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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02 / 나에게 족한 하나님의 은혜 (고후12:6-10)
여러분도 그러시겠지만,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좋아하는 성경 구절이 하나씩은 다 있을 겁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니라.”는 말씀도 그런 말씀 중의 하나입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다 귀하고 소중하지만, 어찌 보면 이 말씀이야말로 하나님의 의지하고 살아가는 신앙인이라면 평소에 늘 기억하고 확신해야 할 말씀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하나님으로부터 기도 응답으로 받은 말씀입니다.
바울이 누굽니까? 초대교회 당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독보적인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도 육체적인 고통과 연약함이 있더라는 겁니다.
일설에 의하면 눈병으로 고생했다고도 하고 또는 심한 간질병을 앓고 있었다고도 합니다만, 그게 뭐든 한번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에게와 각자가 저마다의 신이라는 것을 만들어 놓고 믿노라는 사람들에게 예수 믿으라고 전하는 중에나 아님, 예수 믿고 구원받으라고 전도하는 중에 정작 본인은 눈병으로 눈이 빨개서 전도한다면? 혹은 한창 전도하는 중에 갑자기 땅을 구르며 거품을 물고 발작을 일으키기라도 하면 사람들이 예수를 믿기는커녕 ‘너나 잘 믿으세요.’라고 비아냥거릴 것입니다.
이러니 참 고민입니다. 해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병을 고쳐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응답이라는 것이 병을 고쳐 주시기는커녕 고난을 가진 현재의 상태가 충분히 은혜이며 그런 상태나 형편이 족한 줄로 알라고 하고 계십니다.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고난이면 분명 괴롬이고 아픔인데 그게 하나님이 주신 받은 은혜라니요?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가난이나 실패, 괴롬이나 질병, 원수의 괴롭힘 등이 은혜스럽던가요?
한때 자칭 똑똑하다 자처하는 사람 있었습니다. 부득이 실명을 거론하겠습니다만, 김용옥 씨라고. 그분의 전공이 철학이라는 데 강의를 들어보면 나름 아는 건 참 많다라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런 그가 싯다르타와 불교라는 강연에서 말하기를 싯다르타는 출생과 성장 과정과 출가, 고행, 득도 등의 과정이 소상하게 역사로 남아 있기에 믿을만하며 실존을 확신할 수 있고 그가 부처가 되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합니다.
여기까지만이라면 그의 생각이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은데 굳이 그는 예수님을 거론합니다. 예수는 출생도 비상식적이고 성장 과정도 전혀 기록이 없는 데다 행적이라든가 죽음, 부활 따위가 전혀 비현실적이기에 믿을 수가 없으며 예수가 실존 인물이라고 하기엔 오히려 신화일 뿐이라고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과연 본인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세상 사람들이 믿어야 할 보편적인 진리일까요?
제가 볼 때는 학문적으로 상당히 교만한 소치라고 생각합니다.
같은 이치로 놓고 보면 만약 누군가가 김용옥 씨에 대해 그가 누구인지 모르겠다고 해서 그가 세상에 없는 걸까요? 또 누군가가 김용옥 씨의 주장이나 신념이 허황되고 믿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이 실존 인물이 아닌 게 될까요?
나름으로 공부는 많이 했지만, 세상 이치를 머리로만 이해하려고 하다 보니 그런 행동을 하게 되는 겁니다. 결국 우물 안 개구리처럼 자기가 아는 게 세상 진리의 전부인 줄 알뿐이지요.
듣기론 신학대학에서도 공부하셨다고 하던데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신학은 말 그대로 인간이 신에 대해 알기 위해 신과 관련된 주제들을 연구하는 학문일 뿐 신학이 신앙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신학이 전혀 무용지물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신학은 당연히 신앙에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학이 진정한 믿음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우리의 머리에만 있어서는 안 되며, 그것이 감정 차원에만 머물러서도 안 됩니다.
분명히 아셔야 할 것이 세상에서 소위 종교라 불리는 것들과 심지어 이단 사이비에도 각기 신학이란 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신학이나 신념이란 게 사람의 이성을 지배하게 되면 그건 신앙이 아니라 세뇌가 되는 것이고, 그게 사람의 감정과 행동까지를 통제하게 되면 심적 지배 즉 소위 말하는 가스라이팅이 되고 말 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세뇌로 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순종이 가스라이팅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믿음이나 순종은 타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각자의 선택이며 각자가 결단해야 합니다.
자!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신학이나 신념이 신앙이 되게 할 수 있을까요?
신앙은 영의 분야에 속한 것입니다. 성경의 요한복음 4:24절을 보면 “하나님은 영이시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영이시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려면 우리의 영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고자 하면 성경 말씀이나 하나님을 아는 신학이 우리의 영에 자리 잡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고민이 또 생깁니다. 과연 우리가 어떻게 해야 믿음이 머리나 감정으로만이 아니라 영으로 믿을 수 있게 될까요?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을 이성과 감정의 자리에서 영의 자리로 옮겨가게 하는 것. 그게 바로 소위 말하는 ‘고난’인 것입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고난의 의미를 확실히 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고난은 우리의 믿음을 믿음 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훈련 과정입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누구든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 누구라도 내 인생에서만큼은 없었으면 하는 게 고난입니다. 그렇더라도 우리가 빛의 소중함을 아는 이유 중의 하나가 어둠이 있음을 알기 때문이듯이 우리에게 믿음이 있어야 할 필요를 가지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있는 고난인 것입니다.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면 우린 인생의 고난을 고난으로만 여겨 그 고난에 발목 잡혀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게 바로 사탄의 노림수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야 할 믿음은 인생에 닥쳐온 고난에 대해 ‘고난 자체’가 아니라 그 ‘고난의 역할’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본문을 보세요. 7절에서 사도 바울은 육체의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마치 하나님이 주셨다는 듯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도 바울에게 하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9절을 보면 하나님은 바울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 하십니다.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이 바울에게 고난이 있게 하셨다는 말은 없습니다. 바울만 그렇게 느꼈을 뿐입니다.
또 7절에서 사도 바울은 자기에게 육체의 가시가 있는 이유로 “하나님이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바울만 그렇게 생각할 뿐이지 성경 어디에도 그런 언급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런 사도 바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9절을 보시면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
어떤가요? 두 구절을 비교해 보면 바울은 기도하는 내내 온통 고난 얘기만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은 고난의 고 자도 언급함이 없이 오직 은혜만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한 바울은 자기에게 고난이 있는 이유를 자기 생각이 사실인 양 단정 짓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은 바울에게 고난이 있는 이유가 바울에게 겸손을 가르치시려는 게 아니라 고난당하는 바울에게 고난이 있는 만큼 더 큰 능력이 있게 하실 것이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날 우리 역시도 고난 중일지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능력을 받아야 할 것이기에 이제부턴 고난 때문에 믿음을 붙잡고, 고난 중에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해, 고난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풍족하게 받으며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게 우리에게 있는 ‘고난의 역할’입니다.
우리가 사는 중에 인생의 가시와 고난은 분명 사탄이 주는 것이지만 백번을 양보해서 그 사탄을 허락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고 할지라도 우린 하나님을 향해 ‘왜 내게 이런 고난이 있게 하셨느냐?’고 원망하는 대신에 나를 위해 하나님은 이번 고난이 내게 어떤 역할을 하게 하실지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출애굽기 6장을 보면 애굽의 종으로 고난당하는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며 그들의 노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여러 큰 심판들로써 너희를 속량하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고난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그리하셨다면 하나님은 고난 중에 있는 나를 위해서도 그리하실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미 구원의 손길을 저와 여러분을 향해 펼치셨습니다. 예수님의 못 자국난 손, 피 묻은 손은 이미 고난 중에 있는 나를 향해 길게 뻗고 계십니다.
지금 혹 여러분에게 고난이 있다고 하면 그 고난이 비록 깊고 길다 할지라도 조급해하지 마세요. 나를 향해서는 하나님의 팔이 짧은가 하는 생각도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이 마술이 아닌 이상 뭐든 ‘뿅’하고 되는 일은 없습니다. 당장에 고난 때문에 당하는 괴롬과 속상함이야 있겠지만 고난의 역할은 우리로 하나님을 찾게 만드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장기전으로 만드는 건 전적으로 내 탓입니다. 고난의 역할이 나로 하나님을 찾게 만드는 것에 있다고 한다면 고난 중에라도 내가 하나님을 빨리 찾으면 찾을수록,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빨리 믿으면 믿을수록,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빨리하면 할수록 우린 더 빨리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다고, 또한 찬송가 70장의 가사에서는 피난처 있으니 환난을 당한 자 이리 오라고 합니다.
전능하시다 함은 ‘못 하시는 게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린 왜 하나님이 내 문제나 고난을 해결하실지 어떨지를 고민하려 하나요?
피난처 되신다 함은 ‘살려 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린 왜 하나님이 내 인생과 삶을 살리실지 어떨지를 의심하려 하나요?
오늘 전능하시고 환난 날에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이 사도 바울을 통해 저와 여러분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니라.”고.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우린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하나님께 말씀드릴 때 하나님도 우리가 말한 대로 되게 해 주십니다. 그래야 우리도 “내가 약한 그때에 하나님의 은혜가 족했다”고 간증하며 감사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이제까지 나에게 닥친 고난들의 역할이 내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기도하게 하려는 것에 있음을 믿으신다면 이제 고난 중에 우리가 할 일도 자명해집니다.
우선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전화벨이 왜 울릴까요?
질문이 너무 생뚱맞은가요? 그렇더라도 전화벨은 왜 울리는 걸까요?
누군가가 나에게 전화를 걸었기 때문입니다.
너무도 당연한 얘기지요? 그런데 이걸 믿음에 적용해 보자면, 우리의 ‘기도가 전화기’입니다. 그리고 ‘고난은 울리는 전화벨 소리’와도 같다 보시면 됩니다.
그럼, 다시 질문을 드립니다. 우리 인생에서 고난의 전화벨 소리는 왜 울릴까요?
하나님이 나와 통화하시려고 내게 전화를 거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는 중에 고난의 전화벨 소리가 울린다면 그땐 얼른 기도의 수화기를 들고 하나님과 통화하셔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할 수만 있으면 고난은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살게 하시고 하나님의 능력이 내 인생을 승리하게 하실 것입니다.
다시 7절과 9절을 보면, 바울은 고난을 토로하지만, 하나님은 고난은 철저히 무시한 채 오로지 은혜만 말씀하십니다.
이렇듯 하나님이 무시해버리는 고난인데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왜 고난을 끌어안고 쩔쩔매야겠습니까?
요한복음 16:33절에서 예수님은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이제 결단하세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나 때문에 예수님까지 세상에서 패배자로 만들지 마시고, 그리스도인답게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셨으니 나도 고난을 이길 줄로 믿어 예수님과 함께 승리자의 인생을 살기를 택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가끔 보면 소심한 아이가 낯설거나 무서운 사람을 만나면 본능적으로 엄마 뒤로 숨습니다. 그럼으로써 이제 세상을 향해 아이 앞엔 엄마가 전면에 서게 됐습니다. 아이에겐 엄마가 ‘안전의 경계선’인 셈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있어서도 안전의 경계선은 예수님이십니다. 세상에서 고난을 당한다면 우린 예수님 뒤로 숨고 나를 대신해서 예수님이 세상과 고난의 전면에 나서시게 해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의 처지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그만하면 족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뭔가 부족하여 불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은혜가 족하다.’와 ‘부족하여 불만이다.’ 사이에서 드러나는 차이는 '믿음 여부'입니다.
누가 됐던 누구에게나 고난은 있습니다. 따라서 사는 중에 고난이 있고 없고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는 중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고 없고는 언제나 문제가 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에겐 매사에 은혜가 족할 것이고 믿음이 없다면 뭔가가 늘 부족하고 불만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난이 결코 유쾌한 것이 아니기에 세상 사람들은 고난이 없기만을 바라지만 그러하기는 하나님을 믿는 우리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더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상은 인생에 때론 고난도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아파봐야 건강 소중한 줄 알고 배고파 봐야 한 끼 식사가 감사한 줄 아는 법입니다. 그렇듯이 그리스도인도 고난이 있어 봐야 믿음도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고난 속에는 나를 위해 하나님이 부여해 놓으신 고난의 역할이 있음을 아셨고 믿으신다면 이제부터는 고난이 있을 때면 내게 능력 주실 하나님을 믿고 내게 은혜 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내게도 족한 은혜와 다시 살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라도 고난이 있게 되면 예전처럼 고난에 지지 말고 고난을 이용하여 여러분의 믿음을 하나님께 증명하려고 하세요. 믿음대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도 인생을 다시 기쁘게 살아가게 해 주실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결론을 맺겠습니다. 내게 있는 고난과 아픔과 괴롬과 약점까지도 알고 보면 내가 서둘러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기도함으로써 나로 하여금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펼치시는 ‘하나님의 신앙 대작전’ 중의 하나인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작전’이라고 하니까 좀 불경스럽다 싶으시지요? 표현이 거슬리시면 작전이란 말 대신 ‘역사’나 ‘섭리’ 또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로 바꾸셔도 됩니다. 단지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평소 우리가 말하는 식의 표현 즉 ‘작전대로 되고 있다.’라는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그런 단어를 쓴 것뿐입니다.
예를 들어 십자가를 보세요. 정녕 예수님께서 사탄에게 져서 사망 권세 앞에 무릎을 꿇고 돌아가신 것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는 패배가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한 ‘예수님의 작전’이십니다. 작전대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작전대로 부활하셨습니다. 따라서 누구라도 예수님을 믿는 한은 때론 ‘지는 것 같은 인생’을 살아야 할 때가 있지만, 그렇더라도 그게 실패는 아닙니다. 당장엔 지는 것 같아도 ‘하나님의 신앙 대작전’ 상 결국엔 이기게 될 것인데 우리에게서 이걸 가능하게 하는 것이 고난을 통해 얻게 되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모쪼록 여러분 모두가 이 믿음으로 닥쳐온 고난을 이기고, 이 믿음으로 인생에서 승리하고, 이 믿음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아, 명실공히 믿음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나에게 족하였다.’고 고백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첫댓글 사는 중에 고난의 전화벨이 울릴때
그때는 얼른 기도의 수화기로 하나님과
통화해야 한다는 말씀 참 감동입니다
이 적절한 시기에 비까지 내려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