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 창녕인물비사⑬>
창녕현감 민병길과 성재의 노인 의로운 투쟁
민병길 창녕현감은 고종 을사(광무 6년;1906)에 도임하여 순종 정미(1년:1907)에 영광군수로 이임하였는데 그의 선정비가 창녕현에서 진주로 가는 대로변 남지읍 수개리에 세워져 있는데 그 시절 송사에 관한 이야기가 흥미롭다.
민 현감이 부임하기 전 일이었다. 계성에 사는 정씨 문중이 수개 바로 안산인 갈마지 만댕이에다 묘를 쓰자 이를 반대하는 동민들이 달려가 싸움을 벌이고 매장을 못 하게 하여 싸움이 벌어져 양측에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 큰 불상사가 벌어졌다. 이에 그치지 않고 수개 동민이 돈을 모아 묘를 철거하고 사상자를 낸 상대를 처벌하라고 정씨 문중을 고발하였다. 송사가 벌어지자 정씨 문중은 진주관찰사의 수청기생을 통하여 힘을 써 묘를 쓰게 하고 처벌은 유야무야 되어 버렸다.
이에 동민들은 식량뿐만 아니라 나중에 놋그릇까지 거두어 비용으로 쓰며 송사를 계속해 이기려 하니 동리 인심이 말이 아니었다.
민 현감이 부임한 후 이 사실을 알게 되자 양측을 불러 설득하여 묘는 이장해 가기로 약조하고 사상자에 대한 처벌은 면하여 서로 소를 취소하게 해 주민들의 파산을 막게 하였다 한다. 그래서 그 공덕을 기려 수개 동민이 정성을 모아 비를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도 그 묘는 이장하지 않고 갈마지 정상에 서 있다고 한다.
민병길은 왕실 외척으로 창녕고을 수령으로 온 사람이었다. 순종실록부록13권, 순종15년 1922년 5월 기록에 보면,
“특별히 전 군수 민병길에게 일금 200원을 하사하였다. 그의 아들이 혼인하기 때문이다.”
라는 기사를 보면 알 수 있다.
그 당시 벼슬을 돈을 주고 얻으면 고을에 나가 본전을 뽑기 위해 가렴주구加斂誅求하기를 당연하게 여겼으니 민병길의 기세도 역시 그랬던 모양이다.
슬산생瑟山生의 글 [성수전成叟傳 기사己巳](노인 성재의成載儀전 기사년(1929)에 세금을 과도하게 징수한 민병길 현감에게 항의하다 투옥당하고 끝내 상경하여 투쟁한 일이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어 그 원문(번역문; 장달수의 한국한 카페 참조)을 그대로 전재한다.
슬산생은 곧 고암면 원촌 출신 구한말 대학자 심재 조긍섭深齋 曺兢燮(1873~1933)으로 42세 때인 1914년 창녕에서 달성 가창면 정대리鼎垈里 비슬산 아래 은거하였기에 ‘비슬산 사람’이라 하니 곧 조긍섭 자신을 말한다.
성 노인은 본관이 창녕이고 이름이 재의載儀이다. 사람됨은 글을 깨치지 못하였으나 모습은 진실하고 가슴속은 기특한 기상이 있었다.
광무 말에 정치가 뇌물로 이루어져 수령은 돈으로 군郡을 얻어 군에 부임하면 백성들에게서 빼앗아 보상받아 그것을 통해 이득을 챙겼다. 창녕 수령 민병길은 젊은 나이에 왕실 외척이라는 권세에 의지하여 더욱 심하게 기세를 부렸다.
이보다 10년 전에 나라의 부세를 가볍게 하기 위해 신화新貨를 사용하였는데, 신화 2전이 구화舊貨 1전의 가치였다.(1905년부터 1909년까지 일제의 주도로 대한제국 내의 백동화와 엽전을 정리하고 상업은행인 일본 제일은행이 발행한 화폐로 대체한 것을 말한다.)
토지에 세금을 거둘 때, 백부百負가 1결結이 되는데 결당 80냥이었으니, 구화로는 40냥이었다. 당시 서울에서는 신화를 사용하였으나 하읍下邑에서는 여전히 구화를 사용하고 있었다. 병길은 세금을 구화로 거두면서 80냥을 채워 취하였다.
성 노인은 간사함이 있을 것이라고 의심하여 하루는 관사에 이르러 종일토록 면전에서 따져 물었는데, 수령은 화를 내어 곤장을 치고 그를 가두었다. 이윽고 칠원漆原으로 이옥移獄시키고 또 의령宜寧으로 옮겼다가 마침내 진주부晉州府에 이르렀다. 고초를 두루 겪었으나 항변하며 굽히지 않자, 진주부에서는 부득이 석방하고 세금을 60냥으로 줄여 주었다.
그러나 성 노인은 뜻에 흡족하지 않아 행장을 꾸려 서울로 가서 그 실상을 캐내었다. 또 호포戶布는 신화로 호구 당 30전인데 군에서 또한 구화로 거두었다.(면포나 저포紵布를 징수하던 세제) 이에 그 실상을 아울러 나열하여 법부法部에 소송하였으나 마침 나라에 일이 많아 오래도록 결과를 판결받지 못하였다.
성 노인은 가지고 간 양식이 이미 다하여 밤에는 빈집에 기숙하고 낮에는 조금의 쌀을 구하여 옹기에 스스로 밥을 지어 먹었다. 반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탁지부度支部(조선조 말엽 정부의 재무를 총할하는 관아)의 지령을 얻어 두 가지 세금에 신화로 백성에게 거둘 것을 허락받았다. 또 여러 군의 잔호殘戶에 감세해 줄 것을 청하여 대읍은 3천, 소읍은 2천으로 하도록 팔도에 반시頒示하였으니, 성 노인 덕분이었다.
슬산생瑟山生은 다음과 같이 논한다.
나는 성 노인과 같은 고을 사람이다. 바야흐로 성 노인이 시끄럽게 따지며 곤액이 더욱 심해질 때, 고을 사람 중에 어떤 이는 괴이하게 비웃기도 하고 어떤 이는 장려하여 힘쓰도록 하였으니, 나는 직접 그 일을 보았다.
그 뒤 20여 년에 성 노인이 두 번이나 나의 우사로 찾아와 나의 글에서 자신의 이름을 보게 해달라고 매우 부지런히 요구하기에, 내가 가엽게 여겨 그를 위하여 이와 같이 기록한다.
나는 일찍이 양씨 계초啓超의 〈세 선생의 전〔三先生傳〕〉을 읽고 기이하게 여겼다. 세 선생은 모두 글자를 모르는 사람인데, 능히 자신을 희생하여 남을 행복하게 한 사람들이다. 양씨가 그들을 선생이라 한 것은 세상에 책을 읽었으면서도 능히 남을 이롭게 하는 일을 하지 못한 사람들을 부끄러워하도록 한 것이었다. 만일 성 노인이 양씨를 만났더라면 아마 네 선생이 되었을 것이다.
성 노인은 올해 나이가 78세인데 기운은 오히려 씩씩하고, 매우 가난하여 항상 떨어진 옷에 닳은 신발을 신고 다닌다. 아, 온 나라 사람들이 그의 덕택을 가만히 받고 있으면서도 덕택으로 여기지 않으니, 이것은 또 어찌 된 것인가.
<창녕신문> 2025년 10월 15일 연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