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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풍의 소리
信天함석헌
들에는 곡식이 누렇게 익어 겸손과 평화로 고개를 숙여 어서 거둬들여지기를 기다리고 있고, 서울 길거리에는 떨어지는 낙엽이 마치 싸움에 지고 쫓겨가는 무리같이 슬픔과 겁에 죽은 빛으로 허둥지둥 굴러가고 있습니다. 누리의 씨알들을 보고 말이라도 해주는 것 같습니다. 알이 들면 저렇습니다. 알이 못들면 이렇습니다.
여러분 긴 여름 동안 더위도 사나왔고 폭풍우도 지독했습니다. 속을 들이기에 얼마나 수고들 하셨습니까? 그러나 이제는 때가 늦은 가을, 요수진이한담청(僚水盡而寒潭淸)이요 연광응이모산자(煙光凝而暮山紫)라, 웅덩이 흙물은 말라 깊은 소 차갑게 가라앉았고 저녁연기 햇빛에 뚫려 푸른 산 모습 하늘가에 뚜렷합니다. 우리 마음도 차게 뚫려 먼 앞을 내다볼 만한 때입니다.
그러나 그만입니까? 무엇보다도 서풍이 불어서 좋습니다. 소리를 들을 때입니다. 사나운 서풍이 가져오는 땅의 소리, 하늘의 소리, 그리고 역사의 소리, 거기는 심판이 있습니다. 예언이 있습니다. 씨알을 신이 나게 하는 동원령(動員令)이 있습니다.
셸리의 서풍노래를 또 한 번 생각하지 않고야 어찌 이 가을을 보낼 수 있습니까?
“오 사나운 서풍이여”
“너 가을 생명의 입김이여
……………………
“사나운 영이여, 아니 가는 곳이 없는 이여”
“무너뜨리면서 또 간수해주는 이여
“들으라, 오, 들으라!”
그는 서풍을 보고 무너뜨리면서 또 간수해준다고 했습니다. 시든 잎새를 흔들어 떨어뜨려 요술쟁이가 도깨비들을 몰아치우듯 쓸어버리니 무너뜨리는 자란 말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여문 씨알들을 실어다 땅속에 고이 묻어오는 새봄 싹을 낼 때까지 고요히 기다리고 있게 하니 간수해주는 자란 말입니다.
그는 유럽 천지에 낭만주의가 한창이던 때, 그중에서도 가장 찬란했던 영국에 나서, 어려서 벌써 굳어진 사회제도에 반항하여 ‘미치광이’ 란 별명을 듣다가 대학에서 쫓겨났고, 서른도 못돼서 벌써 “너처럼 그렇게 억세고 날쌔고 굽힐 줄 모르던 내가” “인생의 가시밭에 엎어졌구나, 피 흘리는구나” “시간의 무거운 짐이 나를 얽매고 덮어 눌렀구나” 하면서 서풍을 향해 부르짖었습니다. “나를 일으켜주려무나, 저 잎새처럼, 물결처럼, 구름처럼” “이 무서운 영아, 네가 내 영이 돼 주려무나! 네가 나려무나, 야, 이 억척같은 놈아!” 하고 애가 타서 했습니다. 그러다 못해 나중에는,
“내 이 죽은 사상을, 마치 시든 잎새처럼,
“하늘가에 몰아쳐. 새 생명을 넣어주려무나
“그리하여, 마치 꺼지지 않는 아궁이에서
“재와 불꽃을 한꺼번에 날리듯이
“나의 말들을 인류 속에 불어 흩어주려무나!
“이 내 입을 통해 깨지 못하고 있는 지구 위에
“예언의 나팔이 돼주려무나!
“오, 바람아,
“겨울이 만약 온다면야, 봄이 어찌 멀었겠냐?”
했습니다. 그는 정말 혁명의 시인이었습니다.
지금도 서풍이 붑니다. 땅 위, 나뭇가지 사이, 물결 위에만 아니라. 역사 위에, 씨알 사이에, 시대의 물결 위에 사나운 서풍이 불고 있습니다.
앞으로 100년이면 지구 위에 사람의 종자가 155억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낳아라, 퍼져라” 하는 인류 위에 서풍 아니겠습니까?
반가운 소식을 기대하며 뜯는 편지가 손 안에서 폭탄으로 되어 터져 목숨을 뺏는 세상이 됐다지, 이제 핵폭탄이 깡패들의 손에 들어갈 염려가 많게 됐다지, 그러니 이것이 못할 것이 없다고 까불대는 기술 문명 위에 서풍 아니겠습니까?
정치는 어떻고 도덕 종교는 어떻습니까?
민주주의 미국에 닉슨, 맥거번의 대통령 자리 싸움이 뇌물, 탐정, 욕지거리의 싸움으로 돼 간답니다. 라인강 가에 기적을 일으켰고 동서화해 외교의 첫돌을 놓았다 해서 자랑하던 서독에서도 브란트, 바젤의 싸움이 역시 돈과 흉계의 싸움으로 돼가고 있답니다. 그만입니까? 어느 나라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극도의 타락입니다. 이제 도리도 이성도 없습니다. 이 문명의 앞길이 어디 있습니까? 셸리의 표현을 빌어서 한다면,
“푸른 지중해의 여름 꿈이 깨지고
“그(서풍) 오는 앞에 대서양의 균형된 힘들은
“끊어진 낭떠러지로 갈려 일어서 길을 내고
“바다 속의 해조의 가지와 꽃조차
“그 소리에 놀라 갑자기 맥빠져 빛을 잃고
“벌벌 떨고 넋을 잃는다.”
서풍, “아니 가는 곳이 없는 사나운 영”인, “그 답답한 기운 속에서 캄캄한 비, 불, 우박이 쏟아져 나오는” 그 서풍은 혁명의 바람입니다. 그 소식을 듣고 낡아 죽어가는 시대와 그 속에 새처럼 깃들이는 권력과 권속들이 무서워 떠는 모양을 그린 것입니다.
天陰欲雨鳥相語(천음욕우조상어) 날 흐려 비 오려니 새란 놈들 지저귄다.
老樹知情風自哀(로수지정풍자애) 늙은 나무사정 알아 바람절로 슬프구나.
취하는 것들은 세상이 늘 그런 줄 알아 취하다가 망할 때에 가서야 아우성을 치지만, 아는 마음은 압니다. 슬프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씨알에게는 걱정이 없습니다. 속에 알이 여무지게 찬 씨알은 죽는 법이 없습니다. 도리어 서풍이 더욱더 사납게 불어주기를 바랍니다. 혁명의 사나운 바람이 불게 되면 평소에 “친애하는 국민”이라고 하며 씨알을 속이던 지배자들은 사정없이 씨알을 죽을 따에 버립니다. 그러나 그 죽을 자리가 사는 자리가 됩니다, 씨알이 정말 여물기만 했다면 제 무게로 땅 속 깊이 들어갑니다. 거기는 심판의 불이 들어오지 못하는 생명의 지성소(至聖所)가 있습니다. 거기 신비론 지혜가 있습니다. 이것을 해주는 것이 서풍입니다. 그러면 오래지 않아 그의 여동생인 봄이 와서 나팔을 불어 자는 씨알을 깨워 천지를 새 생명의 빛과 향기로 덮게 합니다.
창조하는 힘은 씨알에게만 있습니다. 모든 시대를 죽음에서 건져내어 새 문화로 부활하게 하는 영원한 역사의 메시아는 씨알 속에 숨어 있습니다. 다만 하늘소리 땅소리가 그 속에서 결합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땅에서 올라온 양분과 하늘에서 내려온 빛이 열매 속에서 하나로 결합되듯 씨알은 지나간 역사를 씹어 그 의미를 깨닫고 영원한 앞을 내다보아 비전을 얻어 그것을 자기 속에서 결합시켜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망하는 로마의 군대처럼 겉으로 아무리 강한 듯해도 낙엽처럼 떨어지는 수밖에 없습니다.
여름날에 영화를 누렸던 잎과 꽃은 썩어짐으로만 제 할 일을 합니다. 부자는 지옥으로 가는 것이 뜻입니다. 그 대신 구원의 메시아는 이 세상에서는 고난을 당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씨알 속에 시대 구원의 역사적 메시아가 숨는 것은 그들이 여기서 천대를 받고 고난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그대로 참고 받는 것이 우리의 속의 알들임입니다.
우리는 이제 이 서풍의 소리를 바로 들어야 합니다.
일엽지추(一葉知秋)라
오동잎 하나가 떨어지는 것을 보았으면 천지에 가을이 온 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의 사태가 갑자기 벌어집니다. 그것은 하나의 오동잎입니다. 떨어진 것은 하나의 물든 오동잎이지만 그 하나만을 보고 감상에 빠졌다가는 다가오는 겨울을 바로 넘길 수가 없습니다. 추위 에 가장 재빠른 것이 오동입니다. 그러나 그 뒤에는 오동만 아니라 참나무, 전나무, 천지의 모든 숲을 뒤흔들어 그 헐을 벗기는 무서운 겨울이 서 있습니다. 눈 아닌 눈으로 내다보고 귀 아닌 귀로 뚫러 들어야 합니다. 그런다면 서풍은 무섭지만 또 무서운 것만이 아닙니다. 천하와 숲을 헐을 벗기지만 또 그 대신 그 억억 만만의 가지를 진동시켜 “슬프면서도 시원한” 하늘 소리를 내게 합니다, 그것을 알고 그것을 하는 것이 씨알입니다.
우리는 이 나라를 건져야 합니다. 우리밖에 없습니다. 세월 좋을 때에 나무통같이 서던 것들, 거기 붙어 잎같이 꽃같이 영화를 누리던 것들, 그 속에 새처럼 나비처럼 지저귀던 것들, 혁명의 폭풍 오면 다 그 존재가 없습니다. 물에도, 불에도, 칼에도, 약에도, 죽지 않고 남는 것은 하늘 소리를 속에 간직했던 낮고 약하던 씨알들 뿐입니다.
그러나 위기에 빠진 것은 우리나라만이 아닙니다. 온 세계 인류가 다 그렇습니다. 홑으로 사람만 아닙니다. 모든 생명의 씨가 한가지로 위급한 운명에 빠졌습니다. 생각하는 이 인간의 장난 끝에 잘못하다가는 10억년 자라서 오늘에 이른 큰 진화의 생명나무가 씨채 망해버리게 됐습니다. 이 나라의 어려움은 그래서 온 것입니다. 전신에 들어 있는 피가 썩어서 곪아터진 것이 우리 한국이라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세계를 구원함 없이 이 나라를 구원할 수 없고 이 나라를 살리지 않고 우주를 살려낼 길이 없습니다. 여기 우리의 거룩한 사명이 있습니다.
알아야 합니다. 앞으로 더 심한 환란이 올 것입니다. 일이 차차 어려워질 때 소위 강대국이라는 것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보다도 더 노골적으로 저만 살겠다 몸부림칠 것입니다. 정치란 것이 무엇 입니까? 따져 들어가면 한마디로 어려움을 남에게 떠밀고 나만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치로 문제해결 절대 되지 않습니다. 정치는 욕심의 총결산입니다. 욕심 있는 사람 문제를 바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습니다. 더구나 오늘의 정치는 점점 더 폭력주의기 때문에 인류의 멸망을 재촉할지언정 결코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 주도권을 쥐는 나라도 그렇거든 하물며 거기 따라지 노릇을 하는 약소국가들의 정치란 참말 가없이 어리석은 것입니다. 보십시오. 오늘날 월남처럼 세계의 비극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또 그처럼 미친 희극이 어디 있습니까? 정치란 참 악독한 것입니다. 남을 망하게 만들어놓고 그리고는 또 그 망하는 것을 비웃습니다. 정치 만능주의로 줄달음을 쳐온 이 문명이 멸망에 빠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첫째 할 것은 결코 정치에 기대를 걸지 않는 일입니다. 기대를 걸기 때문에 거기 종이 됩니다. 종이 돼서는 우리 거룩한 사명을 다하지 못합니다. 자유 해야 합니다. 내가 거기 기대를 걸지 않는데 어떤 놈이 나를 지배합니까? 떨어져야 합니다. 무엇에도 붙어 있어서는 아니됩니다. 떨어져 나대로 스스로 서는 것이 자유입니다. 씨알은 떨어지는 것입니다. 자라기 위해 한때 붙어 있는 데가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붙어 있을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열매는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입니다. 가을이 와도 떨어지지 못하는 것은 열매가 아닙니다. 쭈그렁 밤송이 3년을 달립니다. 우리는 우리가 생겨났던 어머니 탯집도 버리고 배꼽의 줄이 떨어져 버렸는데 그 밖의 또 무슨 줄이 우리를 영원히 매둘 것이 있습니까? 배꼽 줄이 떨어져야 사람이 되듯이 정 치의 줄도 떨어져야 사람입니다. 영원히 놔주지 않으려면 어머니도 원수입니다. 하물며 사람이 만든 정치겠습니까?
정치는 이날껏 우리의 탯집 노릇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인간은 자랐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거기서 나와야 합니다. 온 세계의 젊은이들이 반항주의로 나가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당장 보기에는 혼란인 듯하나 그것이 자라는 길입니다. 오늘 인류의 중심 문제는 정치에서의 해방입니다. 그 문제를 대표적으로 받아든 것이 우리입니다.
오해해서는 아니됩니다. 씨알이 정치와 싸우는 것은 원수같이 뵈지만 절대로 원수가 돼서 하는 일 아닙니다. 그것이 오묘한 생명의 법칙입니다. 아이가 태속에서 요동을 치는 것은 어머니가 미워서도 어머니를 죽이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생명의 절대의 아버지가 명령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때 까지는 생리적으로만 아버지요 어머니였지만 이제부터는 더 높이 깊이 정신적으로 아버지 어머니 아들이 되기 위해 그러는 것입니다. 우리 지각과 감정은 생리에 붙은 것이므로 옅을 수밖에 없습니다. 탯집에 혁명이 일어나면 서로 원수같이 생명을 걸고 싸웁니다. 그러나 한 순간 후에 아기가 나오면 새 질서 속에서 서로 기쁘고 보다 높은 사랑이 나옵니다. 우리 국가 살림도 꼭 같습니다. 우리가 하면서 하는 일의 의미를 모르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나 많은 할머니의 가르침을 받아 젊은 어머니가 참고 아들을 낳듯이 우리도 지나간 시대의 교훈을 받아 이 위기를 넓은 도량과 참는 마음으로 이겨야 합니다.
씨알의 정치에서의 해방, 정치만능주의의 역사 무대에서의 퇴각, 여기에 오늘의 나갈 길이 있습니다.
가장 경계할 것이 근시가 되는 일과 조급한 생각을 가지는 일입니다.
혁명은 매양 이 때문에 잘못됩니다. 땅 밑에 들어가서, 아닙니다. 하늘 위에 올라가서, 또 아닙니다. 하늘 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아래 위가 서로 다른 것 아닙니다. 다 우리 속에 있습니다. 우리 속에 들어가서, 조용히 프랑스 대혁명을 지도했던 당통, 로베스피에르, 마라에게 물어보십시오. 반드시 한숨 쉬면서 옷깃을 여미면서 그러나 또 빙그레 웃으면서 우리가 잘못했어…… 할 것 입니다. 프랑스 대혁명에서 이미 그렇거든 다른 것을 말할 것 있습니까? 사람은 사람이기에 발 앞을 볼 수밖에 없고 현실에 매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또 사람은 나로만 사는 것 아니고 이제만 사는 것 아니기 때문에 전체를 생각하고 영원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람입니다. 먹어야 살지만 먹으려면 맛을 알아야 하지요, 맛을 알려면 까닭을 알아야지요, 사람은 결국 뜻에 사는 것입니다. 뜻을 위해서는 참아야 하고 비어야 합니다.
다급한 우리 일이지만, 우리밖에 우리를 위해줄 사람 없는 듯이 뵈지만, 절대로 잔재주나 그때 그때를 넘겨가는 정책적인 생각만 해서는 아니됩니다. 생명은 물론 귀하지만, 천금일신(千金一身) 신외무물(身外無物)이라지만, 결코 급한 생각을 해서 금새 먹을 꼿감만을 찾아서는 아니됩니다. 인생의 가로 자른 토막만을 보아서는 아니됩니다. 높은데 올라 세계의 대세의 굽이치는 흐름을 굽어봐야 합니다. 씨알은 첨부터 누리의 씨알이지 골짜기 씨알이 아닙니다. 지금은 과학이 발달해서 극대와 극소의 세계를 다 보여줍니다. 이왕 가까이 보려거든 생명의 슬라이드를 갈아 현미경에 놓고 보십시오. 그러면 골목의 현실이 참이 아닌 것을 알 것입니다. 현미경을 볼대로 보고, 시험관을 흔들대로 흔들고, 역사의 페이지를 뒤집을 대로 뒤집고 나서 까만 하늘을 무심코 바라고 앉을 때 여러분은 자신 속에 움직임을 느낄 것입니다. 어반중한 중간만이 잘못입니다.
현대사가 우리게 대해 이렇게까지 잔인하고 냉혹한 것은 우리를 정치적으로 절망에 빠치기 위해서인지 모릅니다. 내가 늘 말하듯이 우리 는 세계사의 속죄양입니다. 우리 죄, 저의 죄, 긴 것, 아닌 것을 모두 몰아다가 우리 등에 처싣고는 우리를 역사의 빈들로 차 내몰았습니다. 절망을 어떻게 아니합니까? 나는 이제 어리석게 담대해집니다. 절망합시다! 사람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정칙에서 절망해서 죄될 것이 무엇이며 부끄러울 것인들 무엇입니까? 용감하게 절망합시다. 그리고 새 길을 열읍시다. 이만큼 해봤으면 민주주의고 공산주의고간에 도대체 근대식의 이런 정치로 인류를 멸망으로 이끄는 것밖에 없다고 잘라 말한다 해서 감히 무식하다 책망할 사람 없을 것입니다.
절망하자 하면 정치하는 사람들은 나더러 민족의 용기를 떨어친다 욕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봅시다. 이런 식의 정치 30년 동안 해보아서 얻은 것이 무엇입니까? 일이 잘된다면 이렇게 어려운 문제만 뒤에 뒤를 이어 나오겠습니까? 이제야말로 정말 용감해질 때입니다. 멸망의 도시에서는 용감히 절망하고 물러나는 것이 사는 길입니다. 내가 보기에는 민족의 용기는 줄어들었지 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책임이 어디 있느냐 하면 주로 정치에 있습니다. 정치하려는 사람들이 나쁘다기보다 이런 식의 정치가 사람을 그렇게 만듭니다.
정치에 절망하자면 도무지 정치 없이 사는 유토피아를 바라서 하는 말 아닙니다. 정치는 또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따위 정치는 아닐 것입니다. 민중을 희생시키면서 나라를 강하게 만들자는 이런 따위 정치 말고 새로운 정치가 나오기 위해 이것을 깨끗이 버리자는 말입니다. 이날껏 어느 나라에서나 정치는 씨들을 무시하고 버리는데 씨들은 그래도 정치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그래서 좋았는지 모르나 지금은 그럴수록 악을 길러주는 것밖에 없습니다. 지금 정치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은 이미 거기 굳어졌고 거기 개인적인 이해까지 뗄 수없이 붙었기 때문에 그들은 아마 그 낡은 배와 운명을 같이하려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의 주인인 씨은 그런 잘못된 의리에 종이 돼서는 아니됩니다. 이날껏 배를 잘못 저어 파선케 한 그들을 불쌍히 여겨 구해주기 위해서라도 정치는 근본적으로 달라질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세계 역사의 나가는 방향, 과학의 발달해 나가는 앞날의 모양, 기술 문명의 장래가 어떠할 것이냐 하는 내다봄, 이런 것들을 생각하지 않고, 제 나라 남의 나라의 수출입의 숫자, 군비 경쟁의 관계, 외교 방침, 국제회의에서 얻는 투표수, 스파이 싸움, 이런 데만 신경을 쓰고 국민에게서 받은 세금을 쓰고, 인적 자원을 거기 소비하고, 이런 식으로는 절대로 살 길은 오지 않습니다. 이것으로 복잡 가혹한 국제관계를 우리게 유리하도록 풀 수가 없을 것입니다.
새 문명, 새 세계관, 새 인생관, 새 국가를 세우지 않고 우리 살 길만을 찾을 재주가 없게 됐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정치에서는 나올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근본적인 혁명을 의미하는 일입니다. 지금의 정치에서 해방이 돼서만 될 수 있는 일입니다.
인간이 질이 달라졌습니다. 그 때문에 사람을 다스리는 것을 목적으로 하던 옛날의 정치는 이제 인간의 나가는 길을 방해하는 악이 돼버렸습니다. 태 안의 아기와 태 밖에 나온 아기는 가죽 한꺼풀의 사이지만 질적으로 다릅니다. 나온 후에도 배꼽 줄이 아니 떨어지면 아기도 어머니도 다 죽습니다. 지금 인류가 직면한 것은 이러한 진통입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 책상 앞에 떨어지는 신문은 노벨 문학상을 받을 사람으로 뽑힌 것이 하인리히 뵐이라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를 소개하는 제목을 “대중과 전쟁 반대의 세계” 라고 붙였습니다. 이에서 더 현 정치와 정반대의 입장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작가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노벨상의 수상자로 뽑혔다는 것은 오늘의 인간이 어떤 방향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가장 잘 표시하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거기 비추어보면 정치가들은 열심은 열심이지만 말을 거꾸로 타고 앉은 사람들입니다.
이날까지 인간을 속여 온 큰 허깨비가 있다면, 그것은 정치가 역사를 만들거니 하는 생각입니다. 이것은 완전히 망상입니다. 정치가 역사를 만드는 것 아니라 역사가 정치를 낳습니다. 아직도 정치가는, 더구나 우리같이 남에게 한 걸음을 뒤진 나라의 정치가는, 그 허깨비에 잡혀 있습니다마는 세계의 씨에게는 벌써 해가 올라와 그 허깨비들이 달아 난지 오랩니다. 그렇기 때문에 눈이 있는 사람에게는 정치가는 모두 돈키호테같이 보입니다.
그런데 그 돈키호테에게 붙잡혀 나갈 길을 못 나가고 있으니 우리야말로 돈키호테 이상의 웃음거리입니다.
이 웃지 못할 일의 까닭은 이것입니다. 세계의 악의 세력은 세계적으로 협력을 잘하는데 선의 세력은 협력을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악은 제가 악인 줄을 알기 때문에 제 목숨을 위해 최후까지 발악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손을 잡습니다. 선은 스스로 선인 것을 믿습니다. 믿는 나머지 구구한 꾀를 쓰려 하지 않는 것은 좋은데, 어쩌면 모래알같이 서로 따로 돌기가 쉽습니다. 이것이 아직 완전히 깨지 못한 증거입니다. 선은 혼자서 못합니다. 지금 같이 세계가 하나된 오늘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질적으로 달라져서 전체에서 떠난 개인이란 이미 없다는 것을 아직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잘못에 빠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근시가 되고 조급한 생각을 가지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는 동시에 또 하나 반드시 할 일은 세계의 씨알이 어서 손을 잡는 일입니다. 이제 세계적 혁명만이 혁명입니다. 선이야말로 세계적으로 협력하고 과학적으로 조직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자금 세계의 지배권을 쥐고 온갖 수단 방법을 다해서 자기네의 자리를 지키려는 낡은 정치와 싸우려면 많은 희생자를 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희생은 세계를 이 정치에 하는 대로 맡겨두어서 고등기술로 하는 전쟁을 마음대로 할 때에 있을 그것에 비하면 비례가 못되리만큼 적은 것입니다. 10억 년 동안 느리고 느린 길을 걸어 이루 헬 수 없는 희생을 값으로 내며 겨우 해서 오늘날 이 정신이요 도덕이요 하는 데까지 간신히 추어 올라온 이 생명이 달팽이를 생각 옅은 싸움꾼들의 장난으로 인해 하루아침에 멸망에 빠지도록 차마 그냥 보고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하면 그만 희생을 못 감당할 것도 아닙니다. 이제 생명은 귀하다는 것, 정신은 절대 죽지 않는다는 것, 정의의 법칙은 영원히 살아 있다는 것을 몸으로 증거할 때가 왔습니다.
나는 이때야말로 정말 우리가 우리의 가지는 민족적 개성을 살려서 세계 역사에 이바지할 수 있는 때라고 합니다. 속알 없는 죽은 잎새나 마른 가지에게는 서풍이 무서운 죽음의 음성이겠지만, 억만 년 진화의 총결산과 미래 영원한 발전의 설계를 한데 합한 신비의 말씀인 알갱이를 속에 품고 있는 산 씨알에게 그것이 신나는 복음입니다 그렇기에,
겨울이 만일 온다면이야
봄이 어찌 멀었겠냐!
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아직 우리게 긴 긴 엄동설한인지 모릅니다. 이제 그 사나움이 절정에 오른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한몫 할 날이 가까웠을 것입니다. 멀지 않아서 3천년 전에 이사야 가 외쳤던 “그날, 창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검으로 낫을 만드는 날이” 올지 모릅니다. 평화의 새 역사입니다. 나는 우리가 지루한 고난의 역사에서 닦아낸 우리의 특성은 여기 있다고 봅니다. 교만으로가 아니라 겸손으로, 강함으로가 아니라 사랑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알갱이요, 또 인류의 알갱이, 따지고 보면 우주진화의 알갱이입니다.
이것을 부끄럽게 알아서는 아니됩니다.
이것을 살려 써서 생명의 역사를 건져야 합니다.
서풍이 붑니다. 가슴을 헤쳐 마음껏 들이마십시다.
씨알의소리 1973년 11월 28호
저작집30; 7- 119
전집20; 5-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