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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읍에서 북쪽으로 15km 정도 떨어진 용문면 내지리.소백산자락 위치.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直指寺)의 말사.
(사가 서거정의 시)
용문사에 다시 오니 산 깊어 세속의 시끄러움 끊겼어라
절에는 승탑이 고요하고 묵은 벽엔 등불이 타오르네
외줄기 샘물소리 가녀리고 첩첩한 산봉우리 달빛을 나누고 있네
우두커니 앉아 깊이 돌이켜보니 내 여기 있음조차 잊게되누나
김룡사본말사지(金龍寺本末寺誌)』에 의하면 통일 신라 경문왕 10년(870) 두운대사가 창건한 천년고찰. 이 절에는 세 가지 전설이 있는데, 첫째 두운대사가 이 산의 동구에 이르니 바위 위에서 청룡 2마리가 나타나 인도하였다. 둘째 절을 짓기 시작하였을 때 나무둥치 사이에서 무게 16냥의 은병(銀甁)을 캐어 공사비에 충당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셋째는 절의 남쪽에 9층 청석탑(靑石塔)을 세우고 사리를 봉안할 때 4층탑 위로 오색구름이 탑 둘레를 돈 일이다. 하여 절의 이름도 용문사로 불렸다.
고려 태조 왕건은 후삼국 정벌 중에 이 절에 머문 적이 있었는데, 훗날 천하를 평정하면 이곳에 큰 절을 일으키겠다는 맹세를 하였다. 그뒤 936년(태조 19)에 칙명으로 이 절을 중건하였고, 매년 150석의 쌀을 하사하였다. 이후 이 절에는 두운의 법맥이 끊이지 않았는데, 그리고 983년(성종 2)에는 청석(靑石)으로 구층탑을 세웠다. 특히 영련은 이곳에서 30년 동안 수도하다가 조응(祖膺)에게 법(法)을 전하였고 조응은 제자 자엄(資嚴)과 함께 여러 법당과 승방 등을 건립하였다.
조응은 이 절이 퇴락해 감을 안타깝게 여기다가 1165년(의종 19) 제자 자엄(資嚴)과 함께 여러 법당과 승방 등을 건립하였다. 1166년에는 의종의 칙명으로 중수를 시작하였고, 1171년(명종 1) 태자의 태(胎)를 보관한 뒤 절이름을 창기사(昌期寺)로 바꾸고 축성수법회(祝聖壽法會)를 열었다.
1173년 나라에 내란이 일어나자 3만 승재(僧齋)를 열고 대법회를 개설하였다.
개태사(開泰寺)의 승통(僧統) 영치(穎緇)가 강을 맡았는데, 이 법회는 1180년에 시작하여 1182년까지 계속되었다. 유명사찰임에도 입구로 가는 길은 그리 넓지 않다.
고려 시대에 수백 명의 승려가 상주하였고 여러 차례 외침을 당할 때마다 ‘일만승제 삼만승제(一萬勝祭三萬勝祭)’를 올려 국난 극복을 위해 기도했으며, 규정원으로 승병을 훈련하던 곳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때엔 승군의 짚신을 짜서 보급하던 곳으로 호국불교의 장이기도 하다.
척불숭유의 정책을 폈던 조선 시대에도 용문사는 왕실로부터 대접을 받아 세조때는 왕이 잡역을 감해주라는 명을 내렸는데 그 교지가 보물 제729호로 지정되어 전해오고 있다. 성종9년 때에는 소헌왕비의 태를, 정조에는 문효세자의 태를 안장했을 정도로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1478년(성종 9) 소헌왕비(昭憲王妃)의 태실(胎室)을 봉안하고 다시 절이름을 성불산 용문사로 고쳤다. 1608년(광해군 41)에는 혜명(慧明)이 제하당(霽霞堂)을 중수했고, 1636년(인조 14)에 학문(學文)이 적묵당(寂墨堂)을, 그리고 1637년에는 두인(杜印)이 그 남쪽에 범종루를 지었다. 당시 그 밖에도 광명전(光明殿)이 세워졌다. 그뒤 1783년 문효세자(文孝世子)의 태실을 봉안하고 소백산 용문사로 이름을 고쳤다. 1835년(헌종 1) 불이 나서 모두 타 버린 것을 열파(悅坡)·상민(尙敏)·부열(富悅) 등 여러 승려들이 힘을 합쳐 1840년대에 공사를 끝마쳤다. 다시 소백산 용문사(龍門寺)로 고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운루, 사천왕상(四天王像) 예천 용문사 교지, 예천 용문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및 , 용문사 자운루가 있으며, 그밖에 현존하는 당우로 진영각(眞影閣), 명부전(冥府殿), 응진전(應眞殿), 회전문(廻轉門), 범종루, 강원, 천불전(千佛殿), 일주문, 요사채, 두운암(杜雲庵)과 1984년 화재로 모두 불탔다가 복원된 보광명전(普光明殿), 응향각(凝香閣), 단하각, 해운루 등이 있다.일주문(一柱門)은 규모가 크고 오래되었다.
대대적인 개축을 하는 바람에 주변의 나무들을 베어내고 마당을 넓게 닦아 아늑함과 포근함은 잃어버리게 되었다.
[주요문화재]
1) 대장전과 윤장대(국보 제328호)
2) 감역 교지(보물 729호)
3) 목조 아미타여래삼존좌상 및 목각탱(보물 989-1.2호)
4) 예천 용문사 팔상탱(보물 1330호)
5) 영산회쾌불탱(보물1445호)
6)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보물1637호)
7)용문사 천불도 (보물1644호)
8)용문사 천불탱(경북 유형문화재 349호)
9) 자운루(경북 유형문화재 제476호)
용문사 대장전(大藏殿-국보 328호)
보광명전 우측 위치, 대장전과 윤장대는 고려 명종 3년(1173년) 김보당의 난 극복을 위해 조응대선사(祖膺大禪師)가 발원하고 조성한 것으로, 고대 건축물로는 매우 드물게 발원자 와 건립시기, 건립목적이 분명하게(重修龍門寺記/1185년) 드러나 있다. 대장전과 윤장대는 초창 이래 여러 차례 수리된 것으로 확인되는데, 최근 동(오른쪽) 윤장대에서 확인된 천계오년(天啓午年, 1625) 묵서명과 건축의 양식으로 미뤄볼 때 17세기에 수리되어 현재까지 이어져 오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규모는 앞면 3칸· 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건물의 모서리 부분에는 용머리, 연꽃 봉오리와 같은 조각을 해 놓았고, 안쪽 부분에는 더욱 화려한 장식을 하여 당시의 정교한 조각과 장식 솜씨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삼존불 뒤의 나무로 조각한 벽체는 건물의 가치를 더욱 높이고 있으며, 불단 양쪽 옆으로 불경을 보관하는 회전식 윤장대(輪藏臺)를 만들어 놓았다.
용문사 윤장대(醴泉 龍門寺 輪藏臺)(輪藏臺-국보 328호)는 국내 유일 불경 보관대로 이 대를 돌리면 한가지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전해지는 세계적 문화유산이다. 용문사 대장전 안에 설치되어 있는 것으로, 내부에 불경을 넣고 손잡이를 돌리면서 극락정토를 기원하는 의례를 행할 때 쓰던 도구이다. 윤장대 역시 대장전과 함께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마루 밑에 회전축의 기초를 놓고 윤장대를 올려놓았으며, 지붕 끝을 건물 천장에 연결하였다. 불단(佛壇)을 중심으로 좌우에 1기씩 놓여있는데 화려한 팔각정자 형태이다. 아래부분은 팽이모양으로 뾰족하게 깎아 잘 돌아갈 수 있도록 하였고, 난간을 두른 받침을 올린 후 팔각의 집 모양을 얹었다. 팔각의 집 모양에는 모서리에 기둥을 세우고 각 면마다 1개씩 총 8개의 문을 달았다. 문은 좌우로 구분되어 4개의 문에는 꽃무늬 창살이 다른 4개의 문에는 빗살무늬 창살이 정교하게 꾸며져 있다. 문을 열면 8면에 서가처럼 단이 만들어져 경전을 꺼내볼 수 있도록 하였다.
보존이 잘 되어있고 팔각형 모양의 특이한 구조수법이 돋보이는 국내 유일의 자료로, 경전의 보관처인 동시에 신앙의 대상이 되는 귀한 불교 공예품이다.대장전을 창건할 당시 함께 제작된 것인지 조선 현종 11년(1670) 대장전을 새단장하면서 만들어진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대장전에 봉안된 예천 용문사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 목불좌상 및 목각탱(木佛坐像.木刻幀-보물 제989-1,2호)은 대추나무로 만든 후불탱으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되고 큰 작품이다.
조선후기의 목각탱으로는 예천 용문사 대장전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 외에도 상주 남장사 보광전 목각 아미타여래설법상(보물 제922호), 문경 대승사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1675년, 보물 제575호), 서울 경국사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17세기 말경, 보물 제748호), 상주 남장사 관음선원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1694년, 보물 제923호), 남원 실상사 약수암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1782년, 보물 제421호) 등이 있다.
일주문
부도전
비석군 비석들 중앙에 위치한 비석은 조금 색다른 모양의 비석 문화재(중수용문사기비)가 아니다. 중수용문사기비는 성보박물관에 보관
회전문(사천왕문) 비석군을 지나 조금만 오르면 좌측에 육척정도의 자연석계단이 보이고 그 위로 세워진 건물이 회전문이다. 일반적인 사찰의 사천왕문에 속하며, 배흘림이 없는 형식으로 보아 근대의 건축물인듯 하다. 사천왕상과 대들보에 있는 두마리의 용두가 특이
해운루 회전문을 통과하면 이번엔 다듬석의 계단윗쪽에 '소백산 용문사'란 현판의 해운루가 보인다. 통로에서 올려다 본 보광명전은 상당히 높은 위치에 있다. 용문사의 사람 배치는 고저의 지대에 따라 횡으로 배치돠어 있다. 오래된 유명사찰임을 알 수 있다.
보광명전 주 법당으로 1984년에 일어난 화재 이후, 새롭게 건립. 내부에는 커다란 청동으로 주조된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좌측에 아미타불, 그리고 우측에는 약사여래불이 모셔졌는데, 세 불상 모두 크기가 달랐다. 1984년에 용문사에서 일어난 화재는 많은 전각들을 전소시켰는데, 본전인 보광명전 역시 화마를 피할 수 없었다고 한다. 당시 화재가 났을 때, 이곳에서 공부하던 고시생 한 사람이 불타고 있는 보광명전 안으로 들어가, 불상 중 아미타불을 안고 빠져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 모셔진 아미타불은 화재가 일어나기 이전부터 내려져오던 불상이라고 한다.
이 여래상의 몸 안에서는 원문과 시주자 목록 두 장이 발견되었는데, 1515년 4월 9일에 고쳐 만들었다는 개조(改造)라는 개조기록을 비롯하여 이를 만든 화원과 목수 철장의 이름 그리고 수백 명에 이르는 시주자의 이름들이 기재되어 있다. 상화원(上畵員) 이영문(李永文)의 주도하에 만들어졌음을 밝혀 승려가 아닌 일반 장인에 의해 주도된 16세기 전반의 중요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이 불상은 이중의 대의를 걸친 불상으로 가슴과 옷주름, 무릎과 발 등의 표현이 자연스러우면서도 신체의 볼록한 양감이 강조된 모습이 특징이다. 특히 눈 꼬리가 길고 앞으로 튀어 나온 양감 있는 얼굴 모습과 자연스러운 옷 주름 등은 조선전기인 15세기의 전통이 남아있어 16세기에 이르러 평면적인 경향으로 변하는 과도기적 요소를 보이는 작품이다. 이 불상은 16세기 전반의 작품으로 명문불상이 극히 적게 남아 있는 조선전기의 조각 상황, 우수한 조형성 등에서 가치가 높은 작품이다.
목조아마타여래삼존좌상(보물 제989-1호)
예천 용문사 목조아마타여래삼존좌상(醴泉 龍門寺 木造阿彌陀如來三尊坐像, 보물 제989-1호)
삼존목불좌상이 놓여 있는데 이는 그 기법상 목불탱의 불보살과 똑같은 수법으로 만들어진 원각상(圓刻像)이라 하겠다. 본존상의 경우 육계가 생략되었고, 반달형의 중앙계주가 표현되었으며, 신체는 중후한 모습이지만 각 부분은 둥글게 처리되었다. 또한 통견의 불의는 그 두께가 두꺼워 신체 윤곽이 선명히 드러나지 않고 있으며 옷 주름 또한 지극히 단순화되어 도식적인 느낌을 준다. 따라서 이 본존상이 목각탱과 동일한 작가에 의해 동시에 조성된 작품임이 확실하지만 목각탱에 비해 신체의 굴곡이 보다 유기적이고, 표현력도 뛰어나다.
이 작품들의 조성기(造成記)가 하단에 「康熙二十三年甲子季」라고 묵서(墨書) 되어 있어 숙종(肅宗) 10년(1684)에 조성된 것이 분명하며 따라서 이들 조각은 17세기 후기의 조각양식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므로 그 역사적 의의는 매우 높은 것이다.
예천 용문사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醴泉 龍門寺 木刻阿彌陀如來說法像, 보물 제989-2호)
숙종 10년(1684)에 만들어진 것으로 지금까지 알려진 목각후불탱 중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이다. 기본 구조는 상하가 긴 사각형이지만 좌우로 구름무늬 광선을 표현한 둥근 모양의 조각을 덧붙여 장엄하게 장식하고 있다.
중앙에 모셔진 얼굴은 앞으로 약간 숙여 사바세계를 굽어살피듯 평담하게 묘사되었다. 두 손은 모두 무릎 위에 올렸는데 왼손은 손가락을 위로, 오른손은 아래로 하고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어 아미타불의 손 모양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입은 옷은 두꺼운 편이며, 간략한 몇 개의 선으로 신체와 옷을 구분하여 주름이 없다면 신체의 근육으로 여길 정도다.
본존불 이외의 상(像)들은 상·중·하 3행으로 배치시키고 있다. 아랫줄에는 사천왕상이 본존의 대좌(臺座) 좌우로 2구씩 일렬로 서 있다. 가운뎃줄과 윗줄에는 각기 좌우 2보살씩 8대 보살이 배치되고, 윗줄의 보살 좌우에는 다시 무릎을 꿇고 손을 모은 모습의 2대 제자를 배치하여 구도의 미를 살리고 있다. 보살은 본존불과 동일한 기법을 보여주며, 불과 보살상 사이의 공간에는 구름, 광선 등을 배치했다. 목각탱의 앞면에는 삼존목불좌상이 놓여 있는데 본존상의 경우 머리에는 반달 모양이 표현되었고, 신체는 둥글며 옷은 두꺼워 신체 윤곽이 드러나지 않는다. 목각탱과 같은 기법으로 동일한 작가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임에는 확실하지만, 목각탱의 상에 비해 가슴 표현이 유기적이며 조각 기법에서 조각가의 정성을 엿볼 수 있다.
하단에 표현된 조성기(造成記)에 의하여 숙종 대의 작품이 분명하며, 17세기 후반 조각 양식을 알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므로 역사적 의의가 매우 높다. 천정의 모양도 특이하게 만들어져 있으며, 보물이 많은 건물
무엇보다 대장전은 윤장대를 보관하고 있는 국내 유일의 경장건축이라는 데서 독특한 가치가 있다.
윤장대는 고려 초 중국 송대(宋代)의 전륜장 형식을 받아들여 제작한 것으로 , 영동 영국사와 금강산 장안사 등에도 윤장대 설치 흔적과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현재는 예천 용문사 윤장대만이 유일하게 같은 자리에서 846년 동안 그 형태와 기능을 이어오며 불교 경장신앙을 대변하고 있다.
진영당 용문사에 계셨던 스님들의 진영을 보관하는 장소다. 이전까지는 이곳에서 스님들의 진영을 보관했지만, 성보박물관의 개관 이후로, 진영들을 박물관 보관실에서 보관함에 따라, 종무소, 요사채 , 템플관 등등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명부전'은 다른 전각들과는 다르게 남서향으로 지어져 있다. 내부에는 지장보살을 필두로 시왕들을 모시고 있다. 사찰에 따라 지장전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내부에는 사후 세계를 주관하는 지장보살과 시왕들을 모시고 있다. 「 속용문사적기續龍門事蹟記」에 의하면 1649년에 보광전의 동쪽에 지장전을 짓고, 1682년에 다시 시왕전을 지었다고 하는데 지금의 명부전은 당시 시왕전 전각으로 추정하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명부전은 용문사 화재에 피해를 입지 않았다. 오래된 전각 중 하나지만 육안으로 봐서는 새 건물처럼 보이는데, 문화재청에서 해체하여 복원 공사를 진행했다고 한다.
응진전 지장전 위쪽에는 '응진전'이 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는데, 이곳은 부처님과 16제자들을 함께 모신 전각이다. 사찰에 따라 나한전으로 불리기도 한다. 전각은 17세기 중엽에 만들어졌으며, 세대를 거쳐 자하루와 명부전 전각과 함께 보수됐다고 전한다. 마찬가지로 동쪽 편에 위치하고 있어서 용문사 화재로부터 피해를 입지 않았던 전각이다.
명부전과 응진전 사이의 길로 올라가면 담장과 함께 '동향각'이라는 한옥 전각을 볼 수 있는데, 스님들의 거처로 전망이 좋은 곳에 위치
천불전 천개의 부처상이 모셔진곳으로 관음전과 용왕각 사이의 계단언덕위에 자리하고 있다.
영남 제일 강원 보광명전 구역에서 동쪽에 위치하여 서향으로 바라보고 있는 큰 건물은 '영남 제일 강원'이다. 강원은 스님들의 경학 공부를 진행하는 강학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범종각 자운루와 해운루 사이에는 종과, 운판, 목어가 있는 '범종각'이 있다. 이 범종각은 신축한 건물로 보인다.
범종각 옆쪽 조금 아랫단에 대장전을 마주하고 있는 '자운루' 라는 누각이 있다. 누각의 1층은 지형에 따라 모든기둥의 높이가 다른것이 특징이다.
응향각과 마주보며 올려다보고 있는 전각은 '보경당'으로, 이곳은 사찰의 행정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요사채다. 템플 관련 상담 등도 이곳에서 이뤄진다. 종무 행정을 보는 요사채다.
성보박물관을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부도전과 비석전에 보이지 않던 중수비가 있다. 비석에는 '중수용문사기'라고 되어 있으나, 정식 명칭은 '예천 용문사 중수용문사기비'이다. 이 비는 고려 명종 14년(1184)에 이지명(1127∼1191)이 왕의 명을 받들어 기문을 짓고, 이듬해 성인선사 연의가 비문을 쓰고 입선 해석이 각자한 높이 195㎝, 너비 93㎝, 두께 10㎝ 크기의 중수용문사기비이다.
그 외에 부처님의 얼굴만 그려져 있는 '천불도', '영산회괘불탱', 석가의 일생을 묘사한 '팔상탱', 염라대왕이 심판할 때 사용하는 거울 '업경대', '전패'등 여러 보물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