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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 4장
1. 네 직무를 다하라(1-5)
디모데후서 4장은 사도 바울이 어두운 감옥에 갇혀서, 이제 죽을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고 쓰고 있는 내용입니다. 곧 바울에게는 디모데에게 마지막 남기는 유언과 같은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심정이 어떠했는가는 6절의 “전제와 같이 벌써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는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
전제는 제물 위에 붓는 포도주를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자신을 그러한 전제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제물 위에 붓는 포도주가 모두 부어지는 것처럼, 자신의 생명이 하나님을 위해, 모두 쏟아 부어진 상태를 바라보는 심정으로, 4장의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바울은 자신이 마지막으로 남기는 말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기 위해서,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1절 “하나님 앞과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엄히 명한다는 것은 감히 거부할 수 없는, 엄한 명령이라는 얘기가 아니겠습니까? 바울은 이처럼 엄히 명한다는 말을 함으로써, 바울의 말은 결코 가볍게 넘길 내용이 아니며, 바울의 말대로 해도 되고 안해도 그만인 것도 아니라, 인생이 다하는 날까지 신실하게 감당해야 할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왜 자신이 남기는 말을 두고, 엄히 명한다고까지 말하는 것입니까? 바울은 단지 마지막 말을 남기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디모데가 평생을 두고 걸어가야 할, 인생길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인생길은 성도로서 필히 가야하는 길이기에, 엄히 명한다는 말로서 경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1절에서 ‘하나님 앞과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라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은 바울이 지금 하고 있는 말의 권위가 어떠함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모든 판단은,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판단 기준은,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며, 결국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하여 세상을 심판하신 후에, 장차 나타나실 그리스도의 영광과 그의 나라에 참여할 자와, 영원한 사망에 처할 자로 나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디모데에게 권면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성도가 나아가야 할 정당한 길이기 때문에, 바울로서는 엄히 명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곧 디모데가 바울이 말하는 삶의 길이 아닌, 다른 길을 가는 것을 경계하는 말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디모데에게 남기는, 마지막 말은 무엇입니까? 2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바울이 디모데에게 엄히 명하고 있는 것은, 말씀을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항상 힘써야 할 일이, 말씀을 전파하는 것임을 엄히 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말씀을 전파하는 것은, 굳이 엄히 명하지 않아도 성도라면, 성도가 실천해야 할 부분이라고 인정을 할 것인데, 왜 엄히 명하는 것입니까? 단지 전도에 힘쓸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하는 말일까요?
우리는 말씀을 전파하는 것을, 성도의 본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전파하라는 말에서, 전도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전도해서 사람들을 교회로 오게 하고, 예수 믿게 하는 것이야 말로, 성도로서 해야 할 일이고 사명이라는 말을, 교회가 아주 많이 강조하였기 때문에, 말씀 전파, 곧 전도는 성도라면 해야 할 사명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말씀을 전파하는 것을 엄히 명하고 있기 때문에, 마치 전도하는 것을 성도가 하지 않으면 안될, 엄한 하나님의 명령인 것처럼 말함으로써, 교인들을 교회밖으로 내 보내며 사람들을 전도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씀을 전파하라고 엄히 명하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전도에 대한 사명을, 엄히 명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말씀 전파하는 것은, 단지 ‘예수 믿으라’는 말을 해서, 사람들을 교회로 데려오는 식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말씀전파는, 오래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역할은, 사람을 좋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죄에 대해 경책하고 경계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경책과 경계하심을 나타내고 증거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누가 자신을 경책하고 경계하는 말을 듣고 기분 좋아하겠습니까? 요즘 교회가 말하는 전도는 어떻게든 사람의 마음을 끌어서, 교회로 데려오는 방식입니다. 교회만 데려다 놓으면, 구원되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교회가 사람을 경책하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의 현실을 잘 말해주는 것이 3-4절의 말씀입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사도가 말하는 현대의 실상은,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 귀는 진리에서 멀어져 있고, 다만 자신을 즐겁게 해주고, 자기 욕심을 옹호해주는 말을 교훈으로 받아들입니다. 진리에서 돌이켜 생명이 없는, 허탄한 이야기를 즐겨하고 따르는 것이 현대인들의 실상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의 욕망을 파헤치며, 모든 악한 것과 허물을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이것이 전도자의 직무라는 것입니다.
결국 사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라는 것을, 엄히 명할 수밖에 없는 것은, 세상이 싫어하고, 듣지 않고 거부하는 것이, 바른 교훈이기 때문입니다. 곧 귀가 가려워서 자기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것이야 말로, 그들로부터 배척을 받고, 거부를 받는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에, 오래 참음이라는 말을 함께 하고 있는 것입니다.
5절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말씀을 전파하는 일에 왜 고난이 있습니까? 말씀을 전파하면 고난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니라, 필히 고난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말씀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교회 밖의 사람들이, 디모데의 교훈을 거부할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으로부터 그러한 배척과 고난을 받을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말하는 교회가 바른 교훈으로부터, 귀가 멀어져 있는 것이 당시의 실상이었고, 지금의 실상이기 때문입니다.
갈 1:8-10절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사도는 다른 복음에 대해 엄히 경계하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은 곧 저주와 연결됩니다. 그 다른 복음이라는 것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는 말인 것입니다. 사람을 바라보고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 말을 한다면, 그것은 분명 다른 교훈일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을 가리고, 사람들이 원하는 다른 하나님을 제시하는 거짓말이기 때문에, 복음을 가장한 다른 복음이며, 결국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나 따르는 자는, 생명과 상관이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히 4:12-13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이것이 말씀의 능력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며, 모든 허물과 부끄러움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내가 곧 심판을 받아야 할 자임을 철저히 알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어떠함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경책하고 경계하며 부끄럽게 합니다. 그것이 내 안에 말씀이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이 말씀을 전파하는 것이, 디모데의 직무이며, 우리의 직무인 것입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를 가지고 일하시면서, 자기 백성을 찾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전도자의 직무에만, 힘을 쏟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바른 교훈의 말씀을, 그대로 전파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말씀을 전파하는 것을 생각하기 이전에, 나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원하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나 자신부터 나를 경책하고 경계하는 말을 거부하고 싫어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전도자의 직무에 힘쓸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말씀을 전파하라는 이 말씀에서, 먼저 나 자신이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진심으로 원하고 사모하는지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2. 선한 싸움을 싸우고(6-8)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씀을 전파할 것을 엄히 명합니다. 말씀 전파를 엄히 명하는 이유는, 마지막 때의 세상 현실이,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않고, 자기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허탄한 이야기를 따라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세상 현실이 이러한 때, 말씀을 전파할 것을, 엄히 명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교훈 자체를 거부하는, 이방인들을 염두에 둔 말이 아닙니다. 교훈을 받아들이지만, 바른 교훈이 아니라 사람의 욕망을 옹호하는, 다른 교훈을 따르는 이가 많은 현실을 염두에 두고, 말씀을 전파하라고 엄히 명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싫어하고 외면하는 현실에서, 사람들을 교회로 데려오라는 의미로, 말씀을 전파하라고 하겠습니까? 그것도 하나님 앞과 예수 앞과 나타날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할 정도로 심각하게 말을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사도가 디모데에게 촉구하고 권면하는 것은,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싫어하는 현실에서, 디모데가 해야 할 직무는, 바른 말씀을 전파하는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도자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7절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 말을 보면 사도에게 있어서 말씀을 전파하는 것은, 곧 싸움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른 교훈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폭력을 휘둘렀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바른 교훈을 싫어하는 세력들에게 굴복하지 않고, 돌이 날아온다고 해도 바른 교훈을 전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 것이, 사도에게는 싸움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을 전파하는 직무를 하고 살아가는 성도에게, 선한 싸움은 필히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른 교훈을 싫어하는 세태 속에서, 바른 교훈을 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로부터 반대와 공격을 받아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 없는 것이기에, 결국 선한 싸움의 길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전도자의 일은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고 높임을 받는 일이 아닙니다. 사도가 복음을 전함으로써 당시의 사람들에게, 위대한 전도자로 칭송을 받고 대접을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가신 것처럼, 고난의 길을 걸어갔을 뿐입니다. 그러한 고난의 길에서도, 말씀을 향한 뜻을 굽히지 않는 것이, 선한 싸움인 것입니다.
자신을 좋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사도로 부름 받은 자신이 가야할 길임을 알고, 누가 뭐라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만 증명한 것이, 곧 바울이 믿음을 지킨 것이었고, 예수님을 만난 후로 평생을 달려온 길이기도 합니다. 전도자의 직무는 전도를 해서, 많은 사람을 교회로 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1:11-12절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이렇게 말한 것처럼, 진리의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굳게 지키십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전할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부름 받은 성도는, 어떤 고난도 두려워할 것 없이, 말씀만 전파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길을 달려가는 것이고, 선한 싸움에 참여된 성도입니다.
고린도전서 2:1-5절 사도 바울이 이런 말을 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사도가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떤 것이 무엇일까요? 사도는 복음을 전할 때,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곧 사람들이 듣고자 하는 말, 사람들을 기분 좋게 하고,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못박힘을 증거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 외의, 다른 것은 절대 설교하지 않기로 결심했는데, 혹시라도 인간적 지혜가 드러날까 굉장히 신경을 쏟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심히 떨었다”고 표현한 것을 보면, 사실 그도 자기 지혜로 전하고 싶은 유혹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그렇게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의, 갈채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사람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보면, 목사가 경계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목사가 사람들을 좋게 하는 말을 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자기 추종자를 끌어 모으기 위한 것에 불과합니다.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을 많이 확보함으로써, 그것을 교회 안에서의 자신의 힘으로 구축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목사는 말씀을 전파하기만 하면 됩니다. 자기 추종자를 계산한다면, 이미 그는 목사가 아닙니다. 목사가 가장 크게 두려워해야 할 것은, 혹시 강단에서 십자가 외에 다른 것을 전하는 것, 다른 말로 하면 교인 수를 한 명이라도 더 늘려보려고, 세상적 수단을 동원해 보고 싶은 유혹입니다.
그러나 목사는 복음은, 구원을 이루는 하나님의 능력일 뿐 아니라, 전도를 주관하는 이도 성령님이시며, 인간의 말은 단지 그 복음과 능력이 전해지는, 통로일 따름임을 알아야 합니다. 구태여 교회 성장 세미나에 열심히 참여할 필요 없이, 십자가만 전하면 된다는 굳은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교인을 늘려주는 것은, 하나님의 몫일 따름입니다. 복음 자체가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목사가 말씀 전파의 길에서 벗어나게 되고, 선한 싸움을 포기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바라보고, 교회를 바라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좀 더 큰 교회를 이룸으로써, 자신의 자존심을 높이고자 하는 강렬한 유혹이, 목사로 하여금 바른 교훈을 외면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염려는, 오늘 날의 목회자가 염려하는 것과, 판이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의 힘, 아니 심지어 자신의 지혜도 아니라, 기계의 힘을 빌려서 전합니다. 나아가 온갖 감언이설로, 교회 안에 자기 추종자 그룹을 만드는 일에 노력합니다. 교인을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 교인들의 마음에 들기 위한 것에만 신경을 씁니다. 교회의 양적인 성장을 위해선, 어떤 수단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선한 싸움을 싸우고, 사도로서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고 말하는, 사도의 말에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과연 지금 우리가 지키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봐야 합니다.
목사는 교인이 자기 말을 너무 잘 따를 때에, 두려워해야 합니다. 자기가 진정으로 십자가 복음만 제대로 전하고 있는지, 아니면 자신의 지혜로 열렬 추종자 그룹을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따져 보아야 합니다.
전자의 경우라 하더라도, 성도들이 진정으로 목사보다, 예수를 더 따르고자 하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자기의 지혜를 예수와 십자가라는 단어로, 그럴듯하게 포장해 전한 것일 뿐입니다.
8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의의 면류관은 바울이 달려간 길에만, 예비되어 있습니다. 곧 다른 길에는 의의 면류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의로우신 재판장은 오직 말씀을 기준으로 하여, 판단하실 뿐입니다. 인간을 육체대로 보지 않으시는 분이기에, 인간의 공적으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하나님을 알고, 주님이 나타나심을 사모하면서, 그의 나라를 소망하고 살아간다면, 절대로 바른 교훈을 외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를 좋게 하는 말씀이 아니라, 나를 책망하며 의로우신 주님만 바라보게 하는 말씀을 원할 것입니다.
말씀은 목사에게도 성도에게도, 자신의 전부를 걸어야 할 만큼 소중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우리를 생명이신 그리스도께로 이끌어 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싫어하고 거부한다고 해서, 내가 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이런 굳은 마음이, 성도를 선한 싸움의 길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가 말씀에 대해 이런 마음인가를 살펴보기 바랍니다.
3. 다 나를 버렸으나(9-18)
누군가에게 힘든 일이 생기면, 대부분의 사람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대개는 그 말을 ‘하나님께 맡기고, 믿음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이 해결해 주실 것이다’는 의미로 말합니다.
곧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기 때문에, 자기 백성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길로 인도하시는 분임을 믿고, 하나님이 어떤 길로 인도하시든, 설사 그 길이 자신의 모든 것을 잃는 길이라고 해도, 온전히 순종하겠다는 헌신의 마음을 가지라는 의미로 말하는 사람은 아주 드물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기대하면서, 하나님께 맡긴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고, 믿음을 이용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믿음은 결코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 내는 수단도 방법도 아닙니다. 믿음은 우리를 붙들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에, 순종하도록 하기 위한 능력인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를 통해서 그러한 믿음을 확인할 수 있지 않습니까?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후, 평생을 예수님을 위해 살았던 위대한 사도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도의 말년이 어떠합니까?
디모데후서는 바울이 죽음을 앞에 두고 쓴 편지라고 했습니다. 그것도 평소 바울을 흠모했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려 싸여, 그 업적에 대해 칭송을 받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흘리는 눈물 아래 죽는 것이 아니라, 옥에 갇혀서 외롭고 쓸쓸하게, 인생의 마지막을 맞이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하며, 믿음에 이끌림 받았던 사도의 인생입니다.
이러한 사도의 인생에는, 무엇하나 인간이 원하는 것은 담겨있지 않습니다. 대개는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된 결과만을 바라보며, 바울을 위대하다고 하고 흠모하기도 하지만, 바울은 그것으로 인해서 모진 매를 맞아야 했습니다.
결국 사람들의 관심은 고난은 담겨 있지 않고, 인간의 욕망만을 충족시키는, 사도의 위대한 업적에 있었던 것입니다. 쓴 것은 뱉어 버리고, 단 것만 삼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에 붙들려 살았던 바울의 인생은, 모든 사람들이 피하고 싶어 하는, 고난으로 인도받았음을 분명히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더군다나 본문을 보면 바울의 곁에는 남은 사람이 없습니다. 10-11절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이 내용을 보면, 바울 곁에 있던 사람들 중에 누가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바울을 떠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 바울이 받는 고난과 고통을 바라보면서, 바울처럼 예수님을 위해 살 마음이 없어서 떠났는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신령하고 위대한 일생을 살았다고 일컬어지는, 바울의 마지막은 이름도 빛도 없이, 모든 사람이 바울을 떠나간 가운데, 외롭게 끝나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이것을 주님을 위해 살았던 사도의 일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예수님 믿으면, 복 받고 잘 살 수 있습니다’라는 말을, 서슴없이 남발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예수님이 어떤 길을 가셨고, 사도 또한 어떤 길을 갔는가에 대해서는, 염두에 두지 않은 채, 인간의 욕망만 만족시키고자 하는, 허황된 말에 불과할 뿐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모아들여서, 교회를 키우고자 하는 욕망의 단체일 뿐인 것입니다.
믿음이 우리를 세상의 복으로 인도한다는 것은, 성경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약속을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상상해 낸 하나님일 뿐입니다.
교회가 증거할 것은, 예수님이 가신 길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이끌어 간, 사도의 길입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그러한 길로 인도 받는다고 해도, 순종해야 할 것을 증거해야 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러한 증거를 통해서, 누가 과연 예수님을 목자로 바라보고, 예수님만 따르는 참된 하나님의 백성인가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과연 옥에 갇혀서 쓸쓸히 죽음을 맞고 있는 바울 앞에서도, ‘예수 믿으면 복 받고 잘산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요? 그 말은 결국 바울 당신은, 예수를 잘못 믿었다는 말이 되지 않겠습니까?
13절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
이 내용을 보면, 세상을 떠나는 바울이 필요로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겉옷과 가죽종이에 쓴 것, 곧 하나님의 말씀만을 원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역시 세상을 떠날 때,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옷 한 벌과 예수님을 소망하는 믿음이면, 족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왜 그토록 세상 것을 갖지 못해, 안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까? 결국 인생이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를, 보지 않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17-18절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사도는 주께서 자신의 곁에 계시며, 자신에게 힘을 주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바울에게 힘을 주신 것은, 바울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이 듣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주님은 자기 백성을 세워서, 말씀을 전파하기 위해 일하시고, 붙드시고 힘주시는 분이시지, 우리 개인의 복을 위해 일하시는 분이 아닌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에게 힘을 주심으로써 선포된 말씀만, 온전히 전파되게 일하십니다. 또한 우리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지시면서, 그리스도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십니다. 이러한 주님의 일하심에, 우리가 원하는 다른 일을 첨가해서는 안됩니다.
병을 고쳐주고 귀신을 쫓아내 주는 예수님으로,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꿈꾸고 원하는 예수일 뿐,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에 오신, 메시아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는 아닌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사도 바울이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때에, 바울의 곁에 있던 사람은 누가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이 복음을 증거하고, 그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지만, 그것 때문에 바울이 자신의 교회 하나를 크게 만들었느냐는 것입니다.
오히려 바울을 버리고, 바울을 떠나는 현상만 있을 뿐인데, 사람들은 예수로 인해서 교회에 사람들이 늘어가는 것만을 꿈꿉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말하면서도, 예수님이 가신 길에 관심이 없고, 사도 바울을 얘기하면서도, 사도가 갔던 길에는 관심이 없는 것을, 과연 교회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은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로 향하게 합니다. 모든 관심은 주님이 행하신 은혜의 일에 두게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가신 길이, 우리에게 어떤 고난으로 다가온다고 해도, 마다하지 않고 순종하고자 하는 헌신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사도가 이 믿음에 붙들려 인도 받았기 때문에, 주님이 가신 길을 그대로 보여준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믿음을 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뭔가 다른 꿍꿍이속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다른 인생을 살고 싶어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자신의 편안함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리스도의 말씀이 전파되는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어 갈 뿐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교회 안에서, 몸의 관계를 통해서도 나타납니다. 나의 편함보다도 지체의 아픔과 힘듦을 생각하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헌신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증거하는 길로 인도해 가는 것입니다.
사도가 죽음을 앞둔 마지막까지 생각한 것은, 그리스도며 천국이었습니다. 이처럼 사도에게는 삶의 방향과 중심이 분명하고 뚜렷했기 때문에, 어떤 고난에서도 흔들림이 없이 굳건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방향도, 사도와 같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방향이 천국을 향해 있다면, 자연히 우리에게 소중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과연 이러한 삶의 방향을 선명하게 세우고, 사도가 갔던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까?
4. 모든 형제가 문안하느니라(19-22)
사람이 사람을 기억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무엇 때문에 어떤 사람은 싫어하는 사람으로, 어떤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으로 기억에 남는 것일까요? 사람이 사람을 상대하지 않고 살 수는 없습니다. 교회에서든 교회 밖에서든,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어떤 관계로든 사람을 만나고, 함께 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능하다면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과는, 부딪히지 않고 살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이 세상입니다. 사람은 내 마음대로, 내 입맛에 맞는 사람으로 골라가며, 관계를 맺고 교제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인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참으로 힘들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스스로의 자제력으로는, 미워하는 감정을 좋아하는 감정으로 바꿀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미워하는 사람은, 미운 마음 그대로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미운 마음을 간직한 채, 안 그런 척 한다는 것도 말이 안됩니다. 그것은 위선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성도의 모임을 교회,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지체라고 부르며, 형제라고 말합니다. 형제는 참으로 친밀하고 가까운 관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계속되는 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교회를 ‘형제’의 관계로 말할 때, 우리의 감정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곧 ‘너는 저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저 형제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갖고 있든 상관없이, 성경은 그리스도의 피를 나눈 형제로 일컫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된 우리는 나의 감정을 가지고, 형제를 대해서는 안됩니다. 오직 성경이 말하는 형제의 관계에, 순종해야할 의무만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나의 감정이 다스려져야 할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은 죽음을 앞두고, 여러 사람을 부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마지막 편지는 디모데후서입니다. 마지막 편지의 마지막 부분이기 때문에게, 사도에게는 본문이 세상에 남기는 마지막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마지막을 몇 사람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 끝내고 있습니다.
바울은 브리스가와 아굴라, 그리고 오네시보로 집에 문안하라고 합니다. 또한 에사드로와 드로비모라는 사람의 행적을 언급하고, 으불로와 부데와 리노와 글라우디아라는 사람의 이름도 언급을 합니다. 이들은 모두 바울에게 기억된 사람들입니다.
물론 바울이 기억한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신앙적인 사람은 아닙니다. 지난 시간에 말한 것처럼, 세상을 사랑해서 데살로니가로 간 데마라는 사람도 바울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또한 바울에게 해를 입힌 알렉산더란 이름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도 바울은 그들을 개인적인 감정으로 기억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에게 해를 입혔다는 것 때문에, 나쁜 사람으로 기억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1:15-18절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바울 당시에 바울에 대한 경쟁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바울의 입장이라면, 분명 그들에 대해 좋은 감정이 있지 않을 것입니다. 나를 적대시하는 사람인데, 좋은 마음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자신을 기준으로 그들을 바라보지 않고, 오직 복음을 기준으로만 바라봅니다. 그래서 어떤 마음으로 하던, 결국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이 아니냐며, 바울은 다만 그것으로 기뻐하겠다고 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파하면서,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고초를 겪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을 저주하는 말을 전혀 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박해하는 누구라 할지라도, 바울은 그들을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필요한 연약한 자로만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신앙이 있는 자로서의, 너그러움을 보였다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을 ‘죄인의 괴수’라고 말한 것처럼, 바울은 자신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필요한, 연약한 자로 바라보았습니다.
예수님의 긍휼이 아니면, 살 수 없는 것이 자신임을 알았기 때문에, 자신과 같이 연약한 자들에게도, 예수님의 긍휼이 필요하다는 것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을 박해했던 사람들도, 형제라고 부르게 했던 것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이 이름을 부르며 문안하는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바울에게 친분이 있거나, 평소 바울에게 잘해줬기 때문이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개인적 관계가 아니라, 자신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들을 문안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며 문안한다면 어떻겠습니까? 분명 기쁠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이름을 불러준다면, 그것은 자신이 예수님께 기억된 자임이 분명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도가 이름을 부른다면, 그 역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는 증거입니다. 성도는 이것만으로도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눅 10:20절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계 20:15절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이처럼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만으로도 기뻐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에 대한, 고마움을 가슴에 안고 사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가슴에 안고 사는 사람이라면, 은혜를 안고 있는 그 마음으로, 형제들을 대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의 은혜와 긍휼이 필요한 자로 바라보게 되고, 항상 그리스도의 은혜를 나타내고자 힘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형제이며 형제 사랑입니다.
설령 누군가의 나쁜 점만 보여서, 불쌍한 마음이 도무지 들지 않을 때에도, 최소한 나에게서 그들과 같거나 비슷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나라고 해서 그들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깨우침이 있을 때에, 문제를 자신으로부터 시작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깨달음이 있게 하기 위해서, 곧 진실한 성도의 성숙과 유익을 위해서, 교회 안에도 일부러 가시를 심어 놓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로 내가 누구를 미워하고 싫어한다고 해도, 그들이나 나나 도토리 키 재기로 다 같이 불완전하며, 연약한 존재라는 확신이 들지 않으면, 형제의 관계는 불가능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형제와 형제의 관계에 있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의 십자가 앞에 자신의 실체를, 그대로 내어 놓고 엎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오직 성령의 인도와 간섭이 있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무조건 그들을 용서할 마음을 달라거나, 그들이 변화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기 보다는, 이런 일들을 통해서 나에게, 영적인 유익과 깨우침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형제를 바라보는 자신의 마음을, 새롭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물론 끝까지 분쟁만 일삼고, 도저히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일을 하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교회에 큰 문제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도 당장 그들과 맞서 싸우겠다는 결심보다 먼저, 교회 안에는 알곡과 쭉정이가 반드시 함께 있게 마련이라는 생각부터 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복음을 아예 모르는 자가, 교회 안에 들어 온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무슨 뜻입니까? 그들도 전도가 필요하며, 복음이 필요한 대상으로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밖에서는 전도하러 교도소까지 찾아가고, 사랑으로 대한다고 하면서, 교회 안에서는 조금만 문제가 있어도, 외면하려고 한다면 이상하지 않습니까?
교회는 세상의 문제와는 상관없이, 오직 생명의 문제로 모인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기억하는 데는, ‘나’가 기준이 되면 안됩니다. 다만 다함께 그리스도의 은혜와 긍휼이 필요한 연약한 자로서, 예수님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는 관계로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나 또한 연약한 자임을 날마다 되새기면서, 이런 나의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된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가를 생각하고, 다함께 그 기쁨을 누릴 자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