 바라보았다. 그때 그 순간에 김준호는 이현필선생의 그 말씀과 그 모습을 통해 온 몸을 울리는 한없는 감동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애틋함과 온 우주를 껴안는 깊은 사랑을 느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때부터 그는 이현필을 스승으로 모시고 평생을 따르면서 스승께서 보여주신 그 사랑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한다.
이현필은 제자를 사랑하여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서라면 맨발로 30리 50리 산길을 달려갔다. 6.25때는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미국인 유화례 선교사를 살리기 위해서 갖은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버스를 타거나 차를 탈 때면 언제나 제자들에게 가장 나중에 타자며 다른 사람들이 다 탄 후에야 차에 올랐다. 다른 사람들이 다 먼저 구원을 받은 후에 자기는 맨 마지막으로 구원의 방주에 올라타겠다는 철저한 이웃사랑이요 보살정신이었다.
이현필은 말년에 후두결핵으로 고생하였는데 생을 마감하기 전에 뜻하는 바가 있어 제자들에게 고깃국이 먹고 싶다고 말했다. 그래서 제자들은 평생 채식주의자였으며, 자신들에게도 채식주의를 가르친 스승의 말에 놀라면서도 임종이 가까운지라 말씀대로 생선국을 끓여 들였더니 겨우 두 숟갈을 넘겼다고 한다. 이것이 유명한 ‘파계’이다. 이현필은 자신을 따르던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한 참 믿음은 사라지고 이현필 자신이 걸어 왔던 삶을 율법적으로 좇지나 않을까 염려하였고 또 결핵을 앓고 있는 제자의 건강을 염려했던 것이다. 그는 또 제자들에게 선행위주의 노력이 아니라 “예수의 보혈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고백으로 가르쳤다.
이현필은 복음의 삼덕을 순결, 청빈, 순명으로 보았고 이를 위해 수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청빈’ 곧 가난에 대해 이해함에 있어 자신이 처한 상황을 극복하는 자족의 방법과 나눔을 통한 삶을 말했다. 그 실천적 장이 되었던 것이 바로 ‘동광원’이다. 동광원은 수도 공동체로서 본원은 남원에 있고 분원으로서 진도분원, 지지리 분원, 함평 분원, 도암 분원, 광주 귀일원 분원, 소화자매원, 전북 진달래의 집, 경기도 능곡과 벽제 계명산, 갈원 등지에서 그 제자들이 수도하고 있다.
4. 아, 맨발의 성자여
최 흥 욱
일 자: 2004-3-2
당신은 아십니까?
당신은 들어보셨습니까?
한국의 맨발의 성자에 대하여
섬진강 굽이굽이 맨발로 걸으며
눈 덮인 지리산 마루에 서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사랑이 밀려와
‘아 십자가 아 십자가 갈보리 십자가는 저를 위함이요’
감격하여 십자가의 노래 부르며 흐느껴 통곡하던 님
지리산 우거진 솔밭, 갈대밭 속에
한번 엎드리면 꿈쩍도 않고 일어날 줄 몰라
까마귀가 송장인줄 알고 곁에 와서 까악까악 울다가
그대로 움직이지 않으니 부리로 쿡쿡 찍을 때까지
잔등에 흰서리 덮이고 수염엔 고드름 달린 채
밤새워 목숨 걸고 겨레와 민족의 장래를 위해 기도하던 님
한 마리 잃은 양을 찾기 위해
거지같은 헌 옷에 맨발로 걸식 탁발하며
‘주님 가신 길이라면 태산준령 험치 않소
방울방울 땀방울만 보고 따라 가오리다‘노래하며
30리 50리 산길 지치는 줄 모르고 걸어간 거룩한 거지 전도인
눈 오는 밤이면 배고프고 헐벗은 겨레의 가련한 얼굴들이
자꾸 머리에 떠올라 조끼도 없이 맨 저고리에 엷은 바지 입고
불도 때지 않은 방에서 요도 없이 앉아 추위에 떨며
주린 사람들 찾아 돌봐주던 따뜻한 사랑의 사도
더럽고 냄새나는 거지굴 속에 칠성판을 깔고 누워서
거지들과 함께 어울려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던 님
길가의 들꽃처럼 이름 없이 살다가
사진 한 장 쓸만한 것 남기지 않고
마지막엔 ‘내가 죽거든 관을 쓰지 말고 거적대기에 싸서
평토장을 해 달라‘고 유언을 남기고는
하늘로 훌쩍 올라가 버린 님
아, 오늘 같은 영혼의 깊은 밤중엔
맨발의 성자 그 님이 사무치게 그리워집니다
아무리 찾아봐도 님과 같은 이는 볼 수 없어
거슬러 거슬러 영혼으로 님을 찾아 나섭니다
[이현필 선생 친필]
맨발의 성자, 그는 과연 누구인가? 그는 목사도 아니고, 장로도 아니고, 집사도 아닌 평신도였다. 그는 한 시대를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고 간 이름 없는 예수의 제자였다. 그는 한국 기독교 100년 역사 속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하는 성자였다. 그가 곧 한국의 프란치스코라고 불리우는 이현필 선생이다. 맨발의 성자라는 이름은 엄두섭 목사가 1978년 이현필의 전기를 쓰면서 책 제목으로 붙인 이현필의 별명이다.
그는 한평생 집도 없이 하늘을 천장으로 땅 바닥을 안방으로 돌로 베개를 삼고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으며 자원하여 거룩한 전도인으로 거지의 삶을 살다간 주님의 신실한 종이었다. 그는 살아있는 동안 넥타이 매어 본 일도 양복을 입어 본 적도 없고 그 흔한 쌀밥 한 그릇 먹는 것을 옆에서 본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의 제자들이 “선생님께서는 왜 밥을 잡수시지 않습니까?”하고 물으니 “쌀 한 톨 만들기까지 농부들이 석 달 남짓 땀 흘려 수고하는데 농사도 짓지 않는 내가 어찌 그 쌀로 지은 밥을 체면도 없이 넙죽넙죽 먹어 치울 수 있겠는가?”하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손수 병원에서 환자들이 먹고 버린 죽을 다시 끓여 먹으며 삶을 살아갔다고 한다. 이현필의 삶은 고난과 순결, 가난과 청빈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러한 삶 속에서도 그가 살던 화순에서 서울로 광주로 남원으로 진도로 해남으로 가게 되면 그 멀고도 먼 거리를 볼 일은 뒷전이고 맨발로 걸어서 가고 오면서 만나는 사람 가리지 않고 복음 전하다 보면 3개월도 걸리고 6개월도 걸리곤 했다니 이런 그를 가리켜 ‘한국의 프란치스코’ 또는 ‘맨발의 성자’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정말 잘 한 것 같다. 프란치스코가 벼랑 끝에 몰린 유럽의 기독교를 살려내며 불거진 인물이라면 이현필은 소리 없이 한국교회의 언저리에서 예수의 영성을 추구하다 스러져간 참 예수꾼이었다. 이현필, 그는 분명히 한국교회 영성사에 있어서 한 맥을 이루어 놓은 사람이었다. 그는 특이한 사람이지만 숨겨져 있다. 그는 결코 그 자신이 세상에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았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우리들의 순례는 맨발의 성자 숨은 성자 이현필 선생의 지나온 자취를 더듬어 보면서 우리도 그가 걸어간 나사렛 예수의 길을 그대로 따라가 보자는데 그 목적이 있다. 그가 기도하고 수도하고 가르치고 전도하며 몸담아 살았던 거룩한 현장들을 찾아가 보면 길이 보이고 진리가 보이고 예수가 보인다. 본격적인 순례 행진에 앞서서 이번 호에서는 그의 생애를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이현필은 1913년 1월 28일 전남 화순군 도암면 권동리(용하리)에서 평범한 농부인 이승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보통학교를 마친 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집에서 몇 십리 떨어진 영산포에 나가서 닭 장사를 하다가 일본인 목사에게 전도 받고 13세 때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 후 한때 서울에 올라와 YMCA에서 영어와 성경을 공부하였는데 그때 원경선 선생(현 풀무원 공동체 원장)을 만나 평생 교우가 되었다. 원경선 선생은 지금도 동광원 광주 귀일원을 달마다 둘째 주일에는 꼭 한번씩 찾아가 예배 인도를 하고 벽제 계명산 분원에도 일년에 서너 차례씩 오가며 동광원 가족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있다.
[동광원 수양회 마치고]
서울 YMCA에서 영어와 성경을 배운 그는 광주에 내려와서는 신안동 교회 전도사로 일했으며, 해방 전에는 광주 YMCA의 강순명 목사를 중심으로 한 독신 전도단에 참여하여 이준묵 목사, 차남진 박사등과 전도 활동을 하였다.
이현필의 삶이 결정적으로 변한 것은 22세 때 도암의 성자라고 불리우는 서른 살 위인 이세종 선생을 만난 뒤로부터였다. 감리교 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인 정경옥 박사는 이세종을 가리켜 “한국에 성인이 나왔다”고 소개했는데 이세종은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고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살았던 사람이었다. 자기 아내를 누님이라 부르며 부부가 남매처럼 살았고 일제시대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깊은 산 속에서 지냈다. 또한 밤에는 성경을 암송하고 낮에는 가까운 마을의 처녀 총각을 모아 성경공부를 시켰다. 이현필은 남다르게 거룩한 삶을 동경하며 실천하려고 애썼기 때문에 이세종의 수제자가 되었고, 이세종은 살아있을 때에 “내가 많은 사람과 이야기를 해 봤지만 내 말을 가장 빨리 이해하는 사람은 이현필 뿐이다.”하고 하였다.
이현필은 25세 때부터 28세까지 전남 화순군 도암면 화학산에 들어가 기도생활을 하면서 이세종 선생의 지도와 영향을 받게 되어 수도자의 모습을 닮아갔다. 나이 30세 전후로 그는 지리산의 오감산이나 서리내에서 깊이 기도하였다. 산에 파묻혀 금식과 명상생활을 하였고, 특별히 부름 받아 거룩한 삶을 사모하는 10여명의 소년 소녀들을 제자로 삼아 성경을 가르치고 훈련하였다. 남원에서도 몇 십리 들어가는 서리내라는 곳과 그 앞산을 타고 내려오면 갈보리라고 불리우는 동산이 있다. 서리내에서 행해진 교육은 보름씩 산 속에서 행해졌으며 경건생활과 노동이 엄격하게 함께 이루어졌다. 갈보리 역시 서리내와 함께 수도의 도장이 되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여기 모여 예배드리고 성경 강해를 들었으며 특히 그의 순결사상을 여기서 받게 되었다. 갈보리와 서리내는 이현필 운동의 발상지가 되었고 훗날 동광원의 모체가 되었다.
이현필은 제자들에게 예수의 정신을 본받는 경건훈련을 진행할 때에는 매우 엄격하고 철저했다. 그는 제자들에게 자주독립 정신 청빈과 검소의 삶을 훈련시켰다. 그 자신 스스로 짚신을 신었고, 산중 길을 걸을 때에는 추운 겨울에도 맨발로 다녔으며 단벌 옷과 불을 때지 않은 차가운 방에서 지내며 청빈하고 가난하게 사셨던 예수의 삶을 본 받고자 몸소 모범을 보였다. 그는 식생활에 있어서 일식주의자였고 철저한 채식주의자였다. 그는 많은 신비적인 체험을 했으나 일체 침묵하였고 오직 성경만 가르쳤고 하루 종일 하는 대화가 그대로 설교였다. 그는 생명외경 사상을 실천하여 빈대나 벼룩마저도 죽이지 않았다고 한다. 한동안 교회 지도자들이 이현필을 금욕주의자 또는 산중파라고 부르며 비방하였다. 그러나 한번이라도 찾아와서 보고 들은 사람들은 “이것이다, 바로 이 길이다!”하고 소리쳤다. 이현필은 지리산 봉우리 마다 깨끗하게 가득 쌓인 눈경치를 보며 수도하기 위해 세상도 청춘도 모두 바친 제자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아, 십자가! 십자가의 길 뿐입니다!”하고 호소하곤 하였다. 도인(道人) 이세종을 만나 그의 제자가 된 이현필은 화학산 기도 3년, 지리산 기도 4년, 모두 7년이란 산 기도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 십자가 사랑에 통곡하는 사람이 되었고 청빈한 수도자 프란치스코 같은 모습을 닮아 어질고 겸손한 성자의 모습을 이루어 갔다.
이현필의 주위에는 여러 유능한 인물과 명사들이 모여 들었다. 호남의 명사요 나환자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최흥종 목사는 이현필을 아들처럼 사랑했다. 서울 중앙 YMCA 총무요, 평화주의자로, 20세기 종로의 성자라고 일컬어지는 현동완 선생도 이현필을 방문하고 그의 집회에 참석하였다. 광주 YMCA 총무 정인세는 유도 2단에 덴마크 체조 교사이기도 했던 인물인데 YMCA를 그만두고 양복을 벗어버리고 넥타이를 풀어버리고 이현필 운동에 몸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한국의 공자요 작대 철학자로 이름난 삼각산 철인 유영모 선생은 이현필을 사랑하여 한평생을 이현필과 교제하였고 동광원 수양회 강사로 자진하여 봉사하였다. 1946년 처음 만나서 이현필이 세상 떠난 1964년까지 한결같이 사제의 의를 지켰고 진리와 도(道)의 정을 나누었다.
이현필과 당대의 석학 유영모와의 만남은 동광원의 영성 형성에 중요한 것이었다. 유영모 선생은 남강 이승훈 선생이 세운 오산학교 교장이었으며 유명한 한학자로서 수많은 훌륭한 제자들을 길러냈다. 함석헌도 그의 제자 가운데 하나였다. 유영모가 이현필을 만난 것은 현동완과 정인세와의 관계성 속에
[1970년대의 다석 유영모 선생]
서이다. 그들은 한국 안에서 성인을 찾아 헤매였으나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의 갈급함에 대한 응답이었을까. 그들은 전라도 화순의 이세종이란 인물을 찾게 되고 그 후 1946년 전남 광주에서 맨발의 성자라고 일컬어지는 이현필을 만나게 되었다. 이 나라에 성자가 나기를 고대하던 현동완은 이현필에게서 성자의 가능성을 보고 당시 YMCA 연경반 공부를 맡고 있던 삼각산의 유영모에게 이현필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이로서 1946년 봄 광주 YMCA에서 유영모 현동완의 공개 강연이 열리게 되었고 처음 대면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유영모는 이현필에 대해 “한국에 인물이 없는 줄 알았더니 광주에 반쪽이 있었구나.”하고 말했다고 한다. 유영모 선생은 이현필을 무척이나 아끼었고 자주 광주 동광원에 내려와 동광원 식구들에게 강의하곤 하였다. 이현필은 유영모의 가르침에 매우 만족해 하였다. 특히 유영모의 동정 순결사상에 전적으로 동의하였다. 어느 날 이현필은 유영모의 강의를 듣고 나서 평하기를 “한마디 한마디 피투성이다.”고 할 정도로 전폭적이었다. 이현필은 유영모의 참 인격과 참 말씀에 끌리어 스승으로 받들었고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유영모의 영성이 믿음으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강조한 것이라면, 이현필의 사상은 이웃에 대한 비계산적 무차별적 사랑의 실천이었다. 두 맥의 만남을 통해 자칫하면 은둔적이고 신비적인 영성으로 치달을 수 있었던 동광원이 균형 잡힌 영성을 갖추게 되었다. 유영모의 민족적이고 한국적인 여운이 뒷받침되어 한국의 토착적 주관을 가진 믿음을 이 땅에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1949년에는 현동완 총무가 이현필과 그의 제자 일부를 서울로 초청하여 삼각산과 능곡 등지에 머물게 했다. 능곡에는 오원(吳園)을 세우고 남녀 청년들이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다. 추운 겨울 날 이현필은 남녀 제자들을 두 사람씩 짝을 지어 마을에 탁발을 내보냈다. 추운 겨울인데도 신도 신지 않고 맨발로 나섰다. 처녀들이 탁발하고 떠난 집에 뒤이어 남자들이 또 닥쳐 탁발을 청하니 마을 사람들은 놀라서 “요즘 무슨 거지들이 이리도 많아졌지?”하고 말하였다. 제자들은 경기도 고양 지방에 전도를 시작했는데 이것이 후에 고양 벽제에 있는 계명산 수녀원의 모체가 되었다. 경기도 능곡을 중심한 이현필의 젊은 전도대는 농사도 지으며 때로는 탁발도 나가고 모여서는 항상 기도하고 성경 읽는데 주력하였다. 한편 여름에는 전도대를 조직하여 남원 순천 여수 강진 해남 광주 등지로 순회하며 전도하였다. 거지같은 헌옷에 신도 신지 않고 맨발에 걸식 탁발을 하며 전도하였다. 해남의 명사 이준묵 목사도 적극 나서서 도왔고 자기 교회에 이현필을 청해 집회도 가졌다.
[벽제 계명산 수녀원]
그러던 중 6.25 전쟁이 일어나기 바로 전 1949년 여순 반란 사건으로 고아들과 떠도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이현필은 탁발 수도를 그만두고 전남 화순군 화학산 청소 마을에서 고아원을 시작하였다. 1950년 1월 광주에서 정인세 선생을 통해 YMCA를 중심으로 동광원(東光園)이란 이름의 고아원이 생기자 이현필과 그의 제자들은 동광원 고아들을 헌신적으로 섬겼고 결국 동광원은 이현필 선생의 운동 단체가 되었다. 그들은 오갈 데 없는 많은 사람들을 하룻밤씩 재워주는 운동을 벌였다. 광주 역전에서 헤매는 사람들을 데려다가 따뜻하게 대접하고 재워 보내는 이 사역은 후에 귀일원(歸一園)의 모체가 되었다. 여순 사건과 전쟁에 휘말린 민족의 역사 현장에는 고아뿐 아니라 과부, 장애인, 무의탁 노인, 나환자, 폐결핵 환자들이 들끓었다. 동광원의 고아 사역이 귀일원으로 통합되면서 처음 10여명을 돌보던 것이 600여명으로 늘어났다. 이현필 선생과 숨어서 수도하는 동광원 지체들에 대해 생각할 때 흔히 기도 밖에는 관심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그들은 가난한 사람과 사회적 부조리에 대한 걱정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역사의식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현재 동광원 식구들은 전국에 약 80명 가량이며 남녀 모두 독신 생활하는 공동체 형태로 살고 있다. 주로 전라도에 자리 잡고 있으며 남원에 본원이 있고 분원으로서 진도 분원, 함평 분원, 도암 분원, 광주 귀일원 분원, 그리고 경기도 벽제 계명산 분원이 있다.
말년에 이현필은 말 한마디도 못할 만큼 후두 결핵 때문에 무척 고생했다. 그는 자기 건강이 오래 못갈 줄 알고 모든 것을 버리고 어디 가서 혼자 죽고 싶었다. 그래서 서울로 가기로 작정하고 기차를 타고 그의 제자 셋째(한영우 집사)가 넝마주이하면서 살고 있는 신촌 거지 굴까지 업혀서 갔다. 그는 묘지에서 주어 온 칠성판을 깔고 누웠다. 밤이 되어 기온이 내려가면서 그는 죽은 사람처럼 핏기가 없어졌고, 그 자신도 운명의 시간을 기다리는 듯 하였다. 날이 새자 죽음을 넘긴 그는 필담으로 실로 놀라운 고백을 하였다.
“저는 그동안 잘못 믿어온 점을 고백합니다. 제게 있어선 선행이 귀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보혈이 귀할 뿐입니다. 제가 오늘 이대로 죽으면 저는 천국에서 예수님께 역적 같은 놈이 되리라고 느낍니다. 그동안 저는 저를 따르는 이들을 온통 철저한 율법주의자들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저는 위선자입니다. 저도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여 구원 얻은 사람이지 선행이나 금욕 고행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앞으로 주의 보혈을 의지하는 신앙으로만 나갈 것입니다.”그리고 무슨 고기든지 좋으니 먹을 고기를 사오라고 부탁했다. 셋째는 굴비 한 마리를 사서 동냥 다닐 때 쓰는 때 묻은 깡통에 물을 붓고 끓여 가져왔다. 이현필은 그 국물을 자기 입에 떠 넣어 달라고 말했다. 셋째는 시키는 대로 했다. 조기 국물은 후두 결핵으로 말 못하는 이현필의 목으로 넘어갔다. 그동안 한번도 육식 아니 커피 한잔 마시지 않던 그가 고기 국을 마신 것이다. 그때가 바로 1955년 가을이었다. 이것이 유명한 파계이다. 그런데 기적적인 일이 일어났다. 일주일도 못 버틴다는 후두의 병이 깨끗이 나은 것이다. 훗날 그는 이때의 심중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내가 저지른 파계 사실이 세상에 알려져 그동안 나의 금욕 고행의 모습 때문에 따르던 사람들이 격분하여 나를 위선자라 몰아 붙이며 몽둥이로 때리고 동광원에서 쫓아내도 할 수 없다는 각오로 고기를 먹었습니다.” 물론 이현필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보혈을 의지하는 신앙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세상사람 보기에 그는 금욕주의자 같았고 철저한 율법주의자처럼 보였다. 더욱이 곁에서 지켜본 제자들에게 비춰진 인상이 하나님의 은총이나 그리스도의 보혈보다 철저한 절제를 통해 자기완성을 추구하는 사람으로 오해될 것을 걱정하여 의도적으로 파계했던 것이다.
[이현필 선생 임종하신 집]
1964년 이현필은 광주 동광원에서 마지막 고별 집회를 여러 날 계속하고는 세상 떠날 때가 가까운 줄 알고는 급히 서울로 올라왔다. 그가 가장 사랑하고 사모하는 고장은 경기도 벽제 계명산 수녀원이었다. 그곳에 여 제자 정한나 수녀가 홀로 들어가 굴을 파고 살며 개척한 동광원 분원이 있고, 산수 좋은 뒷산 개울가에 현동완 총무의 별장 자리에 조그마한 건물 한 채가 있었다. 현 총무가 동광원에 기증한 것이다. 서울에 올라와서는 계명산 수녀원에서 줄곧 기도하면서 자기가 세상 떠날 것을 미리 말하며, 제자들에게 지극한 사랑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의 장래를 부탁하고 일일이 축복하였다.
최후의 순간이 왔다. 평생 영양실조로 시달린 그의 육체가 더 이상 오랜 병을 감당해내지 못하였다. 수녀들이 깨끗이 빨아 두었던 선생의 누더기 바지 저고리를 수의로 입혀 드렸다. 그러나 그는 입었던 옷을 다시 벗으며 “이것은 내가 깨끗이 입은 것이니 내가 죽으면 이 옷을 없애 버리지 말고 헐벗은 사람에게 주어 입게 하시오.”하고 말했다. 그리고 자기 시체에 수의를 입히지 말라고 부탁하였다. 또 “나는 죄인이니 내가 죽으면 관에 넣지 마시오. 죄인의 시체니까 거적대기에 싸서 아무나 함부로 밟고 다니도록 길가에 평토장해 주시오. 분상을 만들어 놓는 이는 화를 받을 것이오.”하고 유언하였다. 임종이 가까워지면서 몸은 불덩이 같이 뜨거워지고 숨은 곧 끊어질 것 같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는 계속해서 기도하였다. “주님, 저는 주님을 사랑하고자 무척 애썼습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고자 할 때마다 주님은 저를 피하셨습니다. 주님, 저는 지금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갑니다.” 바로 이때 이현필에게 신기한 기쁨의 물결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오, 기쁘다! 기쁘다! 오, 기뻐! 오매 못 참겠네. 아이고 기뻐!” 기쁨의 물결을 이겨내지 못한 이현필은 또 다시 외쳤다. “아이고 기뻐! 오, 기쁘다. 못 참겠네. 이 기쁨을 종로 네거리에라도 나가서 전하고 싶다.” 마지막 숨이 끊어지면서 주위를 둘러보며 “제가 먼저 갑니다. 다음에들 오시오!”하고 고요히 눈을 감았다. 1964년 3월 18일 새벽 3시였다. 그의 나이 52세였다. 꽃피고 새우는 봄의 문턱에서 이현필은 한 알의 밀알 씨가 되어 벽제 계명산에 묻혔다. 유영모 선생은 이 사실을 한시로 읊었다. “도암서기무등등 현필이공계명치”(道岩瑞氣無等騰 賢弼李公啓明致) “도암의 상서로운 기운이 무등산에 오르고 이현필 공이 벽제 계명산에서 마치다”라는 뜻이다. (박영호, 다석 유영모下, P145)
이현필의 평생 갈망과 목표는 순결과 자기완성 그리고 고난당하는 이웃에 대한 끊임없는 사랑이었다. 그는 복음 삼덕 곧 순결은 목숨보다 소중하며, 순명은 생명과 같은 것이고, 나 하나의 인격완성이 가장 귀한 것이요, 그것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순결 청빈 순명의 수도가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나아가서 그는 걱정하는 이웃이 있으면 자기도 밤새 잠 못 이루고 함께 걱정했고, 형제들이 기뻐할 때는 자기도 춤출 듯이 기뻐하였다. 우리도 이현필의 길을 가자. 이것이 바로 나사렛 예수의 길이리라. 아, 제 2의 이현필은 어디서 나올 것인가? 오늘 우린 맨발의 성자를 어디서 또 다시 찾아 볼 수 있을 것인가? 아, 맨발의 성자여, 한국 강산에 신음하는 겨레와 비틀거리는 한국교회를 위해 다시 오라.
지난 19일 오후 2시 경기도 벽제의 웃골(上谷)에 있는 신앙과 사랑의 공동체 '동광원(東光園)' 에서는 조촐한 추모행사가 열렸다.
이 공동체를 있게 한 '맨발의 성자' 이현필(1913~64) 선생의 37주기를 기념하는 자리였다. 이현필은 일생 거지나 병자와 함께 살다 병으로 숨진 '한국의 성 프란체스코' 로 불린다.
이 자리에는 박공순(71) 할머니(흔히 수녀로 불린다) 등 여덟명의 이곳 식구와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목회자들, 그리고 '풀무원' 의 창업자인 원경선씨, 서경원 전 국회의원 등 50여 명이 참석했다.
이현필의 애제자로 그의 생활철학인 순결.청빈.순명(順命)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총각' 김준호(76)씨의 모습도 보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토착신앙 공동체인 동광원은 50여년 전 스승 이세종의 뜻을 받들어 이현필이 만들었다. 고생을 복으로 알고 살며 봉사를 실천하는 노동 수도(修道)단체다. 이현필의 뜻을 따라 현재 이런 삶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전국적으로 50여명에 이른다.
이같은 실천적 사랑의 중심인물, 즉 정신적 지주가 다석 유영모다. 다석은 해방직후인 1948년 이현필을 만나 서로 감화를 주고 받는 선후배이자 동료가 됐다.
다석은 1년에 한두번씩은 전국에 산재해 있는 동광원을 돌며 설교를 하곤 했다. 벽제의 동광원도 예외는 아니어서 지금 있는 할머니 중에도 그 때를 기억하는 이가 많다. 박공순씨의 회고다.
" '철학박사님' 이어서 말씀이 어려웠지요. 그래도 열심히 설교를 듣고 나면 나중에 그 말씀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어요. 말씀이 힘찼는데, 특히 문자 한 자 가지고 뜻풀이를 많이 해주셨습니다. "
당시 수녀들은 다석을 '진달래 할아버지' 라 불렀다. 다석은 '아름답게 피기보다는 지는데 보람을 두는 꽃 같다' 며 진달래를 유독 좋아했는데, 이현필은 다석의 그 '진달래 정신' 이야말로 수녀들이 본받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석은 이들의 묵묵한 실천을 독려하는 뜻에서 가산도 쾌척했다. 서울 구기동의 집을 판 돈으로 광주직할시 동광원 본원(지금의 귀일원)에 있는 '진달래교회' 를 짓는 비용과 1만평의 터를 마련해 준 사람이 다석이었다.
다석과 이현필의 맥은 오북환(93.장로)-김준호를 비롯해 김준(75), 김정호(전 목포대 교수.71) 등으로 퍼져나갔다.
특히 박정희 정권 시절 새마을지도자연수원 원장을 지내는 등 실질적인 책임자였던 김준(전 전남대 교수)은 다석으로부터 '농촌으로 돌아가야 한다' 는 정신을 배웠다. 이 때문에 원시 새마을운동의 사상적 원류를 다석에서 찾는 사람도 있다.
이같은 사회적 실천 못지 않게 다석은 '인간됨' , 즉 도(道)를 향한 금욕수행에서도 본보기를 보였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그의 금욕정신을 그대로 실천하고 있는 사람이 김흥호(82.前 이화여대 교수)다.
김씨는 "그저 선생을 흉내낼 뿐이다" 고 겸손해 하지만 그 지극한 정진은 산란한 현대인들에게 경종이 될 만하다.
다석은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네가지 독소, 즉 탐욕과 치정(癡情).진에(瞋□.지식욕).허위(虛僞)를 끊기 위해서는 하루 한끼 먹고(一食), 정욕을 참고(一言), 바로 앉으며(一坐), 거짓이 없어야 한다(一仁)고 말했다. 다석은 인간의 하루살이 일생은 이처럼 늘 같아야 한다는 뜻에서 오늘을 '오!늘' 이라 풀이했다.
김흥호는 다석의 '오!늘사상' 을 생활 속에서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눈물만 흘렸습니다
최흥욱
한국의 숨은 성자
이세종 이현필 선생의 옛 터전
광주 귀일원, 화순 도암, 남원 동광원
서리내, 갈보리를 돌아보았습니다.
성인이 걸어간 자취를 밟아보고
몸으로 익혀온 그 제자들의 삶의 이야기들을
듣고 보고 만져보면서
잔잔한 감동으로 눈시울을 적셨습니다.
주님처럼 살고 주님처럼 고난 받고
주님처럼 이웃을 내몸과 같이 사랑하며
거룩하고 순결하고 청빈하며
예수가 그들의 전부였던 삶을 살아간 사람들
말하는 이 없어도 그 숨결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람은 서로 다르고 이름은 서로 같지 않아도
주님 그토록 사랑하기에 목숨을 아낄수 없었고
내 것을 가질 수 없었던 이들
이것이다 바로 이 길이다 부르짖으며
예수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 했던 참 그리스도인들
기도가 노동이요 노동이 기도인
자연에 파묻혀 깊이 묵상하며
주님을 찬양하며 살아간 진짜 예수꾼들
이러한 거룩한 사랑 앞에서
가슴 벅찬 감동이 영혼에 밀려와
난 말없이 눈물만 흘렸습니다.
이세종 선생
최흥욱
화순 도암에 가면
숨은 성자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동양적 신선 냄새가 풍기고
한국적 예수 냄새가 나는 사람
이세종 선생이 바로 그 사람이다
머슴살이 하면서 돈 모아 부자가 되어
천태산 기슭에 별장 같은 산당을 짓고 살더니
예수 믿은 후 자기에게 빚진 마을 사람들의 빚문서들을
불질러버리고 모조리 탕감해 주고
창고문 열어 쌓아두었던 양식과 재물을 가난한 이들에게
골고루 나눠주고, 땅들은 구제에 써 달라고 면사무소에
몽땅 바쳐버린 청빈의 길 걸어간 이세종 선생
마흔살 되던 어느날 예수 믿기 시작하여 글 깨우치고
성경 읽기 시작하더니 진리를 깨닫고는 밤이면 성경을
외우고 낮에는 마을 처녀 총각들 모아놓고
"파라 파라 깊이 파라!" 하면서 성경을 가르쳤던
한 책의 사람 이세종 선생
독사도 죽이지 않고
발밑에 깔린 개미의 죽음을 보고는 울었고
길을 뻗어나온 칡 넝쿨은 밟지 않고 옮겨 놓고 지나갔고
길가다가 마을 아이들이 팔을 벌려 길을 막고 지나가지
못하게하면 지나가지 않았으며 늘그막에는 깊은 산 속에서
움막 쌓고 살면서 쑥을 뜯어 먹고 지낸 모든 생명 가진 것을
경외한 넘치는 자비심의 사람 이세종 선생
젊은 아내를 얻어 부부가 아니라
누님이라 부르면 살았고
아내가 두번이나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갔는데 그때마다
아내의 살림살이를 옮겨다 주고
그뒤 계속 옛아내가 사는 집에 심방가서
전도하더니 두번이나 집 나간 아내를
받아들여 기어코 회개시킨
호세아를 닮은 사랑의 성자
자기는 이세상에서 아무 것도 아니라면서
이공(李空)으로 불리기를 원했고
예수 믿는 그날부터
다른 것은 알지 않기로 마음먹고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 한 분만 위해 살아갔던
오직 예수의 사람 이세종 선생
전남 화순 도암 마을에 가면
그를 만날 수 있다
사람아 사람아 예수의 사람아
한번 도암 골짜기 등광리 마을
천태산 바위 틈을 찾아가서
거기서 흠뻑 이공의 영기를
마시고 돌아오려무나
난 말없이 눈물만 흘렸습니다.
맨발의 성자 이현필 선생님의 생애(예수살기)
이현필과 동광원
“오 기쁘다! 기쁘다! 오 기뻐! 오매 못 참겠네.
아이고 기뻐!”
숨이 가라앉는 듯 하다가도 다시 돌아올 때마다
“이이고 기뻐! 오 기쁘다. 못 참겠네.
이 기쁨을 종로 네거리에라도 나가서 전하고 싶다.”고 외쳤다.
환희의 물결이 터져 나온 것이다.
성령의 기쁨이.... 임종 수일 전부터 기쁨이 밀려와서
어쩔 줄 모르더니 이제 절정에 이른 것이다.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보던 제자들에게
“먼저 갑니다. 다들 다음에 오시오!” 하며 고요히 눈을 감았다.
무릎을 꿇고 앉은 채 얼굴은 하늘을 향해 바라보면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때는 1964년 3월 18일 새벽 3시였다.
53세로 생을 마감한 성인 이현필선생의 임종시의 모습이었다.
마치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을 그린 성화의 모습이나
같았다고 한다.
맨발의 성자로 알려진 이현필은 1913년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권동리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3세 때 읍내에 있는 일본인 목사 관파(官波)에게 전도되어 복음을 접한 후, 1928년 광주농업실습학교 학생 때 강순명 목사를 통해 알게 된 도암의 ‘이세종’을 만나게 된다.
이현필은 남다르게 거룩한 삶을 동경하며 실천하려고
애썼기 때문에 그의 수제자가 되었고
이세종은 생전에 “내가 많은 사람과 이야기를 해봤지만 내말을 가장 빨리 이해하는 사람은 이현필 뿐이다”라고 하였다.
이세종과 달리 이현필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과 함께
수도공동체를 이루고 함께 동고동락하며 제자들을 훈련했다.
이현필 선생을 가장 초기부터 따랐던 분으로
당시 남원 읍내에서 목공소를 하고 있던 오북환 집사였다.
오북환집사는 이현필을 만나 그 감화력에 동화되어
목공소를 내놓고 집회장소로 삼았다. 그는 일생 이현필을 본받아 하나님의 충직한 종으로서 동광원을 가꾸며 헌신했다.
이현필은 나이 30세 전후
홀로 산에 은거하면서 금식과 명상생활을 하였다.
화순의 화학산과 남원의 지리산에서 수년씩
홀로 기도생활을 했다. 산에 파묻혀 기도하였고,
특별히 소명을 받아 거룩한 삶을 사모하는 10여명의 소년 소녀들을 제자로 삼아 성경을 가르치고 훈련하였다.
남원에서 몇 십리 들어가는 서리내(仙人來)라는 곳과
그 앞산을 타고 내려오면 갈보리라는 동산이 있는데
이곳에서 제자들과 생활하면서 기도 및 경건생활과 노동 그리고 성경공부 등을 통해 제자훈련을 시켰다.
남원 지방의 독신 기독교인들 중에서 그를 존경하고 따르고자
산으로 모여든 것인데 이것이 동광원의 모체가 되었다.
어머니 강남순과 딸 김금남 두 모녀는 그때부터
이현필을 스승으로 모시고 따랐다.
그때 김금남은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진로문제를 놓고 날마다 고민했다. 그래서 교회에 들어가 열심히 기도하던 중에 “네 몸을 산 제사로 드리라!”하는 신비한 음성을 들었다.
그리고 어머니와 함께 진로문제를 놓고 갈보리에서 백일기도를 했는데 이 기도를 통해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수도생활을 하기로 결심을 했다.
자나 깨나 산 제사를 드리는 방법이 무엇일까 생각하던 중에 마음에 응답되기를 일생 동정을 지켜 자신을 주님께 바치는 길이라는 깨달음이 왔다는 것이다.
그때 교육은 보통 보름씩 산중에서 행해졌다.
그는 제자들에게 예수의 정신을 본받는 경건훈련을 진행할 때 매우 엄격하고 철저했다.
그는 또한 제자들에게 자주독립정신, 청빈과 검소 생활을 배우게 했다. 성경을 배워주고 겸손과 사랑의 실천, 그리고 양심훈련을 시켰다. 먹을 것이 없던 때라 주로 풀뿌리와 쑥을 먹었다고 한다.
그 자신 스스로가 짚신을 신었고 산중 길을 걸을 때는 추운 겨울에도 맨발로 다녔으며, 단벌옷과 불을 때지 않는 차가운 방에서 지냈다. 청빈하고 가난하게 사셨던 예수의 삶을 본받고자 몸소 모범을 보인 것이다.
서래내는 남원 수지면에서 지리산을 등산하는 도중에 있는 경치가 뛰어난 곳인데 이현필은 그곳의 우거진 솔밭이나 갈대밭 속에 한 번 엎드리면 꿈적도 않고 일어날 줄 몰랐다고 한다.
산에 사는 까마귀가 송장인줄 알고 곁에 와서
‘까악, 까악’ 하고 울다가 그래도 움직이지 않으니
부리로 쿡쿡 찔렀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화학산 기도 3년, 지리산 기도 4년을 통해 겸손과 자비와 청빈의 수도자인 성 프란치스코의 모습을 닮아갔다.
이현필은 1948년에 훈련시킨 제자들과 함께 광주 YMCA로 가서 봉사했는데 이때 이들의 모습을 본 당시 YMCA 총무 정인세는 깊은 감동을 받아 바로 이현필을 따르게 되었다.
정인세는 말하기를 그가 만난 인물 중에서 이현필선생 만큼 그릇이 크고 깊은 인물은 없었으며 이현필선생의 그 깊은 속은 자기로서 도저히 측량 할 수 없었다고 했다.
이현필의 전기를 쓴 엄두섭 목사는 “보통 생각하기를 이현필 선생은 예수를 본받으려고 하신 분이고 하나님만 사모한 분이니 그것밖에는 다른 일은 관심이 없는 분인 줄 짐작하지만 그의 포부는 세계적으로 넓었고 애국심에 불탔으며 가난한 사람들과 사회적 부조리에 대한 걱정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했던 분”이라고 전한다.
이현필은 식사생활에 있어서 일식주의자였고
철저한 채식주의자였다. 하루 한 끼만 식사를 했는데 꼭 저녁에만 했다. 주로 금식으로 지내는 때도 많았다.
또한 그는 많은 신비적인 체험에 대해서는 일체 침묵하였고
꿈 이야기도 하지 않았으며 다만 성경을 가르쳤으며
하루 종일 하는 대화가 그대로 설교였다.
그는 모든 생명을 사랑하고 아끼는 자비심으로
빈대나 벼룩마저도 죽이지 않았다고 한다.
간혹 누가 아프다고 그이의 기도를 받고자 원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나는 신이 아니오.”하고 거절했다.
그리고 아프다는 이에게는
“아프게, 더 아프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오.” 하였다.
이세종으로부터 전수된 순결사상과 남녀유별에 대해서는
무서울 만큼 엄격했다.
이현필도 27세에 결혼을 했으나 그의 스승인 이세종 선생처럼 남매지간으로 지낼 것을 권유하고 실천했다.
후일 이현필 선생의 부인은 개가했다.
이러한 순결사상은 그를 따르는 결혼한 제자들에게는
참 견디기 힘든 문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현필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이 결단하여 순결생활을 지켰으며,
때로는 많은 사람이 남편과 집을 놔두고
아이들을 데리고 동광원에 들어와 산 사람들도 많다.
그래서 이현필 선생이 한 번 지나가면 온 동내, 도시가 난리가 났다. 자신의 부인과 생이별하는 일이 벌어지거나 잠자리를 거부하는 일이 생기자 여러 곳에서 비난이 잦아졌다.
특히 전라남도 교회 목사들은 교인들이 대부분 빠져 나가
이현필을 따라 다니자 그를 ‘산중파’ ‘금욕주의자’라 비난하고 그를 이단시하였다.
그러나 한 번이라도 그를 찾아와 대면한 목사들은 “이 길이다!”하고 소리쳤다. 사람들은 “이분은 참 믿음의 사람이다. 참 사랑의 사람이다. 성경말씀대로 살면 이렇게 된다. 이런 것이 믿는 것이요 사랑이다.” 하고 감격했다.
여순반란사건 이전에는 주로 경기도 능곡을 중심으로 농사와 탁발훈련과 전도활동을 했다. 그리고 복음전도대로서 그들은 또한 남원 순천 여수 강진 해남 광주 등 남부지방을 돌며 탁발하고 전도활동을 펼쳤다.
해남 교회에서 당시 청년 김준호는 의사를 지망하며 공부하고 있었는데 이현필 선생을 만나 평생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다.
김준호는 당시 교회 내에서 살면서 손수 교회청소를 담당하고
혼자 기도하고 성경 보면서 공부하던 학생이었다.
하루는 그 교회 집사가 “우리 교회에 참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이 올 것이오. 그는 광주에 사는데 목수 일을 하고 시래기죽만 먹으면서 성경을 공부하고 사는데 항상 기쁨이 충만하여 종일 하나님만 찬양하는 사람이라오.”하고 말해주었다.
그때가 1946년 가을이었다. 강단의 책상 위에 국화를 꺾어다 화병에 놓고 예배를 준비했다. 트럭을 타고 두 분이 내려왔는데 모두 한복 바지저고리를 입었고 한 분은 톱 망치 등 목수연장을 담은 걸망을 지고 내렸다. 이현필 선생과 오북환 집사라 했는데 맨발에 고무신을 신고 있었다.
청년 김준호는 속으로 ‘저런 분이 어떻게 믿기에 잘 믿는 사람일까’ 하고 있었는데 이현필선생이 설교하러 책상 앞으로 나와 앉았다. 그런데 그가 책상 위 화병에 놓여있는 국화를 보고는 깜짝 놀라서 아주 슬프고 안타까운 음성으로 “어찌하여 이 꽃을 꺾었습니까? 꽃은 꺾지 마시고 피어있는 그대로 두고 보셔야 되는데...”하시며 한참을 말없이 슬픈 표정으로 그 꽃을 바라보았다.
그때 그 순간에 김준호는 이현필선생의 그 말씀과 그 모습을 통해 온 몸을 울리는 한없는 감동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애틋함과 온 우주를 껴안는 깊은 사랑을 느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때부터 그는 이현필을 스승으로 모시고 평생을 따르면서 스승께서 보여주신 그 사랑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한다.
이현필은 제자를 사랑하여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서라면 맨발로 30리 50리 산길을 달려갔다.
6.25때는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미국인 유화례 선교사를 살리기 위해서 갖은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버스를 타거나 차를 탈 때면 언제나 제자들에게 가장 나중에 타자며 다른 사람들이 다 탄 후에야 차에 올랐다.
다른 사람들이 다 먼저 구원을 받은 후에 자기는 맨 마지막으로 구원의 방주에 올라타겠다는 철저한 이웃사랑이요 보살정신이었다.
이현필은 말년에 후두결핵으로 고생하였는데
생을 마감하기 전에 뜻하는 바가 있어 제자들에게
고깃국이 먹고 싶다고 말했다.
그래서 제자들은 평생 채식주의자였으며, 자신들에게도 채식주의를 가르친 스승의 말에 놀라면서도 임종이 가까운지라 말씀대로 생선국을 끓여 들였더니 겨우 두 숟갈을 넘겼다고 한다.
이것이 유명한 ‘파계’이다.
이현필은 자신을 따르던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한 참 믿음은
사라지고 이현필 자신이 걸어 왔던 삶을
율법적으로 좇지나 않을까 염려하였고
또 결핵을 앓고 있는 제자의 건강을 염려했던 것이다.
그는 또 제자들에게 선행위주의 노력이 아니라 “예수의 보혈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고백으로 가르쳤다.
이현필은 복음의 삼덕을 순결, 청빈, 순명으로 보았고
이를 위해 수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청빈’ 곧 가난에 대해 이해함에 있어 자신이 처한 상황을 극복하는 자족의 방법과 나눔을 통한 삶을 말했다.
그 실천적 장이 되었던 것이 바로 ‘동광원’이다.
동광원은 수도 공동체로서 본원은 남원에 있고
분원으로서 진도분원, 지지리 분원, 함평 분원, 도암 분원, 광주 귀일원 분원, 소화자매원, 전북 진달래의 집, 경기도 능곡과 벽제 계명산, 갈원 등지에서 그 제자들이 수도하고 있다.
이현필 선생의 영성을 말한다/ 심 상 봉 (목사, 임실제일교회)
감히 성자의 영성을 말씀드리는 것이 여러모로 송구스럽다. 9월 27일∼30일(3박4일)까지 선생님의 직제자이신 오북환 장로님과 김준호 선생님을 모시고, 지지리(전북 장수군 번암면) 깊고 깊은 산골짝에서 귀한 수련을 받으면서 과분한 원고 청탁을 받고 어쩔 수 없이 집필을 하게되었다.
이현필 선생의 스승이 된 호세아를 닮은 성자 이세종 선생님이 계시다. 이세종 선생은 전남 화순 도암에서,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문맹인으로서 남의 집에서 고용살이를 하셨다. 그 상황에서도 성경책을 구입하여 머슴들의 휴식처인 사랑방에서, 창세기 일장 일절부터 하루 밤에 한 절씩 암송하기를 몇 달을 하다가 국문을 터득하고, 성경(하나님의 말씀)읽는 산당까지 마련하여 탐독하다가 도통하였다. 밤이면 기도하고 밝아지면 말씀 읽다가 하는 생활을 수 개월을 하였다고 한다.
이후로 사람들이 광주에서부터 성경공부를 하기 위해 화순으로 모여들었다. "깊이 파라. 깊이 파라. 얕게 파면 너 죽는다. 뿌리도 깊이 팔수록 좁아진다. 좁은 길이다. 깊이파고 깊이 깨닫고 깊이 믿으라. 어설프게 파면 의심밖에 나는 것이 없다. 일본한테는 이웃나라를 못살게 하면 너희 나라가 망한다"며 외치다가 옥고를 겪기도 하였다.
이현필 선생은 1913년 1월 28일 탄생하였다. 이 선생도 같은 도암면이라 이세종 선생을 찾아다닐 때 부모님으로부터 많은 책망도 받으며 억압을 받았다. 아버지로부터 "미친놈들, 무식한 머슴살이한 사람에게서 무엇을 배우겠다고 쫓아가느냐?"고 핍박을 하였으나 이세종 선생의 유일한 제자가 된 것이다. 많이 오면 좋을 것 같으나 많으면 많을수록 방해꾼이 많아 석가도 3천명 중에 한 사람만 주의 집중하며 설법을 한 것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스승의 품격이나 용모가 뛰어났고 믿음의 열정도 불같이 확실했다고 한다.
「맨발의 성자」에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이세종과 이현필 두 인물을 두고 비교해 본다면, 이세종은 이현필보다 무식했으나 선(線)이 더 굵고 큰 인물이었다. 그가 그렇게 무식했으나 유명해진 것은 그는 성경을 한 번 읽고는 한번 실행하고야 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이 말씀을 대할 때 심은 대로 거두는 원리를 생각하면서 돼지는 돼지를 낳고 성자는 성자를 낳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현필 선생은 광주 양림동 변두리에 움막같은 큰집에 자리를 잡았고(지금의 봉선동 귀일원) 은혜생활을 갈망하는 순박한 심령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6.25동란이 지난 후 고아들과 과부들, 생활능력이 없는 자들까지 많은 사람들이 한집에서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가 전국 각처에 생활터전을 갖게 된 것이다. 지금도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숨어 있는 공동체가 10여곳이 있다. 이 선생은 제자들에게 정신을 넣어주려고 교육과 훈련을 시킬때는 철저했다. 자주 독립정신, 청빈과 검소한 생활로 훈련을 시키셨다. 이 선생의 감화력은 대단했다. 한 말씀에 남편을 사별하고 따르는 자들도 있었고, 부모도 아내도, 자신의 재산도 분토와 같이 버리고 따랐기 때문에 가정 파괴범이라는 악평을 받으면서 이단시되었다.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광주 YMCA총무로 봉직하는 정인세 전도사를 방문한 진짜 거지선생은, "당신의 가족의 영혼을 책임지겠으니 나를 따르라"말했다. 그 말에 감동을 받은 정 선생은 이제까지 이러한 책임성있고 신뢰감이 있는 말씀을 들은 적이 없었다고 하였다. 그는 후에 동광원 원장으로 봉직하시다 아버지 집으로 가셨다. 의식주(衣食住)를 해결했다고 할까, 초월했다고 할 수 있을까? 함께 있는 제자들이 먹을 수가 없을 정도로 하루 한끼(一日一食)식사를 하면서 옛날 구정물통에서 건져온 쓰레기 찌꺼기를 끓여먹고, 옷은 한번 입으면 다 떨어질 때까지 입기 때문에 몸에 기생하는 이가 밖으로 기어 나오면 잡아서 품안으로 넣어 주었다고 한다. 선생님의 방은 독채로 지었는데 벽은 가마니를 치고, 서까래는 해바라기대를 사용하여 주택을 마련했으니, 거지집에 거지옷이요, 거지밥이었으나 마음먹고 사람을 만났을 때는 그 영혼을 사로잡아, 새 길을 찾게되고 그 길을 따르게 된 것이다. 예화로 일본식민지시대에 천황 폐하라는 자가 비서에게 이 세상에 가장 무서운 것이 무언가라고 묻자, 한참 침묵 끝에 "목사가 제일 무섭습니다."
"무슨 허튼 소리를 하느냐?"
"진실한 자가 참 목사에게 가면 사람이 변화됩니다. 어떠한 수단이나 핍박, 고문을 가해도 절대로 후회를 하지 않는 사람으로써 어떻게 할 수가 없게 정직해 버립니다."
"그것이 참말이냐?"
"바로 우리 일본의 기독교인이 그렇습니다."라고 했다 한다. 지금도 일본에서는 교회가는 사람을 다르게 본다.
1948년 이현필 선생의 일행이 전남 해남에 처음 전도여행을 갔을 때의 모습은, 머리는 삭발하고 다 떨어진 바지저고리에 배낭을 짊어지고 손엔 깡통을 들고 맨발이었다. 거지치고는 상거지의 모습이다. 그러나 해남 교인들은 존경하며 영접하였다. 당시 군수 부인도 믿음의 식구로써 선지자 대접을 하였다. 일반 신도들이 이현필 선생을 알아보는 것은 해남읍 교회목사가 존경하고 알아모시기 때문이었다.(지금까지도 성자를 알아보는 눈이 없음은 하늘나라를 볼 수 없기 때문이요 이 몸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 증거이다.)
그는 강단에 오르지 않고 마루바닥에 정좌로 말씀증거를 하였기 때문에 작은 밥상이 마련되었다. 교회화단에서 가을 국화 몇 송이를 꺾어 화병에 꽂아 놓았을 때 이것을 보고 "꽃 한 송이가 꺾였다. 꽃 한 송이가 꺾였어"라고 말씀을 계속 반복하는 것이었다. 꺾이지 않아야 할 꽃이 나 때문에 꺾어졌다는 안타까운 말씀이었다. 다른 말씀이 있을까하고 기다리면 침묵을 깨고 "꺾이지 않을 꽃이 꺾였다."시며 이 세상에 많은 인생들 특별히 여성들의 한 풀이를 하셨다. 이 말씀은 당시 젊은 청년 김준호 선생의 마음을 두드렸다. 뜰에 핀 꽃 한 송이를 저렇게 아끼는 선생님이라면 자신의 인생을 맡길 만 하다고 믿고 따랐다. 이분이 지금도 생존해 계신 김준호 선생이시다.
그러나 가장 초기에 따른 제자는 오북환 장로이다. 오 장로께서는 전북 남원읍내에서 믿음의 형제들과 삼일목공소를 동업하였는데 일제 순경들의 감시도 수없이 받았다. 당시 오북환 집사와 동생 오동옥 목사는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오 장로의 목공소 2층에서는 이현필 선생의 집회가 계속되었고, 기성교회는 그 불길을 억제 할 수가 없으므로 이현필은 공산주의자라고 경찰에 고발을 하여 집회 중에 급습을 하기도 하였다. 2층 다락방을 덮쳤으나, 우연치 않게도 성경말씀을 가르치시던 이현필 선생은 바람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곳에는 남원에서 충실하게 살아가는 주부들 몇 명과 오북환 장로의 가정식구, 외지에서 온 사람 몇 명뿐이어서, 타지 사람들만 조사를 받았다. 남원읍내 기성교회는 좋은 방어책이 없으므로 부인들 단속하기에 바빴고, 교회목사는 교인 감시하는 비상이 걸렸었다고 한다. 남원만의 현상이 아니었다고 본다. 그때의 경종이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아서 동광원의 출입을 두려워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는 것입니다(고전4:20).)
우리들의 머리에는 대집회라하면 사람이 많이 모이고, 대중을 현혹시키는 기적을 보이는 마술사적이요 인간적인 야욕에서 구름같이 몰려다니는 것이 연상될 것이다. 그러나 이분들의 모임자리는 몇 사람이 모여 있어도 더 이상의 인간적 기대를 할 수 없을 만큼, 또 그 이하의 청렴한 생활을 할 수 없을 만큼의 청빈낙도의 경지이다. 이것은 주님의 역사이다. 인간의 의지나 학식이나, 다른 사람 흉내내는 원숭이 같은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욕망은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일반 대중은 순결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주님의 진리만 따라가면 아버지께서 역사 하시는 삶을 순응하게 되는 것인데 오늘의 현실은 너무나 잘못 갔다. 지도자들이 자신을 바로 보지 못하는 장님이 되었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는 고난의 길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여러분을 위해서 당하는 고난도 내가 맡은 한 몫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고난을 기꺼이 겪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해 겪어야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으로 채워가고 있는 것입니다"(골 1: 24). 예수 십자가의 고난이었다면 분명히 부활의 씨는 심겨진다고 믿었다. 당시만 해도 교회의 순결성이 보였으나 지도자들의 우매함 때문에 선생을 보는 눈이 부족했다고 생각된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같은 현상이다.
필자는 60세가 다가올 때 얼마나 고민이 되었는지, 죽어도 좋으니 이현필 선생 제자들의 공동생활에서 새로운 변화를 얻고자 교회를 도망치듯 떠났었다. 밤마다 수없이 들었다. 그러나 남의 이야기를 아무리 들어도 나에게는 아무 감각이 없었다. 아무도 나의 거처를 알 수 없는 곳에서 일일일식(一日一食)을 하고 머리도 깎아 버리고 신발도 옷도 주워입고 지냈다. 날마다 요한복음 3장 16절과 1장 5절, 11장 25절∼26절의 몇 마디 말씀과 씨름을 하다가 다 치워 버리고 3장 16절에 귀착되었다. 이 때 나 같은 죄인이 어디 있을까? 예수님의 사랑을 너무나도 모른 무지와 또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성령님의 도우심을 알지 못하는 무능력자라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예수를 믿는 것은, 관념적이 아니라 현실적이요 내 몸에서 예수님의 마음이 소화되었을 때, 예수의 피와 살이 되어서 겸손, 사랑, 관용, 아니 온 세상이 아름답게 되고(성령의 열매 갈 5: 22∼) 예수님의 것으로 발아되었을 때 성자님들의 뜻이 만분의 일이라도 믿어지는 듯 하였다.
우리가 남의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듣고 보고 했는가? 죄송스럽다. 더 이상 말씀을 드리지 않겠다. 이현필 선생의 기도문으로 끝을 맺는다.
주여!
저로 하여금 항상 죄인 됨을 기억케 하시옵소서
죄인 된 것을 깨닫는 시간이 제게 가장 행복 된 것은
구주가 제게 가까워지는 까닭이로소이다
주여!
항상 저의 약함을 깨닫게 하옵소서
저의 약함을 깨닫는 시간이 가장 제게 복된 것은
크신 권능이 물밀 듯이 찾아주시는 까닭이로소이다
이 험악한 세대에
이 두 가지 큰 위로가 저의 자랑이 되나이다
성령의 역사로 이 사람들이 다
주님 권능만 믿고 바라게 하옵소서
이 사람들만 아니라
참으로 주를 우러러보는 자들을 다
주님의 은사만 알게 하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들으소서.
우리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우리는 그리스도를 잘난 사람이거나 부자이거나 세상에서 존경받는 인물로 생각하거나 어떤 환시를 통해서만 나타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주변에 천대받고 멸시받는 그 분들 속에 계신다. (마태. 25:31-46. 참조.)
지금으로부터 60여년전 일제시대 종교의 자유가 없어진 그때 겨울, 25세의 한 청년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 겨울의 어두운 밤길을 걸으며 지리산 중턱을 넘고 있었다.
갑자기 닥친 눈보라에 그 청년은 기억을 더듬어가며 없어진 길을 찾아 걸어가고 있었다.
모진 눈바람속에 길을 잃고 생사의 갈림길에서 헤메이게 되었다.
한참을 눈바람과 사투를 하던 청년의 눈에 하나의 불빛이 비취었다. 아주 아득히 반딧불만하게 보인 불빛은 희망의 빛이었다. 그 빛을 따라 그 곳에 당도한 청년이 볼 때 그 집은 일반집이 아닌 갈대와 짚으로 만든 움막이었다.
청년은 “사람 살려 주세요”하고 소리쳤다.
안에서 인기척이 나며 사람이 나왔는데 그는 다름 아닌 문둥병자였다.
그는 청년을 반갑게 맞이하며 안으로 들어오라 하였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그는 안으로 들어 갈 수밖에 없었다.
방안에서 본 그의 모습은 손가락이 떨어져나가고 몸은 붓고 피고름이 흐르는 중병환자였다. 청년은 무섭기도 하고 전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이불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방문 바로 곁에 앉아 추위에 떨었다. 그는 청년을 향해 “청년, 이불속으로 들어오시오 몸이 얼겠소.” 그러나,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그대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흘러 몸이 점점 얼어오자 그는 이불속에 두다리를 넣었다.
그는 청년에게
“몸을 완전히 이불속에 넣어서 좀 녹이시오.”
청년은 피고름이 묻은 이불속에 몸을 넣기가 두려웠으나 추위에 어쩔 수 없어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이불속에서 몸이 풀리고 노독이 일어나, 몸은 천근 같이 무거워지고 열이 불같이 일어나며 갈증이 나고 목이타 냉수를 청하였다.
그는 청년에게 물을 떠 왔는데 피고름이 바가지에 묻어 있었다.
이것을 받아든 청년의 마음에 뜨거운 통회의 눈물이 흘렀다. 주님이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야기가 떠올랐다. (눅. 10:25-37)
청년은 평소에 건강한 사람이 병든 사람을 섬기는 줄은 알았지만 병들어 죽어가는 환자가 건강한 자기를 죽음에서 살려 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일이 없었다.
그는 목메인 음성으로 “제가, 잘못했습니다. 정말 잘못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영문을 모르는 그는 청년에게
“청년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청년은 그의 간호로 몸이 회복되어 일주일 후에는 완전히 나았다.
청년은 그에게
“정말 고맙습니다. 당신이 저를 살렸습니다. 저는 당신의 병과 모습 때문에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저의 생명을 사랑으로 살려주셨습니다. 용서하십시오.”
그는 청년에게
“당신은 저에게 친구였습니다. 이병에 걸려 모든 사람에게 버림받고 죽는 날까지 이산에 홀로 살려고 들어와서 움막을 짓고 삽니다. 그런데, 당신이 저를 찾아와서 일주일을 지내고 가니 청년! 정말 고맙소. 당신은 저에게 은인이며 귀한 손님 이셨습니다. 편안히 잘 가시오.”
청년은 움막을 나오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은 자기를 버리는 눈물이요. 영의 눈이 열리는 피의 눈물이었다.
바울이 다멕섹에서 주님을 만나고 변화(사도행전. 9:1-18. 롬. 8:18-23) 받은 것처럼 청년은 문둥병자로 나타나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변화받았다.
그는 그때에 받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변화를 받아 문둥병자, 고아, 과부, 거지등 이 세상사람들에게 멸시받고 천대받고 소외당하는 사람들을 섬기는 사랑의 화신이 되었다.
주님께서는 참사랑의 의미와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문둥병자를 통해 청년에게 알려 주셨다.(고전.13:6. 롬.12:9-13. 13:8-10. 참조)
청년은 이 사건을 계기로 옛사람이 아닌 새로 난 사람이 되었다.(골.3:9-11. 공동. 개역. 참조)
이 이야기는 이 현필 스승님께서 자신을 증언한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